1996년 가요계

 

'''1995년 가요계'''

'''1996년 가요계'''

'''1997년 가요계'''


1. 개요


대한민국 가요계에 불어닥친 가수들의 컴백 경쟁이 일어난 해. 일명 '''별들의 전쟁'''으로 불리는 연도로 이 문서에서 다룰 가수는 솔리드, R.ef, 김건모, 신승훈, 전람회, 윤종신, 클론이다.
당시 연예계 쪽에서는 대형 가수들인 솔리드, R.ef, 김건모, 신승훈이 동시기에 컴백하는 빅4의 싸움으로 거론되던 시기였다. 전람회나 윤종신은 빅4에 비해 대중성이 떨어졌고 클론은 이제 막 데뷔하는 그룹이었으니.
1996년 4월(봄)은 작년 겨울에 활동하던 가수들이 활동을 끝내고 당시 한국 가요계를 좌지우지하던 슈퍼스타들의 컴백이 줄줄이 이어지던 가요계가 흐름이 바뀔 시기였다.
그 이전의 상황을 요약하자면 95년 가요계의 연장선상이다. 룰라가 표절로 활동을 거의 못해서 댄스계는 DJ DOC가 점령했으며 김정민은 그 해 겨울에 많은 1위를 수상했다. 그리고 5월까지 역주행과 서서히 인기를 끄는 곡이 많았으며 거물급 가수들이 컴백하기 전까지 1995년 가요계가 이듬해 5월까지 이어진 것.
1996년 1월에 서태지와 아이들의 돌연 은퇴선언으로 트리거가 당겨진 것도 컸다. 한편으로 당시 조선일보 같은 메이저 신문 연예면에서 방송사 PD 입을 빌려 '서태지와 아이들은 냉정하게 말해 은퇴를 해서 후배 가수들에게 길을 열어줘라' 같은 칼럼으로 공격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신인팀이었던 클론을 제외하면 나머지 팀의 경우 각자의 커리어에 굉장히 중요한 시기였으며, 이 시기를 기점으로 인기가 꺾인 팀들도 있다.
앞서 말한 뮤지션들의 앨범 발매 순서는 솔리드 3집(4월 초), R.ef 2집(4월 중순), 신승훈 5집(5월 초), 김건모 4집(5월 중순)이 되겠다. 윤종신의 5집과 전람회의 2집은 4월에 발매되었고, 그 해 여름을 씹어먹은 클론의 데뷔앨범은 5월에 발매되었다.
이 문서를 읽기 전에 가요톱텐의 순위 제도에 대해 알면 보기 쉽고 이해가 잘 될 것이며 그 중에서도 골든컵 제도가 이 문서의 양념 요소다. 쉽게 말해 5주 연속 1위를 하면 명예졸업하는 제도다.

2. 활동 준비


당시 4~5월에 컴백 혹은 데뷔했던 가수들의 이해 관계는 다음과 같으며 컴백 시기 순으로 정리했다.

2.1. 솔리드


김조한, 이준, 정재윤재미교포 3명으로 이루어진 솔리드는 1993년에 데뷔했지만 큰 인기를 못 얻다가 1995년 봄에 그들 최고의 히트곡 '이 밤의 끝을 잡고'가 터지면서 스타가 되었다. '이 밤의 끝을 잡고'는 후속곡 '나만의 친구'가 순위 차트에 진입했다 빠질 때까지 머물렀을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 성공적인 한 해를 보낸 이들은 1996년 봄을 3집 <Light, camera, action>의 발매 시기로 잡았다.

2.2. R.ef


이성욱, 성대현, 박철우로 이뤄진 R.ef는 1995년에 데뷔했으며 그들의 1집에 담긴 '고요 속의 외침', '이별공식', '상심' 세 곡이 모두 1위를 차지하는 등 스타가 되었고 특히 준수한 외모와 화려한 춤 덕에 소녀팬들의 지지가 아주 높았다. 다만 활동곡인 '고요 속의 외침'과 '상심'이 표절 시비에 휘말리는 등 우여곡절이 있었다.
인기 고공행진을 하던 이들은 연말 지상파 방송 3사 가요 시상식을 끝으로 휴지기에 들어갔고, 1996년 봄[1]을 2집 <Back to the black>의 발매시기로 잡았다.

2.3. 신승훈


이미 대중음악계의 슈퍼스타였던 신승훈은 1994년 가을 발매된 4집 <그 후로 오랫동안>을 끝으로 긴 휴지기에 들어갔다. 그는 다음 앨범을 1~4집 성공에 큰 역할을 한 소속사 라인음향의 김창환, 천성일 등의 도움을 최소화해서 발매하겠다는 방침을 세운 다음 그가 전곡 작사, 작곡, 편곡 및 프로듀싱까지 해 낸 5집 <Shin seung hun Ⅴ>를 1996년 봄에 발매했다.

2.4. 김건모


신승훈과 더불어 이미 대중음악계의 스타였던 김건모는 1993년부터 1995년까지 첫인상, 핑계, 잘못된 만남으로 3연속 홈런을 날린 뒤 최다 판매로 기네스북 기록까지 갖게 된 3집 이후, 소속사 라인음향을 나오면서 프로듀서 김창환과 결별한 뒤 솔리드, 김현철이 소속된 서인기획으로 소속사를 갈아탔다.
또한 당시 여러 히트곡을 발매한 최준영과 함께 4집 <Exchange kg. m 4> 작업에 들어갔으며 컴백 시기를 1996년 봄으로 잡았다.

2.5. 클론


고등학교 동창인 구준엽, 강원래로 이루어진 클론은 1996년 당시 라인음향 소속 가수들의 작업을 도와주고 있었다. 미술을 전공한 구준엽은 앨범 디자인에 일가견이 있었으며, 강원래는 박미경을 비롯해 다른 라인음향 소속 가수들의 안무를 짜는 사람이었다.
현진영과 와와로 데뷔한 이 2명은 김건모가 라인음향을 나가면서 빡친 김창환의 주도로 '타도 김건모'를 기치로 데뷔앨범을 준비하게 되었으며, 첫 앨범 발매시기 역시 김건모의 5집과 동일한 1996년 봄으로 잡았다.

2.6. 전람회윤종신


김동률서동욱으로 이뤄진 전람회는 1993년 MBC 대학가요제에 참가하면서 데뷔했다. 1집 <Exhibition> 발매 후, '기억의 습작'이 성공하고 이들은 동시에 군입대(방위병)를 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친구였던 둘은 예전에 작업한 곡들과 더불어 군생활 틈틈히 작업한 새로운 곡들을 모아서 만든 2집 'Strangers…(Exhibiton 2)' 발매시기를 1996년 봄으로 잡았다.
윤종신은 1993년 2집 <Sorrow>의 '너의 결혼식'(1992년 발매), 1994년 3집 <The Natural>의 '오래전 그날' (1993년 발매) 그리고 1995년 '부디'의 연속히트와 라디오 등지에서의 입담으로 점차 대중음악계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었다. 이때까지 윤종신의 앨범은 김형석, 정석원 등이 편곡을 맡았다가 한 술자리에서 김장훈의 소개로 유희열을 만났고 그를 음악노예로 참여시켜 5집 <우()>를 1996년 봄에 발매했다.
당시 이 두 뮤지션의 소속사는 90년대 이른바 뮤지션들의 소굴이었던 '대영 AV'였다.

3. 활동 내역


여기 있는 곡들이 한 달도 안 되어서 1위 후보까지 오른 뒤 1위를 차지하다가 다음 가수에게 1위를 빼앗기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치열한 경쟁이었다.

3.1. 솔리드


마침내 솔리드가 1996년 4월 15일, 3집 <Light, camera, action>을 들고 컴백했다. 타이틀 곡은 '넌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이야'. 이 노래는 솔리드 경력 중 최고봉인 '이 밤의 끝을 잡고'의 뒤를 잇는 R&B 발라드다.
한편, 2집 활동 시절과는 달리 김조한 뿐만 아니라 랩을 담당한 이준도 턱수염을 기르고 나와 화제가 되었다.
이 시기 출연과 관련해 갈등을 빚은 SBS를 제외하고, KBS2 가요톱텐, MBC 인기가요 BEST 50 등 지상파 가요 순위 프로그램에서 빠른 속도로 순위권에 진입한 끝에 2주 간 정상 자리를 차지했다.

3.2. R.ef


R.ef도 솔리드와 큰 시차를 두지 않고, 2집 <Back to the black>로 활동했다. 이례적으로 더블 타이틀곡으로 '찬란한 사랑'과 '마음 속을 걸어가'를 더불어 홍보하다가 이성욱의 인상적인 내레이션으로 유명한 '찬란한 사랑'을 중심으로 활동을 진행했다.
정적인 솔리드와는 달리 현란한 춤을 주무기로 삼고 활동한 R.ef는 소녀팬들의 인기가 대단했으며 먼저 차트 1위를 차지한 솔리드의 뒤를 열심히 쫓은 끝에 마침내 5월 마지막 주에 가요톱텐 정상 자리에 오른 뒤 강력한 가수에게 자리를 넘겨 주었다.

3.3. 신승훈


4집 활동 후, 1년 6개월여의 공백을 가진 신승훈의 컴백은 당시 가요계 전체를 들썩이게 만든 핫이슈였다. 그는 본인이 가진 음악역량의 진수를 보여주고자 5집 <Shin seung hun V> 전 곡을 작사, 작곡, 편곡했으며 타이틀 곡은 '나보다 조금 더 높은 곳에 니가 있을 뿐'. 신승훈이 그간 앨범에 담아왔던 애이불비 정서의 대단원에 해당하는 곡으로 신승훈의 1~4집과 발매와 더불어 빠른 속도로 100만장 판매를 훌쩍 넘겼다. 그와 더불어 차트 순위 진입 속도도 무척 빨라서 앨범 발매 후 가요톱텐에서 3주[2]만에 1위 후보가 된 뒤 6월 5일에 정상 자리를 차지했다.
이는 당시 굉장히 이례적인 일로 그의 인기를 반증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그 당시 1위 제조기인 그의 5집도 컴백하고 약 열흘 후, 한때 같은 라인음향 소속이자 90년대 가요계에서 그의 라이벌인 가수에게 다음 주 바로 정상을 내주었다.[3]

3.4. 김건모


김창환과의 결별 후, 그는 당시 솔리드김현철이 소속되어 있던 서인기획으로 소속사를 옮겼고 4집 <Exchange kg. m 4>를 발매했다. 타이틀 곡은 '스피드'. 이 곡은 당시 의 '작은 기다림', '슬퍼지려 하기 전에' 그리고 룰라의 '날개 잃은 천사' 등의 히트곡을 쏟아냈던 작곡가 최준영의 작품이다. (이후에 이정현의 '', '코요태의 '순정' 등을 작곡했다.)
당시 활동 의상은 브라스 편곡과 더불어 복고적인 리듬으로 진행되는 곡에 맞춰 중절모와 품이 넓은 스트라이프 정장! 그래서 이 시기 영상들을 유튜브에서 찾아보면 남자 출연자들의 와이셔츠 깃이 재킷을 다 덮는다. 심지어 남철, 남성남의 왔다갔다춤 등으로 곡의 분위기를 한껏 살렸다.
스피드는 가요톱텐에서 3주 뒤 신승훈을 1주 천하로 끝나게 한 다음 승승장구하면서 가요톱텐에서의 큰 역사를 남기기 직전에 등장한 인물은......

3.5. 클론


솔리드, R.ef, 신승훈의 대접전 이후 김건모의 4집 타이틀곡인 '스피드'가 파죽지세로 차트를 장악하면서 승리를 굳히려고 할 때 라인기획의 프로듀서인 김창환은 라인기획을 박차고 나간 김건모를 응징하기 위해 댄스 듀오 클론을 출격시켰다. 데뷔곡은 '쿵따리 샤바라'.#
제작사에서는 앨범 발매 전부터 미리 클럽 등지에 데모 테입의 형태로 이 곡을 배포해 두는 등 홍보를 많이 했으며 클론은 현진영과 와와로 데뷔해서 라인음향 소속 가수들의 안무를 짜준 덕에 방송무대에 자주 올랐다. 특히 강원래박미경 2집에 실린 '이브의 경고'에서 랩과 안무를 담당하면서 인지도를 높힌 뒤 건장한 체격에다 화려한 춤을 무기로 여름느낌 물씬 나는 노래로 활동을 시작한 결과 그 해 전체를 지배하는 히트곡이 되면서 발매된지 3주 만에 1위 후보에 올랐다.
'''이들은 승승장구한 끝에 4주 연속 1위를 하던 김건모의 '스피드'를 꺾으면서''' 마침내 '타도 김건모'의 임무를 멋지게 성공했다. 이 날 김건모는 클론의 1위를 진심으로 축하했지만 조용필 이후 정규앨범 4집 연속으로 골든컵을 배출할 수 있는 대기록을 세우지 못한 아쉬운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사실 김건모의 <스피드>는 클론의 <쿵따리 샤바라> 때문에 대기록이 무산된 것도 있지만 중간에 상반기 결산으로 한 주 미집계가 된 것도 있다.(상반기 결산에서 최고의 곡으로 뽑히긴 했다.) 이는 야구로 따지면 9회말 2아웃 상태에서 클론이 그의 퍼펙트 게임을 저지한 거와 마찬가지. 참고로 1위 제조기인 신승훈, 서태지와 아이들도 3집에서는 1위 수상곡을 배출하지 못했다.
그 뒤 기세를 몰아서 또 다른 경쟁곡인 룰라의 <3!4!>, DJ DOC의 <여름 이야기>와의 대결 끝에 골든컵의 주인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바와 같이 이들이 1996년 별들의 전쟁의 최종 승자며, 가장 큰 성과는 신인임에도 당대 최고로 인기가 있던 거성들을 제치고 전성기를 누렸다는 점에 있다.''' 물론, 이 순간 모든 것을 지켜보면서 만면에 미소를 띄었던 사람은 라인음향의 프로듀서 김창환.[4] 더불어 김창환과 라인음향의 마지막 전성기라고도 할 수 있다.
바로 이 때 <꿍따리 샤바라>가 골든컵을 수상한 게 라인음향 소속 가수의 마지막 가요톱10 1위 수상이었다. 그 후로도 라인음향은 1996년 10월 박미경 3집(<아담의 심리>, <기억속의 먼 그대에게> 수록. 실질적으로는 4집이다.), 11월 노이즈 5집(<성형미인> 수록), 1997년 6월 클론 2집(<도시탈출>, <빙빙빙>, <너의 생일엔> 수록)을 발매했지만 모두 전성기 때의 인기에는 못미쳤고 클론이 <꿍따리 샤바라>로 인기몰이를 하고 있을 무렵 콜라를 데뷔시켰지만 라인음향 선배 가수들의 인기에는 못 미쳤다.
IMF 구제금융 한파가 휘몰아친 1998년 2월 발매한 신승훈 6집(<지킬수 없는 약속>, <고개숙인 너에게> 수록)이 라인음향의 이름으로 발매한 마지막 정규앨범이었다. 신승훈 6집이 나오기 직전에 가요톱10이 막을 내렸고, 그 해 7월 사맹석 대표이사가 탈세 혐의로 고발당한 이후 신승훈, 노이즈 등이 라인음향과 결별하면서 라인음향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3.6. 전람회윤종신


  • 대형 가수가 득세하는 이 난세 속에서 전람회는 2집 'Strangers…(Exhibiton 2)'를 발매해 군입대로 인한 긴 휴지기를 마치고 활동에 들어갔다. 타이틀 곡은 '이방인'.# 전람회 특유의 진중한 사운드를 뿜어낸 이 곡은 라디오를 중심으로 서서히 인기몰이를 하기 시작했고, 같은 앨범의 'J's bar에서'와 '10년의 약속' 등도 호응을 얻었다. 무엇보다 이 앨범에 담긴 곡 중 지금까지 인기있는 곡이 있는데, 다름아닌 쑥맥남들의 고백송인 '취중진담'.
  • 윤종신은 1996년 겨울에 예정된 군입대를 앞두고, 그 해 봄 5집 앨범 '<우()>'를 발매했으며 타이틀 곡은 유희열과 함께 작곡한 '환생'.# 1996년은 1970년대 복고무드가 주름잡을 때였다. 그 덕에 슈가팝 스타일의 '환생'은 별들의 전쟁 시기에도 가요톱텐에선 최고 4위, mbc 인기가요 베스트 50에서는 신승훈, 클론과 같이 1위 후보에 3차례 올랐으며 순위권에서도 오래도록 있었다. 당시 다양한 곡의 코러스를 담당하던 조규찬도 한 몫 했고...[5]
더불어 윤종신의 TV 출연도 잦아지게 되었으며 이 앨범은 (이 후 윤종신이 앨범을 만드는 방식이 되기도 한) 앨범 전체를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어 구성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 이 문서에서 전람회와 윤종신을 다루는 이유는 이른바 별들의 전쟁 속에서 본인들의 영역을 단단하게 지켜냈기 때문이다. 특히 대중적인 인기척도인 가요 순위프로그램은 매주 시시각각 노래들의 순위가 오르내리고 있었으나, 이들의 앨범은 가요앨범판매 시장에서 꾸준히 인기를 얻고 있었다. 솔리드, R.ef, 신승훈, 김건모의 경우 시장 초기 반응이 원체 좋아서 순식간에 앨범 판매량이 올라갔다면 이들의 앨범은 천천히 그리고 오래 타는 장작처럼 시장을 달구어갔다.[6]

4. 그 후 행보


  • 그 해 최다 음반 판매는 신승훈의 5집이다.
  • 죽음의 조를 뚫고 승리자가 된 클론은 그 해 김정민에 이어서 2번째 최다 1위 수상을 기록했으며 SBS 가요대상과 서울가요대상에서 대상 2관왕을 차지하면서 전성기를 누렸다.(가요톱텐 5주, TV가요 20 4주, 인기가요 베스트 50 3주)
  • 가요계 전체를 달구었던 1996년 5월 이후 이 위키에 서술된 뮤지션들의 행보는 다음과 같다.

4.1. 솔리드


1993년에 데뷔한 솔리드의 전성기가 시작된 시기는 1995년 2집 활동 때다. 한국에서 R&B 스타일의 곡이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솔리드는 비슷한 스타일의 곡으로 3집 활동을 시작해서 빠르게 정상을 차지했지만 그 성과는 2집과 비교하면 적은 편이었으며 어쩌면 2집의 성공이 독이 되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후 후속곡인 '이제 그만 화 풀어요'가 중박 정도 치다가 활동곡으로 내정하지도 않았던 곡이 입소문을 타면서 지금도 여름만 되면 울려퍼지는 스테디 셀러가 되었다. 그 곡은 다름아닌 '천생연분'이며 가요 차트에서 최고 5위까지 가면서 좋은 반응을 얻었다.#[7]
그 뒤 이들의 인기는 1세대 아이돌의 시대가 시작되면서 점차 내리막을 걷기 시작했고, 다음 해인 1997년에 4집 앨범 <끼리끼리>라는 곡으로 잠시 활동한 후[8]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가 21년 만에 재결합했다.

4.2. R.ef


  • 신승훈, 김건모, 클론이 KBS 가요톱텐에서 차례로 순위 다툼을 하는 동안 1995년에 발매한 1집의 인기를 이어갔으며, 후속곡인 '마음 속을 걸어가'도 10위 권까지 랭크되었다.
  • 1996년 가을에는 2.5집의 타이틀 곡 '가을의 기억'으로 가요톱텐에선 최고 6위까지 올랐으며 TV가요 20에서는 1위 수상까지 하면서 인기를 얻고 있었는데..... # 1997년 초 R.ef가 소속사와의 이익배분 문제 때문에 잠적을 해버린 사건이 터지면서 내부적으로 심한 부침을 겪었다.
  • 다행히 이 문제는 곧 봉합되었고, 분위기 쇄신 차원에서 그룹의 이름의 뜻을 'Rave effect'에서 'Ruff eazy flava'로 바꾼 뒤 1997년 가을에 힙합 장르를 기조로 한 3집 앨범 타이틀곡인 '심연'으로 가요차트 10위 권 안에 드는 등 선전했지만 내부적인 부침과 더불어 이들의 강력한 지지기반이었던 소녀팬들이 막 데뷔를 한 1세대 아이돌 가수들로 넘어갔던 시기였던터라 이들의 인기는 예전과 같지 않았고, 그 뒤 4집을 끝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4.3. 신승훈


  • 그의 5집 앨범은 예전과는 달리 가요 순위 프로그램에서 1위를 많이 하지 못하면서 신승훈도 예전같지 않다는 말이 들려오기 시작했지만 그 해 가장 많이 팔린 앨범으로 기록되었다.
  • 타이틀곡 '나보다 조금 더 높은 곳에 니가 있을 뿐' 이후 그는 후속곡으로 '내 방식대로의 사랑'#으로 선정해 당시 유행하던 맘보무드를 한껏 이용해 가요톱텐에서는 최고 3위, mbc에서는 1위를 차지했으며 스케일이 있는 후속곡 '운명'까지 상위권 순위에 랭크시키면서 활동을 이어갔다.
  • 그 해 겨울 연말 시상식을 끝으로 다음 앨범 준비에 들어갔으며, IMF로 대한민국이 꽁꽁 얼어붙었던 1998년 초 6집 타이틀곡인 <지킬수 없는 약속>으로 여러 가요프로그램에서 1위[9]를 거머쥐면서 다시 전성기를 이어갔다.

4.4. 김건모


  • 라인음향을 떠난 이후 그는 본인이 3집에서 거두었던 성공을 계속 이어나갈 방법을 찾다가 손을 잡은 인물이 바로 작곡가 최준영이었다. 비록 가요톱텐에서 대기록을 쓰기 직전에 전 소속사 후배들에 의해 아쉽게 고배를 마셨지만 4집의 인기로 성공적인 홀로서기를 했다.
  • 그 뒤 후속곡 '악몽'#과 더불어 발라드 '미련', 동명의 MBC 프로그램의 오프닝 삽입곡으로 유명한 '테마게임' 등을 연속 히트시켰으며 그 해 '스피드'라는 곡으로 MBC 가요대상, KBS 가요대상, 골든디스크 시상식(당시에는 대한민국영상음반대상)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 그도 역시 그 해 연말 방송사 시상식을 끝으로 4집 활동을 마감한 뒤 1년여의 작업 끝에 1997년 12월 5집 앨범 를 발매하면서 전성기를 이어갔다. 5집 곡 <사랑이 떠나가네>는 가요톱10 마지막 방송에서 3위까지, <당신만이>는 같은 날 10위까지 올라갔다.

4.5. 클론


1996년 여름에 가요계 차트를 점령한 '꿍따리 샤바라'로 일약 최고 스타가 된 클론은 후속곡인 '난'으로 가요톱텐 1위 후보까지 오르면서 인기를 이어갔으며 1996년 10월까지 활동을 이어갔다.
이들은 다음 해 여름에 '꿍따리 샤바라'와 비슷한 컨셉인 '도시탈출'을 타이틀곡으로 해서 2집 활동을 했다. 이 때는 이전 스타일의 답습에 그쳤다는 평가가 있었고 전성기를 누리던 임창정과 2세대 아이돌들이 장악한 시기였음에도 슈퍼루키 시절의 인기를 통해 여러 가요 프로그램에서 1위 후보에 여러번 올랐으며 후속곡인 '빙빙빙'도 10위 권 안에 들면서 선전했다. 그 뒤 대만 쪽으로 프로모션을 하게 되면서 새로운 길이 시작되었다.

4.6. 전람회윤종신


1996년 봄의 조용한 승자 전람회는 사실 곧 팀 해체를 앞두고 있었다. 음악의 길을 걷고 싶어했던 김동률과 본인의 미래를 걷고 싶어한 서동욱은 서로를 위해 이듬해 초, 3집 <졸업>을 발매한 뒤 공식 해체를 했다.
그 뒤 김동률패닉 멤버인 이적과 함께 카니발이라는 그룹으로 결성해서 활동을 이어갔으며 서동욱은 회사원으로 활동하면서 가끔씩 전람회 멤버들과 같이 틈틈히 음악 활동을 했다.
또 다른 승자 윤종신은 '환생'으로 그 해 여름 내내 활동을 이어간 후, 11월에 6집 '육년'을 발매하고 군에 입대했다. 그 뒤로는 음악 활동 뿐만 아니라 예능에도 뛰어들면서 활발하게 연예 활동을 하고 있다.

5. 그 외


  • 1996년의 또 다른 승리자는 바로 김정민으로 그 해에 그는 가요 프로그램에서 26번이나 1위를 하면서 전성시대를 이끌었다.[10]
  • 이 해에는 스터디 셀러 명곡들이 많아서 1995년 겨울에 발매된 곡이 1996년 여름까지 순위권에 있었으며 설운도의 <삼바의 여인>은 1996년 10월 말까지 가요톱텐 차트 순위권에 있었다. 아울러 1994년에 발매되었던 최백호의 <낭만의 대하여>나 1995년 발매된 현숙의 <사랑하는 영자씨>처럼 1년 지난 곡이 갑자기 순위에 랭크되는 경우도 있었다.
  • 유작 앨범인 김성재의 '말하자면'은 가요톱텐에서 1위 후보에 2주간 있었으며, 서지원의 '내 눈물 모아'는 각종 가요 프로그램에서 1위를 여러번 차지했다.
  • 별들의 전쟁이 끝나고 9개월 후에 데뷔한 가수가 1990년대 가요계의 신데렐라 김현정이다. 다만 데뷔했을 땐 별다른 인기를 끌지 못했고, 1년 후 역주행하면서 큰 인기를 끌게 되었다.
  • 별들의 전쟁이 끝난 뒤인 1996년 6월 이후에도 명곡이 마구 쏟아졌으며, 룰라의 3!4!, 김원준의 '쇼', DJ DOC '여름이야기', 쿨 '운명', 이문세 '조조할인', 터보, 김원준, 성진우, 영턱스클럽, 이소라, H.O.T., 김정민 등이 이 해 여름과 가을에 나온 곡이다. 특히 H.O.T.가 11월 이후 가요차트 상위권을 차지하면서 1세대 한국 아이돌 시대의 시작을 알렸으며, 1997년 젝스키스의 데뷔를 기점으로 아이돌 팬덤 문화가 본격적으로 확산되었다.
  • 별들의 전쟁이 끝난 후 가요계의 경쟁의 승자는 김민종의 <귀천도애>로 가요 프로그램에서 여러 번 1위를 하면서 별들의 전쟁에서의 또다른 승리자가 될 수 있었지만... 표절 시비로 인해 가수 활동을 잠시 중단했던 흑역사를 겪었다. 그래도 1998년에 가수 활동을 재개하면서 전성기를 이어갔다.
  • 김건모가 신승훈을 제치고 골든디스크 대상을 수상한 것에 논란이 있었다.

6. 관련 문서



[1] 1집 곡인 <상심>이 1996년 초까지 순위권에 있었다.[2] 가요톱텐 컴백 기준으로는 2주.[3] 참고로 신승훈은 가요톱텐에선 김건모와 천적 관계인데, 김건모와 같이 1위 후보에 올랐을 때 1996년 6월 첫째주에 <나보다 조금 더 높은 곳에 니가 있을 뿐>으로 1위를 차지한 게 유일하다.[4] 참고로 이들은 박미경의 <이브의 경고>에서 피처링으로 참여했을 때 DJ.DOC의 <머피의 법칙>과 겨룬 적이 있었다.[5] 사실 엠넷 가요베스트27이라는 프로그램에서 2주 연속 1위를 한 적이 있지만, 케이블 방송에다 마이너한 프로그램이라서 그런지 잘 알려지지는 않았다. 참고로 가요톱텐에서 <부디>로 3위까지 간 게 최고 기록이며 그 뒤 21년 만에 좋니로 지상파에서 1위를 최초 수상했다.[6] 실제로 음반/카세트 판매량과 방송 출연을 기준으로 순위를 집계하던 뮤직박스 차트에서 윤종신은 7주 연속 3위, 전람회는 19주 연속 10위권이라는 성적을 기록하며 롱런했다.[7] 컴백 당시에는 댄스곡인 '해피엔딩'을 활동곡으로 잡았다.[8] 솔리드가 4집을 발표한 게 1997년 4월이었는데 이들이 해체될 때까지 KBS 가요톱10에서는 단 한번도 솔리드 4집곡을 소개한 적이 없었고 30위 권에도 단 한번도 들지 못했다.[9] 신승훈 6집이 나온 때는 가요톱10이 종영된 직후였다.[10] 슬픈 언약식(11번 - 가요톱텐 골든컵 수상, TV가요 20 3번, 인기가요 베스트 50 3번), 마지막 약속(6번 - 가요톱텐 1번, TV가요 20 2번, 인기가요 베스트 50 3번), 애인(9번 - 가요톱텐 3번, TV가요 20 2번, 인기가요 베스트 50 4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