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진중공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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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진그룹에서 분리된 한진중공업그룹[2] 의 핵심 대기업이'''었'''던 회사.
본사는 부산광역시 영도구 태종로 233 (봉래동5가)에 위치해 있다.
2. 연혁
국내 최초의 강선(鋼船,steel ship) 건조 조선소. 근대적 조선소의 효시로 대한민국 조선1번지로 불린다. 일제강점기인 1937년 일본 자본으로 부산 영도에 세워진 조선중공업(朝鮮重工業)을 전신으로 한다.[3] 조선중공업은 일본 미쓰비시 중공업과 동양척식주식회사의 합작투자로 설립된 회사로, 중일전쟁 직후인 1937년 자본금 300만원으로 설립되었으며, 1941년 태평양전쟁 직전에는 자본금 700만원 (현재가치 8천400억원) 의 규모로 성장했다. 이후 태평양전쟁 시기에 일본 해군으로부터 발주받은 선박 12척 등을 수주 건조하며, 설비와 자본금을 증자하며 (1,500만원-현재가치 1조8000억원) 당시까지 조선 최대 규모인 조선방직을 능가하는 금액이었으며, 해방 직전인 1945년에는 전시특수를 누리며 자본금 3,100만원(현재가치 3조7천억원)의 규모로 큰 성장을 하게 된다. 해방 이후 50년대까지 한국에서 1,000톤 이상의 대형 철선을 건조할 수 있는 유일한 조선소였다. 일제강점기 시절 대부분의 중화학 공업시설은 흥남 등 북한지역에 세워졌기 때문에, 조선중공업은 드물게 남한 지역에 온전히 남겨진 중공업 시설이었다.
1945년 8.15 해방 뒤 일본인 경영진과 간부들이 자기네 나라로 돌아가자, 전 수상서 치안관 박상길을 중심으로 대책위원회가 꾸려져 본사를 관리했으나, 대책위원회 측 횡령으로 노동자들이 노조분회를 결성 후 대책위를 축출해 자주적으로 공장을 관리했다. 그러나 미군정 출범 후 군정법령 33호에 따라 일본인 재산은 적산으로 분류되어 미군정청에 귀속되었는데, 조선중공업은 이 과정에서 일제강점기 시절 동양척식회사를 이어받은 군정청 산하 신한공사에 귀속되어 관리되었으며,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대한조선공사법에 의거 1950년 1월 자본금 3억원의 국영기업 대한조선공사로 출범했고, 1956년 대한증권거래소에 상장했다.
그러나 6.25 전쟁을 거치며 피폐해진 경제상황으로 말미암아 대부분의 선박 수요가 저렴한 일본 중고선박의 수입으로 대체되어 발주되는 선박이 없다시피하다 보니 50년대 내내 대한조선공사는 변변한 선박을 건조할 수 없었으며, 간간히 소형선박이나 수리조선만 간신히 하는 정부의 대표적인 적자 공기업이 되었다.[4] 막대한 원조를 해주던 미국 측에서는 조선공사의 민간매각을 종용했으며, 이에 정부에서는 1958년 국영기업 대한조선공사를 폐지하고 (주)대한조선공사를 설립하여 주식을 민간에 매각하려 했으나, 매각에 실패하여 형태만 주식회사로 바뀌었을 뿐 여전히 국가소유 공기업으로 운영하게 되었다.
이후 5.16 군사정변 직후 재차 국영화하여 정상화를 꾀하다가 실패하고, 1962년 국내 최초로 공작기계(선반)를 제작 후 1968년 11월 당시 재계순위 10위권 안팎에 있던 극동해운에 매각되면서 재차 민영화됐다. 극동해운의 계열사 편입 이후 남궁연 사장은 부산 영도조선소의 설비를 확충하고, 1969년 대만으로부터 발주받아 국내 최초로 수출선을 건조[5] 했고, 1974년 미국 걸프 사로부터 발주받아 국내 최초로 대형 수출선을 건조[6] 하는 등 사세를 확장했다.
그러나 이미 조선소 인근에 시가지가 형성되어 조선소를 확장하기 힘들어 1972년 즈음 거제도에 옥포조선소를 짓기로 하였으나..... 이듬해 1973년 오일쇼크의 발발로, 조선업 경기가 급강하하면서 휘청거리게 되고, 옥포조선소는 결국 1978년 대우그룹에 분할매각됐다. 이후 옥포조선소는 (주)대우조선공업을 거쳐 (주)대우중공업으로 합병되어 오늘의 대우조선해양에 이르게 된다.
옥포조선소 매각 후 1977년 사우디아라비아 TAIF 공군기지 시설 공사 및 국내 최초로 석유 시추선 건조 등을 했으며 1981년 동해조선을 인수하고 옥포기업을 합병 후 부산수리조선소를 세웠다. 1982년 국내 최초로 사우디 제다에 해외 수리 조선소를 세우고, 1984년 12월 동양 최초로 수륙양용 공기 부양선을 건조하였다. 이러한 공적을 뒤로 하고 1988년 법정관리되어 1989년 조선산업 합리화 계획에 따라 한진그룹이 본사를 인수하면서 한진중공업이 되었다. 1996년 법정관리 종결 뒤 1999년 3월 경남 마산에서 경비정 등을 제작하던 중소 조선업체였던 코리아타코마[7] 를 합병하고, 같은 해 8월 한진건설, 한진종합건설을 합병하였다.
건설부문 또한 조선부문 못지 않은 긴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1967년 설립된 대한준설공사가 1990년 한진종합건설로 사명을 변경하고, 1968년 설립된 한일개발은 1994년에 한진건설로 사명을 변경, 운영되어 오다가 1999년에 당시 조선업을 영위하던 한진중공업과 함께 3개 계열사가 합병하여 지금의 한진중공업이 만들어졌다.
한일개발 시절 국내최초의 철골구조 건물인 서울 해운센터빌딩을 신축한 이래 전통적으로 공항건설 분야의 특화된 기술력과 인천 영종도, 군장 국가 산업단지, 부산 신항 배후 단지 등 준설, 항만 사업분야에서 국내 최고의 실적을 보유하고 있다. 1970년대에는 중동 및 동남아 해외건설 시장에 일찍 뛰어들어 개척자의 면모를 보였는데, 특히 73년 국내 업계 최초로 필리핀 건설시장에 진출한 이후 필리핀 마닐라 경전철을 비롯하여 도로, 항만 공사 등 강점으로 꼽히는 인프라 공사에서 많은 실적을 올렸다.
대표적으로 인천국제공항을 비롯한 대부분의 국내 공항시설 건설과 영종대교, 필리핀 다바오 국제공항, 경부고속철도, 인천문학 월드컵 경기장, 부산 신항만 건설 등 국내외 굵직한 공사들을 수행하였다. 특히 공항 건설 분야에서는 국내에서 독보적인 실적을 자랑한다. 1971년 김포국제공항 국내선 여객청사를 시작으로 제주, 김해, 청주, 인천, 울산, 양양, 대구, 포항, 광주, 무안공항 등 대한민국에서 최다 실적을 보유하고 있다. 특히 동북아시아 허브공항인 인천국제공항 건설에서 최초 공사인 방조제 공사부터 부지조성, 활주로, 여객터미널, 부대시설, 접근도로 공사까지 거의 모든 공정에 참여했다.
이러한 성과로 한진중공업은 2001년 3월 인천국제공항 개항식에서 국내 건설업계 최초로 금탑산업훈장을 수상하였으며, 이후 2단계 공사인 탑승동, 3단계 공사인 제2여객터미널 신축과 전면도로 공사 등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최근에는 초대형 프로젝트인 인천국제공항 제2여객터미널 확장 골조 및 마감공사를 수주하여 공항건설의 독보적인 명가임을 꾸준히 재확인 시켜오고 있다.
전통적으로 공공공사와 토목 인프라 공사에 강점이 있었으나 2010년에 접어들어 민간 건축과 주택사업에서도 그 영향력을 꾸준히 확장시켜 오고 있다. 부산국제영화제가 매년 개최되는 부산 영화의 전당을 비롯하여 부천문화예술회관, 세종아트센터 등 국내의 공연, 문화예술 시설에도 강점을 발휘하고 있다. 주택 사업분야에서는 2006년 런칭한 주택브랜드 <해모로>를 앞세워 정비사업 시장에서 꾸준히 수주를 이어가고 있으며 적극적인 분양 홍보 전략으로 7년 연속 초기분양율 100%라는 기록을 이어가고 있다.
철도차량도 제작한 적이 있었다. 여러 무궁화호 객차들과 DHC 디젤동차 일부 차량뿐만 아니라 이외에도 코레일 341000호대 전동차[8] 나 부산교통공사 2000호대 전동차같은 도시통근형 전동차도 생산한 적이 있었다. 이후 철도차량 부문은 현대정공과 대우중공업과의 빅딜 사업으로 인해 현대로템으로 합병되었다. 참고로 우리나라의 첫 VVVF 전동차를 제작한 곳이 한진중공업이다. 물론 대우중공업도 비슷한 시기에 VVVF 전동차를 제작했지만 구 2x30편성이 현재 341x01편성(한진중공업 제작)이라서 대우중공업이 최초는 아니다. 만약 2x30편성이 351x01편성이었다면 대우중공업이 우리나라의 첫 VVVF 전동차를 제작한 회사로 알려져 있을 것이다.
2005년 한진그룹에서 계열 분리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엄청난 막장 드라마를 찍었다. 2008년 ~ 2012년 동안 노사분규가 장기화되어 해양 플랜트 건설에 많이 뛰어들지 못한 게 새옹지마가 되었는지 현대중공업, 삼성중공업, 대우조선해양 등이 줄줄이 신음하는 2015년에도 그리 큰 적자를 보지 않고 위기를 넘기나 했으나, 2016년 채권단 자율협약을 신청했다.#
2019년 1월 필리핀 소재 수빅 조선소가 현지 법원에 회생절차를 신청함에 따라 자본금 대비 자본총계 비율이 -140%를 기록, 완전자본잠식에 빠졌다. 수빅조선소에 대한 한진중공업의 보증채무는 4억1000만달러(약 4600억원) 규모다. 결국 채권단이 6,874억원에 달하는 채권을 출자전환하고, 대주주인 한진중공업홀딩스와 조남호 회장 개인 소유의 지분을 전액 감자하면서 채권단이 소유, 경영하는 회사가 되었다. #
3. 지배구조
2019년 10월 기준
4. 역대 임원
4.1. 구 법인
- 회장
- 남궁연 (1975~1988)
- 대표이사 회장
- 조남호 (2003~2007)
- 대표이사 사장
- 김권태 (1945~1949)
- 이연재 (1949~1952)
- 신성모 (1952~1953)
- 유완창 (1953~1954)
- 이철원 (1954~1958)
- 석상옥 (1958~1960)
- 권태춘 (1961)
- 이영진 (1961~1965)
- 김두찬 (1965~1968)
- 남궁연 (1968~1975)
- 남궁호 (1975~1988)
- 안정모 (1978~1980)
- 송영수 (1996~2000)
- 이우식 (2000~2002)
- 박재영 (2000~2004)
- 김정훈 (2002~2004)
- 김정웅 (2004~2007)
- 홍순익 (2004~2007)
- 박규원, 이강록 (2007)
- 법정관리인
- 조원강 (1988~1989)
- 이근수 (1989)
- 송영수 (1989~1996)
- 관리인(귀속재산 시절)
- 박상길 (1945)
- 김재련 (1945)
- 정우조 (1945)
4.2. 신 법인
- 대표이사 회장
- 조남호 (2008~2013)
- 대표이사 사장
- 박규원 (2007~2009)
- 이강록 (2007~2008)
- 송화영 (2008~2014)
- 이재용 (2009~2013)
- 최성문 (2013~2015)
- 이만영 (2014~2016)
- 안진규 (2015~2017)
- 이윤희 (2017~2019)
- 이병모 (2019~)
5. 영업 현황
2000년대 이후로는 일반 아파트 건설업, 상업시설 건설 등 건설업에 치중하는 모양이며, 실제로 대부분의 매출이 건설업에서 뽑히고 있다. '''해모로'''가 한진중공업의 아파트 브랜드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건설업의 비중이 높을 뿐이지 조선업도 만만치 않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조선소는 부산의 영도조선소와 필리핀의 수빅조선소를 보유하고 있다. 영도조선소의 경우 부지가 협소한 사정 상 대량건조는 불가능한 대신 각종 첨단기술이 적용된 연구선이나 군함 같은 특수선 위주로 건조한다. 수빅조선소는 상당한 규모의 건조시설을 갖추고 있어 대형 선박은 주로 여기서 건조한다.
대한민국 해군과는 상당한 인연이 있다. 과거 조선공사, 타코마 시절부터 동해급 초계함, 포항급 초계함, 울산급 호위함 상당수와 최근의 독도급 대형수송함 2척 및 여기에 탑재할 솔개급 공기부양정을 건조, 인도하였으며 참수리급 고속정은 설계 단계부터 참여하여 건조물량의 절대 다수가 한진중공업 제작품이다. 현대중공업, 대우조선해양보다는 '''해군이 운용해 본 경험이 없는, 처음 만들어보는 함종'''의 초도함 건조 이력이 상대적으로 돋보이는 편이다. 이 인연은 윤영하급 고속함과 참수리 211급 고속정으로 이어지고 있다.[9]
영도조선소는 경제성 있는 특수선에 역량을 집중하고 상선의 비중을 점차 줄여나가는 것으로 수익성 강화에 나섰다. 2015년 2월 말 기준 영도조선소의 수주 잔량은 15척으로 일부 벌크선을 제외하면 대부분 특수선 및 중소형 상선이다. 이 중 6~7척은 지난해 한국해양수산연수원, 조달청 등으로부터 수주한 항해 실습선이다. 일반 상선은 2011년 현대상선으로부터 수주한 벌크선 한 척 밖에 없다. 한진중공업을 공동관리하는 채권단은 영도조선소의 상선 부문 비중을 단계적으로 축소하여, 2020년까지 영도조선소를 특수선 전문 조선소로 전환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조선부문의 불황과 경영난 속에서도 건설부문은 견조한 실적을 유지하며 어려움을 극복해왔다. 현재 매년 약 1조5천억 원의 수주 실적을 올리고 있으며 공공공사의 경우 약 5천억 원이 넘는 수주 실적으로 꾸준히 톱 10 순위권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2020년에는 7,362억 원의 공공공사 수주액을 달성하여 국내 업계 3위에 랭크되었다.
주택사업분야에서는 서울, 인천, 부산, 대전, 대구, 청주, 제주 등 전국 각지에서 정비사업에 적극 참여하고 있으며 매년 약 5천억원의 수주고를 올리고 있다. 최근에는 가로주택 정비사업에도 진출, 정비사업 시장의 물량 감소에도 발빠르게 대처해 나가고 있다.
지난해 서울특별시 광진구에 위치한 동서울터미널을 매각함과 동시에 공동 개발을 추진하고 있다. 초대형 프로젝트인 만큼 기대효과가 크기 때문에 재무 안전성 강화가 기대된다.
6. 노동운동
타 조선업체들에 비해 노사분규가 크게 이슈화되었다. 일제시대부터 이어진 조선소의 기나긴 역사와 궤를 함께한 노동운동의 역사가 존재하는 회사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노동운동 역사의 산증인이라 하겠다.
대한조선공사 시절부터 박정희 정부의 대한노총(현 한국노총) 산하 노조라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노동자 권익을 위해 활발하게 활동하는 대규모의 민주적 노동조합이 존재했다[10] , 1960년대 말 조선공사 민영화 반대 투쟁에서 패배한 뒤 70년대에는 당시 대다수 노조들이 그랬듯이 관제적 성격을 띄게 되나, 중공업 부문에서 민주적 노동조합이 대대적으로 부활한 1987년 이후 한진중공업 노동조합은 다시 부산 지역 노동운동의 중심으로 떠오른다. 80년대 이후 활약한 대표적인 노동운동가로는 '''한국 최초의 여성 용접공[11] '''으로 알려진 김진숙(이후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이 있다. 부산 지역에서 노동변호사로 활약하던 노무현 역시 한진중공업 노동조합의 활동을 지원하기도 했다.
1991년에는 당시 노조위원장이었던 박창수 씨가 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도중 돌연 사망하는 일이 있었다. 더군다나 장례를 치르려던 그의 시신을 경찰병력을 동원해 강제로 빼앗아가는 짓거리가 벌어지기도 했다. 이는 안기부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노태우 정부 시기의 대표적인 의문사 사건으로 꼽히며, 당시의 분신정국에 기름을 끼얹는 사건 중 하나였다.
2000년대 들어서는 정리해고를 둘러싼 노사간의 갈등이 두드러졌다, 2003년에는 김주익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이 85호 크레인에서 자살한 사건이 있었으며[12] , 얼마 후 곽재규 조합원도 따라서 숨을 거두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시기는 한때 노동자들의 동반자였던 노무현 정권 때였으며, 노무현 대통령은 이 사건 직전에 일어난 두산중공업 노동자 배달호 씨의 분신자살 사건을 두고 '''죽음이 투쟁의 수단이 되는 시대는 끝났다'''라는 발언을 하여 수많은 노동자들에게 충공깽을 선사했다.
2011년에는 희망버스 사건이 있었다. 정리해고 문제를 둘러싼 갈등이 위에서 언급된 김진숙 지도위원의 85호 크레인 농성을 계기로 크게 이슈화되었다. 희망버스 투쟁 이후에는 2012년에는 최강서 조합원이, 2013년에는 또 다른 김 모 조합원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있었다.
7. 한진그룹과의 관계
'''영 좋지 않다.''' 조남호 한진중공업 회장이 맏형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으로부터 계열 분리하여 빠져나오는 과정에서 한바탕 막장 드라마를 찍었기 때문이다.
조남호 회장은 지금까지도 한진그룹 일가와 사이가 굉장히 안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앙금의 단적인 예로 본진인 한진그룹에서는 조중훈 전대 회장의 제사를 음력에 진행하는 반면, 한진중공업에서는 양력에 치른다. 출장갈 때 '''대한항공과 진에어를 아예 타지 마라'''(...)는 내부 지시까지 있을 정도이다. 2000년대 초반까지는 그래도 대한항공에서 할인을 해 주었으나, 이제는 없을 뿐더러 '''대한항공을 타면 출장비도 정산해 주지 않는다.''' 오히려 아시아나항공(!)의 자회사인 에어부산과 관계가 좋은 편이다. 에어부산은 기업우대 제도로 동남권 소재 기업들에게 할인을 해 주는 게 있어서, 영도구에 본사가 있는 한진중공업으로서는 특기할 사항이 아니다.
이는 GS그룹이 필수 인프라 중 하나인 전화망을 LG U+의 것으로 사용하는 거라던지, 천일고속/천일여객 계열사들이 천일고속과 천일여객그룹으로 분리되어 남남이 된 것과 대조적이다. 사실 GS그룹도 LG그룹과 싸워서 헤어졌더라면 전화망을 모조리 SK텔레콤이나 KT로 바꿔 버렸을지 모르며, 천일여객의 경우에도 지분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자식들에게 다른 회사를 물려 줘서 서류상으로 남남이 된 터라 실질적으로는 계열사에 준할 정도로 교류가 많다. 대우그룹 출신 법인들이 자체 버스나 승용차를 자일대우상용차나 쉐보레(한국GM)로 뽑을 정도로 의리가 강한 것과는 완전 천양지차.
그래도 2019년 4월 13일에 조남호 전 회장이 조양호의 빈소를 찾긴 했다. 시간대는 다르지만 막내인 조정호도 빈소에 갔다 왔다.
2019년 조남호 전 회장의 지분이 완전 소각되면서 조씨 일가와 무관한 회사가 되었기에, 이제는 별 의미없는 이야기가 되었다.
[1] 구 한진중공업 법인에서 물적분할한 날짜이다.[2] 2018년 5월 기준 재계서열 56위'''였'''던 기업집단. 2019년 12월 현재 지주회사인 한진중공업홀딩스 산하에 한일레저(골프), 대륜E&S(도시가스), 대륜발전, 별내에너지(에너지공급)가 남아 있다.[3] 1937년 초 박영철을 비롯한 4인의 민족자본가가 나서서 근대적인 조선소를 설립하려 했으나 순수한 조선 사람들만으로 구성된 회사 설립이 어려워지자 그 당시 조선 연안 항로의 해운권을 독점하고 있던 조선우선(朝鮮郵船) 사장인 모리 벤지로(森辨治郞) 등 일본 자본가들을 어쩔 수 없이 주주로 참여시킨다. 이러한 사정은 일제강점기 하에 일본인들이 제반 권한을 독점했기 때문인데 조선중공업 역시 발기인 9명 중 한국인은 상업은행과 조선우선의 중역 2명뿐이었고 발행한 6만 주의 주식 가운데 조선인 소유 지분은 총 5,000주로 전체의 10%에도 미치지 못하였다.[4] 6.25 전쟁 당시에는 큰 역할을 했다. 조선소가 부산에 위치해 있어 전쟁의 직접적인 피해를 입지 않았고 정부 역시 전시물자 수송에 필요한 선복(船腹)의 충당이 필요했으므로 조선업을 지원했다. 특히 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든 1952년 말에는 부족한 선박의 확보와 노후 선박 대체를 목적으로 자금지원과 함께 조선산업 진흥정책을 적극 추진하였는데 이에 힘입어 대한조선공사는 해난복구선 대야호 준공(1951년), 미국 화물선 부르트호 수리(1952년), 영국 화물선 아이리스 칸트리호 수리(1952년), 미국 상선 파크벤저민호 수리(1953년), 준설선 제1용두호(1954년) 등의 사업을 완수했다.[5] 250톤급 어선 20척이다. 우리나라 선박 수출시대를 연 기념비적 사건[6] 총 6척이며 이 중 KOREA GALAXY호는 국내 최초 정유운반선이다. 국내 최초 1만톤급 이상의 대형선 수출 시대를 개척한 것으로 평가받는다[7] 원래 김종필 전 총리의 셋째 형 김종락이 소유했으나, 경영난으로 법정관리를 거쳐 1991년 한진그룹에 인수되었다. VLCC 같은 대형 상선을 건조하지 않기 때문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한국의 상선과 군함 역사에 큰 역할을 한 회사이다. [8] 341x01~341x04편성[9] 윤영하급 고속함의 설계, 건조단계에서 한진중공업이 힘든 시기를 보내는 사이 STX가 끼어든 적이 있었으나 초도함보다 더한 결함을 보인데다가 이를 무작정 쉴드치던 정옥근이라는 해군 역사상 희대의 똥별과의 검은 커넥션이 밝혀진 후 STX는 이미 정옥근이 발주해버린 인천급 호위함 3척을 끝으로 퇴출되면서 차기 고속정은 전량 한진중공업에서 건조, 인도하고 있다.[10] 이 시기를 상세하게 다룬 연구서로 남화숙 워싱턴대학교 교수의 <<배 만들기 나라 만들기>>가 있다.[11] 이는 사실이 아니다. 1971년 대한조선공사에 입사한 여성 용접공 기록이 남아있기 때문. 단지 1971년 입사한 여성을 포함하여 누가 한국 최초의 여성 용접공인지 자료나 증언이 확실하지 않아 김 씨가 언론을 통해 임의로 본인을 내세운 것으로 보인다. 그 증거로 지난 2020년 11월 8일 방영된 KBS 교양프로그램 다큐3일 '굳세어라! 그 시절 여자 기술자' 편에 대한조선공사에서 용접공으로 근무했던 황순란 씨 이야기가 나온다. 여기서 황 씨는 20년 근속 공로패를 보여주는데 입사한 해를 역산해 보면 김 씨가 입사한 1981년으로 같은 해 인데다 심지어 입사일조차 김 씨보다 한참 빠르다. 황순란 씨가 본인을 한국 최초의 여성 용접공이라 소개하지 않는 이유도 입사 당시 이미 선배 여성 용접공들이 있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사실 조선중공업이 창립한 1937년부터 김 씨가 입사한 1981년까지 여성 용접공이 한 명도 없었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주장이다. 조선업계에서는 6.25 전쟁 당시 남자들이 징집되어 여성들을 대체 용접공으로 투입했다는 설이 유력한데, 이러한 전후 사정에 비추어 보면 한국 최초의 여성 용접공은 해방으로 조선중공업이 대한조선공사로 바뀐 1945년부터 6.25 전쟁 전후인 1950년대 사이에 근무했던 여성일 가능성이 높다.[12] 정은임 아나운서가 이 사건을 소개한 라디오 방송분이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C8u97Dsgem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