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전/야구
1. 개요
축구에 비해 야구를 하는 나라들이 많지가 않기 때문에 국제대회에서 자주 맞대결이 펼쳐진다. 게다가 정치적인 상황이나 역사적인 배경까지 더해져 그야말로 불꽃튀는 응원전이 전개되기도 한다. 한국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일본의 경우, 이 한일전의 TV중계 광고단가가 일본대표팀과 타 국가간 대항전때보다 더 높게 나오며 관중들 역시 이 한일전은 거의 매진상태가 되기 때문에[1] 일본야구계측에서도 각별하게 신경쓰는 일이 많다. 한 예로 2013년과 2017년 한국 대표팀이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 광탈했을 때 일본측에서 흥행때문에 아쉬워 했을 정도였다.[2] 또한 2006년엔 첫 대회 때부터 1라운드, 2라운드, 4강 등 3번이나 맞붙어서 명승부를 펼치자 이때 시청률은 대박을 쳤다.
경기적인 면에서도 야구 한일전은 매번의 명승부를 일궈내는 경우가 많다. 특히 일본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것은 야구 인프라 등 모든 면에서 한국에게 압도적으로 우세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과 대결해서 압승을 한 경우가 드물다는 것이다. 물론 2006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준결승과 2009년 아시아 예선전 첫 대결에서 압승했던 경우는 있지만 그 이후로는 거의 대등한 수준의 경기력을 뽐내었기 때문에 일본입장에서는 눈엣가시같은 존재.
이렇다보니 일본은 아예 한국 야구 대표팀을 완전한 라이벌로 의식하고 경기를 하는 추세로 접어들었다[3] . 특히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한국에 패해 4위로 대회를 마친 후 거의 시사보도급 분석 프로까지 내보낼 정도로 민감하게 반응했을 정도다[4][5] . 다른 팀에겐 다 져도 일본에게만은 이겨야 한다는 우스갯소리가 한국내에 있는 만큼이나 일본 역시 한국전만큼은 이겨야 한다는 의견이 매우 높은 편이다.[6][7]
2. 성인 국가대표
'''모든 팀에 다 이겨도 일본에 지면 전패고, 다른 나라에 다 져도 일본에 이기면 전승'''
1904년, 필립 질레트에 의해 한반도에 야구가 도래한 이래 한국과 일본의 야구 경쟁을 이루어져왔다. 최초의 한일전은 1905년 황성 YMCA 야구단의 일본원정경기였는데 비록 고교야구팀에게도 압도적인 패배를 당하는 수준차를 경험하는 등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특히 에도 시대에 야구가 도입되어 1878년 일본 최초의 야구단인 니이바시 아스레틱 클럽(新橋 アスレチック 俱樂部)이 창단되어 이미 기반이 갖춰진 일본에게 승리한 다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었다.'''영원한 라이벌(永遠のライバル)'''
2017 아시아 프로야구 챔피언십 홍보 영상 中 ##
이 간극은 해방 이후에도 이어져 1950년대까지 이어졌다. 일본과의 경기에서는 한국 선수들은 이를 악물고 경기를 펼쳐왔지만 번번히 이기지 못하며 7전 7패를 기록했다. 이처럼 한일전에서 굴욕적인 성적을 기록하던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이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것은 해방후 13년이 흐른 1963년이었다. 1963년 서울 동대문야구장에서 개막한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1차 리그에서 한국과 일본이 맞붙게 되었는데 이때 동점 홈런과 결승타점을 기록한 박현식의 맹활약으로 5:3, 대한민국 대표팀이 승리를 거둔다. 그리고 두번째 맞대결이 펼쳐진 2차 리그에서는 우승을 결정짓는 맞대결이 펼쳐졌는데 신용운의 완투, 3타점을 기록한 김응룡을 앞세운 한국 대표팀이 승리하고 1963년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서 사상 야구 국제대회 첫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이때 반일감정이 극에 달해있던 시절이었기에 승리 기념 카퍼레이드를 했을 정도였고 최초의 국제 야구대회 우승을 숙적 일본을 꺾고 기록했기에 더욱 반응이 뜨거웠다.
1971년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는 김영조 당시 대표팀 감독이 당뇨병으로 대회 중 쓰러지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때 최종전은 다름 아닌 일본. 그러나 대표팀의 방망이는 불탔고 8:3으로 대승을 거두며 숙적을 꺾음과 동시에 우승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에게 잘 알려진 한일전은 바로 김재박의 개구리 번트와 한대화의 결승 쓰리런이 터지며 우승한 1982년 야구 월드컵을 꼽을 수가 있다.
하지만 일본의 경우 프로선수가 나가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일본의 프로선수와 맞붙은 최초의 대회는 2000년 시드니 올림픽이었다. 단, 이때 일본의 경우 프로 선수 8명, 사회인 야구 선수 11명, 대학생 5명이 포함된 1.5군 정도의 대표팀. 아시아 예선에서 처음 맞붙은 양 대표팀은 5:3으로 한국의 승리로 기록되었고, 이후 올림픽 예선에서 연장 접전 끝에 7:6으로 승리를 두게 된다. 그리고 또 다시 만나게 된 3, 4위 동메달 결정전에서 심한 담이 걸려 팔도 제대로 안펴지는 등 몸상태가 영 아니었던 선발투수 구대성이 155구 9이닝 1실점 완투를 기록하고 이승엽이 결승타를 때려내며 3:1 승리를 거두며 동메달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하게 되었다.
그후 2004 아테네 올림픽을 준비한 일본은 엄청난 준비를 기울이게 되었다. "우리 목표는 금메달!"이라는 기조아래 일본 야구 역사상 최초로 대표팀 멤버 전원이 일본프로야구에서 날고기는 주전급 선수들로 모조리 채워진 것. 대표팀 감독은 일본의 전설 나가시마 시게오였고 삿포로 돔에서 열린 경기에서 한국 대표팀은 2:0으로 패배하며 올림픽에 진출하지 못하는 결과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당시 삿포로 참사는 일본전보다 대만전 패배가 큰 충격이었다.
그리고 2006년, 세계 야구 대표 대회라는 이름을 내세운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이 열리면서 한국과 일본의 진검승부가 연이어 벌여졌고 특히 2006년과 2009년에는 대회 주최측인 MLB에서 미국 야구 국가대표팀을 밀어주기 위함과 동시에 흥행을 위해 연이어 한일전을 맞붙이는 등의 노답 대진으로 한일 베이스볼 클래식이라는 비아냥을 얻기도 했다. 2015년에는 WBSC가 출범시킨 프리미어 12가 시작되며 더욱 자주 국가대항전을 볼수 있게 되었다.
단 2000년 이후에도 아시안게임의 경우에 한국대표팀은 미필 선수 위주의 대표팀 선발이 이루어 지지만, 일본대표팀은 일본의 사회인야구 선수들로 구성된 라인업을 짜기 때문에 사실상 1군과 2군간의 맞대결이라고 볼 수 있게 되는데 가끔 이런 2군급 팀에게 대패를 당하며 메달권에서 멀어지는 사달이 나기도 한다.
참고로 2000년 이후 2016년까지 경기 중반까지는 일본이 압도적인 리드를 가져가는 경우가 많았으나 경기 후반에 대표팀이 뒤집는 경우가 많았다. 실제로 일본의 경우 7회 이전 득점은 한국보다 2배 이상 많이 얻어낸 반면, 8회 이후 득점은 한국이 일본보다 10점 더 많았다.
한국야구가 2000년대에 인프라에 비해서 훌륭한 선수들을 많이 양성해내며 투수쪽으로는 박찬호, 김병현, 류현진, 오승환, 김광현, 윤석민, 구대성, 정대현, 임창용, 봉중근 등이 활약하고 타자쪽으로는 이승엽, 김동주, 김현수, 이대호, 정근우 등이 활약하면서 황금기를 맡이하며 한국-일본이 1군으로 본격적으로 맞붙기 시작한 2000년대 초반부터는 국제대회 타이틀은 일본에 뒤쳐질지언정 상대전적으로는 우위를 점하던 시기도 있었는데, 2010년대 이후로는 기존의 황금세대 멤버들이 은퇴하거나 나이가 들며 세대교체가 되면서 국가대표 뎁스가 얇아지며 기존의 한국-일본 야구 인프라차이대로 다시 상대전적이 벌어지고 있다. 2010년대 상대전적을 보면 1승 5패로 한국이 고전하는 중이고(심지어 최근에는 4연패중이다), 최근 10년동안 WBC 2라운드 진출도 하지 못하는 한국 국가대표팀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기존의 한일전 승률만큼 A대표팀 승률도 떨어질 가능성도 있다. 사실 야구 역사나 인프라 차이를 생각하면 오히려 2000년대 한국야구의 파란이 정말 대단했던 거지 이게 정상이긴 하다..
2.1. (한국 프로) vs (일본 프로)
2.2. (한국 프로, 아마) vs (일본 아마)
3. 주요 경기
-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 대회
주성노호엔 박찬호 등 슈퍼스타를 총 출동시킨 반면, 일본은 현재와 마찬가지로 사회인야구대표팀을 출전시켰다. A조에 편성된 한국과 일본은 예선에서 첫 맞대결에서 13:8, 두번째 맞대결에서 9:2로 승리한 주성노호는 결승에서 다시 마주하게 되었고 방콕아시안 게임 역사상 유일하게 결승전 콜드게임을 기록하며 금메달을 따내는데 성공한다.[9] 이에 충격을 받은 일본야구기구는 "이대론 안된다!"라며 2000년 올림픽부터 프로선수 등을 참가시키기 시작했다.
프로선수들이 참가한 첫 한일 맞대결.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아시아 예선이었던 1999년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서 구대성의 맹활약으로 4:3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고 대회 조별 예선 22차전에서 7:6 승리를 거둔 김응룡호는 3/4위전에서 또 다시 일본과 맞붙게 되었는데 동메달이 걸린 이날 경기에서는 감기 몸살로 골골대던 구대성이 일본 타선을 상대로 완투승을 따내면서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2000년 야구 3~4위전 한국 vs 일본 하이라이트
2004 아테네 올림픽 대륙 예선도 겸하여 개최되었기 때문에 아시아선수권에 걸맞지않게 양팀 모두 1군 선수들이 총출동한 대회였다. 한국은 시작부터 대만한테 4:5 로 지는 대참사가 일어나며 올림픽에 나가기 위해서는 일본을 반드시 이겨야 하는 안습한 상황이 되 었다. 그리고 경기 당일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의 신인 영건 와다 츠요시에게 타선이 침묵하고 정민태가 일본 타선에게 실점을 허용하며 결국 0:2 로 패하면서 올림픽행이 좌절됐다.
명실상부 한일전 야구에 제대로 된 불을 지핀 대회. 이전에는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에서 일본이 오로지 아마추어나 프로와 아마추어가 섞인 팀으로 구성하여 대회에 나왔던 반면에 야구의 세계화를 목적으로 한 최대 규모의 야구 국가 대항전이 설립되면서 한국과 일본 모두 KBO, NPB를 넘어서 메이저리거까지 총출동한 멤버로 구성되어 맞붙었다. 아시아 예선과 본선 2라운드에서 2번 만나 일본을 2번 다 잡아내며 파란을 일으켰지만 4강전에서 패하며 목메달에 그쳤다.
-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야구
2007 아시아야구선수권에서 1군 대표팀끼리의 맞대결이 펼쳐졌으나 아베 신노스케, 우에하라 고지의 맹활약으로 패배하게 되었고 이날 경기 패배로 인해 결국 김경문호는 대륙별 플레이오프에 진출하게 된다. 이 경기의 결과 때문인지 당시 일본 야구 대표팀 감독이던 호시노 감독은 "한국은 별거 아니다." "전승으로 금메달 따겠다."는 호언장담을 하게 되는데, 16차전에서 20살의 김광현의 호투를 앞세워 6:4로 승리를 거두었다.
진정한 한일전의 끝... 대회내내 5번이나 만나면서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이 아니라 한일 베이스볼 클래식이 되어버렸다. 1라운드와 2라운드에거 총 4번 맞대결에 서로 2번씩 치고 받으며 나란히 결승까지 올라갔지만 연장까지 가는 명승부끝에 결국 이번에도 일본에게 패하면서 2위에 만족해야 했다.
슈퍼라운드에서 한국이 일본을 2점차 이상으로 승리, 일본이 대만을 3점차 이상으로 승리함으로써 결승전에서 한일전이 성립됐다. 그 뒤 리턴매치 결과 한국이 역시 승리했다.[10]
슈퍼라운드 마지막 일정 경기와 결승전에서 2연속으로 맞붙게 되었다.[11] 그리고 2번 연속 패배하며 준우승했다.
4. 프로팀
- 1991년 / 1995년 / 1999년 한일 슈퍼게임
- 아시아시리즈
- 한일 클럽 챔피언십
이 격차를 여실히 드러낸 것은 1991년에 열린 한일 슈퍼게임으로 특히 일본 투수들의 포크볼은 한국 선수들이 처음 보는 구종이었고 이 구종에 타자들은 맥을 못추었다. 1995, 1997년에도 일본과의 야구격차만이 확인 되었으나 더이상 한일 슈퍼리그는 열리지 않았고 이후 2005년 아시아 시리즈가 출범하며 다시 클럽 대항전이 열리게 되었다. 그러나 한국시리즈와 일본시리즈가 종료된후 한 겨울에 열린 대회였던 지라 선수의 부상등을 우려해 전력으로 경기를 펼치지 않아 큰 의미를 두기엔 어려웠다.
시즌 중에 베스트 멤버들이 참가해 펼쳐지는 축구클럽대항전인 아시아 챔피언스 리그 같은 대회가 열리지 않는 이상 프로팀의 100% 전력 맞대결은 사실상 볼수가 없는데 야구는 한달 내내 야구경기가 펼쳐지기 때문에[12] 사실상 보기가 힘들것이다.
5. 기타
5.1. 18세 이하 청소년 대표팀
- 2012년에는 1982년 서울에서 열린 야구 월드컵 이후, 30년만에 IBAF가 주관하는 국제 야구대회가 대한민국에서 개최되었다. 바로 제25회 IBAF 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였는데 이때도 한일전이 열렸다. 9월 6일에 벌어진 한일전에선 한국이 2:4로 패했다. 이감독이 대회 전에 일본 팀이 부정배트를 쓴다는 발언을 하며 신경전을 벌였으나 되려 역효과를 냈다는 평. 우승을 노리던 한국은 콜롬비아, 대만에게도 패하면서 결승 진출도 좌절되었고 5, 6위전으로 밀려났는데 웬걸. 일본도 미국, 콜롬비아, 대만에게 덜미를 잡히면서 결승행이 좌절되면서 5, 6위전으로 밀려나서 9월 8일 2번째 한일전을 치루게 됐다. 남은 건 자존심 대결이지만...한국이 가볍게 3:0으로 승리. 참고로 이날 한국의 선발은 이건욱이었고 일본의 선발은 오타니 쇼헤이였다. 자세한 내용은 대한민국 U-18 야구 국가대표팀/2012 문서 참조.
- 그 뒤, 1년만인 2015년 제27회 WBSC U-18 야구 월드컵에서는 정반대로 일본에게 0:12, 콜드게임으로 참패했다. 한국은 호주를 이기고 3위를 거두긴 했으나 7년만의 대회 우승 좌절도 그렇거니와 공교롭게도 한일전에서 콜드 게임패로 참패했기에 엄청나게 욕을 처먹었다. 그나마 처음으로 대회를 개최한 일본이 미국에게 밀려 2회 연속 준우승을 거둬 한국에서 통쾌해했다. 참고로 일본은 이 대회에서 준우승만 4번이며 한국은 5번 우승해봤다. 그나마도 이걸 아주 못했다고 욕할게 못되는 것이 2008년 우승 이후 최고 성적을 거둔게 이 대회다. 전날 미국에게 통한의 역전패를 당하지 않았다면 최소 준우승을 확보할 수 있었기에 더 아쉬운 대목이었다. 그러나, 오로지 한일전 콜드 게임 굴욕으로 인하여 욕을 펑펑 먹고 7년만에 거둔 4강 선전이 가려져버렸다.
- 2016년 아시아청소년야구대회에서 한일전이 펼쳐졌다. 김민의 호투가 있었지만 결국 수비에서 승부가 갈리며 3:1 아쉬운 패배를 기록했다. 이해 대회 우승은 일본 U-18 야구 국가대표팀이 차지했다.
- 2017년 9월 9일{한국시간으로는 9월 10일}, 캐나다의 온타리오주 썬더베이에서 열리는 WBSC U-18 야구 월드컵 슈퍼라운드 3번째 경기에서 일본을 6:4로 꺽고 미국과의 결승전을 치르게 되었다.
- 2017년 9월 9일{한국시간으로는 9월 10일}, 캐나다의 온타리오주 썬더베이에서 열리는 WBSC U-18 야구 월드컵 슈퍼라운드 3번째 경기에서 일본을 5:4로 꺾었다. 그 이후 일본은 호주에게 패한 뒤 5위가 확정되었고, 대한민국은 미국에게 패한 뒤 호주와 3,4위전을 하게 되었다
- 2019년 9월 6일에 열린 WBSC U-18 야구 월드컵 슈퍼라운드 2번째 경기에서 소형준의 역투와 8회에 나온 극적인 득점, 그리고 승부치기 까지는 접전 끝에 극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5.2. 리틀야구
- 2014 리틀야구 월드시리즈에서 한국 대표팀은 예선에서 일본을 4:2로 누르고 결선에 진출했고, 다시 만난 일본을 12:3으로 개박살낸 후, 결승전에서도 미국 대표팀을 8:4로 꺾고 우승한 후 그라운드에 태극기를 꽂았다. 29년만에 우승한 대표팀은 금의환향했다. 야! 신난다~
5.3. 여자야구
우선 일본과 한국에는 여자야구 리그들이 존재한다. 일본은 일본여자프로야구, 한국은 한국여자야구대회 및 토너먼트 대회들. 일본은 프로리그에 가깝게 연고지가 존재하고 유소년 야구팀을 운영할 계획을 발표하는 등 준프로야구에 가까운 반면 한국은 선수 이적등에 제약이 존재하며 스폰서를 받는 팀등이 있지만 실업리그와 사회인야구의 사이에 위치해 있다.[13]
대한민국 여자 야구 국가대표팀과 일본 여자 야구 국가대표팀간의 첫 맞대결은 2004년에 열렸다. 일본에서 열린 제4회 여자 야구 월드 시리즈(Women's Baseball World Series)경기였는데 이 경기에서 무려 '''0:53'''으로 5회 콜드게임 대패를 당했다. 하지만 도통 알려지지 않아서 한국에서도 일본 신문을 본 이들이 번역하여 올리면서 알려졌을 정도이다. 더불어 이 대회에 대하여 제대로 한국에서도 알려지지 못해 그저 여자야구 세계 선수권 대회로 국내 언론으로 작게 보도되었는데 여자야구 세계 선수권 대회는 아예 없었으며 Women's Baseball World Series는 미국 월드시리즈 이름을 본딴 여자 야구 이벤트였다가 2004년 일본에서 열린 4회 대회를 국제대회로 확장해서 치뤄진 거 뿐이다. 개최국 일본과 참가국 미국, 인도, 호주, 캐나다, 홍콩, 대만, 한국이 참가하여 한국은 홍콩,캐나다,일본과 경기를 벌여 콜드게임 3전전패에 6득점 93실점을 당했다.
하지만 알아둘 점은, 당시 한국 여자 국대선수가 없어서 한국팀으로 나간 팀은 '''비밀리에'''라는 여자야구 동호회팀이었다. 이 팀이 국대선수로 나갔으며 그마저도 달랑 10명이 겨우 넘는 수준으로 준비 및 훈련기간도 1주일 남짓했다. 이기긴 커녕 대회에 나갔다는 것으로도 대단한 거다. 경기 당시 되려 일본 관중들은 비웃긴 커녕 한국선수들에게 박수를 치며 격려했다고 한다. 참고로 이 경기 전에 가진 조예선 경기에서 여자 야구종목에 제법 강자인 캐나다에게 '''0:24'''로 콜드게임으로 진 건 그렇다쳐도 아시아 야구 최약체급인 홍콩에게도 '''6:16'''으로 콜드게임으로 지면서 수준 차를 실감해야 했다.
일본 언론도 제법 상세하게 보도하면서 그야말로 맨손의 야구가 좋아서 하는 한국 여인들, 그들을 크게 이겨도 자랑할게 아니며 그녀들이야말로 야구팬이라면 축하해줘야 하는 멋진 선수들이라고 일본 신문들이 찬사했기에 일본 관중들도 잘 알고 있었다.
이 대회가 치러지고 두달도 안돼 비로소 캐나다에서 치뤄진 제 1회 2004 IBAF 여자 야구 월드컵에서는 한국은 아예 나가지도 못했다. 그리고 4년 뒤 2008년 일본에서 열린 여자 월드컵대회에서 비밀리에팀이 아닌 한국 여자 야구 대표팀으로 다시 만나서 이번에는 '''11점차'''로 콜드게임으로 졌다. 그래도 4년전을 생각하면 정말 많이 선전했다.[14] 비록 2년 뒤 베네수엘라 대회에서 다시 만나 0-14로 일본에게 졌고 2015년 한국에서 열린 LG컵 국제 야구여자 대회에서 한국 여자 야구대표팀은 결승에 올랐으나 실업여자팀인 일본 아사히 트러스트팀에게 0-16으로 콜드 게임 참패해 준우승하는 등 부진한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2016년 부산 기장군에 위치한 기장-현대차 드림 볼파크에서 열린 제 6회 여자 야구 월드컵 4강에서 마주친 한국과 일본은 6:0으로 패배했지만, 역대 한일전에서 가장 적은 점수 차이를 기록하며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1] 대만과의 경기에도 관중석 상당수가 비어있는 모습이 허다할 정도인데 비해 대한국전이 열리는 날은 마치 일본 국민들 전부가 야구표를 산듯 인산인해에 빈자리가 없다.[2] 2007년 베이징올림픽 아시아 예선에서 한일전은 일본에서 평균25% 최고32%를 기록했다. 아직 라이벌 기믹이 완전히 자리잡기 전이다. 이때 한국은 17%였다..... 그리고 2009년 WBC 결승에서는 최고 시청률이 60%까지 올랐다. 일본매스컴과 관계자가 한일전에 과연 관심이 없을래야 없을 수가 없다.[3] 물론 현재도 미국을 상당히 의식하기는 하나 미국은 자국 프로리그 성적을 더 중시하는 까닭에 국가대항전은 거의 무시하는 수준이다보니 진검승부를 가리지 못하고 한국이 '예상외로' 강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면서 오히려 한일 대결이 더 흥행이 높게 나오고 있다.[4] 일본의 내로라하는 야구 원로들이 총출동해 훈수를 두는 자리까지 마련되었을 정도였다.[5] 다만 원로가 훈수를 두는 자리까지 마련한 것은 한국에 패한 것을 떠나 일본 야구 역사상 최악의 행보를 보인 것 때문이다. 2015 프리미어 12을 기준으로 하면 호시노 감독이 오타니 쇼헤이를 불펜 대기를 시키고 G.G 사토가 오재원의 타구를 놓쳐 경기를 완전히 말아먹은 것이다.[6] 게다가 시기 또한 생각해 보자. 1회 WBC부터 일본 대표팀은 대표로서 일본 국내에 큰 이미지를 심었다. 멤버 또한 초호화로 이른바 꿈의 팀(Dream Team)이다. 일본에서 야구가 얼마나 큰 이미지인지는 말하기가 피곤하고 대표팀이 1-2월에 훈련할 때도 4-5만명이 관람하러 운집한다고 한다. 그런데 이 시기가 2006년인데 한류 이미지나 한국에 대한 경제, 라이벌 심리 등이 딱 맞아 떨어진데다 아시아 최강을 자부하던 대표팀이 한 수 아래라 생각하던 팀에게 가끔씩 홈에서 지고 그 이후로도 계속되는 접전으로 이기니..[7] 게다가 나중에 가서 미화되지만 06년 오 사다하루, 09년 하라 타츠노리 감독은 당시 한국에만 졌다 하면 언론이 들들 볶는 정도가 아니라 말려 죽이는 정도다. 더구나 오 사다하루는 일본의 야구 대원로급인 인물인데 이런 사람에도 한국에게 졌다고 앙앙대는게 일본이다. 이런 스트레스가 커서 한번 정상에 오른 감독들은 다시는 대표팀을 안 맡으려 하는 케이스가 크다.[8] 2000 시드니 올림픽 본선 티켓이 걸린 대회. 대한민국 대표팀은 전원 프로 선수들로 구성되었으며 일본은 후루타 야츠야, 마쓰자카 다이스케등 일부 선수들(8명)만 프로 선수로 구성되었다.[9] 다만 사회인야구대표팀이라고 한국과 같은 수준으로 여겼다간 큰코 다친다. 일본은 사회인야구팀도 준프로급 실력을 갖춘 팀이 꽤 되므로 경기 수준이 높은 편이다. 특히 고시엔 대회라는 국가적인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학창시절부터 실력을 갈고닦았던 선수 출신들로 구성되었기에 만만하게 볼 수 없다.[10] 다만, 이전 경기들에서 좋은 모습을 보이지 못해 네티즌에게 좋은 평을 받지 못했다.[11] 올림픽 아시아예선에서 떨어진 뒤 프리미어 12 슈퍼라운드에서 대만에게 충격적인 패배를 당해 올림픽 진출이 불투명해졌지만, 멕시코를 이기면서 올림픽 티켓을 따내는 데 성공했다.[12] 한국은 매주 월요일이 휴식일, 일본은 일정에 따라 휴식일이 배정된다.[13] 단, 사회인 야구보다는 실력이 월등한게 남자 사회인 야구팀들과 맞붙으면 여자 야구팀이 이기는 경우가 많다. 사야이에서도 이 내용을 다룬 적이 있다.[14] 4년 전 콜드게임패를 안긴 홍콩을 15-5로 이기며 설욕은 했다. 참고로 여자야구 월드컵에선 일본이 여럿 우승(2014년까지 6번 열린 월드컵 대회에서 우승 4번, 준우승 2번이며 결승에서 캐나다와 호주를 10점차 콜드게임으로 이기고 우승했다. 미국에게는 2012,2014년 3-0으로 이기며 우승)할 정도로 일본여자야구는 세계 최강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