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뭐길래
야 대발아!!!
- 이병호(이순재)가 아들 이대발(최민수)을 부르던 대사.
1. 개요
MBC에서 1991년 11월 23일부터 1992년 5월 31일까지 방송된 주말 드라마다. 김수현 작가가 대본, 박철 PD가 연출을 맡았다. 참고로 방영 당시 맞춤법으로는 '뭐길래'가 아니라 '뭐기에'가 맞았지만, 2011년 한글 맞춤법이 개정되어 이젠 '뭐길래'도 표준어이다.
2. 상세
엄격한 자린고비 이병호 사장네 집안 아들 대발과, 평화적이고 민주적인 박창규 이사네 집안 첫째딸 지은이 결혼을 하면서 벌어지는 소동과 변화를 그려냈다. 동시에 이병호와 박창규의 아내인 여순자와 한심애는 사이가 좋지 않은 여고동창생인 까닭에 끊임없이 갈등을 빚기도 했다. 그런데 아내끼리는 이렇게 갈등을 빚는데도 남편끼리는 그와는 대조적으로 이병호 사장이 박창규 이사의 중학교 선배였기 때문에 서로 선배, 후배하며 별일없이 잘 지냈다. 이 드라마에서 이병호는 그야말로 거칠 것 없는 폭군인 셈. 그 밖에도 다양한 구성원들을 통해 종교 갈등, 가치관 갈등을 묘사했다. 매회 마지막 장면은 항상 몸개그와 함께 스탭롤이 올라가며 마무리되는 것도 특징.
인터넷 및 각종 여타 매체 등이 활성화 되지 않았던 당시[3] 의 기록으로, 지금과 같은 다매체 다채널 상황에서 저 시청률 기록을 깨는 건 어려워졌기 때문에 계속 기록을 유지할듯 하다. 특히 한 회 분 최고도 아니고 평균이 59%라면.최고 시청률 '''64.9%''' - 역대 2위[2]
평균 시청률 '''59.6%''' - 역대 1위
1990년대 후반 중국에 '''한국 드라마 역사상 최초로 수출'''되어, 중국 CCTV에서도 높은 인기리에 방영되었기 때문에 중화권 한류 드라마의 시초로 평가받기도 한다. 13명 중에 1명꼴로 봤다고 하니 대략 1억명이 시청한 셈. OST로 사용된 김국환의 타타타도 높은 인기를 얻었으며[4] 이 드라마에 협찬을 한 모 가구회사는 파산 직전의 위기에서 벗어났다는 이야기도 있다.
드라마의 인기 덕분에 1990년대 당시 텍스트유머의 산실이었던 PC통신 공설 유머게시판 등에선 대발이가 주연으로 나오는 일명 '대발이 시리즈'라는게 유행하기도 했다. 드라마는 본 적이 없어도 대발이 유머 시리즈는 아는 사람도 많았을 정도.[5]
여순자 역을 맡은 김혜자는 뛰어난 연기로 1992년 MBC 연기대상에서 대상을 받았으며, 이병호 역의 이순재는 이 드라마의 인기를 타고 국회의원에 출마해 당선되기도 했다.(...) 당시 지역 유권자들도 이순재의 캐릭터성에 취했는지 "자꾸 대발이 엄마를 구박하면 안찍겠다"(...)는 소리를 했더라는 신문 기사도 남아있다. 허나 이런 점이 부각되어 당시 따로 출마한 강부자의 라디오 출연이나 이주일의 출국과 비교, 여당 후보인 이순재의 출연이 특혜 아니냐는 논란도 있었다. 특히 극 후반 갈수록 "대발이 아버지"가 긍정적으로 묘사된 것에 대해서도 이를 의식한 것 아니냐는 비판이 있었다. 다만 본래 이런 류의 드라마에서 가부장적인 캐릭터는 마지막에 따뜻한 면을 보여주면서 끝나는 게 정석 중 하나긴 하다. 굳이 이런 전개를 비판하려면 꼭 정치적으로 해석하기보다는, 캐릭터의 성격 변화를 설득력있게 그리지 못했다는 비판이 더 적절할지도 모른다.
당시 일부 여성단체의 비판도 있었다. 비판 이유는 전통 예절을 강조하는 이순재와 아내를 아끼는 김세윤의 캐릭터와는 달리, 김혜자의 억압되어 삐뚤어진 모습이나 윤여정의 욕구불만적인 모습이 남성-여성을 긍정-부정으로 묘사했다는 것이었다. 특히 독선적인 남편에게 꿈쩍도 못하는 아내(김혜자)는 시대착오적이라는 비판. 하지만 이는 극중 이순재의 가부장적 모습이나 김세윤의 우유부단한 모습도 결코 긍정적이지만은 않았다는 점, 그리고 김혜자가 삐뚤어진 원인 자체가 대발 아버지 이순재의 억압 때문이라는 점은 고려하지 않은 지적이란 의견도 있었다.
또한 김혜자가 그렇게 꿈쩍도 못하는 묘사는, 그런 삶이 옳다는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극의 재미를 위한 설정이다. 코믹함을 강조하기 위해 대발이네 집의 가부장적이고 남녀차별적인 묘사가 자주 등장했고, 이게 지나치다는 지적도 많았던 것을 생각해보면 당시 여성단체의 지적을 무조건 무시할 수만은 없지만 이것은 작품이 전개되면서 보여주는 점진적인 변화를 생각해보면 섣부른 비판이기도 하다.
실제 초중반까지 엄격하고 꼬장꼬장하기만 하던 이순재가 김혜자에게 수고했다고 넌지시 말을 건내거나, 나라가 빚을 다 갚으면 같이 해외여행을 가자는 등, 점차 권위를 내려놓고 따뜻한 남편으로 변해가는 것이 이 작품의 볼거리 중 하나이기도 하다. 결국 대망의 마지막회, 부엌에는 얼씬도 안하던 이순재가 생전 처음으로 스스로 밥을 지으려다가 밥솥을 엎지르며 엔딩을 맞이하는 것으로 변화되어가는 가부장과 가족의 개념을 나타내려는 작가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드라마 이후 차기작으로 선택한 월화 미니시리즈 두 여자를 끝으로 김수현 작가는 MBC와 계약이 만료되면서 더 이상 MBC와 작업을 하지 않았다. 덕택에 잠깐 TBC에서 집필활동을 한 것을 빼면 30년 넘게 이어지던 김수현과 MBC의 관계는 끝이 났다는 게 중론이다.
2001년 MBC에서 방송된 주말 드라마 여우와 솜사탕이 이 드라마를 표절했다고 판정을 받아 해당 작가는 방송작가협회에서 제명되고, MBC는 김수현에게 4억원 가량을 배상해야 했다. 표절에 대한 분석과 쟁점은 딴지일보 기사1 아카이브, 기사2 아카이브 참고.
3. 등장인물
3.1. 대발이네 사람들
- 이대발 (최민수)
- 이병호 (이순재)
- 여순자 (김혜자)
대발의 여동생. 모델 지망생이며, 딸이라는 이유로 차별받고 있다. 때문에 더더욱 성공에 대한 열망이 강해서 순자의 지원으로 미스코리아에 도전하려다가 아버지에게 들켜 무산된 적이 있고, 또 몰래 CF모델을 하다가 들킨 후 집에서 나와 지은네 집에서 지내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 나중에는 포기하고 대학을 졸업하며, 자신의 결혼에 관한 결정만큼은 자신이 내리게 해 달라는 요구를 관철시킨다. 어머니 여순자가 가출했을 때에 저녁상을 지어올렸는데 이병호가 숟가락마다 돌을 씹는 바람에 실컷 면박만 받았다. 결말부에서는 정섭의 친구 민우와 사귄다.
3.2. 지은이네 사람들
- 박지은 (하희라)
- 박정은 (신애라)
- 박정섭 (김찬우)
- 박창규 (김세윤)
- 한심애 (윤여정)
- 시모 진숙 (여운계)
- 안양이모 선숙 (강부자)
- 미국이모 미숙 (사미자)
- 학준 (심양홍)
3.3. 기타 등장인물
- 한철진 (이재룡)
- 민우 (박세준)
심애와 순자의 친구들. 둘 사이에 갈등이 벌어지면 풀어주는 역할을 한다.
4. 스타덤
이 드라마에 출연한 많은 배우들이 스타덤에 오른 것은 물론이고, OST를 부른 김국환 역시 무명가수에서 단번에 인기가수로 뛰어올랐다. 또한 이 드라마에 출연한 다수의 배우들은 최소 2개 이상의 CF를 찍게 되고 연예와는 별로 상관이 없는 분야에서 성공하는 사람까지 발생했다. 이 드라마로 인한 그들의 성공사례를 보자면..
이 드라마의 인기로 이후 그는 배우로서 승승장구하게 된다.[19]
이 드라마의 인기를 등에 업고 국회의원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사랑이 뭐길래가 종영되던 해의 MBC 연기대상을 수상하고 최고의 배우 인증을 했다.
- 김세윤
이순재와 마찬가지로 이 드라마에서 얻은 인기를 등에 업고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하희라와 같은 케이스. 이 인기를 등에 업고 배우로 승승장구 했으며, 이후 사랑을 그대 품안에에서 만난 차인표와 결혼했다. 또한 하희라와 최수종의 비밀연애를 이계인과 같이 도움을 주었다.
하희라나 신애라와 같은 케이스로 이재룡은 이후 유호정과 결혼했다.
이 드라마로 인기를 얻고 캠퍼스드라마 '우리들의 천국' 2기에서도 주인공을 맡아 청춘스타로 크게 된다.
- 임채원
- 박세준
- 바로크가구[20]
법정 파산 일보 직전이던 바로크가구가 단지 이 드라마에 가구를 협찬해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법정 파산 위기에서 벗어나고 장사도 잘됐다는 말이 있다.
5. 캐스팅에 관해
- 하희라가 분한 박지은 역은 당초 최진실이 캐스팅됐었다. 그러나 최진실이 자기가 출연한 히트 영화 <나의 사랑 나의 신부>의 감독 이명세의 차기작 <첫사랑> 촬영 스케줄을 받아들여 고사하는 바람에 하희라가 대타로 들어갔다. 그런데 직후 <첫사랑>의 시나리오를 읽은 최진실은 극중 인물 성격에 강한 불만을 표시하여 사실상 하차하였고, 결국 이명세 감독은 최진실 대신 김혜수를 전격 캐스팅하게 된다.
- 배역 결정 당시 원래는 김혜선이 하희라의 남동생 역이었던 김찬우의 애인으로 낙점됐었다. 그러나 하희라와의 연기대결을 꺼려하여 고사하였다고 한다.
- 지은이네 가족들, 박지은역의 하희라, 박정은역의 신애라, 박정섭역의 김찬우 박지은 삼남매역할 배우 모두 1969년생으로 동갑이다
[1] 여담으로 사위가 영화 블레이드 시리즈의 주인공 웨슬리 스나입스이다.[2] 엄밀히 얘기하자면 1990년대 이전에도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던 드라마는 있었지만, 1990년 이전과 1990년 이후의 시청률 조사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1990년대 이전에 측정된 시청률은 신뢰성 문제로 인정하지 않는 것에 가깝다. 1990년 이전에는 전화설문조사 방식으로 시청률을 집계하던 시절이었으니..[3] 드라마 방영 당시엔 종합유선방송(케이블)도 없고 채널이라곤 지상파인 MBC, KBS1, KBS2, 교육방송 뿐이었는데, 교육방송을 빼면 실질적으로 3채널에 불과했다. 다만 방영 도중인 1991년 12월부터 수도권에서는 SBS가 추가되긴 했다.[4] "니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 한치 앞도 모두 몰라 다 안다면 재미없지~" 그때까지도 무명가수에 가까웠으나, 이 곡이 히트하면서 일약 트로트계의 스타로 부상하였다. "알고보니 은하철도 999 등 애니메이션 주제가를 많이 불렀던 가수"라는 게 알려진 것도 이 이후의 일.[5] 그중 몇몇은 이후 최불암 시리즈 등에서 같은 이야기에 캐릭터만 바꾼 버전으로 돌아다니기도 했다.[6] 장인과 첫 대면에서 이름을 말했더니, 장인의 시선이 아래로 가기도 했다. 다만 정확한 뜻을 한자로 풀이하면, 아마도 큰 대(大)에 필 발(發)인 것으로 알 수 있다.[7] 드라마 방영 당시 문구점에서는 대발의 모습이 그려져 있고 그 밑에 "남자는 하늘이야"라고 쓰여 있는 지우개를 팔기도 했고, 이걸 가지고 다니는 국딩들도 의외로 많았다.[8] 순자의 친구들이 이 이야기를 하면서, "순자가 그래서 더 미치겠는거야"라고 이해해주는 장면이 나온다[9] 당시에는 임경옥으로 활동했고, 나중에 임채원으로 개명했다. 참고로 유재석의 동기인 코미디언 최승경의 아내이다.[10] 여기서 이병호의 허당스러운 면이 드러나는데, 강도를 잡으려 방망이를 들고 슬슬 대발의 방으로 가다가 잠꼬대가 한층 더 심해지자 정작 방에 뛰어들어와 강도(사실은 대발)을 두들겨팬 사람은 여순자였다(...).[11] 감히 시아버지에게 그런 것을 제안한다고 경악하는 가족들은 덤이다.[12] 철진이 키스하려고 하면 괴상한 비명을 지르며 도망간다.[13] 방영 당시엔 굉장히 논란이 된 관계였다. 아무래도 가까운 인척 관계이다 보니 왠지 동성동본간 결혼을 연상시켜 그런지 반발이 컸다.(참고로 동성동본간 결혼 금지는 2005년에 폐지되었다.) 하지만 겹사돈이라는게 예전부터 존재해왔다는 신문 기사 등이 나오면서 사회적 인식이 제법 변화되었고, 이후 이 관계는 보고 또 보고에서는 대중들에게 받아들여지게 된다.[14] 진외종조부=아버지의 외삼촌.[15] 당시에도 부유하게 살던 친정언니 진숙이 도와주었으나, 선숙 스스로 지나친 도움은 거절했다고 한다.[16] 강부자는 실제로도 불교 신자이다.[17] 사미자는 당시 한 연예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게스트로 출연한 심신을 그냥 '심신 씨'라고 부르긴 밋밋하다며 '심신이 오빠'라고 부른다.[18] 당연하지만 최수종과의 결혼 성립에 이 작품이 영향을 준 것은 아니다. 최수종은 이 드라마 이전부터 하희라를 상대역으로 지명하는 등 호감을 표시하고 있었다. 이 당시에 신애라와 이계인의 도움으로 비밀연애를 할 수 있었다고 방송에서 고마움을 표현했다.[19] 일밤의 패러디 명작극장 '미워도 다시 한번' 편에 김혜자가 출연했을 때 어린 시절에 아빠에 의해 강제로 헤어진 아들 역으로 카메오 출연했다. 엄마가 보고싶다고 울먹거리던 연기가 일품이었다.[20] 1978년 설립. 당시의 사명은 청우기업으로 보루네오가구의 회장 위상식의 막내동생 위상돈 사장이 설립했으며 1980년대까지 전체 가구시장의 20% 이상을 차지하며 ‘위 씨 천하’, ‘3위 1체 시대’라는 유행어를 만들기도 했다. 이 세 형제는 1966년에 보루네오가구, 1973년 동서가구를 설립(위상균 회장)했으며 이 회사는 위씨 형제중 가장 마지막에 설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