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위 요구자/아시아/일본
1. 개요
본래는 왕위 요구자/아시아 문서의 하위 항목이었으나, 너무 길어져서 분리하였다. 본 문서는 일본의 왕위 요구자를 다룬다.
2. 주의할 점
아시아의 일본에는 쇼군이라는 특이한 통치자가 있었는데, 마지막 쇼군을 배출한 도쿠가와 가문 수장[1] 을 '일본국 왕위 요구자'로 인정하는 것에는 논란이 있다. 일본에는 진짜 군주인 천황이 따로 존재하기 때문이며 쇼군은 정이대장군(政夷大將軍)으로 직함상 국가총사령관이지 황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국내에서는 막부라고 번역하는 국가 형태는 영미권에서는 Shogunate(쇼군국)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일본을 통치하던 이들 위에는 명목상의 군주인 천황이 있었고, '쇼군'은 이름부터 장군이라는 뜻이다. 아시카가 요시미츠가 명나라로부터 "일본 국왕" 칭호를 받은 적은 있다. 하지만 무로마치 막부의 감합무역이 쇠퇴한 다음 들어선 막부에서는 왕호를 사용하지 않았다. 일본국에는 현재 일본국 천황이 있고, 누구도 천황에 맞서 왕위를 요구하지 않는다.
한편 일본어 위키백과에서는 쇼군과 네팔의 재상 라나같은 경우 실질적 군주로 취급되기 때문에 그 자손도 왕위 요구자와 비슷한 취급을 받는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이곳 나무위키에서도 쇼군을 포함한 일본 무사정권 지도자는 군주로 분류하기도 한다. 다만, 나무위키에서는 등재 기준을 정하는 토론에서, 에도 막부의 마지막 쇼군이 스스로 대정봉환을 통해 통치권을 천황에게 반납한 것이 등재 기준 중 '작위 보유자가 공식적으로 작위를 포기한 경우'에 해당한다고 결론지어졌으므로 도쿠가와 막부는 왕위 요구자 목록에 없다. 그리고 일본의 전직 피겨 스케이팅 선수 오다 노부나리가 자신이 오다 노부나가의 17대손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2] , 오다 노부나리 항목에 들어가봐도 알 수 있겠지만 여러 정황상 그저 자칭 후손에 불과할 가능성이 높으므로 그는 오다 정권 수장직과 오와리국 다이묘직의 요구자로 간주되지 않는다.
3. 등재 기준
이 문서는 상위 문서인 왕위 요구자의 정의에 따른 일본 지역의 현재 왕위 요구자들을 나열한 목록 문서이다.
- 해당 국가가 현재까지 존재하거나,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적법한 근거를 가지고 해당 작위를 주장한 사례가 있었던 경우
- 혈통을 통해 세습되는 왕위나 작위와 같이 만약 해당 정권이 존속했다면 해당 정권의 주권을 이어받을 수 있는 누군가를 특정할 수 있는 경우에 해당하는 경우에만 등재하며, 계승권을 실제로 주장하는지 아닌지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 작위 이외에 영토에 대한 권리 주장
- 작위 소유자가 공식적으로 해당 작위를 포기, 또는 해체한 경우
- 식민국가나 피정복국가가 독립하고, 상대국이 해당 국가를 인정한 경우에 해당하면 등재하지 않는다. 토론 합의
4. 현재 왕위 요구자 목록
4.1. 데와 요네자와 번주
지금의 야마가타현 요네자와시 일대에 있었던 요네자와번은 우에스기 겐신의 조카이자 양자인 우에스기 카게카츠가 초대 번주였으며, 이후 그의 후손들이 대대로 다스렸다. 요네자와 우에스기 가문은 무진전쟁 때 에도 막부를 지지하여 막부파가 되었다가 막부파의 패배로 인해 요네자와의 통치권을 잃고 화족에 편입되었으며, 훗날 1947년에 화족 제도가 폐지됨에 따라 명목상의 지배계급 지위마저 상실하였다. 요네자와 우에스기 가문의 현 당주는 우에스기 쿠니노리인데, 그는 우주공학자였다가 2006년 정년 은퇴했으며, 우에스기 가문과 관련한 학술대회나 각종 행사에도 참석하고 있다고 한다.
4.2. 도요토미 정권 수장
도요토미 히데요시 가문의 당주인 기노시타 무네토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방계 후손인데, 오사카 전투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손자인 도요토미 쿠니마츠가 어린 나이에 에도 막부에 의해 참수형에 처해지면서 도요토미 가문의 직계 혈통이 단절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방계 후손들은 메이지 유신으로 에도 막부가 무너지기 전까지 자신들의 혈통을 대놓고 밝히는 일이 없었으며 더 나아가 도요토미라는 성을 쓰는 일도 없었다. 이 때문에 쿠니마츠 사후 도요토미 히데요시 가문의 역대 당주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원래 성이었던 기노시타라는 성을 쓰게 되었으며, 오늘날 도요토미라는 성을 쓰는 일본인들은 혈통상 전국시대와 에도 시대의 도요토미 가문과 무관하다. 사실 도요토미 가문이 이미 힘을 잃은 데다, 다이묘들은 몰라도 민중들 사이에서는 도요토미 세력에 대한 지지가 꽤 있는 편이어서, 에도 막부는 성씨를 바꾸고 숨어버린 도요토미 가문 방계 후손들에 대해서는 모른 척하고 구태여 숙청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는 조선이 창건 직후에는 고려의 왕가였던 개성 왕씨를 대거 숙청하다가, 이후 민중들 사이에서 고려에 대한 향수가 없어진 뒤에는 왕씨임이 드러나도 그냥 모른 척하거나 고려의 왕릉들을 보존하는 능참봉으로 기용하는 등 개성 왕씨에 대해 유화적으로 대한 것과도 같다.
4.3. 류큐 국왕
만국진량(萬國津梁)으로서 번영을 누려 오던 류큐 왕국은 1872년 일본 제국에 의해 '류큐 번'으로 강등되었으며, 1879년에는 오키나와현을 설치해 류큐 왕국은 멸망했다. 류큐 왕국의 왕은 삼산시대 이래로 명·청으로부터 유구국 중산왕의 칭호를 책봉 받아 썼다. 일본이 일방적으로 합병을 선언하고 류큐 번을 설치한 뒤 일본에서는 류큐 번왕의 칭호를 내렸지만 류큐 왕국은 계속 유구국 중산왕 칭호를 사용하며 청과 교류하였다. 류큐 번 폐지와 오키나와 현 설치 이후 류큐의 마지막 군주인 쇼타이(尚泰)는 왕위에서 강제로 퇴위돼 도쿄로 강제이주되고, 1885년 후작에 봉해졌다. 두 아들은 남작위를 받았으며, 장남이 후작위를 계승했다. 쇼타이의 차남 쇼인(尚寅) 남작과 사남 쇼준(尚順) 남작은 일본의 오키나와 지배를 인정하는 대신 자치 형태로 쇼 씨 일가를 지배자로 복귀시키는 복번 운동을 벌였으나 일본 정부는 당연히 이를 거부하였다. 이후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전하고 현 일본국 헌법이 발효되면서 귀족 작위는 폐지되었다.
현 왕위 요구자 쇼 마모루(尚衞)는 쇼타이의 현손자로 1996년부터 왕위를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류큐 독립이 이뤄질 가능성도 희박하고 현 일본 내에서 황족 외에는 임명되지 않는 왕으로 책봉해줄 가능성도 거의 없다. 그보다 낮은 오등작 역시 현행 헌법 제정 후 폐지되었는데 오직 쇼 마모루만을 위해 예외적으로 부활시켜 줄 가능성도 제로에 수렴한다.[4] 그리고 그나마 있는 소수의 류큐 독립 운동 참여자들은 대개 류큐 공화국 건국을 추구하고 있다. 따라서 어떤 식으로든 쇼 마모루가 왕위를 되찾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5]
4.4. 무츠 센다이 번주
다테 마사무네는 지금의 미야기현 센다이시에 있었던 센다이번의 초대 번주였다. 센다이 다테 가문의 현 당주는 다테 마사무네의 직계 후손인 다테 야스무네다.
4.5. 비젠 오카야마 번주
우키타 히데이에는 세키가하라 전투에 서군 다이묘로 참전했다가 서군이 패하는 바람에 결국 비젠 오카야마 번주직을 박탈당하고 하치죠지마로 유배되었다. 우키타 가문의 현 당주는 우키타 히데이에의 후손인 우키타 후지오다.
4.6. 사쓰마 번주
사쓰마 시마즈 가문은 전국시대 및 에도 시대의 다이묘 가문으로서도, 일본 제국 화족 가문으로서도 모두 명성을 떨친 명문가다. 사쓰마 시마즈 가문의 현 당주인 시마즈 노부히사는 조상인 27대 당주 시마즈 나리아키를 모시는 테루쿠니 신사에서 궁사(최고 신관)로 일하고 있다.
4.7. 쓰시마 후추 번주
현 쓰시마 섬의 번주위 요구자인 소 타츠히토는 그 유명한 덕혜옹주의 남편인 소 다케유키 백작의 아들이며[6] , 1871년에 폐번치현으로 쓰시마 후추 번주 직위가 폐지되고 1947년에 화족 작위가 모두 폐지되었음에도 소씨 가문이 명목상의 쓰시마 후추 번주 칭호를 공식적으로 포기하지 않아서, 2020년 현재까지 명목상의 번주를 자칭하고 있다.
4.8. 아마쿠사 번주
아마쿠사 번주였던 고니시 유키나가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자신이 속한 서군이 패하는 바람에 결국 참수형에 처해졌으며, 고니시 가문의 다른 사람들도 죄다 죽임을 당하여 일부만 살아남으면서 결국 고니시 유키나가의 직계 혈통은 단절되었다. 그로 인해 고니시 가문의 그나마 남은 생존자들은 아마쿠사 번주직 계승권마저 박탈당한 채 몰래 숨어서 지내는 신세가 되었다. 아마쿠사 고니시 가문의 현 당주 고니시 다카노리는 그렇게 몰래 숨어서 지내던 고니시 가문 생존자들의 후손이며, 당연히 고니시 유키나가의 방계 후손이다.
4.9. 오다 정권 수장
오와리 오다 가문의 현 수장은 오다 노부나가의 차남 오다 노부카츠의 후손인 오다 노부타카#s-2다. 그는 오다 노부나가의 삼남과 동명이인이기도 하다. 오다 노부나리는 상술한 것처럼 오다 노부나가와는 성씨만 같고 혈통상으로는 전혀 무관할 가능성이 높으므로 오다 정권의 수장직 요구자로 간주되지 않는다.
4.10. 일본 세습친왕
본래 일본의 구 황실전범에 따르면, 천황직을 계승한 자를 빼면 어떤 천황의 5대손까지는 친왕/내친왕(각각 남, 녀에게 붙이는 칭호)의 작위를 받고[7] , 그 이후에는 왕/여왕의 칭호를 받으며, 왕/여왕에서 분가를 하게 되면 신적강하/황적이탈하게 되어 황족 신분을 잃게 된다.[8] 그러나 일부 친왕 계통의 경우에는 직계가 단절되는 경우 등을 대비하여, 몇 대를 세습하여 내려가더라도 친왕 지위를 잃지 않게 했는데 이들이 바로 '''세습친왕가'''들이다. 그러나 현재 일본에는 세습친왕가 직위가 존재하지 않는데, 2차대전 패전 이후 1947년에 미군정이 강제로 이들을 황적이탈시키고 세습친왕가를 폐지했기 때문이다.[9] 본래 세습친왕가들은 이보다 더 많이 존재하였으나, 여기에 왕위 요구자로 올라가 있는 계통 및 후술할 카야노미야·히가시쿠니노미야 계통을 제외하고는 모두 가문이 끊겨 단절된 경우에 속한다. 이하의 내용은 모두 일본 황실 문서를 기초로 하여 적었다.
아직 가문을 유지하고 있는 구 세습친왕가 중 하나에는 '''카야노미야 계통과 히가시쿠니노미야 계통'''도 존재하지만, 세습친왕가들의 지위가 박탈될 때 당시 히가시쿠니노미야 계통의 당주였던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는 오히려 신적강하에 찬동했고 다른 세습친왕가들의 황족 지위 박탈에 협력했으며, 카야노미야 계통도 당주였던 츠네노리(恒憲)가 구 황족들이 신적강하되기 직전에 신적강하를 자청했기 때문에, 나무위키의 '왕위 요구자' 등재 기준에서 '작위 보유자가 스스로 작위를 포기한 경우'에 해당한 경우로 간주하여 왕위 요구자 리스트에 등재하지 않았다. 물론 이후에 그의 후손들이 다시금 친왕위를 요구하면 당연히 이 항목에 등재할 수 있다.
4.11. 조자이 번주
조자이 번의 마지막 번주인 하야시 타다타카는 일본 역사상 마지막으로 개역당한 다이묘로 유명하다. 그는 보신 전쟁 당시 메이지 신정부에 맞서 싸우기 위해 탈번(자신의 번에서 이탈)하였는데, 이는 에도 시대 기준으로 사형에 처해질 만큼 무거운 죄였지만, 번주가 탈번을 하는 전례 없는 상황에다가 에도 시대 말기와 일본 제국 초기의 혼란기라서 결과적으로는 개역만 당하는 정도에 그쳤다. 그는 말년에 둘째 딸의 아파트에서 살다가 세상을 떠났는데, 그로 인해 아파트에서 살아본 처음이자 마지막 다이묘라는 타이틀까지 얻었다.
4.12. 키이 토바 번주
지금의 미에현 토바시에 있었던 토바번은 구키 요시타카의 아들 구키 모리타카가 초대 번주였다. 토바 구키 가문의 현 당주는 구키 다카쿠니다.
4.13. 히고 구마모토 번주
호소카와 가문은 개역되어 평민으로 전락한 가토 가문을 대신하여 구마모토번의 새로운 번주 가문이 되었다. 현 당주 호소카와 모리히로는 일본의 전직 총리이기도 하기 때문에 구마모토 호소카와 가문은 단순히 옛 명문가 정도에 그친 게 아니라 현재진행형으로 명문가 지위를 유지하는 셈이다.
[1] 현 도쿠가와 가문 수장은 도쿠가와 츠네나리이다.[2] 정확히는 그의 증조할아버지 세대부터 대대로 오다 노부나가의 후손을 자칭했다.[3] 에도 막부는 도요토미 가문을 멸문시키고 오사카 성주직을 폐지한 후 오사카를 막부의 직할지로 만들었다.[4] 어차피 구 일본 제국의 오등작 제도를 그대로 부활시키는 것이라면 쇼씨 왕가의 숙원을 달성할 수 없다. 구 일본 제국의 오등작은 봉토가 없는 작위이기 때문에 쇼 마모루가 쇼타이처럼 후작에 봉해져도 류큐 지역의 명목상 지배자로 군림할 수 없다. 과거에 쇼인 남작과 쇼준 남작이 괜히 복번 운동을 한 게 아니다.[5] 쇼 마모루 본인도 이런 현실을 알고 있는지, 류큐 왕실 소유의 유물과 유적지의 대부분을 일본 정부와 오키나와현 현청에 기증했다.[6] 다만, 덕혜옹주의 아들은 아니다. 소 다케유키 본인은 조현병으로 투병 중인 덕혜옹주를 20년이나 헌신적으로 간호하다가 지친 나머지 1955년에 별 수 없이 합의이혼했지만, 후사를 이을 아들을 낳아야 하는 책임 때문에 부득이하게 재혼을 했고, 소 타츠히토는 이 후처의 자식이다.[7] 2차대전 이후의 현 황실전범에서는 2대손 까지만 친왕 칭호를 받을 수 있다.[8] 이러한 제도는 동양식 황제국 체제에서, "왕은 황제에 의해 책봉받는 존재"라는 개념을 도입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도 형식적으로는 황제로부터 조선 왕의 칭호를 받아 임명된 존재이다. 그리고 중국의 황실에서도 황제가 되지 않은 황족들에게 왕이나 친왕의 자리를 내린 바 있다. 그 예시로 팔왕의 난 시기 황위를 두고 싸운 사마씨들이 모두 왕의 지위를 받은 황족이었으며, 청나라 초기의 예친왕 아이신기오로 도르곤이나 청나라 말기의 공친왕 등이 바로 친왕에 속한다.[9] 전쟁범죄에 관여한 전과 때문이라고 오해를 받지만, 사실이 아니다. 사실 미군정은 전범으로 기소된 황족들만 지위를 박탈하려고 했는데, 히가시쿠니노미야 친왕가의 당주인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가 모든 친왕가의 작위를 박탈해달라고 요구하여, 세습친왕가 전체가 신적강하되었다, 물론 카야노미야 친왕가의 당주인 츠네노리와 같이 스스로 신적강하를 자청한 경우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