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표/선수 경력

 




1. 클럽 경력



1.1. 안양 LG 치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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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건국대학교를 졸업하고 이후 안양 LG 치타스에 입단했다. 2000년 리그우승과 2001년 수퍼컵 우승을 이끌었다. 월드컵 종료 후 한 달 후 벌어진 2002년 K리그 올스타전에서 올스타전 최초로 자책골을 기록했다.
이임생 선수에게 경기 중 폭행당한 것도 이때다.(2002년 7월)

1.2. PSV 에인트호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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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경기(105) 1골 13도움'''

2002년 8월부터 거스 히딩크 감독네덜란드 에레디비시의 명문팀 PSV 에인트호번으로 복귀하게 되는데, 히딩크 감독은 박지성과 함께 이영표를 네덜란드로 데려간다.[1] 2003년 시즌이 끝나자마자 완전 이적을 하였다. 이적하자마자 맹활약. 2004년에는 에레디비시 베스트 11에 선정되는 기염을 토한다. 2006 월드컵 당시 BBC에서 선정한 세계 수비수 8위에 오르기도 했다. PSV의 리그 우승과 챔피언스 리그 4강을 견인하는 등 박지성과 함께 맹활약한다. 특히 ac밀란과의 챔스 4강 2차전에서 측면에서 카푸를 재끼고 크로스를 올려 어시스트를 기록한것이 압권. 04-05 시즌 공식전 '''4425분'''을 출장하며 당시 팀에서 출전시간 1위를 기록하는 등 팀의 에이스급 역할을 했다.[2] 이영표는 또 2004년 10월 24일 아약스와의 리그 경기에서 헛다리 짚기로 파고든후 중거리 슈팅으로 데뷔골을 신고했다. 이후 잉글랜드, 이탈리아, 스페인 등 여러 상위리그에서 이영표에게 러브콜을 보낸다.
'''2002/03 시즌: 15경기(선발 14경기)'''
에레디비시: 15경기(14)
'''2003/04 시즌: 45경기(선발 44경기) 3도움'''
에레디비시: 32경기 3도움
챔피언스리그: 6경기
유로파리그: 6경기(5)
슈퍼컵: 1경기
'''2004/05 시즌: 46경기 1골 10도움'''
에레디비시: 31경기 1골 9도움
챔피언스리그: 12경기 1도움
챔피언스리그 예선: 2경기
KNVB: 1경기

1.3. 토트넘 홋스퍼 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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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경기(91) 1도움'''

2005년박지성잉글리시 프리미어 리그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로 진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영표도 같은 리그의 토트넘 홋스퍼 FC에 입단했으며 팀내 연봉 5위 수준.[3]
초기에는 뛰어난 기량과 과감한 오버래핑으로 토트넘의 주축으로 자리잡았으나 수비능력에서 혼란을 겪은 적이 있었다.[4] 2번째 시즌초부터 베누아 아수 에코토에게 주전 자리를 빼앗겨 4개월 동안 벤치멤버로 전락하였으나 에코토는 겨울에 열린 아스날전에서 상대 공격수들에게 유린당하며 멘탈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였고 결국 이 경기 후반 이영표로 교체되었다. 이영표는 그 경기에서 전과는 달라진 수비능력을 보여주면서 스카이스포츠로부터 "IMPROVED" 라는 호평을 받으며 이후 주전자리를 공고하게 지켜냈다.
하지만 이영표의 공격 능력 부족은 고질적인 문제점이었다. 원래 크로스 킥력이 부족하고 정확도가 낮아서 드리블 돌파 후 이어지는 낮고 빠른 크로스라면 몰라도 상대를 제치면서 올리는 높은 크로스는 위협적인 경우가 많지 않았다. 높은 크로스는 EPL은커녕 K리그에서도 좋지 못했다.(일명 아리랑 크로스. 또는 '''두둥실''' 크로스) 가장 큰 문제점은 왼쪽 윙백이면서도 왼발로 크로스를 못 올렸다는 점이다. 네덜란드 리그에서 뛸 때는 분명 왼발로도 크로스를 올린 적도 적지 않은데, EPL로 가면서 갑자기 그런 모습이 사라졌다. 오버래핑 후에 왼발로 바로 크로스를 올리지 못하고 뒤로 방향을 바꾼 다음에 오른발로 크로스를 올리니 공격템포가 죽고 성공할 리가 없었다. 상대방 수비수골키퍼 사이 공간으로 크로스를 못 올리니 이영표의 오버래핑 공격은 성공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그를 데려온 마틴 욜 감독 시기까진 어떻게든 경쟁이 가능했으나, 2007/08 시즌 도중에 후안데 라모스 감독이 부임하면서 완전히 전력 외로 낙인찍힌다. 토트넘 부임 이전 세비야에서 다니엘 알베스라는 세계 최고의 공격형 풀백과 함께한 라모스 감독에게 이영표는 성에 차지 않았다.
'''2005/06 시즌: 32경기 1도움'''
프리미어리그: 31경기 1도움
리그컵: 1경기
'''2006/07 시즌: 31경기(선발 30경기)'''
프리미어리그: 21경기(20)
유로파리그: 4경기
FA컵: 5경기
리그컵: 1경기
'''2007/08 시즌: 30경기(선발 29경기)'''
프리미어리그: 18경기(17)
유로파리그: 6경기
FA컵: 2경기
리그컵: 4경기

1.4.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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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은 당시 도르트문트 감독 위르겐 클롭, 왼쪽은 현재까지 도르트문트 단장직을 맡고 있는 미하엘 초르크.

결국 장기 부상 당한 주전 레프트백 데데의 대체자를 찾던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로 이적하게 된다.[5] 2008/09 시즌 초반에는 도르트문트에서 꾸준히 출전했고 1년 재계약에도[6] 성공했지만, 뛰어난 공격가담 능력을 가진 부주장 데데가 복귀하여 팀내 입지가 흔들리고[7] 본인도 다음 해에 월드컵이 있는 만큼, 꾸준히 경기 출장을 할 수 있는 팀을 찾았기 때문에 결국 사우디아라비아알 힐랄 FC로 이적했다.

1.5. 알 힐랄 FC


클래스가 훨씬 낮은 사우디리그에선 축구를 가르쳤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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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2월 16일에 벌어진 FA컵인 크라운 프린스컵 8강전 알 아흘리 경기에서 승부차기 키커로 나와 득점에 실패했다.[9] 다행히 골키퍼의 활약으로 겨우 4:3으로 팀이 4강에는 진출했다. 그리고 팀의 크라운 프린스컵 결승 경기에서도 활약하며 팀은 대회 우승했다. 그 당시 결승이 이교도는 들어갈 수 없는 메카에서 치러지는 거여서 이영표를 포함하여 알 힐랄의 외국인 선수들이 참가를 못할 뻔 했으나 왕자의 중재로 들어갈 수 있었다고 한다. 어쩌면 메카에 들어간 최초의 한국인 이교도일지도 모른다.[10]

1.6. 밴쿠버 화이트캡스 FC



2011년 6월, 알 힐랄과의 계약만료 이후 알 힐랄과 재계약하지 않고 거취를 고민하다가 12월 6일 미국프로축구(MLS) 밴쿠버 화이트캡스 FC와 1+1 계약을 확정짓고 새로운 거처를 마련하였다. 자녀들의 교육 문제와 장래 지도자로의 변신을 위한 선택이었다는 입장을 밝혔다. 물론 자신의 트위터에 '''티켓 필요한 밴쿠버 유학생들 연락달라'''며 새 팀에 대한 기대를 숨기지 않았다. #
2012년 4월 29일에는 7년 만에 리그 경기에서 골을 넣었다. 프리킥 골이다.
2012년 7월 20일에는 대한민국 기준 나이 36세였음에도 불구하고 '''북미 프로축구 리그(MLS) 전 경기 풀타임 연속 출전 기록을 달성했다'''.[11] 그야말로 이영표 선수의 몸관리 능력이 얼마나 뛰어난지를 방증한다. 대한민국의 하비에르 사네티라 불러도 부족함이 없다.

1.7. 현역 은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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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0월 27일 은퇴 경기에서 주장 완장을 차고...
2013년 10월, 현역에서 은퇴한다고 공식 발표됐다. 그리고 2013년 10월 28일, 공식 은퇴전을 치렀으며 이 경기에서 주장 밴드를 차고 나와 90분을 소화한 뒤에 추가시간에 교체되어 나왔다. 교체사인 뜨자마자 박수 쳐주는 피치 위의 동료들과 한번씩 포옹한 뒤 마지막에 교체선수와 포옹하면서 피치 위에서 완전히 내려왔다. 그리고 2013년 11월 15일, 스위스와의 A매치에서 현역 은퇴식을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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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잘 보자, 이영표 선수가 뛰었던 안양 LG 치타스, PSV 에인트호번, 토트넘 홋스퍼 FC,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알 힐랄, 밴쿠버 화이트캡스 FC엠블럼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엠블럼이 이영표 선수의 얼굴과 나란히 실려있다.
이어서 건국대 홍보모델이 됐다.은퇴 이후 후배 선수들의 권익 보호를 위해 앞장서고 있다. 해당기사

2. 국가대표 경력



2.1. 대한민국 U-23 축구 국가대표팀



2.1.1. 2000 시드니 올림픽


본래 주목받는 선수는 아니었으나, 허정무 감독이 이끄는 올림픽 대표팀과 이영표가 재학중이던 건국대학교 간의 연습경기에서 허정무의 눈에 들어 올림픽 대표팀에 승선했다. 당시 포지션은 3-4-3 포메이션의 왼쪽 미드필더.
올림픽 대표팀에서는 오른쪽에서 영리한 플레이로 주가를 높이던 박진섭과 쌍으로 묶여 ‘좌영표 우진섭’으로 명성을 날렸으며, 이때의 활약을 바탕으로 국가대표에도 발탁되는 영예를 누린다.[12] 당시에는 올림픽 대표팀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성인 국가대표팀에 전격 발탁되는 선수들이 대거 등장했는데, 이때 이영표와 같이 선수들 중 설기현, 이천수, 박지성 등은 훗날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을 떠받치는 기둥으로 자리잡는다.

2.1.2.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2002 부산 아시안 게임에 이운재김영철과 함께 와일드카드로 선발되었다.
대한민국은 준결승인 이란전에서 승부차기까지 갔을 때, 이영표가 찬 공은 아쉽게 골대를 맞았다.[13] 이 한 번의 실축으로 대한민국이란에 패해 3-4위전으로 밀려났고, 울산에서 열린 3-4위전에서 태국을 이기고 동메달을 수상했다. 이 실축 때문에, 월드컵 탈락 한풀이를 하러 온 이동국은 시즌 후 빼도박도 못하고 군대 확정.

2.2.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2.2.1. 2000 AFC 아시안컵 레바논


올림픽 대표팀을 맡고 있던 허정무 감독의 눈에 들어 1999년 6월 12일 코리아컵 국제축구대회[14]에서 A매치 데뷔전을 치룬다. 예나 지금이나 대표팀 선수 대다수가 어려서부터 재능을 인정받고 U-17, U-20, 올림픽 팀(U-23)을 차례로 거쳐 대표팀에 뽑히는 엘리트 코스를 밟는 것에 비하자면 이영표는 대기만성형으로 또래들에 비해 다소 늦게 주목받은 경우다.[15][16][17]
이 시절 이영표는 윙백이 아닌 윙어로서 공격력이 상당해 득점도 곧 잘 기록했다. 특히 중국에게 강했는데, 중국 대표팀과 평가전에서 결승골을 넣었고, 레바논 아시안컵에서도 중국을 상대로 선제골을 넣었다.

2.2.2.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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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한일 월드컵 조별리그 3경기 포르투갈에서 루이스 피구를 막아내는 이영표
그리고 히딩크 감독의 지옥훈련도 무난히 통과하여 월드컵 대표팀에도 승선했다.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에선 쓰리백을 사용한 대표팀의 왼쪽 측면 미드필더로 나서 대회 기간 내내 맹활약했다.[18] 특히 예선 3차전에서 루이스 피구가 이끌던 포르투갈 대표팀을 좌영표-우종국의 미칠 듯한 콤비네이션으로 도륙내 버렸다. 이영표의 크로스를 받은 박지성의 환상적인 결승골로 기억되는 그 날의 경기는 대한민국 축구 팬들에게 영원히 잊을수 없는 추억이다. 뿐만 아니라 16강전인 이탈리아전에서 안정환의 헤딩 골든 골 어시스트를 기록했다. 이 대회에서만 '''결승골''' 도움 2개를 기록한 것.
8강 스페인전에서는 김남일의 부상으로 인한 빠른 교체 이후 이을용과 함께 수비에 집중했으나 호아킨 산체스에게 상당히 고전했다. 비단 두 선수뿐 아니라 당일 한국 대표팀 모두가 체력적 부담, 실력의 차이, 부상으로 인한 악재 등이 겹쳐 스페인에게 거의 뚜들겨 맞다시피 했다.
4강 독일전에서는 공수양면으로 좋은 모습을 보이긴 했으나 장신의 독일 수비진에 큰 영향을 주진 못했고 발락에게 결승골을 내주고 탈락했다.
터키와의 3ㆍ4위전에도 선발출전하여 4위로 대회를 마감한다.

2.2.3. 2006 FIFA 월드컵 독일


2006 독일 월드컵 명단에 당연히 포함되었으나 팀은 1승 1무 1패, 조 3위로 16강 진출에 실패했다. 오른쪽 풀백, 윙백 자리에서 뛰었고 프랑스전에서 뻥 크로스를 한번 보여주었다.

2.2.4.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 공화국


2008년 11월 20일 사우디아라비아전에서 차범근, 홍명보, 황선홍, 유상철, 김태영, 이운재에 이어 FIFA 센추리 클럽에 가입했다.
그의 경기력과 신상에 전혀 문제가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남아공 월드컵에 출전했고, 4경기 모두 풀타임으로 뛰며 풀백으로서의 능력을 아낌없이 보여줬다. 단적인 예로 4-1로 대패한 아르헨티나 전은 이영표-박지성의 좌측 라인은 정상적으로 가동되어서 공격을 잘 막아냈지만 반대쪽 라인이 숭숭 뚫리면서 실점이 전부 우측에서 터졌다.

2.2.5. 2011 AFC 아시안컵 카타르


2011년 AFC 아시안컵에 국가대표로 출전했고, 3ㆍ4위전까지 6경기를 모두 뛰었다. 마지막까지 대한민국 최고 풀백으로서의 능력을 보여주었고, A매치 127경기 출장[19]라는 기록을 남긴 채 박지성과 함께 태극마크를 반납했다.
[1] 이 때 박지성은 정식 입단으로 3년 계약을 체결했으나, 이영표는 6개월 임대 후 완전 이적 계약 여부 결정이었다. 때문에 이영표는 당시를 회상하며 매우 절박한 심정이었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2] 보통 체력안배가 많이 필요하지는 않은 골키퍼들이 출전시간 1위를 차지하고 3000분대 중후반 정도를 뛴다. 그걸 훌쩍 뛰어넘는 수준으로 경기에 나온 것.[3] #[4] EPL은 에레디비지보다 수준이 훨씬 높다. 특히 킥이 발달한 EPL에서 크로스를 허용한다는 것은 상당히 위협적인 일이기에 수비수는 상대방이 크로스를 올리지 못하도록 최대한 노력해야 한다. 반면 네덜란드 리그는 크로스를 올려도 별로 위협적인 크로스가 드물기에 수비수들이 적극적으로 막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이영표는 네덜란드 리그에서 하던 것처럼 상대방이 크로스 올리는 것을 멀뚱멀뚱 바라보기만 하였다.[5] 클롭이 마인츠 감독 시절에 차두리가 마인츠에서 선수로 뛴 적이 있는데 이 때 인연이 되어 차두리에게 이영표에 대해 물어보았다고 한다. 이후, 클롭은 시간이 흘러 지동원을 영입할 때도 차두리에게 먼저 물어보았다고 한다.[6] 데데가 다음 시즌을 끝마치고 브라질로 복귀하겠다고 밝혔던지라 구단측은 2년 재계약을 제안했으나 이영표 측에서 1년 재계약을 원했다.[7]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데데는 여전히 부상에 자주 시달리게 되었고 결국 유망주인 마르셀 슈멜처에게 주전 경쟁에서 밀리게 된다. [8] 사우디아라비아 선수들에게 지적했던 많은 문제점들이 2018년 러시아 월드컵 지금까지도 고쳐지지 않고 있다고 한다.[9] 승부차기를 잘 못 찬다. 2002 부산 아시안 게임에서도 4강 이란전 마지막 키커로 나갔다가 실축해 금메달을 날리고 이동국군대로 보내버린 바 있다. 일명 이동국 군대가라슛![10] 사실 종교를 판단할 방법이 마땅치 않아 옷만 비슷하게 차려입고 무슬림 행세를 하면 이교도라도 들어갈 수는 있다고 한다.[11] 7월 20일 기준 21경기 연속 풀타임 출장.[12] 박진섭 역시 이영표와 함께 국가대표에 승선하였으나, 피지컬의 부족으로 인해 히딩크감독 부임 후 국가대표에 승선되지 못한다.[13] 일명 이동국 군대가라 슛....[14] 여담으로 이 대회가 1970년대에 박스컵에서부터 이어졌던 코리아컵 국제축구대회의 마지막 대회였다. 당시 참가팀은 대한민국을 제외하면 멕시코, 이집트, 크로아티아. 우승은 1년 전의 돌풍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크로아티아가 차지했다.[15] 잘 모르겠지만 이영표의 청소년 시절에 이영표보다 더 주목받던 선수가 있었다. 양현정이라는 선수였는데 이 당시 이관우와 함께 1996년 아시아 청소년 축구대회에 우승에 공헌했고 1997년 말에 국가대표 상비군으로도 발탁되었다. 이 당시 차세대 윙어로 주목받던 선수고, 부상 이전에는 2002 멤버로까지 거론되던 차세대 기대주였다. 양현정은 잦은 부상을 겪으며 기량이 발전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십자인대 부상이라는 치명적인 상황을 맞았고, 한때 무명이었던 이영표가 프리미어 리그에서 빛을 발할 동안 K리그에서... 그것도 부상 때문에 얼마 뛰지도 못하다가(그가 남긴 족적이라고는 전북 현대 모터스 소속으로 2000년 신인상이 유일하다.) 베트남 리그로 이적했다. 이후로 은퇴해서 지도자가 되었는데, 현재 동티모르 청소년 대표팀을 맡고 있다.[16] 또 다른 기대주 박진섭은 박주영이 나타나기 전까지 천재소리를 듣던 유망주였지만, 체력이 모자라고 체격이 왜소하다는 이유로 강판, 이후 그의 자리를 꿰찬 선수가 바로 송종국이다. 그래도 박진섭은 양현정과 달리 선수생활 자체가 말리진 않았고 당시 K리그 최강팀으로 군림하던 성남 일화의 일원으로 우승도 경험하며 나름대로 화려한 선수생활을 했다.[17] 약간의 오류가 있는데 양현정은 윙어였고, 이영표와 박진섭의 포지션은 스리백의 윙백과 포백의 풀백이다. 그리고 이영표는 대표팀 커리어 기간 동안 전문적으로 윙을 맡았던 선수는 아니다. 2000년 아시안컵에서 잠시 윙어를 본 적은 있지만, 당시엔 하석주와 공존 시키려는 허정무의 고육지책에 가까웠다. 애초에 이영표는 유소년 시절 주목받던 선수가 아니었고(고등학교 때 까지는 대부분의 한국 선수들이 그렇듯이 공격수 출신이다), 양현정은 측면 수비수로 뛴 적은 없는 선수다. 차라리 양현정 관련된 코멘트는 경쟁 포지션이었던 설기현의 내용에 들어가는 게 더 어울려 보인다.[18] 다만, 1~2차전에는 결장했었다. 개막 전 훈련 도중 왠 기계인간과 부딪히면서 부상을 당했기 때문.(...)[19] 통산 최다 출장 3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