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보병사단 사단장 살인사건
1. 개요
1959년 2월 18일 육군 제28보병사단 제81보병연대에서 대대장이 사단장을 M1911 권총으로 살해한, 당시 창군 이래 최악의 흑역사이자 1959년 국내 10대 뉴스에 선정되었을 정도로 세간을 크게 뒤흔든 사건이었다. 한국군 내 프래깅의 대표적 사례.
2. 피해자와 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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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 서정철 육군 준장은 1921년 경남 통영 출신으로 이승만 정권 시절 대한민국 법무부 장관을 지낸 서상환이 그의 조부이다. 일본 주오대학 재학 중 학병으로 징병된 적이 있으며 해방 후 국방경비대에 입대, 육군사관학교를 2기로 졸업한 뒤 제3보병사단 부사단장, 육군기갑학교 교장, 육군본부 작전과장 등을 거쳐 미 육군 참모대학 유학 후 1956년 28사단장에 임명된 인물이었다.
성격이 매우 급하고 거센 면이 있어 수틀리는 일이 있으면 바로 부하들의 정강이를 군화발로 찬다든가 철모 쓴 머리를 지휘봉으로 내려칠 만큼 과격한 부분도 많기는 했지만, 부하를 마구잡이로 학대한 사람은 아니었으며 머리가 좋고 영어에 능한 군인이었다. 평소 부하들에게 "현대 장교들은 운전, 영어, 타자에 능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장교들을 시험할 정도로 그 시대 군인 치고는 스마트한 면이 있었다.
실례로 '''장군이 된 이등병'''으로 유명한 최갑석 장군(현지임관, 1983년 소장 전역)이 6군단 포병 대대장(소령) 시절 28사단에 배속된 일이 있는데, 사단장인 서 장군이 대대를 방문해서 최갑석 소령에게 운전할 줄 아느냐고 묻자 최 소령은 관측장교(소위) 시절부터 운전을 해왔다고 답했다. 그러자 서 장군은 최 소령이 운전하는 지프에 타고 포병 훈련장을 돌게 했는데 운행 내내 서 장군은 보조석에서 코까지 골며 단잠을 잤다고 한다. 나중에 사단 참모회의 때 서 장군은 "최갑석 대대장은 운전을 잘 한다. 타고 가는 내내 편하게 잘 수 있을 정도였다" 라고 최 소령을 대놓고 칭찬하기도 했다. 즉, 까기만 하는 게 아니라, 자기 성에 차기만 하면 그만큼 보상을 하는 일면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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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관인 서정철 장군을 살해한 6297부대 1대대 대대장이던 정구헌 중령은 1925년 평안남도 대동군 출신으로 육사 8기생으로 군문에 들어선 뒤 미 육군보병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수료한 장래 유망한 장교였다. 독실한 개신교 신자로 사생활은 깨끗한 편인 정의감 넘치는 수재형 인간이었지만, 자존심이 너무 강하여 자신의 생각과 배치되거나 부족하다고 보는 의견은 지휘고하를 막론하고 깔아뭉개거나 얕보는 일이 잦아서 교우관계가 그리 원만치 않았다는 뒷이야기도 있다. 이 사건도 어찌보면 정 중령의 지나치게 높은 자부심이 빚어낸 참사였다고 볼 수 있다.
3. 사건 개요
당시 미 육군 제1군단(군단장 투르도 미 육군 중장)에 작전 배속된 28사단에 전투정찰대 운영 시범훈련을 실시하라는 명령이 제6군단(군단장 백인엽[1] 육군 중장)으로부터 내려왔고, 백 군단장에게 지시를 받은 서정철 장군은 시범훈련 부대로 6297부대 1대대를 지정하여 1959년 2월 19일부터 대대수색 정찰 시범을 실시하기로 하고 강도높은 훈련으로 준비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서 장군은 시범 전날인 18일 훈련준비 상황을 시찰하기 위해 당일 오후 2시경 1대대에 도착하였는데, 그때 1대대는 주둔지 뒷산에서 분대 단위로 시범훈련 중이었다.
이를 본 서 장군은 대대장 정구헌 중령에게 화력증강 차원에서 소대 단위로 훈련형태를 바꾸라고 지시했는데, 정 중령은 아래의 이유를 들면서 사단장의 지시를 정면으로 반박하였다. 문제는 아래 이유를 들 때 정 중령은 서 장군에게 "사단장 각하께서 뭘 모르시고 말씀을 하신다"라며 사단장을 무시하는 듯한 언행을 보였다는 것이다. 이는 서 장군의 심기를 건드렸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 지형정찰을 새로 해야 한다.
- 날도 어두워지는데 내일까지 바꿔서 준비할 시간이 부족하다.
- 화력증강은 위력정찰이지 수색정찰이 아니다.
뚜껑이 열린 서 장군은 '''"너 이 자식, 잔소리 집어치우고 당장 내려가!"''' 라며 정 중령에게 소리를 질렀고, 옆에 있던 연대장 송광보 대령이 서 장군을 말리며 대대장실로 데리고 내려왔는데, 이때가 오후 6시경이었다. 내려오던 도중 정 중령은 사단장이 권총을 장전하는 듯한 소리를 들었고, '혹시 사단장이 나를 쏴버리려는 건 아닌가?' 라는 피해망상에 사로잡혔다.
대대장실에 들어온 서 장군은 노기를 풀지 못하고 뒤따라 들어온 정 중령을 향해 '''"꼴도 보기 싫으니 당장 뒷문으로 나가라!"'''고 고함을 쳤다. 뒷걸음질로 대대장실 뒷문으로 나온 정 중령은 자신의 45구경 권총에 실탄을 장전했고, 권총 장전소리를 듣지 못한 서 장군이 뒷문으로 따라 성큼성큼 걸어나오자 정 중령은 '드디어 나를 쏘려는구나'라고 오인하여 3m 앞에 있던 서 장군을 향해 세 발을 발사하였다. 총탄에 맞고 쓰러진 서 장군에게 정 중령은 나머지 네 발을 모두 명중시켰고 사단장은 그 자리에서 비명도 못 지르고 사망하였다. 이때 서 장군의 나이는 39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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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신문에 보도된 사건 상황도
3.1. 사건의 이면에는...
당시 대한민국 국군은 만성적인 하사관 부족 현상에 시달리고 있었다. 6.25 전쟁 직후 하사관에 대한 처우도 불량했고, 거기다 위로는 장교들에게 밟히고 밑으로는 병 특히 자신보다 일찍 입대한 내무반 실세인 상병~병장들에게 치받히는 샌드위치 신세[3] 인 하사관 장기복무를 아무도 지망하려 들지 않던 상황이었다.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강제로 하사관에 지원하게 된 육군 병사가 총기를 들고 중대장실이나 대대장실에 쳐들어가 '''"하사관 지망을 취소하지 않으면 당신을 죽이고 나도 죽겠다"''' 라며 깽판을 치는 일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이쯤 되니 각 부대별로 부대장은 물론 예하 장교들에게까지 어떻게든 하사관 자원들을 확보하라는 지상명령이 떨어져 있었다.
다만 지금 현재까지도 부사관 자원이 부족하고 부사관을 무시하는 분위기가 있다. 한국인 특유의 자격지심때문에 직업군인을 장교로 하기를 원하고 부사관을 무시하는듯 하다. 실제로 한국은 장교 인플레이션 국가이다.
이에 대부분의 부대 장교와 하사관들은 온갖 회유와 협박, 심지어 가정방문(...)까지 서슴지 않으며 하사관 지원을 받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고, 특히 집안이 심히 가난해 급전이 필요하거나 부대에서 무마 가능한 수준의 잘못을 저질러 약점이 잡힌 병들이 주 타겟이었다. 이는 자연히 강제로 진급한 하사관들을 대거 양성해 하사관들의 질적 하락을 유도했다. 이게 다 계급의 허리가 없어서 생긴 일이다. 6군단 산하의 28사단도 물론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대대장이던 정구헌 중령은 '''"내가 옷을 벗고 말지, 하기 싫다는 사람에게 어떻게 하사관을 시켜?!"'''라면서 상부의 하사관 자원 확보 명령을 거부했고, 당연히 정 중령의 1대대 하사관 지원율은 사단 최하위였다. 이 때문에 사단장 서정철 장군이 6군단장에게 적지않게 힐난을 당했고, 모든 면에서 1등을 달리지 않으면 직성이 안 풀리던 서 장군으로선 정 중령을 바라보는 시선이 고울 리는 없었다. 이러한 갈등도 사건 발생에 한 몫 했다고 볼 수 있다.[4] 게다가 그 6군단장이라는 인물이라는 게 형 빽 믿고 까부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안한, 당대 최고의 똥별인 백인엽이었다. 무엇보다도 윤의철 저리가라 수준의 혹장(酷將)인 백인엽이 직속상관이었으니 서정철의 입장은 서정철 본인의 성격은 둘째치고 저런 직속상관으로 인해 애간장이 탈 지경이었다. 게다가 백인엽 이 인간은 6군단장으로 끝나는 인물이 아니라 육군참모총장의 친동생이다. 그리고 범인인 정 중령을 재판하는 과정에서 하사관 차출을 강요했다는 사실이 문제화될 것을 꺼려했던 6군단장 백인엽 장군(..)이 아예 사단장 살해 사건 자체를 '''혈기 넘치는 대대장의 또라이짓'''으로 축소시켜 버렸다는 뒷이야기도 있다.
덧붙이자면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 군인으로서는 정직하고 훌륭한 인물이었다. 정 중령은 하사관 차출명령 거부 말고도 부사단장의 쌀 상납 요구를 거절한 경력이 있는 꼿꼿한 군인이고, 서 장군 또한 사단장으로 재직하며 사병들에 대해 '''정량 급식'''을 이행하지 않은 장교들은 엄벌에 처했던 당시로선 보기 드문 강직한 장군이었다. 당시의 한국군 현실을 보면 그저 안타까운 사고로 보인다.
4. 사건의 결과
정 중령은 범행 직후 곧바로 특무대에 자수하여 체포되었고, 사건 현장에 있던 연대장 송광보 대령도 살인방조 혐의로 구속되었다. 군사법정에 회부된 정 중령은 '''"서 장군이 나를 쏘려고 권총을 장전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자위권을 행사한 것"'''이라며 정당방위를 주장했지만, 애당초 서 장군의 총에는 실탄이 없었다는 것이 밝혀졌고, 결국 정 중령에게는 사형이 선고되었다. 한편, 같이 구속된 송광보 대령은 징역 4개월에 급료 전액 몰수를 선고받고 파면당했다.
정구헌 중령은 1959년 5월 20일 오후 2시경 대구 육군정보학교 야외 교정의 산골짜기에서 총살형으로 생을 마감했다. 향년 34세. 정 중령은 이날 사형수라고 하기엔 너무나 태연한 모습으로 형집행을 받아들였고, 집행직전 만난 이전 부대 상관인 2군사령부 법무부장 최문기 대령에게는 "오랜만입니다. 안녕하셨습니까?"라고 반갑게 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또한 입회차 형장에 몰려든 신문기자들에게도 "다들 고생이 많다"라고 담담하게 손을 흔드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육군 군종 목사 양석봉 중령의 기도와 설교를 들은 후 아래와 같이 유언을 남기고 총살당했다.
- 사건에 대해서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 일흔 살의 노모와 처자식을 남기고 먼저 가는 것이 미안할 뿐이다.
- 앞으로 자신의 개인 목적을 위해 부하들을 구타하거나 혹사시키는 병영 내의 악습이 없어지길 빈다.[5][6]
- 나는 지금까지 양심적으로 신념에 따라 살아왔다고 자부하며, 깨끗이 죽는다고 생각한다.
5. 뒷이야기
이 사건으로 28사단의 분위기는 바닥까지 떨어지며 흉흉해졌고, 이를 우려한 당시 육군참모총장이던 백선엽 대장은 33사단장으로 재임 중인 이세호[7] 준장을 불러 "내 전용 헬리콥터를 줄테니 지금 28사단으로 가서 사단장으로 부임하시오"라며 다짜고짜 지시를 내렸다. 상황을 잘 모르던 이 장군은 "사단으로 돌아가서 준비를 하고 가겠습니다" 라고 했지만 백 장군은 "지금 그럴 때가 아니니 당장 28사단으로 가시오! 뒷일은 내가 수습할 테니까" 라고 재차 명령하여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이 장군은 백 장군의 전용 헬기로 경기도 연천군 전곡의 비행장에 내려 바로 부대로 가는 대신 근처 여관에 짐을 풀고 하룻밤 동안 마음을 가다듬으며 싸늘해진 28사단의 분위기를 어찌 수습할지 고민했다.
그리고 다음 날 사단장으로 부임한 이 장군은 예하부대에 '''"3일의 여유를 줄테니 각 부대별로 열병 및 분열식을 준비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평소 호랑이 장군으로 소문난 이 장군이 부대를 시찰한다는 소식에 얼어있던 장교와 사병들의 분위기는 후끈 달아올랐고 모든 부대가 3일 밤낮으로 열병, 분열훈련을 하는 동안 각 부대 분위기는 자연스럽게 원상복귀될 수 있었다. 이후 이 장군은 보급품 절약 운동, 장비 애호 운동 등 계속적인 부대 내 캠페인을 벌였고 덕분에 28사단은 다시 안정과 활기를 되찾았다고 한다.
물론 상급부대 지휘관인 백인엽 6군단장은 이 사건으로 인해 대장 잔급이 날아갔다. 사실 백인엽이 근본적인 원인일 수 있는 게 예하 사단장들에게 계속되는 독촉을 해왔으며 서정철을 포함한 예하 사단장 및 참모들에게도 굉장히 가혹하게 대했다. 오죽했으면 6군단 부군단장인 박정희(!) 준장이 백인엽의 멱살을 잡고 싸움박질을 하는 바람에 당시 육군참모총장인 백선엽은 자기 동생과 박정희를 분리시키기 위해 박정희를 제7보병사단 사단장으로 보직을 바꿔 놓았다.
하지만, 그 이후로도 28사단은 '''화학지원대 총기난사 사건과 김동민 일병의 총기난사 사건, 그리고 2014년의 윤일병 살인사건, 휴가병 동반 자살사건 등 굵직한 사건이 여럿 터지며 더욱 악명만 높아지고 있다.'''
[1] 아는 사람은 다 알겠지만 백선엽 대장의 동생이다.[2] 당시에는 대통령뿐 아니라 장군들도 각하라고 불렸다. 제독은 각하라고 불리지 않았는데, 손원일 제독이 창군 초부터 "각하라는 호칭은 대통령께만 쓰는 것"이라며 해군 내에서 제독들을 부를 때 쓰지 말라고 했기 때문이다.[3] 특히 민간에서 군생활 안 해보고 바로 임관한 하사관후보생 출신 초임들이 가장 큰 피해자였고, 병에서 신분전환을 했다면 이게 덜했으나 병들이 전반적으로 하사관을 "밖에 나와서 할 일이 얼마나 없으면 군대에 말뚝 박았냐?"며 은근히 무시하는 일이 많았다. 자연히 하사관들의 전반적인 질적 수준도 낮아지며 병 및 민간인들의 하사관에 대한 안 좋은 여론도 심해지는 악순환이 반복된 것이다.[4] 게다가 이 날 정찰훈련 건으로 서로 다투고 대대장실로 내려가던 도중 서정철 장군이 홧김에 정구헌 중령에게 "정찰훈련은 그렇다고 치자. '''그런데 자네 부대는 왜 그렇게 하사관 지원이 부실한가?'''" 라며 기어이 한 소리 했다고 하는데 이것도 정 중령의 신경을 긁은 한 요인으로 보인다.[5] 6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병영부조리가 군 내부의 심각한 문제점인 현실이 씁쓸하다.[6] 아이러니하게도 이 유언을 비꼬는 의도인지는 몰라도 이 사건 이후에 창설된 ROTC는 학사장교에게 전무후무한 병영부조리를 자행했다.[7] 후일 2대 주월 한국군 사령관, 초대 3군사령관, 육군참모총장 등을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