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공원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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汝矣島公園
Yeouido Park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여의공원로 68 (여의도동) 소재 시립공원. 이 공원을 기점으로 여의도가 동, 서 여의도로 구분된다.
2. 여의도광장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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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초반 아직 활주로가 남아 있는 상태의 항공 사진이다. 사진 위쪽에 뻗어가는 길은 마포대교.(당시 이름은 '서울대교')
과거에는 11만 4천 345평의 광장이었다. 순수 광장 면적만 7만 2천 평이었다.
광장의 기원은 1916년 일제가 건설한 여의도 비행장과 그 활주로. 제트기가 존재하던 시절이 아니었으므로 지금처럼 비행장에 여러 부속건물이 있을 필요가 없었다. 그저 항공기가 이착륙할 널찍한 아스팔트 활주로와 필요한 가건물 몇 개만 뚝딱 지으면 비행장이 되던 시절이었다. 서울 안의 비행장이었던 만큼 다채로운 일화가 존재한다.
이곳에 처음으로 항공기 다운 항공기가 이착륙했던 것은 1920년의 일이었다. 당시 이탈리아 공군 조종사[1] 가 일본과의 우호 친선을 목적으로 비행하게 되었다. 본래대로라면 이들은 신의주 비행장에서만 한 번 착륙할 계획으로, 서울 상공에서는 선회비행만 몇 번 선보일 예정이었다. 그러나 항공기를 하늘에서도 보기 힘든 1920년대라, 서울시민들의 열화와 같은 요청에 결국 여의도 비행장에도 착륙, 항공기 이착륙을 선보였다. 예정에 없던 일종의 서비스 차원의 착륙이었으나 항공기에서 내리는 조종사에게 악단이 음악을 연주하고 운집한 시민들이 선물과 꽃다발까지 건네자 조종사는 매우 고마워했다고 전해진다.
첫 번째 조선인 조종사인 안창남도 이곳에서 이착륙과 선회비행을 선보였다. "떴다 떴다 안창남"이라는 노래가 널리 유행할 만큼 이 역시 열화와 같은 성원을 받았다. 이탈리아 공군 조종사가 이착륙한지 불과 2년 뒤인 1922년의 일이었다. 특히 무엇보다 이 이착륙에서, 안창남이 몰고 온 애기(愛機)에는 조선반도가 새겨져 있어 감동을 더했다.
안창남이 이착륙을 선보인 7년 뒤, 여의도 비행장은 정식 비행장으로 개장했다. 한강에서 홍수가 나면 섬이 잠겨버린다는, 비행장으로선 상당한 악조건이었으나 서울에 위치한 비행장이라는 접근성은 크게 매력적이었다. 그리고 일본 - 조선 - 만주를 잇는 항공수송의 허브 기지로 자리매김했다. 물론 고질적인 침수 문제 탓에, 김포에 비행장이 건설된 뒤로도 번갈아 이용되었다. 김포비행장이 있음에도 완전히 기능을 김포로 이전하지 않은 것은 압도적인 접근성 때문이었다.
8.15 광복 이후 공군이 창설된 곳도 바로 여의도공원 부지였다. 1949년 10월 1일, 대통령령 제 234호에 따라 공군이 창군되었을 때,[2] 1천여 명의 장병과 20여 기의 경항공기로 구성된 공군 최초의 비행단이 존재했다. 앞선 서술처럼 홍수가 나면 대피해야 하는 악조건이 존재했지만, 뛰어난 접근성 덕에 20년 넘게 공군의 최전방 기지로 운용되었다. 2009년에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여의도공원에 공군 창설 60주년 기념탑이 건립되기도 했다. 이후 군 공항으로서의 기능은 성남시의 서울기지로 이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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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에 촬영된 여의도 광장. 상단의 교량은 서울대교 (현 마포대교)이며, 여의도공항 및 공군 기지의 활주로를 활용한 곳이기에 북단 부근에 B-29 폭격기 같은 군용 비행기를 전시해 놓기도 했다.[3][4][5]
그리고 1971년, 공군기지가 이전하게 되자 당시 '불도저'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던 김현옥 서울시장은 '여의도 개발계획'을 수립한다. 군부대 이전으로 생긴 공터를, 신시가지 건설 및 당시 폭발적인 주거난 해소에 활용할 카드로 꺼낸든 것. 잦은 침수 문제 때문에 결국 공군기지가 이전한 것처럼, 이 침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밤섬이 폭파되었다. 왜냐하면 홍수를 막기 위한 제방을 쌓아야 하는데, 재료가 될 토사는 이 밤섬을 폭파해서 가져오는 게 가장 간편했기 때문이다. 당시엔 밤섬에도 주민들이 살고 있었지만 이들은 섬 인근의 마포구 창전동 지역으로 강제 이주되었다.
당시 여의도 개발계획을 주도한 사람은 김수근인데, 첫 구상 자체는 매우 입체적인 도시계획이었다. 거대한 활주로가 있던 부지도 어김없이 신시가지로 변모될 예정이었으나... 개발계획을 밀어 부칠 서울시장이 와우 시민아파트 붕괴사고로 잘려버리고, 무엇보다 이미 제방을 설치하는데 예산이 거덜 난 상황이었다. 그렇다. 1971년의 우리는 제방 건설만으로도 돈이 없어 개발계획이 좌초되던 가난한 나라였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김수근의 계획을 엎어버린 사람은 당시 대통령이던 박정희였다. 손정목교수(당시 서울시 간부)에 의하면 처음에 김수근이 계획 조감도를 들고 청와대로 들어갔더니 반려되고, 그다음에 들어가서는 광장을 넣으라고 했단다. 그래서 뉴욕의 센트럴파크를 연상시키는 조경이 잘 된 광장을 그려갔더니 싹 밀어버리고 거대하고 광활환 비상활주로 용도의 광장을 주문했다고. 그것이 5.16광장이라는 거대 콘크리트 공간의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실제로 후임 양택식 시장은 당초의 계획을 엎어버린다. 아예 민간에 택지 분양을 해버리는 전술을 들고 나온 것. 개발에 돈이 없으니 이렇게라도 예산을 충당하는 수밖에... 이 과정에서 거대한 활주로는 5.16 광장이라는 이름의, 사실상 비상활주로로 남겨두게 된다. 침수 문제 탓에 공군기지가 이전했는데, 제방공사로 그 침수 문제가 해결됐으니까. 물론 군부대로 다시 쓸 생각은 없고, 민간분양으로 확정했으니 공군부대를 원위치시키진 않았다.[6] 그래서 위의 사진에서처럼 광장 북단에는 몇몇 항공기들이 전시되기도 했고, 유사시를 위해 화장실과 샤워실, 지휘실이 있는 '''지하 방공호'''도 비밀리에 구축되기도 했다.#
다만 워낙 비밀리에 건설되었기에 그동안은 무명의 지하 배수나 배관 시설 등으로 여겨져 방치되어 있다 2005년 5월 여의도 버스 환승센터 공사를 하다 우연히 발견되었다.# 명확한 용도는 불명이지만 70년대 초중반 사진들에선 출입구가 확인되지 않다 79년도 항공사진에 7~5개의 출입구가 추가되었고 발견 당시 내부도 당시엔 최신식 좌변기와 소파 등이 들어서 있기에 74~79년 사이에 행사에 참석한 고위층들이 유사시 대피해 농성할 수 있게 건설한 것으로 추정된다. 게다가 상술했듯 담당/소관부처도 없고 관련 자료조차도 전혀 없어서 버스환승센터 공사주체인 서울특별시청 관할로 넘어가게 되었다. 참고로 후술되어 있듯 현재는 전시관으로 탈바꿈되었다.
옛 공군기지의 활주로를 비상활주로 용도로 써먹을 목적의 오리지널 활주로 광장이었으나[7] , 평양직할시의 김일성광장에 대응되는 성격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대체로 제3세계권 후진국 정권들은 체제 선전을 위해 대규모 정치집회와 퍼레이드를 자주 개최하는데, 도심 한가운데 이런 활주로 광장이 있으면 행사 장소로 매우 유용하다. 웅장하고 엄숙한 정치집회로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아서 정권을 탈취한 히틀러와 무솔리니. 천안문 광장에 모인 수많은 인파 앞에서 연설하는 마오쩌둥 등을 생각해보면, 광장에 모인 인파 앞에서 거룩한 존재로 연출된 모습을 드러내는 위대한 지도자 같은 이미지는 독재 정권의 필수요소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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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1970년대와 80년대에 걸쳐서 북한과의 체제 경쟁에서 선전을 위한 대광장으로도 활용되었으며 국군의 날 열병식과 관제 집회도 여의도 광장에서 자주 개최되었다.
물론 오로지 체제 선전용으로만 쓰인 건 아니고, 이후 5공 시절서도 국풍81 같은 각종 국내, 국제 행사를 개최하는 대표적 장소로 활용됐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방한 시 대집회라든가, 요한 바오로 2세도 방한 시 이곳에서 미사를 집전하며 김대건 안드레아, 정하상 바오로와 101위 동료 순교자를 시성한 적이 있다. 또한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라는 역사가 일어나기도 했다. 매년 국군의 날에는 대규모 열병식이 개최되기도 했다.[9]
또한 지금처럼 TV 후보 토론회 생방송이 없어서[10] 연설과 인파만으로 인기를 가늠할 수 있었기에, 여의도광장은 선거 유세의 장으로도 널리 활용되었다. 1987년 13대 대선에서 김대중#(추산 500만)을 최초로 해서 김영삼(추산 130만)#, 노태우#(추산 250만)등의 후보가 세를 결집하는 유세장이 되기도 했다. 오랜만에 있었던 야권 정치집회라 500만 집회라는 별명도 있었으나 실제로는 이 정도 규모까진 아니었을 것이다. 130만 명이란 숫자는 가득 채웠다는 추산치로 보이며,# 그 점에서 세 후보의 규모는 크게 다르지 않다. 어쨌든 당시 김대중 후보와 김영삼 후보의 연설을 구경하기 위해 엄청나게 많은 인파가 몰려왔고 용팔이 사건 같은 일도 일어나고 하면서 각 진영은 승리를 자신했지만 실제 결과는... 실제로 김대중 후보가 이른바 '4자 필승론'을 신뢰하며 별도 출마까지 한 것도 이때는 TV 토론이나 체계적 여론조사[11] 없이 오로지 여의도광장 등에 운집한 군중만으로 세를 어림잡아 판단했던 것도 한 이유였다.
민주 운동권 입장에선 1980~90년대 재야 노동운동, 농민운동, 학생운동 단골 집회/시위현장도 바로 여의도 광장이었으며, 과격 시위가 난무하던 시절 복무했던 전의경 80~90년대 군번들에겐 '전쟁터'로 명성이 자자하여 시위만 터지면 온 광장은 최루가스와 화염병, 짱돌 등으로 범벅이 되었다. 물론 6.10 항쟁의 주 무대가 되었던 서울광장에 비하면 포스가 약하기는 했다.
평소에는 일반인들에게 개방되어 자전거나 롤러스케이트를 마음껏 탈 수 있는 국내 최대 규모의 단일 공간이었다. 80년대까지는 놀이동산 같은 시설이 우리나라에 흔치 않았다. 한강시민공원 역시 80년대 중후반에야 서서히 건설되기 시작하는 등, 당시 서울 시내의 여가시설이 전무하다시피해 여의도광장은 휴일에 가족단위로 가볍게 놀러 다녀 올 수 있었던 여가시설로 꽤나 각광받았었다. 덕분에 광장 주변에 자전거 및 롤러스케이트 대여점도 많았다. 물론 여의도공원으로 바뀐 지금도 이들 대여점들은 남아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시절에 서울에서 유년기를 보낸 사람들의 기억 속에도 널찍한 광장에서 타던 자전거와 롤러스케이트는 추억으로 남아 있다. 달려라 하니나 천방지축 하니같은 여의도 광장이 현존해있었을때 제작된 애니메이션이나 드라마에서도 이 당시 여의도 광장의 분위기를 엿볼수있다.
1991년 아스팔트 광장 시절 사회에 불만을 가진 한 사람이 훔친 승용차를 몰고 당시 여의도 광장에 돌진해서 당시 자전거나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놀던 어린이 2명이 사망하고 어린이 및 시민 20여 명이 중경상을 입었던 여의도광장 차량질주 사건이 있었다. 당시 기사 문제는 그 다음해인 1992년에도 비슷한 이유로 택시가 돌진한 적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이 사건으로 인하여 택시운전자격증 제도가 생겼다.
여의도공원으로 변경을 추진하던 시절 자전거 대여업을 하던 사람들이 반대 서명 운동을 했던 적이 있었다. 물론 전술했듯이 공원으로 바뀌고 나서도 장사 잘 하고 있다.
여담으로 당시 광장 한가운데에는 시대에 따라 '새역사창조'(1980년 초중반), '선진조국창조'(1980년대 중후반), '세계로 미래로'(1990년대 이후~철거 전) 등 구호가 크게 써져 있었다.[12]
3. 아스팔트에서 녹색공원으로
1993년 문민정부로 취임한 김영삼 대통령은 민주투사 이력답게 도시계획을 환경친화[13] 및 군사정권 잔재 제거에 중점을 둔다. 이 와중에 여의도광장은 활주로가 그대로 재활용된 아스팔트 광장이라는 미관 문제와 체제 경쟁 집회 및 부대 사열로 활용된 군사정권의 잔재라는 문제 제기가 나왔다. 이에 따라 1994년에 수립된 21세기 서울시 개발 플랜은 뉴욕의 센트럴 파크, 런던의 하이드파크 같은 도심권 공원을 건설하는 방향으로 추진되었고, 1997년 4월 10일 공원화를 위한 첫 삽이 떠올려진 이후 1998년 10월 31일부터 부분적으로 공개, 1999년 2월 서울특별시 시립공원인 '''여의도공원'''으로 완전히 개장되었다.
보면 공원 안은 한국 전통의 숲, 잔디마당, 문화마당, 자연 생태의 숲 등으로 나뉘어 있다. 이 중 문화마당과 공원 내 곳곳의 자전거도로는 여의도광장 시절의 흔적이라 볼 수 있다. 여의도라는 특성상 여의도 지역에 근무하는 직장인들과 방문객들이 찾고 있는 공원이자 쉼터이기도 하며 주변에 여의도 증권가(街) 등 여러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여의도공원에는 벚나무가 꽤 많이 심어져 있기 때문에[14] , 벚꽃이 피는 철에 가면 그야말로 장관이다. 이때를 맞춰 서울시에서는 여의도에서 벚꽃축제를 개최하고, 이때는 수많은 인파가 여의도 공원으로 몰린다. 공원 근처에 있는 여의도역은 이때가 되면 넘치는 유동인구로 헬게이트 당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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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상기된 문단에 있던 지하벙커는 리모델링설이 솔솔 나오다, 드디어 2017년 새단장 공사를 마치고 미술 전시관으로 탈바꿈했다.#
일산호수공원이 그렇듯이, 이곳 역시 5월이 되면 강서구, 양천구, 영등포구, 동작구 등지의 중. 고등학생들이 졸업사진을 찍으러 오는 대표적인 공원이다. 여담으로 국민일보 뒤쪽 여의도공원에 있는 연못의 모양이 상당히 독특한데 잘 살펴보면 연못의 전체적인 모양이 서울특별시의 모양을 본뜬 것임을 알 수 있다.[15] 같은 서울 시립공원인 여의도 한강공원과도 인접해있다.
여의도공원으로 바뀐 뒤에도 국회의사당 근처, 시청광장, 광화문광장과 더불어 재야운동 중심지로서의 역할은 아직 남아 있는데, 지금도 뉴스에서 뜨는 노동절대회, 전국농민대회, 전국노동자대회 등 3대 재야집회의 단골 개최지로 유명하다. 그런 연유로 의경 및 경찰기동대의 주요 퀘스트 지역으로 악명이 자자해 집회만 터지면 공원 근처에 경찰버스가 기차처럼 죽 늘어서 있는 진풍경을 볼 수 있다.
4. 동영상
여의도공원 2020년 여름 풍경
[1] 페라린 대위 외 1명, 붉은 돼지에 나오는 페라린 중위가 이 사람을 모티브로 한 캐릭터다.[2] 본래 공군은 육군에 예속된 항공부대였다. 당장 미군도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도 육군과 해군에 각각 항공대가 별도로 존재했으며, 독립된 군으로 공군이 존재한 나라는 의외로 적었다. 본격적으로 독립된 공군이 등장한 시기는 2차대전 말엽~이후이다.[3] 참고로 사진의 거대한 몸집의 B-29 폭격기는 1970년대에 미 공군에서 오버홀하여 한국에 정태 보존용으로 넘겨 준 기체였다. 이 기체는 현재 경남 사천의 항공우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으며 전 세계에 딱 26대 남아 있는 B-29 중 유이하게 미국 밖에 존재하는 기체다(다른 하나는 영국에 있다).[4] 이외에도 지금의 서울국제금융센터 자리에 종합안보전시장이 있었다. 1995년 종합안보전시장 전시품이 경남 사천으로 이전한 뒤에는 그 자리에 여의도 중소기업박람회장으로도 쓰였다.[5] 저 B-29 옆에 있는 거대한 4발 수송기같아보이는 항공기는 C-124 글로브마스터 II(C-124 Globemaster II) 수송기다.[6] 사실 여의도광장의 활주거리는 이전의 프롭기면 몰라도 대형기가 뜨고 내리기엔 애로사항이 심하다. 그야말로 비상용 이착륙을 위한 활주로 및 주기장 수준밖에 안 된다.[7] 그래서인지 서울특별시 항공사진 서비스에서 특정 연도에 찍은 사진들 중에 이 부분이 가려진 사진들도 있다.[8] 1934년 나치당 전당대회를 기록한 다큐멘터리 의지의 승리나 북한의 체제 선전 영상 등에서 이런 모습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9] 여의도광장이 공원화된 후로 국군의 날 행사가 계룡대에서 비교적 작은 규모로 치러지게 되었기 때문에 국내 밀덕후들 중에는 여의도광장의 공원화를 아쉬워하는 사람들도 많다. 실제로 쌍팔년도 특전사 출신 할배들 중에는 여의도 강하 시에는 국회의사당 뒤편의 좁디좁은 공터를 DZ로 삼아 내려야 했기 때문에 정말 몸서리치게 싫어했다고 한다. 게다가 고공탈출 시범의 경우는 "그 날 아침 먹은 식사가 뭔지 공중에서 확인할 수 있다" 는 수준이었다고...[10] TV 후보 토론회는 당시 미국 등 서방 선진국에서나 도입됐고, 한국에선 1987년 13대 대선 때 관훈토론회가 시초이며, 1995년 제1회 지방선거부터 방송사 토론이 도입되었다.[11] 여론조사 자체는 시행되고 있었지만 표본선정을 제대로 할수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많았다.[12] 서울특별시 항공사진 서비스 참조.[13] 이 당시 환경친화적 도시계획의 대표적인 사업으로 서울 '남산 외인아파트 철거'를 예로 들 수 있겠다.[14] 대부분은 창경궁을 복원하면서 옮겨 심어진 것들이다. 일제는 창경궁을 동물원으로 만들면서 조경용으로 꽤 많은 벚나무를 심어 놓았다.[15] 이건 당시 민선1기 조순 시장의 의견이 들어간 것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