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동원/선수 경력
1. 개요
최동원의 선수경력을 정리한 문서.
2. 고교야구 시절
처음에는 어머니의 제안으로 축구를 했다고 한다.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 축구로 활동했으나, 야구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하면서 경남중학교 야구부에 입단하게 된다. 그리고 경남고 시절부터는 전국구 투수로 이름을 알리게 된다. 1학년때인 1974년, 황금사자기에서 대구상고를 상대로 구원 등판해 팀을 승리로 이끌기도 했다.
고등학교 2학년때인 1975년, 황금사자기에서 당시 2관왕을 기록 중이던 최강팀 경북고를 상대로 노히트 노런을 거두기도 했으며, 17이닝 노히트 노런을 달성하기도 했다. 동 시대의 라이벌이었던 김시진은 최동원이 가장 좋았던 시절로 경남고 1~2학년을 꼽을 정도. 고등학생 신분으로 팔 보험을 들어서 엄청난 화제를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1]
그의 전성기였던 1976년에는 청룡기에서 4강에서 선린상고를 상대로 11K 완봉승을 기록, 승자결승에서 군산상고를 상대로 20K를 달성하며 팀을 결승에 진출 시켰다. 그리고 최종 결승전에서 다시 마주한 군산상고를 상대로 12K 완투승을 기록하며 청룡기를 혼자 힘으로 우승 시키는데 성공한다.
참고로 이때 김성한이 회고하기를 최동원의 공이 너무 빨라서 이를 치기 위해 당시 한국에서 가장 빠른 배팅기계가 있던 한양대학교를 찾아가 150km/h짜리 공을 치는 훈련을 하기도 했으나 정작 본 게임에 들어가니 공이 안보였다고.
3. 대학야구 시절
원래 고려대학교에 입학하려고 했으나 중앙정보부의 강압에 의해 진학이 취소되었고, 이에 고향에 있는 동아대학교 진학을 하려했으나 이곳에서도 마찬가지로 진학을 거부받았다. 군대라도 빨리 다녀오려고 육군 경리단의 문을 두드렸지만 그 곳에서도 받아줄 수 없다고 했고, 고위 관계자의 공작에 의해 결국 연세대학교로 진학하게 되었다고 한다.[2]출처 - 박동희 기자의 칼럼
연세대학교 시절, 1978년 대통령기 전국대학야구대회 때 동아대학교와의 준결승전에서 임호균과의 1박 2일에 걸친 18회 연장 승부는 굉장히 유명했다. 14회까지 0:0으로 진행되다 일몰 서스펜디드 게임이 선언되어 다음날로 이어졌고, 결국 연세대학교 김봉연의 솔로홈런으로 최동원의 연세대학교가 1:0으로 승리를 거뒀다.
그러고도 최동원은 같은 날 곧바로 열린 성균관대학교 와의 결승전에도 선발로 등판하여 또 9이닝을 완투했고 이틀동안 무려 27이닝, 투구수 375개에 12피안타, 33탈삼진, 2실점을 기록한 끝에 연세대를 우승으로 이끌었다. 오죽 최동원의 투혼이 감동적이었으면 적장이던 김동엽 성대 감독이 경기 후 마운드로 올라가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칭찬할 정도였다. 그 소문난 다혈질 양반이 지고도 그런 반응이었으니 말 다한 셈...
그러나 이듬해 사건이 벌어졌다. 1979년 3월 21일, 대통령기 쟁탈 동국대와의 준결승에서 공군을 제대하고 2학년으로 복학한 박철순이 선발로, 3학년인 최동원이 마무리로 출전하였다. 이날 각각 2점씩 실점하여 경기는 4:2로 패배하였다. 경기에서 지자 연세대 선배들은 패배의 책임을 물어 최동원을 구타하였다.[3] 이때 허리를 잘못 구타하여 팬티가 피범벅이 되고 허리 아랫부분이 시커멓게 죽을 정도로 큰 부상을 입는다. 근 100일 동안 움직이지도 못하고 집에서 요양해야 할 정도였다고 이 과정에서 학교는 구타사실을 은닉하기 위해 최동원이 무단이탈했다는 언플을 한다. 훗날 야구계의 전설이 될 인재가 선배들의 조폭놀이 때문에 야구인생이 끝날뻔 한것이다.
연세대학교 시절 무시무시한 구위로 1978년 로마 세계야구선수권대회, 1981년 대륙간컵 국제야구대회등 국제대회에서 맹활약하자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스카우터들이 그를 주목했고, 토론토 블루제이스와 계약,[4] 까지 했으나 병역특례 혜택을 받은 뒤에도[5] 5년 동안 국내에서 그것도 아마에서만 활동해야 대체복무로 인정되는 병역법 때문에 바로 해외에 나갈 수 없었던 점이 크게 작용했다.[6] 병역말고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계약이 최하급이었다는 말이 있지만 이건 사실과 다르다. 4년에 옵션 20만 달러[7] 포함 총액 61만 달러계약인데 이정도 금액이면 최하급이 아니라 오히려 특급대우다. 연봉도 첫해인 1982년에만 최저연봉인 33,500달러일뿐 바로 다음해 연봉은 66,500달러, 3년차에는 115,000달러, 4년차에는 185,000달러에 달했다. 당시 토론토의 1선발로 4년차였던 짐 크랜시의 1981년 연봉이 167,000달러라는 걸 생각하면 토론토 측에서 상당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고 볼수 있다. 아니 애초에 프로리그조차 없던 국가의 투수에게 4년간 연봉을 무조건 보장한다는 시점에서 상당한 기대를 가졌다고 볼수 있다.[8]
토론토는 프로 경험이 전무한 최동원이 입단 4년 차(1982년부터 뛴다는 가정 아래)가 되면 1981년 메이저리그 평균 연봉(19만 6천500달러)을 받을 수 있는 투수로 성장하리라 예상했고, 그래서 1985년 연봉을 18만 5천달러로 정한 것이었다.
그 당시 블루제이스 측에서 해외 언론에 밝힌 최동원의 프로필을 보면 그를 당장 메이저 전력감으로 평가하며 메이저 평균 수준의 직구와 커브 그리고 메이저 상위 수준의 슬라이더와 제구력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했다라는 말[9] 도 있고 당시 나온 기사로는 토론토 수상이 직접 한국에 최동원을 위해 병역 면제를 건의했다는 말이 있지만 이건 그냥 단순히 최동원 선수를 알고 있고 관심을 가지고 있다던 기사에서 와전된 말인 듯하다. 다만, 토론토 시의회 의장이 한국정부에 최동원의 메이저리그 진출을 희망하는 진정서를 넣은 것은 사실이다. # 결국 블루제이스 측에서 계약 위반이라며 법정행 카드까지 들고 나오며 그후 몇년 동안이나 포기하지 않았으나 결국 최동원은 해외 진출을 포기하고 1983년에 롯데 자이언츠와 계약하게 된다. 다른 말로는 당시 프로야구 최대 흥행카드인 최동원이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 가면 흥행에 문제가 생길 것이라 생각한 높으신 분들의 압력이 있었다 카더라. #
그리고 연세대학교 시절 최동원을 보고 '''가네다 마사이치''' 감독도 스카웃, 정확히는 양자로 맞이할려고 했으나, 조부의 반대로 인해 무위로 돌아갔다는 루머도 있었다. 하지만 가네다는 2011년의 인터뷰에서 최동원의 존재는 알았지만 양자 입적이야기는 사실무근이라고 하였다. 2012년 10월 26일 엠비씨 스포츠 스페셜다큐에선 김시진의 증언을 보면 뉘앙스적으로는 단순히 일본진출 방법을 설명한 것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래도 최동원에 놀람과 관심을 많이 가졌다는 모양. 최동원의 팬들은 최동원이 국내에서 시달린 혹사와 마지막 롯데의 토사구팽 때문에, 실패했더라도 이때 해외리그나 적어도 롯데로 가지는 말았기를 소망하는 팬들도 있다.
4. 실업 시절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당시 최고 수준인 3,000만 원[10] 의 계약금을 받고 1981년 실업야구 롯데 자이언트에 입단했다.그때부터 롯데 자이언트의 에이스가 되었다. 1981년 롯데 자이언트가 소화한 팀 이닝이 36경기 324이닝이었는데 그 중 206이닝을 신인이었던 최동원이 소화, 17승 4패를 기록하며 팀을 코리안시리즈[11] 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는 팀을 위해 코리아 시리즈에서 불태웠다.
81년 실업야구 코리아시리즈 6차전까지 전부 등판
1차전 9이닝 3실점 완투 敗
2차전 7이닝 무실점 (2회부터 구원 등판) 敗[12]
3차전 7이닝 3실점 (5회부터 구원 등판) 무
4차전 7⅓이닝 3실점(희대의 기록인 1경기 1승 1세이브를 기록) 勝[13]
5차전 3이닝 무실점(7회 구원 등판)勝
6차전 9이닝 4실점 완투. 勝
'''코리아시리즈 6경기중 6경기 등판 42⅓이닝 2승 1패 1세이브. 방어율 2.45'''
[image]
김시진, 장효조 등이 포진되어있던 육군 경리단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면서 롯데가 실업야구 마지막 코리아시리즈에서 우승을 하는데 일조했다.
특이사항으로 4차전때 7회까지 선발로 던지다가 휴식을 주기위해 8회초 1루수로 보직을 변경했고, 8회말 2사 만루상황에서 구원등판해서 깔끔하게 막아 1경기 1승 1세이브를 기록하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도 연출한다.[14]
롯데의 우승과 더불어 최동원은 실업야구 최우수선수, 다승왕(17승), 신인투수상을 수상하며 3관왕을 차지했다.
1981년 시즌이 끝나고 실업팀이던 한국전력공사에 이적하여 선수생활을 이어갔다. 이유는 세계야구선수권대회가 1982년에 있었는데 이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소속 팀이었던 롯데는 프로로 전환하였기에 아마추어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던 것. 그래서 한창 날아다니는 선수들을 실업팀에 임시로 입단을 시켰다. 임호균, 심재원, 이해창, 김재박, 장효조 등이 한국프로야구 원년에 데뷔를 하지 못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세계선수권대회가 종료된 후, 다시 최동원은 (프로로 전환한) 롯데에 입단했다.
5. 프로 시절
5.1. 1983년(롯데 자이언츠)
최동원의 프로야구 첫 시즌은 '부진했다'는 평을 받았다. 본인 말로는 연봉협상 때문에 몸관리를 하지 못해서라고. 1983년 시즌종료 후 하루에 1,000개가 넘는 공을 던지며 몸관리에 들어갔다고 KBS 다큐멘터리에 코멘트가 되어 있다.
그런데 그 부진했다는 성적이 '''208.2이닝'''(5위) '''ERA 2.89'''(11위) 9승 16패 '''148삼진'''(4위)이다. 2010년대 야구관으로 보았을 때는 절대로 부진한 성적이 아니다. 그것도 38경기(21선발)에 출장해 본인이 거둔 9승 중 8승이 완투승이었고, 선발 7.2이닝 - 이틀 쉬고 구원 2.2이닝 - 다음날 선발 완투승 - 이틀 쉬고 선발 완투패 등의 미친 듯한 혹사를 하면서 나온 기록이다.(5월 28일-6월 7일 11일간 5회 등판, 4회 선발, 3회 완투) 당시의 롯데는 당시 팀타율 0.244(6위)에 승률도 역시 꼴찌를 한 팀이라 괜찮은 활약을 하고도 승운 없이 9승에 그쳤다... 투고타저의 영향으로 평균자책 2.89 찍고도 11위한 것도 한몫했다. 그 당시의 야구관은 '투수는 승리 기록이 최고 '이던 시절이었기에 혹평을 받았다.
사실, 실업팀 시절의 롯데 자이언트는 우승 경력이 있는 강팀이었지만, 프로야구팀 롯데 자이언츠는 1983년까지 별볼일 없는 약팀일 뿐이었다. 따라서 '롯데 자이언트 시절 우승을 이끌었던 에이스 최동원이 겨우 9승에 그쳤기에' "부진했다" 라는 평이 나왔던 것이기도 했다. 사실 당시 롯데의 상황에 문제가 좀 있었다. 타선은 박용성-김용희-김용철-유두열이 있었으나 하위타선의 불균형은 원년과 같았고, 최동원 역시 혹사 여파와 몸관리 부족으로 이전의 폼은 보여주지 못한 모양이다. 원년 에이스였던 원년도 탈삼진왕 노상수와 왼손 투수 천창호는 전년에 비해 부족했고, 안경쓴 투수 김문희[15] 가 버텼으나 부족했다. 외야수의 고의실책도 있었다고...
5.2. 1984년(롯데 자이언츠)
최동원을 불멸의 투수로 만들어준 경기가 바로 1984년 삼성과의 한국시리즈다. 당시는 전기/후기리그로 나누어서 전기 1위와 후기 1위 팀에게 한국시리즈 진출권을 주었다. 만일 한팀이 전후기 모두 우승하면 한국시리즈 없이 통합우승.[16]
1984년 전기리그 1위를 달성한 팀은 삼성이었다. 삼성 김영덕 감독은 후기리그에선 선수들을 쉬게 하여 전력을 보존하고, 각 팀을 분석해서 최대한 만만한 팀을 후기 리그 1위로 만든 뒤에 한국시리즈를 무난하게 가져가려고 했다. 결국 후기리그 막판에 완전히 노골적인 져주기 게임을 연발하면서 위협적인 OB 베어스를 떨구고, 대신 롯데 자이언츠를 후기 1위팀으로 만드는 추태를 부렸다.[17] 당시 삼성과 롯데의 마지막 3연전을 중계하던 방송캐스터가 '이 경기를 중계하고 있는 제가 부끄럽습니다.'라는 발언을 할 정도였다.[18]
[image]
이런 막장같은 상황은 승리를 위해선 무슨 짓이던 서슴치 않는 삼성 김영덕 감독의 사고방식 때문이다. 게다가 OB 베어스 감독(김영덕)과 투수코치(김성근)로 원년인 1982년 우승까지 이루었던 2명간의 악연이 겹처서 벌어진 일이다. 1983년 시즌 종료이후 김영덕은 감독 사퇴이후 미국으로 지도자 연수를 떠나기로 예정돼있었고, 이 상황에서 김성근에게 삼성 감독직 제안이 들어온다. 김성근은 이걸 김영덕에게 상의했는데, 김영덕은 김성근의 삼성행을 만류한다. 결국 김성근 투수코치는 OB에 잔류하는데, 열흘 뒤에 삼성 감독으로 김영덕이 발표된 것이다. 즉 자기 후배가 갈 자리를 가로챈 김영덕 감독...이 사건으로 1984년 시즌 내내 삼성과 OB 경기는 살벌한 분위기에서 치러졌고, 난투극도 여러번 불거졌었다.
이에 자존심이 상한 롯데는 최동원을 필두로 반격에 나선다. 당시 롯데 감독이었던 강병철 감독은 한국시리즈를 준비하면서 1, 3, 5, 7차전에 등판하도록 최동원에게 지시를 내린다. 이에 대해 너무 무리하는게 아니냐고 묻자[19] , 강병철 감독은 무척이나 미안한 표정으로 두고두고 회자되는 '''"동원아, 우짜노 이까지 왔는데"'''라고 했다. 결국 최동원은 '''"네, 알았심더. 함 해 보입시더"'''[20] 라고 답변하고 이를 수용한다.
그 결과 기록은 1차전 선발 등판 완봉승[21] , 3차전 선발등판 12K 완투승, 5차전 선발등판 완투패, 6차전 구원등판 구원승, 7차전 선발등판 완투승[22] . 총합 '''5경기 등판 4승 1패 40이닝 투구 평균자책점 1.80 WHIP 1.08.''' 그리고 롯데 자이언츠는, 아니, '''최동원은 우승했다.'''
인터뷰어[23]
: 최동원 투수! 컨디션 어땠어요?최동원: 글쎄요. 허허. 어제보다 좋았다고 할까요?
인터뷰어: 무리 아니었습니까?
최동원: 무리였죠. 무리지만 팀이 이길 수 있다면... 이제 올해 마지막 시합이잖습니까. 그래서 최대한 힘 있는데까지는 열심히 해가지고... 마 저희들이 노력한 만큼의 어떤 성과를 얻기 위해서는... 무리라는걸 알죠. 알지만도 마 나갈 수 있는 한 끝까지 나가서 이기야죠.
6차전 경기에서 구원승을 거둔 뒤 인터뷰
마지막 7차전에서는 5번 유두열이 힘이 떨어진 김일융[24] 을 상대로 역전 쓰리런 홈런을 치면서 우승하게 되는데, 사실 6번으로 나오려던 것을 기록원이 실수로 5번으로 적었고 강병철 감독은 그냥 그대로 가자고 했다 한다. 어찌되었던 이 뜬금포 한방으로 유두열이 한국시리즈 MVP가 되는 해프닝같은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는 의견도 있지만, 최동원이 1984년 27승 다승왕, 탈삼진왕으로 정규시즌 MVP로 이미 선정되었으므로 한국시리즈 MVP까지 독식하는걸 반기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서 라는 이유로 유두열이 MVP가 되었다는 의견도 있다. 진실은 저 너머에...[25]인터뷰어: 최동원 투수, 지금 제일 하고 싶은 말이 뭐에요?
최동원: 아이고~ 자고 싶어요.
7차전 경기 직후 인터뷰
어쨌든 최동원은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 5경기 등판 중 홀로 4승(1패)을 거두며 롯데를 창단 첫 우승으로 이끌었다. 이는 당연한 이야기지만 국내 유일한 기록이다.[26] 이 당시 혹사에 대한 후폭풍이 경기 종료 후 바로 나타났는데 리포터가 마운드를 내려온 최동원에게 달려가 지금 무얼 가장 하고 싶냐고 묻자 자고 싶다고 답변한 일화가 유명하다.[27] 또 우승을 한 당일 밤에 롯데 구단 우승축하파티에 참석한 최동원이 자리에 앉자마자 바로 코피를 쏟아버렸다는 것.[28] 단순히 어깨나 팔꿈치에만 무리가 간게 아니라 몸 전체 피로도가 심각했을 가능성이 크며, 그 한국시리즈 선발 4회 구원 1회 총 5회 등판이라는 기록이 얼마나 무식한 혹사였는지 눈치챌 수 있는 대목이다.
84년 한국시리즈를 요약한 영상
5.3. 그 이후
결국 1984년의 혹사는 이후 최동원의 선수생활을 갉아먹게 된다.
사람들이 흔히 한국시리즈의 혹사만 생각하는데, 당해 최동원은 페넌트레이스에서도 기록적인 혹사를 당했다. 전년도의 장명부에 비견될 만한 혹사였다. 총 51경기 중 선발로 20경기를 나와 14경기를 완투했고, 계투로 31경기를 나와서 거의 300이닝에 근접한 투구를 했다. 현대야구의 관점에서 보면 선발로 등판한 경기를 다 빼고(150이닝 가량을 빼고) 구원등판한 경기만 봐도 상당한 수준의 혹사다. 최훈은 이 당시를 그리면서 롯데가 리그 최강의 투수진을 가졌다고 평하기도 했다. 최고의 선발진 최동원과 최고의 계투진 최동원(..)[29] 그러나 그는 은퇴 후 세월이 흐른 후의 인터뷰에서도 "우승은 나 혼자만의 영광이 아니라 팀과 팬들의 기쁨이기 때문이다.", "무리는 역시 대가가 있게 마련이더라. 그러나 후회한 적은 없다. 다시 그날로 돌아가도 난 1차전부터 7차전까지 던질 거다. 왜냐? 그게 최동원이니까."라는 말을 남겼다. 하지만 본인의 선수 생명까지 바쳐가면서 구단에 우승을 안겨준 선수에 대한 롯데의 태도는...이 때문인지 아래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그 때로 다시 돌아간다면 그렇게까진 안던질거다"라는 말도 남겼다.[30]
5.4. 삼성 라이온즈 트레이드 이후
최동원의 선수 생활 중 중대한 고비를 맞이한 것이 1988년으로, 바로 이 때 가장 먼저 선수협을 만들려고 했다. 그 결정적 계기가 당시 해태의 투수 김대현이 이순철과 함께 승용차를 몰고 고속도로를 달리다 휴게소 진입 도중 교통사고로 사망한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31] 이 때 최동원은 선수들의 복지를 위해 선수협을 구성하려 했으나, 당시 7개 구단들의 반대로 실패로 돌아갔다. 이 사건 이후 연봉협상 등의 이유로 마찰이 심하던 롯데 구단과 완전히 틀어지게 된다. 선수협의 여파로 최동원은 삼성의 김시진 등의 거물투수와 트레이드를 당하게 된다. 이 당시의 트레이드는 규모와 네임 밸류에서 역대 최고로, 롯데의 '최동원-오명록-김성현-김용철-이문한'과 삼성의 '김시진-전용권-오대석-허규옥-장효조-장태수'의 총 규모 5:6 트레이드가 이뤄졌다.
[image]
이후 인터뷰에서 롯데에 관한 질문에서 최동원은 "그래요. 롯데는 처음부터 나와의 약속[32] 을 지키지 않았어요. 이런 상태에서 프로 롯데라고 믿음이 갔겠습니까. 그래도 나는 롯데를 위해 1984년을 통째로 바쳤어요. 하지만, 그 대가가 무엇이었습니까. 그 대가가."라는 말로 짙은 아쉬움을 나타냈다.
그렇게 롯데에 버림받았다고 생각한 최동원은 야구를 더이상 못 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미국으로 출국한다. 이후 1989년 후반기부터 삼성에 복귀하지만, 신혼여행 및 야구를 떠나 방황하면서 체중은 불어나고 그에 더해 전체적인 훈련량이 모자랐던 것 + 그 전까지의 혹사의 여파로 구속도 떨어지고 제구도 안 잡히게 되는 전체적인 기량 하락으로 이어졌고, 지금 관점으로 본다면 야구선수 치고는 이른 나이에 은퇴했다.[33] 인터뷰로는 당시 감독이던 김성근 감독이 가더라도 1년 더 하고 가라고 말렸으나, 자신이 강력하게 은퇴를 요청했다고 한다.
[image]
요약해서 보는 그의 혹사. 완투율은 70%가 넘었고 규정 이닝의 2배를 뛰어섰으나, 승리를 챙기지 못하였다.
간단하게 요약하면 전성기가 조금 지나서 프로 데뷔했고 프로 팀 실력이 영 좋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감독이 미친 듯이 굴렸고 미친듯한 성적을 거뒀다는것.
이후 동생인 최수원(KBO심판)이 밝힌 바에 따르면, 이미 어깨 인대 2곳이 끊어져 있었다고 한다.
6. 연봉 문제
박동희 기자의 취재로 인해 당시 옵션계약, 이면계약 등이 밝혀진 바 여기에 해당 내용을 기술한다.[34]
6.1. 1983년
최동원 측은 메이저리그 진출을 포기했으니 그에 걸맞는 몸값을 달라며 롯데 측에 1억을 요구했는데, 당시 실업야구 롯데 시절 계약금 5천만원 가운데 절반 이상인 2,900 만원을 약속어음으로 받았다가 롯데 측이 지급을 미루는 바람에 그 돈을 송두리째 떼였던 일이 있던 상황이 있었기 때문에 태도가 강경했다.
롯데는 1억원은 힘들다고 난색을 보였으나 최동원의 태도가 강경하자 결국 편법을 이용하여 1억을 지급하는데, 방법은 이렇다. 일단 롯데는 최동원에게 계약금 5천만원, 연봉 3천만원을 줘 8천만원을 채우고. 실업 롯데시절 미지급한 계약금 2천 9백만원 중 2천만원을 보너스 형태로 추가 지급하기로 하여 총 1억원을 채운다. 다만 몸값은 계약금과 연봉만 발표하자고 요청하여 언론에 보너스는 발표하지 않았다.
6.2. 1984년
연봉협상의 기초가 되는 1983년 최동원의 성적은 38경기(선발 21경기) 9승 4세이브 16패 탈삼진 148개 평균자책점 2.89이다. 롯데는 적은 승수와 많은 패수 등을 이유로 한국 최고투수라는 명성에 어울리지 않는 성적이라며 최동원의 연봉을 3천만원에서 2천750만원으로 삭감한다. 1983년 롯데의 팀 타율, 팀 출루율이 리그 꼴찌였으며, 리그 최다실책팀임을 감안하고 최동원이 선발로 나온 21경기 중 16경기를 완투하여 완투승 8번, 완투패 8번을 기록한 것을 감안하면 2010년도 프로야구계의 일반적인 시각에서는 당연히 연봉이 상승되었어야 할 것이다. 다만, 당시 시대상 투수의 클래식 스탯인 승-패. 평균자책점 등에 비중이 컸던 것도 고려하고 넘어가야 한다.
6.3. 1985년
1984년 최동원은 정규 시즌에서 51경기(선발 20경기) 284 2/3이닝, 27승 6세이브 13패, 평균자책점 2.40을 기록한다. 게다가 한국시리즈에서 4승을 거두며 팀을 우승으로 이끈 전설적인 해이기도 하다.
최동원과 롯데는 1984년부터 등판간격과 승수에 따라 보너스 명목의 연봉을 따로 챙겨주기로 이면 계약을 맺었는데, 이에는 당시 연봉상승 25% 상한선 제도가 존재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1983년 9승이라는 승수에만 치우쳐 연봉이 깎이는 상황이 되자 최동원의 아버지 측에서 롯데에 제안한 것이기도 하다.
결국 1984년 성적을 볼 때 최동원은 연봉과 보너스를 합산시 1억이 넘는 돈을 받았어야 하나 협상 끝에 7천4백만원에 연봉계약을 체결한다. 또한 최동원 측은 롯데 측에 연봉 25%상한선 제도는 독소조항이므로 없어져야 하고, 연봉과 보너스는 모두 연봉으로 계산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롯데로부터 연봉과 보너스를 합한 금액을 연봉으로 발표하겠다는 다짐을 받아낸다.
6.4. 1986년 ~ 1988년
1985년 20승을 기록한 최동원은 8100만원의 연봉을 받는다.
1986년 19승을 기록한 최동원은 8910만원의 연봉을 받는다.
1987년 14승을 기록한 최동원은 8910만원으로 연봉이 동결된다.
이에는 롯데와 최동원 측이 맺은 이면계약 합의서의 내용에 기반하였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15승을 기준으로 15승을 거둘시에는 동결. 15승 미만의 승수를 거둘시에는 연봉삭감. 15승 이상 거둘시에는 연봉상승. 대표적으로 87년 동결된 연봉계약의 이면계약 합의서의 내용은 23승 이상(25% 상승), 22승(22% 상승), 21승(20% 상승), 20승(15% 상승), 19승(10% 상승), 18승(8% 상승), 17승(5% 상승), 16승(2% 상승), 15승(동결), 14승(2% 삭감), 13승(8% 삭감), 12승(15% 삭감), 10승(20% 삭감)이다.
1988년 연봉이 동결되기까지의 과정이 우여곡절이 긴데, 이면계약서 내용에 따라 14승을 거두면 2%가 삭감되지만, 2세이브는 1승으로 친다는 조항 역시 존재하였고, 마침 최동원은 2세이브를 기록하였기에 계약내용에 따르면 동결이었다. 이 과정에서 한 언론사가 "약간의 연봉 인하 요인이 있으나 에이스라는 점을 감안해 깎지 않기로 했고 동결시켜줄 계획"는 롯데의 입장을 기사로 내면서 최동원 측의 반발이 시작된다.
이 과정에서 이루어진 막장스러운 배틀은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으며, 이때부터 롯데 프런트의 막장행보가 시작되었다고 볼수있다.
이 막장스러웠던 배틀은 최동원 90만원 사건 항목 참조. 롯데에게 최동원은 결론적으로 눈엣가시였으며 그가 선수협을 창설하자 이를 빌미로 강제 트레이드를 시킬수있는 구실을 만들게 된다.가뜩이나 연봉협상으로 굉장히 밉상이 찍힌 상대였기 때문.[35]
[1] 기사의 동해생명보험은 현재의 KDB생명보험이다.[2] 1980-90년대의 영남의 야구선수들은 고려대에 진학한 선수들이 많았다. 특히, 롯데 자이언츠의 야구선수 및 코칭스태프는 부산고-경남고/고려대 중 하나 혹은 둘 다 거친 경우가 굉장히 많다. 당장 롯데출신 유명 선수들 중 부산에서 고등학교를 나오고 고려대를 졸업한 경우는 김용희, 양상문, 박동희, 마해영, 손민한등 매우 많은 반면, 연세대에 진학했던 롯데 선수 중 유명 선수는 최동원 외엔 윤학길뿐이다. 지금이야 부산출신 고려대 선수들이 롯데 자이언츠 쏠림이 줄었지만, 진갑용, 정근우, 이택근 등 부산지역 고교-고려대를 거친 유명 야구선수들은 결코 적지 않다. 반대로, 김봉연, 이순철, 조계현, 김정수(1962), 조규제 등 1980년대 호남출신 야구선수들은 연세대학교로 진학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국보급 투수라 불린 선동열은 고려대학교로 진학했다. 이는 아버지 선판규씨의 선택에 의한 것으로, 자세한 것은 선동열/선수 경력 참조.[3] 선배들은 박철순이 폭행을 저지른 이유를 두고 박철순의 의도였는지 다른 선배들의 지시였는지를 두고 논란이 많은데 인터뷰와 당시 상황을 조합해보면 박철순의 의도 쪽에 무게가 실린다. 좀 더 자세한 내용은 박철순 문서 참조.[4] 메이저리그 사무국에서 공식허가를 받은 계약이었다. 1981년 9월 28일 승인[5] 당시 최동원은 1977년 니카라과에서 열린 야구 슈퍼 월드컵 우승으로 혜택을 받았다.[6] 이후 아마가 아니라 프로에서 뛰는 것도 허용으로 바뀐다.[7] 올스타 선정시 해당 연도 2만 5천달러, 사이영상 수상시 해당연도 2만 5천달러[8] 토론토가 계약서에 최동원의 향후 5년간 연봉을 명기하던 1981년 메이저리그 평균 연봉은 19만 6천500달러였다. 1980년 평균 연봉 14만6천500달러에 비해 34.13%가 증가한 액수였다.[9] 메이저리그에는 이런 말이 있다. "평균 이상의 구속과 뛰어난 제구력, 그리고 명품 커브를 갖춘 투수는 두 자리 승수를 보증한다." 하지만 이런 강속구와 커브 위주의 정통파 올드스쿨 피쳐는 메이저리그에서도 박찬호가 마지막이다. 그 박찬호마저도 슬럼프를 극복한 후엔 변화구로 슬라이더를 주로 던졌다.[10] 최동원의 인터뷰에서는 5,000만원이었는데 2,100만원은 현금지급이었고, 2,900만원은 6개월 어음이었다고한다. 최동원은 이 말도 안 되는 계약을 믿었으나, 롯데는 그 어음을 그가 사망할 때까지 결제해 주지 않았다. 그리고 최동원은 프로구단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하면서 "다시는 속지 않겠다."라고 하였다. 그와 롯데와의 인연은 시작부터 악연이었다.[11] 한국시리즈의 실업야구 버전[12] 이미 1회에 롯데가 5실점한 상황이라 패전이 아님[13] 현대 야구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기록인데 과거의 야구 룰 상으로는 충분히 가능한 기록이다. 투수를 교체할 때 아예 빼지 않고 야수 자리에 넣었다가 다시 투수로 기용할 경우 이런 기록을 세울 수 있다. 주로 고교야구 등 아마추어 야구에서나 볼 수 있는 상황이며 프로야구에서는 10년에 한 번 볼까 말까한 빈도로 이런 광경이 벌어진다. 김성근 감독이 SK 감독 재임 시절 이런 식으로 경기를 치른 적이 있다.[14] 참고로 현재 야구 규칙으로는 한 투수가 동일한 경기에 승리와 세이브를 동시에 채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KBO 규칙 10.20조에는 세이브 투수의 요건으로 '승리 기록을 얻지 못한 투수'라고 명시하고 있기 때문에 투수는 승리 혹은 세이브 두 기록 중 하나만 가질 수 있다.[15] 나중에 충수염수술을 받는데,이 수술로 인해 기량이 하락하여 은퇴한다.[16] 1985년부터 전체승률 1위는 한국시리즈 진출권을 얻고 리그 우승팀인 두 팀이 플레이오프를 치르게 됐다. 그러나 1985년 전체승률 1위+전기리그 후기리그 우승을 싹쓸이하며 삼성이 한국시리즈 없이 통합우승을 차지 하자 최고의 흥행카드인 한국시리즈가 사라질수 있는 시즌이 더이상 나오지 않도록 하기 위해 KBO는 결국 1986년부터 전,후기리그 1,2위팀에게 플레이오프 진출권을 주고 진출권 2장이면 한국시리즈 직행하는 제도로 바꾸고, 1989년부터는 단일리그제로 바뀌면서 준플레이오프가 도입된다.[17] 객관적인 전력상 최동원 빼면 롯데는 삼성보다 한수 아래라는 평가가 많았다. 게다가 최동원조차 고의패배 경기를 제외하면 1984년 삼성전 전적은 2승 4패 3세이브로 썩 좋지 않았다. 즉 김영덕 감독은 7전제 한국시리즈에서 최동원이 기껏해야 선발로 3경기 나올 걸로 보고 나머지 경기를 모두 이기면 된다고 계산한듯 싶다.[18] 당시 롯데는 마지막 2경기를 모두 이기면 OB 경기의 결과에 상관없이 1위가 되는 상황에서 김영덕 감독의 배려를 사전에 감지하고 노골적으로 2군과 후보 선수들을 기용해서 주전을 쉬게하면서 무난하게 2연승을 한다. 그리고 이게 전국에 TV생중계 되면서 일파만파... 김영덕 감독은 지금까지도 란 감독의 대명사로 불린다. 최근 몇년간은 김성근 감독도 그런 욕을 먹지만 이 사람에 비하면 애들 장난 수준이다. 김성근 감독은 그래도 자기 팀의 전력을 최대한으로 쥐어짜서 승리하려고는 할 지언정 고의로 져주기 게임 따위는 하지 않았다.[19] 당시 롯데의 투수진은 그야말로 최동원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고 할만큼 비참 그 자체였다. 노상수는 1983시즌 종료 후 현역 입대로 전열에서 이탈했고, 장명부와의 불화로 삼미에서 롯데로 건너와 1984시즌 10승을 따낸 임호균 외에는 돋보이는 투수가 없었다. 더구나 만년 하위 단골에서 첫 한국시리즈 진출이라는 쾌거를 낳은 이상 우승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던 롯데로서는 어쩔 수 없는 대책이기도 했고...[20] 최동원의 이 한마디는 33년 후인 2017년 롯데의 포스트시즌 캐치프레이즈로 활용됐다. 그러나 준플레이오프에서 지역 라이벌 NC 다이노스에 패퇴하고 만다.[21] 한국시리즈 최초의 완봉승이다. 완투승은 원년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 박철순이 최초로 달성했다.[22] 우천으로 경기가 하루 순연했기에 선발 등판 한것이다. 원래는 6차전 때처럼 5회쯤 등판시키려 했다고[23] 1980년대부터 1990년대 말까지 각종 프로그램에서 리포터로 활동하던 김승규 씨가 당시 인터뷰어로 활동했다. 참고로 김승규 씨는 농구선수 출신이기 때문에 이 당시 스포츠 현장을 주로 다녔다. 한국시리즈 7차전 종료 직후 최동원에게 "하고 싶은 말이 뭐에요?"라고 묻는 사람도 이 사람이다.[24] 사실 김일융도 이 시리즈 3승을 기록하고 있었다. 이 시리즈 최동원과 김일융의 대결을 놓고 (김일융의 시점에서)'''4승 투수에 가려진 3승 투수의 눈물'''이라고 회자되기도 한다. 만약 이날 삼성이 승리했다면 현재 커뮤니티에서는 최동원이 아니라 "'''김일융의 한국시리즈 4승은 다시는 나와서는 안될 기록이다'''"라는 말이 돌아다녔을 것이다.[25] 성적대로 하자면 최초의 트리플 크라운인 이만수가 정규시즌 MVP를 받고, 최동원이 한국시리즈 MVP를 받는 것이 맞다. 그러나 기네스북까지 오른 아홉 타석 연속 고의사구로 홍문종을 걸러내면서 '비난은 잠시지만 기록은 영원하다'라는 김영덕 감독 때문에 기자진들이 외면한 이만수는 정규시즌 MVP를 놓쳤다.[26] 참고로 일본프로야구에서는 1958년 니시테츠 라이온즈의 이나오 가즈히사와 1959년 난카이 호크스의 스기우라 타다시가 일본시리즈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상대로 시리즈 4승을 기록한 적이 있다.[27] 실제로 2011년 9월 25일 방영된 KBS 스페셜 '무쇠팔 최동원 인생을 던지다' 편에서 당시의 인터뷰를 볼 수 있다.[28] MBC 스페셜 '불멸의 투수 최동원' 편을 보면 코에 휴지를 끼우고 노래를 부르는 최동원의 모습이 나오는데 표정으로 보기에도 매우 피곤해 보인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당시 최동원의 팀 후배이자 전담포수이자 한국시리즈 7차전 종료 직후 기뻐서 최동원에게 가장 먼저 달려가 끌어안았던 사진으로도 유명한 한문연이 2015년 최동원을 추억하며 기리는 의미의 SBS Sports 주간야구 방송에서 이 사건이 실제 일이냐는 질문에 맞다고 직접 증언했다.[29] 하지만 1984년의 엄청난 혹사에도 1985년에는 20승을 달성하고 1986, 1987년까지 꾸준히 두자리수 승수를 올리는 등 괴물같은 활약은 지속되었다. 선동열과 그 유명한 15회 완투 대결도 바로 1987년에 나온 것. 밑에서도 후술하겠지만 최동원이 비교적 이른 은퇴를 한 것은 혹사로 인한 후유증도 후유증이지만 그보다는 선수협 창설 시도로 인해 구단에게 찍혀서 삼성으로 트레이드를 당한 충격과 그로 인해 야구에 대한 동기부여와 의욕이 상실되는 정신적인 문제도 있었다. 그는 롯데맨에 대한 자부심이 컸다고 한다. 그러나 분명 구속이 많이 떨어졌고 변화구 궤적의 수준도 많이 떨어졌기 때문에 정신 충격이 혹사보다 더 높은 비중의 원인으로 보는 건 부적절하다고 보는 쪽도 많다. 롯데에 대한 자부심도 컸지만 한국 야구의 스타선수로서의 자부심 역시 컸던 최동원이 아무리 모욕적인 상황이라 해도 자기가 그만두면 뒀지, 팀에서 쫓겨났다고 현재 소속팀에서 열심히 공을 던지지 않을 성격과 인품은 아니기 때문이다.[30] 정확히는 마지막이 배신(강제 트레이드)당하는 것임을 알았더라면 아마 그 자리에서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였을 것이라고 말했다.[31] 여담으로 이순철은 자고 있는 동안 운전 중이던 김대현이 의자를 젖혀줘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32] 1981년도 실업 롯데에 입단하기로 하면서 약속한 2,900만 원을 주지 않은 것을 말한다.[33] 삼성 선수로 뛰던 1990년에 당시 롯데 최대 신인이었던 박동희를 상대하게 된다. 롯데 팬들이 영웅으로 여기던 투수와 기대하는 최유망주가 붙은 셈. 결과는 최동원이 김민호 등에게 홈런을 얻어맞으며 패로 기록된다.[34] 원문 기사의 부분부분을 인용한 내용으로 보다 상세하게 원문을 보고픈 사람들은 기사를 참조하기 바라며, 저작권상 문제가 있다면 해당 부분은 기사 링크만 시키고 내용 삭제해줄 것을 바람.[35] 이점은 삼성에서도 연봉협상 당시 똑같이 분쟁을 일으킨 장효조나 김시진도 동일하다.특히 장효조도 최동원과 마찬가지로 1988년 시즌 시작전 연봉협상으로 분쟁을 일으켰기 때문이다.그나마 장효조는 합의에 성공하여 시즌을 날려먹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