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동열/선수 경력
1. 아마추어 시절
송정동초등학교 시절 먼저 야구부에 들어갔던 다섯살 위의 친형을 보고 부모님을 졸라 4학년부터 야구를 시작했다.[1] 여관을 운영하던 부친 선판규 씨는 둘째아들을 사업가로 키우고 싶어했다. 그러나 아들이 야구를 고집하자 "이왕 할 꺼면 최고가 되어라" 며 공터에 조명시설까지 갖춘 야구장을 만들어줬다. 송정중 2학년 때 유격수에서 투수로 포지션을 바꿨고 야구부가 해체되는 바람에 무등중으로 전학했다.
광주일고 1, 2학년때는 투수보다는 타자로 두각을 나타냈다. 3학년때는 투수로서 1년 후배인 차동철과 함께 원투펀치를 맡아 팀을 우승으로 이끄는 선수가 되었다.[2] 3학년이던 1980년에는 첫 전국대회인 대통령배에서 에이스 겸 5번 타자로 출전해 4강 충암고전에서 4피안타 완봉승을 따냈다. 결승전에서 이순철이 유격수로 뛴 동향의 광주상고를 만나 구원 등판해 팀의 우승을 지켰다. 같은 해 봉황대기에 출장해 경기고와의 경기에서 노히트노런을 기록한 바 있다.[3]
선동열이 고등학교 3학년이던 1980년에는 프로야구 출범 이전이었기 때문에 대학 진학이 당연시되었고, 연세대와 한양대가 선동열을 입학시키기 위해 각축전을 벌였지만 고려대는 초고교급 선수인 선동열의 스카우트비용이 없어서 오퍼를 넣지 못했던 상태였다.[4] 그러나 선동열의 아버지 선판규씨가 직접 고려대 야구부장에게 전화를 걸어 고려대에 진학시킬 의사를 내비쳤고, 일사천리로 입학 절차가 진행되어 선동열은 1981학번으로 고려대학교에 입학한다.[5][6] 고려대학교 입학 동기로는 정삼흠[7] , 한영준이 있으며 선후배로는 김경문[8] 양상문, 양승호, 박종훈, 박노준 등이 함께 호흡을 맞췄다.
정기 연고전에서는 두 차례 출장해 모두 완봉승을 기록했다. 1981년에는 출장하지 못했고 팀은 0-3으로 패배했다.[9] 1982년에는 3-0 완봉승을 거두었다. 1983년에는 양교 총장이 성명서를 발표하면서 연고전이 무산되었다. 1984년에는 6-0 완봉승을 거두었다.
선동렬의 기량은 고등학교 3학년 때 물이 올라서 대학시절 만개했다는 평이며, 선동렬 본인도 대학시절에 가장 공이 빨랐다고 회고했다. 그 결과 위에서 언급한 2경기 완봉승이나 아래 서술할 세계야구선수권대회의 MVP 수상 등의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일부 팬덤이 주장하는 것과 달리 대학리그에서는 프로리그와 같이 0점대 방어율을 기록하진 못했다. (물론 뛰어난 투수였다는 점은 변함이 없다.) 당시 대학리그는 알루미늄 배트를 사용했던 것이 주된 이유였다.
고려대학교 입학 이후, 대한민국 U-18 야구 국가대표팀에 차출되어 1981년 제1회 세계청소년야구대회에 참여, 김건우, 조계현 등과 함께 초대 우승을 일궈냈다.[10]
1년후인 1982년에는 만 19세라는 어린 나이에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에 선발되어 당시 서울에서 열린 세계야구선수권 대회에서 미국, 대만, 일본전에서의 거듭된 호투로 대한민국 우승의 주역이 된다. 참고로 이 대회에서 찍은 평균 자책점은 0.31. 다만 이 대회 방어율 1위는 0을 찍은 임호균이었다. 이 시기부터 최동원의 뒤를 이어 국가대표 우완 에이스 자리를 물려 받는다. 자세한 내용은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1982년항목 참조.
1984년에 동아일보를 통해 LA 다저스에서 오퍼를 받았다는 발언을 하였고, 본인도 여러 인터뷰를 통해 1982년에 다저스에서 영입을 제안받았다는 발언을 하고 있다.[11][12] 1984년 한미 대학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 4차전과 6차전는 부진했지만, 1984년도에 LA 올림픽에서는 꽤 호투했다. (16이닝 자책점 1점, 1승1패 방어율 0.56) 다만 토너먼트제에서 선동열이 1패를 한 것은 문제(자책점은 1점)였고, 쿠바가 빠졌는데도 한국팀이 메달을 따지 못했기 때문에 평가절하되는 경향이 있다. 초특급인 투수를 놓치지 않으려는 해태는 구단의 사정이 좋지 않아 최대한 계약금을 깎아보려고 이런저런 수를 썼다. 하지만 선동열 측은 최소 3억을 요구했고, 해태는 난색을 표했다. 이 과정에서 군면제에도 실패하고[13] , 안 되면 대학원이나 가버리겠다고 대학원 시험을 쳤는데 이것마저 떨어져 버린다. 해태는 '''이제 고개 숙이고 오겠구나'''했는데 선동열은 '''한국화장품 야구단과 계약해버린다'''.[14] 당연히 해태 팬들은 난리가 났고 해태 사무실과 선동열의 집에 있는 깨질만한 물건들은 죄다 박살이 나는 분위기 속에서 1985년 새해로 넘어갔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태와의 협상은 불발. 이 와중에 선동열은 한국화장품 합숙 훈련에 불참하는 한편 상무 입단을 선언했다가 번복하는 등 오락가락했는데, 당시 본인으로서도 매우 고민이었던 듯하다.
결국 선동열은 한국화장품 유니폼을 입었다만, 선동열은 아직 확답을 정하진 못한 상태였다. 그러나 어머니의 간곡한 설득 끝에 프로로 가겠다고 선언, 1억 5천의 계약금을 받고 1985년 3월 25일 해태 입단식을 가졌다.
그러자 이번엔 한국화장품 측에서 반발. 그도 그럴 것이 엄연히 입단한 자기 선수가 계약 해지도 안했는데 이중계약을 맺은 꼴이니... 게다가 직후 김용수와 민문식도 비슷한 수법으로 프로행이 결정나는 바람에 아마야구계의 집단 반발로 번지고 만다. 선동열 개인에게는 프로입단무효 가처분 소송이 걸렸고, 5월에는 해태가 선동열을 1군에 등록 강행하겠다고 하면서 싸움이 가열되는 양상을 보였다. 하지만 5월 21일, KBO 차원에서 선동열을 당분간 출전시키지 않는 대신 선동열에게 걸린 소송을 취하하는 것으로 KBO와 KBA가 극적 합의를 함에 따라 일약 선동열 사건은 큰 일 없이 마무리되었다. 이 사건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실업야구에 진출한 선수는 실업야구에서 최소 2년을 플레이해야 프로에 진출할 수 있다는 규정[15] 이 명문화되었고, 선동열은 전반기 등판 없이 1985 시즌 후반기부터 등판하게 된다.[16]
이렇게 복잡하게 프로에 입성한 후 '''그의 전설은 시작된다.'''
2. 프로 선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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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해태 타이거즈 시절
한국야구의 레전드 투수 최동원, 김시진과 함께. 자신들의 배번인 18+11=29을 익살스럽게 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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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역 시절 신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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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첫 해(1985년) 한국화장품 야구단과의 이중 계약 파문으로 후반기부터 출전했다.
삼성 라이온즈와의 첫 프로 경기에서 7회까지 4피안타 무실점 호투를 했는데, 김응용 감독이 계속 던지게 했고 결국 8회에 무너졌다. 7.2이닝 동안 5실점으로 데뷔경기를 마쳤다. 겸손해 지라는 뜻에서 데뷔전을 실점할지도 모르는 상황으로 밀어 넣었던 것이다. 경기 후 "좋은 경험을 얻었습니다. 데뷔전에서 승리투수가 됐더라면 자만심에 들떴을지도 모릅니다만 오히려 지금의 심정은 패전투수가 된 것이 저의 프로생활을 위해 잘된 것 같습니다" 라고 말했지만, "80%정도의 힘으로 던졌습니다. 컨디션은 좋지 않았지만 최강타자들로 구성된 삼성선수들과 대결하고 나니 프로에서도 내 볼이 통할 수 있겠구나 하는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라고 말하는 패기도 보여주었다.#
어쨌거나 평균자책점 1위(1.70)를 기록하며 7승 4패 8세이브로 시즌을 마무리했다.[18] 분명히 뛰어난 성적을 기록했으나, 시즌 내내 3루에서 좋은 모습을 보인 입단동기 이순철의 활약으로 인해 아쉽게 신인왕은 놓쳤다. 그러나 본격적인 활약은 이듬해인 86년부터 시작되었고, 그 때부터 선동열은 리그를 폭격하기 시작한다.
데뷔 2년차인 1986년에는 '''평균자책점 0.99 262이닝[19] 24승 6패 6세이브 214삼진 19완투 8완봉 sWAR 14.89''' 라는 전대미문의 기록을 세우며 프로야구를 초토화시켰다.[20] 이듬해인 1987년에는 162이닝 동안 14승 2패 6세이브에 평균자책점 '''0.89''' sWAR 9.39[21] 를 기록하며 2년 연속 '''0점대 방어율'''이라는 독보적인 활약을 펼치며 해태의 KBO사상 첫 2년 연속 우승에 힘을 보탠다. 1988년도 역시 '''16승 5패 10세이브 평균 자책점 1.21 sWAR 11.79'''를 기록하면서, 에이스로서 전후기 통합리그로 치뤄진 단일 시즌 첫 해 우승을 견인했다.[22] 특히 1988년은 1986년에 이어 선동열이 선발로서 두 번째로 잘 던졌던 시즌이었는데, KBO 단일시즌 WAR로만 봐도 86선동열-83장명부에 이은 3위를 기록했을 정도. 1989년과 1990년 역시 각각 '''21승 3패 8세이브 평균자책점 1.17 sWAR 10.52, 22승 6패 4세이브 방어율 1.13 sWAR 11.06'''을 기록해 리그 MVP와 투수 3관왕을 차지하며 전성기를 구가했다.[23] 1989년에도 해태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끌며 리그 4연패에 기여했으나, 1990년에는 플레이오프에서 삼성에게 덜미를 잡히면서 한국시리즈 5년 연속 진출이 좌절되었다.[24] 1991년에는 선수생활 7년만에 연봉 1억원 계약을 맺었다. 입단 계약금으로 억단위를 받는 경우는 이전에도 있었지만, 순전히 연봉만으로 1억을 받은 것은 선동열이 처음.[25] 선동열은 한국 프로야구에서 억대 연봉 시대를 연 주인공이었던 셈이다. 이 해에도 19승 4패 6세이브에 평균자책점 1.55, sWAR 10.97을 기록하며 또 다시 투수 3관왕을 차지했다. 그러나 리그 MVP는 35홈런을 때리며 센세이션을 일으킨 빙그레 이글스의 장종훈이 차지했지만, 해태가 6번째 우승을 달성하면서 MVP를 놓친 아쉬움을 달랬다. 한국시리즈 마지막 경기 9회에 선동열은 마지막 타자를 삼진으로 장식하며 1989년 한국시리즈 마지막 경기에 이어 포수 장채근과 함께 승리의 기쁨을 나눴다.[26]
그러나 1992 시즌 이후 선동열은 선수생활에 중대한 기로를 맞게 된다. 1992년 4월 11일 잠실 OB전에 그가 선발로 예정되어 있었는데 전날 일기예보에 다음날 비가 온다고 되어있어서 경기 취소를 확신하고 마음놓고 술을 마셨다. 하지만, 의외로 경기가 시작할 무렵에는 비가 잦아들어서 경기가 강행되었고, 선발로 등판해서 경기를 치르던 도중 빗방울이 점점 굵어지는 가운데 식어가는 어깨로 무리하게 투구를 했다. 그는 이 경기에서 완봉승을 따냈지만 그 결과 어깨에 건초염이 생기면서 부상으로 거의 시즌을 접다시피 했다. 당시에는 예상도 못했지만 이 경기가 결국 선동열 선수 커리어의 마지막 완봉승이 되었고, 결국 그의 야구 인생과 해태 타이거즈의 행보에 거대한 전환점을 가져다 줬다. 선동열의 1992년도 기록은 2승 8세이브 0.28.[27] 물론 시즌 1위였던 빙그레나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롯데의 전력이 매우 강력한 탓도 있었지만 선동열을 제외하고도 10승 투수가 5명[28] 나왔던 1992년의 해태 타이거즈 전력을 고려하면 해태로서는 매우 아쉬웠던 시즌. 선동열이 거의 시즌을 거의 공치다시피 한 해태는 플레이오프에서 롯데의 기적의 행진의 제물이 되는 이변의 희생자가 되었으며,[29] 다행히 건초염이 낫긴 했지만[30] 부작용으로 어깨의 근지구력이 약화되면서 1993년 선동열은 전업 마무리로 뛰면서 '''49경기 126이닝 10승 3패 31세이브 평균자책점 0.78, sWAR 10.27'''을 기록하며 93년 해태의 7번째 우승이자 자신의 선수시절 마지막 한국프로야구 우승을 이끈다.[31] 흔히 이 부상 이후 선동열이 완전히 마무리로 전업했다고들 하나 실제로 선동열은 1994년에 선발 재전환 시도를 하면서 8차례 선발로 출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시즌에 커리어 로우를 기록하게 되는데 그 커리어 로우가 평균자책점 2.73에 6승 4패 12세이브에 sWAR 4.16(...) 아무튼 94년 선발로서의 한계를 느낀 선동열은 그 다음해이자 한국 프로야구 마지막 시즌이었던 1995년까지는 전업 마무리로 뛰게 된다. 이 해 '''48경기 출장 109이닝[32] 5승 3패 33세이브 방어율 0.49 sWAR 9.09'''를 기록한 후 주니치 드래곤즈로 이적하게 된다. 그리고 해태 선발진의 축은 선동열에서 조계현으로 이어지게 된다.
선동열은 이렇듯 한국 프로야구에서 뛰는 동안 압도적인 활약을 펼쳤는데, KBO 기록으로만 보면 그에 범접할 투수는 사실상 찾아 볼 수 없으며. 현역시절 직접적인 맞대결에서도 그의 선수경력 기간 동안 선수생활 초반의 나이 차가 좀 있던 최동원을 제외하면 라이벌이라고 부를 수 있는 선수조차 나타나지 않았다.[33] 이로 인해 박찬호 이전에 미국 MLB에서 관심을 가지기도 했다. [34] 매년 범접할 수 없는 성적을 찍는 와중에서도 선동열이 선발과 마무리에서 각각 정점을 찍은 시즌은 1986년과 1993년으로, KBO 역사상 이 시즌에 버금가는 기록을 올린 선수는 찾기가 힘들 정도. 물론 1986년과 1993년이 역대 최고의 투고타저 시즌으로 KBO 전체 방어율이 3점대 초반 정도였던 점은 감안해야 한다.[35] 그러나 그 투고타저를 고려해도 1986년 선동열의 조정 평균자책점은 '''307.1'''[36] 이며 역대 모든 선수들 중 단일 시즌 WAR 1위를 기록했을 정도로 압도적인 활약을 펼쳤다.[37]
통산 평균자책점이 '''1.20'''인데, 역대 평균자책점 2위인 최동원이 선동열과 함께 80년대에 활약하고 그 수치도 2.46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실로 엄청난 기록이며 앞으로도 깨지기 힘든 기록이 아닐 수 없다. 애초에 KBO 역사상 선동열의 통산 평균자책점보다 낮은 기록을 규정이닝으로 1시즌이라도 기록해 본 선수는 1993년에 1.13의 방어율을 기록한 OB의 김경원밖에 없다. 통산 WHIP도 0.80 인데, 2위인 이상훈 선수의 1.05와는 제법 차이가 많이 난다. 1993년 시즌에는 10승 3패 31세이브에 평균자책점 "0.78", WHIP는 0.54로 역대 시즌 최고의 평균자책점과 WHIP을 기록했다. 게다가 정규이닝을 소화하면서도 0점대 평균자책점을 3시즌이나 기록했다. 평균자책점 외에도 인간 같지 않은 기록이 많다. 대표적으로 '''통산 피홈런 28회'''[38] 로, 이는 한국프로야구에서 통산 규정이닝(1000이닝) 이상 투구한 선수 중 최소 피홈런 1위이다.[39] 이 기록에 재미있는 일화가 있는데, 유승안[40] 이 선동열의 공을 쳐서 만루홈런을 때린 뒤[41] 다음날 스포츠신문 1면에 자기 사진이 나올까 설레었으나 정작 다음날 스포츠신문 1면의 기사는 '''선동열 만루홈런 맞다.'''[42] 그리고 유승안의 이름은 자그마하게 '유승안에게'라고 나왔다고 한다. 참조[43] .
기록에서 나타나듯이 전성기 선동열은 그야말로 완전체를 넘어 절대자에 가까웠다. 구속도 평균 142km에서 145km에 형성되었으며 최고구속이 150km대에 달할 정도로 매우 빨랐고[44] , 역대 최고로 평가받는 뛰어난 슬라이더를 자랑하면서 거기에 리그 평균 이상의 커브도 섞어 타자들을 요리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제구력까지 뛰어났는데, 물론 당시 넓은 스트라이크 존의 영향이 있었지만 KBO 통산 BB/9가 1.87에 그칠 정도로 잘 활용할 줄 알았다. 위의 최동원, 김시진과 함께 한 사진에서도 드러나듯이 체격이 상당히 유연하고 좋았던 것도 당시 투수들 기준으로 롱런할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 그 뿐 아니라 배짱, 센스 등등 투수로써 갖춰야 할 모든 자질이 다 갖추어져 있었고, 독보적으로 완벽했다.
이로 인해 상대팀이 이기고 있어도 선동열이 불펜에서 몸을 풀고 있으면 상대 타자들이 기가 죽었을 정도로 막강한 능력을 자랑했다. 그래서 김응룡 감독은 선동열이 컨디션 난조로 나오지 못할 때도 불펜에서 몸을 풀게해서 상대편 기를 죽이곤 했다고... 실제로 선동열이 불펜에서 몸을 풀면 타자들이 스윙을 서둘렀다는 증언이 있다.[45] 이러한 허장성세가 제대로 먹힌 것이 1988년 한국시리즈 6차전(1988.10.26) 이었다. 당시 선동열은 손가락 부상으로 등판할 수 없었지만 2:0으로 앞선 상황에서 몸풀기를 시키자 빙그레 타자들의 멘탈이 흔들렸고, 이에 다음날 죽은 공명에 비유하는 기사가 나오기도 했다. 위에서의 김응룡의 기용법 덕분에 한국에서의 통산 146승 중 딱 절반인 73승이 구원승이다. [46][47] 당시 라이벌이었던 최동원 역시 개인 최고 성적을 올린 1984 시즌 후반기에 구원으로 더 많이 등판했는데, 김응용 강병철 두 감독 모두 '저렇게 잘던지는 놈을 선발내서 4, 5일에 한번씩 써먹으니 그냥 불펜대기 시키다가 위급하면 막 써먹는게 더 좋겠네' 싶어서 불펜으로 돌렸고 실제로 선발이 위험하다 싶으면 몇 이닝이 남았든 그냥 올라가서 던지게 했다. 현대 야구에서는 지탄을 받을 활용법이나, 당시 프로야구가 고교 및 실업야구에서 벗어난지 얼마 안된 시대라는 점을 감안해야 하는 부분.
이렇듯 한국에서 선수 시절 선동열은 프로야구를 말그대로 지배한 완벽에 가까운 투수였으나, 포스트시즌에서만큼은 그 이름값을 하지 못하였다.[48] 풀타임 선발로 뛰었던 1986년~91년을 기준으로 할 때 5번의 한국시리즈와 3번의 플레이오프에서 그가 거둔 성적은 72이닝, 평균자책점 2.50, 피홈런 6개. 결코 나쁜 성적은 아니나, 그의 프로통산 방어율과 통산 피홈런을 생각하면 나쁜 기록이다.[49] 그래서 혹자는 선동열은 정규시즌용이라고 평하기도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선동열의 압도적인 페넌트레이스 성적에 비한 성적일 뿐 '''저 기록 또한 나쁜 기록은 아니다'''이다. 그만큼 해태는 선동열을 페넌트레이스 내내 잘 써먹었고, 선동열도 시즌 내내 활약으로 팀을 한국시리즈까지 올려놓은 일등공신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게다가 해태는 한국시리즈만 가면 선동열 외 다른 선수들이 제대로 각성하는 묘한 징크스가 있었기에[50] 선동열의 상대적으로 빈약한 포스트시즌 성적은 종종 묻히곤 한다. 어쩌면 이런 현상이 당연한 게 당시 한국프로야구의 투수기용을 생각해보면 정규시즌에서 선발과 마무리를 오가며 시즌 내내 던졌으니 포스트시즌에 가서는 체력이 떨어지는 건 당연한 결과.[51] 선동열도 결국은 사람이니 당연히 정규시즌 때보다 체력이 떨어진 상태에서 정규시즌 만큼의 성적을 내는 건 할 수 없는 일이다.
2.1.1. 역사상 최고의 선발 투수였는가?
비교 대상조차 없는 압도적인 클래식 스탯에, 세이버 스탯 역시 압도적인 '''국보'''라는 별명이 아깝지 않은 KBO리그 역사상 단연 최고의 투수였다고 할 수 있는 선동열이지만, ''''과연 최고의 선발 투수인가?'''' 라는 의문을 근거로 경력을 깎아내려는 시도가 이전부터 있어왔다. 다만 이에 결론부터 말하자면 '''최고의 선발로도 분류할 수 있다.'''
먼저 제시되는 의견으로 당대 선발 에이스 치고는 소화 이닝이 적다는 것인데, 이닝 소화 능력은 1980~90년대 에이스의 필수요소 중 하나로 꼽혔기에 거론되는 비판근거이다. 선동열이 선발로 활동했다고 할 수 있는 86시즌부터 91시즌까지 6시즌 동안, 이닝이터의 대체적인 지표로 분류되는 200이닝+, 넓게 잡아 185이닝+를 기록한 시즌이 86시즌과 90, 91시즌으로 세 시즌이니 많다고 할 순 없다. 그러나 동기간의 상대적인 이닝 소화 능력으로 봤을 때, 87시즌과 89시즌을 제외하면 모두 리그 5위권 내의 이닝을 소화했고, 그 두 시즌도 리그 11위의 기록으로 결코 적다곤 할 수 없다. 또한 선동열이 시즌 시작부터 합류한 첫시즌인 86시즌 이후로 91시즌까지 '''선동열보다 더 많은 이닝을 소화한 선수는 없다.''' 게다가 선수별 연속 6시즌의 기록으로 묶었을 때도 선동열보다 더 많은 이닝 소화를 한 건 당대 경쟁 에이스인 최동원[52] 과 김시진[53] 밖에 없다. 선동열은 결코 적은 이닝을 소화하지 않았고 오히려 꾸준히 많은 이닝을 소화한 몇 안되는 투수이다.[54] 기존의 이닝 소화 능력을 까내리는 사람들의 주장은 기록만 찾아봐도 오히려 선동열의 월등한 점을 조명한 셈이 되며, 더불어 최고의 선발투수인지에 대해 비판을 하려면 선발일 때의 이닝 소화 기록을 가지고 와야할 것이다. '''선발로 분류되는 시기의 이닝 소화력은 기록을 보면 이미 검증되었다.'''
다음으로, 포스트 시즌 때 선발로서 이름값을 하지 못했다는 건데, 선동열이 포스트 시즌 선발로서 등판한 건 5차례로 모두 한국시리즈에서의 등판이며, 86시즌 두차례, 88, 89, 91시즌 각 1차례씩 선발로 나왔다. 기록은 86시즌 15이닝 5실점(3자책), 88시즌 7과3분의1이닝 무실점, 89시즌 8이닝(완투) 4실점(3자책), 91시즌 9이닝(완투) 4실점(4자책)이다. 39와3분의1이닝동안 10자책으로 평균자책점 2.29의 성적. 2완투도 곁들였다. '''선동열'''이란 이름값에 못 미칠뿐 결코 못한 성적은 아니다.
마지막으로, 선발 등판횟수가 너무 적다는 내용. 당대 선발 에이스들이 전천후로 뛰었다 해도 대부분 선발등판수가 더 많은 것에 비해, 선동열은 1987년~1990년까지 중간등판 수가 더 많았다. 1987년~1990년까지 각 시즌당 31-31-36-35 차례의 경기에서 선동열의 선발 등판 횟수는 11-12-12-16회 였다. 이 때문인지 1987~90시즌은 선발이 아닌 마무리로 활동했다고 보아야 한다는 사람들도 있다.[55] 하지만 알다시피 10차례 이상의 선발 등판한 투수를 과거든 현재든 선발투수로 분류하지 중간계투로 분류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팀내 선발 등판 횟수도 87시즌을 제외하면 모두 5위 안에 들었기에 소위 선발 등판 횟수만으로 따졌을 때도 5선발 안에 들어온다. 물론 선동열 수준의 투수에게 등판 형식과 같은 논쟁은 의미 없는 문제이긴 하지만.
간단히 기록을 보면 선동열 경우 일단 선발로 나오면 60% 넘는 경기에서 완투를 했고 25%가 넘는 경기에서 완봉을 했다.[56] 즉 선수생활중 선발보다 불펜투수로서 더 활약했다는 의미이지 '''선발투수로서 성적이나 실력이 부족했다는건 아니다.'''
선발투수 선동열 역시 부족함이 없으며, 그저 선발로서 등판한 횟수가 생각보다 많지 않았을 뿐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선발로 분류할 수 있는 시즌들 모두 리그에서 압도적인 원탑의 성적을 거뒀으니 최고의 선발투수로 분류되는 것 또한 무리는 아니다.'''
2.2. 주니치 드래곤즈
KBO는 당시 FA제도가 없어서 아무리 팀에 공헌을 많이 해도 구단이 풀어주지 않으면 어디로도 갈수 없었다. 1995 시즌 후 11년간 6회 우승에 기여한 선동열은 해태 구단에 해외 진출을 원한다는 뜻을 강하게 피력했고, 이에 해태는 처음에는 그의 해외 진출을 반대하다가 1년만 더 뛰고 1996년 우승한뒤 떠나라고 했다. 선동열은 은퇴불사의 전략을 펼치면서 강경하게 나갔고, 국민들도 대다수가 해외 진출을 찬성해서 결국 일본프로야구팀 주니치 드래곤즈로 임대시키기로 결정, 이적료 3억 엔에 주니치와 임대 계약을 맺고 한국을 떠나 일본으로 가게 된다.[57]#. 주니치에 입단하면서 달게된 등번호는 20번. 주니치 드래곤즈의 투수 에이스[58] 들이 차례로 달았던 등번호이다. 그만큼 진출 당시 일본에서도 기대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첫 해인 1996년에는 태평양처럼 넓었던 국내 프로야구보다 훨씬 좁은 일본의 스트라이크존 적응 문제와, 더 높은 레벨의 일본 타자들을 상대하면서 많은 적응에 어려움을 겪었다. 한국타자들이 헛스윙하기 급급하던 공을 일본 타자들은 뛰어난 선구안으로 볼넷을 얻어내거나 뛰어난 컨택트 능력을 바탕으로 기어코 안타를 만들어내니 당시 선동열 입장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59][60] 시즌 도중 2군을 전전하기까지 하며 패전처리로 주로 뛰면서 평균 자책점 5.5로 시즌을 마무리하게 되고, 바로 전시즌 한국에서의 평균자책점보다 무려 5점이나 상승했을 정도로 부진을 겪게 된다. 다만, 클래식 스탯의 경우 의심할 여지 없는 최악의 성적이나, 세이버 스탯을 보면 상위리그로의 첫 진출 시즌 치고는 그렇게 나쁜 시즌은 아니었다. 일본 진출 첫해인 1996년 선동열의 FIP는 2.62로, 평균 자책점에 비해 상당히 괜찮았으며, K/9 역시 11.17을 기록하며 구위는 일본에서 먹히는 수준이었다. 무엇보다 BABIP이 무려 .382를 기록하기도 하는 등, 세이버 매트릭스의 관점으로 평가하면 운이 따라주지 못한 시즌이었다고 볼 수 있다.[61]
하지만 여기서 선동열이 일본 데뷔 첫 해 부진한 이유 역시 살펴볼 수 있다. 1996년이 주니치 커리어에서 K/9이 가장 높았던 시즌이라는 점을 감안하면[62] 빠른 공의 구위에 문제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즉 해태시절보다 노쇠화로 인해 구위가 떨어져서 성적이 좋지 못했다는 말은 근거가 없는 이야기로 볼 수 있다. 정작 문제는 KBO에서는 상대가 없었던 주자 견제 능력과 제구가 일본에서는 매우 떨어지는 수준이었다는 점이다. 1996년 BB/9은 주니치 시절 중 가장 좋지 않은데 3.6개을 조금 넘어간다. 국내 마지막 커리어인 1995년 BB/9이 1.15개였으니 1년만에 BB/9이 3배나 폭등한 것이다. 거기에 견제 능력이 확실히 좋지 못해 타자가 1루에 나가기만 하면 그린 라이트였고, 이는 앞서 각주에 제시된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타선에게 유독 약한 원인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즉, 구위는 좋아서 삼진은 잘 잡아내는데, 조금이라도 컨디션이 좋지 못하면 썩 좋지 않은 제구에 볼넷으로 타자가 출루하게되고, 견제능력이 떨어지는 탓에 주자가 손쉽게 도루에 성공. 이로 인한 불안한 경기운영으로 주자를 쌓다가 장타를 맞고 대량 실점하는 패턴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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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기사. 선동열이 상대타자를 경계한다는건 KBO 리그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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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역사인 1996년 시즌에 중간계투로 나와 던진 모습. 결국 점수는 내줬다. 보다시피 구위는 문제가 없던 시절. 오히려 해태 시절보다 구속은 더 빨라졌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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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바탕으로 빠른 공의 구위가 아닌 다른 원인을 지적하는 하일성.
굴욕을 맛본 1996년 시즌[63] 이 끝나고 겨울이 되자 마음을 다잡고 투수코치에게 직접 개인훈련을 부탁해서 대대적인 수정에 들어간다. 이때 어찌나 독하게 훈련했던지 김응용 감독이 "한국에서 저렇게 훈련했으면 30승은 했을거다."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 3000개 투구와 하체단련으로 제구력을 다잡고 투구폼을 수정하여 주자견제능력을 보완하는 등 본인의 피나는 노력과 때마침 개장한 홈구장이 투수들의 천국 나고야돔이라는 이점 덕분에 1999년 시즌까지 좋은 활약을 보였다. 1999년 시즌은 논란이 조금 많은 편이지만, 주니치 시절의 변화가 마음에 들었던지 훗날 '나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을만큼 훈련해보자.'는 각오로 훈련에 임했으며 '자신의 전성기는 한국 시절이 아닌 일본에서 뛴 시절'이라고 회고했다. 사실 선동열이 정말 대단한 점은 성적도 성적이지만 자존심을 내려놓고 변화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성적으로 자신의 가치를 입증했다는 점이다. KBO에서 선동렬은 상대팀 타선을 초토화시키며 절대자로 군림했지만 일본에서는 구위는 괜찮지만 제구도 경기운영도 부족한 2군을 들락거리는 패전처리조일 뿐이었다. 이러한 성적에 뒤따르는 냉정한 시선이나 대우를 한국에서는 겪어보지 못했으니 여간 자존심이 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2군에 내려가서 자기 빨래도 직접해야하고 적응이 어려웠던지 1996년 시즌이 끝나자 짐싸서 바로 귀국할 생각까지 했다고 한다. 이러한 심리적 압박과 적응의 어려움은 지바 롯데로 이적했던 이승엽도 겪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서 자신의 위치를 냉정하게 돌아보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을 가진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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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1997년에는 '''1승 1패 38세이브 방어율 1.28 WHIP 0.76 WAR 4.5''', 1998년에는 '''3승 무패 29세이브 방어율 1.48 WHIP 0.86 WAR 2.3'''를 기록하며 일본 리그 최고 수준의 마무리로 등극했다. 투구 스타일은 KBO시절 오승환과 비슷하게 주무기는 70% 이상 던지는 직구였고 여기에 슬라이더를 가미했다. 사실상 KBO가 탑클래스 선수들의 일본 진출을 위한 교두보로 전락한 시발점은 선동열의 97년 이후의 활약이었다.[64][65]
선동열의 마지막 시즌이던 1999년 성적은 1승 2패 28세이브 2.61의 평균 자책점을 기록하여 표면적으로는 나쁘지 않은 성적을 기록했지만 1997, 98년의 성적과 비교하면 확연히 떨어진 성적을 기록했다. 무엇보다 39경기라는 적지않은 경기에 등판하였음에도 소화이닝이 31이닝으로 평균 1이닝도 안될 정도로 떨어졌다. 한 마디로 마무리가 불안해서 9회 시작하자마자 출격시키지를 못하고 아웃카운트 1, 2개 남겨놓고 투입하는 일이 꽤 있었다는 소리.[66] WHIP으로 봐도 1997, 1998년에 0.76, 0.86을 기록한 반면 1999년은 1.32로 치솟으며 확연히 불안해졌다는걸 스탯으로도 확인할수 있다. 당시 주니치의 감독이었던 호시노 센이치가 역시 전년에 비해 불안한 모습을 보인 사사키 가즈히로와 함께 선동열과 사사키 모두 올해는 구위가 아닌 얼굴로 마무리를 하고있다고 발언을 했을 정도. 전성기를 지난 피칭을 하지만 그 투수의 이름값으로 타자들에게 부담을 주어 피칭을 한다는 것을 은유적으로 언급한 것이다.
은퇴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이야기가 있는데 본인이야 명예로운 은퇴였다고 하지만 시즌 막판부터 주니치와의 협상과정에서 잡음이 많아 매끄럽지 못한 것이 원인이 된 것이 사실이다.[67] 성적 또한 1997년~1998년에 비해 떨어진 상황이었는데 실제로 1999년 시즌 중 선동열은 3경기 연속 블론세이브를 기록할 정도로 구위가 점점 떨어지고 있었고 덩달아 이닝 소화율도 낮아지며 시즌 중 2군에 다녀올 정도로 노쇠화 조짐이 보이던 상황이었다.
불안감을 느낀 주니치에서는 시즌 도중 새로운 마무리 투수 에디 게일러드를 영입했고, 선동열의 다음 시즌 계약 때는 야마다 히사시 수석 투수코치를 비롯한 코칭스태프가 '''"내년 시즌에는 마무리로 기용할 수 없다. 미들맨으로의 보직 변경은 물론 때론 2군행도 감수해야 한다"'''고 말했었다. 게다가 이 시절 주니치의 불펜 투수진은 선동열을 굳이 아쉬워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매우 좋았다. 삼성 라이온즈의 투수코치를 맡는 오치아이 에이지, 이후 부동의 릴리프투수로 떠오른 이와세 히토키 등 일본인 불펜 투수진이 매우 충실했다.
그 후 보스턴 레드삭스로의 진출을 계획했다. 실제로 보스턴은 선동열이 1995년 해외 진출을 추진했을 때부터 러브콜을 보내왔던 팀 중 하나였고, 기존 마무리였던 톰 고든이 어깨 수술을 받아 마무리 자리에 공백이 생기자 그 대체자로 선동열을 영입하겠다는 계획을 세운 상태였다. 1999년 말 주니치의 센트럴리그 우승 기념으로 선수단 전원이 미국으로 여행을 가게 되었는데, 이 시절 보스턴 스카우트와 만나 입단 협상을 벌이며 2년 계약을 제시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입단 테스트를 받아야 하고 테스트 결과에 따라 계약 세부조건이 결정되며, 가족들의 집을 포함한 주거비를 자비로 부담해야 된다는 다소 굴욕적인 이야기를 듣고 부친의 종용으로 결국 1999년 11월 22일, 은퇴를 선언하며 '''대한민국의 국보급 투수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사실 명예로운 은퇴라고 보기에는 다소 잡음이 끼인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는 나쁘게 상황이 돌아가자 깔끔하게 은퇴를 결심하고 KBO의 레전드로 남았다.
은퇴경기는 2000년 3월 9일 나고야돔에서 열린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시범경기 도중 열리게 되었다.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대표타자였던 마쓰이 히데키와 상대하게 되는데, 타석에 들어선 마쓰이가 안타를 때리고 서로 웃으면서 포옹했다. 참고로 마쓰이는 선동열 상대로 통산 15타수 5안타(모두 단타) 무볼넷이며 타율은 .333로 강한 편이었다. 참고로 마쓰이가 메이저리그로 진출한 후에 천적으로 군림했던 선수가 바로 박찬호다.(마쓰이와의 상대전적은 9타수 1안타(홈런) 1볼넷 2타점이다.) 대신 스즈키 이치로에게 약한 모습을 보였다. 경기가 끝난후 마쓰이에게 선동열의 은퇴경기에서 어째서 안타를 쳤는가에 대해서 물어봤는데. '''"현역을 은퇴하는 선수에 대한 내가 보일수 있는 최대의 예의이다. 오히려 일부러 치지 않았으면 자존심이 상했을 것이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주니치 시절 별명으로는 국내 여러 스포츠 찌라시에선 '나고야의 태양'이라고 지칭했다.[68] 주니치 유니폼 마킹이 'SUN'이었기 때문. 그러나 당시 감독 호시노 센이치가 '나고야의 태양'이란 별명을 못 알아듣고 다시 물어본 적도 있었다. 일본에서 실제로 많이 쓰인 별명은 '''앙팡만'''(호빵맨)이었다. 얼굴이 호빵맨과 닮아서 붙여진 별명이다.
3. 연도별 성적
- 붉은 글씨는 1위 입상 성적. 진한 글씨는 리그 5위 내 입상 성적. 푸른 글씨는 KBO 리그 역대 최고 성적.
[1] 형의 이름은 선형주. 선동열이 초등학교 6학년때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마저도 스튜어디스 일을 해서 해외를 오가던 누나가 약을 구해와 1년여를 연명했던 거라고 한다.[2] 당초 광주상고에 진학할 예정이었지만 아버지의 의항으로 진로를 바꿨다고 한다.[3] 선동렬은 대학시절과 프로시절에도 각각 노히트노런을 한 번씩 기록했다.[4] 당시 초고교급 야구선수들의 대학 진학을 할 때는 대학 측에서 계약금 지급은 물론이고 실력이 조금 떨어지는 다른 선수들도 같이 입학시켜주면서까지 '''모셔오는''' 것이 당연시 여겨지던 시대였다.[5] 출처 - 고려대학교 스포츠매거진 SPORTS KU 2010년 3월호[6] 선판규씨가 최남수 전 고려대 야구 감독을 불러 무리 절대금지, 어느 때건 휴식할 수 있는 자유를 조건으로 고려대에 입학시키겠다는 말을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출처 [7] 고교시절에 유급[8] 3년 선배였던 김경문이 선동열과 1년간 기숙사 방장-방졸 사이였다고 한다. #[9] 당시 연세대 선발은 2학년 윤학길이었다. 고려대 최남수 감독은 연세대와의 추계리그 성적이 나빴던 선동렬을 등판시키지 않았다.[10] 본인을 제외하고는 전원 고등학생으로 이루어진 선수단에서 유일한 대학생이었다. 1963년 1월생으로 학교를 1년 일찍 입학한 빠른 년생 이었기 때문이다. 반면 김건우의 동기생이었던 박노준은 고3이었으나 학교를 1년 늦게 입학한 1962년생이어서 나이제한에 걸려 출전하지 못했다.[11] 정작 메이저리그에서 그에게 오퍼를 했었다는 자료가 있는지조차 미지수다. 메이저 오퍼 발언도 선동열 자신의 주장과 그 이야기를 들은 국내 스포츠 언론들만 언급하는 정도일 뿐이다. 증거가 비교적 확실히 남아있는 최동원과는 다소 다른 경우. 하지만 구두 수준에서 오퍼가 오고갔을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구체적인 증거가 없다면 구두 수준 오퍼라는 것도 어디까지나 추측의 영역.[12] 허구연이 그의 저서에 자신이 LA 다저스 중역들에게서 선동열 영입 의사를 듣고 구체적인 금액까지 조언했다는 말과, 이후 선동열에게서 자신이 조언한 금액으로의 제의가 실제로 있었다고 들었다는 말을 써 놓긴 했다. 어차피 수십년 전 일이고, 구체적인 증거가 남아있는 상태가 아니지만 허구연 입장에서야 사실이 아니라고 결론이 나도 오래 전 일이라 기억이 뚜렷하지 않았다고 말하면 그만이다.[13] 징병검사에서 현역 판정을 받았다는 뜻이다. 그는 세계선수권대회 우승 경력으로 오늘날의 예술체육요원 격인 병역특례를 받았는데, 당시의 병역특례는 국내에서 5년간 활동해야 해외진출이 가능했다. 결국 해태에서 이 기간을 채우고 현역으로 가진 않았다. 당시 치질이 있었는데 제대로 치료 안 받고 술을 마셔가며 악화를 시켜서 내심 면제 판정도 기대했다고 한다. 선동열 본인은 해태 구단 관계자와 병무청이 짰다고 주장한다. 어차피 병역특례를 받아서 실제 현역입대할 일은 없지만, 현역 판정을 내려야 현역으로 안 가기 위해서 해태에 갈 것이라는 판단으로. 보통 검사 즉시 판정을 내리는데, 자신이 신검을 받을 때는 즉시 판정 결과를 통보하지 않고 기다리라 하고는 귀가 후에 현역 판정으로 연락을 받았다고. 농구의 이충희가 그것 때문에 스페인 진출에 실패하고, 축구의 김주성은 서른이 넘어서야 독일에 진출할 수 있었다.[14] 여기서 병역 특례 기간인 5년을 채우고 미국에 진출하겠다는 의도였다. 다만 1985년 당시 인터뷰에서 선동열은 실업팀과 계약한 것을 팔꿈치 부상 치료를 위해서였다고 밝혔고, 팬들에게 2년만 기다려달라고 당부했었다는 것을 볼 때 실업팀에서 5년이나 뛸 생각은 없었던 듯.[15] 이외에도 대학 진학 후 중퇴한 선수는 합의된 중퇴일 경우 1년, 무단 중퇴일 경우 2년이 지나야 프로 진출이 가능하다는 규정도 있었다. 이 규정이 실제로 적용된 경우는 김경원과 손경수, 그리고 현대 피닉스 소속 선수들(문동환 외) 등이 있다. 정작 실업야구 2년 플레이 후 프로 진출 규정은 송진우나 강기웅, 조계현 등 1988년 서울 올림픽 야구종목 참가 선수들이 실업야구에서 1년만 뛰고 프로로 입단해버렸던 사례가 있는 걸로 보았을 때 지켜지지 않았던 듯 하다. 참고로 아직도 실업야구가 남은 일본에서는 실업야구에서 2년 플레이를 해야만 프로에 갈 수 있다는 규정이 여전히 살아 있다.(고졸로 실업야구에 가면 3년.)[16] 그러나 사실은 전기로 배정된 경기를 하나 뛰었다. 1985년 9월 22일 MBC전으로 원래는 전기에 치러져야 했을 경기인데 우천 등의 이유로 후기에 치러졌으나 분류상으로는 '전기' 경기가 되었다.[17] 해태 시절 후기. 위 사진은 1996년 해태 팬북에 수록된 사진인데, 선동열은 1996년초에 NPB 진출을 발표하면서 이 유니폼을 입고서 선수생활을 한 적은 전혀 없었다.[18] 프로야구 초창기 특유의 투수 운용으로 인해 후반기만 뛰었는데도 규정이닝인 110이닝을 넘겼다.[19] 엄청난 이닝 소화 능력을 보였으나 아쉽게도 최동원의 267.0이닝에 밀려 2위를 기록했다.[20] 이 해에 다승, 평균자책점 부문에서 2관왕을 기록했다. 탈삼진도 1위였으나 이 당시 탈삼진 부분은 따로 시상을 하지 않았다. 승률 부문은 19승 4패의 최일언이 차지했다.[21] 87년에는 부상 때문에 전년도만큼 많은 등판을 하지 못했다.[22] 여담으로 1988년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시즌의 기세를 몰아 7.1이닝 동안 탈삼진 14개에 무실점으로 다이너마이트 타선으로 유명한 빙그레 타선을 압도하며 팀 우승에 기여했으나, 그 경기에서 부상을 당하면서 시리즈에서 더 이상 등판하지 못했다. 이 때 투수진에서 선동열 대신 활약한 선수가 시리즈 MVP 문희수.[23] 다승, 승률, 평균자책점 부문. 당시 탈삼진 부문은 상이 없었다. 지금 기준으로는 4관왕.[24] 당시 선동열은 선발 등판한 1차전에서 삼성 김용국에게 홈런 등을 맞아 패전했고, 다음날 2차전에도 2점차로 앞선 9회초 2아웃에 구원 등판했으나 김용철에게 동점 홈런을 맞고 연장전 역전까지 허용하는 부진을 겪었다. 심하게 말해 그해 해태의 플레이오프 패배 원흉이었다고 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이로 인해 선동열은 분명 한국시리즈에서 좋은 활약을 보여놓고서 플레이오프만 나가면 힘을 못쓴다는 편견을 얻게 된다.[25] 단, 한국 학교 출신 선수라는 단서가 붙어야 한다. 장명부 등의 재일교포 선수들은 지금의 외국인 선수와 비슷한 위상을 가졌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한 한국과 일본의 환율 차이도 있어서 이미 억대 연봉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한국 프로야구의 주류는 한국 학교 출신 선수가 될 수밖에 없으므로 그 주류에 속한 선수 중 최초의 억대 연봉이라는 점의 의미는 역시 크다.[26] 다만 91년의 한국시리즈에서 평균 자책점 4.91을 기록하면서 다소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27] 물론 부상으로 32이닝에 그쳤기 때문에 당시 규정이닝인 126이닝에는 당연히 미치지 못하는 기록이다.[28] 1992년 당시 이강철(18승), 김정수(14승), 신동수(13승), 조계현(10승), 문희수(10승).[29] 선동열처럼 압도적 수준의 마무리가 부재하면서, 특히 플레이오프 마지막 경기였던 5차전에서 롯데에게는 9회 집중타를 맞았다.[30] 선동열은 말고기를 붙이는 등 치료에 갖은 방법을 써 보았지만 효과는 없었고, 아마 병이 나은 건 휴식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다고 뉴스에서 밝힌 바 있다.[31] 그러나 당시의 '마무리'는 현대의 1이닝을 전담하는 클로저보다 3~4이닝을 도맡아야 했던 중무리에 가까운 개념이었다.또한 여기서 그치지 않고 1993년 선발로 나온 경기도 있다.[32] 전업마무리 시즌이었음에도 규정이닝인 126이닝에 고작 17이닝 정도만 미치지 못할 정도로 많은 이닝을 소화했다.[33] 최동원과의 맞대결에서는 1승 1무 1패로 호각. 이 경기들에 대해서는 선동열 VS 최동원 문서 참조.[34] 당시 MLB에서 관심을 가진 한국 야구선수가 3명이었는데 최동원과 선동열, 그리고 박동희였다고 한다. https://mnews.joins.com/article/23522135#home[35] 1987년은 KBO 전체 방어율이 3점대 중반으로 1986, 1993시즌보다는 다소 높은 편이었다.[36] 라이브볼 시대 가장 압도적인 전성기를 보낸 2000년 페드로의 조정 ERA가 291이다.[37] 그런데 조정 평균자책점으로 따지게 되먼 선동열의 커리어 하이는 1993시즌이 되는데 이때 조정 평자책이 '''419'''에 이른다. 1986시즌은 6번째로 높다. 단지 1993시즌에는 마무리로 보직 변경 후 선발 등판이 1회밖에 없기에 규정이닝을 간신히 넘긴 것이 흠이긴 하다. 그리고 전업 마무리로 전환해서 규정이닝에 불과 16.2이닝이 부족한 1995년 시즌의 선동열의 조정 평균자책점은 '''763'''이다.[38] 28회의 피홈런 중 2번의 홈런을 친 사람이 딱 4명있다. 젊은 KBO 팬들에게 잘 알려진 류중일 전 삼성 감독을 포함하여, 김동기, 박승호, 전대영.[39] 2위는 NC 다이노스의 투수코치인 최일언으로 34피홈런이다. 하지만 최일언이 1110이닝을 살짝 넘긴 것에 비해, 선동렬은 1640이닝을 넘게 던졌다. 530이닝 이상 더 던지고 홈런은 덜 맞은 것. 그 외 세자리수 피홈런이 아닌 선수를 찾기가 힘들 정도고, 두 자릿수 선수들 중에는 선동렬보다 많은 이닝을 소화한 선수가 한 명밖에 없다. 그 한 명은 바로 1831이닝을 던진 LG의 김용수(86피홈런).[40] 빙그레 이글스의 대표적인 안방마님이자 경찰청 야구단 감독으로 재임했던 인물. 유원상, 유민상(야구선수) 형제의 아버지기도 하다.[41] 이게 1989년에 나온 선동열의 첫 만루피홈런이다. 그가 선수 시절 맞은 28홈런 중에 의외로 3번(89유승안, 93김동기, 94류중일)이 만루홈런이었다고.[42] 나중에 해설자가 된 이병훈은 모 프로그램에서 이를 두고, 선동열한테 홈런 치고 너무 놀라서 스스로 도핑테스트를 받으러 갔을 거라는 드립을 쳤으나 아마도 농담일 것이다. KBO에서 도핑테스트가 도입된 게 2000년대이다.[43] 재밌게도 이 짧은 신문지면에 등장하는 이름 중 향후 KBO 단장이나 감독을 역임하는 사람이 8명이나 있다.[44] 현재 프로야구에서도 좋은 속도의 패스트볼인데, 제대로 된 훈련이나 시스템도 없던 80년대~90년대 초 프로야구에서 150km을 던졌다는 건 지금 150km 후반~160km을 던졌다는 것과 비슷할 정도로 타자들이 체감되었을 것이다. 당시 프로야구에서 136km정도가 평균구속이었고, 146km를 던지면 스포츠 신문 1면에 나오던 시대였다. 참고로 MLB 평균 구속도 전체 투구에 대한 구속 집계가 처음 이루어진 2002년에 포심의 평균 구속은 89.0마일이었다. https://www.fangraphs.com/leaders.aspx?pos=all&stats=pit&lg=all&qual=0&type=4&season=2019&month=0&season1=2002&ind=0&team=0,ss&rost=0&age=0&filter=&players=0&startdate=&enddate= 참조[45] 다만, 선동열은 감독님이 시키니 억지로 하지만, 휴식이 보장이 안되다 보니 별로 안좋았다고 밝혔다.[46] 그래서 통산 최다 완투 및 완투승 타이틀은 롯데의 윤학길이 가지고 있다. 단, 통산·시즌 완봉승 기록은 선동열이 가지고 있는데, 1986 시즌의 8완봉과 통산 29완봉승을 기록하고 있다.[47] 한편, 1983년 이길환(MBC)이 기록한 특정 팀 단일시즌 최다 완봉승(VS 삼미전 4완봉승)에 근접한 기록을 남겼다. 1986년 VS OB전 3완봉승, 1990년 VS 롯데전 3완봉승이었으며 특정 팀 단일시즌 최다 완봉승 기록 2위는 선동열이 1986년 VS OB전과 1990년 VS 롯데전에서 거둔 것, 1985년 삼성 김일융이 VS MBC전에서 기록한 것, 1986년 빙그레 한희민이 VS 청보전에서 거둔 것, 1988년 삼성 김훈기가 VS 태평양전에서 기록한 것, 1992년 빙그레 정민철이 VS 쌍방울전에서 거둔 3개가 최고인데 이들 중 1986년 한희민(VS 청보전)과 1992년 정민철(VS 쌍방울전)은 단일 시즌 순수 신인 특정 팀 최다 완봉승 타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48] 그러나 커쇼와 비교하면 선동열 입장에서 억울한것이, 선동열의 포스트시즌 성적은 선동열이라는 '''이름값 치고는 좋지 않은 기록일 뿐''' 객관적으로는 좋은 기록이나, 커쇼는 그냥 못한다(...) 차라리 커쇼보다는 선동열과 마찬가지로 정규시즌 최고의 투수이자 역대 최고의 투수로 꼽힐 수 있으나 포스트시즌에선 그 이름값에 비해 다소 아쉬운 그렉 매덕스와 유사하다.(매덕스 포스트시즌 통산 198이닝 11승 14패 방어율 3.27 whip 1.242)[49] 선동열의 정규시즌 기록에서 이보다 높은 평균자책점을 기록한 시즌은 커리어 로우인 1994년(2.73) 뿐이며 그나마도 선발 등판은 8차례에 불과하다. 또한 피홈런 면에서도 이것보다 많은 피홈런을 기록한 시즌은 1991년(8피홈런) 뿐인데, 이 때 선동열이 기록한 이닝은 자그마치 203이닝으로 거의 3배에 가깝다.[50] 실제로 부상 때문에 정규시즌에는 큰 활약을 못했던 김정수와 문희수가 가을만 되면 각성했다.[51] 한편 이를 단일 시즌에서 가장 잘 보여준 게 1999 임창용인데 정규시즌에서 철벽 중무리로 군림했지만 엄청난 혹사를 당한 탓에 체력이 떨어져 그 해 플레이오프에서 롯데 팬들이 영원히 잊지 못할 경기를 선사했다. 선동열, 임창용과 정반대의 경우가 바로 가을까치 김정수. 제구력도 좋지 않은 편에 잔부상을 달고 다녀 치료와 재활을 병행하는 등 로 보낸 시즌도 있었지만 한국시리즈만 되면 제구불안이 단기전에서 상대 타자들을 압도하는 무기가 됐다. 또 정규시즌 동안 푹 쉰덕에 지친 선동열과 달리 체력에 아무 문제가 없어 한국시리즈 통산 최다승을 거둔 투수로 거듭났다.[52] 1987년까지 연속으로 200이닝+를 기록했다.[53] 1985년 이래 200이닝+를 기록하진 못했지만 1987년까지 196.2-193.1이닝을 기록했다.[54] 비판 근거로 2년 연속 190이닝+에다가 두 번째 200이닝+를 기록한 1991년 선동열은 커리어 최다 피홈런(8개)을 기록했다는 내용이 있는데, 그럼에도 방어율은 1.5점대로 역대급 시즌을 보냈다. 오히려 많은 이닝을 소화했음에도 저 성적이라는게 대단하다는 내용으로 다뤄져야 될 부분.[55] 다만 당시엔 선발과 불펜의 분업이 확실하던 시기가 아니고 잘던지는 투수가 선발과 불펜을 오가며 중요한 상황에 주구장창 등판하던 시기이다. 최동원의 최전성기 4년 역시 164경기 80선발로 50%가 채 되지 않는다. 김시진만이 4년 149경기 108선발로 50%를 넘는다. 다만 1987-90년의 4년간 절대적인 선발 등판 수치가 적은건 사실.[56] 당시에는 지금과 같은 분업화 시스템도 자리 잡기 전이고 선발투수가 점수를 주지 않는한은 그냥 끝까지 갔다. 이는 지금보단 완투, 완봉의 상황적인 기회가 더 많았다는 거지만 아무리 기회가 많더라도 이를 위해선 그만큼 점수를 안 줘야함이 전제되므로 전혀 의미 없는 수치는 아니다.[57] 사족으로, 이때 요미우리 역시 선동열을 노리고 해태에 접근했다. 이에 해태의 이상국 단장은 긍정적으로 보고 요미우리와 거의 계약성사 직전까지 갔지만, 주니치구단 측에서 자매결연 관계인 LG 트윈스 구본무 구단주에게 협조 요청을 했고, 구본무 구단주와 특수 관계였던 박건배 회장이 주니치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구단주의 의사를 거슬러 요미우리 임대를 추진했던 사장과 단장이 한꺼번에 옷을 벗는 후폭풍이 일었다.[58] 스기시타 시게루 - 곤도 히로시 - 호시노 센이치 - 고마쓰 다쓰오[59] 특히 '''아카헬(붉은 헬멧) 군단, 붉은 악마 군단, 일본판 빅 레드 머신''' 등으로 불리는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타선에 유난히 약해서 히로시마 전에서 '''0.1이닝 7실점'''이라는 대기록까지 세우기도 했다.[60] 당시 요미우리의 용병타자였던 셰인 맥이 선동렬과의 대결 중 슬라이더를 잡아당겨 홈런을 친 적이 있는데 경기 후 '''슬라이더밖에 없네. 슬라이더만 쳐라'''는 멘트를 날린 적도 있었다.[61] 놀랍게도 96년의 선동열의 세이버 스탯은 15년 한신에서 평균 자책점 2.73 41세이브 7홀드를 기록한 오승환의 세이버 스탯에 맞먹거나 더 높은 부분이 있을 정도였다.[62] 1996년 K/9이 11개을 조금 넘는다. 또한 주니치 시절 탈삼진을 두번째로 많이 잡은 시즌도 1996년이다. 주니치 시절 기록 참고바람[63] 선동열뿐만 아니라 주니치 팀 자체로도 굴욕을 맛본 해였다. 1996년 10월 6일, '''홈구장 나고야 구장에서의 마지막 시합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게 패하며 '''11.5 게임차가 뒤집히는 역전 리그우승(일명 메이크 드라마)'''을 허용한 것이다.[64] 그 후 이종범(해태→주니치→KIA), 이상훈(LG→주니치→보스턴→LG), 구대성(한화→오릭스→뉴욕 메츠→한화→시드니 블루삭스), 정민철(한화→요미우리→한화), '''타이론 우즈(두산→요코하마→주니치)''', '''호세 페르난데스(SK→지바 롯데→라쿠텐→세이부→오릭스)''', '''세스 그레이싱어(KIA→야쿠르트→요미우리→지바 롯데)''', '''이승엽(삼성→지바 롯데→요미우리→오릭스→삼성)''', 이병규(LG→주니치→LG), 다니엘 리오스(두산→야쿠르트), 이혜천(두산→야쿠르트→두산), '''임창용(해태→삼성→야쿠르트→시카고 컵스→삼성→기아)''', 김태균(한화→지바 롯데→한화), 켈빈 히메네스(두산→라쿠텐), '''이대호(롯데→오릭스→소프트뱅크→시애틀 매리너스→롯데), 오승환(삼성→한신→세인트 루이스→토론토 블루제이스→콜로라도 로키스→삼성)''', 크리스 세든(SK→요미우리→SK), 릭 밴덴헐크(삼성→소프트뱅크), 앤디 밴 헤켄(넥센→세이부→넥센), 야마이코 나바로(삼성→지바 롯데), 데이비드 허프(LG→야쿠르트), 윌린 로사리오(한화→한신), 제리 샌즈(키움→한신) 등의 사례가 이어지면서 KBO 탑클래스 선수의 일본 유출 사례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65] 다만 KBO에서 활동하다 일본에 건너가서 다시즌 동안 좋은 모습을 보인 선수는 선동열, 타이론 우즈, 호세 페르난데스, 세스 그레이싱어, 임창용, 이대호, 오승환 정도로 압축된다. 특히 1990년대~2000년대 초반 일본에 진출한 선수들 중 유일하게 선동열의 경우가 2시즌으로, 구대성은 한 시즌 동안 선발로 2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하기도 했지만 이때는 오릭스가 막장을 달리던 시절인데다, 불펜으로 나왔을 때는 기복이 있고 분식회계도 자주 한 터라 성공이나 실패라고 딱히 단정짓기 어려운 성적이다. 이상훈 역시 주니치 시절 선동열과 활약하긴 했지만 부상과 혈행장애 등으로 인해 좋은 모습을 보였던 시즌은 1999년 시즌밖에 없다. 언급한 선수를 제외한 나머지, 정민태, 정민철,다니엘 리오스, 이혜천, 이범호, 이병규 등은 확실히 일본 프로야구에서 좋지 못했고, 이종범, 조성민은 좋은 활약을 보이다 부상으로 인해 남은 일본에서의 선수생활에 어려움을 겪었다.[66] 99년 당시 주니치 불펜은 오치아이 에이지, 이상훈, 이와세 히토키와 같은 수준급 투수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덕분에 마무리를 이렇게 기용할 수 있었다.[67] 거기에 선동열의 보유권을 여전히 가지고 있던 해태는 주니치와의 임대 기간 연장 후 임대료 재협상을 원했고, 주니치는 해태 구단으로부터 선동열의 보유권을 가져와 완전 이적하는 방안을 내놓는 바람에 협상이 틀어졌고, 이에 친정팀 해태와 관계도 서먹해졌다고 한다. 훗날 은퇴 후 한 인터뷰에서 선동열은 자신을 두고 이적료 협상을 벌이던 해태 구단에게 실망했다는 늬앙스로 말하며 한동안 고향팀에는 가지 않겠다고 했을 정도였다.[68] 2019년 발매된 선동열 자서전에 따르면, 완전 지어낸 별명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재일교포 팬들이 붙여준 현수막 중에 해당 문구가 있었다고.[69] 유일하게 홈런을 친 타자는 이민호이다.[70] 단 당시 일본프로야구는 구원승을 더한 세이브포인트로 최고구원투수를 뽑았기 때문에 사사키와 세이브는 공동 1위였지만 구원승 3개를 기록한 사사키에 2개 차이로 밀려서 최고구원투수는 수상 실패.[71] 100승 이상 기록 투수 중 압도적 1위다. 2위가 0.6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