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 돈덕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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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德壽宮 惇德殿
덕수궁 경내 석조전 뒤에 있었던 건물이다. 덕수궁은 근대에 지은 황궁이니만큼 서양식 건물, 양관(洋館)이 여러 채 있었다. 돈덕전도 그 중 하나이다. 러시아 건축가 아파나시 이바노비치 세레딘사바틴[1] 이 설계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2. 이름
'돈덕(惇德)' 뜻은 ‘덕(德) 있는 이를 도탑게(惇) 하여 어진 이를 믿는다”이다. 《서경(書經)》의〈순전(舜典)〉에서 유래했다.#
현판 글씨는 당나라 명필 구양순(歐陽詢)의 글자를 모아서 만들었다.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서 보관 중이다.
3. 역사
처음에는 경운궁(덕수궁의 옛 이름) 영역이 아니었다. 원래 이 자리에는 대한제국 정부의 총세무사였던 영국인 존 맥리비 브라운(J. M. Brown)[3] 이 관장하던 해관[4] 의 한옥 청사가 있었다. 그러다 1901년(광무 5년) 경에 경운궁으로 편입된 듯 하다. 그러나 궁내 주요부 영역과는 떨어져 있었다.[5][6] 이후 기존의 해관 건물을 철거한 뒤 새로운 양관 공사를 시작했다. 이 새 양관이 바로 돈덕전이다.
돈덕전을 지은 이유는 1902년(광무 6년) 10월에 있을 '고종 즉위 40주년 기념 칭경예식' 때문이었다. 고종은 이 예식을 통해 근대 국가 대한제국의 위용을 세계에 알리고 싶었다. 그 일환으로 각국의 외교관들을 초청해 대규모 행사를 계획했다. 바로 그 행사의 연회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돈덕전을 지은 것이다.#[7]
그러나 공사가 많이 더뎠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수옥헌이 불타자 한동안 멈췄다. 그러다 1902년(광무 6년) 5월 경에야 다시 진행하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다. 이후 언제 완공했는지 알 수 없지만, 〈황성신문〉 1903년(광무 7년) 4월 6일 자 기사에 칭경예식 장소와 관련하여 돈덕전 언급이 있는 것을 보아 적어도 그 이전에 완공했고 이름도 지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담으로, 1902년(광무 6년) 10월에 치루었어야 할 칭경예식 행사를 1903년(광무 7년) 4월까지 언급한 것에서 알 수 있듯, 원래 계획한 날에 열지 못했다. 이후에도 여러 이유로 미뤘다가 결국 영원히 개최하지 못했다.(...)
1904년(광무 8년) 4월에 일어난 경운궁 대화재 때 다른 주요 건물들은 불 타 사라졌지만 돈덕전은 무사했다.# 이후 돈덕전은 황실과 정부에서 수옥헌과 함께 주로 사용하는 건물이 되었다.
황제와 황태자가 각국의 공사와 사절들을 만나고## 연회도 열었으며, 신하들을 접견하는 용도로 사용했다.# 한 예로, 1906년(광무 10년)에는 황태자 이척(순종)과 황태자비 윤씨(순정효황후)의 가례 때 연회장으로 사용했다.
그리고 의외로 외국의 귀빈들이 묵는 숙소로도 활용했다. 대표적으로 1905년(광무 9년) 방한한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의 딸 앨리스와 일본 황족 후시미노미야 히로야스 등이 여기서 머물렀다.
1905년(광무 9년) 11월 을사조약 이후에는 일본 경관들이 머물며 경운궁을 감시하는 공간으로 사용했다.
1907년(융희 원년) 8월에는 순종이 이곳에서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로 즉위했다.#
1910년에 석조전을 완공하고 서쪽 궁장을 확대하면서, 돈덕전은 비로소 덕수궁[8] 주요부 영역으로 들어왔다. 일제강점기에도 이태왕으로 강등당한 고종의 탄신연을 비롯하여 여러 행사가 열렸다. 1919년 고종 승하 후 덕수궁은 비었고, 그 후 없어졌다. 정확히 사라진 때는 모른다. 다만, 1933년 10월 8일자 〈동아일보〉의 기사를 보면 ‘최근에 돈덕전이 헐려버렸다’고 나오는 것을 보아 그해 초, 중반에 진행했던 덕수궁 공원화 작업의 일환으로 철거한 듯 하다.
이후 돈덕전 터에는 아동 유원지가 들어섰으며, 8.15 광복 이후에는 덕수궁관리소와 강당을 세웠다.
문화재청은 2017년까지 돈덕전 복원을 위한 발굴조사를 실시했고, 2018년부터 설계 및 복원 공사를 시작하여 2021년 완공할 예정이다.
2020년 현재 기본 골조 공사중인데 비용 때문인지 몰라도 원래의 석조가 아닌 철골로 공사 중이다. 사실 내부 구조가 평면도 하나 말고는 알려진 것이 없기 때문에 훗날 더 자세한 설계도라도 발굴된다면 내부를 수정할 수 있게 이런 방식을 채택한 것으로 보인다. 석조가 내부 무게를 지탱하는 방식이면 아예 건물을 다시 해체한 후 쌓아올려야 하기 때문.
복원 후에는 대한제국 관련 자료관 등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4. 구조
4.1. 외부
- 돈덕전 외관은 붉은 벽돌과 회색 벽돌로 만들었으며, 벽돌 쌓기 양식은 중명전, 구성헌과 동일하다. 하지만 현재까지 남은 중명전과 달리 붉은 벽돌은 창문 사이의 벽에만 쌓고, 주로 회색 벽돌의 비율이 높았다.
4.2. 내부
- 돈덕전 내부의 모습은 확실하게 밝혀진 것은 없으나 각 실의 용도가 표기된 평면도가 있다. 순종황제의 즉위식 안내 위해 작성한 것으로,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목수현 박사가 《법규유편(法規類編)》이란 책에서 발견했다.#
- 현재까지 유일하게 남아있는 돈덕전 내부의 사진이다.
5. 여담
- 순종의 황제 즉위식 장소와 날짜가 각각 두 가지로 알려져 있다. 하나는 1907년(융희 원년) 8월 27일 돈덕전이고 다른 하나는 1907년(광무 11년)[9] 7월 19일의 중화전이다. 그런데 중화전에서 거행한 것은 즉위식이 아니고, 대리청정을 맡은 순종에게 진하(陳賀)하는 예식이었다.# 당시 고종은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일제에게 퇴위 압박을 받고 있어서, 절충안으로 양위 대신 황태자였던 순종에게 대리청정하라고 명했다. 그래서 저 예식을 치룬 것. 그런데 일제는 이를 슬그머니 즉위식으로 포장하여 고종의 강제 퇴위를 기정 사실화 해버렸다. 그렇게 얼결에 순종은 황제에 올랐고 정식 즉위식을 같은 해 8월 27일 돈덕전에서 거행했다.#
5.1. 오해
돈덕전에서 촬영한 이 사진들이 한 때 여러 자료에 잘못 설명된 적이 있었다. 바로 '아관파천 당시에 러시아공사관에 있는 고종을 대포를 끌고와 위협하는 일본군'의 모습으로 알려진 것.
촬영 시기가 아관파천 때가 아닌 이유를 살펴보자. 위에 있는 왼쪽 사진에서 사람 부분을 확대한 모습을 보면 한 어린이(하늘색 원)가 있다. 바로 영친왕이다. 영친왕은 대한제국 수립 후인 1897년(광무 원년) 10월에 태어났기에 아관파천 당시에는 세상에 있지도 않았다. 이것만 봐도 절대 아관파천 때 모습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다.
러시아공사관이 아닌 근거도 튼튼하다. 남아있는 러시아공사관의 사진을 보면, 현재까지 남아있는 탑을 제외하고 전부 1층이었다. 그런데 사진 속 건물은 2층이다. 그리고 높은 언덕 위에 있었기 때문에 저렇게 대포를 끌고 시위할 만한 평지도 주변에 없었다. 그래서 확실히 아니다.
2000년대 들어 오류가 밝혀진 후에는, 아관파천과 관련된 설명은 많이 없어졌다. 그런데 또 한 동안 고종의 강제퇴위 당시 일본군이 대포를 끌고 무력 시위하는 모습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그것도 아니다.
이 사진의 정체는 훗날 초대 조선총독을 지내는 데라우치 마사타케 당시 육군대신이 1907(광무 11)년 6월 고종황제에게 대포를 헌납하면서 사용법을 설명하는 모습을 담은 것이다. 이런 사실은 한국영상문화사(사장 박종수)가 해제, 번역과 함께 5일 '일제가 강점한 조선'이라는 제목으로 출간한 '한국병합' 관련 일본측 사진자료집인 '일본의 조선'(日本之朝鮮)에서 드러났다.#[10] 다만, 사진집을 감수한 이민원 동아역사연구소장은 “이를 통해 조선에 대한 일본의 무력시위 효과도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고 언급했다. 이로써 저 사진에 대한 논란은 일단락되었다.
왜 앞서 말한 낭설들이 퍼졌는지는 확실하게 밝혀진 것은 없다. 다만 그 이유에 대해 추론한 포스팅이 있으니 한번 들어가서 읽어보자.
[1] Афанасий Иванович Середин-Сабатин. 1860 ~ 1921. 흔히 ‘사바틴’으로 널리 불린다. 근대기 서울과 인천의 주요 건물들을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을미사변 당시 현장을 직접 목격한 2명의 외국인 중 한 명이다.(다른 한 명은 시위대 지휘관이었던 미국인 다이(W. M. Dye) 대령.[2] 사실 이 사진은 돈덕전을 찍은 것이 아니라 미국공사관 진입도로를 촬영한 것이다. 지난 2006년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전시한 독일인 장교 헤르만 산더(Hermann Sander)의 기증사진전 도록에 실렸다.[3] 석조전을 짓는데에 큰 역할을 한 사람이다.[4] 海關. 조선 말기 개항 후에 창설된 관세행정기구. 오늘날의 세관.[5] 오다 쇼고(小田 省吾)의 《덕수궁사》를 보면 '회극문(會極門)밖 즉 현재 영국 영사관의 서쪽에 해당하며 '''작은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돈덕전의 구획이 있었다.''' 회극문과 더불어 집하문(緝門)은 곧 이 작은 길을 나서 동전(同殿)으로 통하는 문이었으나, '''나중에 석조전의 건축에 즈음하여 이 작은 길은 돈덕전 부지와 더불어 본 궁역내에 들어가''' 현재 보는 바와 같은 모습이 되었던 것이다.'라고 적혀있다.[6] 오다 쇼고의 《덕수궁사》는 덕수궁을 연구할 때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오류도 많고, 일본인의 관점에서 쓴 것이기 때문에 비판적으로 접근해야 한다.[7] 현재 광화문 교보문고 앞에 있는 칭경비전도 이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8] 1907년(융희 원년) 순종이 즉위한 후 태상황 고종이 사는 궁이란 뜻에서 경운궁의 이름이 덕수궁으로 바뀌었다.[9] 1907년 8월 2일까지는 연호를 '광무'로, 8월 3일부터는 '융희'로 사용했다.#[10] 기사에는 1906년으로 되어있으나, 데라우치의 방한을 언급한 당시의 관보나 신문, 그리고 그가 남긴 일기를 종합해보면 1907년이 맞다. 일본에서 대한제국, 조선을 담은 사진들의 내용을 표기할 때 이런 오류가 많이 보인다. 한 예로, 1898년 치루어진 흥선대원군의 장례식 사진 연도를 1899년이라고 소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