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균관/역사
1. 기원
성균관의 기원은 중국의 상고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경에 따르면 전설상의 순 임금은 설(契)을 사도(司徒)로 임명하여 윤리로 일반 민중들을 교화하게 하고 기(夔)를 전악(典樂)으로 임명하여 노래로 귀족 자제들을 가르치게 했다고 한다. 그리고 바로 이 기가 전악으로서 귀족 자제들을 가르치던 교육 기관이 바로 성균이었는데,[1] 성(成)이란 악기를 연주하는 것이고[2] 균(均)이란 음운을 조율하는 것으로 역시 노래를 가르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상고 시대의 대학에 대한 고대의 전승은 기본적으로 전설상의 이야기에 속하므로 그 역사적 실재에 대해서는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지만, 그럼에도 여기에는 아직 문자가 발달하지 못한 시점에 노래의 형식을 빌린 구전으로 공동체의 지식을 기억하고 전승해오던 역사적인 경험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역할을 맡은 전승자는 주로 시력이 차단됨으로써 비상한 청각과 기억력을 가지게 된 장님이었고, 고대 동아시아의 샤머니즘적 전통 위에서 그는 그 공동체 최고의 음악인이자 지식인인 동시에 무속인이기도 했다.[3]
또한 전승에서 이미 민중 교화와 귀족 교육이 서로 구분되어 나타나고 있는 점에서 보이듯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중국에서는 윤리를 가르치는 소학과 지식을 가르치는 대학이 분리되어 있었다. 대표적인 소학으로는 노인을 받드는 상(庠), 궁도를 익히는 서(序), 기강을 다잡는 교(校), 문화를 배우는 학(學)이 있었고[4] 대학으로는 상나라에서 고종(瞽宗)과 주나라에서 벽옹(辟雍)이 설치되어 그 임무를 맡았다. 이로써 동아시아에는 처음으로 국가적 차원의 교육 기관이 태동하게 되었던 것이다.[5]
특히 주나라 시대에 천자국의 대학은 물이 그 주위를 벽옥처럼 둥글게 에워싸고 있다고 해서 벽옹이라 부르거나 혹은 그 물을 영소(靈沼)라 하고 학교를 영대(靈臺)라 일컬은 데 반해, 제후국의 대학은 물이 그 주위를 반쪽만 둘러싸고 있다고 해서 그 물을 반수(泮水) 라 하고 학교를 반궁(泮宮) 또는 반궁(頖宮)이라 일컬었다. 이는 대학이 세상에서 격리된 하나의 신성한 구역을 이룬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고, 그 모습은 시경에 잘 나타난다.
虡業維樅 賁鼓維鏞 / 종과 경 매다는 데 종과 경 달아놓고
於論鼓鍾 於樂辟廱 / 아아 종과 북 울리니 아아 벽옹아 즐거워라
於論鼓鍾 於樂辟廱 / 아아 종과 북 울리니 아아 벽옹아 즐거워라
鼉鼓逢逢 矇瞍奏公 / 악어북 둥둥 울어 장님들 연주하네
- 『시경』 대아 <영대>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주나라 중심의 천하 질서가 붕괴되고 춘추전국시대의 헬게이트가 도래하자 그 성분이 귀족으로 국한되는 공적인 교육 기관은 자연히 해체되기에 이르렀다. 공적인 교육 과정을 거치는 것보다도 군주에게 직접 등용되는 것이 더욱 효과적인 관직 진출 방법으로 부상했고,[6] 지식인들은 종래의 신앙적인 도덕과 의식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사고하며 세상을 구제할 새로운 길을 모색해나갔다. 그리고 이에 부응하여 등장한 것이 바로 공자를 필두로 한 제자백가의 무수히 많은 사학들이었다.思樂泮水 薄采其芹 / 즐거운 반수에서 그 미나리 뜯노라니
魯侯戾止 言觀其旂 / 노후께서 이르사 그 깃발을 보리로다
其旂茷茷 鸞聲噦噦 / 그 깃발 하고 많고 말방울 소리 딸랑딸랑
無小無大 從公于邁 / 크고 작음 할 것 없이 공을 따라 가는도다
- 『시경』 노송 <반수>
따라서 전국 시대를 종식시키고 중국 최초의 통일 제국을 건설한 진나라는 중앙에는 박사, 지방에는 삼로(三老)를 두어 학문과 교화를 전담시키고 한편으로는 분서갱유라는 문화적 폭거를 감행함으로써 사상적인 통일을 꾀했다. 여기에 뒤이어 세워진 한나라가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받아들이고 보급함에 따라 국가적 교육 기관은 유교와 결합된 모습으로 다시 부활하게 되었는데, 한무제는 기원전 140년에 유교를 국시로 삼고 기원전 136년에 오경박사를 설치한 데 이어서 기원전 124년에는 이를 국가적 교육 기관으로 만들어 50명의 학생으로 태학을 창립했다.
이후 지방의 호족들이 유학을 수용하여 중앙으로 진출하면서 태학의 규모는 지속적으로 확대되어 한 무제의 아들인 소제 때에는 100명, 손자인 선제 말에는 200명, 증손인 원제 때에는 2천 명, 현손인 성제 말에는 3천 명으로 불어났고 급기야 후한에 들어서서는 3만 명에 다다르게 된다. 또한 중간에 삼국시대의 난세를 거치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진 시대 태학생의 숫자는 7천에 이르러서 이들을 인위적으로 3천까지 감축해야만 했다.
서진에서는 구품관인법에 따라 지배층 안에서도 정국을 주도하던 문벌귀족들이 상류층으로 분리되어 나오는 현상이 두드러졌는데, 이에 따라 278년에는 이러한 문벌 귀족의 자제들이 입학하는 상류 학교로 따로 국자학(國子學)이 세워졌다. 이후 국자학은 태학과 나란히 존재하면서 북제에서는 국자시(國子寺), 북주에서는 노문학(露問學), 수나라에서는 국자감(國子監)으로 명칭이 바뀌었고 이밖에도 유학, 현학, 문학, 사학, 음양학, 의학, 율학, 산학, 서학 등 다양한 학문의 고등교육이 시도되었다.
수나라와 그 제도를 이어받은 당나라에 들어와서 국자감은 국자학 외에도 태학, 사문학, 율학, 산학, 서학의 6학을 거느리는 국가의 최고 학부로 자리 잡아 일원적인 대학으로서의 체제가 확립되었다. 하지만 북송 시대에는 국자학의 비중이 유명무실해지는 바람에 실질적으로는 태학이 최고 학부로서의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고, 이외의 학과들은 사문학, 율학, 무학, 소학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다시 원나라에 들어와서는 태학이 사라지고 다른 학과들은 모두 흩어져서 그 이름은 유학을 가르치는 국자감의 별칭으로만 남게 되었다.
2. 삼국시대
한국의 공식적인 고등 교육 기관은 서기 372년에 고구려의 소수림왕이 대학(大學)[7] 을 세운 것이 최초이다. 이 대학이 세워지기 직전에 화북의 전진에서 사신을 보내어 불상과 경문을 보내온 일이 있었는데 이것으로 미루어 고구려가 대학을 세우는 데에는 전진의 조력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또한 체제 정비에 대한 강력한 소수림왕의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후 7세기에는 대학박사 이문진이 고구려의 역사서 신집의 편수자로 등장하고 있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백제에서도 고등 교육이 박사 제도의 모습으로 자리를 잡았다. 삼국사기에는 근초고왕이 박사 고흥을 얻어 처음으로 서기(書記)를 가지게 되었다는 기술이 있으며, 일본서기에도 오진 덴노가 아직기에게 그대보다 더욱 뛰어난 박사가 있는지를 묻고 있다. 6세기에 들어서면 오경 박사를 비롯한 백제의 여러 박사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활동하는데, 다만 이러한 박사들이 소속되어 있었을 국가적 고등교육기관의 전모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2012년 발견된 '진법자묘지명'에 진법자의 증조 진춘이 은솔로서 태학정(太學正)이었다는 내용이 확인되면서 존재가 증명되었다. 태학의 교수관일 가능성이 높은 오경 박사가 사료상 처음 나타나는 무령왕 대가 태학의 설치 시기로 주목되고 있다.
3. 남북국시대
신라에서는 화랑제도라는 전통적인 교육, 인재 천거 방식이 있었고 초기 유교적 교육 또한 화랑제도 하에서 이루어졌다. 반면 중국과 같은 체계적인 유교적 고등 교육 기관의 설치는 상당히 늦었는데, 김춘추는 648년 처음으로 당나라에 갔을 때 당나라의 국학(국자감)을 참관하고 도입의 필요성을 인식했으나 당시는 삼국통일전쟁의 절정기로 제도개혁의 여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미뤄졌고, 결국 통일전쟁이 완전히 끝난 682년이 되어서야 신문왕이 국학(國學)을 세워서 오경과 그 중에서도 특히 논어와 효경을 중심으로 하는 유교 교육을 실시했다.[8]
박사와 조교가 소속되어 학생들을 가르쳤고, 학생들은 9년 기한으로 교습을 받은 뒤 그 사이의 학업 성취도에 따라 차등적으로 관직에 등용되었다. 또한 이밖에도 산학 박사, 천문 박사, 의학 박사, 율령 박사가 있어서 학생들에게 다양한 실무 기술을 가르치는 일을 맡았는데 산학을 제외한 천문 이하는 저마다 교습하는 담당 기관이 따로 있었던 것으로 보기도 한다. 국학 내에서 과거 제도의 초보적 단계인 독서삼품과를 실시하기도 했다.
한편 발해에서는 당나라의 국자감을 본떠 주자감(胄子監)이 설치되었는데, 이 주자감이라는 명칭은 한편으로는 당제의 적극적인 수용을 보여주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황제가 사용하는 국자감의 이름을 교묘하게 가져옴으로써 발해가 가진 외왕내제 체제의 일면을 보여준다.
4. 고려 시대
고려 초기에는 달리 특기할 만한 교육 기관의 존재가 보이지 않지만, 930년에 태조가 서경에 행차하면서 그곳에 학교와 학원을 창설하고 공식적으로 학업을 진흥시킨 일이 있었다. 이를 근거로 삼아 개경에도 일찍부터 학교가 있었으리라 추정하는 견해가 있지만, 그럼에도 그것이 아직 전국적 차원의 고등 교육 기관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뒤로 유교 사상을 기반으로 하는 문벌 집단이 형성되면서 고등 교육 기관에 대한 내부의 수요가 증폭되었고, 이에 비로소 성종이 체제 정비의 일환으로 신라의 국학을 본뜬 태학을 개경에 건립했다. 서기 983년에 박사 임노성(任老成)이 북송에서 종묘 사직과 문묘의 설계도를 가져온 것을 시작으로 적어도 987년에는 태학이 완성되어 260명의 학생으로 교육이 시작된 것으로 보이는데, 고려사에는 다음과 같은 성종의 교서가 실려 있다.
짐이 평소 박덕함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유학을 숭상하려는 마음이 간절하여, 주공과 공자의 학풍을 일으키고 요순의 치세를 이루고자 하였다. 이에 학교(庠序)를 세워 인재를 양성하고 과목으로 선발하는데, 지금 각 주에서 올라온 학사(學士)들 가운데 고향을 그리워하는 사람이 있을까 염려되니 모두 임의대로 떠나거나 남거나 하라. 귀향하는 학생 207인에게는 베 1400필을 하사하고, 잔류하는 학생 53명에게도 복두 106매와 쌀 265석을 하사한다.
- 『고려사』 선거지, 성종 5년 7월
이후 992년에 성종은 다시 태학과 별도로 국자감을 세우고 독자적인 전장(田莊)을 운영하도록 하여 고등 교육 기관의 질적인 제고를 꾀했다. 또한 여기에서 나아가 전국에 널리 학교를 세우도록 함으로써, 국자감을 정점으로 하는 일원적인 공교육 체계를 지방으로 파급시키고자 하였다.근자에 널리 뭇 주군현의 자제들을 모아서 개경으로 불러다가 학업을 익히게 했더니, 과연 바람을 타듯 이르고 조서에 응해 몰려와 학교 안이 학도들로 북적이게 되었다. 무릇 집을 등지고 먼 길을 와서 손님이 되어 많은 날을 보낸지라 또한 태산을 이루려는 뜻이 게을러지고 고향을 그리는 마음이 더욱 깊어가고 있다. 그 객지의 외로움을 가엾이 여겨서 유지를 내려 보살피나니, 머물기를 원하는 자는 개경에 머물기를 감내하고 물러가길 구하는 자는 고향으로 돌아가길 허락한다. 각자에게 하사품을 내릴 것이니 받은 뒤에 떠나거나 머무르라.
- 『고려사』 성종세가, 성종 6년 8월
그러나 현종 대부터는 본격적으로 문벌 귀족 사회가 정착되면서, 이러한 명문가의 학생들을 중심으로 더 이상 국자감에 입학하지 않고 자기 집으로 개인 교사를 초빙하는 '''사교육 문화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따라서 이전까지는 과거 급제자 대부분이 대체로 중앙과 지방의 차별이 없는 공교육(국자감) 출신이었으나, 점차 사교육을 받은 중앙의 문벌 귀족들이 과거 급제자 대부분을 차지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고려가 태평성대를 누리던 덕종, 정종, 문종 시대를 거치면서 계속 심화되었고, 그 끝판왕이 다름아닌 최충의 문헌공도(9재 학당)와 그를 비롯한 사학 12도.
때문에 이 시기에 이르면 국자감은 껍데기만 남아 학생들이 이름만 걸어놓고는 국자감시(국자감생 한정 특채) 때에만 모이는 대기소처럼 되어버렸다. 이를 개선하고자 정종 2년에는 입학한 지 3년이 지나야 국자감시에 응시할 수 있도록 규정을 만들었으나, 이는 오히려 학생들이 국자감에 이름을 걸어놓는 것조차 기피하는 역기능으로 작용하고 말았다.
결국 이를 보다못한 예종이 공교육을 활성화하고자 나섰다. 예종은 국자감을 7개 전공으로 나누어 전문화시켰는데, 이것이 바로 7재다. 이는 각각 주역, 상서, 모시, 주례, 춘추, 예기, 무학(!)[9] 을 전공하는 것이었으며 7재 전체는 '국자학', 무학을 제외한 6재는 '태학'이라 통칭되었다. 이렇게 정비된 공교육 체제는 오래지 않아 맞이한 무신정변으로 사학 12도가 철퇴를 맞으면서 다소 반사 이익을 보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관리들이 인맥빨로 채용되는 정국에서 공교육이라고 제 역할을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 이규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마침내 몽골의 침입으로 조정이 강화로 천도하자, 국자감은 한동안 강화 향교 건물에 더부살이하다가 1251년에야 건물을 따로 가지게 된다. 전쟁이 끝나고 조정이 개경으로 환도하면서 다시 돌아오기는 했지만, 쑥대밭이 된 개경의 교육 여건은 그야말로 절망적이라 별도로 경서와 사서에 능통한 사람을 뽑아서 교육을 위탁해야 할 지경이었다.(...) 이 당시 국자감이 얼마나 피폐한 상황이었는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원나라의 사신으로 온 야율희일(耶律希逸)이 고려의 국자감 건물이 너무 좁고 누추하다고 충렬왕에게 지적할 정도였다.사림(士林)으로 말하면, 옛날에는 벼슬에 나가는 길이 매우 어려웠으므로 선비가 반드시 학문에 힘써서 과거에 응시하는 자가 많았는데, 지금은 벼슬에 나가는 길이 매우 쉬우므로 반드시 과거를 보아야만 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학문에 종사하는 자가 적다. 그 벼슬에 나감의 어렵고 쉬움이 고금이 같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 폐단을 개혁하여 옛날대로 회복하는 방법은 또 어떻게 해야 옳겠는가?
- 『동국이상국후집』 제11권, 갑오년에 예부에서 시험한 책문.
더욱이 당초의 이름인 국자감도 1275년에는 국학(國學)으로, 1298년에는 성균감(成均監)으로, 1308년에는 다시 성균관(成均館)으로 자꾸만 수정되었다. 이는 원나라에서 그들의 국자감과 동일한 이름을 쓰지 못하도록 간섭했거나 아니면 고려 스스로 그 이름을 피하려고 한 데에 기인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다만 성균감에서 성균관으로 이름을 고친 시기와 주체에 관해 다소 혼란이 있는데, 고려사 백관지에서 '충렬왕 34년에 충선왕이 성균관으로 이름을 고쳤다'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충렬왕 34년은 충렬왕이 죽고 충선왕이 복위한 해이므로 충선왕이 복위하자마자 성균관의 이름을 고쳤다고 보는 것이 옳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공교육 복원에 가장 현저하게 공헌했던 인물이 바로 안향이었다. 안향은 1289년에 충렬왕을 따라 원나라에 들어가서는 그곳에서 주자학 서적과 공자와 주자의 초상을 가지고 돌아왔고, 1303년에는 관리들의 돈을 추렴해 성균관의 장학 재단격인 섬학전에 충당했으며, 그 가운데 남은 돈으로는 중국에서 문묘 제례에 사용할 각종 용구와 교육에 쓰일 각종 경전들을 구해오게 하는 등 동분서주했다. 위와 같이 원나라 사신의 지적을 받고 성균감 건물을 정비한 것도 바로 이 시기의 일.
이후 성균관은 공민왕이 공교육을 대대적으로 정비하고 성균관의 이름도 국자감으로 복원시키면서 다시 잘 굴러가는가 싶었지만, 이내 홍건적의 침공으로 개경이 함락되자 다시 쑥대밭이 되었다.(...) 이에 공민왕은 국자감을 다시 성균관으로 되돌리고 이색을 중심으로 성균관을 복원했는데,[10] 물론 이것도 공민왕이 시해되고 정국이 이인임을 비롯한 권문세족에 의해 주도되면서 대부분 도로 아미타불.(...)
결국 성균관은 이인임과 최영이 축출되어 신진 사대부들이 집권하고, 공양왕이 즉위한 뒤에야 비로소 공교육의 정비와 함께 그 위상을 갖추게 된다.
조선왕조가 들어서고 천도하면서 성균관은 한양으로 내려가게 되고 기존의 개성성균관은 조선시대 동안 개성지역의 향교로 그 위상이 격하됐다. 북한정권 치하에서는 더이상 유교 교육기관으로 사용되지는 못하고 대성전 등 일부 건물은 고려박물관으로 사용되어 고려시대 유물 1천여점을 전시하고 있다. 남한 관광객 대상으로 개성관광이 이뤄지던 시절에는 관람 코스의 일부였다.
5. 조선 시대
조선 시대 : '''고려 시대 모습 그대로'''[11][12]
5.1. 생활
- 이 항목에서는 성균관 유생들의 실제 일상 생활을 다룹니다. 소설을 찾으시는 분들은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으로.
식비나 거주비는 전부 국가에서 대주는 무료였으나, 하재생들은 식사 때 반찬만 줘서 쌀을 자기가 구해다 먹거나 내야 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걸 이용한 성균관 유생들의 시위 방법 중에도 단체로 성균관 급식을 째는 집단 파업, 권당이란 게 있었다. 유생들이 단체로 급식을 째면 성균관 제도상 유생들을 어쩔 수 없이 잘라야 하므로 이를 성균관 유생들의 국가를 끌어안은 자폭으로 보기도 했다. 관료제 국가에서 국가 고시생이 통째로 시험을 안본다? 실무 행정을 담당하는 하급 관리 보충에 당장 이상이 생긴다.
위에 설명한 권당과 유소(상소) 등을 이용해 정치적인 발언을 내기도 했는데, 처음에는 단순히 예비 정치인의 소신 발언에 가까웠지만 후기로 갈수록 정치 세력에게 사주를 받은 관제 데모에 가까워지게 되었다.
이곳에 오기 위해서는 과거 시험을 보는 유형과 추천과 기부로 들어오는 유형이 있는데 전자는 상재생, 후자는 하재생이라 한다. 상재생 전형의 경우 과거 시험의 소과를 보아야 하는데 난이도가 심히 어렵다.[13] 이들은 성균관의 주류가 되었다. 하재생의 경우는 쉽지만 차별이 존재했다.
해마다 제주도에서 진상하는 귤을 성균관과 사학 유생들에게 내리고 실시하는 과거인 황감제가 있었다고 한다. 조선 후기 윤기(1741~1826)라는 선비가 황감제를 표현한 시가 있는데 시험장에 시제가 내걸리기 전에 하급관리가 유생들에게 감귤을 나누어주는데 서로 먼저 차지하려고 앞다투어 달려가고 줍고 서로 밀치고 빼앗는(...) 등 유생으로서 못하는 짓이 없었다고 탄식했다고 한다.
렛츠고 시간탐험대 4화 ~ 6화에서 성균관의 노비와 유생들의 생활을 그리고 있으니 참고해도 좋다.
6. 근대
1911년 이후 성균관의 연혁은 다음과 같다.
성균관의 경학원(經學院)으로 변경 및 축소(1911년) → 경학원 내 명륜학원(明倫學院) 설치(1930년) → 명륜학원을 명륜전문학교(明倫專門學校)로 개편(1939년) → 명륜연성소로의 격하(1944년) → 명륜전문학교로의 재개교(1945년) → 학린사(學隣舍) 및 명륜 전문 학교를 통합하여 재단 법인 성균관대학 설립(1946년)
이에 성균관과 성균관대가 아무 관련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관련 역사를 전혀 모르는 발언이다.
1945년 광복 후 명륜전문학교가 부활하고[14] 경학원이 성균관으로 명칭을 회복했다.[15] 같은 해 11월 김창숙의 주도로 전국유림대회가 열렸고 전국에서 천여명의 대표 유림들이 성균관 명륜당에 모였다. 김구가 위원장을 이승만이 고문을 역임했다.[16] 이 자리에서 성균관의 정통을 계승할 대학의 수립을 위하여 '성균관대학 기성회'가 조직되었으며, 종전의 명륜전문학교 재단을 통합하여 재단법인 성균관대학을 설립하였다. 1946년 9월 25일 문교부로부터 성균관대학이 정식으로 인가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이 과정에서 전국 향교로부터 재산을 갹출 받았고 전국 유림들이 기부금을 냈다.[17] 그리고 학봉 이석구가 재단법인 학린사의 거대한 토지재산을 희사하였다. 초대 학장으로 김창숙이 취임하였다. 당시에는 성균관대 총장과 성균관장이 겸임이었다.
1963년 사학법 시행 이후에는 학교법인 성균관과 재단법인 성균관으로 분리되었다. 이후에도 성균관대 총장이 성균관의 당연직이사이며 성균관장은 성균관대의 당연직이사로 양자의 밀접한 관계가 유지됐었다.기사 재단 분리 이전에는 성균관장과 성균관대 총장을 한 사람이 겸임하는 정도였다.기사 이후에도 성균관장은 성균관대 총장이나 성균관대 교수 출신이 취임하는 경우가 많았다.기사기사 특히 성균관의 중요 행사인 석전은 그 원형이 잘 보존되어 문화적 가치가 높은데, 그 석전에 성균관대 총장이 매번 빠짐없이 참석하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기사 이런 성균관대 총장의 역할은 지금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다.기사
참고로 국왕이 문묘에 제례를 올릴 때에 성균관 유생들만을 대상으로하는 시험인 알성시가 존재하였는데, 이는 전통 유산이라고 하여 현대에도 성균관대학교에서 가끔씩 재현하였다. 1990년대에는 유학자들을 모아서 먹 갈고 붓으로 쓰는 그야말로 전통 과거의 재현이었고, 2000년대에는 재학생들에게 도포를 입혀서 시험 치르는 형태로도 등장했다. 심지어 디지털 알성시라고 해서 '''노트북으로 글 작성하고 심지어 게임으로 대결까지 벌이는''' 상상을 초월한 형태로도 전개되기도 하였다. 과거와 같이 돗자리를 깔고 도포 입고 복건을 쓰고 진행하였다. 그야말로 희귀한 구경거리이기 때문에 한번 할 때마다 언론에도 보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