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트 디즈니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월트 디즈니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사옥
'''월트 디즈니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Walt Disney Animation Studios
'''
[image]
'''이전 명칭'''
디즈니 브라더스 카툰 스튜디오 (1923-29)
월트 디즈니 프로덕션 (1929-1985)
월트 디즈니 피처 애니메이션(1986-2006)
'''형태'''
부서
'''업종'''
영화 산업
'''전신'''
래프 오 그램
월트 디즈니 카툰즈
'''창립'''
1923년 8월 23일 (100주년)
'''창립자'''
월트 디즈니
로이 O. 디즈니
'''소재지'''
미국 캘리포니아 버뱅크
'''국가'''
[image] '''미국'''
'''주요 인물'''
앤드루 밀스타인 (사장)
제니퍼 리 (CCO)
'''제품'''
애니메이션 영화
'''직원'''
800명 이상
'''모기업'''
월트 디즈니 스튜디오
'''홈페이지'''
홈페이지

1. 소개
2. 역사
3. 작품
4. 흥행
4.1. 한국
5. 기타
6. 관련 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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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1923년 8월 23일에 설립된 '''현존하는 역사상 가장 오래된 애니메이션 스튜디오.'''[1] 월트 디즈니 컴퍼니 산하 장편 영화 제작 스튜디오이자 월트 디즈니 컴퍼니의 모태가 되는 기업이다. 첫 작품은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1937)로, 디즈니를 대표하는 굵직한 장편 애니메이션을 제작했다. 2000년대 중반에 들어서는 조금 주춤하기도 했지만, 드림웍스 애니메이션, 그리고 픽사와 함께 미국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를 대표하는 곳.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를 작업한 ''''나인 올드 맨''''으로 대표되는 애니메이션계의 원로들로부터 현대 애니메이션 제작법의 기초가 정립되기도 했다. 한때 월트 디즈니 피쳐 픽처스로 개명했으나, 픽사와의 합병 이후 스튜디오의 개편 과정에서 다시 월트 디즈니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로 돌아왔다. 로고 역시 배급 시에는 월트 디즈니 픽처스의 로고가 대신 삽입되었지만 최근 작품부터는 새 로고가 대신 출력되고 있다.
우리가 영화관에서 만나는 디즈니 영화들은, 모두 다 월트 디즈니 컴퍼니가 아닌, 여기서 제작하고 있다.

2. 역사



디즈니 애니메이션 영화 한정으로 월트 디즈니 로고와 함께 나오는 월트 디즈니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로고. 단편 증기선 윌리의 한 장면이다.
월트 디즈니와 로이 디즈니가 1923년 로스앤젤레스에 '''디즈니 브라더스 카툰 스튜디오'''를 설립했고 실사와 애니메이션을 합친 앨리스 단편 영화 시리즈를 약 3년간 제작했다.[2] 이때 월트는 제작 및 사업에 전념하고 어브 아이웍스를 총작화감독으로 다시 불러 작화를 맡기도록 했다. 하지만 1928년 디즈니가 공들여 단편 제작에 임했던 오스왈드 래빗유니버설 픽처스에 판권을 뺏기며 새 캐릭터를 만들기 위한 작업에 들어갔고 디즈니는 영화에 음성 삽입을 위해 음악가 칼 스텔링과 사업가인 팻 파워스와 접촉하면서 <증기선 윌리>부터 'cinephone'을 활용하여 세계 최초로 광학녹음 방식을 도입시켰다. 뒤이어 1929년 <실리 심포니 시리즈> 1탄 '해골 춤'을 만들어 또다시 히트했다.
그러나 작품 퀄리티를 높이기 위해 제작비는 갈수록 올라갔으나 얼마 못 가 파워스랑 분쟁을 겪어 수입금이 들어오질 않았다. 게다가 절친 어브 아이웍스도 월트 디즈니와 제작 관련해서 두 차례 언쟁을 벌이고 독자 제작사를 세워 퇴사했다. 그 전인 1929년 12월에 컬럼비아 픽처스랑 새로 유통 계약을 맺었다. 다만 컬럼비아 시절 3년여 동안 애니메이터들이 작품 히트에 따라 타 제작사에 고액 스카우트됐기 때문에 시리즈 제작에 차질을 겪기도 했다.
3년 후 1932년 실리 심포니 시리즈 단편 중 '꽃들과 나무들'을 최초 3색 테크니컬러로 제작해 미국 애니계에 충격과 공포적인 여파를 남겼다. 이때 테크니컬러 회사와 2년간 프로세스를 독점 계약을 체결했는데, 이 때문에 루니 툰이나 뽀빠이 단편에서 테크니컬러 도입이 늦은 원인으로도 작용하기도 했다.
디즈니는 1934년 장편 영화 제작을 발표했는데, 이는 당시의 대부분 단편 애니를 제작하던 영화사들보다 차별화된 시도였고, 1937년 개봉된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의 배급은 RKO 라디오 픽쳐스가 맡았다. 이는 개봉 후 대흥행을 거둬 스튜디오를 버뱅크에 위치한 부에나비스타 거리로 이전하는 데 한몫 해내기도 했으며, 종업원도 1천여 명까지 증가했다. 1930년대 중반부턴 도날드 덕, 구피, 플루토 등 다른 캐릭터를 주역으로 내세운 단편의 제작 수를 늘려나갔다. 1940년 독자 배급사 브에나 비스타를 세웠다.
1940년대엔 《환타지아》와 선전용 영화 'victory through air power'의 흥행 실패로 인해 몇년간 고비용 장편 영화 제작을 중단했었고, 《피노키오》에서 활약한 9명의 애니메이터(나인 올드맨)[3]들이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1941년 12월 미국의 제2차 세계대전 참전으로 미국 정부로부터 의뢰받아 《총통각하의 낯짝》 등의 선전용 애니메이션들을 제작해 많은 대중적 호응을 얻었으나 타 영화사들과 달리 적자로 한동안 고생했다. 게다가 직원이 1천여 명에 육박해지면서 종전의 가부장적이고 독단적인 제작 스타일로는 회사를 지탱하기 힘들었다.
이로 인해 스튜디오 측이 적자로 인해 정리해고, 임금 삭감, 장편 애니 제작중지, 주식 매각 등의 대책들을 발표하자 애니메이터들이 파업을 일으켰고, 피켓 대열은 사장인 월트 디즈니에게 "사이비 휴머니스트"라며 침을 뱉기까지도 했다. 해고된 이들 중 보브 캐논(Bobe Cannon), 존 허블리(John Hubley), 데이빗 힐버맨(David Hilberman), 월트 켈리(Walt Kelly), 스티븐 보스스튜(Stephen Bosustow) 등은 UPA를 설립해 독자적인 작품을 제작해나갔고, 이에 디즈니도 애니메이터, 연출가 등 스탭들의 의견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전환하면서 이전의 카리스마도 점차 사라졌다.
이후 1950년 《신데렐라》, 1951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만들어 주위의 호평을 받았으나, 정작 월트 디즈니는 자신이 작품을 직접 감독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같은 칭찬을 내켜하지 않았다. 1953년부터 브에나 비스타 디스트리뷰션에서 디즈니 영화들을 배포하게 되고, 이 무렵부터 월트 디즈니는 TV 프로그램 제작과 디즈니랜드 공사에 더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에 애니메이션 제작은 주로 나인 올드맨과 디즈니 스튜디오 소속 애니메이터들이 담당했다고 한다. 그러나 《잠자는 숲속의 미녀》의 흥행 실패로 디즈니 스튜디오는 1959년에 대규모로 정리해고를 단행했다. 그 뒤로 1960년대에 《정글북》, 《101마리 달마시안》으로 건재함을 과시했으나 70년대엔 월트 디즈니의 사망과 스튜디오 경영진 교체, 베테랑 애니메이터들의 은퇴와 더불어 인기가 한동안 하락하였다.
1980년대 초반부터 컴퓨터 기술을 애니메이션 제작에 활용하기 시작했고, 마이클 아이스너제프리 카첸버그 등 새로운 경영진의 영입과 더불어 대규모 조직 개편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제작했던 장편 영화들이 줄줄이 실패를 거두면서 디즈니 스튜디오는 실사 영화와 TV 프로그램 생산과 테마파크 확장, 해외 스튜디오 설립 등 문제를 헤쳐나가기 위한 방안들을 구상해 실행시킨다. 1989년 《인어공주》의 흥행 성공으로 인하여 디즈니 르네상스를 개막하였고, 1995년에 《토이 스토리》의 배급을 맡으면서 듣보잡이었던 픽사를 메이저급 회사로 발돋움해주는 데 기여하였다. 그렇지만 90년대 중반 이후로 경영진들간의 마찰과 권위주의적 행태 및 영화 흥행 실적의 감소로 인해 다시 한번 침체를 겪는다. 그러나 2006년 픽사 인수로 디즈니에 복귀한 존 라세터의 스튜디오 환경 쇄신과 더불어 《라푼젤》이 다시 목표 이상의 실적을 거두면서 디즈니 르네상스의 부활을 알린다.
한국에선 2014년 이전까지 100만 관객을 넘은 작품이 《라푼젤》 하나뿐이어서 드림웍스에 비해 3D 애니메이션으로 널리 알려진 곳은 아니었으나 2014년에 《겨울왕국》이 국내 애니메이션 역사상 최초로 '''천만 관객을 돌파하면서''' 유명세가 극도로 높아졌다.
존 라세터의 직원 대상 성추문이 미투 운동의 여파로 밝혀지면서 겨울왕국의 감독 제니퍼 리가 새 CCO를 맡게 되었다.
지속적인 비디오 시장의 축소와 더불어 디즈니툰 스튜디오의 작품들의 평가와 흥행이 좋지 않게 나타나자 2018년에 스튜디오 폐쇄가 결정되었다.

3. 작품


픽사 등의 월트 디즈니 산하회사는 틀이 따로 있으므로 여기에서는 월트 디즈니의 작품만 기술한다.


4. 흥행



4.1. 한국


'''순위'''
'''제목'''
'''전국 관객 수'''
'''매출액'''
'''개봉년월일'''
1
겨울왕국 2
1,374만
1,147억
2019년 11월 21일
2
겨울왕국
1,030만
824억
2014년 1월 16일
3
주토피아
470만
370억
2016년 2월 17일
4
빅 히어로
280만
219억
2015년 1월 22일
5
모아나
231만
180억
2017년 1월 12일
6
주먹왕 랄프 2: 인터넷 속으로
175만
139억
2019년 1월 3일
7
라푼젤
101만
101억
2011년 2월 10일
8
주먹왕 랄프
91만
65억
2012년 12월 19일
9
볼트
75만
49억
2008년 12월 31일
10
치킨 리틀
58만
29억
2006년 1월 26일
11
브라더 베어
35만
1억
2004년 1월 16일
12
보물성
23만
-
2003년 1월 1일
13
릴로 & 스티치
23만
-
2002년 7월 19일
14
아틀란티스 : 잃어버린 제국
18만
-
2001년 7월 13일
15
로빈슨 가족
11만
7억
2007년 4월 19일
16
공주와 개구리
10만
7억
2010년 1월 21일
17
카우 삼총사
1만
3402만
2004년 8월 6일
표에서 나타났듯이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2014년을 기준으로 흥행 판도가 크게 달라졌다. 주먹왕 랄프까지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200만을 넘긴 작품이 없었고, 드림웍스 애니메이션에 크게 밀렸었다. 하지만 2014년에 겨울왕국이 천만 관객이라는 신화적 흥행을 일으킨 뒤부터 나온 작품들은 200만은 물론 드림웍스 애니메이션을 뺨치고도 남을 흥행력[4]을 보여주었다.
또 겨울왕국의 흥행 이후부터 한국 시장에서 드림웍스의 흥행은 부진해진 반면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흥행이 강세를 찾기 시작한 동시에 다른 스튜디오인 픽사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일루미네이션 엔터테인먼트, 소니 픽처스 애니메이션도 한국 시장에서 강세를 얻기 시작했다. 겨울왕국의 영향력이 한국 영화 시장 속 애니메이션 흥행에 엄청난 변화를 일으켰음을 알 수 있다.
2019년 말에 개봉한 겨울왕국 2도 엄청난 흥행을 거두며 전작 겨울왕국 흥행을 깨고 2020년 1월 중순까지 13,721,194명을 기록해 역대 애니메이션 흥행 1위를 갱신했다.

5. 기타


픽사가 디즈니에 인수되고 존 라세터와 애드 캐트멀(픽사 사장)이 디즈니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의 지휘를 맡게 되면서 보수적이고 경직되어 있었던 스튜디오의 분위기가 많이 쇄신되었다. 기존 경영진 아래에서 철저히 종속되었던 과거와는 달리 픽사와 같은 제작자의 창의성과 개성을 중시하는 풍토가 형성되었다고. 실제로 합병 이후 픽사와의 협업이 늘어나면서[5] 작품 자체에서도 픽사 색이 짙어졌다는 평이 많아졌다. 페이퍼맨이나 말을 잡아라! 등 극장 공개용 단편 애니메이션 역시 제작 횟수가 많아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 부작용으로 픽사 작품과 월트 디즈니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의 작품을 헷갈려 하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가고 있다. 대표적으로 주먹왕 랄프는 미국 내 매체에서 몇 번이고 픽사 작품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최근 디즈니가 안시 애니메이션 축제에서 공개한 신작 <만찬(Feast)>의 경우 역시 몇 언론이 픽사 작품이라고 소개한 탓에 디즈니 애니메이터들이 트위터로 이를 비꼬기도 했다.
애니메이션계에선 2000년대에 비판을 많이 받았다. 라이벌 기믹이 있던 픽사가 여러 명작들을 흥행시키며 선전하며 급기야 토이 스토리 3로 정점을 찍었는데 그에 비해 디즈니는 동년에 개봉한 라푼젤 이전까지 하락세였다.[6] 그렇게 부진하다가 2013년이 되어서야 부활기가 찾아온다. 이후 빅 히어로, 주토피아, 모아나 등이 3연타를 치면서 다시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이후 겨울왕국 2가 개봉하면서 그 상승세는 더 올라가는 중.
공주(Princess)가 등장하는 작품마다 역사를 쓰는 것으로 유명하다. 회사의 첫 장편이자 애니메이션계의 영원한 오파츠(백설공주), 디즈니랜드 건립을 가능하게 해준 초히트작(신데렐라), 90년대 회사의 최전성기 작품들이자 지금도 회사의 밥줄인 시리즈들(인어공주, 미녀와 야수, 알라딘), 다시 한번 회사를 부활시킨 작품들(라푼젤, 겨울왕국)에도 프린세스가 등장한다. 한편으로 회사를 휘청거리게 만들었던 작품들에도 프린세스가 등장하기도 했다.(타란의 대모험, 잠자는 숲속의 미녀, 아틀란티스)
일본 만화계의 거장으로 불리는 데즈카 오사무 역시 디즈니의 애니메이션들을 어렸을때부터 즐겨보고, 많이 좋아했었다고 한다. 만화가가 되고 나서는 자신이 그린 만화의 애니메이션이 미국에 수출된다고 할때, 미국같은 애니메이션 강국에 자신의 작품이 나오면 창피를 당할까 걱정을 많이했다고 한다.

6. 관련 항목


[1] 최초의 애니메이션 제작사는 아니다. 플라이셔 스튜디오만 해도 디즈니보다 2년 앞선 1921년에 설립되었다.[2] 1926년 월트 디즈니 스튜디오로 첫 번째 사무소로 옮길 때까지 주소를 여러 차례 변경하였다고 한다.[3] 각각 레스 클라크, 마크 데이비스, 올리 존스턴, 밀트 칼, 워드 킴벌, 에릭 라슨, 존 라운즈베리, 볼프강 라이터만, 프랭크 토머스, 1970년대 중반부터 각각 은퇴한 디즈니의 원로 애니메이터들.[4] 겨울왕국은 드림웍스는 물론 모든 애니메이션의 기록을 제쳤고, 빅 히어로는 같은 해에 개봉한 드림웍스 애니메이션 을 압도하는 성적을 기록했다.[5] 대표적으로 겨울왕국. 합병 전인 2006년경부터 픽사와 공동 작업중이었다.[6] 사실 흥행에선 픽사의 토이 스토리 3와 라푼젤은 게임이 안되었다. 평가도 여전히 토이 스토리가 더 좋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