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라세터
'''The art challenges the technology, and the technology inspires the art.'''
'''예술은 기술에 도전하고, 기술은 예술에게 영감을 준다.'''
ㅡ 존 라세터
[clearfix]
1. 개요
미국의 애니메이터, 감독이자 픽사와 월트 디즈니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의 전 CCO.
2. 상세
쉐보레 판매원인 아버지와 미술 교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자랐다. 어릴적부터 만화영화를 보고 자랐는데, 10대가 되었어도 남들은 자동차나 여자친구에 관심을 가질 때도 여전히 만화영화에 빠져 살았다. 고등학교 1학년때 도서관에서 애니메이션 제작에 관한 책을 읽고, 애니메이션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의 진로를 정했다. 어느 정도였냐면 한국으로 고3이 되는 나이에도 만화영화를 놓치지 않기 위해 방과 후에 달려왔을 정도다.
어린시절부터 디즈니에서 일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 대학에 진학할 때 칼아츠에 입학했다. 대학생 시절 1977년에 개봉한 스타워즈를 보고 그는 큰 감명을 받았고 이는 곧 그의 인생에 큰 영향을 주었다.[1][2] 그리고 1979년 대학을 졸업하고 꿈에도 원하던 디즈니에 입사해 애니메이터로서 일을 시작하게 되었지만 그는 월트 디즈니 프로덕션이 아티스트들이 아닌 경영진들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큰 실망에 빠지게 된다. 그 무렵, 라세터는 디즈니 내부에서 제작되어 컴퓨터 그래픽을 도입한 1982년작 트론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
일찌감치 CG 애니메이션에 대한 나름의 비전을 가지고 있었던 라세터는 글렌 킨(Glen Keane)[3] 과 함께 이러한 비전을 디즈니 측에 강력하게 어필했지만[4] , 그 때는 CG 산업이 정말 태동기에 있었던 상황이라 당시 디즈니의 CEO였던 론 밀러[5] 는 이러한 비전에 대해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고, '''훗날 컴퓨터가 2D 애니메이터들의 일자리를 빼앗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6] 에 론 밀러는 얼마 안 가 라세터를 디즈니에서 해고시켰다.[7]
하지만 곧 기회는 찾아왔고, 라세터는 루카스필름 산하의 컴퓨터 그래픽 팀[8] 에 입사했다. CGI 부서를 이끌던 에드윈 캐트멀과 올비 레이 스미스는 CG 애니메이션에 대한 열정은 뚜렷했으나 전문 애니메이터가 아니었던 만큼 스토리텔러로서의 재능은 부족했고, 라세터는 훌륭한 스토리텔러로서 CGI 부서의 애니메이션 제작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이 때 동료들과 실험적으로 만들었던 단편 애니메이션이 'The Adventures of André and Wally B'로, 이를 통해 CG 애니메이션의 가능성을 업계에 어필하는 데에 성공한다.
조지 루카스가 이혼과 관련한 문제로 픽사를 스티브 잡스에게 팔아치운 이후, 그는 잡스의 후원 아래서 이전에 만들었던 단편 작품 '틴 토이'를 장편 애니메이션 토이 스토리로 확장시켜 개봉함으로서 그의 비전이었던 '''3D 애니메이션의 시대'''를 열었다.[9] 이후 스티브 잡스의 전폭적 지원 하에 픽사의 수장으로 발탁되고 토이 스토리 시리즈부터 업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걸작 CG 애니메이션들의 제작을 지휘했다.
2006년, 삽질을 반복하던 월트 디즈니 컴퍼니는 픽사를 인수했고, 존 라세터는 근 20년만에 자신을 내쳤던 월트 디즈니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의 수장이 되었다. 이후 '로빈슨 가족'부터 디즈니 애니메이션 제작을 지휘하게 되었는데, 존 라세터가 디즈니에 돌아와서 가장 처음 한 일은 스튜디오의 분위기 쇄신이었다. 2006년까지 월트 디즈니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는 경영진의 통제 아래 철저히 묶여있는 상황이었는데, 이러한 스튜디오 환경을 픽사와 같은 영화 제작자 위주의 환경[10] 으로 바꿈으로써 제작진이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된 것이 성공의 요인이었다고 겨울왕국의 프로듀서인 피터 델 베초는 인터뷰에서 밝혔다. 빅 히어로의 프로듀서인 로이 콘리도 인터뷰에서 라세터의 열정적인 지원이 스튜디오의 변화를 이끌어냈다고 말하며 비슷한 코멘트를 남겼다. #
그가 처음으로 제작에 관여한 작품인 로빈슨 가족은 평과 흥행 모두 좋지 않은 편이었지만, 볼트와 공주와 개구리의 흥행 성공[11] 을 기점으로 재기를 시작하여 라푼젤, 주먹왕 랄프와 '''겨울왕국'''까지 연달아 성공시킴으로써[12] , 2000년 중반까지만 해도 애니메이션 제작을 포기할 뻔했던 디즈니를 완벽하게 부활시키고 제 2의 디즈니 르네상스를 열었다. 결국 그는 '''자신을 쫓아냈던 회사가 훗날 맞닥뜨린 위기를 자기 손으로 직접 끝낸 것이다.'''
2011년 타임지 선정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 중 한명에 포함되었다.
2018년까지 CCO(Chief Creative Officer)로서 모든 디즈니/픽사 애니메이션의 제작을 지휘하며[13] , 애니메이션 제작 기획 역시 에드 캐트멀(픽사 CEO)과 함께 심사했다.
2.1. 성추행 사건
2014년에 토이 스토리 4의 제작이 발표되면서 카 2 이후로 오랜만에 감독에 복귀하게 되었는데, 2017년 말에 하비 와인스틴 성범죄 파문 이후 미국 전역에서 성추행 의혹이 나오면서 같이 성추행 의혹이 터졌고 본인이 이를 인정하며 6개월간 회사를 떠날 것이라고 했다. 원래 연출을 맡게 될 예정이였던 토이 스토리 4의 감독 자리에서 물러나고 조시 쿨리로 변경 되었다.
결국 디즈니는 2018년 12월 31일자로 라세터가 월트 디즈니 컴퍼니를 퇴사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회사를 나가기 이전까지는 사내에서 컨설팅 역할만 맡을 거라고.
그리고 2019년 초 스카이댄스 애니메이션[14] 대표로 부임하면서 논란이 커질 전망이다. # 이로 인해 엠마 톰슨은 원래 스카이댄스 애니메이션의 신작 '럭(Luck)'에서 더빙을 맡을 계획이었으나 존 라세터의 영입 소식에 분개하며 영화에서 하차했다.
3. 여담
- 사실 본인의 능력도 뛰어났지만 저물어가던 애니메이션 업계를 3D 애니메이션을 통해 되살려낸 것은 때를 잘만난 측면도 있었다. 공교롭게도 라세터가 업계의 업무전반에 대해서 잘 알아가고 본격적으로 자신이 능력을 펼쳐보일 때 픽사를 스티브 잡스가 인수했던 것은 신의 한수였다. 다만 스티브 잡스 항목을 참고하면 알겠지만 잡스가 애니메이션에 대한 엄청난 꿈이나 애정이 있어서 한 일은 아니었다. 픽사를 인수했을 당시 애플의 창업자로 애플에서 쫓겨난 상태에서 잡스에게는 권토중래할 어떤 무기가 필요했다. 그것이 바로 픽사였다. 3D 애니메이션이라는 것은 당연히 고도의 컴퓨터 기술과 멋들어진 디자인이 필요했는데 잡스가 남긴 가장 위대한 유산인 iPhone을 보면 알겠지만 디자인과 컴퓨터 기술의 고도의 집합체이다. 잡스로서는 자신이 애플에 복귀할 때를 대비해 내공을 키울 필요가 있었고 이에 픽사를 선택하여 전폭적으로 투자를 하였다. 하지만 역시 비즈니스는 비즈니스라서 수익이 나지 않자 마구잡이로 화를 내었던 사람 또한 역시 잡스였다. 그럼에도 토이 스토리의 성공 이후 마음이 변했는지 픽사와 그 직원들을 매우 아끼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가 디즈니에 픽사를 매각할 때 밥 아이거와 가장 많이 논의를 했던 문제도 픽사의 사내 문화를 어떻게 유지하고 보존해나갈 것인가에 대한 부분이었고 스티브 잡스 본인이 말하길 라세터가 찬성하지 않았더라면 픽사의 매각은 절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 #
- 셀 애니메이션을 끝장낸 사람이라는 평을 듣고 있지만 본인은 그런 평가에 대해 굉장히 가슴 아파한다. 애초에 라세터는 CGI 전문가가 아니라 애니메이션 제작을 배운 애니메이터 출신이며, 심지어 애니메이션 연출의 기본을 정립한 디즈니의 소위 '아홉 원로(Nine Old Men)'에게 애니메이션을 배운 2D 애니메이션 업계의 성골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 존재다. 픽사와 디즈니의 합병 후 와해된 2D 제작팀을 끌어모아 공주와 개구리, 곰돌이 푸 2011을 제작한 것도 애드 캐트멀과 라세터의 공이 컸다.
- 그 때문인지 최근에는 3D로 2D 애니메이션의 느낌을 살려내는 시도를 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페이퍼맨에서는 3D를 통해 셀 애니메이션 특유의 평면적이고 과장된 움직임을 만들어 냈으며, 말을 잡아라!에서는 미키 마우스가 비현실스럽게 움직이는 모습을 3D로 표현하고 2D와 3D 사이를 자연스럽게 오고가는 장면까지 만들었다. 또한, 본진인 픽사에서도 텍스쳐와 필터를 사용해 유화와 카툰 풍의 색채를 재현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그리고 공주와 개구리, 곰돌이 푸 리메이크와 같은 2D 작품의 제작을 추진했으며 현재 디즈니의 메인 작품들에도 수작업 효과를 집어넣고 있다.[15] 스튜디오 지브리를 방문했을 때는 지브리 측에 '2D 애니메이션을 포기하지 말아달라'는 요청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브리가 애니 제작팀을 해체하면서 사실상 2D 애니메이션의 앞날이 매우 심각한 상황이 되었다.
- 라세터의 셀/CG 애니메이션에 대한 견해는 '애니메이션은 어디까지나 메시지를 건네기 위한 수단'이라는 것이다. 얼마나 재미있는 이야기를 구상하는가가 중요하지, 무슨 연필이나 프로그램을 쓰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16]
- 1987년 11월 11일 일본을 방문했을 때, 그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들 중 하나가 루팡 3세 칼리오스트로의 성이라는 것을 안 현지인 측의 소개로 스튜디오 지브리를 찾아가 미야자키 하야오와 첫 만남을 가졌다. 그 당시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웃집 토토로를 제작하고 있었는데, 라세터는 고양이 버스라는 설정에 감탄을 했고 그림을 선물로 받았다고 한다. 이후 일본을 방문할 때마다 그는 미야자키와 만남을 가지고 우정을 쌓았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미국에서 개봉했을 때는 라세터가 선전활동과 번역총지휘로 도움을 주었고, 토이 스토리 3에는 지브리의 마스코트인 토토로가 찬조 출연하기도 했다.
- 2006년 디즈니의 픽사 인수와 관련하여 미국 포춘지의 커버스토리를 장식한 적이 있다.
[image]
- 차덕후다. 쉐보레 판매원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어릴 적부터 차를 좋아했다고. 희대의 차덕후 영화인 카를 본인이 감독, 각본, 스토리를 전부 맡으면서 제작했으며, 후속작인 카 2 역시 본인이 감독했다. 영화 내에서도 존 라세타이어라는 이름으로 출연. 픽사의 신작으로 인크레더블 2와 함께 뜬금없이 카 3: 새로운 도전이 발표된 것도 그의 입김이 가해진 결과라는 이야기가 있다(...). 물론 주요 이유는 카 시리즈의 완구 판매량이 높아서겠지만.[17]
- 현재 디즈니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뿐 아니라 디즈니툰 스튜디오(Disneytoon Studio)[18] 의 수장 역시 맡고 있는데, 이들이 기존에 만들어왔던 홈비디오행 후속작 개발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 때문에 라세터 취임 이후 제작중이었던 치킨 리틀, 아리스토캣의 후속작은 모두 취소. 이러한 결단이 성과를 보았는지 디즈니툰의 최신작인 비행기나 해적 요정은 디즈니툰 스튜디오의 작품이라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퀄리티가 높아졌다.
- 하와이안 셔츠를 좋아한다. 당장 이 문서의 상단의 프로필 사진에도 하와이안 셔츠를 입은 것을 확인 할 수 있고 사적인 자리는 물론이고 시사회 등의 공적인 자리에서도 입고 나오는 경우가 많다. 옷장에 1000장 정도 구비해 놨다고(...). 또한 자신이 제작에 참여한 영화들을 바탕으로 직접 디자인한 셔츠들을 주문제작해서 입고 등장하기도 한다. 픽사의 자유분방한 사내 문화를 상징하는 복장으로 주목받기도 했다. 최근엔 자신이 참여한 작품들을 집대성한 셔츠를 입고 등장하였다.
-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1994년엔 FreeBSD 책의 표지에 FreeBSD의 마스코트인 BSD Daemon을 그려놓았는데, 이 그림이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진 BSD 데몬의 모습이 되었다. 그 이전에 흑백 버젼을 그린 적도 있었다.
- 픽사 애니메이션에 조연 (목소리 출연)으로 등장을 많이 했다.일본어 더빙에서는 이 사람이 픽사작품에서 맡은 캐릭터 대부분을 타치키 후미히코가 맡았다.
4. 작품
작품명 옆에 세부적인 직책이 첨언되지 않은 작품은 책임 프로듀서(Executive Producer)로 참여한 작품들이다.
4.1. 픽사
- 단편
- 룩소 주니어 - 감독, 각본, 모델링
- 틴 토이 - 감독
- 장편
4.2. 월트 디즈니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4.3. 디즈니툰 스튜디오
[1] 가장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라고 한다. 그 당시 스타워즈에 충격을 먹은 동료 애니메이터들이 대부분 VFX 쪽으로 직업을 바꾸려고 했다고.[2] 그의 인터뷰에 따르면 당시 디즈니는 월트 디즈니의 사망과 함께 디즈니의 핵심 애니메이터들이 전부 은퇴할 무렵으로 세대교체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던 상황이였으며 애니메이션 그 자체에 대한 인식도 애들이나 보는 유치한 오락물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 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남녀노소 불문하고 스타워즈에 열광을 하던 광경은 그에게 애니메이션도 이와 비슷한 수준의 새롭고 혁신적인 무언가를 보여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게 만들었다.[3] 디즈니의 원로 애니메이터. 인어공주, 알라딘, 미녀와 야수 등 굵직한 작품을 작업했다. 마지막으로 라푼젤을 작업한 후 디즈니를 퇴사했고, 2013년에 디즈니 레전드라는 칭호를 받았다.[4] 이 때 만든 테스트 애니메이션이 Where The Wild Things Are(1983)이다.[5] 월트 디즈니의 맏사위이며 1978년부터 사장직을 맡았고 1983년부터 CEO직을 역임했다. 그러나 장인어른과 달리 사업적 수완은 부족했는지 론 밀러가 이끌었을 당시의 디즈니는 그야말로 내리막길 그 자체였고 이같은 침체기는 마이클 아이스너에게 자리를 내주기 전까지 계속되었다.[6] 실제로 토이 스토리의 대성공 이후 헐리우드에서는 2D 애니메이션 인력을 대폭 축소하고 3D 애니메이션의 투자에 집중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이러한 견해는 어떤 점에서는 타당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픽사 스토리(The Pixar Story)라는 다큐에서 론 클레멘츠(인어공주와 알라딘의 존 머스커 감독의 친구)가 CG 애니메이션 때문에 많은 2D 애니메이터들이 일자리를 잃었다고 언급했다. 그리고 훗날 곰돌이 푸 2011 이후 디즈니가 더이상 2D 애니메이션을 만들지 않는다고 선언을 하면서 이 불안감은 결국 실현이 되었다.[7] 라세터가 디즈니에서 쫓겨난 지 1년 후 디즈니의 임원진들이 싹 물갈이되었고 새롭게 영입된 마이클 아이스너와 제프리 카첸버그는 단편 틴 토이를 보고 가능성을 엿본 후 라세터에게 디즈니로 다시 돌아오라고 계속 설득을 시도했다. 그러나 라세터는 ''''지금 디즈니로 가면 감독 자리는 얻을 수 있겠지만 여기에 남는다면 역사를 만들 수 있다.''''고 말하며 제안을 거절했다.[8] 이후 픽사로 개명한다.[9] 이후 드림웍스가 '신밧드-7대양의 전설'의 흥행실패로 2D 애니메이션 제작을 포기하게 되면서 고자본이 들어간 극장판 2D 애니메이션은 사실상 사양세로 돌아서게 되었다. 이러한 흐름에 당황한 디즈니는 아틀란티스: 잃어버린 제국와 보물성 등 실험적인 작품들을 내지만 연이은 흥행 실패로 카우 삼총사 이후 5년 후에 나온 공주와 개구리와 곰돌이 푸 리메이크판을 낸 후로는 극장판 장편 2D 애니메이션 제작을 포기했다.[10] 스튜디오 내의 재무팀을 완전히 없애버리고 영화 제작진이 자율적으로 예산을 집행할 수 있게끔 회사 구조를 재편하였다. #[11] 다만 이 과정에서 의견 충돌로 비뮤지컬 계열 애니메이션 최고 흥행작 중 하나인 릴로와 스티치의 감독이자 스티치의 성우인 크리스 샌더스을 해고했다. 그는 이후 드림웍스로 들어가 드래곤 길들이기를 만든다.[12] 곰돌이 푸(2011)는 평단의 호평을 받았지만 흥행 면에선 아쉽게도 제작비 정도를 벌어들이는 데 그쳤다.[13] 현재 모든 디즈니/픽사 애니메이션에 'Executive Producer'로 이름을 올렸다. 바지사장은 아닌 것이, 제작 인터뷰마다 존 라세터에게 도움을 받았다는 내용이 많다. 대표적인 것으로 Let It Go의 영상 제작 과정이나 올라프의 캐릭터 형성 과정.[14] 영화 제작사 스카이댄스 미디어의 신설된 애니메이션 부서다.[15] 라푼젤의 빛 효과와 겨울왕국에서의 각종 얼음결정, 눈 효과가 대표적인 사례이다.[16] 아카데미 시상식의 연설에서 '아무도 마크 데이비스나 올리 존스턴에게 '무슨 연필을 썼느냐'고 묻지 않는다'며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라세터가 올리 존스턴에게 연필을 선물받은 적이 있다는 말이 있다(...).#[17] 카 시리즈는 픽사 작품중 가장 낮은 평가를 받음에도 불구하고 완구 판매량은 어마어마하다.[18] 디즈니의 메인 작품이 아닌 TV나 홈비디오용 후속작품을 제작하는 스튜디오이다. 디즈니 만화동산의 프로그램들이 디즈니툰의 대표작.[19] 당초 책임 프로듀서로 참여하였으나 제작 중간에 쫓겨났기 때문에 크레딧엔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