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벤투스 FC/역사

 



1. 개요
2. 역대 엠블럼
3. 초창기
4. 세리에 A 개편 및 국내 강자로의 부상, 첫 전성기
5. 보니페르티 시대 - 유럽 최고의 구단으로의 성장, 두번째 전성기
6. 리피 시대 - 세계 최강의 구단, 세번째 전성기
7. 칼치오폴리와 그 이후
8. 시절[1]
8.1. 악몽의 2009-10 시즌
8.2. 끊이지 않는 부진의 2010-11 시즌
9. 콘테 시대 - 제왕의 귀환
10. 알레그리 시대 - 리그 8연패, 역사그리
11. 사리 시대
12. 피를로 시대
13. 역대 감독
14. 역대 회장
16. 울트라스 응원단 부적절 응원 징계 사례


1. 개요


유벤투스 FC의 역사를 설명하는 문서.

2. 역대 엠블럼




3. 초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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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88 시즌 촬영된 유벤투스의 첫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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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벤투스의 역사가 시작된 벤치'''
유벤투스의 창단은 189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토리노의 세 고등학생이 한 벤치[2]에서 영국과 그들이 살던 토리노에서 한창 대유행이던 축구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가 구단을 만들자는 이야기가 나와 만들게 된 것이 구단 창단의 계기이다. 13명의 공동 창립자 중 에우제니오 칸파리(Eugenio Canfari)가 초대 구단주를 맡았는데, 당시 그는 고등학생 신분이었다. 1년 후 형인 엔리코 칸파리(Enrico Canfari)[3]가 구단주 자리를 이어받아 3년간 역임하였다. '젊은이들'을 뜻하는 클럽명 유벤투스는 고등학생들을 중심으로 창설한 클럽이라는 역사로부터 비롯되었다.
1905년 첫 우승을 차지하였으나, 당시 구단주이던 알프레드 딕(Alfred Dick)이 승부에 집착하는 구단 운영 방향에 환멸을 느껴 반대파를 이끌고 새로운 클럽을 창설하게 된다. 이 클럽이 현재 유벤투스와 지역 라이벌 관계에 있는 토리노 FC이다. 이후 첫 우승 시 핵심 플레이어로 활약했던 카를로 비토리오 바레티(Carlo Vittorio Varetti)를 비롯한 몇 명의 구단주를 거치며 고전하였으며, 이후 다시 우승을 차지한 것은 1925-26 시즌이 되어서였다.
'''참고 영상 자료'''




5탄 - 1996/97 시즌
유벤투스의 100년 역사를 소개하는 5부작 다큐멘터리 비디오 (1997)

4. 세리에 A 개편 및 국내 강자로의 부상, 첫 전성기


1929년 세리에 A가 프로화 되면서 라운드로빈 토너먼트 형태로 개편되었는데, 그 이전까지는 제노아 CFC가 9회 우승, FC 프로 베르첼리 1892가 7회 우승으로 양강을 이루고 있었고, 유벤투스 2회, AC 밀란 3회,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2회 등 우리가 오늘날 알고 있는 강호들은 그다지 강한 면모를 보이지 못하였다.
이렇게 초창기에 비틀대던 유벤투스가 도약의 기틀을 마련한 것은 엑소르피아트를 이끌고 있는 아넬리 가문과 관계를 맺게 되면서부터이다. 1923년 피아트 그룹 창립자의 아들인 에두아르도 아넬리가 구단주로 취임하여 모기업의 돈을 클럽에 투자하면서 유벤투스는 강팀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리그 개편 후 첫 우승은 인테르가 차지하였으나, 그 다음 시즌부터 유벤투스는 리그 5연패를 달성하며 화려하게 등장하였다. 당시 유벤투스 선수들은 1934년 이탈리아에서 개최된 월드컵에도 다수 국가대표로 출전하여 우승을 거두면서 이탈리아가 세계 축구계에서 강국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특히 골키퍼 잔피에로 콤비, 하프백 루이스 몬티, 아웃사이드 레프트 라이문도 오르시는 전경기에 출전하였다.
하지만 영원한 강자는 없는 법인지, 5연패 당시 레전드들의 은퇴 이후에 유벤투스는 침체기를 겪게 된다. 5연패 이후 몇 차례 볼로냐 FC와 인테르가 우승을 주고받은 뒤 토리노가 리그 5연패를 차지하며 그란데 토리노 시대를 열었다. 하지만 1949년 선수단을 태운 비행기가 추락하는 수페르가의 비극으로 말미암아 1968년 홈에서 열린 유로 우승까지 이탈리아 축구계는 침체기를 맞게 된다. 이후 세리에 A는 유벤투스-밀란-인테르의 트로이카 체제로 굳어져 1950년 이후로는 거의 이 세 클럽이 우승을 나누어 먹듯 하였다.[4]

5. 보니페르티 시대 - 유럽 최고의 구단으로의 성장, 두번째 전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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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벤투스는 잠피에로 보니페르티를 회장으로 선임하고 1970년대부터 밀란-인테르와의 우승 횟수 격차를 벌려 나가기 시작하면서, 조반니 트라파토니 감독이 부임한 1976-77 시즌 UEFA컵을 차지하면서 제2의 전성기를 시작, 유럽 수준의 강팀으로서의 면모를 구가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유럽 축구는 요한 크루이프프란츠 베켄바워 등이 이끈 토탈 풋볼이라는 거대한 전술적 흐름으로 이탈리아 전통의 카테나치오는 경쟁력이 없어지고 사장되어 가고 있었다. 또한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이탈리아 클럽은 유럽 대항전에서 좋은 성과를 못 내고 있었다. 이에 회장 잠피에로 보니페르티조반니 트라파토니는 토털 풋볼의 혁신성과 고전적인 카테나치오를 융합하는 장기적인 전술적 프로젝트와 이에 따라 대대적인 유망주 발굴과 유망주 중심으로 팀을 구성한다는 거대한 프로젝트를 계획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카테나치오와 토탈 풋볼의 혼합 전술이 바로 '''조나 미스타'''이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주세페 푸리노, 로베르토 베테가, 파올로 로시''' 등 유스 출신 플레이어들을 발굴했고, 타 팀으로부터 '''가에타노 시레아, 안토니오 카브리니, 클라우디오 젠틸레, 마르코 타르델리, 프랑코 카우시오''' 등 플레이어들을 영입하면서 탈바꿈에 성공했다. 그 결과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에도 크게 기여했는데, 발굴한 유망주들은 국가대표팀에서 볼로코-유베라는 별명을 가지고 엄청난 활약을 보여주며 1982 FIFA 월드컵 스페인의 이탈리아 우승 주역이 되었다. 결승전 선발의 '''8명'''이 유벤투스 선수였으니 이 프로젝트가 이탈리아 전반에 얼마나 거대한 영향을 끼쳤는지 알 수 있다.
이후 1980년대 들어 발롱도르 및 리그 득점왕 3연속 수상에 빛나는 미드필더 미셸 플라티니가 입단하면서 유벤투스는 세계 최고의 클럽 중 하나로 우뚝서게 된다. 1983-84 시즌 UEFA 컵위너스컵에 이어 1984-85 시즌 유러피언 컵 타이틀을 획득하면서, UEFA가 개최하는 모든 유럽 대항전 대회를 최초로 우승하는 위업을 달성하였고, 이를 기리기 위해 1988년 UEFA에서는 UEFA 플라크라는 기념패를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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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제네바에서 열린 유럽 대항전 조추첨 행사에서 UEFA 4대 회장인 자크 조르주(왼쪽)가 잠피에로 보니페르티에게 UEFA 플라크를 수여하는 장면.
단 하나 안타까운 점은 유러피언 컵 우승 당시 헤이젤 참사가 일어나 기쁨을 만끽하지 못했다는 것이다.[5] 당시 유럽 축구계는 분데스리가의 강세가 사그라들며 이탈리아와 잉글랜드가 최강 리그의 자리를 놓고 경쟁하던 상황이었는데, 리버풀의 훌리건들이 일으킨 헤이젤 참사로 인해 잉글랜드가 UEFA로부터 5년간 유럽 대항전 출전 금지 처분을 받음으로써 이후 세리에 A의 위상이 급상승하는 효과가 발생하였다. 이는 세리에 A 전체로 보면 호재였으나 유벤투스 입장에서는 악재가 되었는데, 정점을 찍은 트라파토니 감독이 사임한 이후 유벤투스는 연이어 우승에 실패하였고, 그 사이 급성장한 밀란이 리그 및 유럽을 제패한 기세는 다시 모셔온 트라파토니 감독도 막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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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리피 시대 - 세계 최강의 구단, 세번째 전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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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침체기를 이겨내고 다시 한 번 유벤투스에 전성기를 가져온 감독이 마르첼로 리피이다. 리피 감독이 부임한 1994-95 시즌 9년만에 스쿠데토를 되찾아온 것을 비롯, 4년의 기간 동안 유벤투스는 스쿠데토 3회,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에 3회 연속 진출하여 우승 1회, 준우승 2회를 차지하였고, 이는 플라티니 시절을 뛰어넘는 클럽 최고의 전성기에 해당한다. 허나 당시 AS 로마 감독이었던 즈데넥 제만의 의혹 제기로 인해 약 7년 반에 걸친 조사 및 법정 싸움을 겪게 된다. 자세한 사항은 유벤투스 금지약물 복용 의혹 항목에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거듭되는 유럽 대항전 및 월드컵으로 인한 체력 부족, 에이스 알레산드로 델피에로의 무릎 부상 및 위 사건의 여파로 인해 1998-99 시즌을 7위로 부진하게 마친 유벤투스는 리피 감독을 카를로 안첼로티로 교체하고 기존의 델피에로, 필리포 인자기, 지네딘 지단, 에드가 다비즈, 안토니오 콘테, 알레시오 타키나르디, 치로 페라라, 파올로 몬테로, 잔루카 페소토, 마크 율리아노 등에 에드윈 반 데 사르, 잔루카 잠브로타 등을 보강, 완벽에 가까운 팀을 완성하며 7공주중 일약 우승 후보로 도약하였다. 그러나 1999-2000 시즌은 마지막 경기를 AC 페루자에게 내주며 SS 라치오에 역전 우승을 허용하였고, 2000-01 시즌은 전성기의 프란체스코 토티를 내세운 AS 로마가 내내 선두를 지켜 리그 우승도 실패, 챔피언스 리그에서도 조별 예선에서 탈락하는 충격을 맞는다.
설상가상으로 다비즈의 금지약물 검출 및 출장 정지로 인해 팀 전술 수정이 불가피해진 유벤투스는 다시 리피로 사령탑을 교체, 지단과 인자기, 반 데 사르 등을 팔고 SS 라치오에서 파벨 네드베드, 파르마 FC에서 잔루이지 부폰릴리앙 튀랑 등을 영입하는 역대급 이적시장 행보를 보인 끝에 탄탄한 팀을 만드는 데 성공하여 다시 우승을 차지하였다. 리피는 그 뒤로도 2002-03 시즌 리그 우승과 네드베드의 눈물로 유명한 챔피언스 리그 준우승을 거두었다. 이 팀을 파비오 카펠로가 이어받아 이탈리아 대표팀 주장 파비오 칸나바로, 세계 최고의 수비형 미드필더 에메르손, 그리고 유로 2004에서의 활약을 통해 자신의 이름을 알린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까지 영입하며 다시 유럽을 제패하기 위해 팀을 더욱 강화시키고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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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브라히모비치가 구상한 드림팀. 당시 호나우두 대신 다비드 트레제게, 파올로 말디니 자리엔 막 성장하기 시작한 유망주 조르조 키엘리니가 있었을 뿐,[6] 나머지 멤버들은 그대로인 말 그대로 드림팀이었다.[7]

7. 칼치오폴리와 그 이후


자세한 내막은 해당 문서 참조.
칼치오폴리 스캔들로 2004-05 시즌 우승은 공석, 2005-06 시즌 우승은 인테르에게 넘어갔고, 감독 포함 구성원의 상당수가 이적을 했다. 베스트11 중에 6명이 떠났는데 사이좋게 두 명씩 빅클럽으로 갔다.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파트리크 비에이라는 인테르로, 릴리앙 튀랑잠브로타는 바르셀로나로, 파비오 칸나바로에메르손파비오 카펠로 감독과 함께 레알 마드리드로 향했다. 팀에 남은 선수는 델피에로, 네드베드, 부폰, 트레제게, 제비나, 카모라네시, 키엘리니, 비린델리 정도...
참고로 강등되었던 클럽을 다시 1부 리그로 끌어올린 데샹 감독은 승격 직후 EPL처럼 자신에게 전권을 주길 바랬으나 경질당했다. 그 후 클라우디오 라니에리가 감독으로, 그는 2007-08 시즌을 3위로 마치며 유벤투스의 실질적인 시즌 목표인 챔피언스 리그 진출을 이루어내는 데 성공했다. 라니에리의 유벤투스는 2007-08 시즌 리그에서 인테르, 밀란, 로마 등의 강팀들과의 대결에서 각각 1승 1무를 기록하며 유벤투스가 건재하다는 걸 보여주었다. 하지만 2008-09 시즌 중 보여준 잦은 실책과 비난 여론에 의해 결국 시즌 종료까지 2경기나 남은 상황에서 라니에리 감독이 경질되었다. 이는 팀의 대들보 중 하나였던 트레제게와 팀 내 최고로 각광받던 유망주인 조빈코를 잘 기용하지 않는 용병술이 팬들의 반발을 초래했고, 거기에 더불어 만족스럽지 못한 리그 성적이 도화선이 된 것이다.[8]

8. 시절[9]



8.1. 악몽의 2009-10 시즌


세리에 A의 전통적인 강호 유벤투스지만, 이 시즌은 영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 직전시즌 라니에리 감독이 시즌 종료를 2경기 남기고 경질된 후 잔여 경기 감독을 맡았던 치로 페라라[10] 감독이 유임되었다. 여름 이적시장에서 디에구와 펠리페 멜루, 파비오 그로소를 영입했고 칼치오 폴리 때 떠났던 파비오 칸나바로도 복귀했다.
초반에는 나쁘지 않았다. 개막 후 리그 4전 전승으로 출발할 때만 해도 인테르의 강력한 대항마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후 팔레르모에 첫패를 당하고 11라운드 나폴리에게 2:3 대역전패, 14라운드 칼리아리 원정은 2:0 완패를 기록했다. 15라운드 인테르와의 홈경기에서 마르키시오의 결승골로 승리해보지만 곧바로 승격팀 바리 원정에서 3:1 참패를 당했고 2009년의 마지막 경기인 17라운드 원정호구 카타니아와의 홈경기조차 패하는 수모를 겪는다.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 지롱댕 보르도의 돌풍(5승 1무로 유벤투스도 2:0,1:1로 물리쳤다.)과 바이에른전 패배(4:1 대패,1:1 무승부)로 예상을 뒤엎고 3위로 밀려나서(그나마 이스라엘의 마카비 하이파를 상대로 2경기 모두 1-0으로 이긴 게 전부다.) 챔스 조별 예선 탈락했다. 마지막 뮌헨과의 단두대매치 홈경기에서 비기기만 했어도 16강에 가는 상황이었으나 전반 트레제게의 선제골 이후 후반전 4골을 얻어맞고 유로파로 가게 되었다.
2010년이 된 후 파르마 원정에서 승리했으나 AC 밀란에 안방에서 3대0 참패, 키에보 원정 패배, AS 로마와의 홈경기에서 2대1 역전패로 3연패에 리그 8패째 기록했고 6위까지 추락했다. 결국 페라라 감독은 경질되었다.
새로 알베르토 차케로니 감독이 부임되었지만, 차케로니 감독의 능력을 충분히 봐온 수많은 유베 팬들은 좌절했다.(…) 그래도 디에구나 트레제게 등이 나름 선전하여 리그에서는 5위로 겨우겨우 올라왔지만 아니나 다를까, 유로파 리그 16강전에서도 1차전에서 기껏 3:1로 이겨놓고도 프리미어 리그 중위권인 풀럼 FC 원정에서 '''4:1''' 대패를 당하면서 4:5로 골득실에 밀려 탈락해버렸다. 펠리페 멜루, 지에구, 아마우리, 트레제게, 시소코, 키엘리니, 부폰 그리고 델피에로 같이 충분히 좋은 선수들이 아무리 있어봤자 감독이 안 좋으면 팀도 안 좋아지는 것을 보여주는 듯하다.
결국 이번 시즌은 그야말로 망할 만큼 망해서 이번 시즌은 7위로 전락. 윗동네에서도 비슷한 팀이 7위로 전락한 것과 어째 많이 비슷한 성적이다. 일단 유로파 리그는 나갔지만… 이탈리아 최고의 명문팀치고는 굉장한 굴욕이다. 그리고 골득실도 유베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마이너스 1...
이렇게까지 유벤투스가 기운 이유는 여러 가지지만 첫 번째 이유로는 시즌 전 이적 시장에서 영입한 선수들의 문제이다. 실제 2009년 최고로 부진한 스트라이커는 아마우리였고, 큰 마음먹고 사온 지에구는 아마우리 등이 전혀 호응을 해주질 않아 혼자 고군분투했지만 역부족이었다.[11][12] 펠리페 멜루는 기대치 만큼의 활약을 하지 못하며 부진한 모습을 보여준다. 더군다나 부폰, 조르조 키엘리니를 포함하여 수비진들의 줄부상에… 더군다나 차케로니 감독조차 자신은 "임시 땜빵"이라는 것을 알아서 재계약이고 뭐고 없으니…의욕도 없었고, 그야말로 경기장이 불타고 계란이 날아오는 시즌이었다.
결국 자케로니 감독과의 재계약은 본인이 예상한대로 그런거 없고 차기 감독으로 삼프도리아를 챔스에 진출시킨 삼프도리아 감독인 델 네리, 그리고 삼프도리아의 단장 쥐세페 마로타를 영입하고 유벤투스의 회장 또한 안드레아 아녤리로 바뀌기로 결정된다.

8.2. 끊이지 않는 부진의 2010-11 시즌


보드진이 물갈이되면서 대대적으로 개편에 들어간 유벤투스…유베의 상징이었던 트레제게와 카모라네시까지 팔아버리면서 대 개편에 들어간다. 마르코 모타, 시모네 페페, 레오나르도 보누치, 파비오 콸리아렐라, 밀로스 크라시치, 알베르토 아퀼라니, 호르헤 마르티네즈, 마르코 스토라리 등을 영입하며 알찬 이적시장을 보낸다. 다만 애초에 기대했던 에딘 제코가 이적자금 문제에서 난항을 겪으면서 무산이 되며 별로 바라지 않았던 콸리아렐라를 영입하며 아쉬움을 남긴다. 한편 델 네리 감독 체제로 바뀌면서 4-3-1-2에서 다시금 4-4-2로 바뀌면서 지에구의 포메이션 문제가 겹쳐지며 결국 헐값에 팔아 버린다.
전반기 시즌 시작후 부상의 악몽 속에서도 콸리아렐라와 크라시치의 선전으로 전반기를 4위로 마치며 우승까지 넘볼 기대를 만든다. 하지만 후반기 시즌 시작 파르마와의 경기에서 시작 3분 만에 콸리아렐라의 십자인대가 끊어지며 시즌 아웃을 당하고 펠리페 멜루가 퇴장을 당하면서 1-4로 패하며 좋지 않은 출발을 하였다. 더군다나 비노보(유벤투스 트레이닝센터)의 저주로 부폰 키엘리니 등 공격수 수비수 할 것 없이 주전 들이 줄부상 당하면서 최악의 후반기를 맞게된다.(수비수 후보가 없어서 유소년팀에서 18살이던 쇠렌센이라는 선수를 쓰기에까지 이른다.) 게다가 아마우리는 1년 가까이 골을 못 넣으며 희대의 기록을 세우고 한때 이탈리아 최고 풀 백 유망주였던 마르코 모따는 헬 게이트를 열어버리며 수비진에 구멍을 만들어 버린다. 이로 인해 공격진에 구멍이 생긴 유벤투스는 급하게 루카 토니, 알레산드로 마트리를 영입하였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꾸역꾸역 해가는가 하더니 결국 뒷심을 발휘하지 못하고 다시금 7위를 차지하며 명문 구단의 자존심을 구기고 만다. 그리고 유로파 리그에서도 조별리그 6무라는 희대의 기록을 세우며 탈락.

9. 콘테 시대 - 제왕의 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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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벤투스가 연속 두 시즌 7위라는 실망스러운 성적을 거두는 것을 본 유벤투스의 새 회장 안드레아 아넬리는 팀 내에서 승부욕이 사라진 것이 문제라고 판단, 유벤투스 선수 시절부터 승부욕 넘치는 플레이를 펼쳤던 안토니오 콘테를 델 네리 감독의 후임으로 임명하였다. 이에 대해 페라라 감독의 실패를 지켜본 팬들은 대형 클럽 감독 경험이 없었던 콘테에 대해서도 우려를 표시하였다.
하지만 콘테 감독은 이러한 우려를 불식시키며 2011-12 시즌 무패우승, 2013-14 시즌 사상 최다승점 우승 등 탁월한 성적으로 팀의 3연속 우승을 이끌며 유벤투스를 다시 리그를 대표하는 강팀으로 되살리는 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클럽 대항전에서는 아직 만족할 만한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는 숙제를 남긴 채 3시즌 만에 구단과의 상호 합의하에 계약을 해지하였다.

10. 알레그리 시대 - 리그 8연패, 역사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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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5TORY, #LE6END, #MY7H, #W8NDERFUL'''[13]
콘테 후임으로는 마시밀리아노 알레그리가 선임되었는데, 당초에는 과거 AC 밀란 재임 시 안드레아 피를로와의 갈등과 콘테 감독과의 태도 차이[14]로 우려를 표하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부임 직후 급격한 포메이션 변경을 자제하며 과거 콘테의 성공을 이어받았으며, 잇단 중앙 수비수의 부상으로 인해 4백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도 피를로를 강제적으로 배제하지 않고 무리 없이 전술을 변경하여 비난 의견들을 잠재웠다. 특히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 과거 콘테가 보였던 전술적 답답함이 알레그리에 의해 해결되자[15] 감독 교체에 대한 팬들의 평가는 "신의 한 수"라 반전되었다.
5년간의 재임 기간 중 매 시즌 리그 우승, 5대 리그 최초 4연속 더블로 이탈리아 내 절대강자 위치를 확고히 했고, 2014-15 및 2016-17 시즌 챔피언스 리그 준우승 등의 성과를 거두며 유럽 무대에서의 위상도 회복했다. 비록 결승에서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로 1:3, 1:4로 무너져 아쉬움을 남겼으나 팬들은 "결승까지 간 것만도 알레그리 덕"이라 평가했다.
하지만 2018-19 시즌 리그 우승에도 불구하고 경기력에 대한 비판이 계속되었고, 구단에서는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를 영입하며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기대했으나 AFC 아약스와의 챔피언스 리그 8강에서 패해 탈락한 것이 결정적 원인으로 시즌 종료 후 감독을 사임했다.

11. 사리 시대


2019-20 시즌은 리그 우승으로 세리에 A 9연패에는 성공하였지만, 최근 우승 성적중 가장 안좋은 성적(최다 패, 최다 실점)이었다. 코파 이탈리아,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와 같은 컵대회에서는 각각 SSC 나폴리, SS 라치오에게 결승에서 패배하며 준우승에 그쳤다. 결정적으로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 15-16시즌 이후 5시즌만에 16강에 그치며 알레그리에서 사리로 축구 스타일 변화를 꾀했지만 기존의 단단한 수비축구도, 감독교체를 통해 지향했던 공격적인 축구도 아닌 어정쩡한 색채로 과도기였다고는 하지만 팀 스타일 변화 및 팀 성적 모두 실패한 시즌으로 남았고 결국 사리의 경질로 이어졌다.

12. 피를로 시대



13. 역대 감독



클럽 프로화 이후 최초의 이탈리아인 감독으로, 그 전에는 헝가리, 스코틀랜드 등 타 축구 강국들로부터 감독을 영입하는 추세였다. 총 전적은 111승 27무 23패, 승률 69%로, 초기 유벤투스의 리그 5연패 가운데 4개 타이틀을 따내는 등 클럽 위상 향상에 크게 기여했다. 1934-35 시즌 도중 리그 5연패를 앞두고 당시 최강 자리를 위협받던 제노아가 조감독으로 영입하였다.
카르카노의 성공 이후 줄곧 이탈리아인 감독이 클럽을 맡아 왔으나, 1934-35 시즌 우승 이후 계속 우승에 실패한 데다, 라이벌인 토리노의 전성기에 자극을 받아 유벤투스는 다시 외국인 감독을 시험해 보게 된다. 1948-49 시즌 먼저 스코틀랜드 출신인 윌리엄 찰머스(William Chalmers)가 왔으나 승률 50%에 그쳐 한 시즌으로 교체되었고, 이어 1949-50 시즌에 잉글랜드 출신 제시 카버가 팀을 맡아, 부임 첫 해에 15년만의 우승을 클럽에 안겨주었다.
총 전적은 51승 14무 11패, 승률 67%로, 세리에 B에서 거둔 디디에 데샹의 승률인 70%를 제외하면 외국인 감독 중 가장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하지만 감독 본인이 영국 복귀를 희망하여 계약은 2년을 채우지 못하고 종료되었다. 이후 카버는 결국 영국에 정착하지 못하고 다시 이탈리아로 복귀, 라치오, 토리노, 로마, 인테르, 제노아 등에서 전체적으로 준수한 성적을 거두지만 결국 유벤투스에서 거둔 1949-50 시즌 우승이 유일한 우승 경력이 되는 불운을 맛본다.
파라과이 국가대표 출신으로 스페인에서도 국가대표 경기 경험이 있다. 라요 바에카노, 테네리페, 에스파뇰 등 스페인 클럽에서 활약하다 1964~1969 5시즌 동안 유벤투스 감독을 맡는다. 총 전적은 100승 73무 42패, 승률 47%로 다른 성공적인 감독들에 비해 그다지 높지 않고 우승도 1966-67 한 번 뿐이지만, 공식전 215경기는 전체 유벤투스 감독 중 3위, 외국인 감독 중에는 1위에 해당한다.
위 역사 항목의 트라파토니 시대 참조. 총 전적 319승 181무 96패, 승률 54%를 기록했으며, 리그 6회, 코파 이탈리아 2회, 유로피안컵 1회, 유에파컵 2회 우승 등 유벤투스를 오늘날의 명문 클럽으로 만든 일등 공신이다. 공식전 596경기는 전체 유벤투스 감독 중 1위에 해당한다.
감독 개인으로서도 축구 역사상 가장 성공한 감독 중 하나로 꼽히는데, 4개국에서 리그 타이틀을 획득한 다섯 감독 중 하나이며, UEFA 주최 3개 대회 모두와 대륙간 클럽 대항전(당시 인터컨티넨털컵)을 우승한 세계 유일무이한 감독으로 자리하고 있다. 유벤투스 부임 전 밀란에서, 사임 후 인테르에서 각각 스쿠데토를 획득하여 이탈리아 3대 빅클럽 모두에서 우승한 기록도 있다.
위 역사 항목의 리피 시대 참조. 총 전적 227승 104무 74패, 승률 56%를 기록했으며, 리그 5회, 코파 이탈리아 1회, 챔피언스 리그 1회 등의 우승 경력이 있다. 공식전 405경기는 전체 유벤투스 감독 중 2위에 해당한다.
2006년 월드컵 우승을 통해 월드컵과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모두 경험한 최초의 감독이 되었고,[16] 2013년 광저우 헝다에서 AFC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거두어 2개 대륙에서 챔피언스 리그를 우승한 유일한 감독이 되었다.
위 역사 항목의 콘테 시대 참조. 총 전적 102승 34무 15패, 승률 68%를 기록하였다. 유럽 대항전 성적이 다소 아쉬운 점이 있으나, 강팀의 위치에서 밀려날 위기에 있던 팀을 다시 리그 내 강자로 만든 공로가 컸고, 특히 우승 자체보다 팀의 승부욕을 되살렸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받았다.
위 역사 항목의 알레그리 시대 참조. 총 전적 191승 43무 37패, 승률 70%를 기록했고, 재임 기간 5년 동안 리그 5회, 코파 이탈리아 4회 우승 및 챔피언스 리그 준우승 2회를 거두었다.

14. 역대 회장


아녤리가 인물 중 유벤투스 회장을 역임한 인물들과 혈연 관계는 아래와 같다.
  • 에도아르도 아녤리(Edoardo Agnelli, 1923-1935)
  • 조반니 아녤리(Giovanni Agnelli, 1947-1954): 에도아르도 아녤리의 장남
  • 움베르토 아녤리(Umberto Agnelli, 1955-1962): 에도아르도 아녤리의 막내아들
  • 안드레아 아녤리(Andrea Agnelli, 2010-): 움베로트 아녤리의 아들
가장 오랜 기간 회장을 역임한 인물은 선수로서도 전설적인 인물인 잠피에로 보니페르티로, 1971년부터 1990년까지 재임하였다.
현재 명예 회장에는 조반니 아녤리, 잠피에로 보니페르티, 프란초 그란데 스테벤스(Franzo Grande Stevens) 세 명이 이름을 올리고 있다. 스테벤스는 조반니 아녤리 시절부터 피아트 그룹의 법률 고문을 맡아 온 거물 변호사로 2003년부터 2006년까지 회장직을 맡은 바 있다.

15. 역대 유니폼


항목 참조

16. 울트라스 응원단 부적절 응원 징계 사례


21세기 들어 크게 이슈화 된 부적절한 응원 사례 모음

[1] 이 당시 감독이었던 치로 페라라, 알베르토 차케로니, 루이지 델 네리에서 한 글자씩 따온 단어이며 유베의 암흑기를 상징한다. 차케로니의 경우 자케로니로 주로 읽힌 관계로 '차' 대신 '짜'로 용어가 굳어졌다. [2] 현재 유벤투스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3]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전사했다.[4] 1949-50 시즌부터 2018-19 시즌까지 유벤투스, AC 밀란, 인테르가 각각 28회, 15회, 13회 우승한 반면 그 밖의 팀들은 1~2회 우승에 그쳤고 이를 모두 합쳐도 13회에 불과하다.[5] 이 때문에 많은 유벤투스 팬들은 이때 참사를 일으킨 리버풀을 매우 싫어한다. 유벤투스 팬이라면서 리버풀을 좋아한다고 하면 그 사람은 유벤투스가 아닌 호날두의 팬으로 의심해봐도 좋다.[6] 2005-06 시즌 당시 주전 구성은 왼쪽에 참브로타, 오른쪽에 조나단 제비나였으나 제비나가 부상을 당했다. 참브로타가 양쪽 모두 번갈아가며 뛰던 가운데 키엘리니는 2005-06 시즌 U-21임에도 불구하고 리그/유럽 대항전 포함 23경기에 출전하여 팀에서 왼쪽 풀백으로 가장 많이 출장하였다.[7] 이브라히모비치가 인테르, FC 바르셀로나, AC 밀란, 파리 생제르맹 FC를 거쳐 8년 후 꼽은 베스트 11에서도 이 멤버 중 6명이 포함되어 있다.[8] 당시 세리에 A에서 유벤투스의 성적은 3위로 칼치오폴리 이후 강등 및 승강의 과정을 거치면서 팀의 선수진이 많이 약화된 것을 고려하면 나쁘지 않은 성적이다. 다만 그 전까지 리그 정상에서 놀던 팀이기에 팬들의 기대치가 높았고, 경질 당시 유벤투스는 9경기째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있던 상황이었다.[9] 이 당시 감독이었던 치로 페라라, 알베르토 차케로니, 루이지 델 네리에서 한 글자씩 따온 단어이며 유베의 암흑기를 상징한다. 차케로니의 경우 자케로니로 주로 읽힌 관계로 '차' 대신 '짜'로 용어가 굳어졌다. [10] 이른바 7공주 시대에 선수로 유벤투스에서 활약했던 그 페라라 맞다.[11] 디에구는 브레멘 때의 활약상만 보아도 스루 패스를 찔러 넣는 것을 잘 한다. 하지만 유베에서 필요한 것은 타겟 맨들에게 크로스를 잘 올려야 하는 공미이다. 같이 월 패스를 주고받을 섀도 스트라이커(브레멘 때의 피사로처럼)가 있어야 플레이가 빛을 보는데, 아마우리를 포함한 타겟 맨 3명이 그렇게 해줄 수도 없다. 디에구 혼자 이래 저래 뛰어 다니면서 크로스를 힘겹게 올리는 것을 보면 안쓰럽기 짝이 없다. 정말로 호흡이 맞는 짝이 유벤투스에 없었다.[12] 비록 볼을 끄는 단점이 있지만 그 막장이었던 팀에서 7골 12어시를 했으니 할 수 있는 최대한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오히려 팀의 퀄리티는 확 올라갔지만 수준 높은 2선 자원만 없는 12년 이후부터 팬들이 다시 그리워하는 선수이다.[13] 유벤투스 공식 페이지에서 각 시즌별로 사용한 해시태그[14] 콘테의 경우 경기 후 선수들의 셀레브레이션에 함께 참여하는 등 선수들과 함께 호흡하는 리더십을 보인 반면, 알레그리는 "셀레브레이션은 선수들의 무대"라고 선을 긋고 경기종료 휘슬이 울리자 마자 라커룸으로 칼퇴근하는 차이를 보였다.[15] 특히 2017-18 16강 토트넘 전2018-19 16강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전은 감독의 전술적 역량으로 거둔 승리라는 극찬을 받았다.[16] 2010년 비센테 델 보스케가 월드컵 우승을 하면서 이 기록을 달성한 두 번째 감독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