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군의 졸전 기록/연혁
1. 기원전 510년 크로토네와의 전투
당시 이탈리아 북동부에 있던 시바리스라는 나라에서 기병대의 말을 승리의 퍼레이드를 위해서 연주를 하면 뛸 수 있게 조련했다. 그런데 중요한 싸움에서 상대가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결국 대혼란 끝에 대패.
거기다 이런 비슷한 야사는 의외로 많이 있다. 다른 사례에 따르면 로마가 로마에 계속 저항하는 게르만 족(고트족)을 정벌하고자 출정하였다. 이때 로마 황제는 아프리카의 사자를 모르는 게르만 족이 사자를 보면 지레 겁을 먹어 사기가 꺾일 것을 기대하고 특수훈련을 받은 사자를 동원하였는데 로마 황제의 생각대로 전투가 시작되자 사자를 본적이 없는 게르만 족은 사자를 악마로 보고 겁을 먹었으나 이때 한 게르만 장군이 몽둥이 하나를 들고 사자 무리에게 달려가면서 이렇게 외쳤다.
이렇게 외치면서 진짜로 사자 무리 중 제일 큰 사자를 몽둥이로 때려죽이자 이에 감동받은 게르만 족들은 너도나도 몽둥이로 사자들을 때려죽였고 오히려 게르만 족이 사자를 때려죽이는 광경에 충격받은 로마군이 사기가 꺾여 게르만 족에게 대패당했다. 식의 야사도 많다."저것은 개다. 내가 이제부터 개잡는 법을 가르쳐 주겠다."
2. 이탈리아 독립전쟁
2.1. 1866년 6월, 쿠스토자 전투
20만의 이탈리아 육군은 알브레히트 대공이 인솔하는 오스트리아 육군 7만 5천명에게 대패.
2.2. 1866년 7월 리사섬 공략
첫 번째 출전 때는 해상에서 사령관 페르사노 제독의 장황한 연설만으로 종료. 두 번째 출전 때는 리사섬을 유람 주유하고 종료. 이후 머리끝까지 화가 치민 정부와 국내여론이 들끓어 비난을 받자 페르사노 제독은 「아직 우리 함대는 전투를 할 수 없다!」라고 답했다.
세 번째의 출전 때에야 마지못해 전투를 시작, 리사섬의 오스트리아 육군은 1개 연대 반의 병력에 80문의 구식포가 전부여서 이탈리아 해군도 승리를 낙관하고 함대 28척에서 4시간 동안 예비포격을 가했지만 오스트리아 해안포대의 반격에 페르사노 제독은 즉각 후퇴(…). 최종적으로 이탈리아 해군은 군함 32척을 동원하고 병력 26,000명을 상륙시키고나서 리사섬을 간신히 점령.
2.3. 1866년 7월 리사 해전
상대인 오스트리아 해군의 함포는 모두 시대에 뒤떨어진 전장식. 이탈리아 해군은 함포의 성능, 장갑함의 수, 함정의 총 숫자와 배수량에서도 상대를 압도했지만 역시 시대에 뒤떨어진 충각 전술에 의해 대패.
개전 직후 이탈리아 함대의 사령관 페르사노 제독은 최신예 장갑함 「레디탈리아」에서 바로 며칠 전 간신히 함대에 편입해 훈련이 부족한 「아폰다토레」로 갈아탐.[6] 이 결과 단종진을 이루던 함열이 일시정지되고 선두함은 그대로 전진...함열은 분리되었고 이에 대해 오스트리아 함대의 테게트호프 제독은 횡진으로 목조함까지 포함해 전력 돌격.
오스트리아 해군은 목조함까지 싸웠지만 이탈리아 해군의 다른 함정들은 방관. 최종적으로 오스트리아 측의 침몰은 0, 사망자는 178명. 그나마 대부분의 오스트리아 해군 사상자는 '''장갑함을 따라 충각돌격을 실시한 목조함'''에서 발생했다. 이탈리아 해군 측의 침몰은 3척, 사망자 약 800명.
함대의 양과 질, 모든 스펙에서 오스트리아 해군을 웃돈 이탈리아 해군은 구시대 전술에 대참패. 참고로 충각 전술이 유효하게 기능한 것은 이 해전이 최후. 게다가 「장갑함을 가라앉히려면 충각돌격이 제일!!」이라는 잘못된 전훈을 40년간 세계에 각인시킴. 상대인 테게트호프 제독은 오스트리아 제국에선 알아주는 명장으로, 이탈리아 해군의 옆구리를 기습하여 상당한 타격을 입혔다.
3. 청일전쟁
청일전쟁 직후인 1899년, 서구 열강에게 수많은 항구를 조차당하고, 해군은 전부 털린 상태에서 ATM이 되어버린 청나라의 남아있는 몇 안되는 군항의 부지 중 하나인 절강성의 삼문만을 조차하기 위해서 군함 6척을 이용해 위협을 시도하였지만, 청의 전투의지를 보고 1년 정도를 대치(...)하다가 포기.[7]
4. 제1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4.1. 아도와 전투
기관총까지 장비했지만 에티오피아군에게 압도적 대패. 이 직전에 벌어진 안바·아라기 전투에서도 이탈리아군이 참패한 것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음. 즉,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를 상대로 2연패. 최종적으로는 에티오피아군을 상대로 6000명 가까운 사망자와 3천명의 포로를 낸 대패였음.
4.2. 1896년 3월 에티오피아 정규군과의 전투
에티오피아군 전사자 1000여 명에 대해 이탈리아군은 5000명. 근대에 들어 백인이 유색 인종에게 진 전쟁은 러일전쟁이 최초라고 하지만 사실은 이것이 처음.
5. 제1차 세계 대전
'''참고로 아래에 전투들이 벌어졌을 당시에는 미국이 참전한 때이기는 했다.''' 하지만 러시아의 이탈, 니벨 공세의 실패와 프랑스군 항명사태, 제3차 이프르 전투의 패배로 인해 말 그대로 연합군 최악의 해나 마찬가지로 미국이 참전했다는 것만으로 연합군에게 유리한 해였다고 단정짓기 어렵다. 게다가 빠르게 수를 늘린 신병의 전투력을 키우는 과정에서 프랑스군에 크게 의존했다. 미군이 제대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는 것은 1918년 초반이었으나 그 당시에도 경험이 적었고 전쟁장비들 역시 부족했다. 즉, 러시아가 빠진 자리를 미국이 완전히 메우는 데는 1년 이상이나 걸렸다는 이야기.
5.1. 카포레토 회전[8]
오스트리아군과 사이에서 벌어진 카포레토 회전에서 이탈리아군은 대패해 3주간 150km를 패주했다.
오스트리아군은 전사 및 부상을 포함한 사상자가 2만 3천명이 나왔지만, 이탈리아군은 사망자 1만명, 부상자 2만명, '''포로 26만 5천명'''이 나왔다. 이 전투에 참가한 이탈리아군이 대략 40만명 정도로 추산되는데, 이 전투에서 70%를 날려 먹은 셈이다. 이와 별개로 이탈리아군에서 35만명에 이르는 전선이탈자가 나왔지만, 이 경우는 대부분 수습되었다.
5.2. 1917년 10월, 크라곤자 산 전투
이탈리아 북부 알프스의 톨마인지방, 크라곤자-마타주르-스톨 3개의 산으로 이루어진 산맥에 걸쳐 총 5개연대가 방어선을 치고있었다. 정신나간 독일군 대대장 1명이 자신의 대대를 이끌고 이 산을 공격하였다. 그리고 불과 이틀반만에 독일군의 '''1개 대대'''에게 이탈리아군 5개 연대가 격파당하고 장교 150명을 포함해 9000명을 포로로 붙잡혔으며 3개의 산, 6개의 고지를 점령당했다. 독일군의 피해는 전사 6명 부상 30명.
그리고 이 정신나간 독일군 대대장의 정체는 훗날 사막의 여우라 불리게 되는 '''에르빈 롬멜''' 중위였다.
5.3. 1918년 10월 경, 피아브강 전투
오스트리아와의 휴전 교섭 중 이탈리아군은 이 틈을 노려 피아브강을 넘어 공세로 나왔지만 오스트리아군에게 격퇴.
5.4. 1918년 11월 4일, 비토리오 베네토 전투
'''휴전 발효 후''' 오스트리아군을 공격해 30만의 포로를 획득.
6.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6.1. 1922년 에티오피아 침공
항공기와 전차까지 동원한 압도적인 침공전에도 불구하고 전투 초기에는 패배를 당해 전군이 포위되거나 전선이 붕괴되었다. 그때마다 이탈리아군을 구한 것은 바로 독가스.. 이탈리아군은 핀치로 몰릴 때마다 독가스로 형세를 역전시켰고 이후 독가스 살포에 뒤잇는 독가스 살포로 어떻게든 억지로 승리. 참고로 이탈리아는 독가스 사용을 금지한 제네바 협약에 가입한 상태였다.
참고로 에티오피아군의 장비는 오직 소총만으로 심지어 구식 머스킷도 현역(…) 기병은 창(…)이 무장이었다고 함. 또한 공무원을 급히 모아 편성한 군대에게조차 이탈리아군은 질뻔한 것이다.
6.2. 1935년 10월
당초는 에티오피아군의 후퇴 전술도 있어 순조롭게 진격했지만 수도 아디스 아바바로부터 진군한 에티오피아군에 포위되어 덴베그이나 고개를 지키는 검은 셔츠 부대는 대부분의 야포와 전차를 버리고 패주, 마칼레의 보급기지까지 떠밀려 이탈리아군의 우익은 완패, 좌익의 보급기지까지 위협당해 총사령관인 바드리오 장군은 전멸의 공포에 휩싸였다. 하지만 여기서 이탈리아군은 독가스를 사용해 형세를 역전시키고 이후 전투 종료까지 독가스를 계속 사용했다.
7. 스페인 내전
7.1. 1937년 3월 스페인 과달라하라 전투
마드리드를 목표로 한 이탈리아군 4개 사단이 진군했지만 과달라하라 전투에서 다수의 투항자를 내고 패주.
8. 제2차 세계 대전
[image]
영국의 삽화가인 Paule Loring의 1943년 4월 16일자 "히틀러 vs 무솔리니, 히틀러는 표류 중인 무솔리니를 자를까?(Will He Cut Him Adrift?)" 히틀러의 짐짝으로 전락한 무솔리니의 신세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8.1. 1940년 6월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이탈리아는 영국과 프랑스에 선전포고한다. 하지만 단지 아돌프 히틀러의 전과를 질투한 무솔리니가 즉흥적(…)으로, 그야말로 무계획적으로 참전했기 때문에 전쟁에 필요한 물자의 비축도 거의 없었고 이탈리아 선적의 상선도 전세계에 흩어져 있던 상황이었기에 선전포고 2개월 내 외양에 나가있던 상선 대부분이 영국 해군에 나포되어 버린다. 또 어떤 작전도 명확히 계획하지 않았기 때문에 먼저 선전포고를 해놓고도 10일간 어떠한 군사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8.2. 1940년 6월 남프랑스 전역
독일 국방군에게 유린되어 항복 직전인 프랑스에 침공한 이탈리아군은 르네 앙리 올리 대장이 이끄는 불과 2개 사단도 안되는 프랑스군의 반격을 받고 붕괴직전까지 몰렸다. 프랑스의 항복이 좀 더 늦었다면 이 프랑스군은 이탈리아를 침공할 계획이었다.
8.3. 몰타 항공전
이탈리아의 선전포고 남발 덕분에 추축국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점령하지 못했다. 이로 인해 아프리카 군단은 보급문제로 허덕이고, 결국 연합군의 반격을 허용해 괴멸된다. 원인은 이탈리아의 그리스 침공에 실패한 것이고 추축군이 몰타를 점령할 능력을 상실하게 만든 크레타 섬 전투 덕분. 사실 몰타섬에는 전투기한대없이 대공포 조금이랑 경비대수준의 육군병력만 있어서,사실상 폭격기가 오면 바로 함락는데, 운 좋게도 몰타항공전 전에 항공모함에 실려야하는 복엽기 씨 글래디에이터 4대가 서류상의 실수로 몰타에 남겨졌다. 1대는 폭격으로 파손되어서 해체되었고 나머지 3기는 방공전에서 맹활약하며 Faith(신념), Hope(희망), Charity(자비)란 별명과 함께 사랑을 받게 됐다. 1대는 격추당하고 1대는 폭격으로 파손되어서 Faith 1대만 살아남았다.
8.4. 그리스 침공
이탈리아의 선전포고 남발로 인해 독일군에게 엄청난 피해를 주게된다, 이탈리아는 21개 사단을 동원해 그리스를 침공했지만 그리스군 13개 사단의 반격에 알바니아까지 후퇴해 붕괴직전까지 몰린다. 그리스는 친 독일적인 중립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이 사건으로 연합국측에 가담. 결국 독일이 대신 전선에 뛰어들게되고 크레타 섬 전투로 인해 독일 공수부대는 더 이상 공수작전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 덕분에 몰타라는 징검다리도 확보하지 못해 북아프리카의 롬멜 군단이 보급에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고, 바르바로사 작전을 준비하던 병력 일부를 발칸 반도 끄트머리까지 내려보내야 해 물자와 병력을 간헐적으로 소모시키고 소련에게 준비 시간을 조금 더 주게 되는 등, 단기적으로는 북아프리카 전선에서의 패배, 장기적으로는 추축국의 패망까지 불러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혹자는 독일군 참전 이후 잘 싸웠냐 하는 질문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그냥 문서를 직접 보자.
여담으로 2018년에 유튜브에 이탈리아의 그리스 침공을 조롱하는 영상이 만들어졌고 조회수 240만회를 달성하며 인기를 끌었다. 이후 이를 패러디한 여러 버전의 영상들[12] 이 제작되었다.[13]
8.5. 1940년 12월 이집트 전역
그 당시 사실상 영국의 보호령이던 이집트 왕국을 침공한 이탈리아군 7개 사단은 영국군 2개 사단의 반격을 받고 패주. 13만 명이 포로가 되고 이탈리아령인 키레나이카까지 잃는다. 이탈리아가 무계획적으로 저지른 발칸과 북아프리카의 실정을 구원하기 위해 독일은 발칸을 제압했고 아프리카 군단을 편성해 파견했고, 이 발칸 제압을 위해 바르바롯사 작전 발동은 1개월이나 늦어졌고 북아프리카 전선에도 7,000대의 트럭이 보내졌는데(당시 동부전선 전체에서 1만 4000대밖에 없었음) 이것이 동부전선의 초기진격에 크게 영향을 주게 된다.
8.6. 타란토 공습
영국해군 지중해 함대의 항모 HMS 일러스트리어스에서 발진한 페어리 소드피시 21기가 타란토항의 이탈리아 주력함대를 공격. 전함 콘테 디 카보우르는 대파착저, 전함 리토리오, 카이오 두일리오 중파. 영국해군의 손해는 소드피시 뇌격기 2기.
8.6.1. 1941년 3월 마타판 해전
마타판에서 이탈리아와 영국 수상함대가 격돌. 이탈리아 해군은 중순 3척을 상실했지만 영국 해군의 손해는 전무.
8.7. 1942년 북아프리카, 튀니지
>만약.. 요리라면 이탈리아가 영국을 이겼겠죠. 하지만 전쟁은 요리 대결이 아니었어요.
>그러게 이탈리아는 그냥 피자나 파스타를 만들지 왜 전쟁을 했을까요? - 듀베르, 월드 오브 탱크 역사만화에서.
25만의 이탈리아군 병력은 영국군 3만 5천과 전투, 튀니지에서 항복했다.>그러게 이탈리아는 그냥 피자나 파스타를 만들지 왜 전쟁을 했을까요? - 듀베르, 월드 오브 탱크 역사만화에서.
8.8. 1942년 12월 동부전선
돈 강변에서 이탈리아 제8군은 소련군의 공격을 받자 바로 모든 병기를 포기하고 패주했다. 바로 전달인 11월에 거의 비슷한 소련군의 공격을 받았던, 훨씬 장비가 열악했던 루마니아군은 며칠간을 선전하며 전선을 유지했다. 그리고 독일 제6군은... 무솔리니의 사위였던 갈레아초 치아노 이탈리아 외상[17] 이 자국군을 걱정하며 헤르만 괴링에게 "이탈리아군의 피해상황은 심각합니까?"고 묻자 괴링 왈..."'''전혀 없습니다'''.. 왜냐면...그들은 소련군 포화가 시작되자 바로 후방으로 뜀박질했기 때문이지요.."라고 했다.
8.9. 1943년 9월 보니파시오 해협
1943년 9월 9일, 이탈리아가 연합국에 항복하자 이탈리아 함대는 즉시 항복을 위해 연합군 점령지였던 몰타 섬으로 출항했다. 그런데 출항하자마자 들켜서 보니파시오 해협을 통과하려던 무렵 이들을 저지하려고 유유히 다가오던 독일 공군 소속 폭격기 Do 217에게 공격을 받았는데, '''이탈리아 함대는 이들을 프리츠 X를 투하하기 직전까지 대공포 사격 등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멀뚱멀뚱 서 있었다.''' 결국 이 틈을 탄 독일군의 공격은 성공했고, 이로 인해 리토리오급 전함 로마가 격침당하고 네임쉽 리토리오(이 당시에는 이탈리아로 개명된 상황이었다)가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
8.10. 1943년 9월 무솔리니 구출
1943년 9월 12일 오후 2시, 오토 슈코르체니 중령이 지휘하는 무장 SS, 공군 혼성공수부대는 글라이더 12기에 나눠타고 바돌리오 장군의 신 정부에 의해 무솔리니가 감금된 그란 삿소 산장 근처 야산 분지의 평지에 강행착륙했다(착륙성공 8기). 이 산장을 경비하던 부대는 적이 무장 SS란 것을 알자마자 주저없이 항복, 슈코르체니 부대는 무솔리니를 무사히 구출해 단거리 이착륙이 가능한 피젤러 슈토리히 연락기로 무솔리니와 지휘관 슈코르체니 중령이 먼저 탈출했다. 그리고 남은 SS대원들은 유유히 케이블카로 하산했다.(…)
9. 걸프 전쟁
이탈리아 공군의 토네이도 전폭기 20여기가 출격, 첫 실전 공중급유에 이탈리아 공군의 토네이도는 절반이 실패하고 기지로 바로 귀환. 나머지 10여기는 이라크군 군사시설을 공격했지만 그중 몇 기가 격추되어 조종사는 포로가 되었다.
10. 소말리아 내전
1994년 소말리아의 내전으로 민간인이 학살당하자 UN에서 평화유지군을 보냈다. 대한민국은 전투병이 아닌 건설공병대대[18] 를 파견했는데, 이탈리아군과 함께 작전을 수행했다. 한국군은 약 60명의 공병대, 지원무장 81mm 박격포[19] 반면 이탈리아군 1개 대대병력. 망구스타 공격헬기 지원가능한 상태.
처음 이탈리아군은 한국의 비전투부대에게 박격포는 왜 가져왔냐고 비웃으면서 우리는 공격헬기까지 보유했으니 걱정말라고 안심시킨다. 얼마 뒤 소말리아 민병대가 기지를 습격하자 이탈리아군은 공격헬기에게 지원요청하는 것도 까먹은 채 기지에 한국군만 달랑 남겨놓고 이탈리아 대대병력 전원 철수.
기지에 남겨진 한국군은 소수의 특전사 경호병력을 제외하면 대다수가 비전투 공병부대원에다 부실한 무장이었지만, 박격포를 사용하여 소말리아 민병대 격파하였다.
11. 아프간 전쟁
대테러전쟁에서 NATO군의 ISAF로 참전한 이탈리아군이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과 뒷거래를 한 정황이 포착되게 된다. 2009년까지 이탈리아군은 아프가니스탄의 사루비 지역에서 주둔하다가 아무 탈 없이 프랑스군에게 이 지역을 인계하고 철수를 했다. 이탈리아군이 작전하던 동안 별 문제가 없던 지역이었으므로 이 지역은 상대적으로 안전한 지역으로 간주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철수 직후 해당 지역에서 작전하던 프랑스군은 갑작스러운 탈레반의 공격을 받아서, 많은 사상자[20] 를 기록하게 된다.
사실 아프간이라는 전장환경상 전투 발생 자체는 이상하지 않지만, 이탈리아군이 주둔할 때는 오랫동안 공격이 없었다는 사실에서 이 문제가 굉장히 이례적으로 보여질 수밖에 없었다. 주둔하는 동안 공격이나 탈레반 활동이 저조하다면 상대적 안전지역으로 분류했었고, 프랑스군도 그에 맞추어 대비 태세를 갖추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조사가 시작되자 그 결과는 황당했다.
이탈리아군이 자국 군인들의 목숨을 탈레반에게 구걸했기 때문이었다. 이탈리아 정부가 자국군의 생명보존을 위해서 탈레반에게 뒷돈을 주고 안전을 확보해 온 정황이 확인된 것이다.관련기사 냉정하게 보자면 평화를 돈으로 사려는 행동자체가 욕먹을 수는 없다. 하지만 용납할 수 없는 부분은 '''작전지역의 이러한 정황을 동맹국인 프랑스에 공유하지 않고 인계'''한 점으로서, 아무리 이탈리아의 역성을 들어주고자 하더라도 이 부분은 옹호가 되지 않는다.
당시 이탈리아 정부는 공식적으로는 이 문제를 부정했지만, 프랑스에서는 당연히 이탈리아에 대한 반이탈리아 감정이 증폭되고 외교문제로 비화될 정도로 상황이 나빴다.
[1] 12차 이손초 전투라고도 한다.[2] 프로이센군은 보오전쟁 중 오스트리아의 동맹국이었던 바이에른, 하노버, 헤센등 중소국가와 벌인 독일 본토 전역은 당연히(?) 석권하고 있었고, 작센과 슐레지엔에서 오스트리아군을 두들겨 패면서 보헤미아로 진군 중이었다. 그래서 이탈리아에서 빈을 공격하면 오스트리아군이 급격하게 무너질 것을 기대하고 제안한 것이다.[3]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1797년 이탈리아 원정 중 만토바 요새를 함락시킨 건 포위후에 오스트리아에서 오는 구원병력을 잡아먹고, 요새 병력을 굶겨서... 항복 받은 것이었고 실제로 만토바 요새는 나폴레옹조차 정면공격하지 않았던 난공불락의 요새였다.[4] 물론, 전력상의 우위가 승리를 '''항상''' 보장해주는 건 아니지만, 오스트리아군의 전력 우위가 정말로 달성됐다면 전쟁의 양상이 다르게 흘러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5] 다만 교황령 일부가 아직 프랑스 제국의 보호 아래 있었다. 교황령까지 접수하여 리소르지멘토가 완성되는 건 5년 뒤의 일.[6] 리사 해전에서 이탈리아 해군의 가장 치명적인 실책으로 본다.[7] 청말 해군의 중건과 해권(海權) 인식의 고양 -청일전쟁 이후를 중심으로, 조세현[8] 12차 이손초 전투라고도 한다.[9] 독일어권이 아닌 타민족 징집병들은 전투를 거부하고 항명하거나 탈영하기까지 했다. 이미 전투 중반 오스트리아 후방에서 체코를 포함한 다양한 국가들이 독립선언을 하며 들고 일어났기 때문.[10] 게다가 그 악명높은 시베리아 부대다. 사보이아 기병연대와 같은 연대 규모. 근데 이 부대가 조금 방심하고 있다가 기습당한 거긴 하다.[11] 일반적으로 전쟁터에서 가장 널리 사용었으며, 현재까지도 화학탄의 주 원료로 남아있는 독가스다. 여기 들어간건 겨자 열매 추출물 같은게 아니라 염화수소 등을 합성해 만든 합성물질이다. 겨자 란 이름은 별명일 뿐. [12] 히틀러, 처칠, 스탈린, 그리고 이 문서에도 나와있는 무솔리니의 수 많은 삽질들(...)[13] 현재 해당 합성물을 만드는 앱은 공식 트위터를 통해 서비스 종료를 공지했다. 이 영상은 그 여파로 잠깐 역주행했던 것.[14] 이탈리아 또한 인간어뢰를 이용해서 알렉산드리아 항구에 정박한 퀸 엘리자베스급 전함 2척을 항구에 주저앉게 만들기도 했다.[15] 영국은 이탈리아가 이걸로 겁먹고 최대한 활동을 안하길 원했다.[16] 에르빈 롬멜은 이때 몸이 좋지 않았으며, 전선이 무너저 포로가 될 수 있다고 본토로 소환한 뒤, 나름 능력이 있다고 본 한스-위르겐 폰 아르님 상급대장을 대신 파견했다[17] 훗날 무솔리니를 실각시키는 데 가담하였고 무솔리니가 오토 슈코르체니에 의해 구출되어 괴뢰 정부 살로 공화국의 수장으로 복귀된 뒤 처형당했다.[18] 물론 특전사 경호병력이 소수 있었다.[19] 보병부대로 보자면 완편기준 고작 소대급의 인원, 지원무장인 81mm 박격포의 경우 중대급 지원화기다.[20] 10명 전사, 21명 부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