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군의 졸전 기록/연혁

 




1. 기원전 510년 크로토네와의 전투
2. 이탈리아 독립전쟁
2.1. 1866년 6월, 쿠스토자 전투
2.2. 1866년 7월 리사섬 공략
2.3. 1866년 7월 리사 해전
4.2. 1896년 3월 에티오피아 정규군과의 전투
5.1. 카포레토 회전[1]
5.2. 1917년 10월, 크라곤자 산 전투
5.3. 1918년 10월 경, 피아브강 전투
5.4. 1918년 11월 4일, 비토리오 베네토 전투
6.1. 1922년 에티오피아 침공
6.2. 1935년 10월
7.1. 1937년 3월 스페인 과달라하라 전투
8.1. 1940년 6월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8.2. 1940년 6월 남프랑스 전역
8.5. 1940년 12월 이집트 전역
8.6.1. 1941년 3월 마타판 해전
8.7. 1942년 북아프리카, 튀니지
8.8. 1942년 12월 동부전선
8.9. 1943년 9월 보니파시오 해협
8.10. 1943년 9월 무솔리니 구출


1. 기원전 510년 크로토네와의 전투


당시 이탈리아 북동부에 있던 시바리스라는 나라에서 기병대의 말을 승리의 퍼레이드를 위해서 연주를 하면 뛸 수 있게 조련했다. 그런데 중요한 싸움에서 상대가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결국 대혼란 끝에 대패.
우선 위치부터 틀렸다. 크로토네와 시바리스는 이탈리아 남부에 있던 그리스 식민도시다. 고대 역사가 디오도루스 시쿨루스의 기록에 의하면 기원전 510년에 시바리스에서의 정치 분쟁으로 인해 두 도시 사이에 전쟁이 났고, 두 도시 사이에 있는 강에서 전투가 벌어졌는데, 30만 군대를 이끌고 진격했던 시바리스가 10만도 안 되는 크로토네군에 대패하고 크로토네의 속국이 된 것은 맞지만 도시가 파괴된 것은 그로부터 약 60년 뒤인 기원전 445년경이다. 전투의 진행 자체에 대해서도 이에 대해 서술한 역사가마다 말이 다르는 등 상세하게 알려진 것이 없는 데다가 시쿨루스의 기록 자체도 병력 수가 터무니없이 과장되어 있어 진실성이 의심되는 부분이 있다. 시쿨루스 이외에도 헤로도토스, 스트라보와 같은 다른 역사가들이 이 전쟁에 관해 기술하고 있기 때문에 이 시기에 두 도시 간에 전쟁이 있었던 것만은 사실로 보이지만, 전투 자체에 대해서도 이렇게 확인된 것이 없는데 원문과 같은 멍청한 기록이 사실로 확인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거기다 이런 비슷한 야사는 의외로 많이 있다. 다른 사례에 따르면 로마가 로마에 계속 저항하는 게르만 족(고트족)을 정벌하고자 출정하였다. 이때 로마 황제는 아프리카의 사자를 모르는 게르만 족이 사자를 보면 지레 겁을 먹어 사기가 꺾일 것을 기대하고 특수훈련을 받은 사자를 동원하였는데 로마 황제의 생각대로 전투가 시작되자 사자를 본적이 없는 게르만 족은 사자를 악마로 보고 겁을 먹었으나 이때 한 게르만 장군이 몽둥이 하나를 들고 사자 무리에게 달려가면서 이렇게 외쳤다.

"저것은 개다. 내가 이제부터 개잡는 법을 가르쳐 주겠다."

이렇게 외치면서 진짜로 사자 무리 중 제일 큰 사자를 몽둥이로 때려죽이자 이에 감동받은 게르만 족들은 너도나도 몽둥이로 사자들을 때려죽였고 오히려 게르만 족이 사자를 때려죽이는 광경에 충격받은 로마군이 사기가 꺾여 게르만 족에게 대패당했다. 식의 야사도 많다.

2. 이탈리아 독립전쟁



2.1. 1866년 6월, 쿠스토자 전투


20만의 이탈리아 육군은 알브레히트 대공이 인솔하는 오스트리아 육군 7만 5천명에게 대패.
실제로 이 전투에 투입된 이탈리아 육군은 총 12만 명이었다. 오스트리아군의 병력이 적은 것 같지만 '''수비하는 쪽이 오스트리아군'''. 이탈리아의 동맹국 프로이센 육군 참모부에서는 "그 요새는 함락 못 시키니 차라리 으로 진격해라"[2] 권유했지만, 당시 이탈리아의 정치적 입장상 1849년, 1861년에 함락시키지 못했던 난공불락의 만토바 요새를 친다는 것이 과거 이탈리아 영토의 수복이라는 명분에 부합했다. 만토바 요새와 페스키에라 델 가르다 요새는 합스부르크 가의 이탈리아 지배의 상징과도 같았다. 결국 이탈리아군은 이번에도 요새를 점령하기 위해 정면으로 들이 받았고, 민치오강을 끼고 도는 지리적 이점을 누린 오스트리아 군이 이번에도 방어에 성공했다. 전사자는 이탈리아군 8천1백, 오스트리아 5천 6백 명으로, 그 자체로는 대패라고 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에 저지당하며 전략적으론 완벽하게 패배했다.[3]
이탈리아군의 졸전은 장비와 기술력의 문제도 한몫 했는데, 오스트리아 육군은 발전된 강선포로 무장하였으나, 이탈리아는 통일된 지 5년밖에 안 된 시점에서 구식 활강포로 무장할 수밖에 없었다. 도리어 교환비 자체로는 선전한 수준.
그리고 전체적인 전략상황을 보면 결국 오스트리아군은 독일 방면과 이탈리아 방면으로 병력의 분산을 강요받아야 됐다. 북이탈리아에 전개된 오스트리아군이 합류하는 상황이 벌어질 경우에는 프로이센군과 오스트리아군 간의 전력 균형이 '''깨져버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군이 단 며칠의 여유만 있었더라면 이런 상황이 정말로 실현 됐을거라고 평가하는 견해도 있다.[4] 이런 상황 속에서 프로이센군은 보헤미아 방면 오스트리아군 주력에게 절묘한 시점에 결전을 유도하여 쾨니히스그레츠 전투에서 분쇄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 제국이 전쟁에서 패배한 결과, 이탈리아왕국은 베네치아 지방을 양도 받고 합스부르크 세력을 이탈리아에서 완전히 배제하는[5], 즉 '''정치적 목적 달성'''에 성공했다. 전쟁이 정치의 연장이다는 견해를 고려한다면 이탈리아 입장에서는 충분히 가치있는 전투였다 할 수 있다.
물론 다르게 말하자면 이탈리아군은 전력이 분산된 오스트리아군을 제압 못했다는 소리이기도 하고 특히 같은 시점에서 진행된 아래 문단의 리사 해전은 쉴드치기조차 안 되는 안습 그 자체인지라, 전략적 목표를 달성했음에도 그 의미가 다소간에 퇴색된 면이 있기도하다.

2.2. 1866년 7월 리사섬 공략


첫 번째 출전 때는 해상에서 사령관 페르사노 제독의 장황한 연설만으로 종료. 두 번째 출전 때는 리사섬을 유람 주유하고 종료. 이후 머리끝까지 화가 치민 정부와 국내여론이 들끓어 비난을 받자 페르사노 제독은 「아직 우리 함대는 전투를 할 수 없다!」라고 답했다.
세 번째의 출전 때에야 마지못해 전투를 시작, 리사섬의 오스트리아 육군은 1개 연대 반의 병력에 80문의 구식포가 전부여서 이탈리아 해군도 승리를 낙관하고 함대 28척에서 4시간 동안 예비포격을 가했지만 오스트리아 해안포대의 반격에 페르사노 제독은 즉각 후퇴(…). 최종적으로 이탈리아 해군은 군함 32척을 동원하고 병력 26,000명을 상륙시키고나서 리사섬을 간신히 점령.

2.3. 1866년 7월 리사 해전


상대인 오스트리아 해군의 함포는 모두 시대에 뒤떨어진 전장식. 이탈리아 해군은 함포의 성능, 장갑함의 수, 함정의 총 숫자와 배수량에서도 상대를 압도했지만 역시 시대에 뒤떨어진 충각 전술에 의해 대패.
개전 직후 이탈리아 함대의 사령관 페르사노 제독은 최신예 장갑함 「레디탈리아」에서 바로 며칠 전 간신히 함대에 편입해 훈련이 부족한 「아폰다토레」로 갈아탐.[6] 이 결과 단종진을 이루던 함열이 일시정지되고 선두함은 그대로 전진...함열은 분리되었고 이에 대해 오스트리아 함대의 테게트호프 제독은 횡진으로 목조함까지 포함해 전력 돌격.
오스트리아 해군은 목조함까지 싸웠지만 이탈리아 해군의 다른 함정들은 방관. 최종적으로 오스트리아 측의 침몰은 0, 사망자는 178명. 그나마 대부분의 오스트리아 해군 사상자는 '''장갑함을 따라 충각돌격을 실시한 목조함'''에서 발생했다. 이탈리아 해군 측의 침몰은 3척, 사망자 약 800명.
함대의 양과 질, 모든 스펙에서 오스트리아 해군을 웃돈 이탈리아 해군은 구시대 전술에 대참패. 참고로 충각 전술이 유효하게 기능한 것은 이 해전이 최후. 게다가 「장갑함을 가라앉히려면 충각돌격이 제일!!」이라는 잘못된 전훈을 40년간 세계에 각인시킴. 상대인 테게트호프 제독은 오스트리아 제국에선 알아주는 명장으로, 이탈리아 해군의 옆구리를 기습하여 상당한 타격을 입혔다.
철갑선 항목 참조. 당시의 유탄포는 목선을 무력화시키는 데는 충분한 수준이었지만 아직 철갑선의 장갑을 완전히 관통할 만한 수준은 되지 않았다. 리사 해전 이전에 벌어진 미국 남북전쟁의 해전들에서 이 점이 분명하게 드러났으며, 이후 계속해서 유탄포가 발달하기는 했지만 철갑을 관통하는 강력한 화포를 장착한 현대적인 군함의 등장 이전까지는 철갑선간의 전투에서는 충각돌격이 계속 유효한 수단으로 작용했다. 또한 위의 쿠스토차 전투에서 언급한 것과 비슷하게, 오스트리아 해군은 규모는 작아도 테게토프 제독을 비롯한 인적 자원의 수준은 상당했다. 수병의 질적 격차가 있긴 했는데, 리사 해전에서 철갑함의 수는 이탈리아가 더 많았다(...) 철갑선 12척 vs. 철갑선 7척에 총 배수량 약 68,000톤 vs. 50,000톤인데, 리사 해전은 이탈리아가 변명할 거리가 있는 정도지, 졸전을 했다는 점은 변치 않는다.

3. 청일전쟁


청일전쟁 직후인 1899년, 서구 열강에게 수많은 항구를 조차당하고, 해군은 전부 털린 상태에서 ATM이 되어버린 청나라의 남아있는 몇 안되는 군항의 부지 중 하나인 절강성의 삼문만을 조차하기 위해서 군함 6척을 이용해 위협을 시도하였지만, 청의 전투의지를 보고 1년 정도를 대치(...)하다가 포기.[7]


4. 제1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4.1. 아도와 전투


기관총까지 장비했지만 에티오피아군에게 압도적 대패. 이 직전에 벌어진 안바·아라기 전투에서도 이탈리아군이 참패한 것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음. 즉,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를 상대로 2연패. 최종적으로는 에티오피아군을 상대로 6000명 가까운 사망자와 3천명의 포로를 낸 대패였음.
사실 아도와 전투는 원래 에티오피아군이 이탈리아군보다 4배나 많았지만 현대식 소총은 지급률이 매우 적었고 기관총을 사용했음에도 2:5의 교환비를 내고 전략적 승리를 달성하지 못한건 이탈리아의 선전이 아니라 졸전에 가깝다.

4.2. 1896년 3월 에티오피아 정규군과의 전투


에티오피아군 전사자 1000여 명에 대해 이탈리아군은 5000명. 근대에 들어 백인이 유색 인종에게 진 전쟁은 러일전쟁이 최초라고 하지만 사실은 이것이 처음.
에티오피아는 숫자도 더 많았으며, 이탈리아는 부족한 병력과 장비, 적대적인 주민 등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 에티오피아군은 총 10만 명 중 8만 명이 소총으로 무장했고, 소수의 대포와 기관총을 동원한 데 반해 이탈리아군은 2만 명 정도의 병력에 60여 문의 대포로 무장. 또한 당시 에티오피아 황제 메넬리크(Menelik) 2세도 상당히 뛰어난 황제였다. 기습을 지시한 것도 바로 이 사람. 그리고 문명 5 에티오피아의 버프도 바로 이 전투를 말하는 것이다. 즉 그 정도로 에티오피아의 조국 수호 저력이 엄청났다는 것이다.
사실 이-에 전쟁보다 더 먼저인 1879년에 영국군은 헨리-마티니 후장식 소총과 다량의 화포에 그당시 최신예 병기인 로켓포까지 동원했음에도 이산들와나 전투에서 보급 문제로 총탄을 다 써보지도 못하고#관련 분석 줄루족에게 탈탈 털리고 워낙 순식간에 밀려 장교 56명 등 영국군 1329명 전원이 죽임을 당하는 수치를 당했다. 다수의 소총과 2문의 대포까지 노획당한 건 덤. 태양이 가려진 날, 이산들와나 전투 다만 4:1의 병력 비율로 싸웠던 이탈리아와 달리 영국은 20:1의 병력 열세를 보였던 것도 감안할 필요가 있고, 이 전투가 종결된 후 영국군의 패잔병 일부와 임시로 군용병원으로 쓰던 오두막 경비병 150여 명(139명 + 환자 39명)이 며칠 동안 압도적으로 우세한 숫자와 총기를 보유한 줄루족 3500명을 상대로 로르케 국경의 방어전투(# 록스 드리프트 전투)에서 성공함으로써 간신히 체면치레를 했다. 다만 이산들와나 전투 이후로 영국군은 결국 줄루를 정복했으나, 아도와 전투는 일단 이탈리아의 패배로 끝났기 때문에 서구 열강이 아프리카를 상대로 패배한 유일한 사례로 남게 되었다.

5. 제1차 세계 대전


'''참고로 아래에 전투들이 벌어졌을 당시에는 미국이 참전한 때이기는 했다.''' 하지만 러시아의 이탈, 니벨 공세의 실패와 프랑스군 항명사태, 제3차 이프르 전투의 패배로 인해 말 그대로 연합군 최악의 해나 마찬가지로 미국이 참전했다는 것만으로 연합군에게 유리한 해였다고 단정짓기 어렵다. 게다가 빠르게 수를 늘린 신병의 전투력을 키우는 과정에서 프랑스군에 크게 의존했다. 미군이 제대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는 것은 1918년 초반이었으나 그 당시에도 경험이 적었고 전쟁장비들 역시 부족했다. 즉, 러시아가 빠진 자리를 미국이 완전히 메우는 데는 1년 이상이나 걸렸다는 이야기.

5.1. 카포레토 회전[8]


오스트리아군과 사이에서 벌어진 카포레토 회전에서 이탈리아군은 대패해 3주간 150km를 패주했다.
오스트리아군은 전사 및 부상을 포함한 사상자가 2만 3천명이 나왔지만, 이탈리아군은 사망자 1만명, 부상자 2만명, '''포로 26만 5천명'''이 나왔다. 이 전투에 참가한 이탈리아군이 대략 40만명 정도로 추산되는데, 이 전투에서 70%를 날려 먹은 셈이다. 이와 별개로 이탈리아군에서 35만명에 이르는 전선이탈자가 나왔지만, 이 경우는 대부분 수습되었다.

5.2. 1917년 10월, 크라곤자 산 전투


이탈리아 북부 알프스의 톨마인지방, 크라곤자-마타주르-스톨 3개의 산으로 이루어진 산맥에 걸쳐 총 5개연대가 방어선을 치고있었다. 정신나간 독일군 대대장 1명이 자신의 대대를 이끌고 이 산을 공격하였다. 그리고 불과 이틀반만에 독일군의 '''1개 대대'''에게 이탈리아군 5개 연대가 격파당하고 장교 150명을 포함해 9000명을 포로로 붙잡혔으며 3개의 산, 6개의 고지를 점령당했다. 독일군의 피해는 전사 6명 부상 30명.
그리고 이 정신나간 독일군 대대장의 정체는 훗날 사막의 여우라 불리게 되는 '''에르빈 롬멜''' 중위였다.

5.3. 1918년 10월 경, 피아브강 전투


오스트리아와의 휴전 교섭 중 이탈리아군은 이 틈을 노려 피아브강을 넘어 공세로 나왔지만 오스트리아군에게 격퇴.
해당 전투는 '''6월'''에 있었던 전투다. 또한 피아브 강 전투에서 이탈리아군은 수비군이었고 오히려 공격을 가한 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이 전투에서 최종적으로 패배했으며, 이는 제국 붕괴에 엄청난 영향을 주게 된 사건이다. 카포레토 전투의 경우, 변명거리가 없는 명백한 졸전이고 참패였지만(350,000명 vs. 400,000명), 의도적으로 상대를 오스트리아군 하나로 축소시키고 있는 서술트릭이 있다. 카포레토 전투는 이탈리아 전선에서 '''독일군이 최초로 전면개입'''한 전투다. 독일군이 개입했다곤 하나 독일도 여유가 크게 없어서 14군만 투입했지만, 서부전선에서 갈고 닦은 신 전술을 많이 활용해서 매우 위협적이었다. 예를 들어 독가스의 활용인데, 이탈리아군의 방독면이 시원찮아서 제대로 당했다고. 거기에다가 독일의 만든 초기 기동전을 활용한 결과 이탈리아군의 빠른 대처에 실패했으며(이전까지는 꽤 잘 막아냈다. 그러니까 12차 이손초 전투인 것.) 마비와 붕괴가 발생했다.

5.4. 1918년 11월 4일, 비토리오 베네토 전투


'''휴전 발효 후''' 오스트리아군을 공격해 30만의 포로를 획득.
역시 틀렸다. 이탈리아군의 공세는 10월 24일 시작되어 11월 3일에 끝났고, 휴전협정으로 11월 4일부터 전투행위가 종결되었다. 참고로 휴전협정은 공세 5일 뒤인 10월 29일부터 개시되었다. 비토리오 베네토 전투는 완전히 사기가 떨어진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이었다곤 하나[9], 이탈리아군이 완벽하게 적을 격파해서 전선의 종결을 앞당겼을 정도. 나중에 이탈리아가 이 전투를 기념해서 리토리오급 전함 2번함 이름으로 쓰기도 했다.

6.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6.1. 1922년 에티오피아 침공


항공기와 전차까지 동원한 압도적인 침공전에도 불구하고 전투 초기에는 패배를 당해 전군이 포위되거나 전선이 붕괴되었다. 그때마다 이탈리아군을 구한 것은 바로 독가스.. 이탈리아군은 핀치로 몰릴 때마다 독가스로 형세를 역전시켰고 이후 독가스 살포에 뒤잇는 독가스 살포로 어떻게든 억지로 승리. 참고로 이탈리아는 독가스 사용을 금지한 제네바 협약에 가입한 상태였다.
참고로 에티오피아군의 장비는 오직 소총만으로 심지어 구식 머스킷도 현역(…) 기병은 창(…)이 무장이었다고 함. 또한 공무원을 급히 모아 편성한 군대에게조차 이탈리아군은 질뻔한 것이다.
이미 30여 년 전에도 에티오피아군은 8만 명을 소총으로 무장시켰던 근대화된 국가였다. 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에서 에티오피아는 70만 명의 병력을 소집했는데, 이는 에티오피아의 국력으로 감당할 수 없는 병력이었다. 이전에도 프랑스, 영국으로부터 다량의 소총과 기관총을 꾸준히 사들이고 있었으며, 그럼에도 과도한 징집으로 무기가 모자라게 되자 어쩔 수 없이 일부 병사들에게 머스킷이나 창, 활을 쥐어줬을 뿐이었다. 또한 이탈리아군이 입은 피해는 에리트레아 출신 식민지 병사들이 대부분이었고, 다른 전선에서 에티오피아군은 녹아내리는 수준의 피해를 입었다.
유럽식 무기만 갖춘다고 유럽인들의 전투력을 갖추게 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인도나 중국 등에서는 유럽식 무기로 무장한 전근대적인 군대가 유럽의 근대적으로 훈련받은 군대에게 일방적으로 당한 사실에서 보듯 복합적인 군사적 역량이 상당히 중요한데, 에티오피아군이 어느 정도 근대적인 군사적 역량을 갖추고 있었는지는 논란이 조금 있다. 더군다나 창으로 무장한 기병에게 박살났다는 것도 그리 이상한게 아니다. 폴란드 침공 당시 독일 보병부대. 보급부대들도 기병창과 대전차포/대전차 소총으로 무장한 폴란드 기병대에 심심하면 기병돌격으로 썰렸다. 1942년 '''이탈리아군''' 사보이 기병연대 600명은 기관총 지원을 받는 소련군 2천 명[10]에게 기병도로 돌격하여 31명의 사상자만 내고 소련군의 공격을 격퇴한 전적도 있다.
여기에서 사실은 이탈리아군이 신사적이라는 것은 서방국가의 군대와 교전할때에 한정일 뿐이고, 이탈리아군 자체의 무능은 상대를 가리지 않는다.

6.2. 1935년 10월


당초는 에티오피아군의 후퇴 전술도 있어 순조롭게 진격했지만 수도 아디스 아바바로부터 진군한 에티오피아군에 포위되어 덴베그이나 고개를 지키는 검은 셔츠 부대는 대부분의 야포와 전차를 버리고 패주, 마칼레의 보급기지까지 떠밀려 이탈리아군의 우익은 완패, 좌익의 보급기지까지 위협당해 총사령관인 바드리오 장군은 전멸의 공포에 휩싸였다. 하지만 여기서 이탈리아군은 독가스를 사용해 형세를 역전시키고 이후 전투 종료까지 독가스를 계속 사용했다.
실제로 이탈리아군이 사용한 것은 겨자 가스다.[11] 여담으로 에티오피아 점령 후에도 이탈리아군은 에티오피아 국민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한다. 그나마도 전후 전범재판에서 제대로 처벌받지도 않았다. 이탈리아군의 졸전기록과 더불어 '''이탈리아가 신사적이었다는 이야기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소리'''일 뿐이라는 근거.

7. 스페인 내전



7.1. 1937년 3월 스페인 과달라하라 전투


마드리드를 목표로 한 이탈리아군 4개 사단이 진군했지만 과달라하라 전투에서 다수의 투항자를 내고 패주.
여기서 이탈리아군이 상대한 공화파는 소련제 T-26 전차로 상당히 중무장을 하고 있었던 데 반해 이탈리아군은 CV-33 탱켓으로 무장하고 있었으니 지는 싸움이었을 수밖에 없다. 한 마디로 탱켓 따위를 이탈리아의 산악 지형에 적합한 전차 운운하며 선택한 군 상층부의 탓이지 군인들은 잘못이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이탈리아군은 3월 18일의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고 퇴각하였지만 이후 역으로 37mm 대전차포를 활용하여 오히려 공화파의 T-26 전차를 관광태웠다. 그리고 3월~5월 동안은 소련이 150여 대의 전차와 40여 대의 장갑차를 지원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과달라하라 전투 자체가 과달라하라에 주둔하고 있던 제11 국제 여단을 상대로 이탈리아군과 모로코 출신 식민지병으로 구성된 국가군이 공세를 퍼붓다가 국제 여단의 치열한 항전으로 인해 좌초된 것을 지원온 공화국 정규군 제4군단이 역공을 가해 국가군이 대패한 전투인데, 여기서 전투 초기 무장이나 숫자로나 완벽하게 우세였던 이탈리아군의 공세를 막은 제11 국제 여단의 주축은 '''같은 이탈리아인으로 구성된 주세페 가리발디 대대였다.''' 스페인 내전 내내 가리발디 대대는 미국 출신 에이브러햄 링컨 대대, 독일 출신 에른스트 탈만 대대, 영국 대대와 같이 국제 여단 내에서도 가장 치열하게 싸운 부대 중 하나로 명망이 높았다. 보다 자세한 설명은 이걸 참조.

8. 제2차 세계 대전


[image]
영국의 삽화가인 Paule Loring의 1943년 4월 16일자 "히틀러 vs 무솔리니, 히틀러는 표류 중인 무솔리니를 자를까?(Will He Cut Him Adrift?)" 히틀러의 짐짝으로 전락한 무솔리니의 신세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8.1. 1940년 6월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이탈리아는 영국프랑스에 선전포고한다. 하지만 단지 아돌프 히틀러의 전과를 질투한 무솔리니가 즉흥적(…)으로, 그야말로 무계획적으로 참전했기 때문에 전쟁에 필요한 물자의 비축도 거의 없었고 이탈리아 선적의 상선도 전세계에 흩어져 있던 상황이었기에 선전포고 2개월 내 외양에 나가있던 상선 대부분이 영국 해군에 나포되어 버린다. 또 어떤 작전도 명확히 계획하지 않았기 때문에 먼저 선전포고를 해놓고도 10일간 어떠한 군사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8.2. 1940년 6월 남프랑스 전역


독일 국방군에게 유린되어 항복 직전인 프랑스에 침공한 이탈리아군은 르네 앙리 올리 대장이 이끄는 불과 2개 사단도 안되는 프랑스군의 반격을 받고 붕괴직전까지 몰렸다. 프랑스의 항복이 좀 더 늦었다면 이 프랑스군은 이탈리아를 침공할 계획이었다.
이탈리아 전체 사상자가 4,000명 + 2,000명(동상) 정도로 괴멸당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당장 6월 10일에 선전포고하고, 실질적인 전투는 21일에 시작해서, 24일에 종전이 되어서 작전이고 뭐고 펼 시간도 없었고 반대로 프랑스군도 비록 독일군이 북프랑스를 휘젓기는 했지만 바보같은 프랑스 수뇌부 덕분에 40개의 사단이 프랑스 국경에 배치된 상황이라 (덕분에 파리를 방어할 병력이 20개 사단밖에 없었다) 마지노선 끝단에 10년간 건설한 Alpine Line 방어선에 85,000명의 프랑스군, 거기에 여름에 동상만 2000명이 걸리는 알프스 산맥도 있어서 프랑스군이 크게 열세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그 상황에서 이탈리아군은 3일 만에 비록 수십 km 정도지만 프랑스로 진격했고 종전 후 남프랑스 일부를 할양받았다. 단지 원천 목적인 니스, 사보이, 코르시카, 튀니지, 지부티, 알제리 일부라는 무솔리니의 욕심에 턱없이 미치질 못했을뿐.

8.3. 몰타 항공전


이탈리아의 선전포고 남발 덕분에 추축국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점령하지 못했다. 이로 인해 아프리카 군단은 보급문제로 허덕이고, 결국 연합군의 반격을 허용해 괴멸된다. 원인은 이탈리아의 그리스 침공에 실패한 것이고 추축군이 몰타를 점령할 능력을 상실하게 만든 크레타 섬 전투 덕분. 사실 몰타섬에는 전투기한대없이 대공포 조금이랑 경비대수준의 육군병력만 있어서,사실상 폭격기가 오면 바로 함락는데, 운 좋게도 몰타항공전 전에 항공모함에 실려야하는 복엽기 씨 글래디에이터 4대가 서류상의 실수로 몰타에 남겨졌다. 1대는 폭격으로 파손되어서 해체되었고 나머지 3기는 방공전에서 맹활약하며 Faith(신념), Hope(희망), Charity(자비)란 별명과 함께 사랑을 받게 됐다. 1대는 격추당하고 1대는 폭격으로 파손되어서 Faith 1대만 살아남았다.

8.4. 그리스 침공


이탈리아의 선전포고 남발로 인해 독일군에게 엄청난 피해를 주게된다, 이탈리아는 21개 사단을 동원해 그리스를 침공했지만 그리스군 13개 사단의 반격에 알바니아까지 후퇴해 붕괴직전까지 몰린다. 그리스는 친 독일적인 중립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이 사건으로 연합국측에 가담. 결국 독일이 대신 전선에 뛰어들게되고 크레타 섬 전투로 인해 독일 공수부대는 더 이상 공수작전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 덕분에 몰타라는 징검다리도 확보하지 못해 북아프리카의 롬멜 군단이 보급에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고, 바르바로사 작전을 준비하던 병력 일부를 발칸 반도 끄트머리까지 내려보내야 해 물자와 병력을 간헐적으로 소모시키고 소련에게 준비 시간을 조금 더 주게 되는 등, 단기적으로는 북아프리카 전선에서의 패배, 장기적으로는 추축국의 패망까지 불러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혹자는 독일군 참전 이후 잘 싸웠냐 하는 질문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그냥 문서를 직접 보자.
여담으로 2018년에 유튜브에 이탈리아의 그리스 침공을 조롱하는 영상이 만들어졌고 조회수 240만회를 달성하며 인기를 끌었다. 이후 이를 패러디한 여러 버전의 영상들[12]이 제작되었다.[13]


8.5. 1940년 12월 이집트 전역


그 당시 사실상 영국의 보호령이던 이집트 왕국을 침공한 이탈리아군 7개 사단은 영국군 2개 사단의 반격을 받고 패주. 13만 명이 포로가 되고 이탈리아령인 키레나이카까지 잃는다. 이탈리아가 무계획적으로 저지른 발칸과 북아프리카의 실정을 구원하기 위해 독일은 발칸을 제압했고 아프리카 군단을 편성해 파견했고, 이 발칸 제압을 위해 바르바롯사 작전 발동은 1개월이나 늦어졌고 북아프리카 전선에도 7,000대의 트럭이 보내졌는데(당시 동부전선 전체에서 1만 4000대밖에 없었음) 이것이 동부전선의 초기진격에 크게 영향을 주게 된다.

8.6. 타란토 공습


영국해군 지중해 함대의 항모 HMS 일러스트리어스에서 발진한 페어리 소드피시 21기가 타란토항의 이탈리아 주력함대를 공격. 전함 콘테 디 카보우르는 대파착저, 전함 리토리오, 카이오 두일리오 중파. 영국해군의 손해는 소드피시 뇌격기 2기.
이것을 굳이 졸전이라 하기는 힘든 것이, 군함을 뇌격해서 침몰시킨 사례는 적지 않으며, 게다가 타란토 공습은 함대에 뇌격공격을 가한 역사상 첫번째 전투였으며 이탈리아군도 방공대비는 열심히 했지만 야간기습이어서 제대로 된 대처를 하지 못했다. 수치상으로만 비교했을 경우 엄청난 교환비를 내며 뇌격에 침몰된 군함은 연합군,추축군 가릴 것 없이 많았다.[14] 또한 여기서 영국군은 그다지 만족할만한 성과는 내지 못했고[15], 5일 후에 출동한 이탈리아 함대에게 호송선단이 괴멸당하는 등의 타격을 입는다. 자세한 사항은 타란토 공습 항목 참조.

8.6.1. 1941년 3월 마타판 해전


마타판에서 이탈리아와 영국 수상함대가 격돌. 이탈리아 해군은 중순 3척을 상실했지만 영국 해군의 손해는 전무.
이탈리아 함대의 원래 목표는 크레타 섬 근처의 영국의 수송 함대를 기습 공격하는 것이었고, 이탈리아의 작전이 예상대로 이뤄졌을 경우 주력 함대가 한참 멀리 있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영국은 완벽하게 털릴 운명이었다. 그런데 하필 '''작전 개시 3일 전에 이탈리아의 암호 체계가 앨런 튜링이 이끄는 블리츨리 파크의 암호 해독팀에 의해 최초로 해독되면서'''(...) 해당 암호문을 통해 영국 해군은 상대의 구성과 목표를 알아내게 되었다. 마타판 해전에서의 영국 함대는 이 정보에 기반해 상대를 압도할 수 있는 전력으로 함대를 편성한 것으로, 이탈리아 전력은 전함 1척에 순양함 8척인데 영국군은 항모 1척, 전함 3척, 순양함 6척 + 크레타 섬에서의 항공 지원으로 애초에 영국군이 이탈리아 해군을 박살낼 수 있는 전력을 끌고온 것이었다. 사실 이탈리아군은 영국군이 해군을 끌고 온다는 것은 파악했다고 한다. 문제는 그 규모를 항모 0척에 전함 1척으로 오보받았다는 것.(...)

8.7. 1942년 북아프리카, 튀니지


>만약.. 요리라면 이탈리아가 영국을 이겼겠죠. 하지만 전쟁은 요리 대결이 아니었어요.
>그러게 이탈리아는 그냥 피자나 파스타를 만들지 왜 전쟁을 했을까요? - 듀베르, 월드 오브 탱크 역사만화에서.
25만의 이탈리아군 병력은 영국군 3만 5천과 전투, 튀니지에서 항복했다.
이 시기는 북아프리카 전투의 절정이며 최종단계였다. 그 유명한 롬멜이 방어전을 펼치다가 폰 아르님이 북아프리카군 사령관으로 교체되었고[16] 독일군은 티거까지 동원하였지만 결국 졌다. 정확한 항복 시기는 1943년 5월. 이 시기는 영국군뿐만 아니라 미군과도 같이 싸운 전투였으므로 25만 vs 3만5천이란 숫자는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 또한 독일-이탈리아 연합군의 포로는 약 27만여명. 북아프리카 전투 초기 오코너 장군의 영국군 3만이 22만명 가량의 이탈리아군을 상대로 승리하고 38000명의 이탈리아군 포로를 잡았는데, 이 사실이 잘못 알려진 것일 가능성이 있다.

8.8. 1942년 12월 동부전선


돈 강변에서 이탈리아 제8군은 소련군의 공격을 받자 바로 모든 병기를 포기하고 패주했다. 바로 전달인 11월에 거의 비슷한 소련군의 공격을 받았던, 훨씬 장비가 열악했던 루마니아군은 며칠간을 선전하며 전선을 유지했다. 그리고 독일 제6군은... 무솔리니의 사위였던 갈레아초 치아노 이탈리아 외상[17]이 자국군을 걱정하며 헤르만 괴링에게 "이탈리아군의 피해상황은 심각합니까?"고 묻자 괴링 왈..."'''전혀 없습니다'''.. 왜냐면...그들은 소련군 포화가 시작되자 바로 후방으로 뜀박질했기 때문이지요.."라고 했다.
이 시기의 이탈리아군의 장비는 루마니아군보다 약간 좋았을 뿐. 독일이 동부전선에서 큰 피해를 입자 울며 겨자먹기로 이탈리아군을 추가로 증원받은 상황이었다. 참고로 1년전인 1941년에 무솔리니가 이탈리아군을 추가파병하겠다고 하자 히틀러는 수송수단이나 화력의 문제로 거부한 적이 있다. 더불어 이 당시 스탈린그라드 전역에 종군하고 있던 이탈리아 8군의 주력은 산악군단 소속 병력들로, 산악군단 소속 병력들은 동절기 기후에 익숙해 늘어질대로 늘어진 보급선과 장비/예비 병력의 부족이라는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혹한의 러시아에서 용맹히 싸웠다. 당장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벌어지는 1942년 8월에는 사보이아 기병대 700명이 야포, 박격포, 기관총의 지원을 받는 소련군 2500명을 상대로 32명 전사 52명이 부상을 입은 반면 소련군에겐 150명의 전사자를 안겨주고 300명의 부상자와 600명의 포로를 잡은 대전과를 내기도 했다.

8.9. 1943년 9월 보니파시오 해협


1943년 9월 9일, 이탈리아가 연합국에 항복하자 이탈리아 함대는 즉시 항복을 위해 연합군 점령지였던 몰타 섬으로 출항했다. 그런데 출항하자마자 들켜서 보니파시오 해협을 통과하려던 무렵 이들을 저지하려고 유유히 다가오던 독일 공군 소속 폭격기 Do 217에게 공격을 받았는데, '''이탈리아 함대는 이들을 프리츠 X를 투하하기 직전까지 대공포 사격 등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멀뚱멀뚱 서 있었다.''' 결국 이 틈을 탄 독일군의 공격은 성공했고, 이로 인해 리토리오급 전함 로마가 격침당하고 네임쉽 리토리오(이 당시에는 이탈리아로 개명된 상황이었다)가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
이 사건의 전말은 바로 이탈리아군의 착각 때문이었다. 당시 연합군은 탈출하는 이탈리아 함대에게 상공 엄호를 해주겠다고 약속한 상황이었고, 이탈리아 함대는 이를 믿고 상공에서 다가오는 Do 217들을 상공엄호를 위해 온 연합군 전투기라고 착각했다. 여기에도 이유가 있는데, 당시 이탈리아 함대의 위치에서는 Do 217편대가 과연 독일군인지 연합군인지 식별하는 것이 불가능했고, 결국 이들이 연합군이라고 착각했다가 당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것은 연합국의 약속과 이탈리아 함대의 착각이 겹쳐져 의해 벌어진 참사였지만, 흔히 떠돌아다니는 "이탈리아군은 탈출하면서도 게으르게 퍼져서 대놓고 다가오는 독일군 폭격기들에게 대공사격조차 하지 않고 스스로 죽음을 자초했다." 같은 루머는 사실무근이다. 애초에 공격이 시작되자 이탈리아 함대는 곧바로 반격을 게시하여 필사적으로 폭격기들을 막으려고 노력했다. 다만 회피기동을 제때 하지 못한 이유는 독일군의 Do 217이 급강하 폭격도 뇌격도 아닌 수평폭격을 하자 단순한 위협으로 판단한 점도 있었다. 물론 이탈리아 해군은 프리츠 X라는 유도폭탄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8.10. 1943년 9월 무솔리니 구출


1943년 9월 12일 오후 2시, 오토 슈코르체니 중령이 지휘하는 무장 SS, 공군 혼성공수부대는 글라이더 12기에 나눠타고 바돌리오 장군의 신 정부에 의해 무솔리니가 감금된 그란 삿소 산장 근처 야산 분지의 평지에 강행착륙했다(착륙성공 8기). 이 산장을 경비하던 부대는 적이 무장 SS란 것을 알자마자 주저없이 항복, 슈코르체니 부대는 무솔리니를 무사히 구출해 단거리 이착륙이 가능한 피젤러 슈토리히 연락기로 무솔리니와 지휘관 슈코르체니 중령이 먼저 탈출했다. 그리고 남은 SS대원들은 유유히 케이블카로 하산했다.(…)
당시 산장을 경비하던 부대는 군 소속이 아니라 경찰의 일종인 카라비니에리 소속이어서 소총 정도의 빈약한 무장밖에 없었으며, 적이 SS라는 것을 알고 주저없이 항복한 것이 아니라 처음에는 '''독일군을 향해 총격을 가하는 등 저항'''했지만 슈코르체니가 데려온 친무솔리니파 이탈리아군 장성 페르난도 솔레티 장군이 "국왕의 어명으로 무솔리니가 다시 권좌에 복귀한다!" 라고 거짓 호통을 친 것에 속아 저항을 멈춘 것이다.

9. 걸프 전쟁


이탈리아 공군의 토네이도 전폭기 20여기가 출격, 첫 실전 공중급유에 이탈리아 공군의 토네이도는 절반이 실패하고 기지로 바로 귀환. 나머지 10여기는 이라크군 군사시설을 공격했지만 그중 몇 기가 격추되어 조종사는 포로가 되었다.
사실 공중급유는 실제로 매우 어려운 임무이고 이를테면 한국 공군은 공중급유기가 없어서 훈련조차 하지 못한 탓에 미국에서 태평양을 건너 공중급유를 받아가며 배달오는 전투기들은 모두 미 공군 조종사가 조종해서 오는 실정이다. 이 부분은 전투기의 출고를 담당하는 쪽이 어느 쪽이느냐의 문제에 따른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한국 조종사들도 공중급유를 할 능력이 되는데, 한 예시가 레드플래그작전 당시 알래스카로 공중급유를 받아가며 장시간 비행을 한 것이다 단, 레드플래그에 참가한 조종사들은 그이전에 미공군급유기로 공중급유훈련을 받았기에 가능한 것이다. 공중급유는 교육과 훈련을 통해 라이센스를 취득해야하고 그후로도 6개월마다 갱신해야 한다. F-15K를 도입하면서 이 공중급유문제가 불거져 미공군에 돈을 지불하면서 미공군의 공중급유기로 공중급유훈련을 실시해 공중급유를 받을 수 있는 조종사들을 양성했고 이는 우리 공군의 공중급유기사업 때 도입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암만 뛰어난 조종사라도 공중급유훈련을 제대로 받지 않으면 공중급유를 받을 수 없고 해주지도 않는다. 공중급유는 자칫하면 서로 공중충돌하거나 급유기의 후류에 휘말려 전투기가 추락할수도 있는 위험한 비행이다. 그러므로 아예 라이센스가 있고 주기적으로 갱신까지 해줘야 하는 것이다.
또 이탈리아 공군이 운용한 토네이도는 문서에도 나와있듯이 초저공 침투 지상공격이 주임무인 기체다. 당연히 위험도가 높은 임무를 맡는만큼 피해도 많을 수밖에 없다. 비단 이탈리아 공군뿐만 아니라 영국 공군도 걸프전에서 다수의 토네이도를 상실했다.

10. 소말리아 내전


1994년 소말리아의 내전으로 민간인이 학살당하자 UN에서 평화유지군을 보냈다. 대한민국은 전투병이 아닌 건설공병대대[18]를 파견했는데, 이탈리아군과 함께 작전을 수행했다. 한국군은 약 60명의 공병대, 지원무장 81mm 박격포[19] 반면 이탈리아군 1개 대대병력. 망구스타 공격헬기 지원가능한 상태.
처음 이탈리아군은 한국의 비전투부대에게 박격포는 왜 가져왔냐고 비웃으면서 우리는 공격헬기까지 보유했으니 걱정말라고 안심시킨다. 얼마 뒤 소말리아 민병대가 기지를 습격하자 이탈리아군은 공격헬기에게 지원요청하는 것도 까먹은 채 기지에 한국군만 달랑 남겨놓고 이탈리아 대대병력 전원 철수.
기지에 남겨진 한국군은 소수의 특전사 경호병력을 제외하면 대다수가 비전투 공병부대원에다 부실한 무장이었지만, 박격포를 사용하여 소말리아 민병대 격파하였다.
'''1994년 파병부터 틀렸다'''. 한국군의 상록수부대 파병은 1993년 여름에 시작되었다
1993년 10월 미군 1개 중대가 게릴라의 습격으로 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했고, 이 사건으로 미국 내 여론이 나빠져 결국 미군을 비롯한 우방국의 철수가 시작되었다. 또한 상록수 부대와 함께 주둔한 이탈리아군의 철군으로 안전 보장이 힘들어지는 등 현지 사정 악화로 상록수 부대 역시 철군하게 되었다.
지역 군벌의 공격에 단순히 퇴각했다기보다는 미국을 비롯한 우방국의 철수가 진행되는 시점이었으므로 한국군이 늦게 퇴각해서 벌어진 해프닝일 가능성이 높다. 이탈리아군의 졸전이 아닌 한국군의 분전으로 받아들이자.

11. 아프간 전쟁


대테러전쟁에서 NATO군의 ISAF로 참전한 이탈리아군이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과 뒷거래를 한 정황이 포착되게 된다. 2009년까지 이탈리아군은 아프가니스탄의 사루비 지역에서 주둔하다가 아무 탈 없이 프랑스군에게 이 지역을 인계하고 철수를 했다. 이탈리아군이 작전하던 동안 별 문제가 없던 지역이었으므로 이 지역은 상대적으로 안전한 지역으로 간주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철수 직후 해당 지역에서 작전하던 프랑스군은 갑작스러운 탈레반의 공격을 받아서, 많은 사상자[20]를 기록하게 된다.
사실 아프간이라는 전장환경상 전투 발생 자체는 이상하지 않지만, 이탈리아군이 주둔할 때는 오랫동안 공격이 없었다는 사실에서 이 문제가 굉장히 이례적으로 보여질 수밖에 없었다. 주둔하는 동안 공격이나 탈레반 활동이 저조하다면 상대적 안전지역으로 분류했었고, 프랑스군도 그에 맞추어 대비 태세를 갖추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조사가 시작되자 그 결과는 황당했다.
이탈리아군이 자국 군인들의 목숨을 탈레반에게 구걸했기 때문이었다. 이탈리아 정부가 자국군의 생명보존을 위해서 탈레반에게 뒷돈을 주고 안전을 확보해 온 정황이 확인된 것이다.관련기사 냉정하게 보자면 평화를 돈으로 사려는 행동자체가 욕먹을 수는 없다. 하지만 용납할 수 없는 부분은 '''작전지역의 이러한 정황을 동맹국인 프랑스에 공유하지 않고 인계'''한 점으로서, 아무리 이탈리아의 역성을 들어주고자 하더라도 이 부분은 옹호가 되지 않는다.
당시 이탈리아 정부는 공식적으로는 이 문제를 부정했지만, 프랑스에서는 당연히 이탈리아에 대한 반이탈리아 감정이 증폭되고 외교문제로 비화될 정도로 상황이 나빴다.
[1] 12차 이손초 전투라고도 한다.[2] 프로이센군은 보오전쟁 중 오스트리아의 동맹국이었던 바이에른, 하노버, 헤센등 중소국가와 벌인 독일 본토 전역은 당연히(?) 석권하고 있었고, 작센슐레지엔에서 오스트리아군을 두들겨 패면서 보헤미아로 진군 중이었다. 그래서 이탈리아에서 빈을 공격하면 오스트리아군이 급격하게 무너질 것을 기대하고 제안한 것이다.[3]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1797년 이탈리아 원정 중 만토바 요새를 함락시킨 건 포위후에 오스트리아에서 오는 구원병력을 잡아먹고, 요새 병력을 굶겨서... 항복 받은 것이었고 실제로 만토바 요새는 나폴레옹조차 정면공격하지 않았던 난공불락의 요새였다.[4] 물론, 전력상의 우위가 승리를 '''항상''' 보장해주는 건 아니지만, 오스트리아군의 전력 우위가 정말로 달성됐다면 전쟁의 양상이 다르게 흘러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5] 다만 교황령 일부가 아직 프랑스 제국의 보호 아래 있었다. 교황령까지 접수하여 리소르지멘토가 완성되는 건 5년 뒤의 일.[6] 리사 해전에서 이탈리아 해군의 가장 치명적인 실책으로 본다.[7] 청말 해군의 중건과 해권(海權) 인식의 고양 -청일전쟁 이후를 중심으로, 조세현[8] 12차 이손초 전투라고도 한다.[9] 독일어권이 아닌 타민족 징집병들은 전투를 거부하고 항명하거나 탈영하기까지 했다. 이미 전투 중반 오스트리아 후방에서 체코를 포함한 다양한 국가들이 독립선언을 하며 들고 일어났기 때문.[10] 게다가 그 악명높은 시베리아 부대다. 사보이아 기병연대와 같은 연대 규모. 근데 이 부대가 조금 방심하고 있다가 기습당한 거긴 하다.[11] 일반적으로 전쟁터에서 가장 널리 사용었으며, 현재까지도 화학탄의 주 원료로 남아있는 독가스다. 여기 들어간건 겨자 열매 추출물 같은게 아니라 염화수소 등을 합성해 만든 합성물질이다. 겨자 란 이름은 별명일 뿐. [12] 히틀러, 처칠, 스탈린, 그리고 이 문서에도 나와있는 무솔리니의 수 많은 삽질들(...)[13] 현재 해당 합성물을 만드는 앱은 공식 트위터를 통해 서비스 종료를 공지했다. 이 영상은 그 여파로 잠깐 역주행했던 것.[14] 이탈리아 또한 인간어뢰를 이용해서 알렉산드리아 항구에 정박한 퀸 엘리자베스급 전함 2척을 항구에 주저앉게 만들기도 했다.[15] 영국은 이탈리아가 이걸로 겁먹고 최대한 활동을 안하길 원했다.[16] 에르빈 롬멜은 이때 몸이 좋지 않았으며, 전선이 무너저 포로가 될 수 있다고 본토로 소환한 뒤, 나름 능력이 있다고 본 한스-위르겐 폰 아르님 상급대장을 대신 파견했다[17] 훗날 무솔리니를 실각시키는 데 가담하였고 무솔리니가 오토 슈코르체니에 의해 구출되어 괴뢰 정부 살로 공화국의 수장으로 복귀된 뒤 처형당했다.[18] 물론 특전사 경호병력이 소수 있었다.[19] 보병부대로 보자면 완편기준 고작 소대급의 인원, 지원무장인 81mm 박격포의 경우 중대급 지원화기다.[20] 10명 전사, 21명 부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