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사라 음란물 지정 및 탄압 사건

 



1. 개요
2.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3. 소설 '즐거운 사라'
4. 사건의 진행
4.1. 체포와 유죄 선고
4.2. 연세대학교 학생들의 구명 운동
4.3. 유죄 선고 이후
5. 관련 문서


1. 개요


1992년 10월 29일 연세대학교 문과대학 국어국문학과 '''마광수'''(1951~2017) 교수가 집필한 소설 《즐거운 사라》가 형법 제243조244조음란물에 해당한다는 이유로 '''강의 도중''' 들이닥친 경찰에 의해 체포, 법정에서 유죄가 확정되어 징역을 선고받은 사건이다.
이렇게 작가가 공권력에 의하여 표현의 자유를 침해당하는 것을 필화(筆禍; 붓으로 인한 재앙)라고 하는데, 대부분의 필화의 경우는 반체제 인사가 칼럼이나 수필, 풍자 등으로 높으신 분들의 심기를 거슬리게 했다는 이유로 당하는 것이지만 이 사건은 '가공의 소설을 창작했다는 이유'로 당한 것이기 때문에 이례적인 일이다.

2.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포르노그래피가 완전히 불법인 나라
포르노그래피가 부분적으로 합법인 나라
포르노그래피가 합법인 나라
냉전기 자유 진영인 제1세계에서는 '''성인이 성인물을 향유하는 것'''이 개인의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되었으나, 유독 대한민국만큼은 소련이나 중국 못지않게 성인물을 금기라 여겼다[1][2]. 당시 한국은 수십 년간 지속된 군사 정권하에서 '북한사회주의 이념이 들어오는 것을 방지한다'는 이유로, 국민을 계도・검열하기 위한 규제가 문화 산업 전반에 아주 팽배해 있었다. 음악계에는 건전가요가 대표적인 예다. 이 배경에는 성 문화를 부끄러운 것이라 여기고 터부시하는 성리학적 잔재도 깊게 깔려 있었는데, 오늘날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정부의 미니스커트 단속 같은 것도 이러한 배경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이루어졌다.
1987년 대한민국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으로 민주화를 맞이하였지만, 여전히 국민의 문화 지체는 계속되어 그 의식은 70-80년대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호주제혼인빙자간음죄, 간통죄의 존재였는데, 심지어 후자 둘은 2009년2015년이 되어서야 폐지되었다. 불과 십 년 전만 해도 한국에는 성적 자기결정권이라고 하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사건도 비교적 최근인 1992년에 일어난 것이며, '국민소득 2만불'을 목표로 하고 선진국의 반열을 넘본다던 한국에서 현직 국어국문학과 교수가 '''소설을 썼다는 이유로 징역을 선고받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나고야 만 것이다. 특히 이 사건이 유명해진 이유는 마광수 교수가 천재로, 근대 문학 비평에 지대한 공로를 쏟았다는 점과, 쌍팔년도도 아니고 도화(圖畵)나 영상이 아니라 활자 매체인 '''소설'''에까지 공권력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 맞는 것이냐 하는 비판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춘향전 같은 고전 문학조차 굉장히 자유로운 성적 묘사가 들어가 있는데, 이 기준으로 보면 우리 조상들은 전부 범죄자라는 뜻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3]. 조선시대에 고려가요를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라 하여 탄압했으니 '''문화 검열의 수준이 수백 년 전으로 퇴보한 것'''이었다.

3. 소설 '즐거운 사라'


소설의 내용을 간략히 요약하자면 '성에 대해 보수적인 한국 사회 전반에서, 프리섹스를 추구하는 자유로운 여대생 사라가 온갖 섹스를 즐기며 쾌락을 추구한다'는 내용이다. 사실 소설을 읽어보면 그 음란함은 당시 PC통신에서 돌아다니던 <엄마의 유혹>과 같은 평범한 야설 수준과 거의 비슷하다(...)[4] 다니자키 준이치로[5] 같은 쇼와 거장과는 비슷한 수위임에도 다른 처분을 받게 되었다.
동시대 다른 외국 서적과 비교해 봐도 이 소설이 특별이 이상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일본프랑스, 독일처럼 서점에 야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나라와는 비교할 것도 없고, 《롤리타》나 《살로, 소돔의 120일》에 비하면 양반이다. 당시 국내 출판된 서적들을 봐도 그보다 훨씬 야한 일본 에로티시즘 소설 《여인의 추억》 같은 소설이 아무 문제없이 버젓이 출판되던 시기였는데, 누구는 체포된 것이다. 사법부에서는 '음란성의 정도를 사회 일반인의 기준에서 판단해야 한다'고 명시한 적이 있으나, 사회 일반적으로 이 소설만이 특히 이상한 것이 아님에도 실형이 선고되었다는 것은 오판이라는 것.
마광수 교수 자신은 '즐거운 사라'만 그리 혹독한 처분을 받은 것이 일단 '''교수'''가 쓴 것이기 때문이고[6] 주인공 '사라'가 방탕한 쾌락 끝에 불행해지거나 정신차리는 교훈적, 도덕적 결말이 아니기 때문에 불편하신 분들의 심기를 건드린 게 아닐까 하고 언급한 바 있다.

4. 사건의 진행



4.1. 체포와 유죄 선고


'''소설 '즐거운 사라' 표지'''
'''연행 당시 모습'''
당시 1심 판결문
1992년 9월 1일, 간행물윤리위원회는 출판 서적에 대한 검열 작업 도중 《즐거운 사라》를 발견, 검찰음화제조음화반포죄로 마광수 교수와 청하출판사를 고발했고, 9월 24일 문화부(현 문화체육관광부)에 마 교수에 대한 제재를 건의하였다.
10월 29일, 강의 중에 형사가 들어와 그대로 마광수의 손목에 수갑을 채워 끌고 갔다. 그는 그대로 구속되었다. 출판사 직원도 차례로 체포되었으며, 뿐만 아니라 검찰은 책을 인쇄했던 업체 고려제책(주)을 압수수색, 5천여 권의 서적을 수거했다.
당시 마광수는 검찰에 강력하게 항의하였으나 세간의 인식은 '''"뭐, 연세대 교수씩이나 된다는 사람이 야한 소설을 써!? 세상이 망했구나! 저 놈을 매우 쳐라!!"''' 수준이었다...[7] 소수의 사람들이 표현의 자유를 내세우며 마광수를 옹호하였으나, 결과는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이라는 유죄판결이 내려졌다[8].
사건 당시 보수 성향의 유력 일간지 등을 통하여 "마광수를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한 지식인들이 많았는데, 대표적으로 서울대학교손봉호[9] 교수는 "마광수 때문에 에이즈가 유행한다''', 마광수는 교수가 아니라 마광수 씨로 불러야 한다"''' 등 공격적 발언을 쏟아내면서 자신의 위세(?)를 높이기도[10] 했다. 이밖에도 이태동 같은 사람들은 "<즐거운 사라>에 나오는 여대생과 그를 가르치는 교수 사이에서 문란하고 변태적인 성관계가 성실한 노력의 상징인 학점의 흥정대상이 된다는 것은 커다란 사회적인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라는 주장으로 마광수와 여제자 사이의 모종의 거래가 있었을 것이라는 인신공격 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문열중앙일보에서 그의 작품을 '구역질을 동반한다, 보잘 것 없다'며 노골적으로 비난했다.[11] 다만 해당칼럼에서 이문열은 동시에 검찰의 마광수교수에 대한 대처에 대해서도 비난하였다. 구역질 나는 짓을 했지만, 그렇다고 잡아가는것도 구역질 나는 짓이라며. 해당칼럼의 링크는 이문열 항목에 있다.
실질적으로 마광수를 법적 처리하라고 검찰에 "명령"한 것은 당시 현승종 국무총리인데, 현승종은 원래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교수이자 고려중앙학원 이사장, 성균관대학교 총장을 지냈던 인물로, 정치적으로도 매우 보수적인 사람이다. 후에 민주당계 정권이 들어선 이후 극우적인 시국선언에도 단골로 나왔다.[12] #
참고로 문재인 정부 초기 법무부 장관후보자였다가 자진 사퇴한 안경환 서울대학교 교수는, 마광수 교수의 항소심에서 <즐거운 사라> 2차 감정 때 재판부측 감정인으로서 감정을 했는데 그 감정서로 인해서 마광수 교수의 항소심이 기각되었다고 한다. #

4.2. 연세대학교 학생들의 구명 운동


당시 마광수를 지지한 연세대 학생들이 "마 교수를 인도와도 바꾸지 않겠다"라는 플래카드를 내걸었다가 '''주한인도대사관'''의 항의를 받는 일이 있었다. 플래카드를 건 사진이 신문 1면에 나왔는데, 이를 본 인도대사관이 "아직도 우리가 식민지냐"고 항의했고, 이에 연세대학교 학생회가 사과했다고 한다.

4.3. 유죄 선고 이후


이 사건으로 인해 마광수는 당시 연세대학교 교수직에서 해임되었으나 1998년에 다시 교수직에 복직하였다. 그러나 <즐거운 사라>는 아직도 재판이 허용되지 않는 금서[13]이며, 마광수 본인은 다른 교수들 사이에서 아웃사이더 취급을 받았다. 여러모로 안습.[14] 이 사건은 <즐거운 사라> 필화 사건이라고 불리고 있으며, 이현세 화백의 <천국의 신화>와 함께 예술과 외설의 경계가 과연 어디까지인가? 하는 답없는 논쟁을 사회전반에 일으키기도 하였다.
그런데 마 교수는 훗날 <즐거운 사라>를 인터넷에 다시 올렸다가 2007년에 약식기소되기도 하였다. '달라진 시대상에 비추어 봐도 음란물이기는 하지만 과거 정식기소했을 때보다는 음란성이 약하다'라는 것이 약식기소의 이유였다.#
마광수 본인은 "10년 정도 지나면 어처구니 없던 해프닝으로 기억할 것"이라고 예언한 바 있다. 그 말대로 위키러들이나 누가 보기에도 웃기는 옛날 해프닝이 되었지만, 현재까지도 <즐거운 사라>는 재출판되지 않고 있다. 재출간되려면 마광수 본인에게 내려진 유죄 판결을 재심을 통해 뒤집어야 하는데, 아직도 한국 사회는 보수적이고 마광수 또한 노쇠해서 법정 싸움을 다시 벌일 기력이 없는 탓이었다.
해당 사건으로부터 10년이 지난 2002년이나 20년이 지난 2012년과 앞으로 이어갈 현재를 기준으로 본다면, <즐거운 사라>에서 묘사되는 삶의 태도는 소설 속에서가 아니라 일상의 영역에서 등장해도 별 문제가 안 될 정도로 성적인 개방이 이루어졌다. 덕분에 해당 판결은 비웃음거리가 되다 못해 아예 잊혀지고 말았다.
하지만, 조심해야될 점은 마광수를 유죄로 만든 법조항은 아직도 살아있으며, 그 판결 역시 전원합의체로 변경되지도 않았으며, '버자이나 모놀로그'와 같은 공연이 한국에서 이루어진다면 여전히 징역형을 선고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한국에서 성관계는 건전한 사회 통념에 반하는 행위므로, 매우 조심하고 신중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매우 안타깝게도 마광수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실제로 2010년대 중반 이후 확산된 래디컬 페미니즘[15]이 유교적 전통을 대신하여 검열의 주체로 떠오르고 있다.
마 교수는 이후 문단과 교수 사회에서 잘못된 이미지로 찍혀 사실상 교양 강의만을 맡는 교수로 좌천되었으며, 이후 섭섭함을 느끼고 2016년 강단에서 퇴임하였다. 전과 때문에 연금 수급에 문제가 있어 생활고에 우울증까지 생긴 마 교수는 2017년 9월 5일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마광수가 세상을 떠나면서 안쓰럽게도 더이상 판결을 뒤집을 여지가 없어졌고, 이는 문학계의 치욕스러운 사건으로 남게 되었다. 사후에라도 재평가가 이루어질지는 의문.

5. 관련 문서


[1] 실제로는 국민들에게만 이렇게 하고, 높으신 분들은 누구보다 저속하게 놀았다. 오늘날 언론에 의해 재발굴되는 성추문이나 성고문 정황이 굉장히 많다.[2] 당장 이승만 정부 시절, 웬만한 부자나 공무원들은 죄다 본부인 이외에 (!)을 거느리는 것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질 만큼, 방탕한 성생활을 즐겼다. 한 예로 박정희의 아내인 육영수의 아버지인 육종관은 무려 5명의 첩을 거느렸고 20명의 자식들을 두었다. 또한 박정희 정부 시절에 벌어졌던 정인숙 피살 사건만 보아도 당시 국내의 권력자들이 얼마나 방탕하고 난잡한 성생활을 즐겼는지 알 수 있다.[3] 아청법의 '표현물'에 활자 매체가 빠진 이유도 이것 때문이다.[4] 사실 직접 읽어봐도 그다지 음란하거나 야한 내용은 아니다. 오히려 요마록 같이 정식으로 번역 출판된 일본판 성인 소설들이나 혹은 인터넷 게시판을 돌아다니면 공짜로 볼 수 있는 온갖 야설들이 음란한 정도에서 즐거운 사라보다 훨씬 더 하다.[5] 이 링크 또한 2018년 6월 1일부로 서비스 종료되었다.[6] 사실 1980년대나 90년대에 웬만한 스포츠신문이나 잡지에는 즐거운 사라보다 훨씬 음란성에서 더 강했던 소설이나 만화들이 버젓이 실렸다. 무협소설만 봐도 거의 웬만한 작품들은 죄다 섹스 장면이 들어간 일명 노루표 무협지가 주류였다. 그런데 그런 음란 소설과 만화를 만든 저자들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는데, 마광수만 구속이라는 처벌을 받았던 것은 마광수가 대학 교수의 신분이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마광수가 대학 교수가 아니라 그냥 평범한 소설가였고 스포츠신문이나 잡지에 성인 소설을 연재하던 입장이었다면 처벌을 받기는커녕 그 이름조차 언론 매체에 언급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보는 의견들도 있다.[7] 이 마광수 교수 구속을 가지고 작가 조경휘는 자신의 소설인 '마지막 손오공'에서 "요즘 인간 세상은 대학 교수나 되는 사람이 야한 소설을 쓰고 그게 무죄라고 징징거릴 만큼 품위가 떨어졌고 말세다."라고 비아냥거렸다. 그런데 정작 아이러니하게도 '마지막 손오공'은 작중 내내 온갖 색드립이 난무한다(...)[8] 항소심에서는 재판장이 "이 판결이 불과 10년 후에는 비웃음거리가 될지도 모르겠으나, 나는 판사로서 현재의 법감정에 따라 판결할 수밖에 없다"라고 했다는 소문이 있으나, 이 사건 항소심 판결문이 공간된 바 없어, 저 소문의 진위는 확인하기 어렵다.[9] 국어국문학과는 학과 문서에도 있지만 문과 기초학문의 보루이기 때문에, 역사 깊은 학교들은 모두 나름의 역사와 고유의 업적, 학풍에 대한 자부심이 매우 강하다. 연세대서울대는 그중에서도 견원지간인데다 연대 국문과 내부의 갈등까지 겹치며 마 교수는 이중고를 겪은 셈. 손봉호는 국문학자도 아닌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소속이었는데도 이 정도 극딜을 해댔다. 특이한 것은, 손 교수는 매춘을 막는 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논리에서 공창제에 찬성했다고 한다.[10] 손 교수는 이후 동덕여자대학교 총장, 초대 정보통신윤리위원회 위원장 등을 지낸다.[11] 1990년대부터 마광수는 이문열을 5공 전두환 정권의 교육정책에 대한 문제점 덕분에 상업적으로 성공했다고 비판한 적이 있다. 어쩌면 정곡을 찌른 발언인데, 이문열 본인은 전두환의 생일잔치에도 참가했을 만큼 전두환을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그리고 이문열의 대표작인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주인공인 엄석대가 바로 전두환에 대한 이문열의 그리움을 나타낸 것이라는 해석도 유력하다.[12] 다만 이 부분의 경우 심재륜 전 대검 중수부장의 발언에 따르면 수사시작은 본인의 의견으로부터 시작했으며, 훗날 검찰총장에 오르는 김진태(1952) (당시 특수 2부 소속)검사에 의해 진행되었다고 한다.[13] 1992년 초판본만이 일부 헌책방에서 괴랄한 가격으로 거래되고 있는 실정이다.[14] 강의시간에 대놓고 국문과 교수들을 깐다. 다만 필화사건 이후 해임 및 복직과정에서 본인을 지지하는 교수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본인의 개인주의를 반성하는 시간도 되었다고 한다.[15] 페미니즘의 많은 분파 중에는 성노동을 양지로 끌어올리고 성 문화를 평등하게 개방하자는 '성 긍정 페미니즘'도 있긴 하지만 한국에서는 래디컬 페미니즘이 주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