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외국어대학교/역사

 





1. 주요 연혁
2. 역사
2.1. 설립 이전 (1952~1954)
2.2. 1954년 한국외국어대학 (Forigen Language College of Korea) 개교
2.4. 1980년 용인분교 개교
2.5. 1981년 한국외국어대학교(Hankuk University of Foreign Studies)로 개편
2.6. 1998년 재단 개혁 및 제2건학 선포
2.7. 2010년 용인캠퍼스를 글로벌캠퍼스로 명칭 변경
2.8. 2014년 서울캠퍼스-글로벌캠퍼스 통합
3. 역대 총장
3.1. 한국외국어대학(1954~1980) 학장
3.1.1. 초대 안호삼
3.1.2. 제2대 박술음
3.1.3. 제3대 학장서리 한종원
3.1.4. 제4대 권중휘
3.1.5. 제5대 최완복
3.1.6. 제6대 박술음
3.1.7. 제7대 최완복
3.1.8. 제8대 조규철
3.1.9. 제9대 김동선
3.2. 한국외국어대학교(1981~) 총장
3.2.1. 초대 김동선
3.2.2. 제2대 황병태
3.2.3. 제3대 박필수
3.2.4. 제4대 이강혁
3.2.5. 제5대 안병만
3.2.6. 제6대 조규철
3.2.7. 제7대 안병만
3.2.8. 제8,9대 박철
3.2.9. 제10,11대 김인철

'''참조'''
이 문서의 대부분은 '한국외국어대학교 60년사(1954~2014)'를 기반으로 한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지편집위원회의 기사를 참고하여 작성하였다.

1. 주요 연혁


[image] '''한국외국어대학교의 역사'''
'''년도'''
'''연혁'''
'''1954'''
한국외국어대학 (Foreign Language College of Korea) 개교
'''1957'''
이문동 캠퍼스로 이전
'''1980'''
한국외국어대학 용인분교 개교
'''1981'''
종합대학 한국외국어대학교(Hankuk University of Foreign Studies)로 개편
'''1998'''
재단 개혁 및 제2건학 선포
'''2010'''
용인캠퍼스를 글로벌캠퍼스로 명칭 변경
'''2014'''
한국외국어대학교 서울캠퍼스-글로벌캠퍼스 통합

2. 역사



2.1. 설립 이전 (1952~1954)


전쟁이 한창 중이던 1952년 9월 10일, 기업가 김흥배(1914~1987)는 임시수도였던 부산에 있는 자신의 회사인 한국화재해상보험주식회사 임시본부에서 학교를 세우기 위한 재단법인을 설립하고자 했다. 그는 재단법인 한국육영회[1]를 만들고 문교부에 재단설립 허가요청공문을 보냈다. 이때 문교부에 보낸 공문엔 ‘문과와 이과를 아우르는 종합대학교인 한국정경대학교를 설립하고 싶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전쟁 중 이런 활동을 한 것을 보면 김흥배는 대학을 설립하고자 하는 열망은 강했으나 그것이 외국어에 특성화된 대학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설립허가를 받은 한국육영회는 1953년 1월 8일에 있던 이사회에서 1953년 4월에 개교를 결정하고 교명을 ‘동양대학’으로 정했다. 하지만 전쟁 중이었기에 학교 건물을 세울 수 없었다. 이에 대해 서울을 다시 수복하지 못할 시 부산에 가교사를 설치하기로 했다. 대학에는 3개의 학과를 두기로 했는데 상경학과, 건축공학과, 광산학과였다. [2] [3]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서울로 돌아온 김흥배는 대학설립 방향을 바꾸기에 이른다. 그 배경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영향이 컸다. 휴전협상 조인(1953년 7월 27일) 후 일주일이 채 안 된 31일 이승만 대통령은 백두진 국무총리에게 외국어대학의 설립을 추진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영어, 중국어, 러시아어 등을 능숙하게 구사하는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외국어대학’이라는 구체적 지시였다. 지시를 받은 문교부에서는 설립계획 수립 및 외국어학교 설립위원회를 설치하는 등 신속하게 준비했다. 당초 세우고자 했던 교명은 ‘국립서울외국어대학’이었다. 그러나 당시는 전쟁의 영향이 너무나 컸고, 국가의 재건에 투입할 자금이 최우선이었던 상황이었다. [4]
정부가 외국어대학 설립에 박차를 가할 때 김흥배는 별도로 대학을 설립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당시 친분이 있던 백두진 총리 서리 겸 재무부장관[5]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다. 이에 백 서리는 자신의 은사였던 박술음 사회부 장관을 김흥배에게 소개했다. 박술음 장관은 김흥배에게 ‘자원이 부족한 한국의 현실과 외국의 일터로 나갈 인재육성’을 강조하며 ‘외국어대학이 반드시 필요해 문교부에서 설립 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추진해 왔으나 예산 확보의 어려움으로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으니, 대학설립재원이 확인된 재산가가 외국어대학 설립 신청서를 제출하면 쉽게 인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역설했다. 이에 박술음 장관과 김흥배는 백 서리를 찾아가 정부의 지원을 호소했다. 외국인 교수를 채용하게 되면 인건비외화로 지급해야 하는데, 정부의 외화지원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는 정부에게도 매우 신중히 결정해야 할 사안이었다.
한편, 재산가라 불리던 김흥배였지만 대학 설립 자금 마련은 쉽지 않았다. 그는 자금 마련 과정에서 편법(이라고는 하지만 현재 시각에서 보면 엄연히 불법)을 사용했다. 은행에서 더 큰 융자를 지원받기 위해 영등포 제일방직 터[6]를 국가로부터 양도받는 과정에서 시가보다 열 배 비싸게 뻥튀기시켜 지불한 것이다. 김흥배는 이렇게 융자받은 돈과 자기 방직회사의 주식으로 자금을 마련했다.[7]
외국어대학을 세우려는 정부와 자금을 가진 김흥배의 이해 일치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고되었고 이 대통령은 조속히 준비하는 것이 좋겠다는 결정을 내린다. 이러한 정부의 판단 하에 김흥배에게 교수 인건비 국가보조에 대한 허가와 대학설립인가가 주어졌다. 국립대학을 목적으로 외국어대학교 설립위원회를 만든 문교부는 다시 사립대학을 목적으로 하는 설립위원회로 바꾸었다. 아울러 명칭 역시 문교부에서 정했던 ‘서울외국어대학’에서 ‘한국외국어대학’으로 변경했다. 그리고 많은 준비 끝에 이듬해 1954년 1월 18일 한국외국어대학(Foreign Language College of Korea)으로 인가를 받았다.

2.2. 1954년 한국외국어대학 (Forigen Language College of Korea) 개교


[image]
개교를 확정한 외대는 당시 아직 이문동 캠퍼스에 첫 건물도 완공되기 전이라 종로에 빌딩 하나를 빌려서 교사로 이용하였다. 이 건물은 박술음 장관의 휘문학교 교사 시절 제자인 민대식으로부터 대여한 것이었다. 그렇게 한국외국어대학교는 1954년 4월 20일 서울특별시 종로 2가 82번지 영보빌딩에 임시교사를 두고 개교하였다. [8] 이곳은 주로 전공과목 강의실로 사용되었고 교양과목은 회현동 중앙우체국 근처에 있던 가교사에서 진행되었다.
초대 학장(지금의 총장) 또한 박술음 장관이 추천한 안호삼 교수에게 맡겼다. 안호삼 초대 학장을 중심으로 교수진과 사무진을 갖췄고 3월에 입학시험을 실시해 252명을 선발했다. 과는 영어과(132명), 불어과(21명), 중국어과(37명), 독어과(29명), 노어과(33명) 등 다섯 개 학과로 수업을 진행했다. 과에 따라 반을 구성했는데 각 반은 20~30명 사이였다. 이듬해에는 한국 최초로 서반어(스페인어)과, 이태리어(이탈리아어)과가 신설되었다. 교재는 전공과목, 선택과목 모두 외국어로 된 교재를 사용하도록 했으며 졸업논문도 외국어(!)로 쓰도록 권장했다.
당시 대학교들은 청강생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이에 대해 학교는 청강생을 받지 않는다는 원칙을 엄격하게 고수했는데, 이는 ‘소수의 학생이라도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는 설립자의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학생들의 나이는 고르지 않았다. 군복무를 마치고 온 학생,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학생, 거기에 간혹 만학도도 섞여 있었다. 심지어는 중령, 즉 대대장 계급을 달고 대학에 들어오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연세대를 졸업하고 새로운 전공에 흥미를 느껴 들어온 사람도 있었다. 여학생은 각 반에 서너 명 정도로 많지 않았다. 졸업생들의 회고에 따르면 정규 교육과정 중에는 체육시간도 있었는데, 운동장이 없었기 때문에 남산으로 올라가야 했음에도 불평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또 이 당시에는 대학교 교복도 존재했는데, 외대의 교복은 배지만 빼고는 서울대의 교복과 같은 모양이었다.
정부는 외대의 교원 확보를 위해 금전적인 지원을 해 주었을 뿐 아니라 외국인 교수 초빙에도 발 벗고 나서서 도와주었다. 문교부가 직접 주한외국대사관에 의뢰를 하여 유능한 교수를 추천해주도록 협조를 당부하였다. 특히 운크라(UNKRA, 유엔한국부흥위원단)와도 알선해 타이프라이터 40대, 녹음기, 반향기, 축음기, 라디오 등 최신식 기자재를 도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원이 큰 만큼 정부는 감독을 두었다. 처음엔 문교부 장관 대리인 허증수 문교부 차관을 이사로 임명했다. 그 후 정부의 지원이 계속되었고 1954년 12월 28일에는 당시 정부의 실세였던 이기붕 등 3명을 새로운 이사로 선임했다. 정부의 지원을 업은 만큼 학교는 빠르게 성장했으나, 그만큼 정부의 입김 역시 커졌다.

2.3. 1957년 이문동 캠퍼스로 이전


[image]
종로 빌딩이 너무도 비좁았기에, 외대는 새로운 터를 찾아야 했다. 그러던 중 호재가 찾아왔다. 정부가 공공부지인 이문동의 학교 교사 예정지를 재단에게 매각해 준 것이다. 원래 이문동 캠퍼스 부지는 임업시험장의 부지였으나 그 중 5만평을 팔아주어 사용하도록 했다. [9] [10] 하지만 이 시기에는 자원이 궁핍했던 시기라 시멘트와 철근을 구하기 힘들었다. 이에 문교부는 직접 산업자원부에 공문을 발송하여 시멘트와 철근을 배급해 건물 완공을 도와주기도 했다.
한국외대는 1956년 7월부터 이문동 신교사에 대한 공사를 시작했다. 대부분의 건물들은 공사를 시작한 지 1년이 지난 1957년 8월에 준공되었고, 9월 1일부터 지금의 자리로 캠퍼스를 이전했다. 지금은 고층 건물들이 즐비한 서울의 일부분이지만 당시엔 이문동 전체가 사진처럼 논밭이었기 때문에 외대의 건물들만이 홀로 우뚝 솟아 있는 풍경을 이루었다.
1958년에는 제3대 학장서리로 한종원 교수가 임명되었다.
1961년에는 제4대 권중휘 학장이 임명되었으며, 이 해에 대학원 신설인가를 받아 영어과, 불어과, 독일어과를 개설하여 학구활동의 본격화를 이루는 단계에 접어들었다.
1962년에 제5대 최완복 학장의 취임이 있었고, 9월에는 시청각교육원을 설치, 동양 최대의 규모를 자랑하는 어학실습설비를 갖추게 되었다.

2.4. 1980년 용인분교 개교


이후 한국의 대학이 몸집을 키우던 시기를 맞으면서 외대도 급속하게 학과를 신설하면서 외형적으로 성장을 거듭했다. 하지만 단과대학에서 규모가 커지면서 종합대학이 되기에는 이문동 부지가 작았고, 그마저도 뒤쪽에 중앙정보부국가안전기획부, 지금의 국가정보원이 있었던 까닭에[11][12] 증축이나 신규 건축도 제한을 받는 등 종합대학으로 커나가기에 걸림돌이 되었다.[13]
이에 설립자는 대학발전을 위해서는 다른 곳에 큰 대학부지가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70년대 초부터 10여년을 서울 인근을 물색,[14] 용인에 80만 평의 부지를 사재를 털어 구입하고,[15] 몇 년의 준비 끝에 1979년 용인분교 설립을 인가 받아, 1980년 용인분교가 개교하면서 자연계열 학과가 이전하였다.
[image]
설립자는 용인분교가 분교가 아니라 메인캠퍼스로서 학부와 최종적으로 대학본부도 이곳으로 옮기고 서울캠퍼스는 대학원 및 연구소 중심으로 가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나, 실제는 초창기 한두 개 학부를 옮기는 것 말고는 여러 이유로 실행되지는 못했다.[16][17]

2.5. 1981년 한국외국어대학교(Hankuk University of Foreign Studies)로 개편


용인분교의 개교로 종합대학 조건을 만족시키며 종합대학으로 승격되었고, 교명도 한국외국어대학에서 한국외국어대학교로 변경되었다.

2.6. 1998년 재단 개혁 및 제2건학 선포


외대는 1980년대 전국적으로 불어온 대학의 양적 팽창과정에서 새로운 대학 환경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기보다는 현실에 안주한 측면이 있었다.[18] 그 결과 1990년대에 들어서 대학 전체가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1998년 재단운영을 둘러싸고 이사들의 비리[19] 및 총장 선임 문제로 교수·교직원 간 반목과 수업 거부 등 내부 진통도 불거졌다. 학생들은 전면 수업거부에 들어갔고, 교수들은 비상교수협의회를 구성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당시 총장이었던 조규철 총장은 교수진과 뜻을 모아 교육부 장관에게 사태 해결을 청원하게 되고, 결국 1998년 7월 교육부는 칼을 빼든다. 특별감사를 벌여 재단이 입시비리에 관여하고 법인 예산을 유용하거나 학사행정에 부당 간섭하는 등 탈법·파행 운영한 것을 확인하고 당시 이사를 모두 해임한 것이다. 교육부는 계속해서 임시 이사 9인을 선임하고, 변형윤 서울대 명예교수를 이상장으로 선출하였다. 이러한 학교 정상화 과정에서 새로운 외대 중흥 원년 1998년, 외대인들의 민주개혁 정신을 기리고 앞으로 백년 대계를 세워 끊임없는 개혁과 발전을 추진해 나가자는 취지에서 대학 구성원의 이름으로 ”한국외국어대학교 제2건학“을 선언하게 된다.
급변하는 교육환경 속에서 능동적으로 대처하여 학교발전의 대전환을 이루기 위해서는 개혁을 통한 체질개선과 발전계획의 수립을 통한 방향 정립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고, 이에 “대학평의원회”와 “제2건학 기획단”이 구성되어 이들을 중심으로 “제2건학”의 기치 아래 개혁과 비전 모색을 위한 노력이 다각도로 진행되었다.
외대는 새로운 시대환경에 대응하는 대학발전을 주도하기 위하여 조직구조 설계 방향을 효율화, 분권화, 유연화의 방향으로 설정하고, 학생 중심의 서비스 제공 및 교육·연구 활성화를 위한 지원 등 핵심기능 강화, 용인캠퍼스의 권한 및 책임 강화 등을 지향하는 방향으로 행정조직 구조를 개편하였다. 또한 본관 신축, 기숙사 건립, 리모델링을 통한 강의실의 현대화 등 외형적 인프라를 구축하고, 정보지원처를 신설하여 정보 관련 업무를 일원화하였다. 그리고 도서관, 시청각교육원 및 학사·행정 업무를 디지털화하는 등 정보화 시대에 부응하여 내적 인프라를 구축 운영하였다.

2.7. 2010년 용인캠퍼스를 글로벌캠퍼스로 명칭 변경


본, 분교 통합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대외적 인식 문제로 인해 용인캠퍼스의 명칭을 글로벌캠퍼스로 변경하게 된다.

2.8. 2014년 서울캠퍼스-글로벌캠퍼스 통합


2014년 교육부로부터 글로벌캠퍼스가 본교 승인을 받으면서 분교에서 벗어나 이원화 캠퍼스가 되었다. 허나 이에 대한 학내 구성원 간의 갈등은 2015년까지 이어졌다.[20]
글로벌캠퍼스의 본분교 통합은 상당히 급작스레 이루어졌다. 물론 2000년대 말부터 2010년대 초까지 두 캠퍼스간의 통합에 대한 얘기가 오갔고 실제로 용인캠퍼스 명칭을 글로벌캠퍼스로 바꾸고 제2기숙사를 신축해내는 등의 성과를 이뤘지만, 이는 글로벌캠퍼스에만 이공계 학과가 존재하는 학교의 특성상 앞으로의 미래를 위해 점진적인 통합 준비를 해야되지 않겠느냐 정도의 논의였다.
이렇게 천천히 준비하던 글로벌캠퍼스의 본교화에 큰 영향을 준 것은 두 가지다. 첫째로 2011년 중앙대학교 안성캠퍼스, 2012년 경희대학교 국제캠퍼스(구 수원캠퍼스)가 이원화가 되면서 학교에서도 타 대학들과의 경쟁력 제고를 위해 글로벌캠퍼스의 본교화가 시급하다는 얘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두번째로, 박근혜 정부가 2015년 실시한다고 공표한 대학구조개혁평가다. 한국외대 서울캠퍼스는 교지확보율[21][22]에서 감점을 받을 것이 분명했으며, 또한 이공계 관련 평가는 이공계열 학과가 전무하기 때문에 0점을 받을 상황이었다. 해당 평가에서 A등급을 받지 못하면 상당한 인원을 감축해야 하는 상황에서, 학교 측에서 2011년 공식적으로 들고 나온 비장의 무기가 바로 본, 분교 통합이었다.
당시 글로벌캠퍼스에서 서울캠퍼스로의 복수전공 제도를 통한 학벌 세탁[23] 논란이 거셌던 와중에 캠퍼스 통합은 그야말로 '''불난 집에 기름을 붓는''' 사태였다. 서울캠퍼스에서는 2010년대 이후로 최대 규모 시위가 일어났고, 총학생회장이 삭발까지 해가며 캠퍼스 통합을 반대했다. 심지어는 모 신문사에서 본분교 통합에 반대하는 학생들을 학벌주의자로 매도하는 기사가 올라오자 학생회관에서 해당 신문을 불태우는 퍼포먼스까지 벌어졌디. 글로벌캠퍼스는 상대적으로 미적지근한 반응인 것이 사실이었으나[24], 통합하며 폐과가 예정된 중복학과들은 거세게 반발하였다. 하지만 이미 2012년에 통합하려고 준비해온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캠퍼스 통합을 막기는 어려웠고, 계획보다는 미뤄진 2014년에 캠퍼스 통합이 강행되었다..
통합 이후 꽤 시간이 지난 지금, 통합에 관한 학생들의 이야기는 외대교지 87호 <두 학교 이야기>에 꽤 자세히 인터뷰되어 있다. 이하의 내용은 해당 기사와 이 기사의 후속편을 바탕으로 적힌 것이다.
우선 교육부가 2011년 개정안을 공표하며 사실상 본분교 통합을 장려한 이후 2년도 채 안되는 짧은 기간이 학교가 통합 인가를 위해 노력한 기간의 사실상 전부라고 볼 수 있다. 학교측은 서울캠퍼스를 어문학 중심의 학술계열, 글로벌캠퍼스를 통번역·지역학 위주의 실용학문계열로 특성화할 것이라고 외치며 본분교 통합을 시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중복학과 통폐합이라는 명분 아래 학생들은 학과의 이름이 바뀌고, 합쳐지고, 없어지는 것을 바라봤지만 학교측에서는 그 어떠한 소통의 의지도 없었다. 이 과정에서 가장 레전드로 남은 사건은 외대의 간판이자 자랑이었던 서울캠퍼스 영어통번역학과를 영어학과, 영문학과와 함께 영어학 단일전공으로 통합하고자 시도했던 사건. 결국 영어통번역학과는 그 이름을 글로벌캠퍼스 영어통번역학부에게 넘겨주고 EICC학과로 현재 존재한다.
또한 학교측에서는 EICC학과, 영어통번역학부 / 프랑스어학부, 프랑스학과와 같은 눈속임용 중복학과들을 운영하고 있지만 사실상 커리큘럼 상의 차별성이 없다고 보아도 좋다. 경제학부와 국제금융학부의 경우 1학년 수업과 전공 필수 수업 목록이 서로 똑같기까지 하다.[25] 양 캠퍼스간 통학버스 또한 굉장히 한정된 수 만이 한정된 시간에 운영되고 있고, 양 캠퍼스의 수업 시작 시간도 다르기 때문에 글로벌캠퍼스의 캠퍼스 간 이중전공생과 서울캠퍼스 학생들의 불만이 크다.[26][27]
다만 본분교 통합 과정에서의 갈등이 외대가 특히 심했던 것은 사실이나 이는 외대만의 문제라고 보기에는 어렵고, 비슷한 시기에 본분교 통합을 진행한 경희대중앙대에서도 비슷한 현상. 두산 재단을 힘에 업고 학생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학제개편을 불도저처럼 밀어버린 중앙대나 1999년부터 통합을 준비해온 경희대도 이러한 마찰이 심심찮게 있는 것을 보면 캠퍼스 통합이 쉬운 일이 아님은 분명해 보인다.
비슷한 시기에 경기도에 분교를 설치하고 본분교통합을 하기로 한 한국외대, 중앙대, 경희대는 이원화를 각자 다른 방향으로 진행했다. 중앙대는 안성캠퍼스에 있던 경영학과 등 중복학과를 전부 서울로 통합시키고 생명공학대학[28] 예술대학 체육대학을 안성에 남기고 인문대,경영경제대,공대 등은 모두 서울캠퍼스로 배치시켰다. 이 과정에서 중앙대 서울캠에 국제물류학과[29]가 생긴다. 다만 연극영화과는 원래는 안성에 남았어야 했지만 과 동문회에서 혜화동에 건물을 사줘[30] 그곳으로 옮긴다.
경희대는 정부에서 정원을 관리하여 소재지 이동이 어려운 의학계열 단과대학만 남기고 이과대학 등은 모두 국제캠퍼스로 넘기려 했지만 당시 교수진들과의 마찰로 실패하고[31] 국제캠퍼스에 응용과학대학, 서울캠퍼스에 이과대학이라는 중복되는 단과대학을 운영하게 된다.[32] 그리고 국제캠퍼스의 외국어대학은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과의 교수들과 서울캠퍼스의 영문학부 교수들과의 마찰이 생겨 서울캠으로 올라가지 못하게 된다.
한국외대는 사실상 통번역대학 전 학과, 국제지역대학 내 일부 학과[33], 경상대학 내 전 학과가 중복학과로 여겨지고 있다. 사실상 분교 용인캠퍼스 시절 학과명까지 서울캠퍼스와 정확히 같았으며 커리큘럼을 보아도 일치하거나 적절히 다른 전공이랑 섞어 놓은 학과들이다. 그래도 학교 차원에서도 의식은 하는지 가장 주요한 중복 단과대학인 통번역대학의 영어통번역학부, 중국어통번역학과, 이탈리아어통번역학과의 정원을 감축하고 아랍어통번역학과는 아예 폐과, 이들 정원을 융합인재대학[34]으로 옮겨 중복학과 해소를 위해 움직이고는 있다.[35][36]
위의 문단에서 말했다시피 외대의 본분교 통합은 철저히 비즈니스였다. 관례적으로만 대학 규모 분류를 하던 정부가 정확한 규모(재학생 10000명)를 정해 지원금의 규모를 철저히 나누기로 했다. 외대의 경우 서울캠퍼스, 글로벌캠퍼스를 분리하면 중소대학 두개가 되지만, 두 대학을 합치면 하나의 대규모 대학이 된다. 이 경우 통합을 하지 않을 경우 지원금 절반 가량이 날아갈 위기였다. 게다가 통합으로 인해 학생수가 많아져 재정상황이 개선돼 대학평가에서도 역시 유리해진다. 단순히 재정 뿐만이 아니라 글로벌캠퍼스의 이공계와 자연계가 본교로 합쳐지면서 대학 평가의 주요 지표 중 하나인 교수 연구가 굉장한 수준으로 개선되었다.[37]
다만 그 과정이 정말 졸속으로 처리되어 물리적 통합이 실패하자 학생들간의 심리적 거리가 정말 한 순간에 통합된 학교 다음으로 크게 존재하는 편이며, 이는 학교측의 노력과 글로벌캠퍼스 학생들의 결단을 통해 해결되어야 할 문제이다. 2019년부터는 글로벌캠퍼스 레지덴셜칼리지 문제에 대해 서울캠퍼스와 무관한 일인데도 불구, 서울캠퍼스 총학생회 측에서 글로벌캠퍼스 총학생회와 같이 총장을 향한 항의를 진행하는 등 사이가 점점 개선되어가고 있는 듯.[38]

3. 역대 총장



현재 김인철 행정학과 교수가 총장이며 연임에 성공하여 임기는 2022년 2월 28일까지이다.
인적· 물적 자원에 있어 정부에 많은 부분을 의지한 대학답게, 초기에는 주로 문교부에서 파견된 교직원들이 대다수였고, 당연히 학장 및 총장도 정부에서 파견된 명망 있는 교수들이 맡곤 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자교 졸업생들이 많이 배출된 지금의 외대는 교수 중 자교 출신이 가장 많은 대학 중 하나가 되었다.[39] 이에 따라 자연히 처장급 인사들이나 총장 역시 거의 자교 출신들로 채워지게 되었다. [40]
총장은 교수협의회 주도로 운영되는 총장후보추천위원회가 총장 후보 2인을 이사회에 추천하고, 이사회가 그 둘 가운데 한 명을 결정하는 식으로 선출된다. 이사회에 추천할 총장 후보는 교수 전원 직선제 투표를 거쳐 뽑힌다. 1차와 2차에 걸쳐 투표를 한 뒤 최종 1위와 2위를 이사회에 총장 후보로 올리는 식이다. 총장의 임기는 4년이며 연임제로 운영된다.

3.1. 한국외국어대학(1954~1980) 학장



3.1.1. 초대 안호삼


'''1954.04.20 - 1955.05.09'''
생몰년도는 1902년1973년. 함경남도 함주 출신이며, 1918년 함흥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했으나 의학이 적성에 맞지 않아 중퇴했다. 그 뒤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의 세이소쿠영어학교에 입학하여 대학진학을 준비하던 중 건강을 해쳐 부득이 학업을 중단했다. 고향으로 돌아와 휴양하던 중 함흥에 와 있던 캐나다 선교사에게 영어를 배우고 1923년에 경성고등상업학교(지금의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에 입학하여 1926년에 졸업했다. 그해에 춘천고등보통학교(지금의 춘천고등학교) 교유(敎諭)로 피임되어 영어를 담당, 교육자로서의 첫발을 내디뎠다. 1929년 경성공립제2고등보통학교[41]로 전임되어 1945년까지 재직했다. 광복 후 경성의학전문학교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교수를 역임하던 중 1950년 3월 미국 국무부 초빙 교환교수로 도미하였다가 6·25 전쟁이 일어나자 미국 국방부 문관으로서 귀국하여 3년여 동안 미군사령부에서 근무하였다.
1954년 본교 개교와 더불어 초대 학장으로 취임, 1955년까지 직을 맡았으며, 그 이후에도 1958년까지 외대에서 봉직하였다.

3.1.2. 제2대 박술음


'''1955.05.10 - 1960.06.05'''
생몰년도는 1902년~1983년. 서울 출신이며, 1남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19년 송도고등보통학교 재학 때 3·1운동에 참가하였다는 이유로 퇴학당했다. 당시 외국선교사들과 접촉이 잦았던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영어에 관심을 갖게 되어 연희전문학교 영문과에 다녔고 졸업 후 1924년 휘문고등보통학교(현재의 휘문고등학교) 영어교사로 부임했다.
휘문고보 재직 중 1937년 일본문부성 영어과교원검정고시에 합격했고, 같은 학교 교장직을 퇴임한 뒤 1947년 연희대학 영문과 교수로 부임했다.
6·25전쟁 중인 1952년 휘문고등보통학교 제자였던 당시 재무부 장관 백두진의 천거로 사회부 장관(현재의 보건복지부장관)으로 발탁되어 능숙한 영어실력을 토대로 엔민사처(UNCAC)를 비롯한 해외원조기관 등에 우리 나라의 참상을 호소, 많은 원조를 끌어들이기도 했다. 사회부장관 퇴임 후 1955년 본교 교수 및 학장으로 부임하여 1977년 정년퇴임 때까지 영문법 등을 강의하면서 후진양성에 주력했다.
학장직을 수행하면서도 꼭 강의를 맡아 가르쳤는데, 낱말 하나하나의 기능과 의미를 꼼꼼히 분석, 학생들이 영어문장을 완벽히 이해하도록 하는 데 힘썼다고 한다. 서울캠퍼스에 이 분의 동상이 세워질 정도로 학내에서는 대단히 존경받는 인물.

3.1.3. 제3대 학장서리 한종원


'''1960.6.17.~1961.1.19'''
1905년멕시코 유카탄 지역으로 이민을 갔으며 한인학교였던 진성국어학교를 다녔다. 그 후 메리다에서 생활하다가 1921년에는 멕시코시티로 이주하여 신학교에서 공부하였지만, 병으로 인해 그만 두고 메리다로 돌아왔다. 1922년에는 메리다지방회 외교원을 지냈고, 그 뒤에는 교육위원을 맡아서 한인 2세들을 교육하는데 전념했다. 1941년 5월에 멕시코시티로 옮긴뒤, 묵경지방회 선전위원으로 활동하면서 태평양전쟁 당시에 한인의 안전 보호와 함께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이후 묵경지방회는 폐쇄되었으나, 오랜 시간 후 한종원은 직접 묵경지방회를 부활시키기에 이른다. 이에 더해 멕시코시티의 3대 일간지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일 선전과 한국의 독립운동, 멕시코 한인들의 입장을 게재하는 등 멕시코의 한인들을 대상으로 독립운동을 장려했다.
그 뒤 멕시코 사범대학을 졸업하고서, 베라크루스의 할라발대학과 멕시코국립대학교 등에서 역사학 교수를 지냈다. 1949년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특사인 김동성과 함께 친선사절로 활동하였으며, 1955년 12월 11일에 귀국하여 본교 서반아어과 주임교수를 맡았다. 1956년에 주미대사 양유찬의 수행원으로 남미 20여개국을 탐방한 뒤, 1960년 6월 17일부터 1961년 1월 19일에 본교 학장서리를 지냈다가 멕시코로 돌아갔다.
국내에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재외 한인들의 독립운동을 장려하고 대한민국 건국 초기의 외교사에도 한 획을 그은 인물.

3.1.4. 제4대 권중휘


'''1961.1.20.~1961.12.31'''
항목 참조.

3.1.5. 제5대 최완복


'''1962.1.1.~1966.1.31'''
항목 참조.

3.1.6. 제6대 박술음


'''1966.2.1.~1977.4.19'''

3.1.7. 제7대 최완복


'''1977.4.20.~1980.4.19'''

3.1.8. 제8대 조규철


'''1980.4.20.~1980.8.8'''
1937년 경상북도 김천에서 태어났다. '''최초의 외대 모교 출신 학장'''으로, 피교육자 및 교육자 생활 기간 동안 파리 제8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고 스위스에서 연구교수로 활동한 기간을 제외하면 줄곧 모교에서 공부하고 모교의 강단에 서 있었던 그야말로 '''성골 외대인'''. 1962년 본교 불어과와 대학원을 졸업했으며, 이후 귀국하여 1982년 본교 불어과 교수로 임명되었다. 본교가 종합대학으로 승격되기 전인 1980년 5개월간 학장서리를 역임했으며, 이후 1987년 다시 3개월간 총장직무대리를 역임한 바 있다. 이러한 경력을 바탕으로 1998년 총장선출선거에 출마, 최다득표를 얻었으나 재단분규로 선임이 늦어져[42] 재단이 정상화되어 취임식을 가진 1999년 8월 28일까지 8개월 동안 총장직무대행으로 집무했다. 이후 정식 총장으로 취임, 2002년까지 총장직을 역임했다.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재단문제를 중심으로 한 자잘한 학내 분규로 어지러운 교내 분위기를 그럭저럭 원만하게 수습했다는 평이 많다. 한국불어불문학회장과 천주교 청담동교회 총회장, 제2건국 범국민추진위원을 역임하기도 했다.

3.1.9. 제9대 김동선


'''1980.8.9.~1981.2.28'''
1930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외대의 마지막 학장이자 초대 총장. 고려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본교 영어과 교수를 지내다가 1980년 학장으로 취임했다. 1984년 퇴임한 이후 부산외국어대학교 초대 총장을 지낸 바 있다. 정년퇴임하면서 국민훈장 무궁훈장을 수여받았다.

3.2. 한국외국어대학교(1981~) 총장



3.2.1. 초대 김동선


'''1981.3.1.~1984.2.29'''

3.2.2. 제2대 황병태


'''1984.3.1.~1987.12.21'''
항목 참조.

3.2.3. 제3대 박필수


'''1988.2.5.~1990.3.17'''
생몰년도는 1938년~1998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공립공업중학교와 본교 영어과를 졸업했다. 피츠버그 대학교에서 경제학 석사학위를, 한양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부흥부(현 국토교통부)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해 상공부에서 통상진흥국장, 국제협력차관보, 상역차관보를 맡았다. 1981년 전매청장을 지냈으며, 1988년 본교 총장으로 학계에 머물다 1989년 상공부 장관으로 관계에 복귀했다. “성장은 수출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라고 말할 정도로 수출에 대한 집념이 강한 인물이었으며, 1970년대 수출 드라이브 정책의 주역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1990년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세계통상장관회담의 수석대표로 참가,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에 참여했으며, 은퇴 후에는 기아경제연구소 회장 등을 역임했다. 1998년 상공부 전직 관료들 및 옛 상공부 출신 공무원들의 모임인 상우회 회원들과 삼척 경동탄광 관련시설 시찰을 위해 이동하던 중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별세 이후 유가족들이 이분의 소장도서 2226권을 본교 도서관에 기증한 바 있다.

3.2.4. 제4대 이강혁


'''1990.4.14.~1994.4.13'''
생몰년도는 1935년~2006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한 뒤 조선대학교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0년부터 본교 교수로 재직하며 기획실장, 부총장을 거쳐 1990년 총장으로 취임했다. 그러나 1994년 학내에서 정원식 총리 폭행사건[43]이 발생하자 이에 책임을 지고 사임하게 된다. 이후 한국공법학회장과 덕성여자대학교 총장을 역임했다. 2006년 숙환으로 인해 향년 70세로 별세했다.

3.2.5. 제5대 안병만


'''1994.4.14.~1998.2.28'''
항목 참조.

3.2.6. 제6대 조규철


'''1998.8.24.~2002.8.23'''

3.2.7. 제7대 안병만


'''2002.8.24.~2006.2.28'''

3.2.8. 제8,9대 박철


'''2006.3.1.~2014.2.28'''
1951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본교 스페인어과 68학번이자 본교의 첫 연임 총장. 전공이자 연구분야인 스페인어학계에서의 권위는 상상을 초월하는데, 돈키호테 완역자이자 국내에 단 2명있는 스페인 왕립한림원 한국인 회원이다.[44] 본교 졸업 이후에는 스페인 정부 장학생으로 선발돼 마드리드 국립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땄고, 본교 교수가 된 뒤 한국ㆍ스페인 우호협회 회장을 거쳐 2009년엔 스페인 왕립한림원 종신회원이 되었다. 2006년 한국외대 총장에 선출되어 2014년까지 제8,9대 총장직을 연이어 역임했다. 재임 시절에 해고무효소송이나 퇴직금청구소송, 인권위처분취소소송 등 학교가 당사자인 소송의 변호사비용 등 12여억원을 교비에서 지출해 사용한 혐의가 인정되어 2017년 1,000만원의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박철 전 총장은 선고가 부당하다며 헌법소원을 제기하였다.

3.2.9. 제10,11대 김인철


'''2014.3.1~'''
항목 참조.
[1]동원육영회의 전신[2] 이를 보면 당시 국토개발을 위한 건축가 양성과 광산운영 전문가, 경제개발을 위한 경제 전문가에 대한 사회의 수요가 높았음을 알 수 있다.[3] 이와 더불어 김흥배가 경영했던 삼화피복공사, 동양철광공사와 소유하고 있던 한국화재해상보험주식회사, 제일방직공업주식회사의 성격을 보면 이 회사들에 필요한 인력을 양성하기 위함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4]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2억 달러 원조계획으로도 부족할 정도였다.[5] 1952년 10월 9일부터 익년 4월 3일까지는 정식 총리가 아니라 서리였다. 정식 총리 임기는 익일부터 시작했다. 고로 상술한 1953년 7월 31일에는 총리였던 게 맞고, 김흥배가 대학 설립을 위해 한창 뛰어다니던 중에는 서리였다가 총리 인준안이 가결된 것이다.[6] 전쟁 중 인민군의 방화로 황폐화되어 있었다.[7] 이 편법행위에 대해 김흥배는 ‘비슷한 시기에 설립 인가를 받은 대학들이 기본재산 없이 학생들의 수업료에 의지했던 것과 비교해 자기자본을 가지고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고 말한다.[8] 이 영보빌딩은 지금은 헐려서 없어졌지만 지금의 위치로 말하자면 대강 종로서적이 있는 자리 정도다.[9] 이문동 캠퍼스뿐 아니라 외대 뒤편 천장산 주변이 전부 홍릉 임업시험장이었다. 그러나 KIST, 경희대, 외대 하다못해 안기부(현 한예종)까지 꿰어차고 들어와 이리저리 떼내서 불하되거나 넘기고 남아 있는게 지금의 홍릉수목원이다. 5만 평을 구입했다고 하나 지금 남아 있는 건 2만 5천 평 정도이니 절반쯤은 그 후 야금야금 팔아먹었다는 이야기다.[10] 설립자 회고집을 보면 대학 부지가 도로로 둘로 나눠져 있서 문제였다고 언급한 걸로 봐서는 나머지 부지는 지금 외대와 외대역 사이였던 걸로 보인다.[11] 지금의 한국예술종합학교 자리이다. 이후 지금은 알다시피 국정원은 서초구 내곡동으로 이전한 상태.[12] 여담이지만 단국대학교도 국정원 때문에 피해를 입은 대학이다.[13] 당시에는 대학이 종합대학이냐 단과대학이냐가 대학의 위상을 가를 정도로 중요한 기준이었고, 대학들이 너도나도 종합대학이 되기 위해 사력을 다해 규모를 키우는 시기였다. 심지어는 종합대학만이 "대학교"라는 명칭을 쓸 수 있었고 단과대학은 "대학"이라고만 표기해야 했다. 또 단과대학은 "총장"이라는 호칭도 쓸 수 없었고 "학장"이라는 호칭만 써야 했다. 수험생들도 대학을 선택하는 중요한 기준을 종합대학이냐 아니냐로 두기도 했다.[14] 설립자 회고록을 보면 "10년 이상 교지 확보를 위해 이곳저곳을 돌아다녔지만, 마땅한 곳을 찾기가 쉽지 않았던 이유는 내가 생각하는 학교부지로서의 조건이 까다로웠기 때문이다. 새로 정할 교지는 서울 중심부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도 안 되고 너무 가까워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장차 대학 본부가 자리 잡게 될 곳이므로 종합대학교 캠퍼스로서 갖가지 조건에 부족함이 없어야 했다. 앞으로의 대학의 규모를 생각해서 세월이 흐른 뒤에도 학교부지로서의 조건에 부족함이 없어야 하고 또 넉넉한 공간 활용의 여유가 있어야 하는데 그러자면 대지가 80만평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대학촌이 형성된 뒤의 모습도 생각해 보아야 했다."라고 되어 있는데 일부러 서울에서 좀 떨어진 곳을 선택한 것 같다. 지금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생각이지만 아마 그 당시에는 굳이 서울에 위치하거나 서울에서 가까워야 할 이유가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듯 하다.[15] 설립자 회고록을 보면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다. "어느 가을 날 경기도 광주를 지나 용인으로 빠지는 길에서 잠시 차를 세웠다. 동쪽으로 시선을 옮기어 푸른 하늘을 쳐다보니 산봉우리가 보였다. 봉우리를 중심으로 날개처럼 두 줄기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산등성이가 동물의 부드러운 등허리처럼 순하게 뻗어 있었다. 나는 이상한 영감에 말려드는 듯하였다. 어림잡아 그 일대가 80만 평이 넘을 것 같았고 산세가 포근하면서도 힘이 있었다. 여기다! 나는 속으로 외쳤다." … "부지 매입 자금은 내 소유의 땅을 팔아서 마련하였다."[16] 결정적으로 설립자는 용인캠 개교 몇년후 숙환으로 별세했다. 사실 80년대까지만 해도 이렇게까지 서울에 캠퍼스가 있다는 게 입결에 중요한 문제로 작용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멀리 갈 필요도 없이, 서울 용산구 한남동에 있었던 단국대학교가 죽전으로 이전하고 나서 어떻게 되었는지 봐도 답이 나온다. 서울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으니 입결에는 전혀 영향을 주지 않을 거라고 판단한 것 같다.[17] 비슷한 경우로 명지대학교가 있다.[18] 이러한 안주적인 학내 구성원들의 태도는 수십 년이 지난 현재 2020년대까지도 지적되고 있는 외대의 고질병이라고 할 수 있다.[19] 특히 설립자 김흥배의 처조카인 박승준 이사의 비리가 문제가 되었다.[20] 2024-06-27 05:18:22 지금도 학내 구성원 간의 갈등이 표면적으로만 드러나지 않는 것이지 에브리타임 같은 익명 커뮤니티에 들어가보면 설캠과 글로벌캠이 언제 싸워도 이상하지 않은 분위기이다.[21] 한국외대 서울캠퍼스와 비슷한 수준의 학부생 인원을 갖춘 학교는 경희대학교 서울캠퍼스, 서울시립대학교 등인데, 이 학교들과 학교 부지를 비교해보면 처참하기 그지없다.[22] 서울캠퍼스의 열악한 상황과는 반대로 글로벌캠퍼스는 학교 부지가 수도권에서 서울대학교 바로 다음이라는 어마무시한 크기를 자랑한다.[23] 이 제도로 이득을 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조우종이다.[24] 본디 서울캠퍼스 총학생회가 연대를 요청해 글로벌캠퍼스 총학생회 역시 학교 측에 반대입장을 표명하기로 약속되었으나, 중간에 글로벌캠퍼스 학생회가 어물쩡 말을 바꾸면서 뒤로 빠지자 서울캠퍼스 학생회만이 반대운동에 나서게 되었다. 이 때문에 서울캠퍼스 고학번들과 졸업생들은 아직까지도 글로벌캠퍼스 학생회에 대한 시선이 대단히 곱지 않다.[25] 다만 상경계의 경우 1학년 전공기초 정도는 단과대끼리 공유하는 사례도 있으므로 적어도 이 사례는 참작의 여지가 존재한다.[26] 링크(두 학교 이야기2)를 들어가보면 알겠지만 기사가 작성 된 당해의 캠퍼스 간 이중전공의 신청 인원은 글로벌캠퍼스가 1029명, 서울캠퍼스가 29명이고 이것은 약 35배 차이이다. 사실상 캠퍼스 간 이중전공은 글로벌캠퍼스 학생들만 이용하는 지경.[27] 위에도 적혀있듯 서울캠퍼스는 교지확보율이 많이 낮은데, 인근 산책하러 오는 이문동 주민에다가 이중전공하러오는 글로벌캠퍼스 학생들까지 와서 인구밀도가 좀 많이 높다. 그 덕분에 도서관 리모델링이 되기 전엔 시험기간에는 특히 열람실을 이용하기 어려웠었다.[28] 원래는 올라오기로 되어있었으나 서울캠퍼스 생물학과 교수들과 마찰이 생겨서 못 올라왔다는 카더라가 있다.[29] 원래는 안성캠퍼스에서 생긴 과이지만 본분교통합 후 서울캠퍼스에 자리잡게 됐다. 하지만 통합 전에 입학한 학번들에게는 졸업장이 통합 전 안성캠퍼스, 즉 분교로 나왔다.[30] 중대 연영과의 동문들과 과의 위상을 보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31] 이 시기쯤에 서울캠퍼스의 물리학과 장모 교수가 LG디스플레이와 협약하여 사실상 공대인 정보디스플레이과를 설립한다. 내려가기 싫다고 알박기를 시전한셈. 다만 경희대학교/학부문서에 있지만 공학사가 아닌 이학사가 나온다.[32] 정말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아무리 규모가 작은 공대여도 공대에는 자연대가 같이 붙어있었고 꼭 필요했기 때문에 이과대가 내려오지 않아 중복학과인 자연대인 응용과학대를 존치할 수 밖에 없었다.[33] 위에도 언급이 있지만 이 단과대가 가장 골때리는 게 서울캠의 프랑스어학부 인도어과 노어노문학과와 글캠의 프랑스학과 인도학과 러시아학과는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정확한 중복학과이다.(이 중복학과들은 상호 캠간 이중전공이 제한되어 있다.) 글캠 쪽 학과가 지역학을 좀 더 배운다곤 하지만 학사 수준에선 그 나물에 그 밥. 차라리 다른 과들은 영어통번역을 제외하면 과 이름만이라도 서울캠퍼스랑 조금씩 다르게 했다. 예를 들어 포어과는 브라질학과로 이름이라도 바꿨지 앞의 사례들은 너무 눈 가리고 아웅인 통합인 것. 이 쯤이면 이원화를 통과시켜준 교육부가 정말 이상한 것이다. 이러한 중복학과들이 설캠과 글캠의 반목 이유 중 하나기도 하고, 당장 외대 프랑스학과를 다닌다고 하면 글로벌캠퍼스 출신이 아닌 이상 100에 99는 서울캠을 떠올리지 글로벌캠을 떠올리지 않는다.[34] 특히 융합인재대학은 5개 모듈 중에서 3개 이상을 골라서 그 5개 모듈 안의 것만 전공하는 것 이어서 서울캠퍼스 및 글로벌캠퍼스 모든 과로의 부전공 및 이중전공, 전과가 불가능해 서울캠퍼스로 올라올 일이 없어서 서울캠에서도 좋아한다. 글로벌캠퍼스에서는 상경학사를 주는 과들의 정원이 늘어났고 서울캠퍼스는 서울로 올라오는 수요가 조금이라도 줄어들어 서로 윈윈인 셈.[35] 하지만 중복학과를 통폐합시키는 과정에서 없어진, 혹은 축소된 과들의 학생들은 학습권 보장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고 주장한다.[36] 다만 아예 폐과를 반대하는 중복학과의 학생들도 있고 실제로 서울캠퍼스 앞에서 시위도 했다. 중복학과 문제를 해결해야 글로벌캠퍼스의 이원화 문제와 인식을 개선할 수 있는데 오히려 퇴보하려고 하는 셈.[37] 계열평균 교수당 국제학술지 논문 순위가 중앙일보 대학평가 기준 2012년 26위에서 2015년 1위로 껑충 뛰었다.[38] 오히려 학교의 총장이 코로나19로 인한 비대면 수업 관련 이슈로 글캠 학생회가 서울 대학본부로 서울캠 학생회랑 같이 올라오자 글캠 학생회에게 '니들은 왜 왔냐?'라고 하는 등 학교의 높으신 분들부터가 통합은 지원금 타먹기와 비즈니스에 불과하다는걸 인증하고 있다.[39] 그도 그럴 것이 특수외국어 학과 같은 경우 자교 외에는 전공자를 배출하는 곳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40] 2017년에 열린 제 11대 총장 선거에서는 8명 중 6명의 후보가 자교 출신이었다.[41] 지금의 수도여자고등학교[42] 이 때 기존 재단 퇴진과 제2건학에 힘썼는데, 사실 조 교수는 학내 자주화에는 별 관심이 없었으나 총장 선거에서 2위에 그친 교수가 이사회에 의해 자신을 제치고 총장으로 임명되자 이에 반발하여 이사진 퇴진에 힘을 실어주었다는 것이 중론이다.[43] 이 사건을 계기로 운동권 진영에 대한 국내의 인식이 뒤집힐 정도로 핵폭탄급 사건이었는데, 자세한 것은 정원식 문서를 참조할 것.[44] 다른 한 명 역시 본교 서어과 61학번인 민용태 고려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