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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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의 정치 정보
부패인식지수
77점
2020년, 세계 11위[1]
언론자유지수
30.01
2020년, 세계 80위[2]
민주주의지수
6.02
2019년, 세계 75위[3]
1. 개요
2. 역사
3. 삼권
4. 청렴도
5. 지방행정
8. 민주화 시위와 본토 정부와의 갈등


1. 개요



'''홍콩 시위의 근본 원인'''
홍콩은 1997년 7월 1일부로 영국령에서 중국령이 되었지만, 영중공동선언에 의거해 고도의 자치권을 부여하는 일국양제의 특성으로 인해 싱가포르처럼 도시국가와 비슷하게 굴러간다.
홍콩의 최고 법률은 중화인민공화국 홍콩특별행정구 기본법으로 중국 헌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 정부조직은 삼권분립[4] 원칙에 의거하여 행정부인 홍콩 정부와 입법부인 입법회, 그리고 사법부인 홍콩 법원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베이징의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전국인민대표대회, 최고인민법원과는 엄연히 분리되어 있다.
홍콩의 정치제도는 영국과의 협상 과정에서 영국 식민지 시절 정치, 입법, 사법 체제를 반환 후 최소한(at least) 50년간(1997년~2047년) 유지할 수 있고 이와는 별개로 특별행정구 설치로 인해 사회주의 체제를 영구히 적용하지 않기로 한 일국양제(1국가 2체제) 원칙에 따라 외교군사를 제외한 대부분의 것들이 중국 본토와는 따로 돌아간다. 일단 관세부터가 별도 관세구역으로 들아가고 여권 또한 따로 나오며 출입국 정책도 크게 다르다. 국제 기구 참여(올림픽 참가 등)도 당연히 홍콩이라는 이름으로 따로 한다.
외교 또한 원칙적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이 전담해주기로 되어있지만, 중국 공산당은 홍콩 정부에게 '중국 홍콩(Hong Kong China)'이라는 명칭으로 중앙정부의 감독 하에 제한된 외교 활동을 하는 것을 허락해주었다.

2. 역사


오늘날의 인상과는 달리 홍콩 반환 이전 영국령 홍콩은 반환 직전까지 식민지로서 제도적 민주화가 미진한 지역이었다. 현재 홍콩 행정장관은 간선으로라도 선출되지만 행정권과 홍콩 주둔 영국군의 군령권까지 쥐었던 홍콩 총독은 반환 이전까지 한 차례도 선거 없이 본국에서 임명되었다. 주민들에 의해 선출되는 시정평의회[5]는 입법권이 없었으며, 홍콩 입법국은 1843년 개원해 140년동안 임명제 자문회의였다가 1981년 입법권이 부여되었고 1985년 중영공동선언으로 홍콩 반환이 확정되고 난 뒤에야 직선제 개혁을 했고 그동안 입법권 없이 시정평의회에 직능선거구 단 한석이 배분되었다. 당초 계획에 의하면 60석 중 20석만 직선제로 선출하고, 나머지는 선거위원회와 직능선거구 의석이었고, 1995년 선출된 입법국 의원이 반환 이후까지 이어지는 일명 '직통열차' 방안이었는데, 데이비드 윌슨 총독이 대중 저자세로 일한다는 비판이 커지자 영국 정부가 홍콩 총독을 크리스토퍼 프랜시스 패튼으로 교체한 1992년에서야 선거연령을 낮추고 영국식 단일지역선구제를 도입하고 직능대표위원 선거권자 범위 확대, 임명직 구의원 폐지 등의 개혁을 했다. 이게 다 1984년 홍콩이 중국으로 반환하는게 확정된 이후에 후다닥 이루어진 개혁이다. 다른 영국의 해외 영토도 이런 식이지만 제국주의의 해체를 겪으면서 대부분의 경우 해외 영토 주민의 직접 선거로 구성된 의회에서 선출된 총리가 내정에 대한 실권을 맡고 총독은 실권이 없게 되었는데, 그런 점에서 영국 본국에서 내려보낸 총독이 반환 직전까지도 실권을 가졌던 홍콩은 특이했다.[6] 그런데 사실 영국도 다른 영국령 식민지들처럼 이미 1950년대부터 영국령 홍콩의 민주주의 도입에 대해서 여러가지 논의를 해오기는 했다. 마크 애이치슨 영 총독은 3분의 2를 주민 직선으로 선출하는 시의회를 설치하며 공무원에 중국계의 비중을 늘리는 개혁을 구상했으나 이러한 움직임을 포착한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영국에 지속적으로 홍콩 민주화를 추진하지 못하도록 전쟁도 불사하겠다며 압력을 가했다는 것이 문제였다.
제2차 세계 대전이후, 공산화된 중국은 홍콩에 서구적 민주주의가 도입되면 홍콩 병탄이 매우 어려워질 것임을 직감하고, 본토인 영국한테 계속해서 민주화를 하지 못하게 방해를 가했다. 특히 1950년 영국중화민국의 승인을 취소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승인[7][8], 1952년에는 영국-중국 수교 조약을 맺은 이후, 영국에 대해서 입김이 세진 중화인민공화국은 홍콩에 민주적 체제를 도입하지 말 것을 영국에게 지속적으로 요구하며, 민주화를 할 경우 군사적인 조치를 취할 것이라는 경고를 영국 측에게 지속적으로 전달해 왔다. 영국 입장에서는 중공군을 막으려고 4만 명에 달하는 영국군홍콩 신계지구에 파병해서 지켜야 하는 형편이었는데[9] 문제는 홍콩에 영국군 4만명 파병해봤자 마오쩌둥같은 또라이(...)가 홍콩에 수백만 중공군을 이끌고 침공하면 막을 수 없었다. 결국 중화인민공화국의 군사적 압력으로 인하여 결국 영국 정부는 그들의 요구대로 영국령 홍콩의 정치 시스템을 예전과 같은 비민주적인 시스템으로 유지해야 했고, 결국 홍콩의 민주화는 미뤄졌으며 중영공동선언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이 영국령 홍콩에 대해 직접적인 군사 행동을 취할수 없게 된 이후에나 영국이 홍콩에 민주화를 도입한 것이다.
제도적으로 보면 영국령 홍콩 시절의 정치 체제보다 현재의 정치 체제가 더 민주적인 면도 있다.(행정장관 간선 등) 하지만 중국의 최근 행보는 중국이 홍콩의 자치와 민주주의를 존중하고 추진할 생각이 없음을 홍콩인들에게 인식시켜 주고 있다.

3. 삼권



3.1. 입법부



총 의석 70석의 입법회(Legislative Council, LegCo)가 설치되어 있다. 지역 직접선거 의석과 직능 선거구 의석에 각각 35석이 배분되어 있으며 직능 선거구 의석 중 30석은 직능단체별 선거로 선출된다. 임기는 4년. 선출방식은 홍콩 입법회 선거 참조.
기원이 되는 기관은 식민지 시절의 입법국으로 1843년에 설치되었으며 1981년 형식적인 자문회의에서 입법권을 가지도록 변경하고, 60석 중 20석만 직선제로 선출하며 나머지는 선거위원회와 직능선거구 의석이었고, 1995년 선출된 입법국 의원이 반환 이후까지 이어지는 일명 '직통열차' 방안이 확정되었으나 1995년에 최후의 영국령 홍콩 총독인 크리스 패튼의 정치개혁으로 소선거구제 도입과 직능선거권자 범위 확대 등으로 완전 민선화되었고, 이에 대해 중국이 히스테리를 보였고, 결국 홍콩이 중국에게 반환되면서 기존 입법국을 해산[10]하고 현재의 입법회를 세우면서 완전 민선화는 물건너갔다.
가장 최근 선거는 2016년 9월에 있었으며 친중파 계열 정치세력이 40석, 민주파 계열 정치세력이 29석[11]을 차지했다. 이전에 비해 친중파 의석이 3석 줄고 민주파 의석이 2석 증가했으며[12], 무엇보다 민주파 중에서 홍콩 우산 시위를 이끌었던 학생운동가들과 홍콩 독립운동을 지지하는 급진 인사들이 당선되어 구 민주파 정당들이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다.
홍콩 정부 당국은 홍콩 독립운동에 대해서 당연히 재갈물리기에 나서고 있으며, 홍콩 독립운동을 주장하는 의원들 대해서 의원직 박탈을 고려하였고# 중국 베이징 중앙정부 당국은 홍콩 기본법 제104조 해석 규정을 통해 홍콩 독립운동을 주장하는 인사의 공직 임명을 불허하는 규정을 마련해 홍콩 독립운동을 주장하는 의원들을 퇴출할 수 있도록 했다.# 물론 이에 대한 반발도 크다.# 입법회에서 의원을 퇴출하려면 정족수 2/3의 동의가 있어야 하지만, 홍콩 고등법원에서 입법회의 동의 없이 홍콩 독립운동을 지지한 의원 당선자 2명을 자격 박탈하였으며, 13명도 심사 중이다.# 2017년 7월에 그 중에서 민주파 4명을 박탈했으며, 그동안 받은 봉급마저 환수당해 1인당 수억 원의 돈을 토해한다는 판결까지 나왔다.
2018년에 홍콩의 독립을 주장하는 정당의 해산을 검토하겠다고 밝혔지만, 시민단체, 야권에서 반발하고 있다.# 결국 9월에 홍콩민족당의 활동을 금지한다고 밝혔다.#

3.1.1. 국회 공성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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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범죄인 인도법안의 심의 현장. 2019년 5월 11일. 기사 그리고 이 법안은 '''2019년 홍콩 민주화 운동을 촉발시킨 트리거가 된다'''.
홍콩 입법회국회 공성전을 매우 많이 한다. 선거 제도 상 친중파에서 '''표는 적게 받는데 의원직은 훨씬 더 많기 때문에''', 표를 더 많이 받는 민주파는 국회에서 강경 수단을 택하게 된다.

3.2. 행정부




행정부의 최고 수반은 홍콩 특별행정구 행정장관(香港行政長官, HKSAR Chief Executive)으로 임기는 5년이며 1차에 한해 연임할 수 있다. 관저는 홍콩 예빈부이다. 현재 행정장관은 4대째로, 2017년에 당선된 친중파 캐리 람이며 전임자는 렁춘잉(梁振英, 표준중국어로는 량전잉)이다.
행정장관은 선거인단 1200명[13]에 의한 간접선거로 선출된다. 이 투표인단은 직능단체와 홍콩 입법회 의원 등으로 구성[14]되어 있는데 직능단체 투표인단은 홍콩 주민들이 직접 선출하...지만 유권자가 24만 명으로 극히 제한되어 있다. 즉 미국의 간선제와 비슷하면서 또 다르다.
2017년 3월 26일에 제4대 행정장관 선거가 오전 9시에 완차이구 소재 홍콩 컨벤션센터에서 실시되었는데, 장관 선거의 후보는 친중파 대표주자 캐리 람 전 정무사장(우리나라의 행정자치부 장관), 온건 친중파 존 창(John Tsang) 전 재정사장(우리나라의 기획재정부 장관), 민주파 우쿽힝 전 홍콩고등법원 판사 이렇게 3명이 후보로 출마했다. 투표 결과는 오전 11시에 발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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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리 람 후보는 강성 친중파로서 시진핑 중앙정부가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있으며, 현재 선거위원회 위원 중 70%에 달하는 579명을 확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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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창 후보는 온건 친중파로서 홍콩 정재계와 민주파의 폭 넓은 지지를 모으고 있다. 현재 선거위원회 위원 중 160명을 확보했다. 프링글스 캐릭터와 비슷하게 생겨서 프링글스 아저씨가 별명이며 젊은 층이 특히 좋아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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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쿽힝 후보 또한 중도로 민주파에 가까운 인물로서 현재 선거위원회 위원 중 179명을 확보했다.
2017년 3월 26일 오후 6시, 홍콩 영자신문 '사우스 차이나 모닝 포스트 (SCMP)'의 보도에 의해 행정장관 선거위원회 위원 (선거인단) 1,194명 중 과반인 601표를 크게 초과한 777표를 획득해 "캐리 람" 후보가 제4대 행정장관에 당선되었다. 매일경제의 보도에 따르면, 당선의 원인은 투표권을 가진 선거인단 1,200명 (6명 공석으로 1,194명) 중 800명이 친중 성향이기 때문이라고 보도하였다. 반면 반중 성향이 매우 강한 홍콩 청년층의 지지를 받은 존 창 후보는 365표를 얻는데 그쳤다. 홍콩 영자신문 '사우스 차이나 모닝 포스트 (SCMP)'의 보도에 따르면, "투표권이 없는 홍콩 시민들의 지지율이 람 전 시장보다 최대 30%포인트 높았던 창 전 사장이 패배한 이유는 중국 정부의 신임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하였다.
캐리 람 후보는 중국의 노골적인 지지로 당선된 만큼 중국의 홍콩에 대한 간섭도 더욱 심화될 것이라고 언론들은 전망하고 있다.
사실 홍콩은 2017년부터 행정장관 직선제를 도입하는 방안을 검토했지만, 중국 당국과 홍콩인들이 바라는 직선제안은 매우 달랐다. 중국 당국은 후보자가 중국 전인대의 승인을 얻어야 한다고 했고 홍콩인들은 자유 출마를 보장해야 한다고 보았다. 우산 시위의 원인이 이것이었다. 게다가 독립파들을 중심으로 홍콩의 정치개혁이 불가능하다는 말이 나왔으며, 민주파 정치인들은 행정장관 직선제 도입 약속을 어기는 것이라며 반발했다.#

3.3. 사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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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종심법원의 모습.
대륙법 체계를 사용하는 중국 대륙, 마카오와는 다르게 영미법을 따른다. 그래서 영국, 미국, 캐나다, 아일랜드, 호주, 뉴질랜드, 싱가포르 등과 법률이 비슷하다.
그리고 중국 대륙과 달리 삼심제를 채택하고 있다. 또한 중영공동선언홍콩기본법에 따라 사회주의 체제를 적용하지 않기로 해서 중국 본토의 법률은 특수한 경우[15]를 제외하고는 적용되지 아니한다. 대표적으로 최고법원인 종심법원(Court of Final Apeal)과 2심법원인 고등법원(High Court)과 1심법원인 구역법원(District Court)과 형사상 경범죄를 약식 재판하는 치안법원(Magisrates Court)이 있다. 이외에도 토지 및 부동산 분쟁을 담당하는 토지법정, 노사 분쟁을 조정하고 심판하는 노동법정, 특정 상품이나 전시품의 음란성 여부를 심판하는 음란물품법정과 소액청구법정, 자연사 이외의 사인을 심판하는 검시법원과 소년법원 등도 있다. 사법부 수장인 종심법원 수석법관은 행정장관이 지명하고 입법회의 동의를 얻어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임명한다.
홍콩 반환 이전에는 현재 2심법원인 고등법원이 최고법원(Supreme Court)이였고, 상고재판은 영국 본토에 있는 추밀원에서 담당했다. 홍콩이 반환된 이후에 영국 추밀원이나 중국 본토의 최고인민법원에서 판결을 내릴 수 없으니 홍콩에 3심법원을 새로 세운 것이다. 법률 해석도 홍콩 종심법원에서 담당하지만, 홍콩의 헌법인 홍콩기본법의 해석 등은 중국 본토의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에서 하고 있다.
외국인 판사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영국령 홍콩 시절 사법 인재의 풀이 적었기 때문에 영미권 법조인들을 초청해 온 것도 있고 홍콩에서 태어난 유럽계, 인도계 판사들도 있다. 영국령 시절에는 법조인 대다수가 외국인이었다. 2000년대 이후 법관은 현지의 중국계 홍콩인으로 대체되어 가면서 계속 그 수가 줄고 있다. 그러나 변호사들은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들이 충분히 많고 그 수가 늘고 있다. 공직의 경우 원래 식민지 때 백인들과 인도계가 독점하다 중국계에 오픈한 것에 가깝다. 그러나 종심법원 수석법관(한국의 대법원장 격)과 고등법원 수석법관은 다른 나라의 영주권이나 국적을 갖지 않은 홍콩인이어야 한다.

4. 청렴도


홍콩 경찰, 관료들은 청렴하기로 유명하다. '''염정공서(廉政公署(림징궁취''', 영문 두문자로 ICAC)란 행정장관 직속의 초법적 독립수사기구가 있어서 내부감찰도 있는데다 혐의가 있는 건 말이 필요 없을 정도고, 공무원이 자신의 재산 형성을 입증하지 못 할 경우에도 뇌물로 간주한다. 이러한 기관이 생길만 한 것이, 1970년대 홍콩 사회의 부정부패를 보다 못한 '''당시 홍콩인들의 요구로 만들어진 기관이기 때문에''' 신뢰도가 높을 수밖에 없다. 초기엔 경찰들이 수사권을 이유로 반대하기도 했지만, 현재는 홍콩행정장관이 직접 지휘한다.

5. 지방행정


홍콩은 18개의 로 이루어져 있다. 홍콩 섬에 4개, 구룡반도에 5개, 신계에 9개의 구가 설치되어 있다.
구청은 민정사무처(民政事務處, District office), 구의 수장은 민정사무전원(民政事務專員, District officer)이라 하는데, 민정사무전원은 홍콩 행정장관의 추천으로 중국 공산당에서 추인을 받아 인증서를 받은 후보 2~3인 중에서 각 구마다 있는 선거인단이 선출하는 간접선거 방식이다.
이 18개 구에도 구의회가 존재한다. 영어로는 District Council이라 하며, 1982년 영국령 홍콩 시절에 설치되었다. 구의회 의원은 대부분 민선으로 선출되지만 약간의 당연직 의원 및 행정장관 임명 의원이 존재한다. 구마다 의석이 조금씩 다르지만 총 의석은 507석이다. 구의회의 역할은 자문 수준에 불과해서 그리 권한이 크지는 않다. 임기는 4년이다.
모든 의석을 전부 직선으로 뽑는 것은 아니다. 2015년 선출한 홍콩 18개 구의회 정원은 458명이다. 그런데 실제 431명만 선출하였다. 원칙적으로 홍콩 구의회는 100% 전석을 뽑는 것은 아니며 대략 90%의 인원만을 선출한다. 나머지는 직능 대표라는 명목으로 간선제로 선출된다. 그런데 여기서 공석이 발생해 선거에 넘어올 경우에 한해 직선으로 선출한다. 이러다보니 4년마다 하는 구의원 선거 정원이 들쭉날쭉한다. 선출 방식은 소선거구제이다.

6.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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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홍콩 구의회 선거 개표를 위해 투표용지를 쏟아내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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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의 투표용지. 홍콩은 전자투표를 하는데, 터치스크린으로 된 투표 기계를 통해 후보자를 선택하면 '''후보자한테 Ⅴ(체크)표시'''를 한 투표용지가 인쇄된다. 인쇄된 투표용지를 투표함에 넣어야 투표로 인정된다. 투표 기계를 사용하기에 전자투표로 분류는 되지만, 사실상 '''프린터''' 이외의 기능이 없다.
홍콩의 선거는 보통선거이지만 유권자 등록 과정이 복잡해 제한선거제나 다름없다는 비판을 종종 받는다. 보통선거를 실시하는 어엿한 민주국가에서도 선거권 행사에 유권자 등록을 필요로 하는 경우가 많지만(미국 등), 홍콩에서는 유권자로 등록하려면 '''인두세를 내고''' 복잡한 양식의 등록 신청서를 제출해야 한다. 돈도 내고 등록신청 절차도 복잡하다보니 선거 유권자는 400만 명이 최대치인데, 홍콩의 성인 인구는 대략 600만 명 정도이다.
또한 선거의 제도적인 문제점으로 인해 실질적으로 보통선거와 평등선거 원칙이 잘 지켜지지 않는다. 예를 들면 행정부 수장인 행정장관을 선출하는 선거는 간접선거인데, 유권자가 각 직능단체별로 할당된 선거위원회 위원(선거인단) 1200명을 선출하고 이들이 별도로 선거를 치러 행정장관을 선출한다. 그런데 이 선거인단의 유권자가 24만 명으로, 홍콩의 유권자 수 중 일부에 불과하다. 선거위원회 위원도 중국 중앙 정부에 우호적인 직능단체(예: 중의사)의 의석 비중이 인구에 비해 지나치게 크고 중국 중앙정부에 적대적인 직능단체의 의석 비중이 낮을 뿐더러 전인대정협의 홍콩 대표처럼 대놓고 친중국적인 인사들이 당연직 선거위원으로 앉아 있다. 이런 식이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민심을 반영하기가 어렵고, 친중파가 아닌 사람은 당선되기가 어려운 구조를 가지고 있다. 지금까지 홍콩 행정장관으로 있었던 퉁치화(董建華)와 도널드 창(Donald Tsang, 曾蔭權), 렁춘잉, 현임 캐리 람 모두 친중파이다.
입법부 총선도 비슷한 문제가 있다. 입법부 의석 70석 중 35석만이 직접선거로 선출되고 나머지 35석 중 30석은 직능 선거구 의석이라 하여 행정장관처럼 직능단체별로 일정 의석을 부여받아 직능단체의 유권자들이 선출한다. 이 직능단체의 유권자 수도 상당히 제한되어 있다.(22만 명) 5석은 직능 선거구에 속하지 않은 나머지 모든 성인들이 구의원 중에서 선출한다. 실질적으로는 홍콩 행정장관 및 각 구청장, 홍콩 상공회의소 추천 인사가 해당 선거구에 출마하며, 이렇게 선출된 35명의 직능 선거구 의원들은 선출된 다음 해 3월에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의 추인을 받은 후에 단일 교섭단체를 구성하여 정식 의원으로 활동한다. 전인대 추인 이전까지는 법안 발의권, 예산 심사권 등은 있지만 면책 특권과 불체포 특권이 없고, 법안 표결권이 없는 '진공 상태'가 된다. 현재까지 홍콩 입법회 직능의원 35석 중에 전인대 추인을 못 받은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중국 전인대의 추인이 필요하기때문에 대다수는 친중파이고, 중국 입장에서 '예민해하지 않을 수준'의 민주파를 구색 맞추기로 끼워준다. 이들은 친중파가 언제나 의회에서 과반수를 차지할 수 있도록 하여, 과거 한국의 유신정우회와 비슷한 역할을 한다. 한편 나머지 35석을 뽑는 홍콩 입법회 선거도 친중파와 민주파 간 평등 투표가 되지 않아 친중파는 1명당 9만 표를 먿으면 당선인데 반해, 민주파는 17만 표 이상을 받아야 1명이 당선되는 '''차등선거'''이다.
지방선거 역할을 하는 구의회도 비슷해서, 구의회 선거의 '''1/3'''을 선거 없이 지명해서 앉히는데, 그 1/3 중 1/4 정도가 당연직 의원(특정 행정직을 맡음으로써 의원 자격을 가짐)이며, 나머지는 행정장관이 임명한다.
이러한 선거제도의 문제점으로 인해 홍콩의 정치구도는 친중파가 민주파에 비해 항상 우세를 점하게 되어 있다. 홍콩의 민주파는 행정장관 직선제화 및 입법회 선거의 완전 직선화를 계속해서 주장해왔으나[16] 중국 정부는 이를 들어주기는 커녕 설령 홍콩 의회에서 직선제 개헌안이 통과되더라도 중국 전인대에서 승인이 되어야 직선제 개헌을 인정할 수 있다고 못박아버렸다. 2014년엔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과반수 지지를 얻은 행정장관 후보자 2~3인을 내보내고 홍콩 주민이 이 중 1명을 직접 선거로 뽑는 행정장관 직선제가 제안된 바 있는데, 전국인민대표대회는 민주파·반중파 인사가 홍콩 행정장관 선거에 출마하는 것을 반길 리가 없으니 직접 선거를 하더라도 친중파 후보 1·2·3 중 한 사람을 뽑어야 하여, '어용 선거'나 다름없었고, 홍콩 민주파는 이 무늬만 직선제(사실상 임명)에 반발하고 있다. 결국 직선제 도입은 민주파와 친중파 간 의견 충돌로 인해 무산되고 2017년 행정장관 선거 역시 간선으로 치러졌다. 입법부에서도 홍콩 야권은 의원 전원을 보통선거로 선출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데, 이것 역시 대륙 정부가 듣지도 않고 있다. 대륙 정부의 입장은 일단 홍콩 행정장관 직선제를 무사히 치른 다음 논의해 볼 사안이라는 것이다.
이런 식이라 홍콩의 선거제도는 민심을 반영하기 힘들 뿐더러, 중국 중앙정부가 선거에 간섭할 수 있는 장치가 많아 친중파가 구조적으로 민주파에 비해 우위를 점하게 된다. 이 때문에 홍콩 선거 투표율은 '''40%'''가 매우 '''높은''' 투표율이다. 등록 유권자 대비 투표율은 2016년 총선에서 58%가 최고인데, 전체 홍콩 유권자가 630만 명인데 비해 유권자 등록 수가 377만 명으로 과반수를 간신히 넘는 수준이라 전체 환산 투표율은 고작 35% 수준이다. 선거 유권자 등록하는 데 돈을 내야하고, 투표하는데 내가 지지하는 정당과 남이 지지하는 정당의 1표 가치가 다른 상황에서 투표에 열의를 갖지 않는다.
그런데 2019년 홍콩 구의회 선거에서 '''71.23%'''라는 이례적인 고 투표율을 보여주었다. 그 동안 쌓인 불만이 터져나온 것이다.

6.1. 홍콩 행정장관 선거



6.2. 홍콩 입법회 선거



6.3. 홍콩 구의회 선거



6.4. 전국인민대표대회 선거


홍콩은 중국의 행정구역 중 하나로서 5년마다 한 번씩 중국의 입법기구인 전국인민대표대회에 자신들을 대표할 인민대표자들을 선출한다. 홍콩은 사회주의 체제가 적용되지 않는 일국양제에 따라 인민대표대회가 없으므로 별도의 선거인단을 꾸려 선출한다. 홍콩의 경우 약 1,500명 ~ 1,600명 사이의 선거인단에서 36명을 선출한다.
가장 최근에 있었던 2017년(제13회) 전인대 대표 선거에서는 다음과 같은 이들이 선거인단이었다.
  • 2012년(12회) 전인대 홍콩 선거인단
  • 정협 제12회 홍콩 대표
  • 행정장관 선거인단(본인 선택에 따라 포기 가능)
  • 홍콩 행정장관
선거인단은 선거마다 조금씩 달라지지만 저 선거인단 중 대다수가 친중파이며, 민주파도 행정장관 선거인단의 일부를 차지하지만 비율이 낮다. 선거에서 민주파는 한 번도 당선된 적이 없다.
이렇게 선출되어 파견된 홍콩의 전국인민대표대회 대표자들은 정당에 관계없이 무소속으로 활동한다.

7. 정당


홍콩은 중국과는 달리 정당 설립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으며, 상당히 많은 정당들이 의회 의석을 차지하고 있다. 홍콩의 정당은 그 어느 정당도 의회 의석 과반수를 차지한 적이 없으며, 일반적으로는 성향이 맞는 정당들끼리 특정 법안이나 정치적 이슈에 대해 비슷한 태도를 취하고 무소속으로 정무에 임하는 행정장관에 대한 지지, 반대 등을 나타낸다.
홍콩의 정당들은 중국에 대한 입장, 민주화에 대한 입장, 홍콩의 지위 등에 대한 입장에 따라 친중파, 민주파, 본토파 등으로 분류된다.

7.1. 친중파



7.2. 민주파



7.3. 본토파/독립파



8. 민주화 시위와 본토 정부와의 갈등


2047년까지 홍콩은 기본법 및 중영공동선언에 따라 체제를 보장받으며, 그와 별개로 사회주의 체제를 적용하지 않는 별도 행정 구역인 특별행정구로서 본토의 각종 규제들도 적용되지 않고 100% 자본주의 시스템으로 돌아가며 중화인민공화국 영토이되 자체적인 통치를 하고 있다. 2007년 반환 10주년을 맞아 후진타오 정부가 "홍콩, 마카오 일국양제 지속"으로 천명했으며 시진핑 현 국가주석은 '''일국양제가 홍콩의 번영을 이룩했다'''며 일국양제의 적극 실천을 피력했다.관련기사 그러나 갈수록 중국 공산당의 입김이 강해지고 있어 홍콩의 민주주의는 쇠퇴한다는 우려가 많다. 중화민국 관련 뉴스에 관한 중국 공산당의 보도지침 하달, 홍콩 기본법 23조[17] 관련 논란 등 일국양제 원칙이 조금씩 손상되고 있다는 평이 나오고 있다. 아예 중국 공산당은 2014년 6월 '홍콩 특별행정구에서의 일국양제(一國兩制) 실천’ 백서에서 '공산당이 홍콩에 대한 통치권을 가진다'라는 언급을 하여 홍콩의 자치권을 제대로 존중할 의사가 없고 일국양제는 껍데기에 불과함을 밝히기도 했다. 관련 기사
중국 대륙중국인들과 비교해 역사적 경험이나 기본적인 시민교육수준의 차이가 크기 때문에, 홍콩 시민들의 정치 의식은 넘사벽으로 높은 편이다. 천안문 사태를 공개적으로 옹호하면서 중국 공산당의 정치 탄압을 비난하고 '중화인민공화국에도 민주주의가 실현되어야 한다'라고 주장하는 쓰투화(司徒華)[18]라는 사람마저 있었을 정도로 중국 공산당 입장에서는 어떤 식으로든 홍콩의 이런 진보적인 성향을 억누르려고 시도하고 있다. 게다가 홍콩 정치권 내에서도 갈수록 진보 성향의 민주파보다는 친중파의 비중이 높아지고 있는 실정이라 홍콩 민주주의의 미래는 암울해지고 있다.
법리적으로 일국양제 원칙이 2047년이라고 폐지될 가능성은 적지만[19], 만약 중국 공산당이 현 추세를 유지하며 행정장관 선거나 홍콩 사법부의 임명에 대한 간섭을 계속할 경우 사실상 일국양제는 껍데기만 남고 홍콩의 민주주의나 자유주의의 실질적인 요소들은 사라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위험성이 있었다.
때문에 계속 시위를 해왔고 결국 2014년 홍콩인들은 이러한 일국양제를 훼손하려 하는 중국 공산당의 방침에 반대하여 집단행동을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우산 혁명이다. 우리에게는 우산 시위가 잘 알려져 있지만 그 이전에도 민주 시위가 상당히 자주 일어나는 편이었다. 2011년 8월 리커창 중화인민공화국 부총리가 홍콩 방문 도중 시위대와 맞닥뜨리는 경우도 있었고, 2013년 6월말 보아의 페이스북으로 7월 1일에 열리는 홍콩 돔 페스티벌의 불참을 요구하는 탄원성 댓글이 올라오기도 했다. 기사 1 기사 2
홍콩에서는 이런 식으로 중국 공산당이 민주주의/자치 보장을 안 해준다면 차라리 떨어져 나가겠다는 홍콩 독립운동이 있다. 지지자들은 아직 적은 편이지만 대학이나 중고등학교에 확산되고 있다는 점에서 중국 공산당과 홍콩 정부가 긴장하는 중이다. 물론 국제적으로 보는 눈이 많아 대륙에서 하듯이 무조건적으로 때려잡기보단 홍콩인들을 달래는 방식으로 무마할 가능성이 높다. 물론 중국 대륙으로 퍼져서 광둥 성의 도시들인 광저우, 선전 등 본토 연안도시들까지 이런 민주화 요구가 확산되거나 더 나아가 광동 분리 움직임이 보이면 즉각 반국가분열법을 적용, 때려잡는 게 가능하다. 본토는 국제사회 간섭이 덜하기 때문이고 중화인민공화국 공안부는 항시 대기 중이다. 하지만 2015년 이후 경제난으로 통치 기반이 흔들리기 시작하는 공산당이 언제까지 현재처럼 1당 독재로 대륙인들이라고 마냥 윽박지르기도 어렵다.
홍콩 독립운동을 주장하는 의원 2명이 자격을 박탈당했고, 나머지 13명의 독립 성향 의원들도 홍콩 정부가 조사중이다. 독립주장은 홍콩 기본법을 위반하는 것이지만 한편으로 그에 대한 의원직 박탈은 홍콩 사람들의 의사를 무시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홍콩 시민과 홍콩 정부 간, 그리고 더 나아가 공산당과 홍콩 간 갈등이 고조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 민주파에 대해서 중국 공산당이 내륙여행 제한 조치를 해제, 전면 자유화하는 등 민주파와 화해 모드에 들어갔다. 이는 중국 공산당이 홍콩의 민주주의 및 항인치항(港人治港, 홍콩인이 홍콩을 통치한다)이라는 현실을 어느 정도 인정하되, 대신에 홍콩에 대한 '''주권'''만큼은 강력히 행사하고 홍콩 독립운동에 대해서는 극소수 극우의 망발로 고립시키겠다는 의도가 강하다고 볼 수 있다.
중국이 의도했던 1국가 2체제는 정치적 측면보단 경제적 측면이 강하다. 즉 사회주의가 아닌 전면적인 자본주의 경제 체제를 가진 별도의 행정구역들을 만들고 중국 대륙과 분리된 홍콩/마카오 특별행정구와 본토 간 무역을 활발히 하며 중국 국내와 달리 외국인이 아무런 법적 규제를 안 받는 곳[20]을 만들어 돈을 벌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완전한 자치나 완전한 민주주의를 약속한 건 아니다. 우산혁명 등의 충돌은 그러한 일국양제에 대한 해석의 차이로 일어나는 갈등이다. 중국은 홍콩에 경제 자유를 부여했지 완전한 자치나 완전한 민주주의를 허락하진 않았다. 위에서 나타나 있듯 이전 영국령 홍콩도 완전히 민주주의적인 정치체제나 자치를 보장했다고 보기 어려웠기 때문에 중국 공산당의 논리가 먹혀들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2019년 10월 31일 끝난 중국 공산당 4중전회에서 홍콩만 콕 집어 정책 전환을 강조했다. 이에 홍콩국가보안법같은 강경 조치를 시도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된다. 기사 2019년 11월 1일 오후에 '''중국 공산당 명의'''로 선춘야오(沈春耀) 전국인민대회(전인대) 상무위원회 법제공작위원회 주임이 발표했다. 선 주임은 홍콩 문제에 대해 "당연히 4중전회에서 토론한 중요한 내용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는 중앙이 헌법과 기본법에 따라 특별행정구에 '''전면적 통제권을 행사'''하는 제도를 완비할 것"이라고 말했다. 기사 이렇게 대놓고 중국 공산당이 '''홍콩 병탄'''을 선언한 것은 사상 처음이다. 2020년 5월 28일, 결국 이른바 '홍콩보안법'이 가결되었다.

[1] 점수가 낮을수록 부패하다고 국민들이 인식하는 나라. 완전청렴은 100점, 완전 부패는 0점, # [2] 국경없는 기자회 기준, 수치가 높을수록 언론 자유가 없는 나라. 언론자유 최상은 0점, 언론자유 최악은 100점, # [3] 점수가 높을수록 민주주의가 발달된 나라. 가장 발달된 국가는 10점, 최악은 0점[4] 최근 중국과 홍콩 정부는 홍콩이 일국양제에 따른 중국의 특별행정구로, '하나의 중국'으로 사실상 중국에 속해 있는 고도의 자치가 보장된 지방 행정구이기 때문에 독립국가와 같은 일반적인 삼권분립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발표한 바 있다. 중국 정부와 홍콩 정부는 홍콩의 정치 체계는 행정부가 주도하고 입법회, 사법부가 그 권력을 견제하는 일종의 홍콩만의 정치체계라고 주장한다. 물론 홍콩인들도 식민지 시절부터 지금까지 권력분립 원칙이 제대로 안 지켜져왔다고 생각하지만, 지금껏 홍콩 정부는 삼권분립에 의해 굴러간다고 배웠던 홍콩인들에게는 상당히 낯설고 수용하기 어렵다.[5] 반환을 앞두고 해산됐다.[6] 또한 그때까지도 총독을 영국인 중에서 임명했는데 이 역시 특이한 사례이다. 캐나다에서는 1952년 제1대 튜니스의 알렉산더 백작 해럴드 알렉산더, 호주에서는 1965년 제1대 De L'sle 자작 윌리엄 시드니, 뉴질랜드에선 1967년 Ballantrae 남작(일대귀족) 버나드 퍼거슨을 끝으로 호주인 중에서 총독을 임명했다.(영국 국왕이 호주 총리의 추천을 받아 임명하는건 똑같았다.)[7] 이는 영국이 중화인민공화국으로부터 홍콩을 빼앗길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8] 중화민국UN에서 쫓겨난 건 1971년으로 한참 후의 일이다.[9] 홍콩 신계 개발이 매우 늦었던 원인이다. 신계에는 영국군 기지가 50여 곳이나 있었다. 그나마 가장 개발이 빨랐던 곳이 지금 홍콩 국제공항이 있는 란타우 섬이었다.[10] 이 과정에서 저항한 민주당 우치와이 의원 등은 체포됐다. 이를 주관한 사람은 당시 보안장관이자 현 신민당 대표인 레기나 입.[11] 홍콩 독립운동에 호의적인 정치인들을 홍콩에서는 본토파, 혹은 독립파라고 하는데, 이들을 빼면 23석이다. 민주파 정치인 대부분은 홍콩 독립운동에 부정적이기에 민주파에서 이들을 제외하는 경우도 많다.[12] 허나 위에서 언급한대로 민주파에서 독립파를 빼버리면 오히려 4석이 줄었다. 독립파가 6석이나 가져간 탓.[13] 반환 당시에는 고작 400명(...). 그러다가 800명이 되었고, 2010년부터 1200명으로 증가.[14] 자세한 것은 홍콩/행정조직을 참조.[15] 거의 중국 본토와 거래를 할 경우나 홍콩인이 중국 본토에서 문제를 일으킬 경우, 혹은 중국계 홍콩인의 국적 문제.[16] 홍콩 기본법 제 45조와 제 68조에서는 홍콩에도 궁극적으로 행정장관(45조)과 입법회 입법위원(68조)에 대한 완전한 보통선거를 실현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그러나 제 45조에서는 "홍콩특별행정구의 실제 상황과 순서점진의 원칙에 근거하여 규정하며 광범위한 대표성이 있는 지명위원회가 민주적인 절차에 따라 천거한 후 보통선거의 방식으로 선출하는 목표를 실현한다."라고 규정하고, 제 68조에서는 "홍콩특별행정구의 실제 상황과 순서점진의 원칙에 따라 규정하며 최종적으로 전체 의원을 보통 선거로써 선출한다는 목표를 달성한다."라고 규정하여, 현행 행정장관 간선과 반쪽자리 직선제 총선을 과도기적 방법으로 규정하면서도 '실제 상황'이라는 애매모호한 문구를 넣어 중국 정부나 홍콩 정부에서 간선제를 유지할 근거로 활용할 수 있게 했다. 물론 민주파에서는 이를 근거로 완전 직선을 요구한다.[17] 보안 관련 법안으로 조항은 있지만 아직 처벌 법령이 없어 이걸 어겼다고 처벌할 수는 없다. 대륙 정부는 국가안전법을 제정해 이를 어기는 자를 처벌하려 하지만 정치 탄압 도구로 이용될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이 많아 홍콩 주민들이 격렬히 항의하고 있다.[18] 교사 출신으로 영국 식민지 시절에는 식민지적인 교육에 반대하였다. 2011년 1월 2일 향년 79세로 타계하였으며, 워낙 홍콩 시민들에게 명망이 높아 친중파인 행정장관마저도 공개적으로 추도했다. 1월 29일에 장례식이 열렸다.[19] 전술한 것처럼 프레임 자체는 일국양제 지속으로 중국이든 홍콩이든 영국이든 법을 해석하는 법조계에서 2047년 이후 자동 연장으로 본다. 물론 특별행정구 설치로 인해 사회주의 체제 자체는 아예 적용되지 않는다.[20] 당장 마케팅에 필요한 페이스북, 트위터, 유튜브 등은 중국 대륙에서는 막혀있으며 이런저런 사회주의적인 규제들 때문에 중국 대륙에 외국인이 직접 진출하는 건 불가능하다. 즉 특별행정구를 어차피 중국 진출의 베이스 캠프로 만들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