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 서울 올림픽/개회식
1. 개요
개회식은 한국 시간으로 1988년 9월 17일 토요일 오전 10시 30분에[1] 시작되었는데, 당시까지만 해도 올림픽 개회식이 보통 오후 3시경에 시작되던 것에 비하면 이례적인 것이었다.[2] 이러한 개회식 시간 조정에는 당시 국가 이미지 모토인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 맞춰 아침에 개막을 했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더 주요한 가설로는 미국 내 올림픽 방영권을 독점하고 있는 NBC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였다는 얘기가 있다. 그 덕분에 개회식 당일이 임시공휴일로 지정된데다[3][4] 주간 정파없이 연속으로 방송이 진행되는 진풍경도 볼 수 있었다.[5][6] 그리고 서울 올림픽은 '''낮에 개회식을 진행한 마지막 하계 올림픽'''이기도 하다.[7]
다음 올림픽 개최국이기도 한 스페인의 소피아 왕비와 펠리페 왕세자가 개회식에 귀빈으로 참석했다. 이들을 포함해 총리급 이상의 귀빈으로 일본의 다케시타 노보루 총리[8] , 룩셈부르크의 장 대공, 감비아의 바카리 다르보 부통령, 스위스의 장파스칼 델라무라즈 부통령, 말레이시아의 아즐란 샤 부국왕이 참석했다. 이외에도 나카지마 히로시 WHO 사무총장, 토머스 브래들리 LA 시장, 그 해 미스 유니버스였던 폰닙 낙히란까녹[9] , 태국의 티엔차이 시리삼판 부총리, 브루나이의 수프리 볼키아 왕자, 영국의 콜린 모이니헌 체육장관, 룩셈부르크의 기욤 왕자, 그리스 전 국왕 콘스탄티노스 2세, 나카지마 겐타로 일본 문부과학상, 스즈키 슌이치 도쿄도지사 등이 개회식에 참석했다. 참석인사들 중 정상급 인사라고 할만한 사람은 일본 총리 다케시타 노보루 외에는 거의 없었다. 대부분의 국가들은 주로 각료급 인사를 파견했다.
올림픽에서 가장 상징적인 의식인 개회식에 정상급 인사가 다수 불참한 것은 세계 주요국이 몰린 미주와 유럽에서 아시아는 여전히 이동거리가 먼 대륙이었던데다 이 당시만 해도 세계 사회 내에서 대한민국의 존재감이 매우 미약했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대한민국의 존재감이 꽤 높아졌지만 올림픽 당시만 해도 국력도 약하고 영토도 작았으며 올림픽 개최일 기준으로 몇십년 전 치열한 전쟁을 치르고 가난에서 겨우 벗어난 아시아의 약소국이었기에 각국 정부가 파견 인사의 급을 낮췄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올림픽 이후 대한민국의 위상이 수직상승하면서 이야기가 달라지게 된다. 30년 뒤 2018 평창 동계올림픽의 경우 정상급 인사들이 다수 참석하였다.
개회식 당시 장내 아나운서에는 KBS에서 재직했던 원종관[10] 아나운서가 한국어 장내방송을 맡았다. 원종관 아나운서 외에 여성 아나운서 2명이 프랑스어와 영어 장내방송을 진행했다. 영어 방송 사고와 관련해서는 아래 '''여담''' 참조.
2. 식전행사
역대 올림픽 사상 최초로 주경기장 밖에서 개회식이 시작되었다. 한강에서 열린 '강상제'는 세계인들이 강을 통해서 잠실로 모이고 있음을 연출한 것으로, 전통민요를 배경음악으로 수상스키와 연날리기 등을 선보였다. 다음으로 주경기장으로 시선을 돌리면, 거대한 풍선으로 장식된 세계수가 우뚝 서서 관중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주경기장에서는 길놀이를 통해 손님들을 맞이하기 위한 '터씻기'를 행한다. 이후 강상제에서 운송되었던 거대한 용고가 조선 왕조의 군악대의 호위를 받으며 경기장으로 입장한다. 세계수 앞에서 해맞이를 위해 용고를 치자, 거대한 풍선들이 하늘로 떠올라 세계수는 해체되고 성화대가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성화대가 모습을 드러낸 후, 한국의 선녀들과 그리스의 여신들이 만나서 동서양의 조화를 상징하는 무용 '천지인'을 선보인다.
다음으로는 대규모 매스게임을 선보였다. 매스게임에는 서울시내 실업계 고등학교(서울여자상업고등학교 외) 학생들이 동원됐다고 한다.# 이처럼 개회식 예행연습을 위해 강제로 1년여간 단축수업을 받고 또한 방학 때 보충수업을 받는 등,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굉장히 큰 문제로 대두되었을 부분도 있지만, 당시 교육현장 자체가 권위주의 일변도인 데다[11] 국가적으로 워낙 거국적인 행사였기에 말이다.[12] 학생들은 일사분란하게 움직여 '88', 'Welcome'의 큰 글자 모양을 만들어 관객들에게 연출한다.
3. 공식행사
올림픽 팡파레가 울리자, 주최국 대한민국의 국가원수인 대통령 노태우와 그의 부인 김옥숙이 박수갈채와 함께 귀빈석에 입장하여 모습을 드러냈다. (아래 '''여담'''에 따르면 노태우는 대통령과 영부인을 겸직한 것으로 소개된다. 물론 진행상의 실수였다.) 'Welcome'의 모양을 만들었던 학생들은 '어서오세요', 올림픽 오륜마크, 서울올림픽 공식 휘장의 순서로 모양을 바꾸며[13] 놀라운 매스게임을 선보였다. 이후 올림픽 기수단을 선두로 선수단이 입장했다.
개회식 입장은 한글 ㄱㄴㄷ순대로 진행되었으며, 그에 따라 가나가 2번째[14] , 홍콩이 159번째로 입장했다. 다만, 국가 간의 관계 및 사정에 따라 순서가 뒤죽박죽 되는 경우가 있었다. 대표적으로 이란의 경우 원래 입장순서가 이라크 다음으로 배정되었으나, '''이란-이라크 전쟁'''의 앙금 때문에 몇 나라 뒤로 순서를 미루기도 했다.[15] 한국은 개최국은 마지막에 입장한다는 전통에 따라 맨 마지막에 입장했다. 70년대까지는 열병식처럼 대열로 줄맞춰 다소 경직된 분위기로 입장했으나, 몬트리올 올림픽을 기점으로 손을 흔들고, 국기를 흔드는 등 자연스럽게 입장하기 시작했다. 다만 개회식 영상을 보면 선수단 입장 시 동선이 잘 정리되지 않은 탓인지, 몇몇 국가의 선수들은 잠깐씩 멈춰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선수단이 모두 입장한 후, 박세직 조직위원장의 개회사와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IOC 위원장의 환영사가 있었다. 도중에 사소한 해프닝이 있었는데, 사마란치 위원장의 말이 다 끝난 줄로만 알고 아나운서가 대통령의 개회선언이 있을 것이라며 안내방송을 내보낸다. 이 탓에 사마란치 위원장이 한국어로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는 도중 말이 끊기고 만다. 당황스러웠겠지만, 사마란치 위원장은 대통령에게 개회선언을 부탁하는 말까지 마무리한다.[16] 마지막으로 '서울은 세계로, 세계는 서울로!'를 한국어 발음으로 외쳤다. 이후 노태우 대통령이 개회를 선언했다.
올림픽 최종 성화 점화주자가 마지막에 바뀌기도 했다. 원래 누구가 다 예상하는 것처럼 손기정이 점화할 것으로 보였지만, 너무 뻔하고 드러났기 때문에 정부에서 막판 방침을 바꾸게 된다. 손기정은 최종 성화 봉송주자가 되었다. 정확히는 끝에서 2번째다. 손기정이 성화를 들고 주경기장으로 들어온 후 1986 서울 아시안 게임 금메달리스트였던 중거리 육상선수 임춘애에게 넘겼다. 그리고 임춘애가 트랙을 잠시 돌다가 점화자에게 넘긴 것. 그리고 성화 점화자는 당시 노태우 정부의 표어였던 "위대한 보통사람들의 시대"에 맞춰 평범한 시민들이 점화하게 되었다. 바로 건국대학교에 재학중이던 마라토너 김원탁,[17] 섬마을 학교[18] 체육 선생님이던 정선만[19] 과 서울예술고등학교 무용과 재학생이던 손미정[20] 이다. 올림픽의 관례였던 성화 최종주자가 성화를 점화하는 것을 처음으로 깨뜨린 대회다. 이때 최종 성화 봉송주자였던 손기정 옹이 정말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면서 펄쩍펄쩍 뛰며 성화봉송을 했다. 일장기 말소사건을 생각하면 눈시울이 붉어지는 대목[21] .'''''나는 제24회 근대올림픽대회를 경축하면서, 서울올림픽대회를 개최하는 것을 선언합니다.'''''
-노태우 대통령
위의 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2분 3초경) 올림픽 사상 최초로 '''계단이 아닌 방식(엘리베이터)으로 성화대를 점화'''한 올림픽이다. 이전부터 그리고 당시로서는 최근이었던 1986년 서울 아시안 게임까지도 거의 대륙별 스포츠 권위 대회에서 사실상 성화대 옆에 계단이 놓여져 있었고 이를 올라가 불을 붙이는 방식이었으나, 서울 올림픽 때 최초로 엘리베이터를 도입한 후 새로운 점화 방식을 고안하는 것이 개회식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가 되는 전통이 생겼다.[22]
개회식 기획자 이어령에 따르면 실은 그건 현대 문명의 기계식 엘리베이터가 아니라 보이지 않게 피아노줄과 도르래를 이용해서 두레박처럼 끌어올린 것이다.#
성화 점화 후 농구 대표선수 '''허재'''와 핸드볼 대표선수 손미나가 선수대표로서, 이학래가 심판대표로서 선서를 진행한다. 선서 후 공식행사의 최종 순서로 주최국 대한민국의 국가인 애국가가 장내에 연주되었다. 이렇게 공식행사는 마무리되고, 식후공연의 진행을 위해 선수단들은 모두 퇴장했다.
4. 식후공연
식후공연은 스카이다이빙 쇼로 막을 열었다. 스카이다이버들이 공중에서 오륜마크를 그린 후 올림픽 경기장 안으로 정확하게 착지하여 모두의 탄성을 자아냈다. 스카이다이버들이 강하하는 순간 경기장에는 한국환상곡이 울려퍼진다. 한복을 입은 여성들이 축제 때 치는 거대한 차일을 들고 나와 춤추며 흔듦으로써 이들을 환영했다. 이후 조선 왕조의 궁중무용인 화관무를 선보여 태평성대가 도래했음을 보여준다. 태평성대가 지나면 혼돈이 오기 마련이다. 다음 공연 '혼돈'은 무용수들이 각국의 민속 가면을 들고 나와 어지러운 군무를 추어 혼란스러운 상황을 연출한다. 마지막에는 거대한 한국의 전통 가면들이 개회식장 지붕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혼란이 종식되고 우리 사이의 벽을 허물기 위해 수많은 태권도 군단이 한국의 전통 무술인 태권도 퍼포먼스를 선보인다.
벽을 허문 뒤, 어느 어린 소년이 굴렁쇠를 굴리며 경기장으로 입장한다. 개회식에서 가장 인상 깊던 장면으로 뽑히는, 이른바 "굴렁쇠 소년"이다[23] . 행사 도중 윤태웅[24] 이라는 7세 소년(당시 초등학교 1학년)이 홀로 굴렁쇠를 굴리며 주 경기장 한가운데로 들어오는 퍼포먼스였다. 약 2분 동안 경기장에 적막이 흐르는 가운데, 경기장 한 가운데로 굴렁쇠를 굴리면서 등장한 소년이 관중에게 손을 흔든 이 퍼포먼스는 강한 인상을 남기며, 오늘날까지도 서울 올림픽의 상징으로 남았다. 전쟁 이미지가 강했던 한국에 평화의 이미지를 부각시키고 동서 진영의 화합과 평화를 소망하는 의미에서 기획된 것이라고 한다. 기획한 사람은 당시 올림픽 개회식 준비에 참여하던 이어령. 올림픽이 끝난 후 문화부 장관으로 영전한다.
16년 뒤에 열린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의 개회식에서 스타디움 바닥이 에게 해(海)를 상징하는 호수로 변하며 한 소년이 홀로 대형 종이배를 타고 물을 가로지르는 모습을 연출하여 많은 이들에게 회자되었는데,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의 개회식과 폐회식의 총감독을 지낸 예술가 디미트리스 파파이오아누에 의하면, 아테네 올림픽의 개회식 연출을 위해 과거 여러 올림픽의 개회식을 참고하던 도중 1988년 서울 올림픽의 개회식 장면에서 어린 소년이 혼자 굴렁쇠를 굴리며 그라운드를 가로지르던 순간이 자신에게 특별한 감명을 주어 아테네 올림픽에서 어린 소년이 종이배 모양의 보트를 타고 물을 가르지르던 장면의 모티브가 되었다고 밝혔다. 그리고 이 굴렁쇠 소년은 2018 평창 동계올림픽 개회식에 등장한 다섯 아이들의 모티브가 된다.
굴렁쇠 다음에 나오는 '새싹'(바람개비)은 잠실종합운동장 바로 옆에 있는 서울잠전초등학교와 서울삼전초등학교의 한 학년이 맡은 것이다. 다음으로는 우리의 민속놀이 중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고싸움놀이'를 선보였다. 승패를 가르는 대신, 모두의 협동을 통한 화합을 보여준다. 고싸움놀이는 2년 전인 1986 서울 아시안 게임 개막식에서도 등장한 바 있는데 아시안게임과 올림픽 개막식 모두 광주 칠석동 고싸움놀이 보존회가 시연을 준비했다.
마지막 순서였던 한마당에서는 모두가 다 알고 있는 '''손에 손잡고'''를 코리아나가 열창했는데, 여러 나라의 사람들이 자국의 의상을 입고 한데 어우러진 것은 물론이고 역대 올림픽 마스코트, 개회식 전출연자들까지 총집합해 최고의 퍼포먼스를 보여줬다. 특히 뮌헨 참사가 일어난 비극적인 대회의 마스코트인 '''발디''', 보이콧으로 얼룩졌던 직전 3개 대회의 마스코트인 '''아미크, 미샤, 샘 그리고 호돌이가 함께 어울리는 모습'''은 말 그대로 전세계의 화합을 상징하는 것 그 이상이었다. 가히 '''최고의 퍼포먼스'''라는 말 외에는 다른 수식어를 찾을 수 없을 정도.
개회식 폐식통고가 끝난 후 그라운드에 모인 개회식 출연자들이 관중들의 퇴장하는 동안 박수를 치며 동요 고향의 봄을 불렀고 경기장 밖 한강 둔치에서는 폭죽이 터지면서 올림픽 개막을 자축했다.
5. 여담
5.1. 대통령 겸 영부인 노태우
(동영상의 29:33 부터)
올림픽 개막식에서는 개막선언을 하는 대통령과 IOC위원장은 통상 나중에 '입장'하는 것이 관례이다. 가장 중요한 인물은 파티 시작후에 모두가 기다리는 가운데 입장하는 것이라는 서양권의 전통문화에서 기인한다.
문제는 대통령과 영부인의 입장을 알리는 영어 안내문이 다음과 같다는 것이다.
'''Ladies and gentlemen, the President and First Lady, Noh Tae-woo [25] of the Republic of Korea, is now entering the stadium.'''
즉, '''신사숙녀 여러분, 대통령 겸 영부인인 대한민국의 노태우께서 경기장에 입장하고 계십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아마도 의도한 표현에서는 '''\[...\] the President Noh Tae-woo of the Republic of Korea, and the First Lady''' are now entering \[...\] 이었으나 모종의 이유로 아나운서가 잘못 발음한 것이다. 군사독재 시절이면 엄두도 내지 못할 실수였을텐데 당시에 이것이 문제시되지 않았던 것을 보면 너그럽게 넘어간 모양이다.
5.2. 비둘기 통구이 사건
성화 점화 때 의도치 않은 사고가 발생한다. 평화의 상징으로 풀어놓은 비둘기들이 성화대에 앉아 있었는데 성화가 점화되면서 비둘기들이 불길에 휩싸이는 것처럼 보였다. 여러 마리가 불에 타 죽은 듯이 알려졌으나 사실 불에 타 죽었을 가능성이 있는 비둘기는 단 한 마리다. 후술되어 있지만 그것도 개회식 기획자인 이어령은 부정하고 한 마리도 죽지 않았다고 말했다. 대부분의 비둘기들이 성화대에 불이 붙여질 때 불길이 닿지 않는 외곽 난간에 있었고 성화대 안쪽 불 붙는 곳에 있었던 건 한 마리 뿐이다.
굳이 비둘기가 불탄 이유를 꼽자면, 서울올림픽의 성화대가 이전 대회와는 달리 크고 화려해서 새들이 앉기에 좋았기 때문이다. 앉아 있는 비둘기가 사람 마음을 알아주고 날아가는 것도 아니고 성화 점화 순서는 닥쳤으니 할 수 없이 불을 붙였다.
사실 올림픽 비둘기의 참사는 비단 서울올림픽만의 문제는 아니다. 비둘기 퍼포먼스는 이전부터 동물학대 논란이 많았다.[26] 허나 서울올림픽에서 카메라 각도상 비둘기들이 타죽는 듯한 모습이 보여졌기에 화제가 많이 됐다. 비둘기가 앉을 것이라고 예측을 했다면 분명 성화대에 어떠한 장치를 해두었을텐데, 결국 점화 방식이 파격적인 변화를 가져왔음에도 이 사건으로 오점을 남겼다. 훌륭한 개막식이었음에도 이 장면 하나로 폄하하는 외국인들이 많은 것을 보면 장면 하나가 얼마나 개막식 전체의 이미지를 망쳤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서울올림픽 개폐회식을 기획한 이어령은 불에 타 죽은 비둘기는 없다고 말했다.(2016년 7월 11일 주간조선 인터뷰에서) 순백이 아닌 비둘기는 추려내다 보니 남은 순백의 비둘기 수가 적었고, 순백 비둘기는 비쌌다. 그런데 비둘기가 날아올랐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기획이었는데, 연습을 시킬 때마다 비둘기가 돌아오지 않고 날아가버려서 자꾸 줄어드니까 연습을 많이 시킬 수 없었다. 그래서 개회식 때 숙달된 비둘기가 적었다. 걔네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고 경기장 주변에 있거나 성화대에 높이 앉아서 앉아 올림픽 경기장의 풍경을 만끽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난이 죄라며 이어령은 눈시울을 붉혔다. 비둘기는 불이 붙는 아슬아슬한 순간에 날아가 안도의 숨을 쉬었다. 비둘기가 타죽었냐고 여러 곳으로부터 전화를 받은 이어령은 말했다. “모든 것이 녹화되어 있으니 똑똑히 틀어봐요. 진짜라면 중계권을 가진 NBC에서 먼저 보도했을 거야. 서울발 특종 기사로 말야.”[27]
어찌 됐든 올림픽 개회식에서 비둘기를 일제히 날리는 풍경은 서울올림픽을 끝으로 사실상 사라졌다.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이후에는 비둘기를 폐회식 때 풀거나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주로 밤에 개회식을 거행하도록 하고 있다. 특히 1996 애틀랜타 올림픽 조직위원회는 개막식 때 비둘기를 날리는 행사를 없애기로 하고 IOC도 나서서 앞으로 모든 올림픽에서 비둘기를 행사에 활용하는 관행을 없애기로 했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도 이 사건을 소재로 다소 과장된 에피소드를 만들었다. 주인공 성덕선이 우간다 피켓걸로 참가한 후 아빠 성동일과 쌍문동 둘리슈퍼에서 올림픽 개막식 때 받은 각종 기념품을 자랑하면서 "불에 타 죽은 비둘기들을 묻어줘야 한다"고 비둘기 시체를 집으로 가져왔다.
5.3. 의전에 어긋난 국가호칭
올림픽 경기에서는 각 국가의 명칭 전체를 부르고 속칭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의전상 맞는 원칙이다. (단, 대만과 마카오 등의 경우는 예외에 해당한다) 예컨대, 국가의 이념과 상관없이 중국을 China가 아닌 People's Republic of China, 중화인민공화국이라고 불러주는 식이다. 하지만 개회식에 입장할 때 들고 들어온 배너를 보면, 한글명칭에서 '미합중국' 대신 속칭인 '미국'을 사용하였다.
명색이 혈맹국이라면서 전세계 앞에 두고 별명으로 호칭하는 격. 반면 중국에 대해서는 '''중화인민공화국''' 이라고 정중하게 적어주었다.
당시 국제행사를 개최해본 경험이 부족한 국가였기 때문에 일어난 헤프닝이었으나, 자칫 대사관에서 공식 항의를 제기할 경우 크게 문제시될 수 있는 일이었다.
[1] 서머타임 적용[2] 1986 서울 아시안 게임 개회식은 오후 2시에 시작되었다.[3] 당시는 토요일을 '''반공일(半空日)'''이라고 불렀다. 절반의 공휴일이라는 뜻. 주 5일제와 52시간 근무제도가 시행되기도 한참 이전이라서 토요일에도 직장인은 오전 근무를 했고 학생들은 오전 수업을 했다. 따라서 개회식이 늦은 오후나 저녁이었으면 임시공휴일 지정이 어려웠을 수도 있었지만, 얄짤없이 근무시간(+학교 수업시간)인 오전에 개회식이 열리게 되었으므로 별 무리없이 임시공휴일로 지정되었다.[4] 사실 개회식이 근무시간 후에 열렸다 한들 임시공휴일 지정은 애초부터 기정사실이었을 것이다. 일단 재계가 일을 시키려는 특유의 욕심을 발동해봤자 '''상대는 올림픽.''' 단군 이래 최초이자 최고의 국가적 이벤트를 앞둔 상황에 전국민을 대동단결시켜도 모자랄 판에 재계가 쓰잘데기 없는 욕심으로 초를 치는 것은 당시 중앙정부가 결코 좌시하지 않았을 것이고 올림픽 몇 년 전까지 정부의 말을 거역했다가 정부의 강압에 의해 흔적도 없이 사라진 일부 기업의 사례도 알고 있었기에 알아서 조용히 기었다고 볼 수 있다.[5] 불과 2005년까지도 지상파의 경우 낮에는 방송이 없었다.[6] 사실 주간 정파시간대 자체가 특집편성 앞에서는 무력화되었다. 86 아시안게임과 88 올림픽 당시에는 당연히(?) 온갖 특집 프로그램으로 융단폭격을 때렸고, 이외에도 태풍 쎌마호 내습같은 기상특보나 남북 이산가족 상봉, 그리고 전두환 해외순방 귀국 퍼레이드 등등 의외로 낮에도 방송을 하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낮 방송 종료는 어디까지나 정규편성에 한했던 이야기. 사실 꼭 특집이 아니어도 방송이 가능했다. 당시 스포츠 중계에 한해서는 정파시간대에도 방송이 가능했었다. 올림픽 역시 스포츠 행사니까 특집 타이틀 안달고도 중계가 가능했다. 실제 올림픽 기간 내내 낮 정파 없이 모든 채널을 동원해서 방송이 이뤄졌다. 심지어 정파시간대에는 지금의 '''EBS'''인 KBS 제3TV에서도 중계를 했었다.[7] 동계 올림픽까지 포함하면 1998 나가노 동계올림픽이 마지막.[8] 예비 올림픽 격이었던 1986 서울 아시안 게임에도 당시 총리 나카소네 야스히로가 참관했다.[9] 태국 출신이다. 1988년도 미스 타일랜드, 동년도 미스 유니버스. 개막식 중계에 등장하기도 했다.[10] 올드 스포츠 팬들에게는 친숙한 아나운서로 다양한 스포츠 중계방송을 맡았다. 특히 축구 중계를 전문으로 했는데 '83 축구 수퍼리그 개막전 중계를 맡기도 했다.[11] 비록 1980년대 초중반에 일시적으로 교복은 없어졌지만 체벌은 여전했고 과외를 못하게 되면서 그 대신에 야간자율학습을 시행했다.[12] 1986 서울아시안게임 개/폐회식 준비 때도 비슷한 문제가 제기됐다.[13] 특히 공식 휘장을 표현하는 매스게임 장면은 올림픽 개최에 대한 상징성이 어마어마했던 탓에 한동안 애국가 영상이나 국가 홍보 영상에 이 장면이 빠지지 않고 등장했다.[14] 종주국인 그리스가 1번[15] 하지만 다음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는 이라크 바로 다음 순서로 이란이 입장했다.[16] 원래 이 말까지 한 후 안내방송이 있어야 했다.[17] 1990 베이징 아시안 게임 남자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황영조 바로 이전 짧게나마 한국 마라톤계를 빛냈던 선수.[18] 흑산중학교 소흑산분교(현 가거도분교)[19] 아내가 만삭이라 낙도 근무를 할 수 없던 친구를 대신해, 스스로 낙도 근무를 선택했다고 한다.#.[20] 이후로도 계속 무용계에 종사하며 뮤지컬 배우로도 활동했다.#.[21] 그리고 4년 뒤, 황영조가 태극기를 달고 마라톤 우승을 하는 감격까지 겸하게 된다.[22] 바로 다음 대회인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성화는 시각장애인 양궁선수가 불화살을 쏘아올리는 형태로 점화했고 1996 애틀랜타 올림픽 성화는 파킨슨병을 앓던 복싱스타 무하마드 알리가 떨리는 손으로 이동식 불쏘시개에 불을 붙이는 형태로 성화를 점화했다.[23] 최상단 개회식 영상 2시간 53분에서 그 장면을 볼 수 있다.[24] 올림픽 개최가 결정된 날인 1981년 9월 30일에 태어나서 굴렁쇠 소년으로 뽑혔다고 한다. 현재 43세. 그 이후 2009년 10월 4일 방영한 해피선데이 1박 2일 시즌1 연평도 1편에 깜짝 출연했었고, 2008년부터 2017년 2월 초까지 모 결혼정보업체 광고 모델로도 고정 출연하는 등, 연기자 뿐만 아니라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재밌는 TV 롤러 코스터에서도 주역으로 출연.[25] 노태우대통령의 공식 영문이름은 '''Roh''' Tae-woo 지만, 이 안내문에서는 두음법칙이 적용된 표면형인 Noh로 발음되었다.[26] 1900년 파리 올림픽에선 '살아있는 비둘기 쏘기'가 경기 종목이었다. 300마리 가량의 비둘기가 선수들의 목표물로 던져져 21마리의 비둘기를 쏜 벨기에 선수가 금메달을 차지했다. 올림픽 경기지만 하늘로 날아오른 비둘기들이 총을 맞고 추락하는 장면을 관중들은 봤다. #[27] 하지만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지는 비둘기가 타죽었다고 보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