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 자이언츠/역사

 



1. 개요
2. 실업 야구시절
3. 프로 진입 이후
3.1. 1980년대 : 최동원의 롯데 자이언츠
3.2. 1990년대 : 롯데의 전성기
3.2.3. 1992 시즌 : 고졸 신인 염종석이 만든 8년만의 V2
3.2.6. 1995 시즌: 우승을 눈앞에서 놓친, 정말로 아쉬웠던 시즌
3.2.8. 1997~1998 시즌 : 꼴데의 원조
3.2.9. 1999 시즌 : 롯데 역사상 최고로 짜릿했던 시즌
3.2.10. 2000년대: 우여곡절의 시기 시즌 1
3.2.12.5. 2005 시즌 : 포스트 시즌에 진출하여 비밀번호를 지울 수 있었지만, 정말 아쉬웠던 시즌
3.2.12.6. 2006 시즌 : 최동원을 잇는 슈퍼스타의 등장
3.2.13. 2008-2009 시즌 : 로이스터 매직이 부른 재부흥기
3.2.13.1. 2008 시즌 : 8년만의 가을야구 진출
3.2.13.2. 2009 시즌 : 9년만의 가을야구 경기 승리
3.3. 2010년대: 우여곡절의 시기 시즌 2
3.3.1. 2010~2012 시즌 : 창단 최초 5연속 가을야구 진출, 롯데의 최고 전성기
3.3.1.2. 2011 시즌 : 창단 최초 단일리그 2위 달성. 그러나 눈앞에서 아쉽게 놓친 한국시리즈 진출 시즌 1
3.3.1.3. 2012 시즌 : 13년만의 포스트시즌 승리. 그러나 눈앞에서 아쉽게 놓친 한국시리즈 진출 시즌 2
3.3.2. 2013~2016 시즌 : 8888577시절 이후 2차 암흑기
3.3.2.1. 2013 시즌 : 최고 승률 가을야구 탈락 기록 탄생
3.3.3. 2017 시즌 : 5년 만의 가을야구
3.3.4. 2018 시즌~ : 3차 암흑기
3.3.4.1. 2018 시즌 : 막판에 힘이 빠져 아쉽게 포스트시즌 막차 탑승 실패
3.3.4.2. 2019 시즌 : 15년만의 10위 달성. 2010년대 역대 최악의 시즌
3.4. 2020년대
3.4.1. 2020 시즌 : 전 시즌보다는 나아졌으나....


1. 개요


롯데 자이언츠의 역사를 다루는 문서이다.

2. 실업 야구시절


롯데 자이언트 참조.
실업 야구단 시절엔 총 5시즌 중 2회 코리안시리즈에 진출해서 우승한 나름 강팀이였다.

3. 프로 진입 이후



3.1. 1980년대 : 최동원의 롯데 자이언츠


1982년 2월 12일, 롯데호텔 크리스탈 볼룸에서 박영길 실업 롯데 감독을 사령탑으로 김용희, 노상수, 김성관 등을 주축으로 한 22명으로 선수단을 구성하여 6개 구단 가운데 가장 늦게 창단식을 거행했다.
창단 당시 선수단 명단으로는 코치김명성, 최주억, 투수는 김덕열, 김문희, 노상수, 방기만, 이윤섭, 이진우, 천창호, 최규옥, 포수는 차동렬, 최순하, 내야수는 권두조, 김용철, 김용희, 김일환, 김정수, 이성득, 정학수, 외야수는 김성관, 김재상, 박용성, 엄태섭, 정문섭이었다.

3.1.1. 1982 시즌


1982년 시즌 전 대다수의 전문가들는 롯데를 중위권 전력으로 점쳤다. 비록 마운드는 약하지만, 김용희, 김용철, 박용성, 김성관, 김정수 등으로 구성된 타선은 어느 팀에게도 뒤지지 않는 화력을 자랑했기 때문이다. 일단 시즌 출발은 좋았다. 1982년, 해태와의 개막전에서 14-2로 대승을 거두고, OB, 삼미를 잇달아 꺾으며 3연승을 내달렸다. 하지만 그 이후부터는 승리보다 패배하는 일이 더 익숙해지면서 이 해 0.388[1]의 승률로 최종 순위 5위에 그쳤다.

3.1.2. 1983 시즌


1983년에는 믿었던 최동원이 9승 16패로 부진하며 종합순위 꼴찌로 추락했다. 결국 시즌 도중 성적 부진에 대한 책임으로 박영길 감독이 물러나고, 강병철 감독대행이 지휘봉을 잡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락을 벗어나지는 못했다.

3.1.3. 1984 시즌 : 최동원이 만든 V1



[image]
'''1984년 우승 당시 모습'''
1984년에는 삼성의 져주기 논란이 있었다. 하지만 최동원의 대활약으로 후기리그 우승을 하고 한국시리즈에 진출해 우승을 거두었다.

3.1.4. 1985 시즌


1985년에도 변함없는 위용을 뽐내며 20승을 거둔 최동원은 1986년에도 OB와의 시즌 최종전에서 3대1로 앞서 연속 20승이라는 대기록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9회말 김형석에게 동점 2점 홈런을 허용한 데 이어 신경식의 3루타와 실책으로 결승점을 내줘 19승에 머물러야 했다. 그리고 이 때 삼성 라이온즈전후기 모두 1위를 함으로써 롯데는 준우승을 하였다.[2]

3.1.5. 1986 시즌



3.1.6. 1987 시즌



3.1.7. 1988 시즌


1988년 11월 23일, 프로야구계는 충격에 휩싸였다. 롯데와 삼성이 양팀의 에이스인 최동원김시진의 트레이드를 포함한 여러 대형 트레이드를 단행했기 때문이다. 롯데에서는 최동원, 오명록, 김성현을 삼성으로 보내고, 김시진, 오대석, 허규옥, 전용권을 받았다. 또한 12월 21일에는 김용철, 이문한을 보내고 삼성에서 장효조, 장태수를 받는 트레이드까지 단행되었다. 최동원이 사라진 롯데 마운드를 지킨 이는 고독한 황태자 윤학길이었다. 윤학길은 1987년 첫 두 자릿수 승리[3]를 거두며 두각을 나타냈다. 윤학길은 최동원이 연봉싸움으로 이탈한 이듬해 18승 10패 3세이브의 기록을 올리며 단번에 롯데의 에이스로 발돋움했다. 1989년에도 16승을 올리는 등, 1997년까지 구단 내 최다승인 통산 117승을 거뒀다. 승수보다 더 대단한 것은 100완투[4]를 달성한 것이다.

3.1.8. 1989 시즌



3.2. 1990년대 : 롯데의 전성기


롯데는 1990년대 5번 포스트 시즌 진출을 하였는데, 그 중 한국시리즈에 3번 진출하여 1번의 우승과 2번 준우승을 한 나름대로 강팀의 면모를 보였던 전성기였다. 박정태, 염종석, 주형광, 펠릭스 호세 등의 프랜차이즈 선수가 나왔던 시기이기도 한다.
롯데의 포스트시즌 진출 기록은 구단 창단 이후 총 12번인데, 그 중에 5번이 바로 이때 나온 것이다.

3.2.1. 1990 시즌



3.2.2. 1991 시즌


다시 강병철에게 감독직을 맡겼으며,이때까지 3년간 빙그레 코치로 와신상담한 강병철 감독은 마무리 투수 부재 속에서도 선발 로테이션을 꾸준히 지켜나갔다. 그 결과 윤학길(17승), 박동희(14승), 김태형(11승), 김청수(10승) 등 4명의 10승대 투수가 탄생했다. 타선에는 기존의 장효조, 김민호, 김응국 등에 신인 박정태, 전준호가 가세 하며 짜임새를 갖췼다. 시즌 4위로 7년 만에 포스트 시즌에 진출했지만 준플레이오프에서 만난 삼성에 1승 1무 2패로 안타깝게 무릎을 꿇었다.

3.2.3. 1992 시즌 : 고졸 신인 염종석이 만든 8년만의 V2



[image]
'''1992년 우승 당시 모습'''
신인 염종석이 17승을 거두고 평균자책점 1위 (2.33)에 오르는 대활약은 펼치며 롯데 출신으로는 2011년까지 유일한 신인왕이 됐다. 타선에서는 기관총으로 무장한 남두오성이 빛났다. 박정태(0.335), 김민호(0.322), 김응국(0.319), 이종운(0.314) 전준호(0.300) 등 다섯명의 3할 타자를 배출한 팀 타선은 8개팀 가운데 가장 적은 팀 홈런(85개)을 기록했지만, 팀 타율 0.288[5]을 기록하며 상대 마운드를 무너뜨렸다. 정규시즌 3위로 마감하여 준플레이오프부터 시작하여, 플레이오프, 한국시리즈까지 올라가 빙그레의 다이너마이트 타선을 상대로 꽤나 드라마틱하게 우승을 차지했다.[6]
공교롭게도 1992년 우승할 때의 감독은 강병철이었으며[7], 두 번 다 안경잡이 에이스 최동원염종석을 혹사시켜 우승을 차지했다. 그렇지만 그 이후로 우승 다툼에 참가한 것은 1995년,1999년 단 2번 뿐이다.

3.2.4. 1993 시즌



3.2.5. 1994 시즌



3.2.6. 1995 시즌: 우승을 눈앞에서 놓친, 정말로 아쉬웠던 시즌


3위 롯데 자이언츠와 4위 해태 타이거즈 사이에 4.5게임 차이가 났고, 당시엔 3.5게임 이상 차이면 준PO가 안 치러졌기에 PO만 치뤄졌는데, 그 덕분에 전후무후한 엘꼴라시코 포스트시즌이 치뤄지게 되었다. 결국 롯데가 4승 2패로 승리해서 3년 만에 진출하였고, 한국시리즈에서 1위인 OB 베어스를 상대로 3승 2패까지 모는 데 성공하였으나, 이후 2연패를 해서 3승 4패로 아쉽게 준우승을 거두었다.

3.2.7. 1996 시즌



3.2.8. 1997~1998 시즌 : 꼴데의 원조



3.2.8.1. 1997 시즌


3.2.8.2. 1998 시즌


3.2.9. 1999 시즌 : 롯데 역사상 최고로 짜릿했던 시즌



주형광, 박석진 등이 활약한 시즌이다.
시즌 마지막 경기인 133번째 경기가 단두대 매치였는데, 바로 10월 8일 두산 베어스와 잠실에서 드림리그 1위 겸 전체승률 1위 자리를 놓고 겨뤘기 때문이다., 이 경기 직전까지 치른 두 팀의 전적은 75승 5무 51패로 동률이였다. 특히 롯데로서는 승리가 간절했는데 창단 이후 단 한번도 해보지 못한 정규리그 1위 자리도 그렇지만, 1위를 해야만 플레이오프에서 상대전적이 열세였던 삼성 라이온즈를 피할 수 있었기 때문.[8] 그러나 3:3으로 맞선 9회말 강혁에게 끝내기 안타를 맞고 패배함으로써 결국 한 끗 차로 드림리그 2위의 성적을 받아들고 썩 내키지 않은 삼성과의 플레이오프를 치르게 되었다.
하지만 1승 3패에서 기적적으로 역전승하게 되었고, 그 이후 한국시리즈에선 힘을 다 뺐는지, 한화 이글스 상대로 1승 4패를 거두면서 준우승을 하게 되었다.
참고로 이때 얻은 승률은 0.591로 롯데 창단 이후 현재까지 최고 승률이다.

3.2.10. 2000년대: 우여곡절의 시기 시즌 1



3.2.11. 2000 시즌


시즌 시작전 롯데는 매직리그로 삼성은 드림리그로 옮겨졌다.
우선 펠릭스 호세미국 메이저 리그로 떠나고, 마해영박정태는 선수협 파동 때문에 훈련 부족으로 1999년에 막강했던 타선이 식어버렸다. 그래도 2000년에 가을 야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SK한화의 부진과[9] 롯데 투수진들의 분전, 양대리그 덕택에 강팀들과의 순위 싸움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 시즌 초부터 매직리그 1위를 달리다가 막판 부진과 LG의 연승으로 1위 자리를 내주고 삼성과의 준플레이오프 에서 1승 2패로 PO 진출 실패하였다. 그래도 20세기 마지막 해에 가을야구에 초대를 받아서 나름 훈훈하게 마무리 지을 수 있는가 했지만, 임수혁이 시즌 초 쓰러져 선수생활에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그리고 시즌이 끝난 후, 롯데의 운명을 가른 첫 번째 일이었던 마해영 트레이드 사건이 일어난다. 선수협 활동에 적극적이었던 마해영은 롯데 프런트에게는 눈엣가시같은 존재였고, 결국 2000 시즌 종료 후 김주찬, 이계성을 상대로 트레이드 된다. 하지만 문제는 지난 6년간 성장해와서 롯데에서 사실상 유일하게 거포라고 불릴 만한 선수는 당시에는 마해영 밖에는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삼성으로 간 마해영은 3년 연속 30홈런을 치는 등 삼성에서 3할대 초반의 타율과 111개의 홈런, 300개가 넘는 타점을 기록하면서 중심타선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해 줬고, 중심을 잡아줄 리더가 없어진 롯데는 이후 야수진을 꾸리는 데 애를 먹게 된다. 물론 김주찬이 롯데에 와서 잘 해주긴 하였으나 확실하게 잠재력이 터진 시점은 2007년 베이징 올림픽 예선전 이후였고, 그 이전까지는 그저 그런 발만 빠른 선수였다.
그리고 준플레이오프에선 삼성 라이온즈를 만나서 1승 2패로 가을야구를 마쳤다. '''이때만 해도 암흑기가 올 줄은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3.2.12. 2001~2007 시즌 : 암흑기



4연속 꼴지, 2연속 2할대 성적이 이때 나온 것이다.
참고로 꼴데란 이미지가 만들어진 시기가 바로 이 때다.

3.2.12.1. 2001 시즌

2001년은 롯데에 있어 너무나도 불운한 해였다. 먼저 전 시즌에 2000년에 1999년 플레이오프에서 활약했던 임수혁이 심장마비식물인간이 되었고, 다음 시즌에 마해영은 트레이드로 삼성에 이적했으며[10], 주형광도 신인 시절부터 지속됐던 무리한 투구 혹사 탓에 시즌 아웃 됐다.
게다가 2001년은 유례 없는 중하위권 팀들의 치열한 순위 싸움이 벌어진 해였는데, 이 치열한 상황에서 악전고투하던 '''김명성 감독이 시즌 도중 7월 24일에 심장마비로 사망'''하는 사상 유례 없는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진다.
삼성 라이온즈 감독을 맡았던 우용득 감독 대행 체제로 어떻게든 수습하려 했고, 후반기에 김주찬이 톱 타자의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하며 팀에 활력을 불어넣기 시작해 시즌 막판까지 4강 싸움을 벌였다. 01시즌 출루율 5할 호세의 하드캐리를 필두로 팀 타격이 나름 분전했지만, 시즌 막판 마산구장에서 삼성과 1999년 플레이오프의 악연이있던 펠릭스 호세가 배영수의 빈볼성 투구를 참다 못해 참교육이라는 드립을 탄생시키는 폭력을 행사해 잔여 경기 출장정지 징계를 받으며 팀이 무너지고 말았다. 결국 한화는 물론 LG, SK에게마저 역전당해 득실차가 +를 기록하고도[11] '''4위와 2게임 차이로 아쉽게 8위를 차지했다.''' 그리고 호세가 출장 정지 먹고 나서 1군에 갓 올라온 선수가 훗날 롯데의 주전 강타자.
'''그리고,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3.2.12.2. 2002 시즌

2002년 김민재의 FA 이적, 펠릭스 호세의 이중 계약 파동이라는 악재를 맞았다. 특히 호세는 2002년에도 재계약이 사실상 확정되었으나, 휴식을 한다면서 스프링 캠프에 오지 않다가 갑자기 애리조나와의 계약을 하면서 이중 계약으로 프로야구 최초 외국인 선수 영구 제명을 받게 된다.[12] 물론 KBO와 롯데 구단이 항의를 안 한 건 아니었다. 메이저리그 사무국에 항의 팩스를 몇 번 보냈으나 실패로 돌아가게 된 것. 그 후 2004년에 겨우 투자를 시작한 롯데에선 부상으로 약간 안 좋았던 이시온을 포기하고 호세를 다시 데리고 오는 게 낫지 않나라는 의견이 쏟아져 나왔다. 이걸 반영해서 호세 영입을 강력하게 원했던 롯데는 호세만 무조건 영입하려 한다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영입하려 노력했으나, 이중 파동으로 당시 KBO 영구 제명을 당하고 있던 호세는 오지 못했다. 물론 나중에 제명이 풀려서 한국에 2006년 돌아오긴 한다.
이렇게 전년도의 주축 전력들이 이탈하기 시작하며 롯데는 나락으로 빠져들기 시작했고, 대행에서 승격한 우용득 감독은 이러한 상황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다 최악의 성적을 찍고 중도 사퇴하였고 동시에 새롭게 부임한 '''백인천 감독이 롯데 7년 암흑기의 시대를 열었다.'''
백인천은 부임하자마자 시즌 포기와 리빌딩을 선언하며 온갖 무리수를 던져댔고, 그 결과 2002년 롯데는 구단 역사상 '''최악'''+모든 구단 역사상 뒤에서 3등[13]이라는 찬란한 성적인 '''35승 1무 97패, 승률 0.265'''를 내면서 독보적인 최하위를 한다. 7위 한화의 승률인 '''0.461'''와도 2할 가까이 차이가 난다. 이 때문에 2002년 시즌은 역대 최악의 승률 인플레를 자랑했다. 아니, 당시에 '''1위와 7위 한화의 승차보다 7위와 8위 롯데의 승차가 더 벌어졌다'''. 순위 경쟁이 치열하면 '''페넌트레이스 1위와 최하위'''의 승률 차이가 2할도 안 나는 경우도 있고, 심지어 바로 전 해에는 한국시리즈 우승 팀과 리그 꼴찌 팀이 1할도 차이 안 났었는데... 참고로 이 때 롯데는 '''청보 핀토스 시절 허구연의 감독시절 승률 기록인 0.273'''을 깼다...
이 해 롯데의 홈 최종전이었던 2002년 10월 19일 한화전의 유료 관중은 겨우 '''69명'''이었다.
이 당시 관중 동원이 얼마나 안습이었느냐를 증명하는 에피소드가 있다. 2002년 9월 14일, 부산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참가국들을 응원하는 시민 서포터즈가 결성되었는데, 원래 주경기장에서 발대식 행사가 예정되어 있었다. 3만 명 이상의 서포터즈가 모이고 행자부장관, 부산시장, 각국 대사가 참가하는 성대한 행사였다. 롯데는 침체된 프로야구붐을 되살려보겠다는 생각으로 사직야구장으로 장소를 변경하길 요청했고, 행사 이후에 서포터즈가 그대로 공짜 야구 경기를 관람하게 할 계획이었다. 그리고 5년만의 만원 관중 예상이라며 보도자료를 돌렸다. 관련 기사. 그리고 야구장은 오랜만에 사람들로 붐볐는데... # 하지만 그 날 관중 수는 '''514명'''. 행사가 끝나고 경기 시작 시간이 되자 귀신 같이 관중들이 다 빠져나가 버린 것이다. # 당시 운영팀장은 "사람들이 돈 받는 줄 알고 다 갔나봐요."라며 씁쓸해 했다. 한마디로 공짜 야구도 소용 없는 지경이었다.

3.2.12.3. 2003 시즌

새 감독이 대놓고 시즌 포기를 선언하고 다음 시즌을 제대로 준비하겠다고 했으니, 2003년 시범 경기까지는 구단과 팬들도 나름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2002년에 남발했던 무리수의 후폭풍으로 개막 후 13경기 동안 1무 12패를 서막으로 충격적인 시즌이 시작된다. 이후 5월에는 꽤 선전하며 같이 최악의 초반 부진을 겪은 두산 베어스를 누르고 잠시 7위에 올랐으나, 최악의 6, 7월을 보내며 연패일로를 걷게 된다. 2002년부터 시작된 백인천의 온갖 무리수가 시너지 효과를 내기 시작하며 안 좋은 결과들을 쏟아내자, 백인천은 책임은 고사하고 아예 감독직 수행을 거의 포기하고 배째모드로 들어갔다. 2003 시즌이 되며 유니폼을 새롭게 바꾸는 등 다름 새롭게 준비를 하려 했으나 결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고, 그렇게 롯데는 2003년에도 바닥을 기다 '''결국 8월 백인천을 해임한다.'''
대행으로 부임한 김용철이 그나마 팀을 어느 정도 수습하고 승률을 끌어올렸으나 이미 때는 늦어 39승 3무 91패, 승률 3할로 전년도에 이어서 압도적인 꼴찌를 차지했다. 게다가 '''두 시즌 합쳐서 190패'''라는 막장 기록까지는 아니어도 188패이기 때문에 거기서 거기고 무엇보다도 '''두 시즌 연속 90패'''를 기록했다는 점이 뼈아픈 기억이다. 그리고, 이 해 KIA전 '''1승 1무 17패'''[14], 현대전 '''2승 17패''', 삼성전 4승 15패로 3팀한테 합쳐서 고작 7승이라는 충공깽의 상대전적을 기록하였다. '''한국 프로야구 사상 최초로 3년 연속 꼴찌.''' 거기에다가 관중 수가 2년 연속으로 엄청난 삽을 푸다가 이승엽의 아시아 홈런 신기록 56호 홈런공을 잡겠다는 부산 야구 팬들의 일념(...)에 사직구장이 갑자기 만원 구장이 됐다가 성난 관중들로부터 오물 세례를 당하는 굴욕을 맛봐야 했다.[15]

3.2.12.4. 2004 시즌

3년 연속으로 꼴찌를 한 후 2004년부터 양상문 체제로 들어서면서 롯데의 본격적인 리빌딩 행보가 시작된다. 이상목, 정수근을 FA 영입하며 전력 보강을 꾀했고 이대호, 박기혁, 김주찬 등을 중용하며 새로운 주축 전력들을 키워내려 애썼다. 그 결과 승률이 전년도에 비해 '''1할 넘게 올랐으나''' 그 전까지의 누적 데미지가 워낙 컸던 탓에 50승 11무 72패로 다시 한 번, 4년 연속으로 8위를 하게 되었다. '''현재까지 최초이자 유일한 기록이다.'''[16] 그로 인해 '''꼴데'''라는 별명 확정. 8888의 임팩트 때문에, 2019년까지 15년동안 롯데는 꼴찌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꼴데 별명을 이어가게 된다.

3.2.12.5. 2005 시즌 : 포스트 시즌에 진출하여 비밀번호를 지울 수 있었지만, 정말 아쉬웠던 시즌

리빌딩 행보를 밟아나간 양상문호는 '''2005년''' 초 엄청난 돌풍을 일으키며 1위까지 했지만, 아니나 다를까 이후 팍 죽어버리며 한 달도 채 안 되는 기간만에 또 다시 나락으로 추락했다. 고군분투에도 불구하고 재활공장장 버프를 받은 한화에 밀려 '''5위'''라는 아쉬운 성적으로 시즌을 마감하게 된다.
참고로 이때 감독이였던 양상문14년 만에 감독을 맡게 되었지만, 결과는...

3.2.12.6. 2006 시즌 : 최동원을 잇는 슈퍼스타의 등장

그리고 '''2006년'''이 되어 팬들은 2년만에 팀을 5위까지 끌어올린 양상문 감독이 계속 감독을 맡을 거라 생각했다. 투수 코치로서의 양상문은 크보 최악의 투수 코치로 욕 먹고 있지만 이 당시에는 만년 꼴찌 롯데를 단기간에 중위권으로 상승시키는 등 감독으로서의 평판은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그런데 후에 양상문 감독이 -16의 엘지를 4강에 올려놓은 다음 이 때 8888577의 5가 양상문 업적이었다는 게 재발견되었다. 그러나 구단주가 갑작스레 발표한 롯데 투자 계획에 따라 새롭게 들어온 감독은 바로 '''강병철'''. 1984년 최동원, 1992년 염종석의 전성기와 그 후를 아는 팬들은 큰 우려와 혹시나 하는 작은 희망으로 그를 지켜봤지만 성적은 역시나 '''2년 연속 7위'''라는 기록과 함께 또 다시 시궁창으로 빠지게 되고, 대망의 '''8888577'''이 완성된다. 동시에 팬들이 좋은 감정을 가질 수 없던 강병철 감독은 주구장창 까이며 잠시 야인으로 지내다 08년 히어로즈 2군 감독직에 오르게 된다.
[image]
'''꼴데팬이라고 놀림 받는 것도 지겹다'''
'''구단의 특단의 조치를 요구한다.''' -'''DC야갤 롯데팬 일동'''-
이시기 강병철 감독에 대한 분노는 극에 달해있어서, 잠실 구장에서 플래카드가 걸리기도 했고 사직구장에서도 "편파적인 강감독의 선수기용 반대한다"라는 플랜카드를 걸기도 했다. 이 짤방만 봐도 이 시절 롯데 팬들의 설움이 어느 정도였는지 대충 짐작이 간다.
오죽하면 2006년 노무현 당시 대통령과 강병철이 부산상고(현 개성고) 동문이라는 점 때문에 어떤 초등학생이 강병철 감독 퇴진에 힘써달라는 글을 청와대 열린마당 게시판에 올리기도 했다. 기사.
2006년에는 호세, 이대호 말고는 그야말로 물빠따 타선이어서 그야말로 상대팀에게는 이대호만 거르면 별거 아니네라는 인식을 심어주기 충분했다. 특히 물빠따에 지대한 공을 세웠던 FA 영입타자 정수근이 엄청난 욕을 먹었다. 브라이언 마이로우가 시즌 초반에 많은 홈런을 치면서 비교적 선전했으나 마이로우가 약점을 드러내기 시작한 5월 이후부터는 성적이 곤두박질치자 롯데는 새로운 외국인 타자를 데려오는데...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겠다. 투수진도 손민한 말고는 사실상 의미가 없는 수준이었고, 전에 FA로 영입한 이상목의 성적은 처참했다. 그나마 이대호가 잠재력을 폭발시켜 타격 트리플 크라운을 거뒀고, 롯데팬들은 김용희, 김용철, 김민호, 박정태, 마해영 이후 오랫동안 씨가 말랐던 롯데의 중심 타자가 전면에 등장한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리고 류현진을 거르고 뽑았던 나승현이 첫 시즌부터 16세이브를 기록하며 희망이 되었던 것 외에는 의미가 없었다.

3.2.12.7. 2007 시즌

2007 시즌에는 전 시즌에 22홈런으로 홈런 2위를 기록했던 펠릭스 호세와 재계약했고, 마무리로 카브레라를 데려왔는데, 호세가 확실하게 노쇠화되며 형편없는 성적을 내고 퇴출되었다. 초반에 이대호 등의 활약에 고무되어 4월 2~3위권을 유지하던 롯데는 5월부터 귀신같은 추락을 경험하면서 환장하는 성적을 기록했다. 그나마 꼴지를 깔아주고 있던 KIA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도. 그래서 시즌 중반 이후부터는 그 유명한 '''이대호와 여덟 난쟁이'''라는 드립이 성행했다. 이대호 말고는 홈런을 쳐줄 타자가 없었으니까. 다행히도 올스타전 이후에 성적을 끌어올렸던 정수근, 처음으로 두 자릿수 홈런을 기록하며 주전 포수의 입지를 완벽하게 다진 강민호, 그리고 새로운 롯데 내야수로 이원석, 정보명 정도가 성장 가능성을 보였다. 박현승도 생애 처음으로 3할 타율을 기록했다. 물론 엇박자가 심해 이들이 한꺼번에 잘한 경기는 많지 않았고 롯데는 그렇게 희망이 사라져가나 했다.


3.2.13. 2008-2009 시즌 : 로이스터 매직이 부른 재부흥기




3.2.13.1. 2008 시즌 : 8년만의 가을야구 진출


3.2.13.2. 2009 시즌 : 9년만의 가을야구 경기 승리


3.3. 2010년대: 우여곡절의 시기 시즌 2


간단히 요약하자면, 로이스터 - 양승호 체제의 2012년까지는 구단 역사상 최다인 5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을 이루어냈으나, 2013년부터는 2020년까지 8년간 포스트시즌 진출이 단 한 번에 불과한, 사실상 비밀번호만 안 찍은 암흑기. 급기야 2019년에는 15년 만의 꼴찌를 기록하고 말았다. 2010년대 초반까진 프로야구 최고의 인기팀이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신생팀인 낙동강 라이벌 NC 다이노스의 창단과 호성적[17]과 함께 프런트의 병크, 결정적으로 성적 부진이 겹쳐 로이스터 시절과 비교해 롯데에 등돌린 팬들이 많아졌다. 특히 옆 동네 구단이 생기고 이들이 처음으로 가을야구에 진출한 2014년 이후엔....

3.3.1. 2010~2012 시즌 : 창단 최초 5연속 가을야구 진출, 롯데의 최고 전성기


롯데 자이언츠는 단 한번도 5연속으로 가을야구를 진출하지 못했다가[18], 2012년에 최초로 5연속으로 진출하는 데 성공하였다. 특히 2011,2012년은 한 끗 차이로 한국시리즈에 못 갔기에 롯데 팬 입장에선 극히 아쉬운 시즌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3.3.1.1. 2010 시즌

2010 시즌에서도 9월 14일 SK 와이번스 상대로 승리를 거두면서 가을야구에 진출에 성공하였지만, 준플레이오프에서 두산 베어스를 만나서 2선승을 챙기고 3연패하는 바람에 가을야구가 5경기만에 끝났다.

3.3.1.2. 2011 시즌 : 창단 최초 단일리그 2위 달성. 그러나 눈앞에서 아쉽게 놓친 한국시리즈 진출 시즌 1

롯데는 2011 시즌 개막 1달만에 8위까지 떨어지게 되면서 새로운 비밀번호 시대의 서막을 여는가 했으나, 여름 이후 미친 듯이 각성한 롯데 자이언츠의 대약진으로 2위까지 올랐다. 결국 성적은 '''우려했던 것 보다 좋은 성적이었다.''' 더불어 '''롯데의 4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도 구단 최초. 게다가 '''페넌트레이스 2위로 플레이오프 직행'''을 확정지었지만 플레이오프에서 SK와 붙었고, 결국 2승 3패로 패배하면서[19] 최종 순위는 3위로 마감했다.[20][21][22]
하지만 결과적으론 단일리그가 시작된 2001년 이후 무려 10년만의 최고 성적을 냈었고, 무엇보다도 이것이 롯데의 최고 승률 공동 2위[23]를 기록했기에 의미가 있었다.

3.3.1.3. 2012 시즌 : 13년만의 포스트시즌 승리. 그러나 눈앞에서 아쉽게 놓친 한국시리즈 진출 시즌 2

시범경기에서 3승 9패인 최하위로 부진했지만, 페넌트레이스에서는 4월 20일자로 '''단독 1위'''까지 올라섰다. 단독 1위 후에는 두산과 1위 싸움을 신나게 하였다. 그러다 잠시 중위권으로 내려가다 영남 라이벌인 삼성과 1위 다툼을 치열하게 하였고, 7월 7일 단 하룻동안 상위권으로 되돌아간 적도 있었지만 다음날 패배로 다시 2위가 되면서 삼성에게 1위 자리를 내주었다.
그 이후 다시 두산 베어스와 치열하게 치고박기를 하다가 9월 9일 시점에서 2위 굳히기에 나선 상황이었다. 당시 롯데가 가을야구 걱정할 때가 아니라 20년 만의 우승을 걱정할 때라고 롯데팬들은 설레발을 쳤으나, 결국 롯데는 10월 1일 KIA와 4강 싸움을 하였다. 당시 4위였던 롯데는 9월 29일부터 KIA와 경기를 치렀기 때문에 만약 KIA에게 스윕당하면 5위 KIA와의 승차가 1.5경기차로 줄어들기 때문에 어떻게 될지 몰랐었다.
그런데 롯데가 포스트시즌 진출 매직넘버를 0으로 만들고 '''5년 연속 포스트 시즌 진출'''의 쾌거를 이루었다. 이어진 준플레이오프에서 두산을 3승 1패로 꺾고 플레이오프에 진출함으로써 비밀번호를 종결한 이후 처음으로 포스트시즌 차기 라운드에 진출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롯데는 이어지는 플레이오프에서 '''또 SK를 만나서 2승 3패로''' 패배했다.(X-O-O-X-X), 참고로 이땐 3차전만 해도 2승 1패로 2011년보다도 더 먼저 한국시리즈에 진출할 뻔 했다.
양승호 감독은 이에 책임을 지고 감독직에서 사퇴했다. 그리고 얼마 뒤 입시비리 혐의로 구속되었다.
그래도 1999년 이후 13년 만에 포스트시즌 승리를 거두었기에 의미가 있었고, 그래서 다음 시즌에도 올라갈 줄 알았다. '''하지만'''

3.3.2. 2013~2016 시즌 : 8888577시절 이후 2차 암흑기



3.3.2.1. 2013 시즌 : 최고 승률 가을야구 탈락 기록 탄생

2012년 시즌 종료 이후, 김주찬홍성흔이 각각 KIA, 두산으로 떠나고 감독의 작전들이 모두 호구가 되면서 1위부터 7위까지 롤러코스터를 탔다. 삼성과 LG에게 나란히 제쳐지더니 9월 들어 질주하는 두산과 넥센을 끝내 잡지 못하고 '''결국 9월 28일자로 가을야구를 6년만에 못하게 되었다.'''[24]
이 승률도 한화에게 14승2패[25]로 찍어 눌렀기 때문. 그리고 SK와 유종의 미를 위한 5위 싸움 끝에 결국 5위를 차지했다. 그리고 승률은 2012시즌보다는 정작 2013시즌(.532)이 더 높다. 그리고 이는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역대 최고 승률의 가을야구 실패'''. 그렇기 때문에 이때까지만 해도 롯데가 망한다는 생각은 어느 누구도 하지 않았다. 어찌됐든 5할은 넘었기 때문에 말이다.

3.3.2.2. 2014 시즌

2014년 시즌 화요일 20경기중 1승 1무 18패(승률5%) 이란 기적적인 승률을 기록했으며 7위로 마감했다. 결국 8888577을 종결한지 7년만에 다시 7데로 돌아왔다.
시즌 후 일본의 복수구단이 장원준을 노린다는 소식이 들려오는데 정말로 장원준이 복귀 1년만에(...) 해외진출을 해버리면 선발진은 더욱 암울해질 전망. 결국 장원준과의 협상은 결렬되었다. 장원준만 붙잡았으면 그래도 전력, 특히 선발진과 타선은 타고투저를 감안해도 제법 괜찮다는 점에서 희망이 있었지만 롯데 팬들은 이것으로 점점 희망을 접고 있다.
거기에다, 시즌 후 감독 선임 문제로 시작되어 터진 프런트의 막장행각으로 인해 구단 내부 및 구단과 선수단 간의 불화가 만천하에 드러나기까지 해, 이로 인한 후폭풍이 팀에 미칠 악영향을 생각하면 더욱 전망이 어두워지고 있다.[26]당연히 이번에도 FA들은 다 놓쳤으며 여기에 최하진 당시 롯데 구단 사장의 세이버메트리션 코스프레[27], 전횡까지 알려져 욕을 먹었다.
김시진 감독이 자진사퇴하고, 4강에 들지 못한 5팀 중 준플레이오프 기간에 KIA가 먼저 선동열 감독 계약 2년 연장을 발표하고(하지만 선동열은 재계약 포기, 2014 시즌 중 LG 감독직에서 자진사퇴한 김기태가 선임된다) SK김용희 감독을, 두산김태형 감독을 선임하고 뒤이어 한화김성근 감독을 선임했다. 하지만 유독 롯데만 새 감독 소식이 들려오지 않고 있다가 공필성 감독 내정설이 나오고 롯데 자이언츠 선수단 CCTV 사찰 사건까지 터져 분위기가 어수선해진 가운데 플레이오프 4차전이 되어서야 이종운 감독이 선임되었다는 발표가 난다. 하지만 팬심은 이종운 감독에게 별로 호의적이지 않았고, 암흑기를 다시 연장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터져 나오고 있었다.

3.3.2.3. 2015 시즌

시범경기에서 선전하고 4월까지는 승패마진 +2로 선방하면서 이종운 감독의 평가가 좋아지는 듯 했다. 5월 시작하자마자 한화를 상대로 루징 시리즈를 당한 후 SK와 NC를 상대로 연속 스윕 패를 당해 침체되다가 kt 상대 스윕 승을 포함한 6연속 위닝 시리즈로 반등에 성공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그러나 6월 들어 귀신같이 연패 행진을 거듭하며 순위가 8위까지 떨어졌다. 게다가 이 시기에 위닝시리즈 하나 못가져갔고, 이승엽에겐 400호 홈런을 허용, KT에겐 구단 최초의 피스윕 팀이 되었다. 게다가 6월 한 달간 성적도 10개 구단 중 꼴찌, 9위 LG와 0.5 게임 차로 추격당하며 6월을 마감해야 했다.
그리고 7월 14일 한화에게 패배하면서 기어코 9위까지 내려왔다. 하지만 아직 꼴찌 kt 위즈가 시즌 초반 연패를 거듭하면서 바닥 수준의 전력을 보여줬지만, kt가 6월부터 제대로 된 프로야구 팀의 실력을 발휘하는 탓에 kt와의 게임차는 10경기 내외에서 점점 좁혀지고 있는 상황. 만약 kt에게 역전당하는 사태라도 일어나기라도 한다면... 그대로 무관중 운동이 시전될 가능성도 높은데다가 최근 롯데家 소송 분쟁으로 한창 시끄러운 가운데 기업 이미지 자체에 찬물을 끼얹는 꼴이 된다. 당시 부산에서도 롯데 불매운동이 벌어지고 있는 걸 생각하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8월 사이 한화, 기아, SK가 모두 하향세를 타버리면서 그 사이 롯데는 9월 5일 현재 '''5위'''까지 치고 올라왔다! 결과론적으로 현재 5강 티켓의 마지막 주인공은 개싸움이 된 상황.
그러나 다시 도로 내려갔고 결국 9월 30일 트래직넘버가 0이 되면서 가을 야구 탈락 확정이 되었다. 그리고 10월 2일 패배하면서 최종 순위는 8위가 되었다. 팀 수가 10개로 늘어났으므로 꼴찌는 아니지만 어쨌든 11년만의 8위.
여기에다가 시즌 후 2015 프리미어 12 기간 전에 손아섭황재균이 모두 MLB포스팅에서 모두 0원이 나와버리면서 각 구단들의 비웃음을 샀다. 반면 김현수는 그 해 두산의 우승으로 우승 팀 프리미엄까지 받고 볼티모어 오리올스로 이적하는데 성공했다!
그 외의 내용은 롯데 자이언츠/2015년, 이종운, 이종운/평가 문서를 참조.
참고로 이 시즌 이후로 부산, 경남권 팬들은 NC로 수도권 팬들은 두산으로 많이 넘어갔다고 한다.

3.3.2.4. 2016 시즌


NC를 제외한 상위팀들이 모두 전력 약화가 되면서 1~2팀 정도 가을야구가 물갈이가 될 것으로 보인다. 윤길현, 손승락을 영입했는데, 가을 야구의 가능성이 충분히 보인다.
모 기사에 따르면 3강-4중-4약 중 4중에에 속한다고 한다.
7월 14일 전반기가 종료된 시점 롯데는 39승 43패(승률 .476)으로 5위이며 4위 SK와는 2.5게임차, 6위 KIA와는 1게임 차[28]로 가을 야구의 희망을 이어나가고 있었으나....
'''머지 않아 DTD가 시작되었다.'''
일단, 7월 마지막 주 엘 꼴라시코에서 루징이 나온 이후 KT 원정에서 스윕을 당했다. 그리고 여기서 족발게이트가 터져버리면서 팀 분위기가 뒤숭숭해지게 된다. 이후 강팀인 두산-넥센과의 홈 6연전에서 3승 2패로 선전했다.넥센전 1경기는 우취되었으며 1승 1패를 거두었고 두산에게 위닝시리즈를 거두었다.
헌데 그 이후 2연전 체제로 재편되면서 이 기간 동안 투수진은 더 무너지고, 타격이 급격하게 나빠졌다! 강민호와 맥스웰이 부상으로 빠진데다가 김문호가 대타자모드에서 대타 모드가 되어버렸다. 하는 수 없이 로 시즌을 운영해나갔다. 그러다가 8월 4주차에서 KT전 1승 1패 이후 두산 원정에서 결국 우취가 떠버려 이기고 있던 경기가 날아가면서 1패만 추가해버렸고, 대구 원정에서도 우취 1경기 제외하고 다시 1패를 추가, 결국 8월 29일 기준 삼성과 승차 없는 8위에 랭크되어있는 상황이다. 이러는 와중에 감독은 전준우를 제대하자마자 복귀시키겠다는 말을 하고 있다. 만에 하나 FA를 오프시즌 도중 영입하게 되면 보상 선수를 묶을수 있는 폭이 좁아져 현재 많은 팬들이 우려하고 있다. 멀리 안 가고 이런 식으로 선수 보호를 대충 처리한 한화에서 박한길최영환을 데려왔다. 그리고 진짜 전준우와 같이 제대한 신본기, 김사훈까지 등록하면서 현실이 되었다.
결국 10월 02일 NC에게 지면서 가을 야구 탈락을 확정지었다. 경기 결과에 상관없이 이미 기아가 kt를 이겨서 롯데의 트래직넘버가 소멸되었다. 가관인 건 NC와의 전적이 무려 '''1승 15패'''라는 것.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번 시즌 압도적 1위였던 두산에 유일하게 열세를 면한 팀이 바로 롯데다. 그러나 시즌 마지막 대결에서 승락극장이 개봉하여 결국 두산에게 한 시즌 최다 승(92승)을 선물해주고 말았다.] 같은 엘롯기 멤버인 LG와 기아가 가을 야구에 진출, 그것도 와일드카드전에서 맞대결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더욱 충격적인 결과. 게다가 이번 시즌을 앞두고 전문가들 사이에서 가장 가을 야구가 유력했던 팀은 롯데였다. LG와 기아는 이번 시즌은 리빌딩 모드로 가기로 해 큰 기대가 되지 않은 데다가 롯데의 작년 투타 밸런스는 괜찮았으나 델동님이 말아드셔서 망했기 때문에 새 감독 하에서는 잘 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도 있었기 때문. 뭐 결과는 잘 알다시피...
결국 시즌 최종전인 10월 09일 넥센전에서 이기게 되면서 작년에 이어 최종 8위를 확정짓게 된다. 결국 5788 생성.

3.3.3. 2017 시즌 : 5년 만의 가을야구


일단 홍성민김준태는 내년 시즌에 군 입대 관계로 없을 예정이다. 여기에다가 2016년 11월 7일, 이성민프로선수로서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했음이 확인되어 선수 생명이 끝날 위기에 몰렸다. 그렇잖아도 허약한 불펜의 부담이 더더욱 가중화될 듯.
황재균이 1월 23일 부로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 계약을 체결하면서 타선이 거의 최약체가 될 수 있었지만, 다음 날 '''이대호'''가 롯데로 컴백을 하면서 일단 큰 위기는 면할 수 있게 되었다.
7월 초에는 무려 '''1,099일'''만에 NC 다이노스를 스윕하였다. NC와의 총 상대전적은 6승 6패로 작년과는 엄청난 차이를 보이고 있지만 기아 상대로 1승 8패를 기록하고 있는 부분은 반드시 고쳐야 할 것이었는데, 7월 4째주 주말 3연전에서 광주 원정을 스윕하면서 4승 8패까지 올렸다.[29]
전반기까지의 모습은 가을야구와 거리가 다소 멀었다. 김원중, 박진형[30]의 선발진의 성장이 더딘데다가, 윤길현은 기아전만 되면 불지르고 있고,[31] 신본기, 문규현, 정훈, 앤디 번즈 등의 내야 자원이 부상과 부진에 빠진데다가, 레일리는 부활했고 애디튼은 배팅볼 투수짓 하다가 전반기 막판에 살아났지만 린드블럼으로 다시 교체 되었다. 게다가 이대호는 6 ~ 7 월들어 급격하게 득병이 되어버리면서 심각하게 욕을 먹는 중이다.[32] 일단 전반기를 41승 44패 1무 승패마진 -3으로 7위를 기록하며 마쳤다. 4위권과는 4~5경기 차이이니 그 사이에 차이를 얼마나 좁힐수 있으냐가 관건이 될 듯 하다.
그러나 그 사이 치고 올라가면서 8월 18일, 4, 5위인 LG, 넥센과 게임차는 '''단 0.5게임차까지 좁혀졌고. 같은날, 롯데가 넥센을 잡고 4위를 탈환했다. 참고로 5위는 LG.'''
8월 31일 이제 NC와 마지막으로 붙게 된다. 이번 시리즈 결과에 따라서 손시헌이 억울해질 수도 있는 상황이기도 하고 3위 싸움을 할지 다시 내려갈 지를 결정하는 중요한 일전이 될 상황이다. 결국 NC와의 마지막 두 경기를 이기면서 8승 8패도 아닌 9승 7패로 롯데의 우세로 끝났다.
9월 17일 SK 와이번스를 스윕하면서 드디어 포스트시즌 매직넘버를 1로 줄이면서 다음 경기만 이기면 무조건 순위결과에 상관없이 포스트시즌 진출을 확정짓게된다. 그리고, 9월 21일 LG가 삼성에 패해 자력진출이 좌절되면서 롯데는 '''5년만에 가을야구를 확정지었다.''' 그리고 10월 3일, 3위의 고지에 오르게 되어 어쩌면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일생일대의 기회가 롯데에게 찾아왔...으나 NC 다이노스와의 준플레이오프에서 1차전에서 한 선수의 실책으로 9-2로 지고, 이후 승-패-승-패를 해서 2승 3패로 탈락하고 말았다. 말그대로 2011년 플레이오프의 재림이 된 것이다. 경험 부족이 가져온 아쉬운 결과인 것이다.
참고로 롯데의 2017시즌성적은 80승 62패 2무로다, 특히 후반기 한정으로 무려 39승 18패 1무를 기록하면서 후반기 승률은 6할 6푼에 근접했다.

3.3.4. 2018 시즌~ : 3차 암흑기



3.3.4.1. 2018 시즌 : 막판에 힘이 빠져 아쉽게 포스트시즌 막차 탑승 실패

한편 롯데는 지난 2년 동안 288억을 투자한 탓에[33] 이들을 모두 잡기는 매우 힘들고, 그렇기 때문에 어느 정도 연봉 총액의 증가를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잡아야 하지만, 최대어인 손아섭을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했는데, 결국 4년 98억에 재계약을 하면서 일단 한 고비를 넘겼다. 그리고 강민호가 타 팀으로 이적하면서 2018년 KBO 리그 2차 드래프트에서 괜찮은 수비형 포수를 구해오는 것 역시 필요한 과제였는데, 강민호의 보상선수로 나원탁을 지명하면서 위기를 넘겼다. 그리고 문규현을 2+1년, 10억에 잡으면서 일단 유격수 구멍을 최소화했다.
한편 군 제대 자원으로 투수로는 최영환, 이인복, 구승민 타자로는 내야수 자원인 오윤석이 새롭게 합류할 예정이다. 그리고 이 해 시즌 말미에 홍성민과 '''김준태'''가 드디어 돌아온다.
신인인 윤성빈이승헌도 합류할 가능성이 높다.
여기에 11월 28일 민병헌이 영입되면서 중상급 외야진을 구성하게 되었으나 오프시즌 도중 12월 13일 SBS 유영민 기자의 보도로 조쉬 린드블럼의 계약서 파동이 터지면서 꼴런트는 무지막지하게 까였다. 결국 대신에 2013년 보스턴 레드삭스의 우승 멤버이기도 했던 펠릭스 듀브론트를 새로 영입하면서 일단 구멍을 메웠다. 그러나 듀브론트의 경우 몸관리, 워크에씩 면에 문제가 있다는 평이 전 소속팀 보스턴, 오클랜드 팬들 사이에서 나오는 중.
그리고 개막전부터 경남고 출신 신인 3루수 한동희가 데뷔 첫 적시타를 기록하며 기대를 높이고 있다.
강민호는 놓쳤지만 그야말로 돈을 들이붓는 FA 지출과 KBO 페이롤 2위 팀[34]이라는 점으로 인해 여러 전문가들도 5강 멤버에 롯데를 놓을 정도로 희망적인 전망이 점쳐졌으나...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어 보니, 투타의 난조[35], 불안한 수비로 인해 6연패를 기록하며 단독 꼴찌를 차지했다. 롯데가 보인 한심한 경기력으로 인해 경기 이후 청와대 국민청원롯데자이언츠 해체 청원이 올라왔을 정도. [36]사실 26년 전에 이미 답변했다고 한다.
4월 6일 기준 2018년 첫 엘꼴라시코 이후 1승 10패로 1할 승률도 붕괴되었다. 역대 KBO 역사상 이런 초반 승률로 가을 야구를 한 팀은 전무하다. 총체적 난국의 경기력에 개선해야 할 부분을 굳이 꼽기도 힘들 지경. 그냥 꼴데 그 자체다. 오죽하면 롯데 팀 전체에서 손아섭만 야구한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 하지만 4월 10일~12일 넥센전에서 첫 위닝 시리즈를 가져가고 13일 현재 5승 12패까지 오르면서 조금씩 반등을 보이고있다. 그리고 4월 24일부터 6연속 위닝시리즈(중간에 1승1패 시리즈 1번)를 거두며 5월 14일 기준으로 승패마진 -1까지 줄이고 4위에 위치해 있다. 여러 모로 2009시즌과 비슷한 시즌인데 오랜만에 가을야구 진출한 다음 시즌 초반에 꼴찌에 몰려있다가 반등하는 점이 비슷하다.
다시 5월 하순에 또 3월 초반의 승패 재림이 일어나서 하위권으로 떨어졌는데, 또 6,7,8월에 승패마진을 채우다가 또 1승 10패로 무너지고 다시 9승 2패로 또 마진을 채웠고, 마침내 5위 KIA와 승차없는 6위까지 쫒아왔다. 하지만 kt와 치른 더블헤더에서 2연패했고, kt가 한화 상대로 승리해서 1.5게임차까지 벌어졌고, 결국 KIA를 상대로한 맞대결에서 3승 혹은 2승 1무를 해야 가을야구에 갈 수 있는 역대급 희망고문이 시작되었다. 물론 첫 경기에선 이겼지만, 그 다음 경기에서 패하는 바람에 트래직 넘버가 소멸해서 가을야구 진출에 실패했고, 마지막 두산과의 경기에서도 패해서 7데가 되었다.

3.3.4.2. 2019 시즌 : 15년만의 10위 달성. 2010년대 역대 최악의 시즌


시즌 내내 형편없는 경기력을 보여주며 구단 역사상 최초의 10위가 되었고, 결국 시즌 도중 감독단장이 동시에 사퇴하는 초유의 상황을 맞이했다. 특히 감독의 경우 '''KBO 리그로 명칭이 바뀐 후로 감독 부임 첫 해 중도 사퇴라는 최초의 기록'''까지 달성하였다(...). '''15년만의 꼴찌, 10개 구단 체제 최초 원년팀 10위, 그리고 또 KBO 역사상 최초로 한 시즌 90패를 세 번이나 기록한 최초의 팀이 되었다.'''[37] 또 '''10개 구단 체재 이후 50승을 거두지 못한 첫번째 팀'''[38]이라는 불명예까지 기록하였다. 그리고 구단들 중 유일하게 10승을 기록한 투수가 단 한 명도 없는 기록까지... 더불어 10개 구단 체제 역대 최악의 승률도 갱신하였다. 결국 꼴데의 시대를 다시 불러오게 된 거나 마찬가지다.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
이로 인해 다음 시즌 감독은 외국인 감독으로 정했으며, 그 후보군으로 제리 로이스터, 스캇 쿨바, 래리 서튼 등을 공개했다. 그런데 이후 협상이 잘 안 되었는지 다시 국내 감독 중에서 정하기로 해 비난을 받았다.
이후 각종 썰을 보면 이만수, 김기태, 김한수, 조원우, 허문회, 홍성흔, 조성환, 제리 로이스터, 스캇 쿨바, 박경완, 손혁 정도인데, 의외의 인물을 선택할 수도 있다. 롯데는 각종 썰을 빗나간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렇게 각종 썰들이 오간 끝에 롯데의 새 감독은 허문회가 되었다.

3.4. 2020년대



3.4.1. 2020 시즌 : 전 시즌보다는 나아졌으나....


초반에 무려 5승 1패를 내서 이변을 일으켰지만 그 뒤에 4연패를 두번해서 11승 12패로 부진했었다. 하지만 5월에 승패마진을 0으로 만들고, 7월에 승패마진 -2로 다시 마이너스가 되었지만, 8월에 14승 8패를 하면서 5할 위로 올랐다. 그리고 9월엔 다시 11승 14패를 했고 5할 + 1이 되었다. 하지만 10월에 그나마 있던 마진을 다 깎아먹고 결국 가을야구 진출에도 실패했다.게다가 이때 롯데는 '''전 구단 상대로 끝내기 패배'''란 굴욕도 세웠다.

3.4.2. 2021 시즌



4. 여담 : 롯데의 마지막 한국시리즈 진출 후


롯데가 얼마나 한국시리즈 진출 이후 공백이 긴지는 그 이후 한국 야구 역사만 봐도 알 수 있다.
심지어 사라진 구단이자 키움 히어로즈의 전신격 팀인 현대 유니콘스도 롯데의 마지막 한국시리즈 진출 이후 3번 진출('''2000년''', '''2003년''', '''2004년''')해서 3번 다 우승했다. 거기다가 SK 와이번스는 2000년에 창단해서 롯데가 한국시리즈를 다시 가기도 전에 역사의 종지부를 찍고야 말았다.
kt wiz와 롯데를 제외하면 모든 구단이 롯데의 마지막 한국시리즈 진출인 1999년 이후 한국시리즈 진출을 적어도 1번이라도 했지만, 롯데는 이 기간동안 고작 가을야구만 7번[39] 나가는 데 그쳤다. 이 기간 중 정규시즌 최고성적은 2011년의 2위였는데 이때도 플레이오프에서 SK에게 2승 3패로 업셋당하는 바람에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했고, 심지어 시리즈 승리를 기록한 적도 2012년 준플레이오프[40] 단 한 번 밖에 없으니 당연히 이 기간동안 한국시리즈 진출 기록이 '''없다.''' 그나마 kt wiz는 창단한지 불과 8년, 1군에 오른지 겨우 6년 밖에 안된 신생구단임을 고려하면 얼마나 안 좋은 기록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1] 당시 최약체 팀이었던 삼미만 아니였으면 최하위였다. 2005년 당시 KIA의 승률이 0.389였던 것을 보면 어느 수준이었는지 예상이 될 것이다.[2] 참고로 당시 삼성이 통합우승을 확정 지은 곳은 바로 구덕 야구장이였다.[3] 13승[4] 74완투승[5] 당시에는 역대 2위, 현재는 역대 4위, 1위는 1987년 3할을 기록한 삼성[6]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1992년 당시의 롯데와 2001년 두산, 2015년 두산에서만 나온 기록이며, 일본의 경우도 2010년 지바롯데에서 사상 최초로 나온 기록이다.[7] 상대 팀 감독도 공교롭게도 김영덕 감독이었다.[8] 당시 플레이오프는 리그 1위팀이 상대리그 2위팀, 리그 1위팀은 반대로 상대리그 1위팀을 7전 4선승제로 상대해야 했다. 그래서 매직리그 1위인 삼성을 피하기 위해선 롯데가 드림리그 1위가 되어야 했다.[9] SK는 1999시즌의 쌍방울 전력을 거의 그대로 가져온 거라 좋은 성적을 기대하기에는 어려웠고, 한화는 투수진이 폭망해서 시즌 초부터 일찌감치 떨어져 나갔다.[10] 익히 알려진 대로 선수협 사태의 주동자로 찍혀 트레이드 됐다. 1988년 최동원김용철의 사례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11] 한편 '''한국시리즈 우승팀''' 두산은 732득점 733실점으로 득실차가 -1이었다.[12] 사실 이중 계약 파동으로 논란을 겪은 건 롯데만이 아니었다. 한화도 2002년 프란시스코 캄포스라는 투수 용병을 영입했으나 밀워키로 뒤통수 치고 가버렸다(...) 그리고 대체 선수가 바로 레닌 피코타이다.[13] 모든 구단 역사상 뒤에서 1등은 1982년 승률 0.188의 삼미 슈퍼스타즈, 2위는 주전을 모조리 팔아치웠던 1999년 승률 0.224의 쌍방울 레이더스.[14] 그 1승조차도 19차전, 즉 마지막 경기에서 겨우 거둔 1승이다.[15] 이승엽의 마지막 타석 때 김용철 감독대행은 1루를 채우기 위해 고의사구를 지시했고 이 장면을 본 관중들은 물병부터 잠자리채는 물론 쓰레기통까지 손에 집히는 물건은 그라운드로 냅다 던져버리며(...) 불만을 강하게 터뜨리게 된다. 결국 김용철 감독대행이 그라운드로 불려나와 마운드에서 마이크를 잡고 공개 사과를 하고서야 사태가 다소 진정됐다.[16] 한화 이글스도 4연속 꼴찌를 한 적도 없다.[17] 2016년에는 상대전적 1승 15패라는 엄청난 굴욕을 겪었다.[18] 사실 연속기록이 단 2번밖에 없었다.[19] 패-승-패-승-패, 참고로 6년 뒤인 2017년 준PO때도 NC를 상대로 이 구도를 만들었다.[20] 최종 2위팀으로 기록되는 팀은 한국시리즈 준우승팀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플레이오프에서 진 팀이 3위라고도 할 수 있으나 정규시즌 4위로 준플레이오프를 이겨서 플레이오프로 간 팀은 져도 3위가 안 된다. (결국 정규시즌 2위나 3위만 최종 3위가 될 수 있다.)[21] 2008년에는 최종 순위가 3위였지만 준플레이오프에서 삼성에게 스윕당해 최종순위는 4위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데, 준플레이오프는 '''최종순위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이것은 3위에게 주어지는 약간의 어드벤티지. 그러나 만약 2008년에 삼성이 두산을 이기고 한국시리즈에 올라갔으면 롯데의 최종순위는 4위였을 것이다. 한국시리즈 진출 후 패배한 팀이 2위이기 때문에.[22] 이 시기 롯데 구단 직원 출신인 김태룡이 두산 단장으로 부임하여 롯데에 유리한 것으로 의심되는 선수이동을 많이 해서 두산팬들에게 까였는데 정작 두산 구단은 김태룡이 입사한 1990년부터 그가 롯데에 있을 때(1983~1989)보다 우승을 많이 했다. [23] 1992년과 같이 0.563으로 2위다.[24] 다만 13시즌에는 시즌 최하위 팀이 대놓고 개그를 선보여서(...) 승률 5할 3푼 2리를 찍고도 5위를 한 것이다.[25] 여담이지만 한화와의 마지막 맞대결에서 승리했지만, 넥센LG를 잡으면서 가을야구에 실패했다.[26] 이 사건은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 국회의원까지 나서서 사법처리까지 촉구할 정도로 중대한 인권침해 행위이다.[27] 이문한 전 운영팀장이 공개한 카카오톡 캡쳐에서도 야알못이 훈수 두는 수준으로 세이버메트리션 코스프레를 하고 있는데, 진짜 세이버메트리션을 둔 팀 프런트는 별도 데이터팀을 두고 통계, 수학 및 야구 전문인력을 영입해 현장의 의견을 신중하게 듣고 분석한다.[28] 당시 LG는 중하위권이었다.[29] 그리고 NC는 이후 기아와의 전반기 마지막 3연전에서 스윕을 당하며 3위로 추락했다가 이후 DTD로 인해 두산과 3위 싸움을 하게 된 상황이다![30] 결국 후반기 불펜으로 전환.[31] 사실 다른 투수들의 사정도 좋지만은 않다. 박시영의 경우 경기를 많이 뛰어서 구위가 많이 죽었으며, 손승락은 잊을때만 하면 가끔 블론이 나온다. 배장호는 패는 없었지만 6월 14일 경기 첫 패를 떠안았다. 그나마 롱 릴리프로 뛰고 있는 강동호김유영이 잘해주고 있는 부분은 다행인 상황.[32] 9월 3일 경기에서 31호포를 쳐내면서 일단 30홈런-100타점은 성공했다. 3할 유지 여부가 관건.[33] 이대호 150억 + 손승락 60억 + 송승준 40억 + 윤길현 38억[34] 2017년 KBO에서 발표한 자료 기준으로, 신인선수와 외국인선수는 계약금, 환율 등의 영향으로 인해 제외되었다. 연합뉴스 기사에서는 외국인선수와 신인선수를 제외한 연봉총액 1위가 KIA, 2위가 롯데라고 명시되고 있는데, 이건 이대호, 민병헌, 손아섭의 영향이 크다.[35] 홈런이 안 터지다 보니 오죽하면 강백호 선수와 김롯데 선수가 2018년 최다홈런 경쟁에 들어갔다는 농담도 돌았다. 민병헌의 경우 두산 재적시 월별 타격지표가 극과 극을 달렸다는 지적도 있었다.[36] 결국 이 국민청원은 부산일보매일신문로 떴다. [37] 2002년(97패)과 2003년(91패)[38]kt도 50승은 거두었다(...). 당시 성적은 50승 94패.[39] 2000,2008,2009,2010,2011,2012,2017[40] vs 두산, 3승 1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