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기계화보병사단
[clearfix]
1. 개요
경기도 양주시를 근거지로 했던 제7기동군단 소속 사단. 별칭은 '불무리부대'''. 1953년 6월 18일 창설되었으며, 2018년 11월 30일 해체되었다.
2. 상세
6.25 전쟁 막바지인 1953년 6월 18일 전북 익산군(현 충남 논산시)[1] 에서 제73, 75, 76연대를 기반으로 창설되었다. 한국전쟁 이후 화천군, 양구군, 연천군을 거쳐 1964년 현 주둔지인 양주시에 자리를 잡았다. 사단 본부와 직할대 일부는 양주에 있지만 각 여단들이 동두천-연천까지 아주 넓게 흩어진 관계로, 간부가 아닌 이상, 또 대규모 훈련이 아닌 이상 같은 여단 외의 부대원들을 볼 일이 거의 없었다.
1979년 12.12 군사반란 때 수도기계화보병사단과 같이 (시위, 쿠데타를 진압하는) 충정부대였다. 1980년대까지는 진압훈련도 빡세게 받았으나, 1990년대 들어 민주화가 되며 간소화되었다고 한다. [2]
1994년 10월 1일부로 기계화보병사단으로 개편되었다. 이 과정에서 달랑 장비만 던져준 탓에, 기존 기계화부대의 노하우는 고사하고 기본적인 교리조차 전달받지 못했다. 결국 당시 부대원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말 그대로 맨땅에 헤딩해가며 하나하나 습득하는 바람에 장교로부터 병사들까지 꽤나 고생했다. 이 와중에 사격장에서 병사가 소대장ㆍ중대장을 사살하거나 장갑차가 전복되어 사망하는 등 문제가 많았다. 1994년에 30사단 소속 92여단 120기보를 26사단 소속으로 바꾸어 교육하여 다소 체계가 잡혔다.[3] 다른 기보사단이 없는 것도 아니고 이미 3개 기계화보병사단과 여러 기갑여단이 있는데 4번째 기보사단으로 개편되며 일어났다. 즉, 대한민국 국군이 이미 해당 병과 장교와 부사관을 상당수 확보한 상태에서 벌어진 일이다. 2014년 호국훈련에서 최초로 하루만에 여주 남한강 방어선을 돌파했다.
별칭은 불무리부대. 부대 마크가 마스터카드 로고를 연상시켜 '(마스터)카드부대'라고 자주 불리며[4] , 로고가 고환을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쌍불알부대'[5] 라는 별명이 있고, 그 밖에도 잘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피고름멍 사단[6] ' 등의 별명이 있었다. 원래 해와 달을 형상화한 마크라, 해가 뜨면 고생 시작해서 달이 떠도 고생이 안 끝난다고 풀이하기도 했다.
경례구호는 공격. 대한민국 국군을 통틀어 26사단만 사용했다. 호불호가 갈리는 구호. 이유는 과거 최정예 공격사단이었다는 것. 실제로 기계화여단과 사단들 중에서 가장 공격에 특화되었었고 그럴 목적으로 존재한 사단이었기 때문이다.[8] 아무튼 유일한 경례구호로 인해 26사단 신교대에서 훈련받고 후반기교육을 이수하러 후반기교육부대에 들어가, 그 교육부대의 경례구호가 아니라 (신교대에서 했던) '공격'을 외치다가 주변 교육생들이 웃는 일도 일어났다. 발음상 크게 외치기 힘든 구호라, 크게 외칠 때는 '''홍혁'''으로 발음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고, 논산 출신이 26사단에 와서 충!격! 이라고 외친 일도 있었다.
사단 구호는 "Speed 불무리! Victory 불무리!" 였는데 나중에는 그냥 '참싸움꾼 그린존 26 구호'라고 하여 "존중과 배려! 칭찬과 격려! 헌신과 솔선수범! 선진병영문화 정착으로 유쾌한 그린존 26사단(또는 각 예하부대)!"로 바뀌었다.
공격 대원 수첩이라는 것을 나눠주었다. 2015년 서부전선 포격 사건 당시 반격 포격한 여단이 이 사단 소속이다.[9] 이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또한 모든 훈련소 중 유일하게 신교대에서 무박 공격대원 극기훈련을 한다는 것도 자랑한다. 죽을 맛이다. 전날에 공격대원 출정식을 한 뒤 사격행군ㆍ사격ㆍPRIㆍ주간 각개ㆍ야간 각개를 하고 나서 쉬지도 못하고 야간행군에 돌입했다. 그리고 끝나면 재우는 게 아니라 맹세식이라고, 사단 본부 사단장 앞에서 인식표와 사단 마크를 수여하는 행사를 한다. 도중에 쓰러지는 사람이 나오면 간부들은 식겁... 이고 자주 있었던 일이라고 한다.
군 구조를 개혁하려는 작어에 따라 2010년대 중반부터 슬슬 해체하는 과정을 거쳤다. 2016년 12월 1일부로 6군단에서 7군단으로 예속된 것도 사단 개편을 위한 준비작업이었다. 75여단ㆍ76여단 등이 먼저 해체되었고 75 예하 38전차가 5기갑여단으로 복귀했으며, 76예하 126기보대가 5기갑으로 배치되었다. 75여단 산하 125기보대는 73여단으로 옮겨졌고, 27전차는 분해되었으며 마찬가지로 25전차도 해체되었다. 그래서 옆으로 누워있던 사단마크가 옆으로 서서 오뚜기가 된다는 우스갯소리도 나왔다.
하지만 이 사단도 저출산에 따른 군비축소 대상이 되어 2018년 11월 30일, 국방개혁 2.0에 따라 제8기동사단으로 통합되었다.
3. 예하부대
3.1. 사단 직할대
- 기갑수색대대
편제는 본부중대와 전투중대로 나뉘었다. 자세한 편제 및 관련정보는 수색대 문서의 기갑수색대대 항목 참조 바람. 기갑수색이란 이름에 걸맞게 훈련을 미친듯이 하는데, 거의 사단에서 짬당한 훈련들이 대부분이었다. 군단ㆍ사단ㆍ여단ㆍ포병 등 여러 부대와 훈련하므로 이 부대에 전입 왔다면 시간은 굉장히 빨리 흘렀다.
막사는 침상형 생활관의 구형 통합막사를 사용했다. 지어진 지는 오래됐지만 몇 번 보수공사를 하여 특별한 문제는 없다. 정비과나 수송부 등 처부를 제외하고 모든 중대와 모든 처부가 한 건물에 있다. 사단본부에서 차로 10분 거리라 검열을 자주 받았다.
교통여건이 굉장히 좋기 때문에 다른 부대에서 연병장을 훈련 중 숙영지로 쓰거나 행군 반환점으로 삼기도 했다. 이 부대가 일종의 목진지인 셈. 부대 앞에 전용 버스정류장이 있을 정도이며 버스도 많이 다닌다. 양주역 혹은 덕정역과 접근성이 가장 높아 영내에서 생활하는 독신간부들에게는 상당히 좋지만, 병사들에게는 그림의 떡. 근무 서면서 전철 지나가는 것을 목격할 수 있는데, 보통 10번 보면 근무가 끝났다.
바로 옆에는 축소사격장이 있어서 사격훈련 시 안전을 위해서 주변에 거주하는 주민의 입산을 통제하기도 했다. 일단 기계화부대인 만큼 부지가 상당히 크고 산에 걸쳐 있어서 부대관리하려면 꽤나 큰 공사가 된다. 부대 인근에 이미 다른 곳으로 옮겨간 (구) 화학대 부지가 있어서 기갑수색대대에서 일반인 출입을 통제했다. 군사보안상 이유로 방치할 수 없고 지속적으로 관리해야 하므로 애로사항이 많았다. 바로 뒤 공동묘지 방문객 및 등산객들에게는 이곳의 통행가능 여부에 따라서 먼 길을 돌아가느냐 아니냐가 갈리므로 중요했다. 게다가 부대 훈련로의 일부이므로 과거 이곳을 통행하지 못한다면 죽음을 맛보아야만 했다. 더불어 사단 유격장 관리도 맡아서 1년에 2번 부대 내 모든 인원이 투입되어 넓디 넓은 유격장을 보수하러 갔다. 사단 내 유격 교관 및 조교도 담당해서 범사단적 어그로를 끌었다.
다만 유격훈련이 줄어들어 아쉽게도(?) 파견 가는 일은 줄어들었다. 막사 건물 사이에 호랑이 멀티방이라고 컨테이너 건물에 노래방 및 플스방이 있고, 그 양쪽에 인조 잔디 풋살장 및 족구장이 있어서 쾌적하게 운동할 수 있다. 족구장은 주로 간부들이 많이 사용하는데, 시멘트 공구리 쳐서 만들어서 궤도차량 이동시에 잘못 기동하여 살짝 건드려 깨지면 대대간부들에게 온갖 쌍욕을 먹을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풋살장은 조명이 있어서 동절기에 일찍 어두워져도 사용할 수 있고, 철조망을 둘려쳐서 공 주으려고 고생하는 일도 줄어들었다. 참고로 식당 앞쪽으로 농구코트를 만들었는데, 역시 공구리 쳐서 만들었고 높이도 낮아서 농구하는 데 많이 불편했다.
영내 간부숙소[10] 앞에는 클레이코트 형태로 테니스장이 있어서 역시 간부들이 자주 이용한다. PX 앞에 막타워가 있었지만 안전점검 후 부적격 판정 받아 철거하고 씨름장이 들어섰다. 그 외에도 탁구장이나-헬스장 등을 만들었지만 일단 부대 내 건물이 노후화된 관계로 외부 가건물에 조성하였다(사라지고 헬스장은 본관 건물로 옮기고 탁구장은 없앴다.) 막사 건물이 노후화된 점만 제외하면 그외 부대시설은 타 부대에 비해 양호한 편이었다.
부대 내에 교회가 있어서 일요일마다 외부에서 목사님 이 오셨다. 종교활동은 사단 사령부 종교시설로 갔다.
부대 내에 민간인 묘지가 있어서 명절때나 기일로 추정되는 날에 후손들이 정기적으로 출입했다. 2018년에 사단이 독립 기갑여단화되므로 직할대 건물은 앞으로도 현재 편제에서 신 막사가 될 일은 없을 듯하다. 그 후를 기대해 보자.
- 공병대대
사단 사령부 내에 같이 있다. 26사단 종교시설과 상당히 가깝고, 돈을 뽑을 수 있는 ATM기기도 근처에 있어, 종종 돈 뽑으러 오는 경우도 있다.[11] 교육훈련 장소가 불곡산 등산로와 겹치는 바람에 교육훈련을 하다가 등산 동호회 사람들과 자주 마주친다.[12] 간혹 사단 내 다른 대대의 면회를 이쪽으로 오는 경우도 가끔 있다.[13] 그리고 간부아파트와 가장 가깝다는 이유로, 필요한 일이 생기면 거의 첫 번째로 불려가 작업하는 부대이기도 하다.(도서관 건설 전 땅 다지기, 헌병대 나무 가지치기 등등).
희한하게도 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기 사단전투력 측정에서 수색대대를 압도하는 기적을 보인 적이 있다.
해체 전까지 2중대는 본부가 있는 양주가 아닌 75여단이 있던 경기도 연천군 전곡면에 독립중대 형태로 주둔했다. 독립중대로 1개 중대만 따로 나와있다보니 중대장과 행보관은 상급자 눈치를 보지 않고 왕처럼 생활했고, 이 때문에 본부와 달리 부대 분위기가 비교적 자유로웠다. 대신, 주변 전투부대가 훈련을 할 때마다 각종 훈련에 차출돼 다른 중대보다 훈련량은 많았다. 나중에 2중대는 공병대대 안으로 부대를 이동한다. 새건물을 짓지는 않았고 예전 체력단련실을 개조해서 생활관으로 만들었고 간이 화장실과 간이 샤워장을 이용한다(이 모든걸 공병 장병들이 만들었다) 천장 공사하던 중 고양이 시체가 있을 정도로 낙후된 시설을 리모델링 했으면 말을 다했다.
- 방공대대
여타 방공부대와 마찬가지로, 본부는 있으되 병사는 여기저기 흩어진 그런 부대다. 부대 부지가 거의 평지인 데다 포장도 잘 되어서, 아침에 뜀걸음하기 생각보다 매우 '적절한' 환경이다(...) 원래 발칸을 운용했지만 2006년도 후반기에 기존 발칸과 부대원 얼마를 쪼개서 다른 사단으로 보내고 비호를 도입해 부대를 다시 창설했다. 시설은 사단 내 탑5 안에 든다고 할 정도로 훌륭했고[14] , 1중대는 독립중대로서 다른 위치에 주둔하다가[15] 대대로 통합되었다.
방공부대의 임무 특성상 적지 않은 병력이 방공지원 형태로 파견을 나가기 때문에, 대대에 주둔하는 병력은 총원에 비해 상당히 적다[16] . 특이하다면 특이한 것이, 인원이 매우 적기 때문에 대대 전체 병력이 선후임 관계라는 것. 대대 병사들 간에 전우님(아저씨)은 없다. 그러나 중대가 다르면 선/후임 호칭 외에는 서로의 생활에 간섭하지 않는다.
- 보급수송대대
정보통신대대와 한 건물을 사용하며, 건물이 'ㄱ' 자로 나뉘어져 중간을 철문으로 막아놓았다. 보급중대와 수송중대로 나뉘며, 서로 경례는 하지 않지만 존칭은 써준다. PX를 관리하는 대대이며(2015년 기준 통신대 1명 보급대 1명 본부대 1명), 매주 월ㆍ수ㆍ금요일은 1종부식이 들어오는 날이기 때문에 보급중대에서 짬이 낮은 병사들이 차출되어 1종 창고병과 함께 부식을 싣는 '부식지원'을 한다. 한 번씩 2종 유지창고로 '휴지직납'이 업체를 통해 바로 들어오는데, 이때 역시 중대작업으로 병사 대부분이 인간 트레일러가 되어 거대한 휴지박스를 전달하고, 유지창고병은 그것을 6단으로 쌓아올리는 테트리스 기술을 시전했다(...)
사단 사령부 내에서 병사식당과 제일 가깝기 때문에 취사지원이 매일 중대에서 한 명 차출되어 나갔다. 2018년 대대가 2017년 해체된 65사단 자리에 들어갈 예정이였으나 유야무야되고 지금까지도 이동하지 않았다.
신교대 앞에 정찰대가 있어서 간혹가다가 UAV(무인정찰기)가 비행을 한다. 간혹 정찰대 활주로로 사단장급들이 헬기를 타고 온다(목격담).
훈련중대는 교육 1ㆍ2ㆍ3중대가 있는데, 예전엔 지옥(제식)의 1중대, 피의 2중대, 꿀(평화)의 3중대라고 불렸다. 하지만 요즘엔 제식의 1중대, 꿀의 3중대, 평화의 3중대인데, 3중대가 제일 빡쎄다. 1중대는 제식하고 군가만 빡시게 하지 나머지는... 본부중대 안에 분대장 교육대가 있다.
모든 건물이 신식건물인데, 교육중대 건물은 3층 침상형 신식건물이다(조교들은 침대형). 겨울에 더울 정도로 난방이 잘 되며[17] , 교육중대 조교들은 교육과 위병소 근무(훈련병도 같이 참여)를 서는 이중고에 시달린다. 본부건물은 최신식 건물이며 2층 침대를 쓴다. PX를 포함해 사지방이 같이 있기 때문에 근무조건은 최고이며, 취사병들과 같은 중대라 간간히 건빵튀김이 배달 오는 경우도 있었다. 의무실 바로 앞에 PX가 있기 때문에 병사들에겐 상당히 편리한 막사.
의무실에서 치료받는 훈련병에겐 희망고문이지만 걱정 말자. 중대마다 다르지만 1주일에 1회 정도 전화 가능, 약 3주 후에 생필품 구매를 위한 PX 일 회 사용 가능, 약 1주에 2~3회 야간 부식을 제공한다(초코바ㆍ빙×레 바나xx맛우유 라이트ㆍx시콜라 등). 하지만 중대장의 재량에 따라 달랐다.
후반기 교육을 마치고 오는 곳이 신병교육대 보충대인데, 타 사단 보충대는 사단본부에 보통 있지만, 여기는 보충대가 신교대에 있어 보충대에서 교육을 받을 동안에도, 그리고 점호를 할 때도 신교대 방식으로 하기 때문에 타 사단 보충대보다 분위기가 엄했다. 사격장 등 훈련장을 가기 위해서 번화가 를 지나서 걸어가야 했다.
훈련소 근처에는 식당이 많지만 한참 배고픈 훈련병들에게는 그림의 떡이다. 보충병들은 주간에 교육이 있으면 교육을 받고, 그렇지 않으면 취사지원을 하거나 다른 조교들과 함께 작업에 투입되기도 한다. 보충병은 훈련병 식당이 아닌 별도의 기간병 식당에서 식사한다. 영외 BOQ라서 독신 간부들에게는 천국과도 같은 부대.
하지만 2017년 17-16기를 끝으로 신교대 운영이 중단되고 2018년 11월 30일에 8기계화보병사단에 통합되어 사단이 해체됨으로써 신병교육대도 해체되었다.
- 정보통신대대
보수대대와 마찬가지로 사단 사령부 내에 같이 있었다. 가보면 왠지 아니나 다를까 공대에서 느꼈던 그 분위기가 다시금 느껴지곤 한다(...) 운용중대와 무선중대ㆍ본부중대로 나뉘며 불곡산 정상에 통신파견은 무선중대가 담당했다. 영내/영외에 전화가 안 되면 막바로 달려가는 부대였다. 사단사령부 후문의 경계를 담당했다.[18]
운용중대는 사단의 유선통신을 담당했는데, 그 때문에 사단본부나 직할대, 때로는 각 여단에까지 자주 지원 나갔다. (전화나 인터넷이 안 되면 부르는 아저씨... 잘하면 본전, 못하면 개까임.) 장비만이 아니라 통신선 관리까지 담당하므로 보직 특성상 타 부대 내를 왔다 갔다, 지붕이나 전봇대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경우가 많아서, 열심히 훈련 중이거나 작업 중인 타 부대 전우님들 주위를 지나가면 저건 뭐여...하는 시선을 종종 보내주었다. 간부가 불러서 "너넨 뭐야?" 물으면, "네, 통신지원 나와서 작업 중입니다." 하면 "어, 그래..."로 마무리. 가끔(때마다)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사단본부로 파견 가서 사단장과 그 이하 통신라인을 작업할 때에는 중대장이 직접 전선을 까고, 간부와 사병 모두 손을 벌벌 떨며 작업을 한다고.
유선과 무선의 대립이기도 하기에 운용중대와 무선중대는 라이벌 심리가 있다. 본부중대는 상대적으로 인원이 적기 때문에, 대대 체육대회라도 있으면 일찌감치 포기하고 재밌게 싸움구경을 한다. 사단장을 심심찮게 볼 수 있지만 왜인지 부대 분위기는 여유로운 편이었.[19] PX와 식당 모두 가깝기 때문에 6시 내고향처럼 먹거리는 풍요로운 군생활을 할 수 있었다.
- 정비대대
각 여단의 정비지원 및 수송, 병기부속보급 업무를 주로 한다. 대대본부가 사단사령부에서 도로 하나만 건너면 있어서 쓸데없이 행사에 많이 동원되었다. 2018년 현재 대대가 2017년 해체된 65사단 자리에 위치한다.
- 의무근무대
양주역이나 의정부역에서 버스를 타고 들어오면 정류장 이름이 '의무대'이다. PX가 없어서 다른 부대 갈 때 한 명이 싹 사오거나, 양주병원에 갈 때 이용하다가 2010년 컨테이너에 PX를 차렸다. 각 여단본부 내에 있는 의무대는 전부 사단의무대에서 여단본부로 파견 나가는 형식을 취하므로, 실제 군생활을 여단본부에서 하더라도 소속은 의무대대였다. 한때 일반지원중대(여단에 파견 나가지 않은 중대)는 사단 내에서 부조리가 심하기로 소문이 자자했다고 한다. 한 운전병은 보충대에서 의무대로 배치받자 기쁨의 환호성을 질렀지만 조교가 "넌 X된겨, 임마." 하고 말해주었고, 다음 날 조교가 한 말의 뜻을 이해했다고 한다.
2004년쯤 유괴범들에게 쫓기던 여자아이가 울면서 의무대 위병소로 뛰어든 일이 있었다. 초병들이 총을 들고 유괴범(으로 추정되는) 차량에 다가서자 거수자들은 고민하다가 달아났다고... 당시 위병소 근무 서던 인원들은 전원 포상휴가를 받았다.
- 본부근무대
본부근무대 안에 군악대, 수송소대, 경비소대, 참모소대, 본부소대가 있으며, 신병교육대대와 마찬가지로 신식막사다. 소대가 서로 달라도 선후임으로 인정되지만 소대 간 터치는 없었다. 문제가 있으면 보통 타소대 친한 동기를 통해 문제를 해결을 했었던 편. 사단장과 중령급 이상의 간부들을 자주 만나야 하는 인원들로 구성되어[20] 똥군기와 부조리가 생기기 정말 쉬운 환경이었다. 실수가 나오는 순간 사단 전체에 피바람이 불 수도 있으므로.
일례로 2015년 사단장이 본부대 참모소대원들은 군기가 없다고 전방부대들에 (222포병대대 외 3부대) 가서 다른 병사들은 얼마나 힘들게 하는지 3일씩 강제 파견을 시켰는데, 오히려 전방 부대원들만 고생하고 파견 간 참모소대원들은 간부들에게서 벗어나 정상적인 일과생활을 할 수 있어서 행복을 느꼈다고... 참모소대는 보통 본부근무대의 간부들과 사령부 간부들 간의 기싸움에 말려서 스트레스를 받았는데, 처부 간부들이 A를 시키면 본부대 간부들이 B를 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대신에 짬이 차면, 처부에서 잔업이 있다고 해서 본부대 내 귀찮은 일들을 빠질 수 있었다 (물론 이 때문에 타 소대들한테서 욕먹었다).
사단사령부 안에 보수대ㆍ통신대ㆍ헌병대ㆍ공병대ㆍ본부대가 같이 있는데, 의무대가 유일하게 공병대대에만 있었다. 결국 2011년 본부대에 의무실을 개설하여 공병대 의무병과 (새로 받은) 본부대 의무병이 함께 있도록 했다. 공병대 의무병은 본부대 의무실을 처부로 삼아 출퇴근했다.
식사 및 PX 이용은 정보통신대대와 보급수송대대가 있는 곳에서 했다. 시설도 좋고 연등도 꽤 자유로운 편이었다고...물론 당직사관에 따라 달랐다.
- 군악대
사령부 내에 같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편제상 본부대 소속. 참고로 이쪽도 신막사다.
비행장과 같은 주둔지에 있어서 본의 아니게 비행기를 자주 구경할 수 있다. [21] 비행장 안에 4개 부대가 있는데, 나머지는 UAV운용중대[22] 이고 정찰대만 따로 병력을 유지한다.
박쥐 흉장을 사용하며, 신교대와 길 하나를 사이에 둔다.
사단자체 국지도발이 걸리면 대항군으로서 사단사령부에 침투한다. 어느 병사는 "사단사령부 담장이 제일 넘기 쉬워요'." 하고 말한 적이 있다. 훈련을 나가면 저항군으로 자주 볼 수 있는데[23] 정작 간부들은 신경쓰지 않는다. 그냥 병사들끼리 숨박꼭질하는 것이다.[24]
26사단 신병교육대에서 이쪽으로 전입할 때 자신이 유단자라고 밝히거나, 운동을 좀 했거나, 축구를 잘하거나 하면 면접에서 유리할 수 있다. 부대 주변이 활주로라 구보하기 딱 좋다. 전방을 보면서 구보하면 마치 러닝머신에 올라선 듯했다. 종종 산악구보나 군장구보를 했다.
신교대에서 헬기 레펠 훈련을 하는 정찰대 병사들을 가끔 볼 수 있다. 헬기 레펠 훈련은 1년에 4번 받는데, 생명수당을 추가로 받기 때문에 부상 있는 병사를 제외하고, 간부를 포함한 전 병력이 참여하고자 한다. 1회 탈 때마다 거의 한 달 월급의 1.5배를 더 받는 수준. 유격 훈련 시즌이 되면 정찰대가 유격 조교 임무를 맡는다. 정찰대원은 유격훈련 이전에 유격장에 올라가 배정받은 코스에서 훈련하고 코스와 제원을 설명하는 대사를 외웠다.
PX는 정찰대가 관리하며 위병소와 마주 보는 작은 건물인데 매우 협소하다. 부대시설이 매우 열악해서 독서실ㆍ체력훈련장ㆍ족구장ㆍ농구코트 등이 전부였다. 족구장은 말이 족구장이지 활주로 도로에 네트쳐놓고 족구하는 것. 일과가 끝나면 대부분은 축구를 하지만, 짬이 좀 되는 인원들은 체력단련장에서 운동했다. 막사는 철관물대를 쓰는 구형 막사로 라디에이터로 난방했다.(...)
- 헌병대
역시 사단사령부 내에 같이 있다. 사단 사령부 내에 있는 것치곤 시설이 구렸으나 신 막사로 바뀌었다. 공병대대 신병들이 헌병대 신 막사를 보고 희망에 부풀었다가 공병대 가서 절망에 빠진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타 기보사 헌병들과 다르게 사단사령부 바로 앞에 있는 정비대대 궤도차량 한 대만 움직여도 헌병지원(교통통제)을 나간다. 헌병인데 자대배치를 이리 받았다면, 확실히 전역 후에 쇼핑몰이나 웨딩홀 주차장 취직(?)은 보장된다 할 수 있겠다.
- 화학대
몇 년 전 공동묘지로 둘러싸인 곳에서 현 부지로 옮겨왔다. 현재는 정비 1중대와 같은 울타리를 쓰는 중이다. 막사는 오래된 신 막사라서 호불호가 갈렸다.
3.2. 제73기계화보병여단 맹호
3.2.1. 제27전차대대 강풍
지금은 해체되었다.
3.2.2. 제38전차대대 불사조
사단해체에 앞서 상급부대인 75여단이 먼저 해체되자 친정이던 제5기갑여단으로 복귀했다.
3.2.3. 제57전차대대
3.2.4. 제121기계화보병대대
26사단 해체 후 제2기갑여단으로 예속
3.2.5. 제123기계화보병대대 비호
3.2.6. 제125기계화보병대대 한마음
3.3.
눈앞에 실시간 심시티(신도시, 고속도로)를 직접 확인할 수 있었던 부대였다.[25]
위병소를 들어가면 오래된 M-48전차가 갈림길에 전시되어있고 그것을 기준 11시방향은 여단본부, 2시방향으로는 25전차대대가 주둔했다.
전차 뒤쪽으로 대연병장이 있는데 15년도에 허허벌판 모래뿐이던 대연병장에 잔디를 심었다. 원래 예하대대인 126기계화보병대대보다도 시설이 구렸으나 10-11년도에 리모델링을 하고 아래 있는 25전차대대가 영내에 함께 이전하여 부대가 복잡해졌다.
여단 내부에 전차대대가 함께있었기 때문에 전차주차장과 사단직할대 정비대대 1개중대(정비고), 독신간부BOQ가 여단에 함께 있어 영내규모가 제법컸다. 이 때문에 같이 사용하는 건물들이 몇몇 있다. (식당, PX[26] 위병소, BOQ)등
군의관이 배속되어있었고 25전차대대의 병사들도 순환진료를 했었다.
점호는 여단과 25전차대대가 따로하거나 같이할때가 있는데 따로할때도 여단에서 애국가를 틀기 때문에 같이 애국가를 제창한다.
126기계화보병대대에서 점호하는 목소리가 들릴정도로 가깝다.
종교는 기독교는 영내밖 126기계화보병대대 앞에 있는[27] 교회에가며 여단장이 여단군종장교가 보임하여 사실상 여단교회라고 봐도 무방하였다. 불교는 영내에 있는 불교건물에 갔다.
2018년 사단해체, 통합과 함께 여단도 해체되었다.
3.3.1.
원소속은 제1기갑여단이며 경기도 포천시 영북면 야미리에 있었지만 2011년 말에 양주시로 이전[28] 했다. 이전한 곳이 어디냐면, 이 문단 아래에 있는 126기계화보병대대에서 왕복2차선 길 하나 건넌 곳 이다. 바로 여단 본부 내(...). 건물은 완전히 새로 지어서 침대식 생활관을 비롯, 깔끔하지만 여단 안의 대대라 그런 장점이 다 희석되었다. 특히 가끔 대대 생활관에 여단장님이 직접 출현하셨다!!!(...). [29] 그래도 PX만은 인기.[30] .
점호는 대대막사 앞 구 여단막사건물(창고) 소연병장(족구장)에서 진행했으며 상술한 것과 같이 여단 애국가 방송에 맞춰 점호를 시작했다.
식당은 여단과 함께 사용하였으며 병사 편의시설로 PX와 PC방[31] , 콘솔게임(철권7), 코인노래방, 풋살장(여단공용, 우레탄도포.)이 있었다.
원래 25전차대대엔 군의관 편제가 없으나, 높으신 분들의 사정으로 군의관이 배치되었었다.(08~11년도 기준) 부대이전이후 다시 의무부사관이 배치되었다.
부대를 옮기고 나서 유난히 민간행사가 많아졌다. (특히 유치원소풍, 초, 중학생 병영체험행사... 여단과 함께 체험행사를 진행할때가 많았다.)
옥정지구 주민행사에도 참석하기도 했다.
위병소는 여단과 붙어있기 때문에 여단위병소를 같이 사용한다.
위수지역은 과거 송우리에서 이전 이후로는 의정부~ 동두천 까지 풀렸다. 가까운 역인 덕정역까진 버스로 10분정도이고 의정부까진 40분정도의 거리..
부대 코앞에 양주신도시가 들어서는 실시간 심시티를 하는 중인 데다가 주변에 민가가 상당하고 훈련할때 전차 자력기동도 하기 때문에 훈련하려면 좀 멀리 나가야한다.
2018년 부대 해체되었고 전차들은 해병대를 비롯 타 부대로 인계되었다.
3.3.2.
26사단 예하부대 중에서 거의 나홀로 남쪽에 뚝 떨어진 부대로 주변에 북한산이 있다. 물론 북한산을 통과하는 수도권제1순환고속도로가 대대 정문 앞에 떡 하니 있음이 특징. 여단본부와 거리가 꽤 있는데 오히려 사단본부가 더 가깝다. 가장 가까운 부대가 제30기계화보병사단과 제72보병사단일 정도로 소외받는 지역에 있었다.[32]
워낙 단독으로 떨어진 부대위치 때문에 군의관 한 명이 상주했다.[33]
사단 해체전에는 같은 76여단의 126기보대대와 3개월 마다 번갈아가며 asp에 투입되었다.
부대 내부에는 장갑차 기동로(공격로)가 부대건물을 중심으로하여 형성 빙 둘러 형성되어있다.
이 기동로는 K-200장갑차운용 신병훈련과 부대개방행사 때 장갑차탑승행사에도 사용했다.
종교행사는 기독교와 불교는 부대 내부의 교회(초코파이), 법당(국수)으로 가고 천주교(가나파이)는 사단앞 성당을 갔다.
부대편의시설은 교회, 법당, PX, 코인노래방, 콘솔게임(철권7), 사지방OR헬스장(같은 건물)이 있었다.
이 부대의 진가는 가장 남쪽에 있기 때문에 누릴 수 있는 서울특별시와 의정부시와의 접근성이었다. 외박을 나가서 놀기도 편하고, 부대 복귀가 굉장히 빠르다는 것이 장점. 부대앞 버스정류장에서(거의 전용) 23번을 타고 의정부역까지 대략 20분정도 걸린다. 송추쪽으로 좀 걸어가서 704번을 타고 은평, 서대문을 거쳐 서울역으로 갈 수도 있다.
또 다른 장점이라면, 장병 편의시설인 PX가 상당히 큰 편이었다는 것. 여단 본부에 있는 PX보다 규모가 크고[34] 품목 면에서도 다양했는데, 이유는 PX담당관 이외에는 아무도 모를 듯하다. 여단 본부에서 파견된 일반병사들도 의아해할 정도.
단점은 부대 주변으로 북한산 둘레길이 위치해있어 겨울을 제외한 모든 계절에 등산객들이 수두룩하며,[35] 여름이면 불과 1km 인근 유원지에서 들려오는 즐거운 웃음소리 때문에 한층 더 우울해진다. 막사는 현재 구 막사이며,[36] 시설은 26사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구렸다. 14년까지 여름에는 선풍기로 겨울에는 중대하나가 온풍기로 버텼다! [37]
그러나 이 부대의 진정한 단점은 그게 아니었다! 이 부대는 원래 30사단 92여단 소속이었다가 26사단으로 넘어갔는데, 그 때문에 1군단과 6군단 양쪽에 모두 편제되었고, 그래서 훈련을 두 배로 뛰어야 했다! 26사단은 6군단 소속이지만(16년 12월까지) 120대대가 1군단 지역에 있기 때문에, 사단에서 하는 각종 전술훈련은 사단의 통제를 받지만 5분대기나 국지도발 훈련 등에선 1군단의 통제를 받는다. 훈련뿐만 아니라 의료지원도 해당되기 때문에, 26사단 예하부대는 원래 양주병원으로 외진을 가야 하지만, 120대대는 1군단 관할지역에 있다는 이유로 고양병원으로 외진을 간다. 하지만 ASP 위치가 6군단 관할이라, ASP로 파견 나가서 외진을 가면 양주병원으로 갔다. [38][39]
2018년 7월까지는 존재했고 훈련도 정상적으로 진행했다. 사단해체가 되면서 여단과 함께 해체되었고, 대대가 주둔하던 자리에는 125기보대대가 이전 하였다. (11년 01월에 125기보대에 경계지원나갔었는데 그당시 125기보대는 컨테이너에서 생활했다. 위병소 난로도 고장나서 개고생 ㅠㅠ)
3.3.3.
76여단 본부와 2차선 길 하나 사이에 두고 마주 보았다. 여단본부 아침점호 때 함성이 들릴 정도. 여단장이 개신교인이라면, 이곳 대대교회에 매주 일요일마다 오곤 했다. 방공대대장이 종교행사에 참여하는 경우도 있다. 대대교회는 위병소 바로 옆에 있는데, 말이 대대교회지 여단 소속 군종장교가 보직되어 여단교회나 다름없었다. 방공대대에서 제일 가까운 교회이기 때문에 방공대대에서도 왔다.
여단장이 지나가도 경례를 안 했다가 여단으로 중대장이 불려가서 털리고 당사자는 징계받은 전적도 있다. 과거엔 26사단 기보대대 중에서 시설이 최고라는 말도 들었지만, 요즘은 신 막사 중에서 구 막사라는 소리를 듣는다고 한다. 그만큼 신 막사 중에서는 제일 오래되었다는 뜻. 기존 구 막사는 창고로 사용한다. 식당 건물은 오래되었고 신 막사와 거리가 좀 있다.
부대 소속 군의관이 있었으나 25전차대대에 파견으로 근무하였고, 25전차대대의 의무부사관이 126기보대대에 근무하였다. 때문에 126기보대대에 있던 의무부사관의 정식 소속은 25전차대대였다.
군의관이 없는 대대엔 상급 여단의 군의관이 순회진료를 돌아야 하는데, 여단 본부에서 25전차대대까지는 차를 타고 3시간 가량이 걸렸다.(주둔지 변경 전) 양주신도시 부대이전 이후 25전차대대에는 의무부사관이 다시 상주했다. 여단 주둔지 이전이후 여단 본부 군의관들은 길 하나를 건너 126대대로 순회진료를 가게 되었다. (15년 5월기준. 25전차에는 의무부사관만 배치되어있었고 군의관 진료는 바로위 여단본부 군의관에게 받았음.)
ASP를 1개 중대가 120대대 1개 중대와 약 3개월씩 번갈아 가는데, 특식이 대대에 있을 때보다는 더 빵빵하게 나왔다.
2018년 사단 개편 작업에 따라 75여단에 있던 38전차와 함께 5기갑여단으로 배치되었다.
3.4. 사단 포병여단
사단 직할대나 보병여단이 양주를 중심으로 동두천, 포천 쪽에 주둔하는 데 반해 포병여단 본부와 직할대대는 모두 연천에 있다 이 때문에 양주 신교대에서 대기 타던 보충병들이 포병 걸리면 좌절한다 카더라. 그래도 여단본부와 명중대대는 전곡읍에서 걸어 갈 수 있는 위치라 외박이나 휴가 시에는 시간적으로 용이했다. 서울이 집이라면 집에서 점심 먹고 천천히 가도 됐다. 서울에서 오후 3시에 나가도 5시 전에 부대복귀가 가능할 정도.
여단본부는 구 막사이고 여타 사단의 연대본부나 여단본부와는 달리 구성원들이 적어 부대 규모는 조촐했다.
기계화보병사단이니 만큼 여단 내 모든 화포는 155 mm 자주포였다. 연천에 주둔하다 보니 사단 내 보병여단을 지원하기도 하고, 연천에 주둔한 5사단이나 28사단과 함께 훈련을 하기도 했다. 오히려 사단보다는 5사단ㆍ28사단ㆍ6포병여단 등과 더 가까워 이쪽에 친밀감이 더 생겼다(...) 26사단이 군단 기준포 역할을 했기에 더욱더 그랬다. 심지어 해병대 포병 3사단 9사단 등 거리상으로 매우 떨어진 부대와도 합동훈련을 하며 미군과도 한미화력훈련을 한다. 자세한 내용은 군사기밀이라지만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대대와 포반까지도 나오는 현실.
특이점이라면 대부분 군 부대는 담장이 매우 높고 벽돌로 쌓아 부대 내부를 살필 수 없지만, 이곳은 부대를 철조망으로 둘러 내부가 다 보였다. 부대가 한탄강변에 있어서 여름 장마철 집중호우가 있으면 매우 높은 확률로 위병소까지 물이 올라오고 심하면 연병장까지 침수된다. 그럴 때마다 담이 무너져서 매번 보수할 수는 없기 때문에 철조망으로 부대벽을 대신한다. 침수되면 여단병력으로는 보수할 수 없어서 대대병력을 차출하여 수리했다. 침수될 때면 부대 진입로가 물에 잠겨 보급이 중단되므로, 부대원들이 더플백 매고 산을 넘어 주변 부대에서 부식을 수령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기간에 휴가 나간 병력이 있다면 복귀를 연기했다.
여단 내 유일한 성당이 있어 종교활동이 있는 날이면 여기저기서 군용 버스가 왔다(...) 하지만 정작 천주교 군종장교 신부가 사단에 한 명밖에 없으므로 2주에 한 번씩 온다. 안 오는 주에는 그냥 한 시간 노는 거다. 여단 내 기독교 군종병이 되면 부대가 아니라 부대 밖 교회에서 생활했다.
정식 PX가 없었다. 부대인원수가 1개포대(중대) 병력이기 때문이다. 그 대신 충성클럽 파견대라는 이름으로 운영된다. 일과시간 중에는 문을 닫는 경우가 허다하다.
여담이지만 부대 중앙에 수백 년 된 목련 나무가 있는데, 성인 남자 3명이 둘러야 할 정도로 크다. 매년 봄 목련꽃이 필 때면 장관이다. 야간근무 교대할 때면 부대 전체가 목련향으로 물든다.
3.4.1. 제222포병대대 청룡
보통 신교대에서 겁을 제일 많이 주는 부대 중에 하나로서 (물론 어느 부대나 힘들다고 겁주지만...) 155 mm 자주포를 이용하고 막사는 구막사... 한때 병영부조리가 최고로 달했던 부대이며 자살 및 탈영사고가 꽤 많았다. 사단 사령부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예하대대이기도 하다. 실제로 사단내 최북단 부대이고 일부 전방 철책사단 예하 대대들 북쪽에 위치한다(경기도 내 최북단 포병대대라 카더라)[40] 그래서 포병여단 예하 부대에서 사고친 사람을 귀양...보내는 곳으로 쓰이기도 했다. 여단장이 낚시를 좋아하면 이곳에 있는 호수로 낚시를 하러 자주 왔기 때문에, 군자산 깊은 곳에 있는 부대임에도 위병 근무를 서는 병사들에게 긴장할 것을 많이 요구했다. 신병들 중 이곳에 걸리면 그냥 건투를 빈다... 였지만, 17년도 말에 구 65사단이 위치한 천보대로 이동하면서 631 대대와 함께 양주시에 위치했다.
3.4.2. 제228포병대대 화랑
연천군에 위치한, 여단 내 유이한 신 막사 대대. 각 생활관에 에어컨 다 달려있다. 대대급으로 한 건물에 4개 포대가 다 생활한다.[41] 연병장 옆에 인조잔디 풋살장이 있으며, 대대 뒤에도 깔끔한 농구장 겸 족구장이 있다 .체육관도 지을 예정이라고 한다. 식당을 새로 지었는데 훨씬 좋다. [42]
155 mm 최신형 자주포를 사용했다.
하도 사건사고가 자주 터지다 보니 한때 대대를 없애버린다는 얘기까지 있었다. 대대장에 따라 다르지만 전통적으로 관리가 빡셌다. 훈련은 훈련대로 하고, 부대관리는 부대관리대로 하고.
전곡터미널에서 1시간에 1대 있는 56번 버스를 타거나 택시를 타고 'ㅇㅇ리 8포요'라고 하면 기사님들이 알아들었다. 아니면 통상명칭(XXXX부대)을 대도 알아듣는다. 면회소는 위병소 바로 뒤에 붙어있어서 여름이 되면 면회소 건너편 정자에서 야외면회를 할 수도 있었다 외출외박 시 위수지역은 과거 전곡까지였으나 동두천 지행까지로 확대되었다.
대대 안에 교회가 있으며 기독교 종교행사는 대대 교회에서 불교는 앞에도 말한 부대 바로 뒤에 있는 절, 그리고 천주교는 여단본부로 갔다.
3.4.3. 제231포병대대 백호
26사단 신교대에서 포병으로 주특기를 받은 사람들이 잠깐 제2신교대로 이용했던 곳이기도 하다. 동두천이나 연천군 전곡읍에서 택시에 타서 "ㅇㅇ리 포대요." 라고 하거나, 동두천 중앙역 역전 사거리 정류장에서 52번을 타고 가면 갈 수 있었다.
155 mm 자주포를 사용하며 신 막사를 사용했다.
시설이 정말 좋은 편이었다. 통합 막사라서 본부포대 참모부 행정병들은 근무를 제외하고는 막사 밖으로 나갈 일이 별로 없었다. 신 막사는 과거 알파, 브라보 포대와 대대본부가 있었던 자리에 건물을 허물고 자리잡았다. 알파 포대는 완전이 헐렸고 브라보 포대는 건물이 살아남아 신 막사가 완공될 때까지 구 막사에서 잘 먹고 잘 지냈다. 바야흐로 2005년 여름 8월의 태양빛이 따갑고 8시 되도록 해가 지지 않는 시절, 우리는 그 좋은 축구 한 판을 못하고 임시막사 건설 노동현장에 투입됐다. 군대의 특성상 고물 같아도 버리는 일이 없었기에 막사 이전은 정말 아찔했다.
개인장구는 물론 사지방 컨테이너[43] 부터 보도블럭용 벽돌, 빨래 건조 겸 헬즈장이었던 비닐 하우스까지 난리가 났었다. 대대본부(현재의 신 막사 정중앙) 앞이 예전엔 잔디밭이었다. 대대주임원사가 그 잔디떼도 아까웠는지 두께가 최하 25 cm 이상되는 떼를 포상에 옮겨 심으라 지시했다.
알파 포대와 브라보 포대의 포상은 신 막사와 가까워 기동에 문제는 없지만, 차리포대는 비상거리면 산 중턱까지 올라가야 한다. 거기서 군생활 2년을 했지만 그 차리포대 포상에 가보지 못한 것으로 보아 꽤 먼 것으로 추정된다.[44] 때문에 이전에 쓰던 구 막사는 분리수거장으로 이용한다. 신 막사 대대본부 내부에 있는 각 포대 지휘소는 당시 육사 출신 사격지휘장교와 FDC분대장이 이기자 부대 신 막사를 견학하고 벤치마킹하여 일괄적으로 만들었다. 디자인은 비슷하게 하지만 중대마다 색깔이 달라 어떤 곳은 아기자기하고 어떤 곳은 휑했다.
제2신교대 때 조교들이 이곳으로 배치를 받은 훈련병들에게 "저기 분리수거장 보이지? 저기가 니네 막사야." 설명해준다. '설마...' 생각하는데 맞다... 특이하게도 차리 포대가 산 위에 걸쳐 있어서 포까지 뛰어가는데 상당히 힘들다. 매우 많이. 제28보병사단 신교대가 이 부대 앞에 있어서 식사시간에 훈련병들의 하나둘셋넷 고함소리가 자주 들린다. 영내에 교회는 있지만, 사찰이나 성당이 없는 관계로 28사단 신병교육대대로 예불과 미사를 드리러 간다.[45]
8.20 완전작전 유공부대였다. 이곳에서 2015년 서부전선 포격 사건 대응사격을 발사하였다. 주둔지에서 포를 쏘는 광경은 당시 대대에서 가장 짬이 높은 부사관조차도 처음 보았다는 후문. 게다가 주둔지에서 포를 발사하여 포상 근처 유리창이라는 유리창은 다 박살났고, 상황해제 이후 잔해를 치우는 데도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후 엄청난 높으신 분들이 왔다 가셔서 병사들이 엄청나게 고생했다. 육군참모총장ㆍ제3야전군사령관ㆍ6군단장ㆍ사단장ㆍ6포병여단장ㆍ문재인(당시 새정치민주연합대표)[46] 등이 다녀갔고, 심지어 육군참모총장은 취임 후 첫 야전부대 방문을 이곳에 왔다. 심지어 국회 국방위원회 위원도 다녀가는 바람에, 높으신 분들이 오시기 전까지 부대에서 제초가 어떻게 되는지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육군참모총장 방문 시에는 사단장마저 얼어버리는 엄청난 광경을 고작 일개 대대병사들이 목격할 수 있었다. 물론 이 완전작전 유공으로 당시 대대 소속 병사들은 특정 전입일을 기준으로 모두 포상휴가를 받았다. ~~ 그 후 8.20 완전작전을 기념하여 8월 20일에 부대개방행사를 진행했는데, 사단장이 방문하기에 병사들이 죽어나갔다고 한다.
3.4.4. 제631포병대대 명중
다른 포병대대보다 먼저 신형 자주포를 사용했다. 훈련이 장난 아니게 많아서 다른 포병대대들이 훈련을 안 나가도 여긴 나간다. 다른 곳들과는 달리 독립포대라 악명이 높고 실제로 매우 빡셌다. 본부포대는 구 막사지만, 위병소만 나가면 도보 3분 거리에 편의점과 버스 정류장이 있었다. 신형 자주포라 다른 부대가 부러워했지만, 이곳 병사들은 구형 써도 되니 제발 훈련 좀 어떻게 해달라며 징징대었다. 구 막사를 사용하는데, 다른 대대의 분리수거장과 시설 수준이 한치도 다르지 않았다. 리모델링 한다는 소리는 군생활 내내 들을 수 있지만 정작 언제 실행될지 모른다. 여담이지만 향운장 최향남이 이곳에서 군 생활을 했다.
자주포 부대로 바뀌기 전에는 포병연대 전체가 견인포부대였는데, 222ㆍ228ㆍ231대대는 105 mm 견인포(일명 딱총)였고 631대대만 155미리 견인포대였다. 1993년(?) 쯤부터 자주화부대로 개편하였다. 631대대는 지리여건상 본부포대가 한탄강 유원지 바로 옆에 위치했고, 포대의 규모상 독립포대로 구성되어 병영생활은 나름 자유로웠다. 그러나 영역이 넓다보니 야간초소가 여럿 있어 하룻밤에 야간보초를 2번 서는 경우가 많아서 한겨울에는 정말 고역이었다.
양원리에 위치한 브라보포대는 어딘가에 있는 근처에 위치한 HID 부대원들과 울타리 밖의 구멍가게에서 가끔의 조우도 있었다.
위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다른 모든 연대가 신막사였을 때에도 631대대는 구막사여서 빼찌카가 90년대 중반까지도 쓰였다.
4. 과거부대
5. 출신인물
시바스-유튜버
5.1. 사단장
5.2. 장교/부사관
5.3. 병
사단 신병교육대로 입대 후 65사단에서 복무했다.
사단 군악대에서 복무했다. 2017년 4월 20일 전역.
트위치TV의 하스스톤 스트리머.
제631포병대대에서 복무했다.
- 송대익
- 케이(강윤성)
주로 일본에서 활동하는 한국 가수. 사단 군악대에서 복무했다. 전역 후 일본 예능 신도모쿄다이 프로그램에 나가서 군대썰을 푼 게 잠시 화제가 되었다. 해당 영상
6. 기타
6.1. 근무환경
6.2. 사단가 및 구호
'''26사단가'''
1절
'''눈부신 햇살아래 옥토 삼천리'''
'''짙푸른 향내나는 내 조국 강토'''
'''어둠이여 사라져라 찬란한 아침'''
'''지켜서 억만년을 누려보리라'''
2절
'''흥안성 바라보며 말을 달리는'''
'''화랑의 뒷자손이 그 누구인가'''
'''꽃동산 무궁화 혼을 이어서'''
'''잃어진 북녘 땅을 다시 찾으리'''
3절
'''압록강 푸른 물에 칼을 씻는 날'''
'''쫓기어 멸망하는 붉은 오랑캐'''
'''우러러 달을 보라 백두산 천지'''
'''영광은 빛나거라 불무리부대여'''
후렴
'''아아 우리는 불무리의 용사'''
'''식을줄 모르는 불무리 용사'''
'''氣가 살아있는 최정예 공격부대'''
'''Be "The Best Warrior"'''
'''Speed 불무리! Victory 불무리!'''
'''참싸움꾼 그린존 26사단구호'''
'''존중과 배려!'''
'''칭찬과 격려!'''
'''헌신과 솔손수범!'''
'''선진병영문화 정착으로 유쾌한 Green Zone 26사단!'''
사단가에서 '강토'를 '향토'로 아는 병사들이 많지만 공식가사는 '''강토'''다.'''뜨거운 열정!'''
'''따뜻한 마음!'''
'''세계최강 공격부대!'''
'''불무리 불무리 Fighting!'''
(사단 전체 해당인지 모르지만 '''631포병대대'''에서는 사용했었음)
6.3. 훈련
7. 사건사고
8. 여담
김신조 일당이 청와대로 침투할 때 침투로에 있었다(...) 그 때문에 이 라인에 있던 부대장들은 줄줄이 모가지 당했다. 예비사단인 만큼 기계화부대로 개편되기 전까진 당시 8사단, 11사단처럼 상당히 훈련이 많고 군기가 센 부대였다.
[image]
각각 1야전군, 제6군단?, 파병부대, 3사단, 7사단, 11사단, 20사단, 26사단, 30사단, 33사단, 36사단, 3관구 마크.
과거 50~70년대에도 사단 마크는 현재와 유사했다.
박희도 사단장 시절, 80년 8월부터 실시된 삼청교육대를 설치한 몇 안 되는 사단이다.
2017년과 2018년 진행된 오버워치 솔저:76 토너먼트에서 2연속 준우승을 차지한 사단이다.
[1] 1963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전북 익산 일부가 충남 논산으로 편입.[2] 1980년대 거의 모든 충정부대의 소요 진압훈련은 보통 경찰청 의무경찰 소개 문서의 훈련 동영상 수준이었으며, 장비 역시 방패와 장봉 등을 보유했다고 한다. 그리고 방패와 장봉으로 진압이 안 될 경우 소총에 착검하고 실탄이 지급된다고 규정했다고 한다.[3] 원래 보병부대였던 관계로 기갑전술을 모르는 장교와 부사관이 태반이라, 사단 내에서 가장 전문가인 전차대대 소속 이스라엘 유학파 출신 '''위관급''' 장교가 여기저기 불려다니며 가르쳐야 했다고 한다. 한동안 장비에 이스라엘 군처럼 쐐기꼴 기호를 그리고 이스라엘식으로 부대를 운용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고. 실제 사례로 모 화기소대는 훈련 중 통제관이 돌발상황을 부여하자, 보병일 때처럼 감제고지를 선점하려고 장갑차 세우고 뛰쳐나와 그 무거운 M60 기관총 둘러메고 산 위로 뛰어올라갔다가 전멸판정을 받자, 빡친 나머지 통제관과 대판 싸웠다고 한다. 훈련이 끝나고도 한참 뒤에야 알게 된 바로는, 당시 통제관이 부여한 상황에서는 상급부대에 통보하고 우회기동하는 것이 정답이었다고 한다.[4] 2016년에 로고 변경으로 마스터카드 글자가 밑으로 내려와서 더 닮아보인다.[5] 사단 사령부 입구를 따라 쭉 들어가면 부대 마크를 3D화한 조형물(현재는 철거되었음)이 있는데, 계속 보다 보면 기분이 매우 아스트랄해진다....[6] 멍든데 피멍들고 고름 나는 사단[7] GOP를 끼고 있는 최전방 사단 뒤에 위치한 사단. 훈련이 많다.[8] 옛날에는 그랬다. 26사단이 6군단 소속이고, 8사단이 기계화보병사단으로 재편되기 전에는 26사단이 가장 전방에 위치한 기계화보병사단이었고, 또한 예비사단[7] 중 유일한 기계화보병사단이어서 훈련이 많았다. 게다가 기동사격훈련장을 관할하고 있어서, 전차, 자주포, 중기관총 사격 훈련을 다른 기계화부대 보다 많이 했다. 기동사격훈련에는 포를 쏘아대도 산불의 염려가 없는 민둥산과 그 앞으로 차량이 기동할 넓은 부지에, 그보다 넓은 범위에 민가나 민간 시설이 없어야한다. 서울 근교에서 이런 장소를 마련하기 곤란하여, 수기사, 20사단, 30사단은 26사단 지역으로 이동하여 기동사격훈련을 했다. 아마 지금도 그럴 것이다.[9] 기보사 예하 포병대는 연대급이지만 포병여단이라는 명칭을 쓴다.[10] 사단 내에서 정비대 다음으로 간부가 많으므로 독신간부 수요가 많아서 간부숙소 보수공사를 진행했다.[11] 공병대대 막사에서 사단 방면으로 쭉 올라가기만 하면 된다.[12] 불곡산은 양주에서도 유명한 등산코스이다. 가족이나 등산 동호회가 자주 다니고, 거의 병사의 부모님뻘 되는 사람이 자주 다니기 때문에, 운(?)이 좋다면, 먹을 것도 가끔 받기도 한다.[13] 사단 끝자락에 있어서, 도로를 타고 오다가 맨 처음 보이는 군부대라, 여기가 26사단이 맞는지 물어보려고 오거나, 여기가 XX대대인가 보다 착각해 들어오는 경우도 드물게 있다.[14] 재창설과정에서 시설을 보강했다고 한다. 병력이 바글바글한(...) 부대가 아니라 시설유지가 비교적 용이한 점도 있다.[15] 별도의 주둔지에 있었지만 1중대도 침대형 생활관을 비롯해 시설이 좋은 편이였다. 이전 서술은 함께 주둔하던 정비중대의 막사를 보고 혼동한 것으로 보인다.[16] 앞선 서술에서는 1중대와 2중대가 대대에서 떨어졌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독립중대는 1중대뿐이었으며 2중대는 독립부대였던 적이 없고 중대 단위 파견이 있었다.[17] 바깥쪽 생활관이 좀 더 춥다.[18] 정말, 여기서 경계를 서면 사방이 산밖에 없고, 그나마 옆에 막사가 있지만 야간에는 그냥 깜깜하기만 하다. 차라리 다른 막사면 바깥에 아파트도 보이고 간간히 사람도 보여 경계 설 때 심심하지는 않다만..[19] 어차피 각 부대의 분위기는 대대장이나 중대장 특성을 상당히 타기에 지금은...[20] 경비는 사령부 위병소 근무 및 환경미화, 수송은 사령부 간부들의 운전병 역할, 군악대는 각종 사열의 중심, 참모소대는 각 처부의 비서/노예[21] 한때 여기에 사단직할 비행대대가 있었으나, 1999년에 군단직할로 넘어갔다.[22] 수도군단ㆍ1군단ㆍ5군단ㆍ6군단 예하로 모두 다른 군단 소속이다![23] 주둔지 외곽에 만든 야전화장실 옆 사로에서 서로 바지 내리고 마주치는 괴랄스러운 상황도 일어난다.[24] 저항군 정찰대 병사를 야전지휘소(확장벤) 바로 앞에서 잡아도 간부가 그냥 잘했다 풀어줘라 하더라고...[25] 부대해체 직전인 2018년에는 고속도로는 개통완료, 옥정지구는 절반이상이 입주하여 위병소 근무장병들에게 정신적 고통을 주었다.[26] 아래 25전차대대 부분에서 후술 하지만 해당분구매출 2위의 위엄을 자랑했다.[27] 도로하나를 두고 옆에있다.[28] 전차대대다 보니 움직여야 하는 장비가 엄청 많은데 전부 자력으로 기동한다. 새벽에 국도를 달리는 전차들을 흔하게 볼 수 있는 곳이 경기 북부지역.[29] 예하부대 순시도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여단본부와 여단장 관사 사이에 대대건물이 있기 때문...[30] 당시 해당 PX 납품업자 및 PX병에 따르면, 해당 분구 내에서 매출 2위라고. 여단본부와 전차대대에 간부가 워낙 많아서 매출이 상당했다. 참고로 1위는 국군양주병원이다.[31] 인터넷 연결은 안되어있는 PC 주로 스타크레프트, 워크레프트3, PES[32] 26사단이 전차대대 1개를 30사단에 넘겨주고 기보대대인 120대대를 받아왔다. 30사단 시절에는 92기계화보병여단 예하대대였다.[33] 사단의무대는 돌고돌아 40분거리 여단본부는 1시간이 넘는 거리였고 또 야간 응급외진시 가까운 72사단은 야간응급을 받지않았기 때문에 은평구 경계에 있는 56사단 의무대로 갔다.[34] 76여단 PX는 25전차대대 건물에 있는 PX와 함께 사용했는데 여단은 대략 10~15평 정도 크기였고 120대대 PX는 거의 4배이상 크기 건물 한채를 사용했다.[35] 가끔 등산객이 부대 정문 사진을 찍는대 위병서던 병사가 쫒아가서 조치하면 포상휴가를 받는경우가 종종 있었다.[36] 부대내부에 창고로 쓰는 더욱 오래된 막사들이 있는데 자세히 살펴보면 7~80년대 날짜가 적혀있다. 30년 넘은 라면박스도 나오고..[37] 각 중대의 복도 끝에 대형 에어컨이 설치되었다. 그래서 여름이던 겨울이던 에어컨을 켜고 생활관 문을 열어둬야만 에어컨의 해택을 받을수있었다. [38] 대체로 고양병원 외진을 가는 것이 좋았다. 이유는 고양병원 PX와 면회실에는 치킨 ,피자를 파는 곳이 있어 외진때 기다리는 시간을 치킨, 피자와 함께 보낼수 있었기 때문이다. 양주병원은 있었지만 사라졌다.[39] 외진을 가본 병사는 알겠지만 새벽에 빨리 가지 않는 이상 대기하는 병사숫자가 많기 때문에 몇 시간은 무조건 기다릴 수 밖에 없다.[40] 실제로 부대 바로 근처에 28사단 예하부대들이 포진했다.[41] PX, 헬스장, 대대목욕탕, 사지방 등 도 다 한 건물에 있어 편하다. [42] 대대식당은 다른 건물, 그리고... 부대 근처에 돼지농가가 있어 여름만 되면 파리가 아주....더 이상은 생략[43] 놀라지 마라. 저 컨테이너 알파 부대원이 직접 들고 날랐다. 못 믿겠지만 사실이다. 시키니까 했다.[44] 지도상으로는 확인해봄. 역시 멈 [45] 그것 때문에 금토일 당직부사관들이 골치 아팠다. 주말 종교를 변경하는 사람이 많은데, 어쨌든 병력이 영외로 나가는지라 지휘통제실은 언제나 가장 정확한 인원을 원하기 때문이다.[46] 국회 국방위원회 소속 의원 자격으로 방문.[47] 1970년대 초반 사단장을 지냈다. 국방부 군수차관보로 재직시 박희도와 함께 12.12군사반란에 참여하였고 그 공로(......)로 대장 진급 후 예편, 중앙정보부장을 지냈다.[48] 12.12 군사반란이 끝나자 그 공로(…)로 육군 소장에 진급한 뒤 1980년대 초반에 사단장을 지냈다. 박희도의 최종보직은 육군참모총장.[49] 2010년대 초반에 사단장을 지냈다. 이후 기갑병과 역사상 최초로 대장 진급에 성공하여 명성을 날리는가 싶었지만... 나중에 기갑 병과 역사상 최대의 치욕으로 전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