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외왕내제 여부
1. 개요
고려의 외왕내제 여부에 대하여 다룬다.
2. 논점
먼저 '천자(天子) 무엇인가'라는 것부터 따져야 한다. 일반적으로 동아시아 문화권의 천자라 함은 하늘의 뜻을 받들어 세계를 통치하는 군주를 말한다. 고로 무엇보다 하늘을 대리하는 천자를 중심으로 한 세계(천하)가 있어야 하며 이런 관념에 근거해 천자는 하늘에 제사를 지낼 수 있고 하늘의 법칙을 담은 역법을 제정, 연호를 정할 수 있다. 그리고 천자를 따르는 제후들은 천자의 명 아래 각각의 제후국을 통치하며 천하의 질서에 일조한다.
진, 한, 수, 당, 송, 원, 명, 청의 천하 제국들이 단일한 천하라는 관념을 창출해냈으나, 위진남북조에 이르러 남조와 북조가 황위나 황송을 자칭하며 서로를 '도이' 혹은 '삭로'로 멸시하며 통호를 거부하거나, 피차 관계를 정립하기에 이르렀으며, 이에 따라 서쪽의 토욕혼과 동쪽의 한반도와 왜 등이, 중국의 제도 등 정치문화를 제대로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이나 단계에 이르렀느냐 하는 것이 문제긴 하지만, 그 제도를 변용하여 스스로 소세계를 상정하였다.[1] 베트남이나 조선 왕조를 제외한 대부분의 나라들은, 중국의 왕조들과 조공책봉관계를 맺었지만, 대내 방면에서 중국 왕조 및 그들의 천하 질서를 별달리 부정하지도, 이러한 질서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설정하려 들지 않았기 때문에, 중국과의 대등한 황제국 체제를 지향하거나, 황제(천자)의 신하라는 제후국 체제에 대한 목적의식적 지향이 부재했다.[2]
신라의 경우 법흥왕 23년에 처음 건원(建元)이라는 연호를 지정한 이래 이후로 진덕왕 4년 당 연호를 받아들이기 전까지 7차례 연호가 사용되었음이 문헌을 통해 남아있다.[3] 또한 전륜성왕으로 묘사된 진흥왕이 격의불교적으로 제왕(帝王), 짐(朕)으로 표현된 이래, 선덕여왕을 성조황고(聖祖皇姑)라 존숭하거나, 문무왕과 신문왕을 '폐하'라고 불렀으며, 문성왕은 원성왕을 '선황(先皇)'이라고 하였다. 《월광사원랑선사탑비》(月光寺圓朗禪師塔碑, 890)에는 경문왕을 '황왕(皇王)'으로, 《보림사보조선사탑비》(寶林寺普照禪師塔碑, 884)와 《사림사홍각선사비》(沙林寺弘覺禪師碑, 886), 최치원(崔致遠)의 《상제국위대신등봉위헌강대왕결화엄경사원문(上宰國戚大臣等奉爲獻康大王結華嚴經社願文)》은 헌강왕을 '성상(聖上)'으로, 《태자사낭공대사비》(太子寺郞空大師碑, 954)에서는 신덕왕을 '성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외에도 신라 군주는 후대의 개작이든 당대이든 간에 "만승의 지위에 있는", '천자', '황', '성제(聖帝)' 등으로도 여겨졌으며, 그들이 거처하는 금성(경주)은 "황거(皇居)인 왕궁(王宮)"이나 '제궐(帝闕)', ‘제향(帝鄕)' 등으로 불리었다. 《갈항사석탑기》(葛項寺石塔記, 758)에서는 '황태후(皇太后)', 《개선사석등기》(開仙寺石燈記, 858) 및 《삼국유사》에는 황후라는 명칭이 등장한다. 이처럼 신라에서는 대외적으로 당의 외신(外臣)이지만, 화이관에 입각한 서계적 관계를 설정하지 않고 세계의 통합대상으로 ‘9한(九韓)’을 설정한 소세계를 상정했다.[4]
6세기 이래 신라는 중국의 서계적인 천하관(天下觀)에 입조하면서도, 자신을 중심으로 하는 사방(四方)의 세계와 인국(隣國)들과의 공존을 상정했던 복합적 천하관을 싹텼는데, 대표적으로 신문왕이 김춘추의 존호 문제를 두고 당의 압력을 받자, 당 태종의 천하일통과 김춘추의 '일통삼국(一統三國)'을 대등하게 대비한 것이 있다. 또한 삼한에 상응하는 공간적 범주로 해동(海東)을 중국의 동쪽에 있다는 의미와 한편으로는 중국과 구별되는 별도의 소세계로 설정했다.[5] 신라의 통치 체제 이념으로 자리잡힌 삼한일통의식은 후삼국 시대 다시 이를 하나로 합쳐야 한다는 역사, 정치적 당위성를 제공했는데, 고려 태조 왕건은 즉위 당시 "해내(海內)의 겸병"을 역설했으며, 그가 "주인을 죽이는[殺主]” 후백제로부터 신라를 구원한 것은 "옛 주인임을 늘 생각하며 잊지 않[不忘舊主]"았다고 최승로에게 칭송받았다. 이처럼 고려는 고구려의 계승을 표방했지만, 실질적으로 후기 신라에서 연원했기 때문에 후삼국 통일 후 체제 이념이 근간을 이루고 있었다. 고려는 통일을 실질적인 ‘건국’으로 의식하였고, 왕건은 삼한일통을 이룩한 군주로 평가됐다.[6]
신라 하대에 유교정치이념이 상대적으로 확산되고, 광종 이래 송에 사대하면서 광종 때 10성 4부, 성종 때 3성 6부를 거쳐서 고려에 걸맞는 중앙관제로 확립하는 등 중국의 중앙 관제를 수용했다.[7] 때문에 화이사상 또한 상대적으로 강화되어 태조 이래로 우회적으로 천자를 자칭했던 데 반해, 광종은 보다 직접적으로 일시적이나마 독자 연호를 사용했으며, 개경을 황도(皇都)로 부르게 하였다.[8] 그러나 황제나 천자 등의 칭호는 대왕과 마찬가지로 어디까지나 별칭일 뿐, 고려 군주의 공식 직함은 '왕'이었으며, 독자 연호를 사용한 것도 사실상 태조와 광종에 국한된다. 더 나아가 송에 사신을 보내 왕위 계승을 알리고 책봉을 받은 성종은 제후의 명분을 의식하여 조서를 교서로 개칭하는 조치가 단행되고 ‘짐’의 사용 빈도가 줄어들었으나, 동시에 짐이라는 자칭과 본래 신하가 황제에게 올리는 문서인 표문(表文)과 주문(奏文)이 전대와 같이 빈번히 작성됐다.[9]
이러한 복합성은 공식적 성격이 약한 금석문 사료에서도 드러나는데, ‘왕’과 '선왕'의 용례가 일반적이고 압도적이면서도 ‘황제', '선제(先帝)', ‘선황(先皇)'가 드물게 사용됐으며, 왕위의 경우에도 왕위가 1건에 불과한 ‘제위(帝位)’보다 상대적으로 빈출하다. 황자(皇子), 황태자(皇太子), 황후(皇后)의 용례도 있으나 왕자와 왕후 빈도가 압도적이며, 왕태자라는 용어도 사용됐다. 한편으로는 세자(世子) 및 왕비(王妃) 또한 각각 1건과 2건에 그친다. 전기 고려 군주의 대내 위상을 엿볼 수 있는 금석문에서 '내제', '제후' 명분의 견지를 발견할 수 없는 것이다.[10] 즉 고려 전기에 베트남의 황제국 체제나 조선의 제후국 체제는 온전히 운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할 수 있으며,[11] 황제국 체제와 제후국 체제의 혼용은, 화풍(華風) 중심의 관념이 비교적 강화되고, 당의 해체,[12] 거란의 흥기라는 국제정세 속에서 줄어들었을지 모르나 신라 중후기와 큰 차이는 없으며, 비교사적 지평에서 보아도 이는 특수하다기 보다는 보편적인 현상에 불과하다. 동아시아에서 대내적으로도 군주에게 '종주국 군주의 신하' 위상이 관철되는 최초 사례는 몽골복속기 고려다.[13][14]
3. 관련 기록
※ 순서는 금석문에 적힌 순서에 따라 기재.
3.1. 금석문
'''황(皇)'''께서 피석하여 공경을 다하였고...
봉암사정진대사원오탑비(965년)
때는 '''황상(皇上)'''께서 즉위하신 원년 모월 모일이다.
개천사석탑, (1214년)
'''광종'''대왕('''光宗'''大王)[15]
이 '''황위(皇位)'''에 올랐다.
거돈사원공국사승묘탑비(1025년)
'''황제 폐하(皇帝 陛下)'''[16]
께서 조칙을 내려 이르기를... 우리 '''황제 폐하(皇帝 陛下)'''께서도 지극하신 정의로...
고달사원종대사혜진탑비(975년)
엎드려 '''황제 폐하(皇帝 陛下)'''[17]
의 덕이 하늘과 땅에 떨치고..
보현사석탑(1044년)
'''황상(皇上)'''께서 결(訣) 패일(佩日)...
부석사원 융국사비(1053년)
'''황태자(儲皇)''' 역시 그 아름답고 고움을 슬피 여겨 특별히 제물을 내리고 각별히 총애하는 뜻을 보였다.
왕영녀왕씨묘지명(1186년)
'''봉황(鳳皇)'''의 은혜를 입었으며...
연곡사현각선사탑비(979년)
혹시라도 어느 날 그대가 궁전의 섬돌에 서서 '''천자(天子)'''[18]
와 더불어 옳고 그른 것을 논쟁하게 된다면, 비록 가시나무 비녀를 꽂고 무명 치마를 입고 삼태기를 이고 살아가게 되더라도 또한 달게 여길 것입니다
염경애 묘지명
여진은 본래 아조(我朝) 사람의 자손이기에 신복(臣僕)이 되어 누차 '''조천(朝天)'''[19]
해왔고, 그 호적이 모두 아조(我朝)에 올라와 있는데 어떻게 거꾸로 우리가 신하가 될 수 있겠습니까?
윤언이 묘지명
5남 응추는 '''황자(皇子)'''인 극세승통에게 의탁하여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다.
이식묘지명(1156년)
'''성황(聖皇)'''께서 국척 원신을 지극하게 기리는 것이다.
이자연묘지명(1061년)
무릇 우리 '''황(皇)'''[20]
의 아들들은 모두 '''공'''의 생질이 되니... '''황태자(儲皇)'''와 후비, '''친왕''' 등에 이르러서는...
이정묘지명(1077년)
'''황(皇)'''께서는 이에 크게 감동하고... '''황유(皇猷)'''입음을 경축하여...
지곡사진관선사비(981년)
공이 '''황후(皇后)'''[21]
의 인척이므로 더욱 총애하여... '''황후(皇后)'''가 안에서 공을 불러...
최계방묘지명(1117년)
(거란의) 천자는 '''공(公)'''[22]
이 우리 '''황(皇)'''의 친족이고 또한... 칙명으로 특별히 잔치를 베풀어주니, 거란 사람들이 아름다운 일이라고 칭송하였다.
최의묘지명(1223년)
'''황태제(皇太弟)'''가 바로 '''신종(神宗)'''[23]
이다.
최충헌묘지명(1219년)
중성(中城)을 ?해서 ''''황도(皇都)'''[24]
의 울타리로 삼았다.
최항묘지명
'''황상(皇上)'''께서 천조(踐祚)에 오르시던 병술년 봄 정월에 이르러...
칠장사혜소국사비(1060년)
'''태평 2년'''(977년) 정축년 7월 29일 여사을에 계시는 옛 석불을 '''금상황제(今上皇帝)'''를 위해 중수하오니 '''만세'''를 기원합니다.[25]
태평2년명선법사 마애약사여래불 명문(銘文)(977년)
'''만승(萬乘)'''[26]
의 높은 위치에 계시면서 사총(四聰)을 타고 나셨으니 삼교(三敎)의 지극한 가르침을 한 마음에 밝게 비추고 계십니다.[27]
현화사비문(1017년)
4. 관련 서적
※ 서적 '이름'의 가나다순으로 기재한다.
4.1. 한국
4.1.1. 고려사
"내(余) 덕은 박한데 부담은 중하니, 병이 날로 심해진다. 생각컨데 왕위(王位)[28]
는 오래 비워 놓을 수 없다.내(予) 원자(元子)[29]
는 덕이 위까지 알려질 정도니 자리를 이어받도록 명한다.너희 관료와 부서는 사왕(嗣王)의 령을 듣도록 하되 사왕(嗣王)이 떠나있을 기간 동안은 군국(軍國)의 임무는 '''태손(太孫)'''[30]
이 처리하라.산릉의 제도는 검소하게 하고 제사는 삼일안에 끝내도록 하라."
왕의 생일을 천춘절(千春節)이라 했으니, 절일(節日)[32]
의 명칭은 이로부터 비롯되었다.以王生日爲千春節, 節日之名, 始此.
고려사, 세가, 성종 원년(982) 여름 6월 中.
'''짐(朕)'''은 덕이 없지만 대업(大業)을 이어 수호하니 만사(萬事)를 통치했다. 그러니 하루도 편안히 있지 않고 몸을 숙여 정치를 펼치니 밤을 센지가 10여 재(載)이다. 생각컨데 중외(中外)의 사람과 같이 인수지역(仁壽之域)[33]
을 모험했으나 질병에 걸릴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천명(天命)은 알기 힘들다. 짧게 살든 길게 살든 그저 하늘에 맡길 뿐이다. 허나 방기(邦基)[34]
는 지중(至重)하니, 전하는 말을 잊을 수 있겠는가? '''왕태자(王太子)'''[35] 는 인의(仁義)를 알고 효우(孝友)를 안다. 태어날 때부터 똑똑했고, 따뜻했고, 자애롭고, 온화하니 백성의 소망을 채울 수 있다. 그러니 내가 묻히기 전 얼른 군위(君位)를 잇도록 하라. 모든 군국대사(軍國大事)는 일체 사군(嗣君)의 처분(處分)에 맞긴다.'''방진주목(方鎭州牧)'''[36]
은 제 자리에서 애도하되 자리를 비우지 말라. 상례는 하루를 달로 계산하고 산릉을 검소하게 만들어라.오호라(於戲)! 시작과 종말의 시기를 아니 죽는 자는 아무 후회가 없다. 나라의 미래를 위해 산 자는 오래 살도록 하라. 이제 고굉대신(股肱大臣)[37]
과 '''백벽(百辟)'''[38] 과 경사(卿士)들은 왕실(王室)[39] 을 보좌하고 우리 국조(國祚)가 무궁(無窮)하도록 도와라.그리한다면 '''짐(朕)'''은 눈을 감더라도 마음은 족하다. 국내(國內)에 선포하여 '''짐(朕)'''의 뜻을 알리도록 하라.
고려사 세가 숙종의 유조(遺詔)
'''짐(朕)'''은 군부(君父)의 유언(遺言)을 받들어 방가(邦家)의 중기(重器)를 손에 쥐었다. 매사에 조심하여 부탁받은 권한을 조심히 살폈다. 군공(群公)과 장구(長久)의 책략을 세우고, 조종(祖宗)의 경사를 누리고, 조상의 공로를 빛나게 하고자 했다. 그러나 상을 치루던 중 너무나 슬퍼하니, 걱정이 병이 되었다. 때가 흘러 계속 누적되니, 치료를 해도 소용이 없으니 이번 겨울 초에 대참(大漸)에 이르렀다. 바람 앞 등불같은 몸이 어떻게 환기(幻期)를 견더낼 수 있겠는가. 그러나 사직의 도(社稷之圖)는 반드시 예속에게 이어져야한다. 지금 모제(母弟)인 '''수태사(守太師) 중서령(中書令) 국원공(國原公) 운(運)'''[40]
은 다능하고 천부적인 자질을 가졌다. 성덕(盛德)이 날로 갈수록 커지고 농사의 어려움을 잘 알고 있다. 형정(刑政)의 이로움과 병폐를 마음 깊히 알고 있으니, '''구오지존(九五之尊)'''[41] 에 오른다면 억조(億兆) 명의 소망을 채울 것이다. 그러니 구소(柩所) 앞에서 군권(君權)을 가지도록 하라. 무릇 국조(國朝)의 상벌대사(賞罰大事)는 모두 사군(嗣君)의 뜻을 따르라. 밖에 있는 주진(州鎭) 관원(官員)들은 본군(本郡)에서 거애하고 자신의 관사를 떠나지 마라. 상복의 제도는 하루를 달로 계산하고, 산릉의 제도는 검약하게 하라. 오호라(於戱)! 생에는 굴곡이 있으니, 아무리 험난해도 대의를 좇아야 한다. 사람 중 누가 사라지지 않는가, 다만 슬픈 것은 내 삶이 짧다는 것이다. 오로지 몇몇 고굉(股肱)과 중외(中外)의 문무(文武)들이 충력(忠力)을 다하여 내 '''친왕(親王)'''[42] 을 보좌하고, 보력(寶曆)이 무궁(無窮)하도록, '''환구(環區)'''[43] 를 잇는다면 짐(朕)이 눈을 감아도 어떤 유감이 있겠는가?
고려사 세가 순종의 유조(遺詔)
'''짐(朕)'''이 부덕하니 하늘이 벌을 내렸다. 질병이 낫질 않으니 어떻게 신민(臣民)의 위에서 군국(軍國)을 총괄하겠는가.
'''태자(太子)'''가 비록 어리고 작으나 덕행이 이미 완성됐으니 '''제공(諸公)'''[44]
이 모두 마음을 합쳐 보좌하여 그가 다치지 않게 하라.내(予) 질병이 커져 형세가 회복되지 않을 것 같구나. 이에 중임(重任)을 풀어 너(汝)[45]
에게 전해 돌려주마.내 평생(平生)의 행동을 돌이켜 보니 득소실다(得少失多)하니 따르려 하지 말거라. 단지 옛 성현(聖賢)의 길을 따르고 우리 태조의 교훈(我太祖之訓)을 따르거라. 자리(位)에서 게을러지지 말고 영원히 서민(庶民)을 품거라.
'''짐'''(朕)은 천지(天地)의 경명(景命)을 이끌고 조종(祖宗)의 유기(遺基)를 받들었다. 그렇게 삼한(三韓)을 가진지 18여 재(載)가 지났다.
쇠락한 자를 돕고 피폐한 자를 구했다. 만민(萬民)과 같이 생각하고 같이 쉬었다. 옷을 대충 입고 식사를 대충했다. 하루도 잠시라도 게을러진 적이 없었다. 근심이 심하고 누적되니 질병을 요양할 시기를 놓쳐 결국 크게 심해졌다.
권국사(權國事) 해(楷)는 그 명철한 성격이 하늘이 내린 것이며 그 원랑(元良)[46]
의 자질이 인망(人望)을 채울 수 있다. 내 명이 끝나기 전에 왕위(王位)[47] 를 이어라. 모든 군국중사(軍國重事)는 일체 사군(嗣君)의 처분(處分)에 맞긴다.상례는 하루를 달로 계산하고 산릉을 검소하게 만들어라. '''방진주목(方鎭州牧)'''[48]
은 제 자리에서 애도하되 자리를 비우지 말라.오호라(於戲)! 죽음과 삶은 늘 있는 길이니 사람이 도망치기 힘들다. 시작과 종말이 내가 원하는데로 이어지니 짐이 유감이 있겠는가. 묘(廟)[49]
와 사(社)[50] 덕분에 저지(儲祉)[51] 를 세웠으니 신린(臣隣)들은 사군(嗣君)을 같이 보좌하여 왕실(王室)을 영원히 밝혀라. 우리 국조(國祚)가 무궁(無窮)하게 하라.'''아(咨)! 너희(爾) '''여러 나라(多方)'''[52]
들아, 내 의지를 받들라!
- 고려사 세가 예종의 유조(遺詔)
왕[53]
은 강안전(康安殿)[54] 에서 즉위했다. 관정(灌頂)[55] 한 뒤 경령전(慶寧殿)에서 보살계(菩薩戒)를 받고, 강안전에 가 백관(百官)의 조하(朝賀)를 받았다.후에 '''황의(黃衣)'''[56]
를 입고 남쪽을 바라보며 용상(龍床)에 앉았다. 속리대(束里大)와 파투(波透)[57] 는 강안전에 들어와 동쪽을 바라보며 앉았다. '''태손(太孫)'''[58] , '''공(公), 후(侯), 백(伯)'''[59] , 재추(宰樞)[60] 와 고위 문무양반(文武兩班)은 강안전 앞뜰에 순서대로 들어왔고, 하위 양반은 강안전문 밖에 서서 '''표문(表文)'''[61] 을 올리고 '''만세(萬歲)'''[62] 를 외쳤다.
- 고려사, 세가, 원종 순효대왕 재위 원년(1260년) 4월 中.
초하루 임자일. 왕이 대관전(大觀殿)[63]
에서 신년 하례를 받고는 친히 신료가 올리는 하례의 표문을 지어 신하들에게 보여주었다.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새해 정월이 돌아오니 만물이 새로우며 궁전에 봄이 돌아오니 용안에는 기쁨이 가득하나이다. 우주의 이치를 체득하시어 은혜를 널리 펴시고 모든 복록을 한 몸에 모으사 조화를 크게 만드시니 이야말로 성인의 도가 길이 이어나갈 시초이자 만물을 생장하게 하는 기운이 퍼지는 처음이로소이다.
공손히 생각건대 '''폐하'''께서는 요(堯) 임금의 성스러운 밝음과 순(舜) 임금의 지혜로운 총명을 한 몸에 지니셨으니, 온갖 복록이 모여들어 쉼 없이 나날이 새로워지며, 다달이 끊임없이 무궁한 천수를 누리시리이다. 어진 덕이 가득하시니 만물이 제 자리를 찾고, 전쟁을 끝내고 문교(文敎)를 펴시니 이야말로 무궁한 경사로소이다. 이제 태평성대를 맞이하여 닥쳐올 경사가 더욱 융성하리니, 님 계신 대궐에서 신령스런 상서를 옹위하고 남산 같이 창성한 국운을 보위하리이다.
천하의 나라들이 분주히 달려와 옥과 비단을 다투어 바치옵고, 사방의 신민들이 뒤질세라 산넘고 물건너 모여드옵니다. 이 좋은 날에 하례를 받으시니 복을 더욱 크게 받으시리이다. 하물며 요즘 바쁜 정무의 여가에 부지런히 신하들을 접견하시고 글하는 신하들과 더불어 즐겨 문장과 사육변려문을 훌륭히 지어내시며, 신하들의 자리에 오셔서 시(詩)·서(書)·경(經)·사(史)의 오묘한 글들을 강론하시나이다. 북쪽 금나라 사신은 술잔을 올리며 만수무강을 축원하며, 동쪽 일역(日域) 사절은 보물을 바치며 '''황제'''라 부르나이다.
하늘 신령께서 늘 몰래 도우시니 복록과 경사가 강물처럼 불어나고, 세상에 다시없는 새로운 상서가 열리니 군왕께서 통일을 이루심을 보겠나이다. 신하들은 찬미를 바치옵고 그 위업은 청사에 빛나리니, 인민이 생겨난 이래로 오늘 같이 성대한 날은 다시 없으리이다. 저희들은 이 성대를 만나 밝은 임금의 은택을 흠뻑 받으니 '''만승(萬乘)'''[64]
과 같은 위엄을 우러러 보며 대궐로 달려 왔사옵니다. 여섯 왕조의 음악[六樂]과 아홉 곡의 연주[九奏]는 모두 간자(簡子)가 들었던 천상의 음악에 견줄만 하나, 또한 '''만세'''를 세 번 불러 한나라 무제가 들었던 것과 같은 축수를 아니 바칠 수 있겠나이까?”
이 글을 두고 백관이 하례하는 표문을 올렸다.
고려사, 세가, 의종 24년 1월 1일.
조서를 내리기를,
“제왕의 덕은 겸손이 첫째이다. 이 때문에 노자(老子)는 말하기를, '왕(王)ㆍ공(公)은 자칭하기를 고(孤 아비가 없다는 말)ㆍ과(寡 덕이 적다는 말)ㆍ불곡(不穀 착하지 못하다는 말)이라 한다.' 하였고, 한나라 광무제(光武帝)는 조서를 내려 (신하들이)글을 올릴 적에 성(聖) 자를 쓰지 못하게 하였다.
지금 신하들이 임금을 높이고 덕을 찬미함에 있어 용어가 너무 지나치니, 심히 합당하지 않다.
지금부터는 무릇 장(章)ㆍ소(疏)를 올리거나 공용 문서에도 '''신성제왕(神聖帝王)'''이라 일컫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짐(朕)'''은 황천(皇天)의 권명(眷命)을 받들며 열성(列聖)을 이어 삼한(三韓)을 다스린지 35년이 되었다. 오늘이 되어 일이 많아 부담이 쌓이니 질병이 누적되어 치료가 소용이 없어 대참(大漸)에 이르렀다.
오호라! 성철의 도(聖哲之道)[65]
는 존망을 아는 것이며 불로의 말(佛老之言)[66] 은 생사를 알라는 것이다. 죽음에 이르는 것은 이치에 자연스러운 것이다. 돌아가는 자는 변화에 순응해 남지 않고, 남아있는 자는 슬퍼하며 효를 드러내는 것은 천하의 도이다.아! 너 '''왕태자(王太子)''' 현(晛)[67]
은 충효(忠孝)의 미덕을 갖추고 타고난 자질을 가지고 있으니, 덕업(德業)이 융성하여 인망(人望)을 갖추었다. 이에 마땅히 왕위(王位)[68] 에 오를 수 있도다. 제사는 하루를 달로 계산하고 산릉의 제도는 검약하게 하라. 성현의 철칙을 깊게 생각하고 조종의 영광을 저버리지 말라.문무백료(文武百寮)는 다 같이 협력하여 국정을 이끌어 나가고 왕가(王家)[69]
를 보우하라. 중외(中外)에 이를 포고해 짐의 뜻을 알게하라.
고려사, 세가, 인종, 인종의 유조(遺詔)
다루가치가 따졌다. '''"선지(宣旨)라 칭하고, 짐(朕)이라 칭하고, 사(赦)라 칭하니 어찌 이리 참람할 수 있습니까?'"''
왕은 검의중찬 김방경, 좌승선 박항을 보내 해명했다. "참람하려는 것이 아니라 조종(祖宗)이 오래토록 전해 왔으니 바꾸길 겁냈을 뿐이다."
그리하여 '''선지(宣旨)'''를 왕지(王旨)로, 짐(朕)을 고(孤)로, '''사(赦)'''[70]
를 유(宥)[71] 로, '''주(奏)'''[72] 를 정(呈)으로 바꾸었다.
고려사, 세가, 충렬왕 재위 2년 3월 中.
'''짐(朕)'''과 신라(新羅)는 피를 나눈 동맹(同盟)이다. 그리하여 양국(兩國)이 영원히 서로 잘 지내며 각자 사직(社稷)을 지키고자 했다.
이제 나왕(羅王)이 굳이 칭신(稱臣)을 원하고, 경등(卿等)도 그것이 옳다고 한다. '''짐(朕)'''은 마음이 아프지만 중의(衆意)가 원하니 받아들이겠다.
고려사, 세가, 태조 재위 18년(935년 12월), '천덕전에서 고려 - 신라 합방이 선포되다.'
'''朕'''承 先考遺業 謬卽大位.
年當幼冲 體亦病羸,
不能 撫邦國之權 塞士民之望.
陰謀橫議 交起於權門,
逆賊亂臣 屢干于內寢.
斯皆凉德所致 常念爲君之難.
竊見大叔鷄林公 曆數在躬 神人假手.
咨! 爾有衆 奉纂丕圖.
'''朕'''當 退居後宮, 獲全殘命.
'''짐'''은 선고(先考) 유업(遺業)을 받들어 외람되게도 대위(大位)에 올랐다.
나이가 어리고 몸도 허약하니 방국(邦國)의 권한(權)을 옳게 통솔하지 못하였고 사민(士民)들의 기대에 보답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음모와 책동이 권문(權門)에서 걷잡을 수 없게 일어나며 역적난신(逆賊亂臣)들이 대궐을 자주 침범하였다.
이는 다 내가 덕이 없는 까닭이다. 임금 노릇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늘 생각하고 있었다.
내 생각에는 나의 숙부 계림공에게로 대세가 기울어져서 신인들이 모두 그를 돕고 있는 듯하다.
아! 너희들은 그를 받들어 국가의 위업을 맡게 하라. '''짐'''은 뒷궁궐에 물러앉아 남은 생명이나 유지하겠다.
생각컨데 '''황숙고(皇肅考)'''[73]
께선 의와 인과 함께 하셨습니다.구가의 임무[74]
가 나에게 왔는데, 위엄있는 영혼이 마치 신과 같습니다.경기(慶基)를 중흥(重興)시키니 뛰어난 갑옷을 남기셨습니다. 종과 북을 두들겨 때에 맞추어 도와주셨습니다.
우리 아름다운 '''황고(皇考)'''[75]
께선 청명하시고 하늘의 법을 지켰습니다.도를 위해 존경하고 근면하셨으니 그 마음이 연못을 채울 수 있습니다.
뛰어난 계획과 신령한 판단은 바람을 불게하고 천둥을 울리게 합니다.
제가 그 덕을 잇고 싶으니, 부디 축복해주시길 바랍니다.
고려사 악지 숙종 태묘 악장
'''해동천자(海東天子)'''인 지금의 '''황제(帝)'''께서는 부처님과 하느님을 보좌하여 교화(敎化)를 펴러오셨네.
세상을 다스리시는 은혜가 깊음은 원근(遠近)과 고금(古今)에 드물다네.
여진은 본래 구고려(勾高麗)의 부락(部落)으로, 개마산(盖馬山) 동쪽에 모여 살았다. 세세토록 공물을 바치고 직위를 받으니, 우리 조종(祖宗)의 은택을 깊히 입었다. 그러나 그들은 단 하루만에 우리를 배반했고 무도(無道)해졌으니, 선고(先考)께선 심히 분노하셨다. 늘 듣길 고인(古人)이 말하는 '대효자(大孝者)'란 '뜻을 잘 계승한 자'라고 한다. '''짐(朕)'''이 오늘날 다행스럽게 제사를 끝마쳐 국사(國事)를 돌보게 되었으니, 마땅히 의기(義旗)를 들어 무도함을 벌하고 선군(先君)의 분노를 풀 것이다!
고려사, 열전, 윤관 中
講和, 非兵馬使所得專, 宜遣公兄等, 入奏'''天庭'''.
강화는 병마의 관리가 논할 것이 아니다. 그러니 공형(公兄)[76]
등을 '''천정(天庭)'''[77] 으로 들어와 아뢰게 하라.
'''황후(皇后)'''께서 입궁하실 때부터 늘 태자를 낳길 원했습니다. 결국 성인(聖人)[79]
께서 태어나시니, 영원히 사시라고 하늘에 비는 것이 지극하지 않은 점이 없었습니다. 천지귀신이 제 지성을 알텐데 오늘날 적신을 믿어 골육을 해치려 하시다니요.
고려사, 열전, 이자겸, 자신의 무고함을 강조하며
고려는 종실사람으로서 친존(親尊)한 이를 '''책봉'''하여 '''공(公)'''이라 하였고, 그 버금 가까운 이를 '''후(侯)''', 비교적 촌수가 먼 이를 '''백(伯)''', 어린이를 사도(司徒)·사공(司空)이라 했으며, 이들을 총칭하여 '''제왕(諸王)'''이라 하였다.
고려사, 열전, 종실서문 中.
與君同日出'''皇畿'''
君已先歸我未歸
旅檻自嗟猿似鏁
離亭還羨馬如飛
'''帝城'''春色魂交夢
海國風光泪滿衣
聖主一言應不改
可能終使老漁磯
그대와 함께 같은 날 '''황기(皇畿)'''를 나왔건만
그대는 먼저 돌아가고 나는 돌아가지 못하네.
여함(旅檻)에서는 스스로 원숭이가 사슬에 묶인 듯 탄식하고,
헤어지는 정자에서 돌아보며 나는 듯 하는 말을 부러워하네.
'''제성(帝城)'''의 봄빛에 혼이 되어 꿈속에서 오가고,
나라의 풍광에 눈물이 옷깃에 가득하다.
성주(聖主)[80]
의 한 말씀 응당 바뀌지 않으리니,끝내 물고기 잡는 갯가에서 나이 들게 해주시오.
곤면(袞冕)을 내리니 제도가 구장(九章)에 미쳤다.
… … '''성황(聖皇)'''께서는 고귀한 분이 되실 줄을 미리 아시고 후궁(後宮)에서 양육하게 하셨습니다. '''상황(上皇)'''께서 … …
고려사, 열전, 희종 후비 中.
… … 올리는 모든 표문에서는 '''성상폐하(聖上陛下)'''라 칭하고
전(箋)에서는 '''태자전하(太子殿下)'''라 칭하며, 제왕(諸王)은 영공(令公)이라 하고 … …
고려사, 지, 공문서를 주고받는 규정 中.
강회선무사(江淮宣撫使) 조양필(趙良弼)이 쿠빌라이에게 다음과 같이 건의했다.“고려가 작은 나라라고들 일컫지만 산과 바다가 가로 막혀 지세가 험한 까닭에 우리나라가 정벌에 나선지 20년이 넘었는데도 아직 신하로 복속시키지 못한 실정입니다. '''고려 태자''' 왕전(王?)이 입조해 체류한지가 이태나 되었지만 마침 황제께서 서방 정벌에 나가 계신 관계로 대접이 소홀해 우리를 진심으로 따르지 못했으니 한 번 제 나라로 귀국해 버리면 다시 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하니 그 숙소와 음식을 번왕(藩王)에 어울리게 격상시켜 주어야 마땅합니다. 지금 듣건대 그의 부친이 죽었다고 하니 우리가 그를 국왕으로 임명해 귀국시켜 준다면 필시 은덕에 감격해 신하의 직분을 다하게 될 것입니다. 이야말로 힘들게 군사를 동원하지 않고도 한 개 나라를 얻는 좋은 계책이 될 것입니다.”
고려사, 세가, 원종 즉위 원년 中.
4.1.2. 동국이상국집
臣伏覩'''聖上陛下'''某月某日朝享'''大廟'''。某日御儀鳳樓'''大赦'''。於是內外白衣諸生。序立闕庭。各進謠頌。仰歌'''聖德'''。臣以右拾遺扈從。親覩盛禮。臣本諸生。擬諸生所進。謹成'''聖皇朝享大廟頌'''一篇。但慙赧惶恐。不能自獻。庶有以達于'''天聽者'''。臣無任戰懼隕越之至云云。其詞曰。
於穆'''聖皇'''...'''荷天眷命'''...我'''聖皇'''之代...'''百辟'''卿士...嗣孫'''萬壽'''...民咸曰我聖皇是民之父母...
신이 감히 보기로는, '''성상폐하'''께서 모월(某月) 모일(某日)에 '''태묘(大廟)'''[83]
에 조향(朝享)하였습니다. 모일에는 의봉루(儀鳳樓)에 나가셔서 '''대사(大赦)'''[84] 를 내리셨습니다. 이와 같으니 백의(白衣), 제생(諸生)이 궐정(闕庭)에 서립(序立)하여 각각 노래와 찬송을 올리어 '''성덕'''을 찬양 노래하였습니다. 신은 우습유(右拾遺)로서 호종(扈從)하여 성대한 예식을 직접 보았사오며, 신은 본래 제생(諸生)이옵기에[85] 제생으로서 ''''성황조향태묘송(聖皇朝享太廟頌)''''한 편을 만들었습니다. 다만 부끄럽고 황공하여 제가 직접 올리지 못하겠지만 감히 '''천청자(天聽者)'''[86] 에게 드리니 신은 떨리고 황송합니다. 그 가사는 이렇습니다.아! 아름다우신 '''성황'''이시어...'''천명'''[87]
을 받으셔서...나의 '''성황'''의 시대에...많은 '''제후'''와 경사들은...사손의 '''만수'''[88] 다...만 백성이 말하길 나의 '''성황'''은 백성의 부모다...
동국이상국집, 19권, 성황조향태묘송(聖皇朝享太廟頌)
… … '''짐(朕)'''이 보건대, 종실(宗室)이나 '''제후(諸侯)'''의 아들들은 비록 옷을 못이길 정도로 어려도, 으레 사공(司空)을 제배(除拜)한 지 오래이다.
이에 의해 말한다면, 신하로서 큰 공을 세워 '''제후(諸侯)'''의 반열에 있는 사람은 사세가 종실과 비등하다.
그렇다면 그 아들이 사공(司空)되는 것을 참용(參用)함이 매우 의리에 합당하니 … …
동국이상국집, 33권, 최구(崔球)가 수사공 주국(守司空柱國)을 사양한 데 대한 불윤 中.
4.1.3. 동인지문사륙
(생략)...신하들이 사사로히 왕을 '''성상(聖上), 황상(皇上)'''이라 했으며, 임금을 '''요(堯), 순(舜)'''으로, 나라를 '''한(漢), 당(唐)'''으로 표현했다.
왕은 스스로를 '''짐(朕), 여일인(予一人)'''[89]
이라 칭하고, 명령을 '''조(詔), 제(制)'''라하고, 유경내(宥境內)를 '''대사천하(大赦天下)'''[90] 로 표현했으며, 관부 제도는 모두 '''천조(天朝)'''와 같게 했으니, 이들은 너무나도 참람하다....(생략)
동인지문사륙, 서문 中.
4.1.4. 동문선
"'''제(帝)'''가 진(震)을 나와 하늘(乾)을 탄다."는 단지 때에 맞추어 움직인다는 뜻입니다. 허나 왕께서 호경(鎬)에 가 술을 드신다는 건 바로 여러 사람과 같이 기뻐하기 위함입니다.
봄을 부러워하니 식(式)이 즐거워집니다. 물고기 때와 같이 움직이니 시가(詩歌)를 부르니 인애롭게 취합니다.
민(民)이 생긴 이래 금일과 같은 흥성함이 없었습니다. 상제(上帝)가 돌보아 만년을 갈 상스러움이 나타나 새로운 장관(壯觀)을 보았습니다. 사방에서 환희의 소리가 들립니다.
엎드려 '''황상(皇上)'''을 생각컨데 슬기로우시며 거룩하십니다. 능통하시며 신령스러우십니다. 도량이 크시며 겸손하십니다. 당고(唐高)[91]
의 성덕(盛德)을 지니셨지만 그것을 뽐내시려하지 않습니다. 늘 문왕(文王)의 마음가짐을 가지려 하시니 정치가 고쳐지고 폐단이 보수됩니다. 현명하고 충성스러운 자를 고르시고 못난 자를 떠나 보내셨습니다.땅이 어찌 (왕을) 사랑하고 아끼지 않겠습니까? 그리하여 귀한 금덩이가 동도(東都)[92]
에서 나왔습니다. 하늘이 성명(成命)을 내리니 신새(神璽)가 서주(西州)[93] 에서 나왔습니다.(생략)
벼락을 두른 금여(金輿)를 타고 하늘(天)[94]
이 보좌(寶座)에 오시니 실가(室家)가 모두 기뻐하였습니다.(생략)
만국(萬國)에서 옥(玉帛)을 들고 조회하려 옵니다.
신 등도 법을 배우고 민요(民謠)를 채집해 천안(天顔)을 받들고 구호(口號)[95]
를 외칩니다.
옥련(玉輦)이 서순(西廵)한지 여섯번째 봄이 왔네.
주방(周邦)은 오래됐지만 천명(命)은 새롭네.[96]
'''건원(乾元)'''[97]
께서 아홉 용을 부르시니,'''사방의 나라들이 제후가 되고자 하네.'''
'''제소(帝所)'''[98]
는 이미 즐거움이 퍼졌고,노루가 군신(群臣)을 반겨주네.
대평(大平)하니 부로(父老)들이 앞다투어 축하드리고자 하고
오색 구름(五色雲)이 북진(北宸)[99]
을 바라보고 있네.즐거움과 의범이 있으니 구름들이 모이네,
순수하며 윤택하니 운율의 조화가 들린다.
진엄(辰嚴)[100]
을 받들어 공사(工師)들이 같이 노래를 부른다.
동문선 104권 이인저 작 서경 대화궁 대연 치어
아랑위야, 들보 남쪽을 쳐다볼세, 천중만중 얽어 놓은 빛나는 궁궐은 그 형세가 깊숙도 하구나. 금니(金泥)로 글을 써서 '''봉선(封禪)'''[101]
할 가기(嘉期)가 가까웠으니, 숭악(嵩嶽)이 응당 '''만세 삼창'''을 할 것이다.
동문선 108권 연경궁 정전 상량식
4.1.5. 보한집
본국에 장차 환란이 일어날 것 같고, 이미 나라의 운세가 다했나이다. 그러나 다행이 '''천자'''의 빛나는 모습을 뵙게 되었으니 바라옵건대 신하의 예를 갖추고자 합니다.
4.1.6. 신증동국여지승람
용수산(龍首山) 고을 북쪽 2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남산(南山) 고을 남쪽 3리에 있다. 고려조의 문종(文宗)이 일찍이 이 산에 올라서, '''친왕'''(親王)과 재추(宰樞)들을 불러 술자리를 마련하고, 밤이 되어서야 파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43권 황해도 해주목 中.
4.1.7. 제왕운기
용수산(龍首山) 고을 북쪽 2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남산(南山) 고을 남쪽 3리에 있다. 고려조의 문종(文宗)이 일찍이 이 산에 올라서, '''친왕'''(親王)과 재추(宰樞)들을 불러 술자리를 마련하고, 밤이 되어서야 파하였다 ..
신증동국여지승람, 제43권, 황해도 해주목 中
신은 일찌기 식목집사가 되어 도감의 문서를 보다가, 우연히 금나라 조서 2통을 얻었다. 그 서문에 대금(大金) 황제(皇帝)는 고려국(高麗國) '''황제(皇帝)'''에게 글을 부친다 등등으로 이르고 있으니, 이는 형제를 맺은 확실한 증거인 것이다.
제왕운기 中.
4.1.8. 조선왕조실록
公乎公乎! 三韓再造, 在此一擧。 微公, 國將何恃?
'''공(公)이여! 공(公)이여!'''[102]
삼한(三韓)이 다시 일어난 것은 이 한번 싸움에 있는데, '''공(公)'''이 아니면 나라가 장차 누구를 믿겠습니까?[103]
동지사 김종직이 《동국여지승람》의 묘호를 시호로 고치지 말 것을 아뢰다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동지사(同知事) 김종직(金宗直)이 아뢰기를,
"신 등이 《여지승람(輿地勝覽)》을 교정하였는데, 태조(太祖) 이래로 모두 묘호(廟號)를 일컬었는데, 이제 시호(諡號)로 고쳐 쓰도록 명하셨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고치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그대로 두는 것도 무방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우리나라의 일이 중국 조정에 마땅히 휘(諱)할 것이 자못 많아서 갑자기 고치기는 어려우나, 이는 책에 써서 만세에 전할 것이기 때문에 내가 고치려고 하는 것인데, 경의 말이 그대로 두어도 무방하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하자, 김종직이 아뢰기를,
"우리 나라 서적(書籍)에 마땅히 휘(諱)할 것이 많은데, 어찌 능히 다 고칠 수 있겠습니까?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신라(新羅) 무열왕(武烈王)을 태종(太宗)이라고 일컬었습니다. 당(唐)나라 무후(武后)가 보고서 꾸짖기를, ‘천자(天子)가 태종(太宗)이라고 일컬었는데, 너희가 어찌하여 참람되게 일컫느냐?’라고 하자, 대답하기를, ‘무열왕(武烈王)이 어진 신하 김유신(金庾信)의 무리를 얻어서 삼국(三國)을 통합하였기 때문에 태종이라고 일컫습니다.’라고 하니, 무후가 그대로 두고 묻지 아니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전조(前朝)에서는 중국 조정에 크게 휘(諱)할 것을 거리낌없이 일컬었으니, 이것이 어찌 옳겠는가?"
하니, 김종직이 아뢰기를,
"전조 때에는 혹은 '''연호(年號)'''를 일컫기도 하고 혹은 '''황제(皇帝)'''라고 일컫기도 하였으니, 이는 모두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하였다.
"우리 나라에서 태일(太一)의 별 방위에 따라 제사지내는 것은 실로 온당하지 못한 것이다. 고려 때에 '''해동천자(海東天子)'''라고 참칭(僭稱)한 까닭으로, 중국에 조림(照臨)한 별을 망령되게 금년에는 어느 방위로 옮겼다고 이르고 곳곳에서 제사지냈는데, 천하로서 본다면 우리 나라는 하나의 나뭇잎과 같으니, 어찌 동·서·남·북을 나누어서 제사지낼 수 있겠는가. 중국에서 서방이라 하여 제사지내면 우리 나라에서도 서방이라 하여 황해도에서 제사지내는 것이 옳겠는가. 너희들은 그것을 의논하여 계문(啓聞)하라."
하늘에 제사를 지내야 한다는 변계량의 상서문
천자(天子)가 천지(天地)에 제사지내고 제후(諸侯)가 산천(山川)에 제사지내는 것이 제도이니, 비를 하늘에 비는 것은 참람(僭濫)하지 않은가?’고 하나, 신은 말하기를, ‘천자(天子)가 천지(天地)에 제사지내는 것은 상경(常經)이요, 하늘에 비를 비는 것은 비상(非常)의 변(變)에 대처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하늘을 좋게 말하는 경우에는 사람에게 징험이 있다.’고 하였으니, 신은 인사(人事)로써 이를 밝혀서>>사람을 여기에 두도록 청합니다. 그 일을 소송하고자 할 때 형조(刑曹)에 가지 않으면 반드시 헌사(憲司)에 가게 되는데, 형조와 헌사에서 그 일을 올리는 것은 나라의 제도입니다. 일이 급하고 사정이 지극할 경우에는 직접 와서 격고(擊鼓)하여서 천총(天聰)에 아뢰는 자도 있는데, 무엇이>>이와 다르겠습니까? 대저 5일 동안 비가 안 오면 보리가 없어지고, 10일 동안 비가 안 오면 벼가 없어집니다. 그런데 이제 10여 일이 되어도 비가 내리지 않는데, 아직도 하늘[天]에 제사하기를 의심하는 것이 옳겠습니까? 비록 하늘에 비를 빈다고 하더라도 또한 기필할 수가 없는데, 하물며 이제 빌지도 아니하고 우택(雨澤)이 내리기를 바라는 것은 어려울 것입니다. 또 나라의 제도가 예문(禮文)에 의거하여 교사(郊祀)243)를 폐지한 지가 지금까지 몇 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동방(東方)에서는 하늘에 제사지내는 도리가 있었으니, 폐지할 수 없습니다.''' 신은 청컨대, 그 설(說)을 조목별로 말할 수 있으니, 전하께서 청감(淸鑑)244)하기를 원합니다.
'''우리 동방은 단군(檀君)이 시조인데, 대개 하늘에서 내려왔고 천자가 분봉(分封)한 나라가 아닙니다.''' 단군이 내려온 것이 당요(唐堯)245)의 무진년(戊辰年)에 있었으니, 오늘에 이르기까지 3천여 년이 됩니다. 하늘에 제사하는 예가 어느 시대에 시작하였는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그러나 또한 1천여 년이 되도록 이를 혹은 고친 적이 아직 없습니다. 태조 강헌대왕(太祖 康憲大王)이 또한 이를 따라 더욱 공근(恭謹)하였으니, 신은 하늘에 제사하는 예를 폐지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혹은 말하기를, ‘단군은 해외에 나라를 세워 박략(朴略)246) 하고 글이 적고 중국과 통하지 못하였으므로 일찍이 군신(君臣)의 예를 차리지 않았다. 주(周)나라 무왕(武王)에 이르러서 은(殷)나라의 태사(太師)를 신하로 삼지 아니하고 조선에 봉하였으니, 그 뜻을 알 수 있다. 이로써 하늘에 제사하는 예를 행할 수 있었다. 그 뒤에 중국과 통하여 임금과 신하의 분수에 찬연(燦然)하게 질서가 있으니, 법도를 넘을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신은 말하기를, ‘천자(天子)는 천지(天地)에 제사하고, 제후(諸侯)는 산천(山川)에 제사하는 것은 이것은 예(禮)의 대체(大體)가 그러한 것이다. 그러나 제후로서 하늘에 제사한 경우도 또한 있었다. 노(魯)나라에서 교천(郊天)247)한 것은 성왕(成王)이 주공(周公)에게 큰 공훈(功勳)이 있다 하여 내린 것이고, 기(杞)·송(宋)이 교천(郊天)한 것은 그 선세(先世) 조종(祖宗)의 기운이 일찍이 하늘과 통하였기 때문이다. 기(杞)나라가 기(杞)나라 됨은 미미한 것이지만 선세 때문에 하늘에 제사지냈고, 노(魯)나라는 비록 제후(諸侯)의 나라라 하더라도 천자가 이를 허락하여서 하늘에 제사하였다. 이것은 예의 곡절(曲折)이 그러한 것이다.’고 합니다. 신이 일찍이 생각하건대, 고황제(高皇帝)248) 가 참란(僭亂)을 삭평(削平)하여 이하(夷夏)249) 를 혼일(混一)하고, 제도를 창시하며 법을 세울 때, 옛것을 혁파하고 새로운 것을 취하였습니다. 이에 현릉(玄陵)250) 이 귀부(歸付)한 정성을 아름답게 여겨 특별히 밝은 조서(詔書)를 내려, 우리 조정(朝廷)의 일을 두루 말하기를 손바닥을 가리키는 것과 같이 자세하게 갖추 말하였으니, 참으로 이른바 만 리 밖을 밝게 내다보는 것이 일월(日月)이 조림(照臨)하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우리 조정에서 하늘에 제사하는 일도 또한 반드시 알고 있었을 것은 의심이 없습니다.
그 뒤로 곧 의식은 본속(本俗)251)을 따르고 법은 구장(舊章)252)을 지키도록 허락하였으니, 그 뜻은 대개 해외(海外)의 나라이므로 처음에 하늘에서 명(命)을 받았음을 이르는 것입니다. 그 하늘에 제사하는 예법은 심히 오래 되어 변경할 수가 없습니다. 국가의 법은 제사(祭祀)보다 더 큰 것이 없고, 제사의 예법은 교천(郊天)253)보다 더 큰 것이 없는데, 법은 옛 전장(典章)을 지키는 것이니, 이것이 그 먼저 힘써야 할 일입니다. 이것에서 말미암아 말한다면, '''우리 조정에서 하늘에 제사하는 것은 선세(先世)에서 찾게 되니''', 1천여 년을 지나도록 기운이 하늘과 통한 지 오래 되었습니다. 고황제(高皇帝)가 또 이미 이를 허락하였고, 우리 태조(太祖)께서 또 일찍이 이에 따라서 더욱 공근(恭謹)하였으니, 신이 이른바 '''우리 동방에서 하늘에 제사하는 이치'''가 있어 폐지할 수 없다는 것이 이것 때문입니다.
4.1.9. 평거란송
우리 '''성황(聖皇)'''의 받으신 명은 실로 하느님이 주신 것이로다. 하느님이 우리 '''성황(聖皇)'''을 위하여 달단(韃靼)[104]
을 빈손으로 만든 것이다.
평거란송(平契丹頌)[105]
中.
4.2. 중국
왜국은 일본국이다.
본래 이름인 왜를 부끄러워 했는데, 극동에 있어서 스스로 일본이라 부른다.
'''지금 고려에 신하로서 속하고 있다.'''
그 나라에서 신민(臣民)들은 그 임금을 '''성상(聖上)'''이라고 부르고 사사로이는 엄공(嚴公)이라고도 불렀으며, 후비(后妃)를 궁주(宮主)[註241]라고 불렀다.
송사, 외국열전, 고려.
4.3. 일본
고려국(高麗國) '''황제(皇帝)'''가 첩장을 헌상했다고 대재수가 전했습니다.
수좌기[107]
, 조랴쿠 4년(1080년)
5. 기타
- 경순왕은 고려에 입조(入朝)한다는 뜻을 밝혔다.
- 숙종은 넷째 딸 복령궁주의 묘지명에서 천자(天子)로 불렸다. 아들 '왕효 묘지명'에서 예종이 숙종을 '선제(先帝)'로 불렀다.
- 성종은 태묘를 도입하면서 제후식의 5묘제를 쓰기는 했지만 천자국의 법식도 사용했는데 그것은 사당의 이름을 종묘가 아닌 태묘로 지었고 또한 선왕들에게 묘호를 바쳤다. 그리고 선왕들에게 묘호를 바치는 것은 조선시대까지도 이어진다.
- 1079년에 문종(文宗)이 병이 깊어 일본의 상인 왕칙정(王則貞)을 통해서 일본에 의사의 파견을 요청하였으며 외교 문서에 황제의 뜻이라는 의미의 성지(聖旨)라는 용어를 썻다. 다만 이 때문에 일본은 거부를하였는데 그 이유는 당시 일본은 백제, 신라부터 고려까지 한반도 국가들을 자기들 멋대로 일본의 번국으로 여겨서[108] 서로 동상이몽의 상황이 연출되었기 때문이었다.
6. 고려 후기 양상
원종의 칭신 이래 고려에 대한 몽골제국의 지배권이 심화되자, 몽골의 지배 방식은 유교를 통해 고려 내에서 구현됐는데, 카안 울루스는 중화왕조라는 외피를 쓰고 황제국을 표방하며 고려를 제후국 체제로 강격하고, 고려 국내에조차 국왕의 위상을 황제의 신하(제후)로 관철시켰다. 고려는 수동적인 태도로 그것이 제후국 체제에 부합하는지와 크게 상관없이 원 조정이 문제 삼거나 문제 삼을 만한 황제국 체제의 면모를 개편했다. 몽골의 지배 속에서 '팍스 몽골리카'를 경험한 고려 식자층은 몽골을 과거의 ‘흉폭한 달단’에서 사해를 통합한 천조로 인식하여 이데올로기를 수습하였으며, 원·명 교체이라는 변혁 속에서 현실 추수적 성격이 극복된 이후에도 일부 유학자들 사이에서는 자신들을 이적으로, 중화를 보편문명으로 간주하고 주체적으로 제후의 명문을 지향하는 면모가 부상하여 19세기 어느 시점까지 지속되었다.[114]다루가치의 지적에 따라 각종 용어를 격하하다
甲申 達魯花赤詰之曰, “稱宣旨·稱朕·稱赦, 何僭也?” 王使僉議中贊金方慶·左承宣朴恒, 解之曰, “非敢僭也, 但循祖宗相傳之舊耳, 敢不改焉.” 於是, 改宣旨曰王旨, 朕曰孤, 赦曰宥, 奏曰呈.
갑신 달로화적(達魯花赤, 다루가치)이 왕을 비난하면서 말하기를, “선지(宣旨)라 칭하고, 짐(朕)이라 칭하고, 사(赦)라 칭하니 어찌 이렇게 참람합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첨의중찬(僉議中贊) 김방경(金方慶)과 좌승선(左承宣) 박항(朴恒)을 시켜 해명하기를, “감히 참람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조상 때부터 전해오는 옛 관례를 따랐을 뿐입니다. 감히 고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고, '''이에 선지를 왕지(王旨)로, 짐을 고(孤)로, 사를 유(宥)로, 주(奏)를 정(呈)으로 고쳤다.'''
고려사 권제28 충렬왕(忠烈王) 2년(1276년) 3월 19일(음) 갑신(甲申)년 다루가치의 지적에 따라 각종 용어를 격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