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교단절

 

1. 개요
2. 사례
3. 관련 문서


1. 개요


國交斷絶
국가간 외교 관계에서 한때 수교했다가 관계를 다시 단절한다는 외교용어이며, 보통 줄여서 단교(斷交)라고 불린다. 어느 정도 체계가 갖춰진 국가들끼리의 단교는 매우 심각한 외교조치로, 대상국 뿐만 아니라 주변국의 정세와 국가 신용에 헬게이트를 불러오기 마련이다.
보통 이러한 극단적인 일이 일어나는 경위는 세 가지다.
국가 간 외교가 단절될 경우 경제, 사회, 문화 등에도 그 영향을 미치게 되어서 외교관계는 물론, 민간 분야의 교류까지 끊어지는 일이 발생하기도 하고 나라의 입장에서는 더 이상 교류국가가 아닌 적대국가나 무관국가로 분류하게 된다. 예외는 대만처럼 맘먹고 끊어버린 것이 아니라 중국의 요구 등으로 국교단절을 택했을 때에는 민간 차원의 교류에 손 대지 않는다. 그 예로 대만은 여러 선진국과 국교단절을 당했지만 무사증 입국이 가능하다.
대한민국의 국교 단절은 대부분 남북한 외교 대결이 격렬하게 진행되던 1960~70년대에 수교국이 사회주의 정부로 교체되었거나, 친북 성향을 보였거나, 혹은 북한과 외교 관계를 체결한 경우 많이 나타났다. 노태우 정부 당시 이를 바로잡겠다고 북방정책을 펼친 결과 이제는 남북한을 동시에 수교하는 나라가 늘어났다.
한일단교 떡밥은 한일관계가 악화될 때마다 잊을 만하면 한번씩 나오는 떡밥. 마찬가지로 중국과 일본에서도 중일관계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중일단교 떡밥이 나온다. 일반적으로 넷 우익특정 아시아 운운하며 단교를 주장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로. 경제적으로 상당히 서로에게 의존하고 있는 이 3국이 실제로 단교할 가능성은 현재로서는 희박하다.
단교보다 한 단계 아래의 조치로 주재국 대사를 페르소나 논 그라타로 지정하여 추방하는 것이 있다. 참고로 북한은 2017년 들어 단교 1번, 대사추방 8번(12월 23일 기준) 당했다.

2. 사례


취소선이 그어진 경우는 다시 재수교를 한 국가.

2.1. 대한민국


  • : 1978년 재수교
  • : 1990년 재수교
  • : 살바도르 아옌데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면서 북한과 외교 관계를 맺자 단교. 이후 아우구스트 피노체트의 군부 쿠데타로 군사 독재정권이 들어서자 국교 재개.
  • : 1993년 재수교
  • : 1991년 재수교
  • : 이쪽은 나라가 망해서… 대신 1992년부터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과 수교 중이다.
  • : 크메르 루주 공산 정권이 들어서면서 단교. 1997년 재수교.
  • : 1990년 재수교
  • : 군사 쿠데타로 친소 정권이 들어서면서 단교. 1991년 소련이 붕괴되고 1992년 친소 정권이 붕괴된 직후에도 무자헤딘 내전과 탈레반 정권 수립 등 국내의 혼란한 상황으로 복교를 못하고 있었다가 9.11 테러 사건 이후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탈레반 정권이 붕괴되자 2002년 다시 재수교하였다.
  • : 2006년 재수교
  • : 1995년 재수교
  • 중화민국(1992년): 한국이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를 맺을 때 중화인민공화국 측에서 하나의 중국 원칙에 따라 대만과의 외교 단절을 요구하였고, 한국에서 이를 수용하였다. 일단 공식적으로는 국교 단절 상태지만, 상호간에 상주대표부는 유지하고 있어서 비공식적인 국가 간 교류는 여전히 이루어지고 있다. 자세한 사항은 한국-대만 관계 문서로.

2.2. 북한


1973년 수교. 쿠데타로 우익 군부 정권이 들어서자 1977년 대사관에 방화하고 일방적으로 공관 철수. 1990년대 이후로 북한에서 아르헨티나에게 관계 재개를 희망한다고 메시지를 보냈으나, 아르헨티나에서는 관계 재개 전에 대사관 방화사건 배상, 미납 곡물대금 지불 등을 먼저 이행하면 관계를 재개하겠다는 입장이다. 북한/외교 문서로.
  • : 1970년대에 외교 관계를 맺었다가 단교. 2001년에 국교 재개
  • 서사모아
  • (1983년, 이후 재수교)
  • (1983년, 2007년 재수교)
대한민국 국빈 일행이 미얀마에 방문했을 때 북한 측에서 테러를 벌였다. 하필이면 그 장소가 미얀마의 성지급 장소인 독립운동가 아웅산의 묘소였다는 게 문제. 이 사건으로 미얀마는 물론 친북 관계였던 제3세계의 일부 국가들마저 북한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말았다. 자세한 사항은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항목으로.
1974년 수교. 그러나 2014.2.17. 발표된 UN 인권보고서가 북한이 대량 학살을 자행하고, 국민을 노예로 전락시키며, 굶주리게 하고 있다는 내용을 담은 것과 관련하여, 2014년 2월 19일부로 단교. #
트리니다드 토바고가 북한과 단교한 원인은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이 주된 이유로 볼 수 있다.

2.3. 국외


반공 성향이 강하지 않은 국가가 아닌 이상 단교했으며 강대국들이나 중견국들도 반중공, 반공 성향이 있어도 자국의 이익을 위해 중화인민공화국과 외교 관계를 수립한다. 대표적으로 중공과 전쟁까지 치르고도 수교한 대한민국. 다만 이건 어디까지나 공식적으로만 그런 것이고 비공식적으로는 대표부를 통해 외교 관계가 유지되고 있다. 자세한 사항은 대만/외교 문서로.
2004년 헝가리에서 아르메니아 장교 G. Margaryan을 살해한 아제르바이잔 장교 R. Safarov를, 헝가리측이 사면하고 본국으로 송환해버린 처사에 대해 아르메니아가 항의하여 2012년 단교.
2008년에 있었던 남오세티야 전쟁으로 인해 국교가 단절되었다.
2018년에 시리아가 남오세티야압하스를 독립국으로 인정하자 반발했고, 국교를 단절하는 조치를 취했다.#
2012년 9월 이란 정부가 시리아 아사드 정권을 지원하여, 캐나다 민간인들을 위협하고 캐나다 외교관들을 생명의 위협을 처하게 했다는 이유로 캐나다 정부가 단교를 통보하였다. 2020년 지금까지도 이란과 캐나다는 국교가 없다.
2016년 1월 4일과 8일에 이루어졌다. 게다가 자국 유학파 출신인 시아파 성직자가 억울하게 처형[1]당한 건에 대해 이란에서 항의해서 단절한 것이라면 이해가 가는데, 오히려 사우디가 단절했다. 뒤이어 바레인과 수단, 소말리아 등 중동, 아프리카수니파 이슬람 국가들도 이란과 모두 단교. 다만 이란 군중들도 사우디 대사관을 습격하여 국교단절의 명분을 제공한 점에서 귀책사유가 있다. 이슬람혁명 이후 이란 지도자들은 외국 공관을 습격하는 걸(1979년 미국, 2011년 영국) 권장 내지 용인하다시피 했는데 이번에는 역풍을 크게 맞은 셈. 다만 사우디 포함 수니파가 미쳐돌아가면서 서방 내부에서 불신이 엄청나게 강해지고, 그나마 합리적인 이란이 낫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변수이기는 하다. 일각에서는 이란의 핵협상 타결로 인한 제재 해제가 사우디에 위기감을 주어 이런 일을 저질렀다는 분석도 있다. 가뜩이나 석유 값이 떨어져서 경제적 타격을 입었는데 그 동안 석유를 많이 못 팔던 이란이 제재 해제로 석유를 팔기 시작하면 석유 값이 더 떨어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 더군다나 정상국가화된 이란이 중동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할 것 역시 분명하기 때문이다.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분쟁 문서로.
1979년 이란 혁명으로 파탄으로 치닫던 두 나라의 외교 관계는[2] 그 해 11월 발생한 주 이란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 1980년 4월에 단교했다. 그러나 쿠바 혁명 이후 단절된 국교 관계를 회복해 2015년에 다시 재수교한 미국과 쿠바와 달리 이란과 미국은 몇 차례 관계 개선의 의지가 있었음에도 두 나라 간의 불신이 너무 심해 재수교를 하지 못하고 있다.
1979년 이란 혁명 이후 이란은 이스라엘과도 단교했다.
2018년 5월 2일 모로코이란이 레바논 내 시아파 동맹인 헤즈볼라와 함께 서사하라 독립을 주장하는 폴리사리오 전선을 지원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국교단절을 선언했다. #
파라과이는 2019년 1월 10일에 마두로의 재집권에 항의하는 표시로 국교단절을 선언했다.#
미국과 EU가 니콜라스 마두로가 아닌 후안 과이도를 대통령으로 인정하자, 2019년 1월 23일 마두로가 반발하여 미국과의 단교를 통보하고 72시간 내 주 베네수엘라 미국 대사관의 퇴거를 명령했다. 미국은 니콜라스 마두로를 향해 전 대통령이기 때문에 단교 권리가 없고 후안 과이도 국회의장(임시 대통령)이 외교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밝혀 단교를 거부했다. 실질적으로 후안 과이도 과도정부는 행정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베네수엘라에 주재하는 미국 외교관들은 안전을 위해 대부분 철수했다. 사실 그 이전에도 양국은 10년간 대사를 파견하지 않는 등 사이가 개판이었다.
2019년 베네수엘라 정치 위기가 진행된 시점인 2019년 2월 23일에 마두로 정부가 정치·외교 관계 단절을 선언했다. #
2019년 7월 4일, 소말릴란드 무세 비히 압디 대통령이 알파 콘데 기니 대통령의 초청으로 코나크리를 방문하자 소말리아는 기니와 단교해버렸다.
2019년 10월 12일에 아르헨티나는 베네수엘라와의 외교 단절을 선언하고 베네수엘라 외교관들을 추방하였다.#
2019년 11월 4일에 알레한드로 히아마테이 대통령 당선인은 베네수엘라와 단교를 선언한다고 밝혔다.#
2019년 11월 15일에 볼리비아의 임시 정부는 베네수엘라와 단교를 선언한다고 밝혔다.#
2020년 12월 15일에 케냐는 소말리아와 단교를 선언했다.#

2.3.1. 과거


1945년 불가리아에서 공산정권이 들어서자 당시 권위주의 독재를 펼치던 안토니오 살라자르 포르투갈 총리가 국교를 단절했으나 1974년 포르투갈에서 카네이션 혁명으로 새 정권이 수립되자 같은 해 다시 재수교하였다.
1929년 중동로 사건으로 단교되었다가 1932년 다시 수교한다. 1949년에 소련이 중화인민공화국을 국가승인하면서 다시 단교.
원래 우호적인 관계였으나 단교당한다. 소련이 무너진 1992년에 와서야 재수교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사우디아라비아-러시아 관계 참조.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추축국 가입국들은 왕징웨이 정권을 중국의 합법 정부로 보아 기존의 국민정부와 단교하고 일본의 괴뢰 정부인 왕징웨이 정권과 수교했다. 2차대전 이후 이들은 다시 중화민국과 외교관계를 맺게 된다.
1961년 쿠바 혁명 당시 단교했다가, 2015년 재수교했다. 그때까지 양국 상주공관은 2개국 주재 스위스 대사관 산하 이익대표부로 운영하였다.
1967년 쿠바의 베네수엘라 반군 지원으로 단교했다가 1974년 재수교했다.
이쪽은 미국이 남예멘이 독립한 1967년 승인하고 국교까지 맺었으나 1969년 남예멘 측에서 일방적으로 단교했다.
이란도 영국과 외교관계를 잠시 끊은 적이 있었다.
이 쪽도 이란-영국 관계에서처럼 잠시 단절된 이력 역시 있었다. 이집트-이스라엘 관계 문서로.
1967년 중국의 인도네시아 공산당 지원으로 단교했다. 1990년 재수교했다.
이쪽은 굉장히 복잡한데, 1964년 중아공이 대만과 단교하고 중국과 수교했으나, 1966년 장 베델 보카사의 집권 이후 대만과 재수교하고 중국과 단교했다. 1976년 보카사가 중국을 방문한 이후 중국과 재수교하고 대만과 단교했다. 1991년 다시 대만과 재수교하고 중국과 단교했다. 1998년 중국과 재수교하고 대만과 단교하며 끝냈다.
지독한 인종차별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한 항의를 위해서 남아공과 국교를 단절한 국가들이 많았다. 이후 넬슨 만델라의 흑인 정권이 들어서고 아파르트헤이트가 폐지되면서 국교를 회복하였다.
볼리비아는 2009년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 침공에 항의하며 단교했으나 볼리비아 임시정부가 10여년만에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복원한다고 밝혔다.#
차드는 1972년에 아스라엘과 외교관계를 단절했지만, 47년만에 외교관계를 복원했다.#
2017년 6월 5일 사우디, 아랍에미리트, 바레인, 이집트가 단교하며 이뤄졌다. 카타르의 이란 우호 정책과 무슬림 형제단, 하마스 비호가 주된 이유라고 한다. 2022년으로 예정된 카타르 월드컵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 생각된다. 곧이어 5번째로 예멘, 6번째로 리비아(세속주의 성향 동부 정부), 7번째로 몰디브가 단교에 가담했다. 다음날에는 모리타니가 단교했고, 인도양의 섬나라 모리셔스도 단교했으며, 다음날 코모로도 단교에 참여했다. 요르단, 세네갈, 지부티, 니제르, 차드는 단교까진 아니지만 카타르와 외교 관계 격하를 선언했으나 요르단은 다시 카타르와의 대사급 외교 관계를 회복했다. 그리고 2021년 1월 5일부로 미국 중재로 협정을 맺음에 따라 회복하였다.#

3. 관련 문서




[1] 이게 국가반역을 꾸미거나 사람을 죽이거나 해서 처형된 것이 절대 아니다. 시위 벌였다고 처형했다. 어지간히 막장인 독재정권들도 하지 않는 짓을 저지른 셈.[2] 친미 왕정인 팔라비 왕조를 뒤집어 엎은 혁명 세력은 철저한 반미 노선을 추구했다. 당시 혁명의 지도자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는 미국을 '대 사탄(Great Satan)'으로 지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