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희/지도자 경력
1. 개요
김용희의 지도자 경력에 대해 다루는 문서.
2. 롯데 자이언츠 1기
2.1. 코치 부임: 지도자 1기 시작
현역 은퇴 시즌 플레잉코치를 겸업했고 은퇴 다음해부터 바로 롯데 타격코치로 부임했다. 특히 92년 남두오성이라고 불리는 3할타자 5명을 배출하는 성과로 팀의 한국시리즈 우승에 상당한 기여를 했다. 이 당시 김용희의 손에는 항상 선수들의 타격과 관련된 자료들이 종이 뭉테기 단위로 들려 있었다고 한다.
한국시리즈 우승 후 지도자 공부를 더 하길 원해 재계약 대신 미국 연수를 희망했고, 당연히 구단서는 만류했지만 결국 자비로 연수를 가게 됐다.
2.2. 감독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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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철 감독이 예상을 깨고 빙그레 이글스로 이동하면서, 롯데 구단은 고민 끝에 김용희의 감독 승격을 발표한다. 본인은 이르다고 고사했지만 당시 구단주 신준호가 다 도와줄테니 무조건 맡아달라고 밀어부쳤다고 한다. 첫 감독 취임 당시 나이가 '''39세'''라 다소 이르다는 이야기는 있었지만,[1][2] 어차피 차기 감독감 1순위였던 탓에 야구계에선 크게 놀라워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다만, 괜찮은 인재이기 때문에 너무 일찍 감독 데뷔를 시키기 보다 좀 더 경륜을 쌓는 것이 어떻냐는 이야기는 나왔다고.
미국 연수를 경험해서인지, 그의 모토는 자율야구였다. 김용희의 자율야구는 팀훈련시간을 대폭 단축하면서 선수들에게 집중력있고 생각하는 야구를 요하는 것이 그 특징이었다. 제리 로이스터 체제가 등장했을 때, 그가 지지를 보낸 것은 그가 추구하던 야구와 유사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자율야구의 선구자 이광환 감독의 LG 트윈스와 맞대결할 경우 자체 구단끼리 선발예고제를 시행하기도 했다.[3] 감독 첫해 롯데는 1군 붙박이 주전이 무려 8명이나 방위복무를 해 전 시즌보다 전력이 많이 약화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즌 중반 잠깐 4위 싸움에 뛰어들 정도로 선전했다. 최종순위는 6위. 덤으로 이 시즌에 롯데구단 역사상 최초의 투수 분업화를 구축했다. 방위복무에서 제대한 박동희를 마무리투수로 기용했고, 박동희는 6구원승 31세이브를 기록하며 기대에 부응했다.
1995년에 이 자율야구 시스템이 비로소 성공을 거두는데 윤학길과 주형광이 팀의 주축 투수로서 활약하고, 마해영의 합류와 박정태의 재기로 팀 전력이 비약적으로 상승, 3위로 PO에 진출한 것이다. 7전 4선승제로 열린 PO에서 1차전 강성우의 활약으로 이상훈을 무너뜨리면서 이변을 연출하더니 주형광의 역투 속에 4승 2패로 한국시리즈에 오른다. 당시 준PO는 3위와 4위의 게임차가 3.5게임 이상이면 무산되도록 규정되었기 때문에 무산되었다. 당시 4위는 해태. 한국시리즈에서도 굉장히 선전해서 1, 4, 5차전을 잡고 먼저 3승에 오르지만, 6차전 진필중에게 완투패를 당하고, 7차전 2:1로 뒤지던 3회말 2사 2,3루 상황에서 박정태가 치명적인 실책을 저질러 2점을 더 내주는 악재가 겹치면서 아쉽게 OB에게 우승을 내주고 만다. 이 때 만일 우승했다면 장기집권도 가능했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4][5]
1996년부터 주전 선수들의 부상 돌림병으로 인해 주전 투수들을 제대로 가동하지 못했다. 염종석은 전 시즌을 마치고 팔꿈치 수술을 받아 아예 개점휴업했고, 박동희도 부상으로 부진했으며, 윤학길은 노쇠했다. 5억짜리 신인 차명주는 먹튀였고[6] 문동환은 계약금 문제로 현대 피닉스에 입단했다. 4위와 큰 차이로 5위를 기록하며 포스트시즌에도 진출하지 못하는 실망스러운 시즌을 보냈지만, 1995년 한국시리즈 준우승의 성과 때문에 3년 재계약에 성공했다. 이게 좀 흠좀무한게 '''롯데 역사상 최초로 재계약에 성공한 감독이었다는 점.'''[7]
그러나 이듬해 1997년, 롯데 프런트는 개막을 불과 며칠 앞둔 시점에서 문동환을 데리고 오기 위해 전준호를 현대 유니콘스로 5억을 받고 팔아버리는 최악의 현금 트레이드를 단행한다.[8] 여기에 신인 손민한도 부상으로 쓰러지고, 팀 내부적으로도 많은 선수들이 단체로 사기를 당하는 바람에 팀 분위기가 뒤숭숭해지면서 이 시즌은 일치감치 꼴찌로 내달렸다. 아울러 프런트가 원정 기록원도 돈이 없다고 짜르는 등, 슬슬 지원을 줄이더니, 1998시즌도 여전히 꼴지에 머물다가 2년 연속 최하위에 머무른다는 이유로 해임되어 롯데 감독과의 인연을 마치게 된다. 롯데는 해태에서 김응용을 데려오려고 애를 썼지만 데려오지 못해 당시 롯데의 투수코치였던 김명성을 감독 대행으로 임명하였다.
3. 삼성 라이온즈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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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기 정말 힘들었다
롯데 감독에서 해임된 후, 실업팀 시절의 팀 동료였던 서정환의 추천으로 1999 시즌 삼성 라이온즈의 수석코치에 임명되었다.[9]
1999 시즌 PO에서의 패배 책임을 지고 서정환 감독이 사퇴하자, 2000 시즌 그 후임으로 내부 승진했다. 그러나 당시 그의 권위는 강할 수 없었다. 1군 타격코치에는 삼성 프랜차이즈 스타 출신인 '''장효조''', 2군 감독에는 '''김성근''', 타격 인스트럭터에는 '''백인천''', 사장 보좌역으로는 '''전 시즌''' 감독에서 물러난 '''서정환'''이 임명되는 등 감독으로서 힘을 실어주지 않았다. [10] 이미 삼성은 김응용 해태 감독을 영입하기 위해 노력하던 중이었고, 일단 김응용 감독이 한 해 더 해태에 남기로 하자 대타로 임명된 것이었다.
하지만 김용희를 견제하기 위해 장효조, 김성근을 영입했다는 서술은 단락은 야구판을 제대로 모르고 하는 소리다. 김용희에게 힘을 실어주지 않기 위해 장효조, 김성근을 임명한 것이 아니라, 김용희와 마찬가지로 김응용이 오기 전 1년간 땜빵을 시키기 위해 기용한 것일 뿐이었다. 당초 김응용은 2000시즌을 앞두고 삼성에 오기로 구두합의가 되어 있었으나 막판에 일이 틀어지면서 1년 후에 오게 되었던 것. 때문에 삼성은 2000년 1시즌 동안만 팀을 맡아줄 임시직 코칭스태프들이 필요했던 것이었다. 당시 삼성 프런트는 장효조 및 김성근과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다.
장효조는 삼성 구단과 악연으로 유명하다. 삼성 시절 장효조는 매년 연봉 협상에서 삼성 구단과 첨예한 대립각을 세웠던 것으로 유명했다. 1988년 롯데로 트레이드된 후 장효조는 거의 삼성 구단과는 척을 졌다. 장효조는 롯데로 트레이드되고 나서 고향인 부산으로 집을 옮겼고, 죽을 때까지 거주지를 부산에서 대구로 옮긴 적이 없었다. 삼성 구단 역시 장효조를 코칭스태프로 기용하라는 팬들의 열화를 무시하고 2000년을 제외하면 무려 2010년까지 장효조를 한번도 코치로 기용한 적이 없었다. 2000년 장효조가 삼성의 코치로 영입된 것은 김용희와 함께 1년 때우다가 나가라는 의미였다. 삼성 프런트와 껄끄러웠던 장효조가 타격코치로 영입된 것은 김용희와의 인연 때문으로 보아야 한다. 김용희가 롯데 감독을 맡았던 시절 타격코치만큼은 장효조를 신뢰하여 김용희 본인이 롯데 감독에서 경질될 때까지 장효조 타코를 교체하지 않았다. 김용희가 롯데 감독에서 경질되면서 장효조 또한 롯데 타코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삼성 구단 역시 장효조가 못마땅했지만 어차피 1년만 쓰고 버릴 것이었기 때문에 장효조를 타코로 임명한 것.
삼성 프런트는 2000시즌이 끝나고 장효조를 경질하고 나서 무려 10년 동안 삼성 최초의 프랜차이즈 스타인 장효조를 코치로 재기용하지 않았다. 장효조를 코치로 기용하라는 팬들의 요구가 빗발쳤지만, 삼성 프런트는 언론에 성격이상설까지 제기하면서 장효조는 코치로 기용하기에 부적합한 인물이라고 주장했다. 다만 팬들의 요구가 빗발치자 마지못해 2000년대 중반 장효조를 스카우트로 기용하긴 했지만, 당시 스카우트의 처우는 정말 열악했다. 당시 장효조는 대구구장에서 삼성 경기가 열릴 때 기자실에서 TV를 보며 기자들에게 야구를 해설해주었다고 한다(...). 장효조는 2010년에야 2군 감독(총괄코치)으로 복귀하게 되었으나, 2011년에 지병으로 사망했다.
김성근 역시 삼성 구단과 매우 껄끄로운 인물이었다. 김성근은 과거 삼성 감독으로 있으면서 선수단 및 프런트와 각종 트러블을 일으켰고, 이에 선수단 항명이 일어나기도 했다. 삼성 출신 코치들과 프런트까지 선수단 항명에 암묵적으로 동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때문에 OB 선수단 항명사태와 다르게 조용히 넘어갈 수 있었던 것. 김성근은 1991년~1992년 시즌 삼성에서 참담한 실패를 겪은 후 감독으로는 재기 불능 상태에 빠졌다. 수년간 야구 인스트럭트로 연명하고 있다가 1996년 친분이 깊었던 이용일 쌍방울 구단주 대행에 의해 쌍방울 감독으로 영입되면서 간신히 야구판에 복귀할 수 있었다. 김성근은 쌍방울 감독에 있는 동안 자신과 척을 졌던 삼성에게 여러 차례 빈볼을 던지는 등 많은 트러블을 일으켰는데, 현재까지도 회자되는 일화로는 이만수 추격 사건, 부정배트 소동 등이 있다. 삼성 구단이 이렇게 껄끄로운 관계에 있던 김성근을 영입한 이유 역시 1년 땜빵으로 있다가 나가라는 의미였다.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해태의 프랜차이즈 스타였던 이순철도 삼성 주루코치로 영입되었는데, 이순철 역시 김응용 감독과 매우 껄끄러운 관계였다. 다만 이순철은 서정환이 데려온 코치를 유임시킨 케이스. 2000년 10월 30일에 김응용이 마침내 삼성으로 오게 되면서 김용희, 김성근, 장효조, 이순철은 모두 정리되었다.
물론 삼성 프런트도 이강철과 김동수를 FA로, 외국인 선수로 MLB 레전드급 선수인 훌리오 프랑코[11] 를 영입해서 할 만큼 했다고 할 수도 있지만, 선수단을 장악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지 않은 것은 분명 잘못된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양대리그 체제에서 드림리그 3위를 기록해, 당시 매직리그 2위였던 롯데보다 승률이 좋아서 준PO를 거친다. 여기서 승리하고 PO에 오르는데, 이 당시 91승을 거두면서 최강 팀이었던 현대 유니콘스와의 대결에서 4연패로 깨지고 말았다. 그리고 무기력하게 재계 라이벌에게 4패로 물러났다는 점 + 김응용 감독의 영입이 확정되었다는 점으로 인해 자연히 감독에서 물러나게 된다. 여태껏 혹사당하던 임창용도 관리해 주는 등 무리하지 않고 상식적으로 운영했지만, 삼성의 실적 제일주의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성적이 그리 좋은 것만은 아니기도 했고. 참고로 1990년 한국시리즈에서 전자업계 라이벌에게 4연패로 졌다는 이유로 정동진 감독이 짤린 적이 있다. 삼성의 전과는 화려하다! 그리고 10년 뒤에는 선동열 감독이 SK와의 한국시리즈에서 4연패하고 감독직에서 짤렸다. 10년 주기설?
스트레스가 많았던지 평소 모습과는 다르게 이해 6월 25일 김용희 감독은 심판의 멱살을 잡고(…) 항의한 탓에 6경기 출장정지+최고 제재금 200만원을 물어야 했다.[12]
잘 한 점이 있다면 임창용의 투구 이닝을 조절해 주며 임창용이 풀타임 주전이 된 후 처음으로 100이닝에 미달하도록 이닝 소화를 배려해 줬다는 점이다. 임창용이 해태에서 김응용에게, 트레이드로 삼성에 온 첫 해에 서정환에 의해 마무리면서 3년 연속 규정 이닝을 충족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이때에 와서야 임창용은 제대로 된 관리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임창용이 2000년마저 계속 전처럼 굴려졌다면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이나 일본 진출은 고사하고 재기불능 수준으로 망가졌을 가능성이 컸다는 평가를 듣는다.
4. 롯데 자이언츠 2기
삼성 감독에서 해임된 이듬해 2001년 롯데 자이언츠의 1군 수석코치로 부임했다. 그러다가 김명성 감독이 시즌 중에 작고하고 우용득 2군 감독이 1군 감독대행이 취임하자 계속해서 수석코치로 감독을 보좌하였다. 이후 2002년 우용득 감독이 경질되고 백인천 감독이 임명된 후 백감독이 선수단에 합류하기 전인 6월 21일~23일 삼성 라이온즈와의 3연전에선 잠깐동안 감독 대행을 맡기도 했다.
이후 1년을 쉬고 양상문 감독 시절엔 롯데 자이언츠 2군 감독, 강병철 3기 체제 하에서는 다시 수석코치로 활동했다. 롯데 감독이 바뀔 때마다 단골 후보로 거론되긴 했지만, 아무래도 이제는 1군 감독으로서의 복귀는 쉽지 않을 듯 싶었다.
5. 해설가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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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를 나간뒤에는 SBS ESPN의 해설가를 지냈다. 타격 부분에 대해서는 상당한 이론과 식견을 보여주는 해설을 했으며 현역 시절에 인품이 좋은 걸로 유명했던 것 답게, 까는 해설보다는 조용히 칭찬하는 해설자 타입에 더 가깝다. 가끔 들리는 부산 사투리와 롯데에 대한 어쩔 수 없는 애정이 보이기도 한다. 사직 구장에서 중계를 할 때 마다 구장이 배 모양이라고 설명해주는게 일종의 패턴화 되었다.
2011 시즌에도 새롭게 영입한 양준혁과 안경현의 안정성이 아직은 높지 않기 때문에 케이블에서는 주역으로 뛰고 있다. 그리고 올스타전에서 임용수, 양준혁과 함께 신개념 개그 해설을 선보였다.
목소리와 억양, 해설 톤이 씨름의 이만기와 비슷하다. 옆방에서 들으면 씨름중계인지 야구중계인지 헷갈릴 정도. 그래서 포털 사이트에서 "김용희 이만기" 검색해보면 '김용희는 이만기 보이스' 혹은 '오늘 야구 해설은 이만기' 등의 글을 많이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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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7월 20일 경남고 대 군산상고 레전드 매치 촬영. 경기 때는 허구연이 감독이고 김용희가 수석코치였다. 이 경기는 군산상고의 승리. 그리고 최동원이 살아 생전에 대중들에게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냈던 경기였다.
6. SK 와이번스 시절
6.1. 2군 감독 부임: 지도자 2기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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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수 2군 감독이 8월부터 감독 대행을 맡게 되자 2011년 9월 7일 SK 와이번스 2군 감독으로 선임되었고, 추석연휴가 지나간 후 선수단에 합류했다. 퓨처스 개막전 때는 고양 김성근 감독과 감독개그를 주고받았다. 박재홍과 카톡으로 연락을 주고받는 등 세련된 감각으로 소통하고 선수들을 챙겨주는 모습에 과연 덕장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있다.
처음 부임 당시만 해도 회의적인 시선이 있었는데, 이는 SBS 해설위원 시절 김성근 감독 체제 하의 SK를 많이 깠던 것에서 비롯한다. 그러나 2013년까지의 모습을 보면 이만수 감독에 비해서는 지도력이 낫다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실제로 계형철 감독이나 이만수 감독이 2군 감독하던 시절의 성적에 비하면 상당히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SK 퓨처스 팀은 2007년 2위를 한 이후 줄곧 하위권을 맴돌았다. 2007년 우승 이후 상위권 독주로 상위 라운드 신인지명에서 계속 밀린데다, 김성근 감독의 스타일 상 조금이라도 가능성 있는 신인은 2군 경기장에서 직접 컨디션을 확인한 후 군입대도 한계 시점까지 연기하고 1군에서 뛰도록 하는 편이었기 때문에 2군의 전력이 좋다고는 할 수 없을 수준이었다.
조범현 감독이 kt wiz의 감독으로 선임된 비하인드 스토리를 다룬 기사에서 당초 물망에 올라 제의까지 받았으나 "현재 팀에 집중하고 싶다는 이유"를 들어 고사한 '''2군 감독 K씨'''로 추정되었다. 2013년 당시 퓨처스리그 감독 중 이니셜을 K로 쓸 수 있는 사람은 김 감독을 제외하면 롯데의 권두조, 넥센의 김성갑 감독 정도였다.여기에 '이미 이만수 감독은 시즌 후 경질이 확정적이고, 후임 감독을 내부승격으로 처리할 것'이란 살이 붙어서 여러가지 말이 오고가는 상황. 결과적으로 이 말들은 사실이 되었다. 이만수 감독이 유임되긴 했지만.
6.2. SK 육성총괄 겸 스카우트 팀장 부임
시즌 종료 후 은퇴한 박경완이 바로 SK 와이번스 2군 감독에 선임됨에 따라 김용희 감독은 새로 설치한 육성군 총괄 겸 스카우트 팀장으로 보직이 이동되어 신인지명과 육성을 전담했다.
6.3. 감독 부임
그리고 2014년 시즌 후 계약이 만료된 이만수 감독의 뒤를 이어서 SK 와이번스의 후임 감독으로 내정되었다는 뉴스가 보도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SK 프런트 쪽에서 아직 내정된 바는 없다고 해명기사가 나와 아직 확정된 것은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며칠 지나지 않은 10월 21일, 계약기간 2년, 총액 9억 원에 SK 와이번스의 5대 감독으로 공식 선임되었다.
2000년 삼성 라이온즈를 1시즌 맡은 이후 1군 감독으로는 자그마치 '''15년''' 만의 복귀다. 내심 김경기 타격코치나 박경완 2군 감독을 신임 감독으로 기대하던 SK 팬들은 다소 뜻밖이라는 반응이 다수. 다만 시즌 종료 직후부터 SK의 후임 감독은 내부 승격이 유력했다는 점에서 김용희 육성팀장 역시 감독 후보군으로 오르내리고는 있었다.
김용희 감독이 발표되고, 일단 그 분이 아닌, 새 감독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많은 응원과 기대를 받고 있다.
롯데와 삼성에서 감독을 맡았던 시절과는 10여 년 이상 흘러가 버렸기 때문에 감독으로서의 감각과 역량이 살아날 수 있을지 미지수란 점에서 불안 요소는 어느 정도 상존하는 상황. 물론 2011년부터 2년 간 SK 와이번스 2군 감독을 맡으며 이전까지 하위권을 맴돌던 퓨처스 팀을 맡아 2위까지 올려놓은 적이 있는 만큼 김응용처럼 지도자로서의 감이 완전히 녹슬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특히 소속 선수들의 해외 진출과 FA로 인한 전력 유출이 확정적인 2015년 시즌을 앞두고 김경기와 박경완을 섣부르게 1군 감독으로 앉히는 불확실성보다는 그나마 감독을 경험해 본 김용희 쪽이 당장의 리빌딩을 맡기기에는 더 적합하기도 하다는 점에선 현 상황에서의 차선책으로 보아도 괜찮을 듯. 취임 후 인선에서 김경기 타격코치가 수석코치, 박경완 2군 감독이 육성총괄로 확정된 것으로 미루어 보면 김용희 감독 체제에서의 2년은 김경기나 박경완 체제로 전환되기 전의 과도기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지나간 다른 팀이나 현 소속팀 2군 감독 시절에도 덕장으로 인품이 좋았던 지도자이지만 2군과 1군은 또 다른 만큼, 남은 마무리캠프와 내년 스프링캠프, 2015년 시즌에 그의 행보가 주목된다. 전통적인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식 '매니저'에 가까운 스타일의 지도자이므로 프런트 지원만 충분하다면 기본 전력만큼의 성적은 가능할 것이라는 의견이 많다. 그리고 민경삼 단장이 박동희와 진행한 인터뷰에서 사실 만수감독 재신임 할까 생각도 했음 ㅋ이라고 해서 팬들의 속을 또 뒤집어 놓았다(...)
한편 1군 감독으로 선임되고 나서 SK 와이번스 갤러리에서 얻은 별명은 '''용감'''이다.
6.3.1. 부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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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수 전 감독 이임식장에서. 키가 커서 그런지 수트핏이 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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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서에 사인을 하는 김용희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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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만 주장에게 꽃을 받고 있는 김용희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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짤방에 나와 있듯이 이 날 감독으로 취임하며 공식적인 행보를 시작했다. 기자들과의 일문일답에서 '''선수 육성'''과 '''시스템 야구'''를 강조했으며 시스템 야구에 대해서는
라며 자기디스(...)를 겸해 SK에 적용할 새 야구관을 소개했다. 계약 기간에 대해서도
라고 언급하며 성적에 방점을 찍었다. 또 일문일답에는 나와있지 않지만 다른 기사에서
라며 감동님 돌려까기의 장맛을 보여줬다(...)
구단에 요청하여 김무관이 LG 트윈스를 떠나 SK 와이번스 1군 타격코치로 임명되었다.
시즌 이후 열린 FA시장에서 팀이 핵심 FA인 최정, 김강민, 조동화를 모두 잔류시키는데 성공하면서 전력유출을 최소화한 채 내년 시즌을 준비할 수 있게 되었다.
샌디에이고와 협상중이던 좌완에이스 김광현의 이탈 가능성때문에 진해수를 선발로도 검토한다고 하였다. 김광현이 이탈한다면 SK좌완중 선발 경험이 있는 선수는 고효준과 김대유 단 두선수 뿐이다. 그나마도 김대유는 작년 시즌 데뷔한 선수. 진해수 선발 전환 검토는 좌완 선발감이 정말 없기에 선택한 고육지책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김광현 잔류하는 것이 확정되면서 진해수를 선발 전환하는 일은 없을것으로 보인다.
6.3.2. 2015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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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부임 초반이긴 하지만 김용희 감독에 대한 전반적 평가는 긍정적인 평가보단 부정적인 평가가 더 많은 편. 5월까지의 행보는 '''SK를 왕조 시절로 다시 돌려놓고 있다'''고 평가받았다.[13] 그러나 귀신같이 5연패(...)를 당함과 동시에 투타 밸런스 붕괴로 좀처럼 5위 이상으로 치고 나가지 못하고 부진하면서 다시 까이고 있다. 부진했지만 시즌 막판에 나름대로 비축해뒀던 전력으로 다른 5위 경쟁 팀보다 한 발 더 나가는 데에 성공하면서 결국 3년만의 가을야구에 성공했다. 좋지 않은 수비가 발목을 잡으면서 와일드 카드 매치에서 패배를 하면서 와일드 카드에 만족을 해야 했지만.
SK 팬 중에서는 경질을 바라는 팬들도 소수 있었지만 평가가 엇갈리는 상황에서 SK 와이번스는 2016 시즌 또한 김용희 감독과 같이가기로 결정. 애초에 2년 계약이었다 보니 경질 가능성도 낮은 상황이였다.[14]
김성근과는 매니징 타입이 완전히 극과 극. 김성근 감독이 이런저런 혹사로 오늘날에 안 좋은 쪽으로 재조명이 되고 있었지만, 김용희는 서진용 등 일부 선수를 제외하면 좋지 않은 여론에서도 이렇다할 혹사 논란이 없었다는 점이 가장 큰 차이점.
포스트시즌에 진출하기는 했지만 좋지 않은 수비가 발목을 잡으며 결국 이 수비로 인해 시즌을 마감해야 했다는 점에서는 아쉬움이 많았다는 반응. 다만 "팬 여러분에게 죄송합니다." 라며 시즌을 마감짓는 말을 한 것에선 전임 감독과는 큰 차이를 보였다. 좋지 않은 여론에서도 감독 본인이 입을 잘못 놀려서 구설수에 오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에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긴 했지만.
6.3.3. 2016 시즌
계약 2년차이자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해. FA 자격을 얻은 선수들이 대거 팀을 떠나면서 작년보다 더 험난한 시즌이 예상된다. 어찌 보면 강제 리빌딩 시즌이라고 할 수 있을듯. 신진 선수들을 발굴하고 성적까지 낼 수 있다면 감독으로서의 평가도 반전될 수 있을 것으로 보여졌지만... 후반기에 엄청난 삽질으로 인해 평가가 바닥을 치고 있다. 특히 9월에 '''9연패'''를 당한 것이 결정타였다. 마지막 임기라는 압박감에 따른 조급증이 결국 발목을 잡을 수도 있게 된 현 상황.
결국 SK 구단에서 재계약을 하지 않는 쪽으로 결정을 하였다고 한다.
7. 역대 감독 전적
[1] 참고로 당시 여전히 현역으로 OB 베어스에서 뛰고 있던 박철순보다도 '''어렸다.'''(박철순은 호적상 1956년생이지만 실제생일은 1954년생으로 1955년생인 김용희보다 한 살 많다.). 다만 학교는 박철순이 55년생과 같이 다녀서 동기동창이었다고 한다.[2] 1985년 35세에 청보 핀토스 감독을 맡았던 허구연 다음으로 빠르다. 참고로 그 다음이 선동열로 43세였던 2005년에 삼성 라이온즈 감독을 맡았다.[3] 선발예고제는 1998시즌에야 시행됐다. 5년을 앞서간 셈.[4] 본인은 당시 한국시리즈에 대해서 최선을 다했기에 후회는 없다고 한다. 다만 상대팀 감독이 산전수전 다 겪은 김인식이었고, 자신은 겨우 감독 2년차라 지략적인 면이 모자라 여러 경우의 수나 경험 등에서 자신은 우승까지 시간이 더 필요했던 거였다고 당시를 회고했다.[5] 만약 그당시에 롯데가 우승했더라면 김용희 감독은 한팀에서 선수, 코치 그리고 감독으로 모두 우승을 이룰수 있었다.[6] 선천적으로 손에 습진이 있어 공을 던지기에 문제가 있었으며 계약금 10억 + 등번호 7번 달라고 뗑깡부린 이력까지 있어 1996 시즌은 팬들 눈에 좋게 보일리가 없었다.[7] 이후 롯데 감독으로서는 제리 로이스터, 조원우 감독도 재계약에 성공한다.[8] 엄밀히 문동환은 현대건설 야구단(현대 피닉스) 선수였고 전준호가 들어간 팀은 현대 유니콘스로 엄연히 다른 팀이었지만 문동환의 지명권을 행사하게 해주는 풀어주는 대가로 현대에서 5억을 받고 전준호를 팔아버리는 트레이드를 한 것이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무상트레이드나 다름이 없었다.[9] 1998 시즌 삼성은 차동열 배터리코치가 수석코치 겸직.[10] 장효조를 제외한 나머지 세 명은 전부 당시 삼성 1군 감독 경력이 있었다.[11] 참고로 공식 프로필은 1958년생이라서 당시 주루 코치였던 이순철(1961년생)보다 나이가 분명히 많은데 출생신고가 늦어서 실제로는 1956년생이라고 하며 심지어는 김용희와 동갑인 1955년생, 심지어는 1954년생이나 그보다 더 일찍 태어났다는 말도 있다.(...) 이렇게 나이가 많은 탓인지 당시 후배들한테 타격 기술 과외를 가르치며 코치들이 불만을 품었다고 하며 삼성 시절 프로필은 1961년생으로 등록.(...)[12] 김용희 감독이 출장정지 처분을 받은 6경기는 당시 1군 타격코치였던 장효조가 감독 대행을 맡았다.[13] 2015년 개막 때 SK는 우승전력으로 평가받았기 때문에 오히려 초반에 안 좋은 것이 더 이상할 것이다.[14] 현 KBO의 추세상 감독 계약은 2년 계약이 로우리스크 하이리턴이라고 보는 시각이 많기 때문이다. 구단 입장에서도 2년 계약으로 지켜보는 것이 중도 경질을 최소화하고 구단 운영 비용의 손실을 절감할 수 있기 때문.[15] 드림리그[16] 플레이오프 敗[17] 와일드카드 결정전 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