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중근/선수 경력

 




1. 아마추어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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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일고시절 타자 봉중근.
신일고 시절 투수로서 뿐 아니라 타자로도 대단한 재능을 보여주었던 선수다.[1] 또한 1997년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에서 4게임 연속 홈런, 타율 5할을 기록하며 최우수선수가 되었다. 같은 해 청룡기에서는 타율 .688이라는 후덜덜한 기록을 보여주며 MVP, 타격, 타점왕을 휩쓸기도 했다. 1997년 신일고의 황금 클린업 트리오[2] '''봉중근-안치용-김광삼''' 그리고 1번타자 '''현재윤'''[3]은 국내 4개 대회에서 신일고의 3관왕을 이끌었고 세명은 최우수타자, 최우수선수, 최우수투수, 대회MVP 등 각종 상을 휩쓸었다. 이 놀라운 활약 덕에 97년 당시 고2!의 신분으로 애틀란타 브레이브스에 스카웃되어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무대를 밟는다.

2. 프로 경력



2.1. 애틀란타 브레이브스 시절


원래 애틀란타에서는 타자로 키울 생각이었으나[4] 좌완에 148km/h를 찍는 것을 보고 투수로 전향시켰다.[5] 이와 관련 봉중근 선수 본인이 인터뷰 및 자신의 자서전에 기록한 내용을 토대로 설명하자면, 훈련장에 간 첫날 타격연습을 시작했는데, 자신의 스윙이 잘못된 것인지 계속해서 배트가 부러졌다고 한다. 4, 5자루의 배트가 전부 부러진 상태에서 여분의 배트도 없던 중에 좌완인 걸 보고 투수쪽 연습에 합류하라고 얘기하였고, 그때부터 투수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한다. 본인은 당시 어려서 다른 의견을 내고 말고 할 여지가 없었다고 하는데, 훗날 은퇴 전 팀에서 허락한다면 딱 1년만이라도 타자로 전향해보고 싶다고 했다. 대개 나이를 먹음으로 인해 구속이 저하되기 시작하면, 제구력을 갈고 닦아 롱런할 수 있는 투수와는 달리 타자 생명은 하향세가 되므로 이는 그냥 얘기하는 정도로만 생각해도 될 듯.
2002년 메이저리그로 콜업됐다. 2002년 4월 23일 터너 필드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전의 선발투수로 메이저리그 첫 경기 등판. 애리조나의 에이스 커트 실링과 맞대결을 벌였으나 6이닝 5실점을 기록했다. 1회초 2사 만루에서 치퍼 존스가 좌익수 수비도중 라이트에 타구를 잃어버려서 3타점 2루타로 만들어줬다.#

2.2. 신시내티 레즈 시절


이후 메이저리그와 마이너리그를 오가며 2004년 시즌 시작되기 직전 신시내티 레즈로 트레이드 된다. 2004년 6월 21일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원정경기에 등판, 6이닝 무실점으로 메이저리그 처음이자 마지막 선발승을 거둔다.[6] 참고로 봉중근의 메이저리그 첫 승은 2003년 7월 6일 몬트리올 엑스포스와의 경기에서 거둔 구원승이었다. 이후 메이저리그와 마이너리그를 오가다가 2005년 팔꿈치 부상으로 한 해를 통째로 쉬고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이후 LG 트윈스에 입단한다.

2.3. LG 트윈스 시절



2.3.1. 2007 ~ 2008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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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47번을 달던 시절. 팀에서 얼마나 기대가 컸는지 알 수 있는 장면이다.[7]
2007년에 LG 트윈스에서 수준급의 선발을 기대했으나 초반에 반짝하고 후반엔 두들겨 맞았다. 5월 4일 두산과의 경기에서 5회말 안경현에게 머리로 향하는 투구를 하였고 이에 화난 안경현이 달려들자 난투극을 벌였다. 그리고 벤치클리어링이 일어났으며 심판진에 의해 퇴장당한다.
'''Don't Try this at H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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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바디 드랍을 받아라'''.[8]
20분짜리 풀버전을 보면, 당시 기묘한 불운, 답이 없는 LG의 수비, 그리고 아직 그런 LG를 감당할 수준이 못된 봉중근의 멘탈을 다 볼수 있다. [9]
2007년도 기대치 이하의 성적으로 인해 연봉이 1억이나 깎이는 폭풍세일을 당하기도 했으나, 2008시즌에 들어와서 LG 마운드의 당당한 에이스가 되었다. 새로 얻은 별명은 봉타나… 하지만 팀 성적이 팀 성적인지라 8이닝을 무실점으로 던지고 내려가도 9회에 역전당하는 일은 예사였고, 9이닝 1실점을 해도 타선이 1점을 못뽑아 그대로 완투패를 당하는 일도 간간히 있었다.# 이런 가슴 아픈 순간을 자주 겪어서 2007년의 윤석민을 보는 듯 하였다는 평이 다수 존재한다. 그리하여 평균자책점 2.66의 뛰어난 호투에도 불구하고 11승으로 두자리 승수를 겨우 넘긴데다 8패나 당하는 바람에 2008년 윤석민상의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그러한 상황 속에 아래 짤방이 마리오의 노래 'Good bye'의 뒷 부분에 가사 'Don't Cry'가 반복되는 부분이 브금으로 깔려 돌아다니며 '''봉크라이'''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안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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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시즌 9월 3일 등판하여 롯데 자이언츠의 연승 가도를 막았다. 6⅔ 이닝 1실점으로 호투하여 롯데 자이언츠의 폭발적인 화선을 잠재웠다. 덕분에 12연승을 노리던 롯데 자이언츠에게 고추가루 포를 제대로 먹였다. 만약 9월 3일에 LG가 승리하지 못했더라면 롯데는 16연승까지 가능했기에 롯데 팬들에게 원망의 대상이 되었다.
2008 베이징 올림픽 대표팀에 차출되어 미국전과 대만전 2경기 선발 등판했지만 각각 3실점, 5실점하였으며 ERA 8.31을 기록하였고 한기주에 이어 두번째로 나쁜 성적을 기록했다.[10]

2.3.2. 2009 시즌


2009년 초엔 이런 투수를 마무리로 기용한단 기사가 나와 논란이 일었다. (참조) 야구팬들은 김재박 감독이 또 사고쳤다면서 맹비난하였다.
하지만 WBC 이후 선발로 기용하기로 다시 방침을 변경했다. (참조)
2008년 4월 15일, 잠실 KIA전에서 선발 투수로 등판해서, 타선이 무려 8점씩이나 내준 덕에 손쉽게 승리하나 했으나, 우규민정찬헌의 불질로 날려먹었다. 그리고, 정확히 1년 후인 09년 4월 15일, 문학 SK전에서 먼저 3실점하긴 했으나 타선이 4점을 내 준 덕에 승리투수가 될 뻔 했으나, 이번에도 우규민의 부진으로 무산. 더더욱 안습인 것은 09년 4월 15일 새벽에 봉중근 딸이 태어났고, 봉중근은 '딸을 위해 승리투수가 되겠다'라며 등판한 것. 참으로 지못미. 이때 잠시 "딸아, 네가 태어나던 날 아빠는 선발투수였단다. 아빠가 내려가기 전까진 이기고 있었지. 그런데 규민이 삼촌이..." 라는 드립이 유행했었다.
2009년 6월 4일 한화 이글스와의 대결에서 6이닝동안 9개의 탈삼진을 잡아냈지만 타선의 도움을 받지 못해 패전투수가 됐다. 안습한 팀내사정 때문에 선발과 마무리 보직을 오가며 컨디션까지 흔들렸던 윤석민과 함께 2009년 윤석민상 타이틀을 경합 중이었지만 윤석민이 폭발한 팀타선을 배경으로 호투로 승수를 쌓고있던데 반해 봉중근은 여전히. 다만 류현진이라는 변수가 등장했다. 참고로 류현진과 함께 '''다패''' 공동 2위였다.[11]
2009년 8월경 팔꿈치 통증으로 인한 컨디션 난조라는 LG트윈스 최악의 악재가 벌어지고 말았다. 근데 자고 났더니 통증이 사라졌다고. 하지만 8월 27일에 결국 시즌 아웃 기사가 나왔다.
10월 25일 일요일에 같은 팀의 박용택과 함께 현대백화점 신촌점에서 사인회를 가졌다.
결혼한 아내와의 이야기가 특이한 듯. '날 때린 여자는 네가 처음이야'식 발언부터해서 부모님에게도 맞은적 없는데등등의 발언을 했다고.기사를 한번 보자
2009년에 랩퍼 이비아와 함께 사랑해요 LG 힙합버전을 불렀고, 수준급의 랩을 했다. 이곳에서 들어보자
팀의 유일무이한 '''에이스'''였는데...연봉 동결. 이쯤 되면 이 사람이 '''선수'''인지 '''자원봉사자'''인지 구분이 안 갈 지경.

2.3.3. 2010 시즌


2월 25일, 훈련을 하던 중 햄스트링 부상을 당했다. 최훈의 GM카툰에 의하면 이곳 부상은 '''완치'''가 쉽지 않다고 하는데...
4월 4일 경기에서 3이닝 동안 많은 실점을 하고 강판 당한 직후에 몸 상태도 안 좋은 데다가 에이스 답지 못한 태도의 경기를 했다는 이유로 감독과 트러블이 생겨서 2군행이 결정되었다. 그런데 감독과의 트러블이 생긴 과정에서 봉중근이 부인에게 감독에게 들은 말을 옮겼고 위의 이야기에서도 봤듯이 기가 센 것으로 보이는 부인이 그 말을 듣고 열이 뻗쳐서 싸이에 감독을 욕하는 심경문을 올렸다. (링크바람) 이형종의 싸이 감독 맞짱신청 사건이 있은지 1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서 터진 싸이홈피 사건이었다. 이로 인해 봉중근과 박 감독과 봉중근 부인에 대해 보는 시점에 따라서 각자 다르게 까였다.
그러나 그 이후로 서서히 페이스를 살려서 언제 그랬냐는 듯이 팀의 에이스로 자리매김중. 마운드가 불안하면 언제든지 구원투수로 나갈 수 있다고 밝히는 등 팀 케미스트리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2010년 8월 25일까지 10승(리그 9위) 8패, 평균자책점 3.31(리그 5위), 탈삼진 112개(리그 5위) 160⅓이닝(리그 2위)를 기록중. 거듭된 혹사와 부상으로 직구 구속을 크게 떨어뜨린 채 던지고 있다고 한다.
2010년 최종성적은 178⅓이닝 10승 9패 평균자책점 3.58, 탈삼진 130개를 기록. 08년 이후로 정상적인 선발로테이션을 돌린 적이 거의 없는 LG 트윈스에서 유일하게 3년동안 자기 자리를 지켜왔지만 완만하게 성적이 하강곡선을 그리고 있는것이 안타까울 따름. 또한 2010 광저우 아시안게임에도 류현진- -양현종 과 함께 좌완 에이스부대의 맏형 노릇을 해야 한다.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 국가대표 주장으로 발탁됐으나 훈련기간 불미스러운 루머[12]에 시달렸다.
아시안 게임 1차전 대만전에서는 7회초에 원래 윤석민이 등판하려고 했는데, 윤석민이 '''경기 전 등록된 선수 명단에 없어서''' 쫓겨나고 대신 급히 등판했다. 그리고 역시나 몸이 안 풀린 건지 볼은 볼대로 많고 상대 타자들도 잘 잡지 못했다. 그나마 손시헌의 센스로 무실점으로 잘 막았으니 다행이었다.
성균관대학교 스포츠과학부에 10학번으로 입학했다. 셋째 누나가 성균관대 대학원에 다니고 있어서 도움이 많이 되었다고.
산다라박을 격하게 아낀다는 말을 했다.
김성근이 탐나는 선수 톱3중 하나라고 밝혔다. 나머지 둘은 당연히 '''이대호'''와 '''류현진'''.[13][14][15]

2.3.4. 2011 시즌


3년간의 혹사 때문에 몸에 무리가 많이 가서 전훈 때도 2월이 지나서야 공을 만졌다고 한다. 그런데 시범경기에서 '덜컥!' 하고 팔꿈치 통증을 느껴 팬들을 놀라게 했으나 이상 없다는 판정을 받았다. 하지만 무리하면 안 되기에 4월말에 복귀한다고 했다.
관중석에서 LG 경기를 관람하는 게 카메라에 잡혔는데, LG가 찬스를 놓치거나 역전을 당할 때 역동적인 안타까움을 몸으로 표현해서 '관중근'이라는 별명이 새로 생겼다.
그렇게 재활과 준비의 시간 끝에 5월 1일날 볼질로 판을 거하게 말아먹은 심수창과 교체되어 등판했다. 이때의 환호성은 그야말로 잠실이 떠나가라 수준. 봉중근은 이날 3⅔이닝 4볼넷 3탈삼진 2실점 2자책점을 기록했다. 아직 몸상태가 완전하지 않다는 걸 고려하면 그렇게 나쁜 편은 아니었다.
5월 3일 두산 베어스 전에서 역동적인 응원이 카메라에 잡히기도 했다. 박용택이 적시타를 때리자 기뻐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5월 10일 한화 이글스와 경기전에 류현진과 반갑게 인사하는 모습이었는데 그 포즈가 꽤나 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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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겨왔던_나_에에에_수줍은.jpg
경기 때 이외에는 다 선후배간이니 친해서 그런것이겠지만 봉중근이 좀 장난스럽게 들이댄 듯한 모습이다. 거기에 난감해하는 류현진의 모습이 인상적.
그러나 시즌 시작 전부터 봉중근을 괴롭혔던 부상문제가 결국 완전히 그의 발목을 잡고야 말았는지 1군 엔트리에서 말소되고 말았다.관련기사
박종훈 감독이 부상사실을 빨리 말하지 않은 데 대해 봉중근을 책망했다고 한다. 봉중근은 팀 분위기가 좋은 이때에 꼭 보탬이 되고 싶어 부상을 참았다고.
인대접합수술을 마치고 재활에 들어갔다. 다시 150km/h를 던질 수 있을 거 같다는 말을 덧붙이며 수술소감을 밝혔다.
6월 26일 다시 LG선수단을 방문해서 인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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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원에_한_대씩_이다.jpg
2012년 5월을 복귀시점으로 잡고 재활에 매진한다고 했다.
2012시즌 연봉협상에서 신연봉제의 칼날을 피해가지 못하고 무려 전년대비 61%가 삭감된 1억 5천만 원에 사인했다.

2.3.5. 2012 시즌



재활 후 시즌 초 마무리로 전향했던 레다메스 리즈가 불안한 모습을 보이자 대신 마무리로 활약하기 시작했다. 이후 좋은 성적으로 LG의 불펜진을 안정시키며 팬들을 설레게 했으나, 6월 말 엘 꼴라시코에서 강민호에게 동점 투런을 맞고 소화전에 화풀이하다 윤석민처럼 오른손을 다치고 만다. 마무리 부재로 결국 LG는 다음날에서도 9회에 동점을 허용하고 연장에서 역전을 당했고, 마지막에는 이용훈에 퍼펙트게임 직전까지 끌려간 끝에 엘꼴라시코에서 스윕패를 당했다. 이후 7월 10일부터 1군에 복귀하였다.

2.3.6. 2013 시즌



[image]
2013년 정규시즌 두산 베어스와의 마지막 경기에서 '''정규시즌 2위 확정''' 세이브를 한 직후.
[image]
전훈 때의 개그 본능
그리고 2013시즌 위의 저 패션을 경기중 덕아웃에서 또다시 보여줘 네이버 중계창의 팬들을 제대로 웃겨주었다.영상 링크

2.3.7. 2014 시즌



전반적으로 난타당하기도 했지만 극한의 타고투저 속 마무리로서는 평균자책점이 제일 낮았다. 이 해 세이브왕 손승락이 4.33, 2위 임창용 모두 5.84의 평균자책점에서 놀았던 것을 감안한다면.

2.3.8. 2015 시즌




2.3.9. 2016 시즌



해당 문서를 참조. 너무나도 급속도로 퇴물이 되어버렸다. 2군에서도 방어율이 '''심각하게''' 처참할 정도이니...
그러나 9월달부터 선발진에서 나름 나쁘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었고 가을야구까지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2.3.10. 2017 시즌


시즌 후 FA 자격을 취득해 LG 트윈스와 2년 15억원에 FA계약을 체결했다.출처
그런데 4월 이후 2군 등판 기록이 전혀 없어 팬들이 의아해하던 중 어깨 부상으로 인해 수술 또는 재활이 필요하다는 꽤나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결국 2017년 6월 28일 미국 조브 클리닉에서 수술을 받았으며 재활 기간이 1년 정도 소요된다고 한다. 2017시즌은 이렇게 날렸고 2018시즌도 복귀가 불투명하게 됐다.
시즌 이후 인터뷰에 따르면 4월 30일 1이닝 등판을 마지막으로 1군 콜업 통보를 받았는데 이날 등판서 아웃카운트를 잡고 나서 인대 파열 부상을 당했다고 한다. 현재는 2018 시즌 5월달 복귀를 목표로 하고 있다고 한다.

2.3.11. 2018 시즌


시무식에서 탈모가 매우 극심한 근황이 발견되고 말았다..문제는 목표가 2018년 5월이라지만 이미 수술을 여러번 받은 몸에다 불혹을 앞둔 나이라 2018년에도 시즌을 통으로 쉴 가능성이 높아보이는게...
사이판으로 갔다고 한다. 여태 봉중근은 재활할때 약속의 땅 사이판으로 갔던만큼 복귀의 의지가 강력한듯. 팬들도 제발 돌아오기를 바라고 있다.
마무리 투수 정찬헌이 시즌 개막 한 달만에 3블론세이브를 터뜨리면서 LG팬들은 봉중근을 너무나 그리워하고 있다.
6월 잠실야구장을 방문했을 당시 봉중근을 만나본 LG팬의 말에 의하면 7월말 복귀를 예상하고 있다고 한다.
은퇴기사에서 봉중근은 얼마 전까지도 지인들에게 '''“과분한 사랑을 준 팬들 앞에서 마지막으로 한번이라도 공을 던져보고 싶다”며 사이드암으로 투구폼까지 바꿔 안간힘을 썼다고 한다.''' 그야말로 눈물이 앞을 가리는 수준이다....
그러나 아시안게임 브레이크가 지난 이후에도 돌아오지 못했고 결국 2018년 9월 19일 봉중근은 재활을 중단하고 '''은퇴하기로 결정했다.''' 끝내 부상이 발목을 잡았다. LG 관계자에 따르면 봉중근은 최근 구단과 상의 끝에 파란만장했던 선수 생활을 마감하기로 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6월 28일 어깨 수술을 받고 1년이 넘게 재활에 몰두해 왔지만 더딘 회복 속도에 한계를 느껴 은퇴 결심을 굳힌 것으로 보인다. 기사 은퇴식은 9월 28일 KIA전에서 가진다.
9월 28일 은퇴식을 가졌다. 특유의 견제동작을 한 차례 보여준 후 포수로 김정민 코치를 앉히고 시구를 했다. 캐스터의 말처럼 어깨가 상당히 좋지 않아 보였고 그로 인해 전력투구까지는 하지 못했다. 투구 후 김정민 코치와 함께 손으로 하늘과 팬들을 향해 하트를 그렸다. 하지만 경기에서는 에이스인 타일러 윌슨을 하루 당겨쓰고도 패했다. 윌슨은 잘 던졌지만 8회초 2:2 상황을 맞은 이후 올라온 신정락이 장작을 쌓았고 마무리인 정찬헌이범호에게 만루홈런을 맞으며 무너졌다. 윌슨은 봉크라이 시절을, 정찬헌은 수준급 마무리 시절의 봉중근을 그립게 한 씁쓸한 모습이었다. 가을야구 탈락에 7위로 하락해버린 최악의 경기였다. 원래 두산 전에 나와야했을 윌슨까지 당겨쓰고도 대참패하면서 봉중근이 마냥 웃으면서 떠나지는 못하게 되었다.
LG팬들은 이병규에 이어 또 다시 팀을 위해 헌신한 대선수를, 우승은 고사하고 한국시리즈 진출 경험조차 못 시켜주고 떠나보내게 되었다. LG프런트들은 팬들의 엄청난 쓴소리를 또 다시 피해가지 못하게 되었다.
봉중근은 고별사에서 후배들이 가을야구에 갈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고 애써 말했지만, 후배놈들은 그런 맘이 없어서(...) 뭐 다음 해 가긴 했지만 그 해에도 중계만 하면 져서[16]썩 유쾌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올라간게 어딘가. 또한 선수 본인이 LG에서 코치로 남고 싶다고 언급했다.
그렇게 봉의사는 암흑기(2007)에 팀에 와서 암흑기(2018)에 떠나게 되었다.
차명석 단장이 단장 부임 후 가장 먼저 연락한 선수 중 한 명이다.

3. 국가대표 경력



3.1. 2006 WBC



경기
선발
이닝
방어율


홀드
세이브
피안타
실점
피홈런
자책점
사구
삼진
상세
3
0
2⅔
0.00
0
0
0
0
0
0
0
0
2
1

메이저리그에서 롱릴리프 불펜 겸 대체 선발자원으로 활약하던 봉중근은 2005시즌 부상으로 단 한경기도 메이저리그 마운드에 서지 못했다. 하지만 김인식 감독은 2002~2004시즌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한 봉중근의 구위를 믿고 그를 2006 WBC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에 선발했다. 이는 봉중근의 커리어 첫 성인 국가대표 경력이다.
봉중근은 2006 WBC에서 1이닝 정도를 막는 불펜투수의 역활을 수행했다.
특히 1라운드 일본전에서의 활약이 인상깊었다. 봉중근은 한국이 0:2로 뒤진 4회 1사 2, 3루의 위기 상황에 등판했지만 승계주자 실점을 허용하지 않았다. 기록은 ⅔이닝 1볼넷 0실점. 2사 만루의 상황에서 싹쓸이 장타를 맞을뻔 했지만 그 유명한 국민 우익수의 다이빙 캐치로 위기를 모면했다.
이후 경기들에서 역시 불펜투수로서 제 소임을 다한 봉중근은 최종성적 3경기, 2⅔이닝 0실점을 기록하며 팀이 3위를 기록하는 것에 크게 기여했다.

3.2. 2008 베이징 올림픽



경기
선발
이닝
방어율


홀드
세이브
피안타
실점
피홈런
자책점
사구
삼진
상세
2
2
8⅓
8.31
0
0
0
0
14
9
0
8
4
6

2008 베이징 올림픽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서 참가했다. 백넘버는 51번을 달았다.
봉중근은 예선리그 첫 경기인 미국[17]과의 경기에 선발등판했다.[18] 류현진, 김광현 등을 제치고 1선발로 출격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아무래도 봉중근의 미국 무대 경험을 코칭 스테프가 높게 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기대가 무색하게도 봉중근은 4.1이닝 3실점으로 부진한 모습을 보이고 강판 당했다. 다행스러운점은 팀이 이후 역전에 성공하여 8:7 신승을 거뒀다는 점이다.
봉중근은 이로부터 5일후 치루어진 대만과의 조별리그 5차전 경기에 다시 한번 선발등판 했다. 마이너리그 AAA 올스타로 구성된 미국과 달리 한 수 아래로 평가받는 대만이었지만 봉중근은 최악의 피칭을 선보이며 팀을 위기로 밀어넣었다. 지난 경기와 똑같은 4.1이닝을 소화하면서 실점은 두배나 증가한 6실점을 기록했다. 이번 경기 역시 팀타선의 폭발로 한국이 9:8 신승을 거두게 되면서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었다.
대회 최종성적은 2경기, 8.2이닝 6K 9실점(8자책), ERA 8.31로 최악의 모습을 보였으나 팀 동료들의 선전으로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고 귀국하게 되었다.

3.3. 2009 WBC



경기
선발
이닝
방어율


홀드
세이브
피안타
실점
피홈런
자책점
사구
삼진
상세
4
3
17⅔
0.51
2
0
0
0
14
1
0
1
6
4


2009 WBC에 출전하는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에 선발되었다. 3번째 국제대회 출전이자, 2번째 WBC 출전이다.
봉중근의 첫 등판은 1라운드 대만전 구원등판 이었다. 봉중근은 4회 무사 1루의 상황에서 류현진의 뒤를 이어 등판하여 승계주자 실점없이 1이닝 0실점으로 막아내었다.
일본과의 1라운드 2차전에서 본인이 지망해서 선발투수로 출전했다. 이 경기에서 봉중근은 일본을 상대로 압도적인 투구를 보여줘 국내야구 갤러리등에서 엄청난 찬양을 받았다. 그리고 야갤에서는 안중근 의사와 이름이 같은 것을 빗대서 만든 짤방까지 나왔다. 일명 '''의사 봉중근. 그리고 LG 트윈스는 이걸 프린트한 티셔츠를 한정판으로 팔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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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8일 벌어진 일본과의 2라운드 경기에서 두차레에 걸친 견제구 동작(퀵모션)만으로 이치로슬라이딩을 할 정도로 당황스럽게 만들어 이치로 전용 조련사 라는 소리를 들었다. 실제로도 국내에서 주자견제능력은 최고수준. 견제율이 약 7할에 근접한다.
WBC 결승 대 일본전에 세 번째로 선발 등판했다. 지난 2경기에서 당한 것에 칼을 갈고 나온 일본 타자들의 집요한 커트 신공에 말리고, 심판의 석연치 않은 판정에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꾸역꾸역 상대 타선을 막아내며 4이닝 1실점(비자책)을 기록한 이후 마운드에서 내려왔다.
최종성적은 4경기, 17.2이닝, 2승 0패, ERA 0.51을 기록했다. 대회내내 엄청난 퍼포먼스를 보이며 류현진, 김광현, 윤석민 등을 재치고 팀의 1선발로서 활약했다.
당연히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에이스로서 준우승의 일등공신이라 말할 수 있었고, 결국 WBC 공식 베스트 12에 선발되는 영광까지 누렸다.

3.4.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서 참가했고, 국가대표 주장을 맡았다. 이는 자신의 커리어 첫 아시안 게임 출전이다.
봉중근의 첫 출전은 예선리그 1차전 대만과의 경기였다. 대표팀 선수들은 4년전 도하 참사로 인해 굉장한 부담을 가진 상태였다. 하지만 선발투수 류현진이 6이닝 1실점으로 호투를 펼쳤고, 뒤를 이어 봉중근이 1.1이닝을 0실점으로 깔끔하게 막아내며 6:1 승리를 지켜냈다.
이후 대표팀은 홍콩, 파키스탄, 중국, 대만을 차례로 꺾으며 5전 전승으로 8년만의 금메달 탈환에 성공했다.

3.5. 2014 인천 아시안 게임


2014 인천 아시안 게임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서 참가했다. 자신의 커리어 두번째 아시안 게임 출전으로 2연속 금메달을 노리게 됐다.
봉중근은 8강 예선리그 홍콩과의 경기에 구원 등판해 1이닝 0실점으로 막아내며 대회 첫 승을 기록했다.
이후 대만과의 결승전 6:3으로 대한민국이 리드중인 9회말 1사후 등판했다. 봉중근은 대만을 0.2이닝 0실점으로 막아내며 대한민국의 우승을 매듭지었다.
이로써 봉중근은 지난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에 이어 두 대회 연속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게 되었다.

[1] 봉중근을 애틀란타로 스카우트했던 빌 클라크는 "나는 영원히 내가 베이브 루스를 잡았다고 믿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최소한 스탠 뮤지얼을 잡았다고 믿을 것이다. 어깨 부상 때문에 타자로 전향해 슈퍼스타가 된 스탠 뮤지얼 말이다. 나는 영원히 메이저리그 홈런 기록을 깨뜨릴 주인공과 계약했다고 믿을 것이다. 빅리그 스카우트 경력 36년 동안 나는 그런 재능을 가진 선수를 본 적이 없었다."라고 하였다. 출처[2] 신일고 다이너마이트 타선 내지 신일고 봉삼이(봉중근+김광삼)라고도 한다[3] 웃길지 모르지만, 현재윤은 발 빠른 포수였다!! 그래서 발 빠른 포수라는 유니크한 점은 그가 드래프트할 때 큰 도움이 되었다.''' ''' 취소선을 치긴 했지만 현재윤이 포수라서 혹시라도 도루하다가 다치면 진갑용-현재윤으로 꾸렸던 삼성은 대체재가 없던터라 가급적 주의를 시킨 것. 실제로 현재윤이 다치자 부랴부랴 심광호채상병을 영입했지만 결과는 신통치않았다. 프로와서도 주루센스 자체는 좋은 편에 속했고, 가끔씩 깜짝 상위타선에 배치하기도 했다.[4] 포지션은 1루수외야수로 추정, 좌투좌타인 특성상 기용이 가능한 포지션은 이게 전부이기 때문.[5] 반대로 투수로 입단한 부산고 에이스 추신수는 타자로 컸다.[6] 이날 경기에서 켄 그리피 주니어는 통산 500홈런을 기록했다. 국내에서조차 봉중근의 선발승이 묻혀버릴 뻔 할 정도.[7] LG팬이면 절대 잊지 못할 이상훈의 번호인 47번은 이상훈의 은퇴이후 오승준(2004) - 김광우(2005~2006) - 봉중근(2007~2008) - 이형종(2009) - 서승화(2010~2011) - 조윤준(2012~2015)순으로 달았으나 영 좋지 못하던 징크스가 있었으며 이상훈의 번호를 더럽힌다는 평만 받았었다. 봉중근만 유일하게 에이스급 성적을 내었으나 승운이 처첨하게 안좋았던, 여러모로 이상훈에게 어울리던 번호였다. 2016년부터는 이상훈이 아카데미 원장으로 들어오며 주인을 찾았지만 2019년도부터 물러나며 다시 공석. 차명석 단장이 이상훈을 제외한 누구에게도 주지 않겠다며 임시결번 처리했다.[8] 이 당시 동영상이 2012년 5월 6일 잠실 두산-LG 경기의 SBS ESPN 중계 때 재연되었는데(6회초 최준석 아웃 이후), 이 경기 해설자인 안경현은 "이 사람들 너무 하네~"라며 멘탈붕괴했다. 그리고 옐카3에서도 '잠실의 주인은 누구인가' 토론에서 이 장면이 나와 멘붕하기도 했다.[9] 시간이 없는 사람을 위한 요약. 7번 고영민 무사에서 정상적인 2루타 → 8번 이대수 보내기 번트 굴절로 1루수 최동수 넘어지면서 올 세이프 → 9번 민병헌 느린 땅볼 베이스커버 실패로 세이프(1실점) → 1번 이종욱 정상적인 보내기 번트 → 2번 윤재국 스퀴즈 시도했으나 피치아웃 성공으로 3루주자 런다운 상황. 그러나 포수 조인성이 주자와 충돌하여 주루방해 (1실점) → 정상적인 안타(1실점) → 그리고 안경현 [10] 첫번쨰로 나쁜 성적을 거둔 투수는 그 한기주인데 이때 한기주는 아웃카운트를 단 한개도 잡지 못해 방어율은 무한, 속이 꽉찬 99.9라는 불명예스런 별명까지 얻고 말았다.[11] 참고로 다패 1위는 김혁민. 하지만 평균자책점의 차이가 넘사벽이다.[12] 부산에서의 국가대표 평가전 후에 봉중근, 류현진, 이용규가 여성들과 어울려 술마시고 숙소까지 데려갔다는 주장이 KBO 게시판에 올라왔다. 실명제인 KBO 게시판에 올라와서 신빙성있다는 측과 증거가 없고, 기사화되지 않았기에 신빙성이 없는 루머라고 하는 측이 엇갈린다.[13] 류현진은 2006년에 한화에 지명받았고 김성근은 2007년에 SK로 왔다. 결론은 SK 프런트 또는 조뱀의 실수.[14] 하지만 결과론적으로 실수라고 하는 거지, 실제로 고교때 아무리 특급이었다고 해도 수술이나 부상경력이 있는 선수를 쉽게 뽑을 순 없다. 삼성의 STC같은 재활시설이 잘 갖춘 곳이라면야 고쳐쓴다는 마음으로 지를수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팀에서는 망설일 수 밖에 없으니. 더군다나 그 시절 SK에는 투수 자원은 상대적으로 부족한 게 없었고 박경완의 뒤를 이을 포수재원 마련이 더 시급했기에 이재원을 택했을 뿐이다. 그러나 김성근 시절의 이재원은 플래툰에 의한 대타로 기용된 적이 많아 포수로서의 성장이 더뎠고 결국 군 입대를 미루라는 감독의 압박을 부모님이 찾아와 막아낸 뒤 군 팀에 입대하는 등 막장스러운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15] 실제로 지명되었다쳐도 류현진도 살을 빼게 시키겠다고 공헌했던 김성근의 행보로 미뤄볼 때 15시즌 초반의 양훈처럼 안 되었으리란 보장도 없고... '''전병두, 데럴 마데이, 살려조'''를 생각하면 봉중근이 SK에 지명되지 않은 건 신의 한 수라고 생각할 수 있다. 봉중근 정도의 실력이었으면 김성근 감독에 의해 무지막지한 혹사를 당했을 가능성이 크다.[16] 2019년 최종 성적 1승5패[17] 메이저리그 선수들이 불참한 팀이다. 주로 마이너리그 올스타 수준의 선수들이 참가했다.[18] 미국팀의 선발투수는 후에 KBO 리그에서 뛰게 되는 브랜든 나이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