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사장교

 


1. 개요
2. 역사
3. 군 복무
4. 문제점
5. 기타
6. 석사장교 출신 유명인


1. 개요


한국의 군복무 제도 및 특례조치 중 하나. 석사학위자를 대상으로 시험을 쳐 장교로 임관시키는 제도. 정식명칭은 '특수전문요원'이다.
창설 당시부터 군사정권 실세의 병역특례로 악용된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전두환의 장남 전재국의 입대를 앞둔 1982년에 생기고 노태우의 아들 노재헌이 전역할 때인 1991년에 없어졌다는 사실이 이 제도의 의미를 말해준다.

2. 역사


1982년 도입되어 1991년 폐지되었다. 석사학위 졸업 시점을 기준으로 1982년부터 1991년까지이므로, 학부 입학학번 기준으로는 1976학번부터 1985학번까지 존재하였다. 석사 학위 소지자들을 대상으로 시험을 봐서 6개월간의 대한민국 육군 사관후보생 훈련과 '''전방 체험'''을 거치고 육군 보병소위 임관과 동시에 '''전역'''을 시키는 제도. 은어로 육개장이라고도 불렸다. ''''6개'''월짜리 '''장'''교'라는 뜻. 시험과목은 자연계(이과)는 영어, 한국사이고 인문계(문과)는 여기에 제2외국어가 추가되었다. 다만 해외 유학생은 시험을 보지 않고 서류전형을 치렀다.
1980년까지 카이스트 대학원생에게 주었던 병역특례와 별도로 1979년 '자연계 교원요원확보를 위한 특별조치법'이 있었다. 유신 말기 때의 제도로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한 아들 박지만 외에 박근혜박근령에게 예비역 육군 장교 신분을 주려 했다는 비판도 있었고, 박정희조차도 결국 제대로 시행하지 않았다. 이 제도에 따라 서울대학교 자연계 대학원과 충남대학교 공업교육대 졸업생은 병역기간을 1년으로 단축하고 나머지 기간은 교수요원 또는 교사로 근무하도록 하였다. 인원은 서울대 자연계 대학원 700명과 충남대 공업교육대 800명이었다.[1]
'자연계 교원요원확보를 위한 특별조치법'이 1981년에 '대학원 졸업생 등의 병역특례에 관한 특별조치법'으로 개정되었다. 이전에는 서울대 대학원 졸업자만 교수요원으로 선발되었으나 이 개정으로 전국 모든 대학원 졸업자를 대상으로 시험을 통해 석사장교를 선발하게 되었고, 인문계 출신들도 선발대상에 포함될 수 있었다. 병역기간도 1년에서 6개월, 그것도 복무기간에 산입되지 않는 사관후보생 기간만으로 단축되어 엄청난 비판을 받았다. 또한 아무래도 시험이 있다 보니 명문대 출신 석사들이 대체로 혜택을 많이 받았다. 윤상운(1989)이 석사장교 제도 개선을 위해 석사장교 출신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의하면 응답자의 약 2/3가 서울대, 연대, 고대 출신으로 되어 있다. 당시에 카이스트와 포항공대는 졸업생이 나오기 이전이었다. 하지만 1990년에 예편한 어느 훈육대의 추억록에 있는 명부에 의하면 그 훈육대의 전체 120여 명 중 약 60% 이상이 서울대 출신으로 파악된다. 그 기수에는 모두 6개 훈육대가 있으므로 약 750여 명이 예편하였다. 초기 몇 년을 제외하고 1년에 2개의 기수가 운용되었다.
훈련은 영천육군3사관학교에서 4개월의 육군 사관후보생 훈련을 받고 나머지 2개월은 전방부대에서 실습소대장으로 육군 사병들과 함께 철책근무와 동계훈련으로 병영체험을 하였다. 실습소대장은 석사를 마치고 입대하였으므로 일반 육군 병사들과는 평균 5살 정도는 나이 차이가 있고, 학부 출신 소대장들보다도 나이가 많은 편이었다. 게다가 뭐 군대란 게 당연하게도 석사장교들이 계급도 현역병들보다는 압도적으로 높아서 석사장교들은 병사들에게 반말을 썼고 병사들은 석사장교들에게 존댓말을 썼다. 보통 석사장교들은 대체로 사관후보생 시절 받은 월급을 모아두었다가 실습소대장 시절 현역병들에게 온갖 선물들을 사다 주며 산타클로스 역할을 담당하며 현역병들과 친하게 잘 지내다 갔다고 한다. 어차피 소위 굴리기 등 하극상이 만연하던 시기라 소위도 못 단 사관후보생들이 상병장에게 기펼 수도 없었으니 그냥 적당히 얼굴 안 붉히고 있다 가는 쪽을 선호했기 때문이다.
연도별 선발 인원은 1982년 209명, 1983년 643명에서 시작하여 1984년부터 1989년까지는 1,000-1,200명 수준을 유지하였다가, 1990년 675명, 1991년 506명을 끝으로 폐지되었다. 누적적으로는 10년간 9,397명이 이 제도의 혜택을 입었다. 선발 시험 경쟁률은 연도별로 다르나 대체로 2:1을 약간 넘는 수준이다. 카투사처럼 동일하게 석사장교에서 한 번 떨어지면 두 번 다시 기회가 없어서 대학원을 졸업하고 1년 지난 시점에서 석사장교와 같이 생긴 제도(1981년 신설)인 학사장교로 입대했다.
현재도 위관급 장교 출신 중 전역 시 계급이 육군 소위인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석사장교 출신으로 보면 된다. 물론 중위 진급에 실패해서 군대에서 쫓겨나거나 소위로 만기전역[2]한 사람도 없진 않지만 그런 인원은 ROTC에서 한 기수당 6~8명 나오는 수준[3]이며 나머지 출신들은 나오고 싶어도 안 나온다. 그 외에 한국해양대학교에서 승선학부 전원이 대한민국 해군 ROTC 입단을 하던 시절, 이들 중 운 없는 일부 현역 임관자[4]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졸업식 날 임관식 겸 전역식을 동시에 치르고 예비역 해군 항해/기관소위가 됐다. 이 제도는 일단 정규 상선사관들보다 훨씬 적은 급여만 받고 망망대해에서 개고생해야 하고, 상선이나 어선 등 배타는 직종의 직장 분위기가 반쯤 군대에 가깝게 살벌한데다, 파면당하거나 하면 다시 군대 가야 하는 등 파리목숨이었기에 딱히 이쪽으로 간다고 욕하는 사람은 없었다. 지금은 해양대 승선학부의 ROTC 강제 입단이 폐지되어, 승선근무예비역들은 해군 예비역 수병으로 신분이 바뀌며, 승선예비역 근무를 마치면 항해사냐 기관사냐에 따라 갑판 혹은 내연 직별 병장이 된다.
1990년대 종로, 강남구, 여의도부촌의 동사무소에서는 명문대 석사 출신 고학력자들이 몰려 있는 지역의 예비군 훈련에 가면 비교적 명문대 석사 출신 예비역 석사장교들이 매우 흔하게 관찰되기도 했다. 직장 단위로 예비군 편성을 했고 석사장교 출신들이 다니는 직장은 비교적 몇 개로 정해져있는 편이어서 예비군 훈련에 가면 그 부대에서만큼은 일반 장교보다 석사 장교 출신들이 더 많은 경우가 흔하였다. 당시 인기있던 회사에서는 석사장교가 제대하는 2월 전역자를 겨냥해 5월에 입사하는 인원을 특별모집을 하곤 하였다. 90년대 당시 직장의 분포로 보아 석사장교 출신들의 직장은 여의도와 종로에 주로 있었을 가능성이 크며 서면이나 해운대에는 거의 없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유사한 제도로 교대출신 예비역 하사관 병역특례 제도가 있다.

3. 군 복무


일단 입대하자마자 육군 학사장교와 똑같은 육군사관후보생 신분을 부여받고 4개월 동안 사관후보생으로서 훈련을 받는다. 그 4개월의 훈련을 다 받으면 2개월간 전방에 사관후보생 계급으로 실습소대장 신분이 되어 전방체험을 하며, 이를 마치면 '''육군 보병소위 임관과 동시에 전역'''한다. 그래서 6개월짜리 장교인 것이다. 이 군사교육의 강도가 고령을 생각하여 약하게 편성했다고 한다. 전두환 아들과 노태우 아들이 해야 돼서 그렇게 했다는 평도 많다.
당시 3사관학교에서 조교를 했던 사람들의 전언에 의하면 이들을 예사후보생(예비역사관후보생)으로 불렀고 부유층이라는 배경과, 학력(당시 병사들은 고졸이 가장 많았단 시절), 신분(사관후보생은 상사의 위 소위의 아래)등에 대한 질투심같은 것이 있어 예사후보생들을 더 혹독하게 다루었다. 합법적으로, 소위 FM대로 하는 방식이었는데 워낙 범생이 출신들이 많아 고분고분한 편이기도 하였다. 조교(일반병사)와 후보생간은 상호존대하도록 정해져 있었다.
그런데 1985년도에 전두환의 장남 전재국이 예사후보생으로 오면서 이 한 사람에게만 표나게 특혜를 주기는 곤란하므로 전체적으로 교육일정을 다소 완화시켰다. 피복과 개인장구, 소총 등도 전재국만 좋은 것을 줄 수는 없으므로 1,000명이 넘는 그해의 예사후보생 전체에게 신품이 지급되었다. 당시 조교들이 농반 진반으로 '국회의원 아들은 평민' 이라고 할 정도로 고위층 아들이 많았으며 군사학처(교관단)의 중대령급 장교가 몇년 쓸 예산을 한 기수에 쏟아부었다고 말하는 걸 들은 운전병의 전언이 있다.
특히 교육 내용이 이전 기수에 비해 완연하게 강도가 약해졌으며 16주 정도의 교육기간중 1주일 정도는 전적지 답사라는 명목으로 수학여행 비슷한 것을 넣어 군용버스를 타고 다부동, 포항 등지의 전적지 답사, 즉 여행을 하기도 했다. 당시 칸보이(차량대열을 이끄는 찦차)를 했던 운전병에 의하면 저녁 무렵에 포항에서 영천으로 후보생들이 귀대할 때 10여대의 버스가 새떼운행을 하고 앞뒤로 찦차가 붙어 선도(맨 앞 찦차 이것을 칸보이차라고 부른다)와 폐쇄(맨뒤 찦차로 민간차량이 추월하여 대열의 중간에 끼는 것을 막는다.)를 하는데 폐쇄차 하는 것이 가장 흥미진진하여 뒤에 오던 민간인 차량이 추월하려고 하면 중앙선까지 넘어가면서 추월을 봉쇄하였다. 당시는 차가 지금보다는 적었으나 편도 1차선 도로에서 포항과 영천을 잇는 국도를 1시간 이상 이렇게 운행하니 극심한 정체가 발생하여 뒷차 행렬이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길었었다. 당시도 민원이 있기는 했지만 폐쇄차를 운전했던 운전병은 '전재국이 타고 있는데 언놈이 시비걸겠는가' 하는 마음으로 한시간 이상 곡예운행을 했다. 물론 선탑했던 영관장교의 동의도 있었다.

교육이 이전 기수에 비해 많이 느슨해지긴 했으나 그렇다고 완전 물교육은 아니었다. 특히 교관이나 조교들도 현직대통령 아들이 있으니 규정대로 즉 FM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5] 또한 전두환 아들이라고 사적으로 봐주는 건 없었고 오히려 전재국이 아버지 욕 안먹이려면 가장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어서 열심히 한다고 제법 칭찬이 자자했었다.
당시 근무하던 병사나 고졸 장교(마지막 기행사관이 대위급으로 마지막 갑종간부들이 고참소령, 중령으로 있었다)들이 똑똑한 사람에게 군대3년보다 더 국가에 기여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자는 취지라지만 사실상 고위층의 특혜라는 것과 뭔가 불평등하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기는 했지만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즉 당시의 수준에서는 문제의식이 별로 없었다. 그러니 전두환은 이런 말도 안되는 제도를 꺼리낌없이 만들고 노태우는 자기 막내아들이 이 제도로 혜택을 본 직후 폐지해버린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 제도는 거대한 병역비리라고 할 수 있다. 병역기피보다도 더 나쁘다. 병역기피는 국가예산은 축내지 않지만 이 제도는 국가예산을 소진하고 이들을 가르친 조교와 장교들은 사실 헛짓거리를 한 셈이니 더욱 허탈한 일이다.
당시 영천 3사관학교에서는 석사장교라 불리는 예비역사관후보생과정(예사 4개월훈련+8주 전방실습)) 이외에 3사후보생과정(2년제 대학 졸업자 대상 약 6개월 훈련)과 단기사관후보생과정(학사장교 12주과정)과 기타 법무사관, 의무사관(군의관)들도 입교하여 4주간 교육을 받았다. 대구/경북지역 ROTC후보생도 방학때 4주간 입교하여 교육을 받는 등 (육사를 제외한) 육군의 모든 사관후보생들이 3사관학교에서 양성되어 임관했다. 학사사관, 간부사관, 군의관, 군법무관, 군종장교, 기타 기행병과(경리, 교수, 군악, 의정사관 등).
2012년부터는 이 양성과정들이 충북 괴산군에 위치한 육군학생군사학교에서 진행되고 있다.
2년제 3사관학교 생도과정이 훈련기간이 가장 길고, 석사장교가 그 다음이라고는 하나 그 훈련생활이 다른 장교코스의 훈련생활과는 격이 다르게 편했기 때문에 서류상의 훈련기간을 늘리는 것을 이용해 전두환 아들이 해서 편하게 한다는 비판을 피하려 했다는 분석도 있다.
조교들은 예사후보생을 더 엄격히 다루려고 했으나 체력이 따라오질 못했다.
100Km 행군을 하면 3사(전문대졸 후보생으로 24~36주정도로 가장 길었으나 21~22세로 가장 어렸다. 단사 즉 학사장교에 탈락해서 오는 4년제 출신자도 꽤 있었다) 후보생들은 울면서도 완주를 했고 단사(4년제 졸업자로 흔히 학사장교과정인데 12주 교육으로 당시는 단기사관으로 부름)후보생들이 가장 잘한다는 평을 받았으며 예사후보생들은(석사장교라 부르는) 100Km 대신 40Km행군을 했는데 2~30% 정도가 낙오했다.
행군시 보통 2~3명 탈수 있는 엠뷸런스가 맨뒤에 동행하였으나 예사 과정은 아예 버스가 따라갈 정도였다.
앞선 군번(성적순으로 군번 부여함)을 받아야 군생활이 유리해지고 진급에도 평생 따라가므로 특히 의무복무기간이 긴 3사후보생들이 가장 열심이었고 단사(즉 학사)는 자원이 좋고 나이도 가장 적정하여 훈련 이해도는 가장 좋았다는 평을 받았다. 예사는 이래가나 저래가나 퇴교만 안 당하면 되므로 교관(대위 소령)들이나 후보생 모두 결사적으로 하지는 않았으나 조교들은 부러운 마음에 뺑뺑이 좀 돌려보자 하는 마음으로 교육에 임하는 편이었다. 당시 직접 본 소감으로는 그래도 운동과 담쌓았던 공부형 인간 기준으로 즉 나름대로는 힘든 과정이었지 널널한 과정은 절대 아니었다.
또한 석사장교는 6개월의 훈련이 끝나면 소위 계급을 주고 즉시 예비역으로 편입되므로 장교로서의 생활은 단 1초도 하지 않는다.

4. 문제점


전두환장남 전재국의 입대를 앞둔 1982년에 생기고 노태우아들 노재헌이 전역할 때인 1991년에 없어졌다. 그래서 제도 창설 초기부터 군사정권 실세 자녀들의 편의를 봐주기 위한 것이 아니냐는 악평이 끊이지 않았다.
석사장교 제도의 근거가 된 법은 대학원졸업생등의병역특례에관한특별조치법인데, 이 법은 전두환이 정권을 잡기 이전 박정희 집권 시기인 1979년에 통과된 자연계교원요원확보를위한특별조치법에서 기원한 것이고 석사장교와 동일하게 장교로 군대에 가는 것[6]이지만, 정작 박정희 정부 때는 만들어지지 않았다. 이미 민군 양쪽 모두 입법에 성공해도 이런 불공평한 제도를 만들어선 안 된다는 합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박정희 때 만들려던 제도조차 복무 기간이 두 배 이상이었다.
세금으로 장교 훈련을 받게 해놓고 정작 제대로 된 복무는 안 해서 엄청난 악평을 받았고, "국민의 세금으로 독재자의 자식 특혜를 주기 위해 이런 악랄한 제도까지 만들어야 하느냐?"는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제도의 불합리에 저항하기 위해 일부러 석사장교를 지원해 합격한 후 괴롭게 현역병으로 군대를 가서 병장 만기제대를 한 사람들도 있을 정도였다. 물론 이렇게 했다 하더라도 석사장교 자리가 미달이 나자, 국방부에서는 불합격자들 중에서 성적순으로 합격시켜서 이들이 오히려 이득을 보아 석사장교로 군대에 갔다왔다.
석사학위 소지자들이 사실상의 박사 후보생들인 점을 감안하더라도 애초에 지나친 학력 프리미엄을 주는 것이 아니냐는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석사장교는 서울대학교, 고려대학교, 연세대학교명문대 출신들이 거의 90%를 차지했다.
형평성 문제가 야기되어 결국 폐지되었지만 아직도 그 폐해가 크게 남아있다는 주장도 있다. 학부 학번 기준으로 1976~85학번인 현직 교수들의 상당수가 이 제도의 혜택을 받았는데, 이 시기 한국인 학생들의 외국 유학을 가는 사람들까지 늘어 전두환이 원하던, 전두환을 중심으로 하는 엘리트주의가 실현되었다는 평가가 많다. 평균적으로 해당 시기에 석사장교로 군생활 날로 먹은 자들이 지금 현재 한국의 교수진영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5. 기타


훈련 강도는 서울대학교 출신 학자인 김난도가 석사장교로 복무하던 시절 아프니까 청춘이다에서 밝히길 운동에 익숙치 않은 약골 범생이들도 충분히 극복할 정도라고 한다. 서류상의 훈련 내용 자체가 삼사장교 과정이나 학사장교 과정과 특별히 달랐던 것은 아니나 이를 훈육했던 장교들의 증언에 의하면 훈련 종류와 갯수는 일반 장교들과 동일하게 유지하되 그 강도를 최대한 낮추는 방법을 사용했다고 한다.
후보생 사이에 전재국 등 유력인사의 자제가 들어있는 기수에는 훈련강도가 매우 낮았다는 전설이 내려오긴 했으나, 서류상으로는 삼사 장교 과정이나 학군장교 과정과 크게 다를 바 없는 교육이 진행되었다. 석사장교는 주로 공부하던 선생님의 비중이 높고 연령대도 약간 높은 만큼, 태권도나 유격, 200km 행군 시에는 삼사 장교 과정이나 학군장교 과정에 비해 훈련성취도가 높지는 않았다고 한다. 다만 당시 훈육관에 의하면 사격 성적만은 석사장교 출신들이 삼사나 학군장교 과정에 비해 괜찮았다고 한다.
현재 박사를 지망하는 사람들은 병역특례를 제외하면 어릴 때 공군 병사나 학군장교[7]로 복무하고 오는 경우가 많다. 미필 상태로 석사까지 진학했다면 20대 중후반이 되어서 전문연구요원, 교수사관을 가장 선호하지만 이것이 여의치 않을 경우 학사장교를 선호한다.[8] 병, 부사관 입대는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이 제도와 같은 형태로 만든 자매 제도가 바로 육군 학사장교 제도인데 훈련은 동일하지만 석사장교처럼 소위 임관과 동시에 전역처리를 하는 게 아니라 정식 장교로서 실제로 3년간 복무한다. 그리고 학사장교는 석사장교와는 달리 장기복무자들도 상당히 많아서 2010년 정현석 장군을 시작으로 현재 최선임자 최진규 중장 등 장성급 장교도 다수 배출한 상태이다.
원래 미군에서는 ROTC를 이렇게 운용한다. 미군이 모병제이기 때문에 ROTC는 정말 뛰어난 극소수만 현역으로 배치하며 나머지는 석사장교처럼 소위 임관과 동시에 전역하고, 죽을 때까지 한 번도 예비역 소집 안 되는 경우도 제법 많다. 하지만 미군 ROTC의 경우, 석사장교와는 달리 훈련 기간이 꽤나 길다. 대학교 재학 4년 내내 훈련받기 때문에 3학년부터 훈련받는 대한민국의 ROTC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6. 석사장교 출신 유명인



[1] 1979년 6월 5일 동아일보 기사.[2] 부사관 출신 예비역이야 어차피 다 같은 '하사 만기전역'이라 호봉 차이(정상적으로 전역을 하면 하사 4호봉, 사고를 치고 전역을 하면 2호봉)만 있을 뿐 계급상의 차이는 없지만, 병 출신 예비역에게는 '상등병 만기전역'에 해당. [3] 주 원인이 초군반 퇴교.[4] 박봉인 해군 장교보다 상선사관으로 고액 연봉을 받으며 대체복무하는 승선근무예비역을 압도적으로 많이 선호했다.[5] 다만 커리큘럼은 느슨하게 적용하였다.[6] 다만 석사장교와 차이점이 있다면 대학원 졸업생 등의 병역특례에 관한 특별조치법은 일반 장교과정과 동일하게 소위로 입대하고 중위로 제대하는 것.[7] 단, 학부과정에서 학군사관을 하며 본인이 능력만 된다면 후보생 2년간 학사와 석사를 모두 따는 것은 학군교와 학군단장의 심의를 통과한 경우 제한적으로 가능.[8] 사관학교는 대학 졸업할 때쯤 되면 나이 제한 때문에 사관학교로 입대하는 것은 불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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