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 스토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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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gene Morrison Stoner'''.(1922년 11월 22일 ~ 1997년 4월 24일)
미국의 천재적인 총기 발명가. 서방진영의 돌격소총의 주류인 M16 소총과 관련된 여러 총기를 개발하였다. M16과 비슷한 위치에 있는 공산진영의 돌격소총인 AK-47를 제작한 미하일 칼라시니코프와 비교되는 일이 많다.
유진 모리슨 스토너(Eugene Stoner)는 1922년, 미국 인디애나 주의 작은 시골 마을인 고스포트에서 태어났다. 그가 초등학교를 다닐 당시에는 전 세계적인 대공황이 몰아닥친 때였다. 그래서 그의 가족들은 모두 캘리포니아로 이주해 그 곳에 있는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 후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인생의 전환을 맞는다. 바로 항공기 제작사인 베가(Vega)사에 취직한 것이다. 그 때는 2차 세계대전이 아슬아슬하게 발발하기 직전이었고, 군용기의 수요가 높아지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군용기에 무장을 장착하는 일을 맡게 된다. 전쟁 중, 그는 해병대 항공대에 지원한 뒤 그는 항공기 무장사가 되었고, 덕분에 직접 일선에 나서지 않고 안전한 보직을 갖게 되며 자신의 재능을 꽃피웠다.
태평양 전선과 중국을 오가며 군 복무를 마친 그는 2차 세계대전 이후 항공기 부품을 만드는 대형 항공 회사였던 페어차일드 사에 스카웃되었다. 이것은 그의 인생에서의 또 다른 전환점이 되었다. 그 곳에 취직한 그는 뜻밖에도 총기 제작을 의뢰받게 되었다. 당시 페어차일드는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비약적인 발전을 거친 알루미늄 합금 기술을 항공 기술을 총기에 응용한다면 새로운 소재와 새로운 개념의 총기를 만들 수 있으리라 기대했고, 그를 이용해 큰 돈을 벌 수 있으리라 기대한 마음에 자(子)회사인 아말라이트(Armallite)를 만든다. 그 곳에 스토너가 있게 되었던 것이었다.
그는 1954년 아말라이트 수석 엔지니어로 스카웃되었고 거기서 다양한 총기를 설계했다. 그 첫 번째는 바로 공군 조종사 생존용 총기였다. 그 때 당시 미 공군은 창군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이를 이용해 수익을 올릴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공군은 이미 2차 대전에서 사용된 M4 서바이벌 소총과 이를 대체할 후계작인 M6 서바이벌 소총까지 채택한 상황에서 이 총을 채택할 이유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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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10 전에 만든 소총인 AR-7.[1] .22 LR 탄환을 사용하고, 총열, 탄창, 몸체가 모두 분리되어 개머리판에 수납되는 데다, 그 개머리판은 물에 뜬다. 그러나 공군은 채용하지 않았고, 민수용으로 그저 몇 정 팔리는 정도였다. [2]
그렇지만 스토너 이외의 여러 총기회사들이 꿈꾸는 것이 있었다. 바로 미 육군의 차기 소총의 선정이었다. 당시 스프링필드 조병창에서 진행되었던 M14 소총의 개발은 느릿느릿했고, 미 육군은 FN FAL 등의 다른 해외의 소총들을 검토하기도 한다. 여기서 스토너와 다른 아말라이트의 스탭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자신들의 소총을 만들어 육군에 채택시키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이들은 독일의 StG44 돌격소총, FG42 자동소총, 벨기에의 FN FAL, 스웨덴의 Ag m/42 반자동소총, 그리고 미국의 M1941 존슨 소총 등 여러 소총을 참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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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 스토너가 특허를 낸 특허 2,951,424번 "가스 작동식 노리쇠와 노리쇠 뭉치 시스템". M16 소총의 기본적인 작동방식이다. 개머리판 속 완충스프링은 StG44에서, 가스 직결식 작동구조는 륭만에서, 그리고 노리쇠 톱니바퀴와 회전 노리쇠는 존슨에서 참고하였다.[3] 특히 화약의 폭발 가스가 노리쇠 뭉치에 직접 분사되어 노리쇠를 밀어내는 이 방식은 총의 부피와 무게를 대폭 감소시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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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해서 그들은 그들만의 소총을 만들어냈다. 그것이 AR-10이다.[4] 알루미늄 합금 소재로 만들어져 3.3kg의 가벼운 무게, 7.62mm NATO탄환을 사용하면서도 총열의 축선과 개머리판이 일직선상인 그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디자인을 채택해 가벼우면서도 적은 반동을 이뤄낼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이 소총은 미 육군 차기 소총 선발에 제출되었고, 미 육군은 이 소총에 높은 평가를 하였고, '지금껏 본 소총들 중 최고의 소총'이라는 찬사까지 하였다.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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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육군의 사격 테스트 중, AR-10의 '''총열이 완전히 찢어져 터져버리는''' 사건이 일어난다. 사실 그들은 총열을 만들 때 에어소프트건과 비슷하게 총열 바깥쪽은 알루미늄 합금, 강선이 포함된 안쪽은 스테인레스 재질을 사용하여 가벼우면서도 튼튼한 총열을 완성할 수 있다는 이론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예상과 달리 총열이 버텨 주질 못해 완전히 터져 버렸고, 미 육군에서는 AR-10을 탈락시킨다.[5]
그러나 페어차일드는 희망을 잃지 않고, 네덜란드의 병기 메이커인 AI[6] 사에게 생산권리를 넘기기도 하고, 세계 각 지역에 생산권을 넘기기도 한다. 여기서 중남미,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북유럽에 대해 판매권을 얻어낸 인터암즈 사의 사장인 샘 커밍즈는 "가장 발달된 형태의 군용소총."이라는 찬사도 하였다.
그러나 결국 AR-10은 벨기에의 FN FAL에게 패배한다. FAL이 무겁긴 해도 AR-10에 비해 신뢰성과 내구성, 그리고 보급에의 이점이 오히려 더 크게 작용했던 것이다.
또한 기대했던 네덜란드에서조차 FAL을 채택하고 말았다. 결국 AI사는 AR-10의 생산을 포기하고 말았다.
AR-10의 흥행여부와는 별개로, 미국 내에서는 서서히 돌격소총에 대한 개념이 싹트기 시작했다. 이는 한국전쟁에서의 교훈 때문이였는데, 한국전쟁 당시 중국군의 인해전술은 당시 미군의 제식소총인 M1 개런드로는 당해내기가 어려웠다. M1은 우수한 소총이기는 했지만 반자동이라 연사력이 좋지 못해 머릿수로 밀어붙이는 중공군을 저지할 수 없었기 때문. 그나마 경기관총을 장비한 경우는 막아내기 수월했으나 경기관총을 모든 보병에게 쥐어줄수도 없는 상황. 따라서 적절한 연사력과 휴대성을 겸비한 돌격소총의 필요성이 대두된 것이다. 오죽하면 한국전쟁 당시 유엔군이(대한민국 국군 포함) M16같은 자동소총을 장비했다면 틀림없이 전쟁에서 이겼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왔을까? 프로젝트 샐보의 개념이 시작된 것이다. 대다수의 전투에서의 교전 거리가 300m 이하였고, 그런 교전 거리에서는 반동과 파괴력이 강한 탄을 한 발씩 쏘는 것보다는 적은 반동의 소구경탄으로 탄막을 형성해 적을 제압하자는 이론이었다. 이에 미국에서는 SPIW라는 새로운 개념의 소총을 제작하게 되었다. 이것을 아말라이트 사에서 받아들여 우리가 잘 아는 '''AR-15'''를 드디어 제작한다.
하지만 군대라는 조직은 목숨이 오가는 전쟁을 치루어야하는 사정상 언제나 과감한 모험보다는 확실하게 검증된 것을 선호할 수 밖에 없는 보수적인 조직인지라 사용 탄종도 다르고 작동법, 정비법 등 사용법이 완전히 새로운 이 소총을 채용하기를 망설였다. 결국 미군이 선택한 것은 사실상 M1을 위의 요구조건에 맞추어서 자동 사격이 가능하게 만든 물건인 M14 소총[7] 이었고, 아말라이트사는 AR-15를 만드느라 모든 저력을 다 쏟아부은 터라 더 이상 버틸 힘이 남아있지 않아 결국 '''모든 라이센스를 콜트社에게 넘겨버린다.'''[8] 이 유진 스토너는 이 결정에 실망하여 결국 아말라이트를 나간다.
AR-15가 나오고 그 권리가 콜트 사에 넘어간 이후, 스토너의 그에 대한 관심은 빠르게 식어 버렸다. 애초에 남의 회사의 물건이 되어버린 총에 연구개발할 이유를 못 느꼈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관심은 철판 프레스를 이용한 소총의 개발로 기울어졌다. 그 이유는 AR-15는 알루미늄 합금의 정밀 주조 기법은 당시로서는 첨단의 기술이어서, 수많은 아시아 국가들이 프레스 생산을 통해 쉬운 생산을 해 낼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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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15를 보낸 스토너는 동료인 아서 밀러와 다시 7.62mm 탄환을 쓰는 총기인 AR-16을 개발한다. 이 소총은 종래의 개발 소총과는 달리 더 단순한 방식의 가스피스톤 방식을 이용했다. 그 이유는 실용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자신의 가스 튜브 작동방식인 가스 직동식 방식의 권리가 콜트 사로 넘어갔기 때문에 이를 따라해 만들 수 없었던 법적 이유 때문이었다.[9][10]
이 소총은 철판 프레스 방식으로 만들어져 제작이 간단했고, 개머리판을 접을 수 있어서 전차나 차량 승무원들이 가지고 다니기 좋았다. 그러나 총이 지나치게 작아 화염과 반동이 심하였다. 그들은 이 소총을 미 육군 전차 사령부에 제출했지만 그 곳에선 2차 대전에 사용된 M3 기관단총을 그대로 사용하기로 한다.
5.56mm 탄환의 화기와 미군에서 구매했던 AR-15가 콜트 사에서 M16으로 한 단계 더 발전하고 있는 판국에 반동이 강한 7.62mm 소총이 주목받을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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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16 이후 아말라이트 사에서는 AR-18을 제작한다.[11] 다만 이 때에는 스토너는 아말라이트 사를 퇴사하였고 남은 스탭들이 이 소총을 제작한다. 이미 제 3세계 등 다른 나라에서는 FN FAL 등을 사용하고 있었으니 열심히 미 육군에 판촉 활동을 벌였다.[12] 그러나 미 육군은 XM16E1을 잘 사용하고 있는데 또 다른 소총을 사용할 이유는 없었다. 물론 개머리판이 접히는 등의 휴대성 등의 이점이 있긴 했지만, 굳이 새로운 소총을 도입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5.56mm 소총은 사용하고 싶어도 제작 기술과 구매 자본이 부족해 사용하지 못하는 나라에 이 소총의 제작 기술이나 소총 자체를 팔기로 했다. 그래서 그들은 일본의 호와 공업에 생산권을 팔기로 했고, 호와 공업에서는 이것을 생산하여 치안이 취악한 동남아시아의 경찰용으로 팔기 시작했고, 미국 민수용인 AR-180도 슬슬 성장의 가도가 열리는 듯 했다.
그러나 하필이면 IRA에서 미국을 통해 북아일랜드로 AR-180을 밀반입한 뒤 테러에 사용하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호와 공업은 결국 AR-18, AR-18의 생산/수출을 중단한다. 그래도 1974년 영국의 스털링 사에 생산권이 옮겨져 생산이 되지만, 그다지 큰 성공을 거두진 못한다. 그렇지만 영국은 이를 통해 소총의 개발 노하우를 알게 되었고, SA80을 제작할 수 있게 된다.
여담이지만 슈타이어 암즈 사의 AUG, 호와 공업의 89식 소총 등은 AR-18의 작동방식인 쇼트 스트로크 가스 피스톤 방식 기초로 한 것이다.
자세한 설명은 AR-18에서도 되어 있으니 그 쪽을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스토너가 AR-16을 만들고 나서, 그는 아말라이트를 퇴사한다. 그렇지만 그에게는 'M16 제작자'타이틀 덕에 다른 총기 메이커들이 그를 영입하고 싶어했다.
그리고 유진 스토너는 자동차 메이커인 제너럴 모터스의 자회사인 캐딜락 게이지 사에 영입된다. 원래 이 회사는 장갑차나 자동차의 부품을 만드는 회사였는데 총기 업계에 뛰어들고 싶어했다. 그들은 얼른 스토너를 영입했고, 새로운 총기 제작에 돌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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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쪽의 총은 스토너 63의 분대지원화기 버전, 아랫쪽은 그 이전의 7.62mm탄을 사용하는 스토너 62.
그가 캐딜락 게이지에서 처음 만든 총은 7.62mm탄을 사용하는 스토너 62(Stoner 62)였다. 그렇지만 이미 대세는 5.56mm 탄환으로 기울어진 것을 안 그는 5.56mm 탄을 사용하는 스토너 63(Stoner 63)을 만든다. 이 소총은 AR-18의 프레스 가공과 가스 피스톤식의 작동방식을 채택했지만, 쇼트 스트로크 가스 피스톤 방식이 아닌 AK 계열과 유사한 롱 스트로크 가스 피스톤 방식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스토너 63의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시스템 모듈화'방식이었다. 하나의 몸체로 총열이나 거치대 등 일부의 부품만 바꿔주면 카빈, 일반형 소총, 기관총, 거치식 기관총 등 다양한 모델로 변형 가능한 획기적인 구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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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너 63(Stoner 63)의 다양한 형태들.
이 총에 대해 미 해병대에서는 이 총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었으나 결국 높은 비용 문제와 부품 호환 등의 이유로 어쩔 수 없이 포기하게 된다.
결국 네이비 씰에서 Mk.23이란 이름으로 스토너 63의 경기관총 버젼을 사용했지만, 소총이 베이스였기 때문에 다소 한계가 있었다. 결국 베트남 전쟁 이후 캐딜락 게이지는 이것을 차기 분대지원화기로 채택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알다시피 미 육군에선 FN 미니미를 M249로 채택했다. 결국 스토너 63은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역사 속으로 조용히 사라졌다.
더 자세한 것은 스토너 63 항목 참고.
그는 M63 시리즈가 실패한 뒤에도 총기나 무기 설계를 계속하였다. 그는 TRW사에서 25mm 기관포를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ARES 사에서 가방형태로 들고다닐 수 있는 FMG 기관단총을 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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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M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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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 맥풀에서 만든 유사한 총인 FMG-9. 내부에는 글록 18C가 들어간다.
이렇게 많은 총을 만든 그이지만, 그가 제작설계한 것의 거의 대다수는 군에 채용되거나 대량생산되지 못한 채 끝났다. 아이러니한 것은 가장 성공했던 M16조차 그가 좋아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7.62mm의 강한 탄을 사용하는 자동소총을 만들고 싶다는 것을 항상 말했다.[13]
이런 그를 알아본 나이츠 아마먼트(knight Armament, KAC)사의 사장인 리드 나이트와 새로이 관계를 맺게 되었다. 리드 나이트 주니어(Reed Knight Jr.)는 젊었을 때부터 총기류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나름대로 재능 또한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재력이 총기를 제작하는 데 제약을 없게 해 주기도 하였다. 그는 일찍이 M16을 발명한 유진 스토너를 존경했다. 그는 KAC 사를 설립했고 피카티니 레일 시스템을 만들어 어느 정도의 자리를 잡고 그는 스토너를 찾아가 새로운 소총을 개발하고자 했다. 이 둘의 바람은 과거의 AR-10을 부활시키자는 것이었다.
물론 그 당시의 AR-10을 그대로 내놓을 수는 없었다. 시대가 많이 변했고 그 상태 그대로 내놓았다가는 실패할 것이 뻔했으므로, 그들은 그 동안 변화된 상황을 감안해 새로운 형태의 AR-10을 만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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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C SR-25의 첫번째 모델인 매치(경기)용 버전.
그들은 7.62mm 탄을 사용하는 반자동의 저격 소총을 만들기로 하였다. 저격 소총이야 7.62mm에 대한 수요가 아직은 있었고, 그래서 나온 것이 KAC SR-25이다. SR은 스토너의 소총(Stoner's Rifle)의 약자[14] 이고 25는 AR-10과 AR-15의 숫자를 합친 것이었다. AR-10을 기초로 했지만 호환되는 부품은 탄창뿐이며,[15][16] 나머지는 거의 새롭게 만들다시피하여 격발기구는 최대한 M16 시리즈와 기본적인 부품이 호환되게끔 했다.[17] 또한 반자동 저격총 치고는 1MOA[18] 이 되는 명중율을 발휘할 수 있었는데, 그 이유는 AR-10에서 사용된 가스 직동식 방식이 가스 피스톤 계열보다 반동이 적고, 총열과 가스 튜브 등의 부품이 다른 곳에 최대한 닿지 안는 구조 즉, 프리플로팅 배럴이기 때문이다.
결국 반자동 저격 소총을 원하던 미 해군 네이비 씰이 '''드디어''' 이 소총을 채택하게 되고, 2000년, 개량형인 Mk.11 Mod.0를 드디어 채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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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10(어찌 보면)의 첫 미군용 제식 모델인 Mk.11 Mod.0. 드디어 스토너의 소총은 40여년이 지나서야 제식으로 채택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그것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다.
이 소총은 프리플로팅 배럴 주변의 4방향 레일, 그리고 QD(Quick Detachment)타입 소음기와 루폴드 사의 스코프와 양각대 등 부속 장비들을 하나의 세트로 묶어 씰팀에 납품하였다. 결국 AR-10은 명칭과 제원과 스펙이 많이 바뀌긴 했지만 드디어 40년만에 미군에 제식으로 채택되지만 1997년, 스토너는 이미 암으로 세상을 떠난 뒤였다. 말년에는 시력까지 약해졌지만, 엔지니어들과 계속적인 총기를 설계하기까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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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k.11 Mod.0를 사격하는 미 해병대 제 4 MEB 지휘관인 더글러스 오델 소장.
그렇지만 SR-25의 생산량은 그렇게 많은 수준이 아니었다.[19] 그도 그럴 것이, 민수용 위주의 판매보다는 군-경용이나 특수부대 등의 수요에 맞추에 제작(mil spec)되었기 때문이고, 좋은 정밀도와 내구성만큼 가격이 만만치 않았기에 민수 시장에서의 한계가 있을 수밖에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2007년, SR-25는 미 육군의 제식 저격총으로 선정된다. 테러와의 전쟁 이후, 저격수의 교전 거리가 상대적으로 짧아지면서(이라크에서의 시가전 영향) 신속한 연사 능력을 가진 저격 소총이 필요했기 때문에 반자동 저격 소총의 수요가 높아진 것이다. 그래서 KAC는 Mk.11 Mod.0을 베이스로 육군의 요구에 맞게 개량을 했고, 그 결과가 M110 SASS(Semi-Auto Sniper System)이다. 후에 미 해병대에도 이 사양에 맞춘 MK.11 Mod.1을 제공한다.
비록 스토너는 이 광경을 보지 못하고 결국 세상을 떠나게 되었지만 그의 족적은 이 세상에 고스란히 남아 있게 되었고 그가 발명한 총들은 비록 제식에 선정되지 않았지만 다른 국가의 총들에 고스란히 전해져 어찌 보면 그의 소총을 바탕으로 많은 소총이 제작된 셈이다.
스토너가 사망한 해인 1997년, 그는 죽기 직전 자신의 소총의 라이벌이라고도 할 수 있는 AK-47의 개발자 미하일 칼라시니코프가 있는 러시아로 간다. 여기서 그들은 서로의 소총을 들어 보이며 서로 미소지었다.[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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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명적 라이벌인 AK-47과 M16의 발명가의 서로의 만남. 여기서 스토너는 AKM을 들고 있고, 칼라시니코프는 M16A2를 들고 있다.
사실 1990년에도 이미 칼라시니코프가 미국을 방문하여 두 사람이 만나 서로 각자가 설계한 두 총을 시험사격한 적이 있었다. 이때 스토너가 "베트남에서는 당신의 승리였습니다"라고 AK의 내구성을 극찬했으며, 동시에 칼라시니코프가 받은 훈장에 대해서도 부러워했다.[21]
비록 살아서 그의 손 안에서 빛을 본 작품은 하나도 없었지만, 그가 개발한 AR-15의 특허권은 아직 전적으로 그의 소유였기 때문에 특허가 효력을 발휘할 때까지는 M16의 로열티를 받기도 하였다. 그리고 알다시피 M16은 자유세계를 대표한다고 불릴 정도로 아주 크게 성공한 소총이라서 그가 받는 로열티는 엄청난 수준이었고 경제적으로 매우 부유하게 살았다.[22]
여담으로, 스토너와 칼라시니코프는 자신들이 설계한 총기들이 가진 상반된 이미지만큼이나 정반대의 삶을 살아온 것으로도 유명하다. 칼라시니코프는 그의 총기 대부분이 그가 살아있을 적에 빛을 보았고 자신이 설계한 총기를 통해서 사회적인 명망이나 명예 또한 남부럽지 않게 얻었지만, 정작 본인에게 특허권 같은게 일절 없어서 로열티 같은 것은 받지 못했으므로 자신의 총기를 통해 딱히 부를 얻지는 못했다. 반면 스토너의 경우 그의 총기 대부분은 그의 사망 이후에나 빛을 보았고 자신이 설계한 총기를 통해서 사회적인 명망이나 명예를 얻지도 못했으나, AR-15의 대성공으로 인해 상당한 부를 얻을 수 있었다. 다만 칼라시니코프가 AK를 통해 직접 돈을 벌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소련과 러시아 정부가 그 성과와 노력을 인정하여 여러가지 사회적 혜택과 우대를 제공했기에 평생 경제적으로 크게 어려운 점 없이 살았으며[23] , 스토너 또한 공식적으로 훈장을 수훈하거나 하진 않았으나 그의 발명품들이 후대의 총기에 많은 영향을 주어 최종적으로는 총기의 역사에서 결코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인물이라는 명예를 얻었다. 정 반대의 삶을 살아온 두 거장의 인생이 결국 끝에 가서 동일한 결과로 마무리되었으니 어떻게 보면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1997년 4월 24일 향년 74세, 암으로 인해 별세하셨다. 버지니아 주 콴티코에 있는 "콴티코 국립묘지(Quantico National Cemetary)"에 안장되셨다.
'''Eugene Morrison Stoner'''.(1922년 11월 22일 ~ 1997년 4월 24일)
1. 개요
미국의 천재적인 총기 발명가. 서방진영의 돌격소총의 주류인 M16 소총과 관련된 여러 총기를 개발하였다. M16과 비슷한 위치에 있는 공산진영의 돌격소총인 AK-47를 제작한 미하일 칼라시니코프와 비교되는 일이 많다.
2. 그의 출생
유진 모리슨 스토너(Eugene Stoner)는 1922년, 미국 인디애나 주의 작은 시골 마을인 고스포트에서 태어났다. 그가 초등학교를 다닐 당시에는 전 세계적인 대공황이 몰아닥친 때였다. 그래서 그의 가족들은 모두 캘리포니아로 이주해 그 곳에 있는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 후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인생의 전환을 맞는다. 바로 항공기 제작사인 베가(Vega)사에 취직한 것이다. 그 때는 2차 세계대전이 아슬아슬하게 발발하기 직전이었고, 군용기의 수요가 높아지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군용기에 무장을 장착하는 일을 맡게 된다. 전쟁 중, 그는 해병대 항공대에 지원한 뒤 그는 항공기 무장사가 되었고, 덕분에 직접 일선에 나서지 않고 안전한 보직을 갖게 되며 자신의 재능을 꽃피웠다.
3. 2차 세계대전 이후 아말라이트 입사
태평양 전선과 중국을 오가며 군 복무를 마친 그는 2차 세계대전 이후 항공기 부품을 만드는 대형 항공 회사였던 페어차일드 사에 스카웃되었다. 이것은 그의 인생에서의 또 다른 전환점이 되었다. 그 곳에 취직한 그는 뜻밖에도 총기 제작을 의뢰받게 되었다. 당시 페어차일드는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비약적인 발전을 거친 알루미늄 합금 기술을 항공 기술을 총기에 응용한다면 새로운 소재와 새로운 개념의 총기를 만들 수 있으리라 기대했고, 그를 이용해 큰 돈을 벌 수 있으리라 기대한 마음에 자(子)회사인 아말라이트(Armallite)를 만든다. 그 곳에 스토너가 있게 되었던 것이었다.
3.1. 초기작
그는 1954년 아말라이트 수석 엔지니어로 스카웃되었고 거기서 다양한 총기를 설계했다. 그 첫 번째는 바로 공군 조종사 생존용 총기였다. 그 때 당시 미 공군은 창군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이를 이용해 수익을 올릴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공군은 이미 2차 대전에서 사용된 M4 서바이벌 소총과 이를 대체할 후계작인 M6 서바이벌 소총까지 채택한 상황에서 이 총을 채택할 이유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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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10 전에 만든 소총인 AR-7.[1] .22 LR 탄환을 사용하고, 총열, 탄창, 몸체가 모두 분리되어 개머리판에 수납되는 데다, 그 개머리판은 물에 뜬다. 그러나 공군은 채용하지 않았고, 민수용으로 그저 몇 정 팔리는 정도였다. [2]
3.2. 미 육군 차기 소총 테스트, 그리고 탈락
그렇지만 스토너 이외의 여러 총기회사들이 꿈꾸는 것이 있었다. 바로 미 육군의 차기 소총의 선정이었다. 당시 스프링필드 조병창에서 진행되었던 M14 소총의 개발은 느릿느릿했고, 미 육군은 FN FAL 등의 다른 해외의 소총들을 검토하기도 한다. 여기서 스토너와 다른 아말라이트의 스탭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자신들의 소총을 만들어 육군에 채택시키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이들은 독일의 StG44 돌격소총, FG42 자동소총, 벨기에의 FN FAL, 스웨덴의 Ag m/42 반자동소총, 그리고 미국의 M1941 존슨 소총 등 여러 소총을 참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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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 스토너가 특허를 낸 특허 2,951,424번 "가스 작동식 노리쇠와 노리쇠 뭉치 시스템". M16 소총의 기본적인 작동방식이다. 개머리판 속 완충스프링은 StG44에서, 가스 직결식 작동구조는 륭만에서, 그리고 노리쇠 톱니바퀴와 회전 노리쇠는 존슨에서 참고하였다.[3] 특히 화약의 폭발 가스가 노리쇠 뭉치에 직접 분사되어 노리쇠를 밀어내는 이 방식은 총의 부피와 무게를 대폭 감소시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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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해서 그들은 그들만의 소총을 만들어냈다. 그것이 AR-10이다.[4] 알루미늄 합금 소재로 만들어져 3.3kg의 가벼운 무게, 7.62mm NATO탄환을 사용하면서도 총열의 축선과 개머리판이 일직선상인 그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디자인을 채택해 가벼우면서도 적은 반동을 이뤄낼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이 소총은 미 육군 차기 소총 선발에 제출되었고, 미 육군은 이 소총에 높은 평가를 하였고, '지금껏 본 소총들 중 최고의 소총'이라는 찬사까지 하였다.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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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육군의 사격 테스트 중, AR-10의 '''총열이 완전히 찢어져 터져버리는''' 사건이 일어난다. 사실 그들은 총열을 만들 때 에어소프트건과 비슷하게 총열 바깥쪽은 알루미늄 합금, 강선이 포함된 안쪽은 스테인레스 재질을 사용하여 가벼우면서도 튼튼한 총열을 완성할 수 있다는 이론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예상과 달리 총열이 버텨 주질 못해 완전히 터져 버렸고, 미 육군에서는 AR-10을 탈락시킨다.[5]
그러나 페어차일드는 희망을 잃지 않고, 네덜란드의 병기 메이커인 AI[6] 사에게 생산권리를 넘기기도 하고, 세계 각 지역에 생산권을 넘기기도 한다. 여기서 중남미,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북유럽에 대해 판매권을 얻어낸 인터암즈 사의 사장인 샘 커밍즈는 "가장 발달된 형태의 군용소총."이라는 찬사도 하였다.
그러나 결국 AR-10은 벨기에의 FN FAL에게 패배한다. FAL이 무겁긴 해도 AR-10에 비해 신뢰성과 내구성, 그리고 보급에의 이점이 오히려 더 크게 작용했던 것이다.
또한 기대했던 네덜란드에서조차 FAL을 채택하고 말았다. 결국 AI사는 AR-10의 생산을 포기하고 말았다.
3.3. 그리고 인류 역사를 뒤바꿀 총기의 등장
AR-10의 흥행여부와는 별개로, 미국 내에서는 서서히 돌격소총에 대한 개념이 싹트기 시작했다. 이는 한국전쟁에서의 교훈 때문이였는데, 한국전쟁 당시 중국군의 인해전술은 당시 미군의 제식소총인 M1 개런드로는 당해내기가 어려웠다. M1은 우수한 소총이기는 했지만 반자동이라 연사력이 좋지 못해 머릿수로 밀어붙이는 중공군을 저지할 수 없었기 때문. 그나마 경기관총을 장비한 경우는 막아내기 수월했으나 경기관총을 모든 보병에게 쥐어줄수도 없는 상황. 따라서 적절한 연사력과 휴대성을 겸비한 돌격소총의 필요성이 대두된 것이다. 오죽하면 한국전쟁 당시 유엔군이(대한민국 국군 포함) M16같은 자동소총을 장비했다면 틀림없이 전쟁에서 이겼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왔을까? 프로젝트 샐보의 개념이 시작된 것이다. 대다수의 전투에서의 교전 거리가 300m 이하였고, 그런 교전 거리에서는 반동과 파괴력이 강한 탄을 한 발씩 쏘는 것보다는 적은 반동의 소구경탄으로 탄막을 형성해 적을 제압하자는 이론이었다. 이에 미국에서는 SPIW라는 새로운 개념의 소총을 제작하게 되었다. 이것을 아말라이트 사에서 받아들여 우리가 잘 아는 '''AR-15'''를 드디어 제작한다.
하지만 군대라는 조직은 목숨이 오가는 전쟁을 치루어야하는 사정상 언제나 과감한 모험보다는 확실하게 검증된 것을 선호할 수 밖에 없는 보수적인 조직인지라 사용 탄종도 다르고 작동법, 정비법 등 사용법이 완전히 새로운 이 소총을 채용하기를 망설였다. 결국 미군이 선택한 것은 사실상 M1을 위의 요구조건에 맞추어서 자동 사격이 가능하게 만든 물건인 M14 소총[7] 이었고, 아말라이트사는 AR-15를 만드느라 모든 저력을 다 쏟아부은 터라 더 이상 버틸 힘이 남아있지 않아 결국 '''모든 라이센스를 콜트社에게 넘겨버린다.'''[8] 이 유진 스토너는 이 결정에 실망하여 결국 아말라이트를 나간다.
3.4. 아말라이트에서의 스토너의 또 다른 작품들
AR-15가 나오고 그 권리가 콜트 사에 넘어간 이후, 스토너의 그에 대한 관심은 빠르게 식어 버렸다. 애초에 남의 회사의 물건이 되어버린 총에 연구개발할 이유를 못 느꼈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관심은 철판 프레스를 이용한 소총의 개발로 기울어졌다. 그 이유는 AR-15는 알루미늄 합금의 정밀 주조 기법은 당시로서는 첨단의 기술이어서, 수많은 아시아 국가들이 프레스 생산을 통해 쉬운 생산을 해 낼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3.4.1. AR-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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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15를 보낸 스토너는 동료인 아서 밀러와 다시 7.62mm 탄환을 쓰는 총기인 AR-16을 개발한다. 이 소총은 종래의 개발 소총과는 달리 더 단순한 방식의 가스피스톤 방식을 이용했다. 그 이유는 실용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자신의 가스 튜브 작동방식인 가스 직동식 방식의 권리가 콜트 사로 넘어갔기 때문에 이를 따라해 만들 수 없었던 법적 이유 때문이었다.[9][10]
이 소총은 철판 프레스 방식으로 만들어져 제작이 간단했고, 개머리판을 접을 수 있어서 전차나 차량 승무원들이 가지고 다니기 좋았다. 그러나 총이 지나치게 작아 화염과 반동이 심하였다. 그들은 이 소총을 미 육군 전차 사령부에 제출했지만 그 곳에선 2차 대전에 사용된 M3 기관단총을 그대로 사용하기로 한다.
5.56mm 탄환의 화기와 미군에서 구매했던 AR-15가 콜트 사에서 M16으로 한 단계 더 발전하고 있는 판국에 반동이 강한 7.62mm 소총이 주목받을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3.4.2. AR-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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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16 이후 아말라이트 사에서는 AR-18을 제작한다.[11] 다만 이 때에는 스토너는 아말라이트 사를 퇴사하였고 남은 스탭들이 이 소총을 제작한다. 이미 제 3세계 등 다른 나라에서는 FN FAL 등을 사용하고 있었으니 열심히 미 육군에 판촉 활동을 벌였다.[12] 그러나 미 육군은 XM16E1을 잘 사용하고 있는데 또 다른 소총을 사용할 이유는 없었다. 물론 개머리판이 접히는 등의 휴대성 등의 이점이 있긴 했지만, 굳이 새로운 소총을 도입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5.56mm 소총은 사용하고 싶어도 제작 기술과 구매 자본이 부족해 사용하지 못하는 나라에 이 소총의 제작 기술이나 소총 자체를 팔기로 했다. 그래서 그들은 일본의 호와 공업에 생산권을 팔기로 했고, 호와 공업에서는 이것을 생산하여 치안이 취악한 동남아시아의 경찰용으로 팔기 시작했고, 미국 민수용인 AR-180도 슬슬 성장의 가도가 열리는 듯 했다.
그러나 하필이면 IRA에서 미국을 통해 북아일랜드로 AR-180을 밀반입한 뒤 테러에 사용하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호와 공업은 결국 AR-18, AR-18의 생산/수출을 중단한다. 그래도 1974년 영국의 스털링 사에 생산권이 옮겨져 생산이 되지만, 그다지 큰 성공을 거두진 못한다. 그렇지만 영국은 이를 통해 소총의 개발 노하우를 알게 되었고, SA80을 제작할 수 있게 된다.
여담이지만 슈타이어 암즈 사의 AUG, 호와 공업의 89식 소총 등은 AR-18의 작동방식인 쇼트 스트로크 가스 피스톤 방식 기초로 한 것이다.
자세한 설명은 AR-18에서도 되어 있으니 그 쪽을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4. 아말라이트 퇴사 이후
스토너가 AR-16을 만들고 나서, 그는 아말라이트를 퇴사한다. 그렇지만 그에게는 'M16 제작자'타이틀 덕에 다른 총기 메이커들이 그를 영입하고 싶어했다.
4.1. 캐딜락 게이지에서
그리고 유진 스토너는 자동차 메이커인 제너럴 모터스의 자회사인 캐딜락 게이지 사에 영입된다. 원래 이 회사는 장갑차나 자동차의 부품을 만드는 회사였는데 총기 업계에 뛰어들고 싶어했다. 그들은 얼른 스토너를 영입했고, 새로운 총기 제작에 돌입한다.
4.1.1. 모듈화 화기 스토너 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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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쪽의 총은 스토너 63의 분대지원화기 버전, 아랫쪽은 그 이전의 7.62mm탄을 사용하는 스토너 62.
그가 캐딜락 게이지에서 처음 만든 총은 7.62mm탄을 사용하는 스토너 62(Stoner 62)였다. 그렇지만 이미 대세는 5.56mm 탄환으로 기울어진 것을 안 그는 5.56mm 탄을 사용하는 스토너 63(Stoner 63)을 만든다. 이 소총은 AR-18의 프레스 가공과 가스 피스톤식의 작동방식을 채택했지만, 쇼트 스트로크 가스 피스톤 방식이 아닌 AK 계열과 유사한 롱 스트로크 가스 피스톤 방식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스토너 63의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시스템 모듈화'방식이었다. 하나의 몸체로 총열이나 거치대 등 일부의 부품만 바꿔주면 카빈, 일반형 소총, 기관총, 거치식 기관총 등 다양한 모델로 변형 가능한 획기적인 구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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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너 63(Stoner 63)의 다양한 형태들.
이 총에 대해 미 해병대에서는 이 총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었으나 결국 높은 비용 문제와 부품 호환 등의 이유로 어쩔 수 없이 포기하게 된다.
결국 네이비 씰에서 Mk.23이란 이름으로 스토너 63의 경기관총 버젼을 사용했지만, 소총이 베이스였기 때문에 다소 한계가 있었다. 결국 베트남 전쟁 이후 캐딜락 게이지는 이것을 차기 분대지원화기로 채택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알다시피 미 육군에선 FN 미니미를 M249로 채택했다. 결국 스토너 63은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역사 속으로 조용히 사라졌다.
더 자세한 것은 스토너 63 항목 참고.
4.2. ARES 사에서
그는 M63 시리즈가 실패한 뒤에도 총기나 무기 설계를 계속하였다. 그는 TRW사에서 25mm 기관포를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ARES 사에서 가방형태로 들고다닐 수 있는 FMG 기관단총을 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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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M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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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 맥풀에서 만든 유사한 총인 FMG-9. 내부에는 글록 18C가 들어간다.
4.3. 나이츠 아마먼트와의 만남
이렇게 많은 총을 만든 그이지만, 그가 제작설계한 것의 거의 대다수는 군에 채용되거나 대량생산되지 못한 채 끝났다. 아이러니한 것은 가장 성공했던 M16조차 그가 좋아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7.62mm의 강한 탄을 사용하는 자동소총을 만들고 싶다는 것을 항상 말했다.[13]
이런 그를 알아본 나이츠 아마먼트(knight Armament, KAC)사의 사장인 리드 나이트와 새로이 관계를 맺게 되었다. 리드 나이트 주니어(Reed Knight Jr.)는 젊었을 때부터 총기류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나름대로 재능 또한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재력이 총기를 제작하는 데 제약을 없게 해 주기도 하였다. 그는 일찍이 M16을 발명한 유진 스토너를 존경했다. 그는 KAC 사를 설립했고 피카티니 레일 시스템을 만들어 어느 정도의 자리를 잡고 그는 스토너를 찾아가 새로운 소총을 개발하고자 했다. 이 둘의 바람은 과거의 AR-10을 부활시키자는 것이었다.
4.3.1. AR-10의 부활, 유진 스토너의 유작 KAC SR-25
물론 그 당시의 AR-10을 그대로 내놓을 수는 없었다. 시대가 많이 변했고 그 상태 그대로 내놓았다가는 실패할 것이 뻔했으므로, 그들은 그 동안 변화된 상황을 감안해 새로운 형태의 AR-10을 만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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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C SR-25의 첫번째 모델인 매치(경기)용 버전.
그들은 7.62mm 탄을 사용하는 반자동의 저격 소총을 만들기로 하였다. 저격 소총이야 7.62mm에 대한 수요가 아직은 있었고, 그래서 나온 것이 KAC SR-25이다. SR은 스토너의 소총(Stoner's Rifle)의 약자[14] 이고 25는 AR-10과 AR-15의 숫자를 합친 것이었다. AR-10을 기초로 했지만 호환되는 부품은 탄창뿐이며,[15][16] 나머지는 거의 새롭게 만들다시피하여 격발기구는 최대한 M16 시리즈와 기본적인 부품이 호환되게끔 했다.[17] 또한 반자동 저격총 치고는 1MOA[18] 이 되는 명중율을 발휘할 수 있었는데, 그 이유는 AR-10에서 사용된 가스 직동식 방식이 가스 피스톤 계열보다 반동이 적고, 총열과 가스 튜브 등의 부품이 다른 곳에 최대한 닿지 안는 구조 즉, 프리플로팅 배럴이기 때문이다.
결국 반자동 저격 소총을 원하던 미 해군 네이비 씰이 '''드디어''' 이 소총을 채택하게 되고, 2000년, 개량형인 Mk.11 Mod.0를 드디어 채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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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10(어찌 보면)의 첫 미군용 제식 모델인 Mk.11 Mod.0. 드디어 스토너의 소총은 40여년이 지나서야 제식으로 채택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그것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다.
이 소총은 프리플로팅 배럴 주변의 4방향 레일, 그리고 QD(Quick Detachment)타입 소음기와 루폴드 사의 스코프와 양각대 등 부속 장비들을 하나의 세트로 묶어 씰팀에 납품하였다. 결국 AR-10은 명칭과 제원과 스펙이 많이 바뀌긴 했지만 드디어 40년만에 미군에 제식으로 채택되지만 1997년, 스토너는 이미 암으로 세상을 떠난 뒤였다. 말년에는 시력까지 약해졌지만, 엔지니어들과 계속적인 총기를 설계하기까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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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k.11 Mod.0를 사격하는 미 해병대 제 4 MEB 지휘관인 더글러스 오델 소장.
그렇지만 SR-25의 생산량은 그렇게 많은 수준이 아니었다.[19] 그도 그럴 것이, 민수용 위주의 판매보다는 군-경용이나 특수부대 등의 수요에 맞추에 제작(mil spec)되었기 때문이고, 좋은 정밀도와 내구성만큼 가격이 만만치 않았기에 민수 시장에서의 한계가 있을 수밖에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2007년, SR-25는 미 육군의 제식 저격총으로 선정된다. 테러와의 전쟁 이후, 저격수의 교전 거리가 상대적으로 짧아지면서(이라크에서의 시가전 영향) 신속한 연사 능력을 가진 저격 소총이 필요했기 때문에 반자동 저격 소총의 수요가 높아진 것이다. 그래서 KAC는 Mk.11 Mod.0을 베이스로 육군의 요구에 맞게 개량을 했고, 그 결과가 M110 SASS(Semi-Auto Sniper System)이다. 후에 미 해병대에도 이 사양에 맞춘 MK.11 Mod.1을 제공한다.
비록 스토너는 이 광경을 보지 못하고 결국 세상을 떠나게 되었지만 그의 족적은 이 세상에 고스란히 남아 있게 되었고 그가 발명한 총들은 비록 제식에 선정되지 않았지만 다른 국가의 총들에 고스란히 전해져 어찌 보면 그의 소총을 바탕으로 많은 소총이 제작된 셈이다.
5. 그 이후
스토너가 사망한 해인 1997년, 그는 죽기 직전 자신의 소총의 라이벌이라고도 할 수 있는 AK-47의 개발자 미하일 칼라시니코프가 있는 러시아로 간다. 여기서 그들은 서로의 소총을 들어 보이며 서로 미소지었다.[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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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명적 라이벌인 AK-47과 M16의 발명가의 서로의 만남. 여기서 스토너는 AKM을 들고 있고, 칼라시니코프는 M16A2를 들고 있다.
사실 1990년에도 이미 칼라시니코프가 미국을 방문하여 두 사람이 만나 서로 각자가 설계한 두 총을 시험사격한 적이 있었다. 이때 스토너가 "베트남에서는 당신의 승리였습니다"라고 AK의 내구성을 극찬했으며, 동시에 칼라시니코프가 받은 훈장에 대해서도 부러워했다.[21]
비록 살아서 그의 손 안에서 빛을 본 작품은 하나도 없었지만, 그가 개발한 AR-15의 특허권은 아직 전적으로 그의 소유였기 때문에 특허가 효력을 발휘할 때까지는 M16의 로열티를 받기도 하였다. 그리고 알다시피 M16은 자유세계를 대표한다고 불릴 정도로 아주 크게 성공한 소총이라서 그가 받는 로열티는 엄청난 수준이었고 경제적으로 매우 부유하게 살았다.[22]
여담으로, 스토너와 칼라시니코프는 자신들이 설계한 총기들이 가진 상반된 이미지만큼이나 정반대의 삶을 살아온 것으로도 유명하다. 칼라시니코프는 그의 총기 대부분이 그가 살아있을 적에 빛을 보았고 자신이 설계한 총기를 통해서 사회적인 명망이나 명예 또한 남부럽지 않게 얻었지만, 정작 본인에게 특허권 같은게 일절 없어서 로열티 같은 것은 받지 못했으므로 자신의 총기를 통해 딱히 부를 얻지는 못했다. 반면 스토너의 경우 그의 총기 대부분은 그의 사망 이후에나 빛을 보았고 자신이 설계한 총기를 통해서 사회적인 명망이나 명예를 얻지도 못했으나, AR-15의 대성공으로 인해 상당한 부를 얻을 수 있었다. 다만 칼라시니코프가 AK를 통해 직접 돈을 벌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소련과 러시아 정부가 그 성과와 노력을 인정하여 여러가지 사회적 혜택과 우대를 제공했기에 평생 경제적으로 크게 어려운 점 없이 살았으며[23] , 스토너 또한 공식적으로 훈장을 수훈하거나 하진 않았으나 그의 발명품들이 후대의 총기에 많은 영향을 주어 최종적으로는 총기의 역사에서 결코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인물이라는 명예를 얻었다. 정 반대의 삶을 살아온 두 거장의 인생이 결국 끝에 가서 동일한 결과로 마무리되었으니 어떻게 보면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1997년 4월 24일 향년 74세, 암으로 인해 별세하셨다. 버지니아 주 콴티코에 있는 "콴티코 국립묘지(Quantico National Cemetary)"에 안장되셨다.
[1] 여기서 AR이란 ArmaLite Rifle의 약자이다.[2] 이 총은 007 위기일발에서도 나오는 총으로, 본드가 이걸 조립해서 헬기에 탄 조종사를 사살하는 데 쓰인다.[3] 존슨 소총의 개발자인 멜빈 존슨이 고문으로 직접 제작에 참여했다.[4] 사진은 미 육군 테스트 버전인 AR-10B이다.[5] 사실 이 때 당시에 좋다고 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나무와 쇠로 된 총만을 써 온 병사들의 눈으로는 'SF 영화에 나오는 총' 같은 느낌을 주었고, 파열 사건이 발생하자 완전히 눈을 돌렸다.[6] Artillerie-Inrichitingen으로, 영국의 그것과는 다르다.[7]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간략하게 압축해서 표현한 것으로 M14가 단순히 M1을 자동사격만 가능하게 만든건 아니다. 하지만 둘 다 스프링필드社 제품으로 스프링필드에서 M1의 노하우를 통해 M14를 만든건 사실이고 때문에 사용 탄종도 거의 동일하며 사용법도 매우 유사했다. 오랜 친구인 개런드를 포기하고 싶지는 않고, 자동사격은 넣어야겠고, 이 두마리의 토끼를 모두 노리던 미군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안성맞춤이였던 것.[8] 이후 콜트에서 생산된 AR-15의 개량형이 '''미군의 제식소총'''으로 채택된다. 이것이 바로 '''M16 소총'''.[9] 이는 AR-18까지 적용되었고 더 나아가 탄창까지도 적용되어서 훗날 NATO에 의해 STANAG 4179라는 규격으로 채택될 AR-15의 탄창을 쓸 수가 없고 AR-15와 거의 비슷한 새로운 전용탄창을 만들어야 했었다. 하지만 가스 피스톤 방식은 직동식에 비해 월등한 내구성과 훗날에는 명중률까지 높여서 슈타이어 AUG, FN FNC등에도 영향을 끼쳤고 결국 이 작동방식은 총기설계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10] 심지어 AR-15 계열의 HK416도 가스피스톤 방식인 쇼트 스트로크 가스 피스톤 방식을 사용해 히트를 첬다.[11] AR-17은 반자동 산탄총으로서 프로토타입만 몇 자루 생산되었다. 산탄총의 모습은 이렇게 생겼다.[12] 이 때는 1964년으로, 아직 M16(당시에는 XM16E1)은 대량으로 판매만 되었을 뿐, 제식으로 채용되진 않았다.[13] 상위 항목의 AR-16이나 M62만 봐도 그렇고, AR-15를 제작하는 과정에서도 그렇게 열정을 쏟지는 않았다.[14] 현재 일부 제품을 제외한 KAC의 제품명은 이 SR을 돌림자 마냥 붙이고 있다. SR-25 개발 이후인지 아니면 스토너 사후부터 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를 기리기 위함임은 확실하다.[15] 오리지널 AR-10의 탄창은 수집용으로 가치가 있다. 즉, 실용적으로 사용하기에는 무리이고 단순히 '''수집용'''이다.[16] 다만 일단 권총 손잡이는 상호호환이 가능한 걸로 확인되었다. #[17] 전체적으로 약 60% 가량의 부품이 M16A2와 호환된다.[18] 즉, 100야드에서 1인치 이하의 탄착군을 기록한다는 뜻으로 대표적인 탄착군 단위이다.[19] 1993년부터 2003년까지 4000정을 조금 넘는 수준이다;[20] 칼라시니코프는 "M16은 나의 AK에는 없는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라고 평가하였다.[21] 이는 유진 스토너는 생전에 부유하긴 했지만 훈장 같이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만한 상을 수여받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여담으로 미국에 방문하고 워싱턴에도 들른 칼라시니코프는 "미국 대통령의 관저가 이렇게 작을리가 없다"면서 백악관에 대한 평도 남겼다.[22] 어느 정도였냐면 개인 활주로에 비행기까지 띄울 정도 였다. 반대로 소련에는 특허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칼라시니코프는 AK에 대한 로열티를 일절 받지 못했다.[23] 그밖에 개인적으로 사업수완이 좋아서 자신의 이름을 건 보드카 사업으로 크게 성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