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하일 칼라시니코프

 


'''Михаил Калашников'''.
1919년 11월 10일 ~ 2013년 12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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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계판 앞의 젊은 칼라시니코프 하사
훈장을 가슴에 단 노년의 칼라시니코프 기술 중장[1]
1. 개요
2. 생애
2.1. 어린 시절
2.2. 입대
2.3. 총기 개발자의 삶
2.4. 사망
3. 총기 관련 입장
4. 설계 총기
5. 기타


1. 개요


풀네임은 미하일 티모페예비치 칼라시니코프(Михаил Тимофеевич Калашников).[2]
소련, 러시아의 군인이자 무기 설계자로 돌격소총 '''AK-47''', '''AKM''', '''AK-74'''를 개발[3]한 것으로 유명하다. M16 소총을 개발한 유진 스토너와 함께 현대의 돌격소총의 양대 산맥을 구축한 인물. 그밖에 RPK 분대지원화기, PK 기관총 등 다양한 명작 총기를 개발 했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부농집안 가정에서 19명의 자녀 중 17째로 태어났는데[4] 8명만 살아 남았다.[5] 어머니 알렉산드라는 100살 넘게 생존했지만, 아버지 티모페이는 이오시프 스탈린이 시행하고 있는 농업집단화에 앞서 부농에 대한 숙청이 이뤄질 때라서 시베리아로 추방되었다가 사망했다. 이렇게 보면 아버지를 앗아간 소련체제에 반감을 가질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라시니코프는 생애를 통틀어 소련-러시아에 충성을 바쳤다. 왜냐면 시베리아로 가족 전체가 추방되었는데다 미하일 칼라시니코프는 추방당한 그 시베리아 알타이 지방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6]
칼라시니코프 부부 입장에서는 상실감과 고향에 대한 향수가 있어서 정부에 반감을 가졌을 수도 있지만 애초에 미하일 칼라시니코프는 시베리아에서 태어나고 자랐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그런걸 체감하기 어려웠을 것이고 그 여파로 체제에 대한 반감도 커질 이유가 없었다. 당장 시베리아에서 자라면서 소련정부가 칼라시니코프 가문의 출세길을 막거나 교육을 제한한다던가, 추방된 가족이라고 구타한다던지 등의 불이익[7]을 주는 경우도 없었고 주변 친구들도 어차피 그만한 가족사정재산 수준도 비슷해서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환경도 아니였다. 다만 소련체계 붕괴 후 미하일 칼라시니코프의 회상을 들어보면 자신은 시베리아 알타이에서 태어나 겨울에도 힘든 걸 잘 몰랐지만 칼라시니코프의 부모는 원래 따뜻한 지역인 흑해 지역 크라스노다르 출신이라서 영하 40도 까지 떨어지는 시베리아의 겨울만 되면 괴로워했다고 증언한 바 있다.
어린시절 그는 어떤것도 잘 하지 못했다고 한다. 알타이강에서 수영을 배우다 빠져죽을 뻔 하고 얼어붙은 알타이강에서 스키를 배우다가 얼음구멍에 빠지는 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알타이 지방 출신 중에서 자신만 수영과 스키를 못탈꺼라고 한탄하기도 했다. 아버지의 대를 이어 농사 짓는 걸 배워보았지만, 이번에도 낫을 다루다 손을 크게 다칠 만큼[8] 농사에도 재능이 없었다.
그가 유일하게 관심을 가진 것은 기계였다. 기계가 동작하는 모습이 신기해서 그 원리를 알고자 노력했다고 한다. 농촌이라 기계가 귀했기 때문에 주변의 기계를 몰래 가져와 분해하고 다시 조립하곤 했다. 칼라시니코프를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손재주가 뛰어나 동내에 모든 자물쇠를 분해하고 다녔기 때문이다. 하루는 아버지 티모페이 몰래 그 당시 귀하던 시계를 분해했는데, 다시 조립해 봤더니 작동하지 않아서 아버지에게 크게 혼났다고 한다.
칼라시니코프가 14세가 되던 해에 동급생 가브릴이 주운 녹이 쓸어 작동하지 않는 존 브라우닝7.62mm 권총과 안에 들어있는 총알 6발을 받았는데, 그는 아버지 몰래[9] 총을 분해해서 녹을 벗겼다. 당시 '''사포도 구하기 힘든 시골이라서 진짜 모래와 진흙을 가지고 정성스럽게 녹을 제거했고, 이 작업은 거의 한달'''이 소요됐다고 한다. 드디어 총기가 말끔해지자 윤활유[10]를 바르고 재 조립을 했다. 총기가 정상작동하자 그는 세상을 다 가진양 기뻐했고 아직도 그 무쇠와 기름냄새가 잊혀지지 않는다고 회고 했다. 밖으로 나가 알타이 강가에서 시험사격을 했고 4발 모두 정상적으로 발사 되었다.
하루는 그의 친척 여자아이가 집에 놀러왔는데, 그가 브라우닝 권총을 애지중지 어루만지는걸 보고 아직도 어린애 처럼 장난감을 가지고 논다고 놀렸다. 칼라시니코프는 문답무용 총을 발사했는데 하필 거기에 총알이 들어있는 바람에 옷장에 구멍을 냈다.(...) 총소리를 신고받은 경찰이 칼라시니코프를 신문했으나 시치미를 땠고, 총기를 찾지못한 경찰은 결국 무혐의로 결론내리고 돌아갔다. 그러나 그날 미하일은 아버지 티모페이에게 또 죽도록 혼이 나고 권총도 압수당했다고 한다.
이 권총이 그대로 남아있었으면, 브라우닝 박물관이나 칼라시니코프 박물관에 보관 될 만큼 귀한 총기였겠지만 이 압수당한 총기는 결국 분해돼서 길거리에 버렸다고 한다.

2.2. 입대


칼라시니코프는 이처럼 성장하면서 공학에 재능을 싹틔우기 시작했고 1936년 5년제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기계 다루던 실력이 뛰어나 알마티에 위치한 시베리아 철도 기관실 기술부에 취직하였다. 이후 시베리아 철도에서 철도공으로 기관차 수리하는 일을 하는 한편, 틈틈이 취미로 총기를 분해하고 조립하곤 했다. 그는 여기서 피스톤 구조를 매우 좋아했는데, 훗날 총기 설계에도 이런 피스톤 방식 즉 가스 작동식 구조에 반영했다고 한다.
그 후 상관의 추천으로 1938년 18살 나이로 소련군에 입대하였고 신장이 162cm로 작은 편이여서 전차병으로 근무했다. 이때도 기계의 설계, 제작에 재능을 보여 전차포의 발사탄수 계측기를 개발하기도 했고, 이 공로로 게오르기 주코프에게 손목시계를 표창으로 받았다. 이때가 20세였을 때였고 계급은 중사가 되었다.
1941년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여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키예프 사단 소속 T-34를 몰고 전차장으로 참전, 실패로 끝난 브리얀스크 반격전에서 그는 주변에 독일군 전차 위치를 보기 위해 해치 위로 몸을 내밀었는데, 독일군 전차에 포탑이 피격되면서, 어께 견갑골에 파편이 박혔고 팔을 쓸 수 없는 중상을 입어 후방으로 후송되었다.
20명의 부상병과 트럭에 실려서 후방으로 후송되는 중 매복한 독일군의 습격을 받았다. 소련 경비병들은 모신나강으로 무장했으나 매복에 걸린거라 전투는 근접전이였고, 볼트액션식의 모신나강을 든 소련군들은 뛰어난 연사력과 휴대가 편한 MP40로 무장한 독일군에게 순식간에 제압되었다. 싸움에 가망이 없자 부상병을 두고 도망갔는데, 부상병들을 두고 도망갈 수 밖에 없는 소대장은 패주하면서, 분한 마음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MP40이다! 누가 저런 무기 좀 만들어 주었으면..." 하면서 한탄했다. 이것을 들은 칼라시니코프가 AK 개발을 결심하게 된 요인들 중 하나였다고 한다. 결국 당시 후송되던 부상병들 중 살아남은 것은 어깨를 다쳐 뛰어서 도망갈 수라도 있었던 칼라시니코프 뿐이었다.
살아남은 경비병들과 무사히 도망갈 수 있었던 칼라시니코프는 요양 중 독일군의 MP40에 대응할 총기의 개발을 결심하며 총기 설계자의 길을 걷게 된다.[11] 그는 간호사에게 연필과 공책을 빌려, 총기를 설계하기 시작했다. 당시 칼라시니코프는 어릴적 만져본 브라우닝 권총 외에는 총에 문외한이여서, 상당히 힘들었다고 한다. 다행이 칼라시니코프가 머물던 병원은 도서관을 긴급하게 야전병원으로 개조한곳이라 기계공학 관련 기본서가 충실하게 있었고, 후방지역이라 참고할 만한 '''미국제''' 총기가 지천에 널려있었다. 이 때문에 칼라시니코프는 기존 러시아제 총기에 비해 미국 총기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전통적으로 러시아 총기는 지리적으로 유럽에 위치해 있어 당연히 유럽계 총기 설계를 많이 따라갔는데[12] AK-47 항목에 보듯 칼라시니코프의 총기는 미국색을 강하게 띄었다. 그의 최초의 총기도 톰슨 기관단총을 강하게 참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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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PK-42'''

칼라시니코프 사의 PPK-42 소개 영상
설계를 끝낸 칼라시니코프는 1942년 4월 퇴원하게 되었다. 마침 상부에서 집에서 대기하면서 휴양하라는 명령이 내려진다. 하지만 그는 집으로 가라는 명령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총을 완성시키기 위해 '''탈영'''해서 원래 자신이 근무하던 알마티의 시베리아 철도 기술부로 갔다.[13] 온갖 고생 끝에 1942년 중순에 그의 첫 총기인 PPK-42 기관단총을 완성하여 PPSh-41의 후속 기관단총 사업에 제출했다. 하지만 결함이 많은 데다, 생산성, 내구성 등 많은 면에서 소련군을 만족시킨 시모노프의 PPS-42가 채용되면서 그의 첫 작은 좌절되었다. 당시 시모노프[14], 수다예프[15] 등은 그의 총기를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총기 설계의 재능을 인정한 표도르 토카레프의 천거로 러시아 아카데미 정회원이 되었으며, 툴라 조병창으로 배치되어 총기 개발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그의 나이 23세에 일이였다.

2.3. 총기 개발자의 삶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소련군은 대전 말기 독일군의 신무기 StG44에 깊은 인상을 받아 그와 비슷한 신형 무기를 장차 소련군 주력 개인화기로 삼을 계획을 세웠는데, 마침 서방 국가들도 돌격소총 개발에 들어갔다는 첩보가 들어오자 소련 정부는 빨리 돌격소총을 완성하라고 닥달했다. 툴라 조병창에서는 10명의 설계자의 시제품 중 가장 우수한 3개 후보를 뽑고 이 3개의 총기를 테스트해서 가장 우수한 후보를 정식으로 양산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10명의 설계자 중 칼라시니코프만 유일하게 고졸이였고 23세의 어린 나이였다.
그는 후보군에 들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다. 당시 돌격소총 개발의 큰 난제는 총기 걸림의 최소화였다. 그는 탄피가 짧은 7.62×39mm를 선택했는데, 탄피가 짧으면 약실에서 탄피가 빠져나올때 잘 걸리지 않아 신뢰성이 높아진다. 어찌어찌 최종 3개 후보군에 들긴 했는데, 칼라시니코프는 다른 후보군과 차별화를 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단순하지만 확실하게 발사되는 총을 만들길 원했다.
경쟁상대 중 하나였던 토카레프는 시간 날 때 마다 말버릇처럼 구동부에 모기 주둥아리라도 들어가면 안된다고 고함을 치면서 정밀함을 중시했다. 하지만 칼라시니코프는 반대로 생각했다. 가능하면 구동부에 여유를 두자는게 그의 생각이였다. 그는 가스 실린더와 피스톤, 볼트와 공이 틈새를 무려 '''0.3 mm'''로 설정했는데, 총기 같이 정밀한 부품에서 이 정도 틈과 오차는 그 당시에도 충격적인 수준이였다.[16] 그리고 병사들이 쉽게 분해할 수 있도록 그리고 고장을 최소화 하기 위해서 움직이거나 분해되는 부품을 8개로 줄였다. 또한 야전에서 분해 할 때 나사도 필요 없이 탄피로 분해가 되게 설계했는데 이 부분은 독일제 총기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또한 약실에 이물질이 들어가도 노리쇠가 이를 밀어낼 수 있도록 노리쇠를 무겁게 했다.[17] 덕분에 주퇴 반복이 길어서 적당한 발사속도를 가지며[18], 탄피가 빠져나가는 동안 약실을 충분히 식힐 시간을 주었고, 이물질이 좀 들어가도 노리쇠가 이를 밀어서 총 밖으로 보내 버릴 수 있었다.
이렇게 완성된 AK-47 프로토타입은 1946년도에 출시된 설계안 3개들 중 하나로 뽑혔으며, 연사 테스트에서 다른 설계자들의 2개의 후보 총기가 모두 탄이 걸리거나 폭발하는 등 결함을 보이고 칼라시니코프가 설계한 소총이 유일하게 테스트를 통과해 가장 우수한 평가를 받아 소련군 제식소총으로 1947년 채택되어 AK-47이라고 명명되었다.

테스트 당시를 재현한 영화 '칼라시니코프'[19]의 모습[20]
그는 이 소식을 1948년 1월에 들었는데 아들을 대학 보낸 것 처럼 기뻤다고 한다. 그의 나이 28세 때 일이였다.
이 공로로 그는 1949년 스탈린 훈장을 수여받고, 1951년에 육군 상사로 군을 전역한 후에도 이젭스크 조병창의 주임 설계관으로 일하면서 AK-47의 개량형 소총 AKM, AK-47을 베이스로 한 RPK 분대지원화기, PK 다목적 기관총 등 소련군의 주력 총기들을 설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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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K-47 프로토타입을 들고 있는 미하일 칼라시니코프
이러한 공적으로 사회주의노력영웅 칭호 2회, 레닌훈장을 수훈했다. 1969년에는 육군 대령 계급이 수여되었다. 1971년에는 비록 대학을 다니지는 못했으나 그의 공로를 인정받아 공학박사 학위가 수여되었다. 소련이 붕괴되고 러시아 체제가 수립된 후에도 이젭스크 조병창이 민영화된 이즈마쉬사의 주임 설계관으로 재직하였다.[21]
1994년, 75세 생일 축하 선물로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으로부터 종신 육군 기술[22] 중장계급을 수여받았다. 러시아군의 정년은 60세이므로, 칼라시니코프는 사실상 '''최고령 러시아군 장군'''인 셈이다. 2009년 11월 10일 러시아 대통령 드미트리 메드베데프는 칼라시니코프에게 러시아 영웅 칭호를 수여했다.
그의 아들도 그의 뒤를 이어 총기 설계에 종사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칼라시니코프의 아들인 빅토르 칼라시니코프는 1993~1995년에 드라구노프와 같이 PP-19 비존 기관단총을 개발해냈다. 그리고 이 기관단총은 러시아군 내에서 잘 쓰이게 될 정도로 유명해졌다.
AK-47 개발 이후 30살에 이젭스크로 이사 와서 평생 살았는데, 1977년 아내 예카테리나와 사별한 후 1975년에 지어진 아파트에서 손자 이고르 칼라시니코프와 함께 살았다. 30평 가량의 이 아파트는 처음 지어질 때에는 당 간부들이 살았던 고급 아파트였으나 2000년대 기준으로는 낡아서 엘리베이터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90살 나이임에도 계단을 오르내리며, 출퇴근을 했다. 대신 회사에서 고용한 메이드가 하루에 한번씩 방문해 청소해 줘서 집안은 남자 2명이 사는 집 치고는 항상 깨끗하게 유지되었다고 한다.
AR-15를 개발해 그 로열티만으로 재벌이 된 미국의 유진 스토너와 달리[23] 갑부가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한때 알려졌던 것처럼 가난하게 살았던 것은 아니었다.
소련 시절에 이미 공장 노동자의 4배나 되는 월급을 받았으며[24] 배급에서 우선순위에 놓여져 있었고 정든 아파트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었으며 여름에는 별장으로 놀러갈 정도였다. 월급은 본봉 400달러에 기타 수당들이 붙으면 800달러 정도인데 사실 당시 소련의 급여수준이 200루블인점을 감안하면 꽤 풍족하게 살았고, 일반노동자들이 낮은 임금에도 수중에 돈이 많이 남아돌았던 시절인 만큼(...) 칼라시니코프도 금전적으로 크게 부족한 없이 살았다. 또한 소련 붕괴 후 자본주의 사회가 되면서 AK-47(보드카)나 자신의 이름을 딴 손목시계# 등으로 꽤 큰 수익을 올리기는 했다. 하지만 여전히 자신의 아파트에서 손자들을 불러서 냉동식품을 데워먹거나 자신이 직접 사냥한 사슴뼈로 우려낸 사골국 콩소메에 편의점에서 사온 펠메니, 피로시키 등을 넣어 만든 만두국을 저녁으로 먹으며 올리가르히같은 부유층에 비하면 평범하고 소탈하게 살았다. 일본 기자와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은 늙었기 때문에 이 정도면 족하다고 밝혔다. 아무래도 성격 자체가 물욕은 크게 없어서 몸만 편하면 그 정도 생활 수준에 만족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기서 '풍족하게 살았다'는 어폐가 있다. 북한 고위 당원이 먹을 것 걱정없이 평양에 살면서 북한산 싸구려 휴대폰을 들고 소련제 라다자동차를 타고 다녀도, 월급은 남한의 편돌이보다 적고, 먹고 사고 입는 물건의 질도 떨어지는 것처럼, 어디까지나 소련 내에서 의식주 걱정 없이 살았다는 거지, 그의 월급으로는 외국에서 정상적인 물품을 살 수 없었다. 실재로 소련 말기 개방정책에 따라 스미소니언 재단과 버지니아 총기수집협회의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했을 때 칼라시니코프는 자신의 월급으로는 미국산 구두하나 못산다는 사실을 알게되자 좌절했다.[25] 세계 평균 소득 이상으로 넉넉하게 살게 된 것은 소련이 망하고 자본주의 러시아 연방이 들어서고 나서 정상적인 환율의 연금과 월급을 받게 되고 나서였다.
대신 공로도 제대로 인정받아 많은 훈장을 수여받았다. 1990년에 미국을 방문해[26] 유진 스토너와 만난 뒤에 한 인터뷰에서, 자기는 개인용 비행기나 헬기는 없고 AK 소총으로는 한푼도 못벌었지만 훈장은 많이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스토너가 자신이 받은 훈장들을 부러운 듯이 봤다고 말했다. 유진 스토너는 생애 많은 돈을 벌어서 매우 부유하게 살았지만 훈장과 같이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만한 상을 수여 받은 적은 없었다. 또한 발명한 총기의 사회적인 인식을 비교하자면 AK 시리즈와 PK, RPK 기관총은 소련군에 제식으로 채용되는 과정에서 큰 어려움이 없었으나 스토너의 AR-15는 미군에 제식 채용되기까지의 과정이 상당한 험난한 편이었다. 적어도 사회적 명망이나 명예에 있어서는 칼라시니코프가 유진 스토너를 부러워할 이유가 없었다. 그가 평생 살았던 이젭스크에서는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어서 그가 지나가면 항상 반갑게 인사하고 함께 기념 사진을 찍어주길 부탁했는데, 그때 마다 귀찮은 기색 없이 항상 사진을 찍어줬다고 한다.
더욱이 칼라시니코프 소총은 소련이 라이센스를 무료로 뿌려대는 카피레프트 정신을 보여줬기 때문에 일일히 제값을 받았다면 이렇게 확산 되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불법 복제를 잡는 것과 매출의 상관관계는 불명이라는 연구에서 보듯이 무료니까 받는 사람들이 돈을 주고도 산다고는 할 수 없다. 물론 생산성과 가성비가 좋다보니 안팔릴리는 없었겠지만, 사실 지금 시중에 돌아다니는 AK의 다수는 라이센스를 무료로 받은 중국산 56식 자동소총이다. 결국 라이센스를 제대로 내는 나라는 베네수엘라 밖에 없었기 때문에 칼라시니코프 생산업체는 한 때 파산 위험에 처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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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유진 스토너와 첫 만남에서 웨스트버지니아 주의 시험 사격장에서 서로의 총기를 쏴보고, 칼라시니코프는 즉석에서 AK-47을 분해해서 스토너에게 설명해주기도 했다. 스토너는 베트남전 당시 일화를 이야기하면서 AK-47 VS M16은 AK가 이겼다고 인정 했고 칼라시니코프는 M16은 AK-47보다 아름답다고 답변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평소에 '''자신이 존경하던 유진 스토너'''가 자기를 인정해줬다는 사실에 크게 기뻐했다고 회상했다.[27]
이처럼 소련-러시아 출신 총기 설계자 답지 않게 유럽 계열 총기보다 미국 계열 총기에 영향을 크게 받았던 인물이다. 첫 총기였던 존 브라우닝의 총기를 수없이 분해하고 조립하면서 그의 총기 설계의 특징인 '단순함'과 '완결성'을 모토로 삼았다. 본격적으로 총기 설계를 배우던 시절에 참고했던 총기들도 당시 무기대여법으로 들어온 미국 총기들이였던 점도 한 몫했다. 실제 그의 AK-47은 레밍턴 모델 8과 상당히 닮았고#, 작동 구조인 가스 작동식M1 개런드와 같은 롱 스트로크 가스 피스톤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1997년에는 유진 스토너가 사망하기 직전 러시아로 와서 칼라시니코프와 다시 만났는데, 이 때 서로가 개발한 소총을 들어보는 모습이 나왔다. 사진에서 스토너는 AKM을 들고 있고, 칼라시니코프M16A2를 들고 있다.

2.4. 사망


91세라는 나이에 불구하고 저렇게 시범 사격을 보이면서 정말로 노익장 그 자체였으나, 2012년 이후로 심장이 좋지 않아 중환자실에 입원했다. 2차대전 당시 전차장으로 복무하면서 어깨에 포탄파편이 피탄되었을 때 왼쪽 가슴에도 파편이 들어갔으나 심장과 너무 가까워서 제거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평생 왼팔을 잘 쓰지 못하고 파편이 심장으로 들어갈까봐 조심했는데 이것이 도진것으로 보인다.
결국 병세가 악화되면서 2013년 12월 23일 향년 94세로 타계하였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장례식에 참석하고 러시아 애국의 상징으로 장례는 2013년 12월 26일 성대하게 치러졌다. 기사 그리고 모스크바 주 미티시 시 미티시스키 구에 위치한 "러시아 연방 현충원(Федеральное военное мемориальное кладбище, ФВМК)"에서 영면하였다.
이후 2018년 3월 27일에 그의 아들이자 역시 총기 개발자인 빅토르 칼라시니코프 역시 7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3. 총기 관련 입장


'''사내아이에겐 총은 정말 매력적인 존재다.'''

아사히 신문 인터뷰에서 어린 시절 브라우닝 권총을 수리했던 일화를 설명하면서 나온 말[28]

'''여자아이에게 총을 쥐어줄 참인가!'''

— 일본 잡지 Hobby Japan 인터뷰에서 여자아이가 총을 들고 있는 그림에 사인을 요청하자 호통을 치며 나온 말

일본 외교관련 전문가가 그와 만나서 AK-47이 전 세계적으로 퍼져 사람을 많이 죽이는 무기가 되었다는 말을 하자 언짢은 듯이 "그걸 내가 직접 퍼뜨린 게 아니며 해외에서 엄청나게 무단으로 찍어만든게 많다. 그리고 그리 따지자면 '''유진 스토너도 IRA에서 자신이 설계했던 AR-18을 써서 영국인을 쏴죽인 걸 두고 같은 질문을 듣었다면 과연 "죄송합니다." 라고 했을까? 그리고 이 총만들다가 해외로 퍼뜨려 테러에 쓰도록 기여하던 게 당신들 일본인 아닌가?[29] 그럼 일본도 테러 유발 총기를 퍼뜨린 원흉이라고 비난할 수 있다는 소리다'''."라고 대답한 적이 있다. 거기다 일본 잡지 Hobby Japan에서 출간한 <픽셀☆마리탄-소녀를 군인으로 묘사>라는 만화에 사인을 받으러 간 일본인 편집자는 '''"아이에게 총을 쥐어줄 참인가!"'''라고 하는 그의 호통을 들어야 했다는 일화도 있다. #
2002년 영국 가디언지 인터뷰에서는 "나는 조국을 지키기 위해 총을 만들었을 뿐”이라며 “정치인들이 어떻게 사용하느냐는 내 책임이 아니다"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나이를 먹으면서 생각이 좀 바뀌었는지 이전에 한 말과는 달리 그 역시 자신이 만든 무기가 악용되는 것에 대해 적지 않은 고뇌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번은 "AK 소총 개발은 파시스트 침략군에게 맞서 조국을 지키려는 소련군의 뜨거운 열정으로 시작했다. 그런데 조국을 지키기 위해 만든 내 총이 오사마 빈 라덴 같은 테러리스트들 손에 들려 있는 모습을 TV에서 볼 때면 '과연 내가 누구를 위해 무엇을 만든 것인가'라는 걸 다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AK 소총이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확산한 것은 내 잘못이 아니지만 이 소총의 발명가로서 통제하지 못 하는 상황, 즉 범죄나 학살 등으로 내가 만든 총을 사용하는 것을 보면서 무기 거래와 관련하여 국제적인 통제가 필요함을 느꼈다", "중국은 라이센스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러시아 정부나 관계자 수락 없이 AK 생산을 계속하고 있다. 이런 행위는 AK의 평가를 떨어뜨리는 장삿속이다. 개발자인 나로선 심히 불쾌하다." 같은 말을 했다고 한다. UN 개인화기 확산방지 회의, 국제사면위원회(AI)와 영국 자선단체 옥스팜이 벌이는 개인화기 확산방지 캠페인을 지지하기 위한 성명을 보낼 계획이라는 2006년 기사가 있다. 비슷한 내용이지만 각각 출처가 다르다.
죽음을 앞두고 심신이 약해지며 그의 이러한 고뇌와 불안과 후회는 극으로 달했던 듯 하다. 임종을 8개월 앞두었을 무렵 병원 생활을 하던 그는 현 러시아 정교회 수장인 키릴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영혼의 상처가 견딜 수 없을 만큼 큽니다. 제가 만든 총이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았다면, 설령 그 사람들이 적이라고 해도 제게 책임이 있는게 아닙니까?”라고. 키릴의 답장 내용은 칼라시니코프에게 전하는 감사 인사와 함께, "애국적인 행동을 한 사례였으며 조국을 위하는 올바른 행동이었다"고 대답했다 한다.
어찌 보면 원자폭탄을 만든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30] 위력으로 따지면 오펜하이머의 원자폭탄이 칼라시니코프의 AK-47보다 비교도 할 수 없이 끔찍하고 무서우나 그로 인해 죽은 사람은 칼라시니코프가 만든 무기 쪽이 훨씬 많다는 것도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이다. 수십~수백만을 한꺼번에 죽일 수 있는 핵무기는 끔찍한 위력 때문에 어느 누구도 쉽사리 사용할 수 없지만 사람 한두명 죽이는 것은 그에 비하면 훨씬 쉽게 행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31]

4. 설계 총기



엄밀히 말해서 AK-47과 AKM의 개발에만 직접 관여했고, AK-74 등 나머지 작품들은 그가 직접 관여하지는 않았더라도 어느 정도 관여는 한 물건들이다. 요즘 나오는 AK-107을 포함한 이후의 물건들은 사실상 그와 관련이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한 물건들이지만, 위 동영상에서 보듯 판촉이라든가 하는 걸 보면 여전히 이 사람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물건임은 틀림없다.
이외에도 그가 직접 설계한 물건은 아니지만 그의 AK 시리즈의 구조를 이용하거나 영감을 얻어 제작된 많은 동구권 무기들까지 합치면 직/간접적으로 그의 영향을 받은 총기는 어마어마하게 많다. 러시아에서 나온 총기들 중 제식으로 채택된 총기들 대다수는 그의 AK를 조금이라도 참조하거나 아예 설계를 가져다 쓴 물건들이다. K2 소총 역시 설계 과정에서 AK-47의 롱 스트로크 피스톤 방식을 참조했으므로 역시 그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5. 기타


  • 자기 이름을 붙인 보드카 칼라시니코프의 판매에 나서기도 했다. 칼라시니코프의 인기에 힘입어 만든 보드카 브랜드로서 상당한 인기를 누리며, 특히 한정판 격인 "AK-47 모양 병"에 담긴 보드카는 전세계 총덕들이 러시아 여행을 가서 못 사오면 땅을 치고 후회한다는 물건.[32] 보드카 사업은 대박이 터졌고, 시계의 나라 스위스에서 무브먼트를 공급받아 AK 시리즈 시계도 판매하고 있다. 성공은 어느 정도는 자신의 유명세에서 기인한 것이겠지만, 사실 유명한 사람이 유명세를 믿고 사업을 펼쳤다가 망하기도 한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경영 감각도 상당하다는걸 알 수 있다.
  • 문학의 나라인 러시아인답게 어릴 때부터 시를 써왔으며, 자기 이름으로 낸 시집이 6권이다.
  • SA80을 쏴본 적이 있다. 입가의 알 수 없는 웃음기와 한숨만 나올 듯한 표정이 포인트.
  • 모스크바에 세워진 칼라시니코프의 동상 받침대에 부조된 설계도 중에 칼라시니코프가 설계한 소총이 아니라 뜬금없이 나치 독일의 StG44의 설계도가 있다는 게 밝혀져 논란이 일어났다. 관계자들도 사실을 인정하고 그 부분을 제거하기로 했다고 한다.관련 기사칼라시니코프 기념비 러시아어 위키

  • 러시아에서 2020년에 AK-47을 개발하던 그의 젊은 시절을 다룬 영화 AK-47이 나왔다.
[1] 칼라시니코프 중장의(사진은 소장 계급) 정복 넥타이 부분의 목걸이 형식의 훈장은 The Order For Merit to the Fatherland라는 러시아 연방의 서훈이다. 한편 칼라시니코프 중장은 러시아 연방 영웅 훈장도(소비에트 연방 영웅 훈장에서 붉은 리본만 러시아 국기 색깔로 바뀐 디자인) 수훈했기에 사회주의노력영웅 옆에 러시아 연방 영웅 훈장을 착용한 사진도 있다. 해당 사진[2] 미들네임 티모페예비치는 아버지 이름에서 따왔다. 원래 러시아 작명법이 그렇다.[3] AK-74의 경우에는 직접 설계는 하지 않았다[4] 위에 형제들이 너무 어린 시절에 많이 죽어서 자신도 11째인지 12째인지 잘 기억이 안난다고 회고했다.[5] 독소전쟁을 극복하고 살아남은 칼라시니코프였지만 유년 시절 지독하게도 허약했던 탓에 부모의 속을 어지간히 썩였던 모양이다.[6] 현재도 이 지역은 여러모로 위험해서 썩 살기 좋은 동네는 아니다.[7] 심지어 다른지역으로 가는걸 제한하지도 않았다. 당장 칼라시니코프의 첫 직장은 현재 카자흐스탄 지역에 있는 알마티였다.[8] 1cm 정도의 흉터가 평생 갈만큼 큰 상처였다고 한다.[9] 들키지 않기 위해 다락방에서 몰래 그리고 의심을 피하기 위해 30분만 작업했다고 한다. 하교길에 경찰을 만날때 마다 깜짝깜짝 놀랐다고...[10] 건 오일과 일반 윤활유는 성분차이가 거의 나지 않는다.[11] AK-47의 개발 일화를 다룬 영화 '칼라시니코프'에서는 부상병들을 실은 트럭이 진흙탕에 걸려 움직일수 없게 되자, 차를 빼내기 위해 후송을 통솔하던 중령과 함께 근처에 있는 마을에 말을 빌리러 갔는데 하필 국방군 병사 몇명이 있었던 탓에 전투를 하게 된다. 이때 통솔하던 중령이 가지고있던 PPSh-41으로 두명을 사살한 후 헛간에 있던 한명도 마저 사살하려던 중 급탄불량을 일으켜 장교가 총에 맞는 부상을 입게 되고, 칼라시니코프가 마지막 국방군 병사를 처치하고 난 뒤 마을에 거주하던 노인의 말을 빌려 트럭으로 돌아가던 중 장교의 PPSh-41을 살펴보며 탄창에 물이 들어가 탄과 탄창이 얼어붙어서 급탄 불량이 생기고, 스프링도 약한데다 부품이 하나씩 분리가 되지 않는 등 품질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이를 대체하기 위해 총기개발을 결심한 것으로 묘사했다. 그런데 브리얀스크 반격전은 1941년 10월에 끝났고, PPSh-41이 생산되기 시작한 시기는 11월이어서 고증오류다. 고증대로라면 PPD가 나왔어야 한다.[12] 모신나강나강 M1895는 아예 벨기에 설계자가 만들었고, 현재도 .338 Lapua Magnum 등 유럽 규격을 잘 도입하고 있다.[13] 칼라시니코프의 고향 알타이는 위에 서술되어 있듯 완전 깡촌이라 총을 완성할 기계같은게 없었기 때문이다.[14] AVS-36PTRS-41, SKS의 개발자[15] 이후 AS-44를 제작하였으나, 사망하면서 프로토타입으로 끝났다.[16] 그러나 이런 큰 틈새는 AK-47 신뢰성에 한 몫 했다. 춥거나 더울 때 철로 만든 부품들이 팽창, 수축하면서, 총기 고장을 일으키지만 AK 시리즈는 이러한 여유 때문에 그런 걱정이 덜하기 때문이다.[17] 약 500g 정도로 M16에 비해 2배나 무겁다. 덕분에 발사속도도 M16보다 느리다.[18] 원리 자체는 저반동포와 같지만 저반동포와 달리 반동은 줄여주지 못했다. 총기가 너무 무거워 져서 다른 부분을 가볍게 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AK-47은 큰 반동으로 유명하다.[19] 우리나라에서는 'AK-47'로 소개된 영화다[20] 다만 실재로는 저렇게 조용한 분위기가 아니였다고 한다. 칼라시니코프 휘하의 엔지니어는 AK-47이 흙먼지를 뒤집어쓰고도 정상적으로 발사되는 모습을 보고 "마치 개가 물기를 터는 것마냥 발사되는구만!" 하며 환호했다고 한다.[21] 이후 2013년 8월 14일, 대주주의 요구로 칼라시니코프의 업적을 기려 회사명을 칼라시니코프로 바꾸었다.[22] 보통 장성 계급은 병과가 없어진다. 그의 이력을 생각해서 기행병과로 남겨 놓은것으로 보인다.[23] 모든 발명품의 특허권은 발명 당사자의 것이며 따라서 당연히 아말라이트가 콜트에게 넘긴 권리들은 오직 아말라이트 자신이 보유한 권리들 뿐이였다. 유진 스토너가 보유한 권리들은 고스란히 본인에게 남아 있었다.[24] 당시 소련 서기장의 월급은 공장 노동자의 7배에 불과했다.[25] 결국 구도와 정장을 그의 미국인 친구들이 대신 사줬다고 한다.[26] 백악관도 방문했는데, 그는 미국 대통령이 고작 이 정도 규모의 건물에서 집무를 보냐고 믿지 못했다고 한다.[27] 松本 仁一 <<カラシニコフ>> 2004[28] 松本 仁一 <<カラシニコフ>> 2004[29] 'IRA가 AR-18을 사용하는' 경위는 다름아닌 일본 기업 호와 공업에서 AR-18을 라이센스로 만들어 팔던걸 IRA가 사들였기 때문이다.[30] 오펜하이머는 처음부터 자신이 한 일을 후회하고 핵군비 확장을 반대하였다.[31] 영화 로드 오브 워에서도 비슷한 투의 대사가 나왔다.[32] 보드카영국에서 폭력과 공격성을 유발한다는 이유로 판매가 금지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