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용/생애

 


1. 개요
2. 을사늑약 이전까지
3. 변절 이후
3.1. 고종 폐위
3.2. 정미7적의 필두
3.3. 기유각서
3.4. 이재명 의사의 암살미수
3.5. 다시 살아난 후 경술국치 전야까지
4. 말년


1. 개요



KBS 한국사전 - 독립협회장 이완용, 그는 왜 매국노가 되었나?
대표적인 친일반민족행위자 이완용의 생애를 정리한 문서.

2. 을사늑약 이전까지


이완용은 음력 1858년 6월 7일 경기도 광주부(현 성남시)[1]에서 출생하였으며, 그의 아버지는 우봉 이씨 이석준(李奭俊)[2]이고 어머니는 신씨였다. 원래 이완용은 몰락 양반인 잔반이었지만 이호준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권력의 핵심부에 들어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고 양자여서 출세욕이 강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집안은 고려시대의 잠성부원군 이공정의 후손으로 많은 관직을 배출한 명문이었다.[4] 그러나 이완용의 생가 직계 가문은 9대조 이래로 이렇다할 벼슬살이를 한 사람이 없어 우봉 이씨 가문 중에서도 가세가 가장 빈한한 편에 속했다. 따라서 부친 이호석은 겨우 선비의 체면을 유지하며 어렵게 살아온 것으로 추정된다. 반면 양부인 이호준은 당대의 정계 거물로, 승정원 동부승지 등의 고위직을 지냈고 신정왕후 조씨의 조카인 조성하를 사위로 들였으며 흥선대원군의 서녀와 자신의 서자를 혼인시켰을 정도로 인맥도 튼튼한 인사였다.
1882년 증광문과에 급제한 뒤 고종이 축하연주를 하라고 하였다.[5] 세자를 가르치면서 순종과는 사제의 인연을 맺었다. 이후 고종이 국제업무를 담당할 신진관료를 교육하기 위해 육영공원을 만들었는데 거기서 헐버트를 만나게 되었고 이때 영어를 배웠다. 그는 조선인 중에서는 당시 몇 명 되지도 않는 영어 실력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미국은 조선과 거리가 멀어 침입할 우려가 적고, 부국이니 덕을 볼 것이고, 종교지상주의 국가이니 야심이 적을거라 판단, 미국은 부강함이 천하제일이라는 당시 조선 분위기 속에 미국주재 공사로 나가게 되었다. 이는 청나라의 극심한 반대에도 무릅쓴 고종의 결단이었다.[6] 미국에서 2년 5개월간 주미 외교관으로 근무하며,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국제관계의 현실과 근대화된 서구열강의 모습을 보면서 이완용은 친미파 관료로 성장하게 되었다.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일본을 피해 미국공사관으로 고종을 피신시키려 시도한다. 이 사건을 춘생문 사건이라고 하는데 1895년 11월에 있었던 고종의 경복궁 탈출 미수 사건이다. 이범진이 주도하였고, 이완용, 이윤용, 윤치호, 민상호 등이 참여하였다. 목표는 고종이 경복궁을 벗어나 미국 대사관으로 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병력 동원을 위해서 참여시킨 훈련대 대대장 이범래, 이진호가 이를 일본에 밀고해서 실패하였다. 이완용을 포함하여 이 사건에 참여했던 이들은 이후 고종의 높은 평가를 받게 되었다.[7]
이후 이완용은 참찬관으로 미국으로 다시 건너 갔으나 외교적으로 큰 성과는 거두지 못하고, 이후 위와 동일한 방법을 다시 써 아관파천으로 고종을 러시아공사관으로 대피시킨 공로로 외부대신 겸 농상공부 대신의 벼슬을 얻었다. 그 이후 고종을 따라 친러파로 전향하였다.

2.1. 독립협회 참여


이완용은 독립협회의 위원장, 초대 부회장과 2대 회장을 지냈으며 독립협회 존속기간의 3분의 2 이상을 이끌었다. 회비도 가장 많이 냈다고 한다. 독립문 현판도 이완용이 썼으며, 기관지 독립신문에서도 매번 이완용을 칭송했다. 독립문 정초식(건물의 주춧돌을 처음 세우는 행사) 행사 때 한 그의 연설이 독립신문에 남아 있다.

독립을 하면 나라가 미국과 같이 세계에 부강한 나라가 될 터이요 만일 조선 인민이 합심을 못 하여 서로 싸우고 서로 해 하려고 할 지경이면 구라파에 있는 펄낸이란 나라 모양으로 모두 찢겨 남의 종이 될 터이라 세계 사기에 두 본 보기가 있으니 조선 사람은 둘 중에 하나를 뽑아 미국 같이 독립이 되어 세계에 제일 부강한 나라가 되든지 펄낸 같이 망 하든지 좌우 간에 사람 하기에 있는지라 조선 사람들은 미국 같이 되기를 바라노라

-

독립신문 1896년 11월 24일 기사

초기에 독립협회는 청의 간섭으로부터 조선을 독립시키기 위해 왕의 지위를 중국과 동일한 황제로 추대하는 등 왕권에 대해 우호적인 성향을 보여왔었다. 하지만 러시아의 영향력이 지나치게 커지자 독립협회 수장으로써 이완용의 입지는 난처해졌다. 고종이 끌어들인 러시아 제국에 대해 수구파들은 친러성향을 보였고, 개화파와 독립협회는 반러성향을 내보이며 갈등을 빚었다. 게다가 독립협회가 입헌군주정을 지향하는데 반해 고종과 수구파는 전제군주정을 지향하는 점에서도 갈등이 있었다.
이러한 갈등속에서 이완용은 서구열강에 친숙하고 반러, 민권 행보를 보이는 독립협회의 수장이었던 만큼, 독립협회에 부정적인 친러 성향의 주류 근왕파 대신들에게 밀려 1898년 3월 11일 전북관찰사로 발령을 받고 좌천되었다.[8] 그리고 관찰사로 부임한지 닷새만에 직무태만으로 감봉, 공금횡령으로 파직되고 독립협회에서도 제명되었다.
이완용 실각 이후 윤치호를 수장으로 한 독립협회는 1898년 10월 러시아와 일본의 이권침탈을 규탄하는 만민공동회를 개최하고 입헌군주정 정착을 위해 힘썼으나, 황국협회를 중심으로한 수구파들이 "독립협회가 고종을 폐위하고 박정양을 대통령, 윤치호를 부통령으로 한 공화국을 수립하려 한다"는 전단을 뿌리며 방해공작을 펼쳤고, 이에 놀란 고종이 경무청과 친위대를 동원하여 독립협회 간부를 체포하면서 만민공동회와 함께 강제 해산되어버렸다.
이완용은 독립협회 탄압 이전에 이미 실각했으므로 독립협회와 직접적인 연관성은 없었으나, 고종에 의해 독립협회가 해산된 이후 개화파나 독립협회 관련 인사들의 입지가 매우 좁아졌으므로 궁내부 특진관으로 복귀하는 1904년 이전까지 고향에서 아무관직 없이 은둔하게 된다. 중간에 고종으로 부터 복귀 권유가 있었지만 이완용이 이를 거부하였다.

3. 변절 이후


1898년 파직되고 나서 1904년까지 고향에 낙향하여 살다가, 1904년부터 본격적으로 활약하게 되는데 경술국치 이전까지의 그의 행보는 을사조약 체결, 헤이그 밀사에 따른 고종 황제 퇴위, 군대 해산, 정미 칠조약 등으로 대표된다.
1905년, 이완용은 학부대신으로서 '''일본군 무력시위를 등에 업고 어전회의를 열어 고종을 대신해 을사조약을 체결하여''' 을사오적의 수뇌로 불리게 된다. 이 과정에서 그 적극성으로 이토 히로부미의 관심을 받게 되었다.
이완용이 고종을 직접 협박한 것은 아니다. 당시 고종을 협박, 농락한 것은 궁내부 대신 이재극이고, 이완용은 "안 된다고는 할 수 없으니 첨삭 정도로 협상하자"라는 현실 논리로 고종[9][10] 과 을사 오적들의 방패막이 역할을 한다. 하지만 이게 가장 핵심적인 역할이었다.
을사조약 과정을 설명한 이완용의 글을 보면 이지용, 이근택, 권중현이 모조리 '학부대신과 같은 의견'이라며 물타기를 하는 장면이 잘 드러나있다. 이후에도 자신들은 오적이 아니며 어쩔 수 없이 총대를 맨 충신이며, 남들이 위선 떠는 것이란 식의 자기 변명을 했다. 각국에 파견된 대한제국의 주재 공사를 소환해야한다고 주장한 것도 이완용.

3.1. 고종 폐위


1907년 6월 고종이 헤이그 특사 사건이 발생하자 총리대신 이완용과 내각대신들은 고종에게 몰려가 물러나야한다고 말한다.
이완용은 송병준과 함께 이토가 사주한대로 고종에게 책임을 추궁하고 양위할 것을 강요, 내각 회의에서 황제 퇴위를 결정했다. 전화선을 끊고 수라를 거부하는 고종을 협박해 대리청정의 답을 얻어낸 뒤 고종도 순종도 없는 자리에서 강제로 즉위식을 날치기 진행시켜 버린다.
사실 그 전부터 이토 히로부미는 을사오적 일원인 박제순[11]에게 넌지시 고종 퇴위를 제의하나, 의외로 별로 동조하지 않자 그를 물러나게 하고 이완용을 참정대신으로 앉힌 것이었다.
여하간 고종은 황제 대리를 주장하며 끝까지 버텼다. 고종이 응원을 위해 임명한 궁내부 대신 박영효마저도 그 꼴을 보기 싫어서 그 자리를 피했으나 이완용은 스스로를 궁내부 대신 서리에 임명하고(;;)[12] 그 일을 행했다. 그 직후 (20일) 메이지 덴노의 "순종 즉위" 축하 메시지가 오자 즉각 반응, (22일) 대리청정을 황제로 바꾸어버렸다.

3.2. 정미7적의 필두


순종 즉위 직후, 24일 정미7조약(한일 신협약)으로 '''내정까지 통감부의 지배를 받는다'''라는 안을 토씨 하나 수정하지 않고 통과시켰다. 황실 보호 따위는 언급되지도 않았다. 이렇게 정미7적.
그해 8월 1일에는 군대를 해산시켰다. 이로 말미암아 해산된 한국군이 합류한 정미의병이 한창 일어났을 때 이완용은 일본군 대장 하세가와를 매일 찾아가 의병토벌에 대해 논의했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 자리에서 '조선인 현병보조원 제도'를 계획하는 데 크게 일조했고, 의병장 허위가 체포되었을 때, 허위를 처벌할 것을 순종한테 상소를 올린 것도 이완용이었다. 그래서 의병장 허위는 결국 서대문 형무소에서 순국하고 만다.
순종 년간에 이완용은 총리대신을 하면서 형 이윤용을 궁내부 대신으로, 사돈 임선준은 탁지부대신으로, 승녕부 총관(고종의 비서실장)은 처남 조민희, 아들 이항구는 승녕부의 시종을 시키는 등 인척 내각을 이룩했고, 황태제(영친왕) 책봉 문제에도 참여하였다.
한편 이 시기에 이완용은 조선 왕조에서 죄인으로 낙인찍혔던 인물을 신원, 복권하고 명망이 있으나 공적으로 인정받지 못했던 재야 인사들에게 시호를 내려주는 등의 작업을 활발하게 행하였다. 이 작업은 경술국치 직전까지 지속되었다. 이완용의 주도로 복권되거나 새로 시호를 수여받은 인사로는 윤원형, 윤휴, 이징옥, 정인홍, 박지원, 정약용 등이 있다. 이 작업 자체는 매국 행위는 아니며 단순한 정리 사업에 가깝다.

3.3. 기유각서


1909년, 이토 히로부미는 통감에서 물러나면서 일선에서 물러나는 것처럼 보였지만 동시에 사법권을 넘기는 작업을 계획하고 있었다. 심지어 사돈까지도 반대하면서 내각 총사퇴를 주장했다. 내각 내에서도 반대가 빗발치고 내각 총사퇴가 사실상 기정사실화 되자 그는 2대 통감 소네 아라스케와 '''단독으로 조약(기유각서)에 서명해버렸다. 그리고 회의는 없다고 통보'''해 버린다.
12월 4일에는 일진회의 한일합방 성명서가 발표되었다. '''1910년 8월 22일 체결된 한일합병조약은 일진회의 계획보다도 한국에게 훨씬 불리했다.'''[13]

3.4. 이재명 의사의 암살미수


이러한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이완용의 집은 '''민중들에 의해 불타버렸고''' 자신 또한 12월 22일 명동성당 앞에서 벨기에의 왕 레오폴드 2세[14]의 추도식에 참석했다가 당시 현역 군인이었던 이재명의 습격을 받는다. 하지만 아쉽게도 죽이지는 못했는데 왜냐하면 '''우연히''' 지나가던 인력거꾼 박원문이 그의 앞을 막아서는 바람에 목숨을 건진다. 불행히도 박원문은 대신 부상을 당해 그자리에서 사망하고 만다(...). 이재명 의사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그 자리에서 재차 이완용을 공격했지만 치명상을 입히지는 못 하고 체포된다.[15] 이재명 의사는 경술국치 이후 박원문을 살해한 죄로 1910년 9월 교수형에 처해졌다.
여담이지만 당시 이뤄졌던 외과 수술에 대한 기록은 몇 남아 있지 않은 중요한 의학사 자료로 인정된다. 동 시기의 다른 외과 수술 기록이 전부 파기된 데 비해 재판의 증거로 사용되었기에 남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 수술은 대한민국 최초의 흉부외과 수술로 기록되어 있으며, 한국 의학사를 연구하는 학자분들이 "한국 의학의 발전이 5년만 늦었어도……"라는 말을 하게 만든다. 실제로 모 의대의 흉부외과 총론 시간 첫 수업에서 이 에피소드를 소개하며 "의업에 충실한 것이 민족과 역사에 죄를 짓게도 한다."라는 농담을 했다고 한다.#
또한 맹꽁이 서당에서도 경술국치 당시 이용직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며 '''"칼을 맞으려거든 대감 혼자서 맞으시오! 난 그럴 생각 없소!"''' 라며 디스한 장면도 나온다.

3.5. 다시 살아난 후 경술국치 전야까지


5월 30일 부로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제3대 통감에 오른다. 군부 출신으로 강경파였던 그는 일방적으로 경찰권 회수를 통보했고, 내각은 데라우치가 한국에 입국하기도 전에 무기력하게 통과시켜버렸다. 7월 23일, 한국 합병에 대한 세부사항 논의까지 마치고 데라우치는 입국했다. 이즈음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났는지 이완용도 요양을 마치고 상경했다.
이완용은 8월 4일부로 비서 이인직("혈의 누" 작가)을 통해 '''합병을 먼저 제의했다.''' 아마도 송병준의 일진회 등에게 선수를 뺏기기 싫었던 모양. 통감부마저도 "그물도 안 쳤는데 물고기가 뛰어들었다."라는 반응을 보냈다. 합병 조약문에서 이완용은 "국호 한국과 황실의 왕 칭호만은 절대 양보할 수 없다."라면서 추가를 요구했는데, 황실 보호라기 보다 황실의 지지를 통한 자기 입지 강화로 보인다. 물론 일본 입장에서도 한국 황실이 고분고분한 것은 결코 나쁘지 않은 데다[16] 이를 받아들이고, 더불어 한국 황실을 일본 황실로 편입한다.
따지고 보면 그 상황에서 나라는 무조건 뺏길 수 밖에 없는 상태였고, 이완용은 매국의 공과 함께 매국의 이미지를 전부 자기가 가지게 된다.
주저하는 이들을 데라우치에게 일러바쳐 압력을 행사하고, 반대하는 학부대신 이용직을 일본 수해 위문 사절단으로 동경으로 보내는 등(이용직은 이를 간파하고 가지는 않았다.) 갖은 수단을 써서 순종의 윤허를 받았다. 고종에게는 "신이 하지 않아도 송병준과 일진회가 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는데, 이완용이 물러난 후 고종은 "'신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런 매국의 거사는 하지 않겠다.'고 한 자는 바로 이완용 아니던가! 그가 무슨 낯으로 짐을 본단 말인가!"라고 통곡했다. 한때나마 그를 믿어주었던 주군에게까지 신임을 잃었던 것.
그리고 8월 22일, 이완용은 이용직에게는 통보도 하지 않고 최후의 내각 회의를 열고는 한일합병조약을 통과시켰다. 이후 1주일 동안은 숨겼다가 8월 29일자로 순종의 이름으로 발표된다.
이때 나이 52세, '''그는 그렇게 스스로 나라를 팔아 먹었다.'''

4. 말년


(1916년 8월 4일자 매일신보. 이완용이 기고한 글로 순종의 이복동생, 왕세자 영친왕(이은)[17]과 일본 황족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 여왕과의 강제결혼 결정을 '일선(日鮮) 영구의 친선'으로 미화했다.)
강제 병탄이 이루어지자, '''일본으로부터 훈1등 백작 작위'''를 받았다. 조선인이 조선인을 감시하는 "조선인 헌병제"도 이완용의 아이디어였으니, 1910년부터 1919년 사이의 헌병 경찰 제도는 사실상 이완용이 만든 것이었다. 물론 헌병보조원 제도는 정미의병 때부터 있었지만 이걸 전국적으로 확대시킨 것은 이완용의 짓이 맞다. 또 명목상의 총독 자문기관인 중추원의 고문과 부의장을 지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완용은 '''경고문'''을 세 차례 발표하였다.전문
다음 해 '''후작으로 승급'''하였고 1921년에는 창덕궁일본 황실 별궁으로 만들자고 본인 스스로 2번이나 건의했다가 무산되기도 했다. 그 이후 조용히 살았다. 1925년 12월 16일에는 자던 도중 식객 노릇하던 조카를 푸대접한것 때문에 조카한테 침실에서 습격당해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1926년 2월 11일, 만 67세의 나이에 '''폐렴으로 사망'''하였다. 최후의 군주인 순종이 죽기 4개월 전으로, 그의 업보에 비해서는 너무나도 안락한 죽음이었다.
(1926년 2월 13일자 매일신보 기사. 신문 1면에 이완용 사망 소식을 대서특필로 다뤘다.)
사후는 생전보다 더 화려했는데, 일본인과 한국인으로 이루어진 50명의 장례위원들이 참석했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 정2위대훈위 후작 이 공 지 구'''란 휘황찬란한 깃발을 들고 장례가 치뤄젔다. 그의 장례 행렬은 그의 3천 평짜리 집 옥인동부터 광화문까지 이어졌는데 고종 사후 이후 최대 인파가 몰렸다고 한다. 드라마 각시탈에서도 이 장면이 나오는데, 행렬에서 장례위원들이 들고 가던 그의 영정사진이 히로인에게 짱돌을 맞는다.[18]
당시에도 '''지극히 당연하게도''' 민중에게는 증오의 대상이었다.
1926년 2월 13일자 동아일보 1면 사설에 실린 기사. '무슨 낯으로 이 길을 떠나가나'라는 제목으로 이완용에 대한 기사를 실었다. 여기서 동아일보

'''"그도 갔다. 팔지 못할 것을 팔아서 누리지 못할 것누린 , 이제는 천벌을 영원히 받아야지"'''

라는 '''희대의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 가면 해당 기사 부분이 지워져 있는데, 이는 총독부의 검열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다음날인 2월 14일자에 '본보압수'라는 제목 하에 "2월 13일 기사 중 당국(當局)의 기휘(忌諱, 금지령)에 저촉된 바가 있어"라고 그 이유를 밝히고 있다... 그러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한국근현대신문자료에 가면 원문 이미지를 볼 수 있으니 참조하자. 옛날 신문이라 한자가 좀 많다. 한자보다도 고문표현이 많은데, 첫 문단만 의역해보자면 "아무리 겹겹이 실드를 쳐도 저승사자의 칼빵과 몽둥이 찜질은 못 피했다"이다. 신문 발행일은 당시 일본의 연호인 다이쇼(大正)로 표기되어 있다.
그 밖에도 동아일보 "횡설수설" 란에는 이틀 연속으로 그의 죽음에 대한 짤막한 촌평을 달아두고 있다. 이는 네이버에서도 확인 가능하다. 어떻게 보면 요즘말로 고인드립 수준이다.

* 2월 12일 : 구문(口文 : 흥정을 붙여 주고 그 보수로 받는 돈) 후작 이완용은, 작일(作日 : 어제) 황천객이 되엿다고, 지옥행하노라고 무던이 고달풀걸.

* 해석 : 나라를 팔아먹어 그 대가로 후작을 받은 이완용은 어제 죽었다. (나라를 팔았으니) 지옥으로 갈 텐데, 고생길이 훤할 것이다. 왜냐하면 나라 팔아먹은 죄로 조상님들께 두들겨 맞을테니까.

* 2월 13일 : 구문 공신 이완용은 염라국에 입적하엿스니, 염라국의 장래가, 가려(可慮 : 걱정이 되어 마음이 편하지 못하다)

* 해석 : 나라 팔아 공신이 된 이완용은 염라국에 들어갔는데, 이 작자가 나라 팔아먹는 데 일가견이 있기에 염라국의 장래가 걱정이 되어 마음이 편치 못하다. 살아서도 나라를 팔아먹었으니 '''저승에서도 염라대왕이 다스리는 저승을 팔아먹을것이 뻔하니''' 이것이 걱정이 된다.

(1979년 파묘 당시 이완용의 관 뚜껑. 뚜껑 위에 씐 '조선총독부 중추원부의장 정이위 대훈위 후작우봉이공지구(朝鮮總督府 中樞院副議長 正二位 大勳位 侯爵牛峯李公之柩)'라는 글귀가 뚜렷하다.)
그의 묘는 전라북도 익산군(現 익산시) 낭산면에 있었는데 매국노다 보니 지속적인 훼묘사건이 빈번이 일어났다. 그나마 일제강점기 때는 양반이었고 광복 이후에는 매우 심하게 훼손되었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훼묘 사건이 발생한 데다 수풀이 너무 무성하게 자라 관리가 불가능할 지경에 이르러, 1979년 이완용의 증손자 이석형이 파묘를 하고 유골화장했다. 오늘날 이완용의 묘가 있었던 곳은 채석장으로 바뀌었으며 위치는 육군부사관학교에서 매우 가깝다. 파묘할 때 지속적으로 훼손된 묘였지만 붉은 명정에 쓰인 '조선총독부 부의장'이란 글은 상하지도 않고 그대로였다고 한다.
1992년 <시사저널> 기사에 의하면 이완용의 관뚜껑은 당시 인부가 바둑판을 만들기 위해 가져갔다가 원광대학교 박물관에서 사들인 것을 이완용의 손자뻘 친척이라고 상당 기간 오해받던[19] 국사학자 이병도가 사비로 구입해 자택에서 '''불태워 버렸다'''고 전해진다. 결국 부관참시로 이완용의 무덤은 사라지고 관과 유해는 불타 버렸다. 한 마디로 말해서 매국노의 말로.[20]
직함도 더럽게 많이 받아서 조선귀족원 회원ㆍ농사장려회 회장ㆍ조선물산공진협찬회 명예회원ㆍ일본제국군인후원회 조선지부평의원ㆍ조선귀족회 부회장ㆍ농림주식회사고문ㆍ교육조사위원ㆍ총독부산업조사위원ㆍ조선미술전람회심사원ㆍ조선사편찬위고문ㆍ조선농업교육연구회고문ㆍ선만노몽(조선ㆍ만주러시아몽골) 연구협회고문 등을 지냈다.
이러한 모습 때문에 그는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 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6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조사,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06인 명단에 '''당연히''' 포함되었다. 2007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는 이완용과 그의 손자인 이병길의 재산을 국가로 환수하기로 결정하여 환수작업이 진행 중이다. 또한 2009년 공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 이완용의 이름이 '''당연히 그리고 당당히''' 들어가 있다.
이완용은 1910년대 토지, 임야 등 확인된 것만 여의도 면적의 약 2배에 해당하는 1,300여 필지, 1,600만 ㎡를 소유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완용은 일제때에 구입한 토지를 현금화하였으나 총 규모는 아직까지 파악되지 않고 있다. 이완용의 증손자인 이윤형은 친일파 후손 중 최초로 토지 반환 소송을 제기하여 1997년 7월 승소하였으며, 반환된 북아현동 일대의 토지는 당시 시가로 30여억 원에 달하였다. 이윤형은 곧바로 이 토지를 처분하고 캐나다로 이민을 떠났다.

[1] 이완용의 고향에 대해선 약간 논란이 있다. 현재 역사학계에서 정식으로 인정되는 고향은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 백현리(현재의 성남시 분당구 백현동)이지만#, 역사학자 이병도는 이완용의 고향이 전라북도 익산시라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이병도의 발언은 근거가 무덤이 전북 익산에 있다는 것 정도이며 자기도 전해들었다는 '''카더라'''이기 때문에 신뢰성이 그리 높지 않다. 게다가 이완용과 전라도의 접점은 이완용의 양애비 이호준이 이완용을 입양한 후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몇 년을 그곳에서 지낼때 이완용이 종종 양부를 문안하러 갔었던 정도만이 있을 뿐이다.[2] 다른 이름은 이호석(李鎬奭).[3] 윤덕한, 《이완용 평전》 (중심, 2005) 23페이지[4] 이공정의 아들 이자의는 문하시중을 지냈고, 조선조로 와서도 그의 조상들은 대대로 고관을 역임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이완용의 생가 15대조인 이길배가 태종 때 도관찰사를 지낸 것을 비롯해 문과 급제자 40명, 우의정 1명, 대제학 1명을 배출한 대표적 양반 씨족 가운데 하나다.[3] 16대조 이교(李喬)는 판서, 15대조 이방년(李芳年)은 밀직이며 14대조 이순(李淳)은 과거에 급제해 감사를 역임했으며, 조선 성종 때의 유명한 청백리였다. 생가의 11대조 이세명(李世銘)은 을묘사화에 연루된 선비였으며, 0대조 이간(李僴)은 무과에 급제해 수군절도사를 지냈다. 9대조 이의원(李義元)이 동지중추부사였고 그러나 8대조 이우(李寓)가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것을 마지막으로 더이상 관직을 배출하지 못하였다.[5] 고종실록 1882년 11월 2일.[6] 당시 조선에게 이것은 엄청난 모험이었다. 1880년대에 조선은 청나라의 위안스카이의 간섭으로 대외 활동이 매우 힘들었던 상황이었기 때문. 그런 상황에서 주미공사를 설립하고 이완용을 공사관으로 파견한 것은 그만큼 고종이 그를 신뢰했다는 것을 보여준다.[7] 작가 송우혜는 이 사건의 주도자를 엄귀비로 보고 구국의 화신 엄비 운운한다. 그러다 잊혔다. 북한에서는 일단 미국이 개입했다는 것과 이완용이 참여했다는 점을 들어 미제국주의자 대위 훈련대장 다이와 매국노 이완용, 윤치호가 작당한 고종 납치극이라고 주장한다. 결국 이 전략은 다음 시도인 아관파천에서 기어이 성공을 거둔다.[8] 당시 러시아제국 공사관이었던 스페에르(베베르의 후임으로 부임)는 이완용을 어떻게든 쫓아낼려고 대한제국 정부에 압력넣었다고 한다.[9] 고종은 체결 전의 어전 회의에서는 이완용의 이 논리가 타당하다고 말했다! 이런 유유부단한 행보 때문에 을사육적 소리도 듣는다.[10] 다만 해당 시점에서 이미 을사늑약의 거부는 불가능했다. 만약 고종과 모든 대신들이 완강하게 거부했다면 '''고종 목에 총칼을 들이밀고 내각을 환국시켜서라도 일본은 을사늑약을 체결했을 상황'''이었다. 즉, 이완용의 문제는 '''대한제국의 대신으로서 대한제국의 국권을 넘기는 조약에 찬성했다는 그 태도 자체'''이지 이것을 체결시켰다는 결과론적 문제가 아니었다.[11] 을사조약 시기 외무대신. 이후 참정대신 한규설이 항의표시로 물러나면서 참정대신을 맡게 된다. 을사조약 시기에도 초기엔 반대하던 입장이었다. 그래봐야 매국노지만. 경술국적도 된다.[12] 이는 이완용이 맡은 총리대신이 대신의 임명, 파면이 가능한 자리였기 때문이다. 이는 일본이 고종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서 부여한 권한으로, 사실 을사조약 때도 참정대신 한규설이 을사 오적들을 파면시키려 했던 것도 이런 제도에서 근거하긴 한다. 하지만 한규설은 역으로 쫓겨났다(...).[13] 일진회는 일본의 병합 계획을 단단히 착각하고 있어서, 마치 대영제국스코틀랜드처럼 독자적인 내각의회를 가질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14] 이놈도 콩고민주공화국에게는 불구대천의 원수나 다름없다.[15] 다만, 이재명의 의거로 중상을 입었던 이완용은 이때 입은 상처로 말년에 죽을때까지 폐렴을 앓았다.[16] 프랑스에서도 베트남 황제 바오 다이의 지위를 인정한 바 있다.[17] 사실 왕세제가 바른 호칭이지만 고종이 왕세자로 부를것을 고집했다. 물론 경술국치 전의 호칭은 황태자.[18] 이전엔 시신(상여 자체)에 맞는 것으로 잘못 기록되었는데, 시신이 짱돌을 맞은게 아니라 장례 행렬에서 부하가 들고 가던 영정사진이었다. 드라마를 보면 확실히 상여(관)자체가 맞는 게 아니고 앞에 한 사람이 들고 가던 영정사진에 맞는 걸 알 수 있다.[19] 이병도의 조부와 이완용의 항렬이 같아 손자뻘이란 거지 실상은 그냥 남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머나먼 친척이다. 촌수로 따지면 30여 촌 정도 될 거라고 하니.[20] 다만 이에 대해 정지환 기자는 이병도가 자신의 실증주의를 져버린 행위라고 비판했다. 실제로 이병도의 이러한 행동은 역사학자로서 적절치 못하게 보일 행동이었음은 사실이다. 이병도의 전후 행보와 성향을 볼 때 단순히 이완용의 친일 행태에 대한 분노로 그러한 행동을 했다기보다는 오히려 이완용의 흔적을 지우려는 행위로 읽힐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