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비/생애
1. 개요
조비의 생애를 서술한 문서.
2. 생애
2.1. 언플의 소년기
조비가 태어나기 전인 176년에 황룡이 초현에 출현하자, 광록대부 교현이 태사령 단양에게 무슨 조짐인가 묻자 단양은 이 나라에서 천자가 나타날 것이며 50년이 지나기 전에 황룡이 다시 나타날 것이라고 했고 내황(內黃) 은등은 말없이 듣고 이 말을 기억해 두었다.
조비는 후한#s-1 영제 중평 4년(187년) 겨울에 태어났다. 푸른색 구름의 기운이 둥근 모양으로 (황제가 타는) 수레 덮개처럼 걸쳐 있다가 하루 만에 없어져 버렸는데, 이것을 바라본 자들은 지극히 존귀한 증거라고 생각하였다.
창업-수성 군주에 대한 묘사가 대부분 그렇지만 어릴 때부터 조조의 영재교육을 받고, 문학적 소양도 뛰어나 나이 여덟에 이미 붓을 잡으면 그대로 훌륭한 시가 되었고, 각종 경전과 주석, 제자백가 서적을 모조리 꿰뚫었으며 여섯 살 때 궁술을 마쳐 좌우 어느 쪽으로도 자유자재로 쏠 줄 알았으며, 여덟 살 때는 말에 올라탄 채 활을 쏠 수 있었다. 검술도 좋아해 여러 스승에게 사사받고 모든 검법을 숙달해, 궁마술과 검술에 정통했다고 한다. 또한 아버지를 따라 여러번 종군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다만 이는 조비 자신이 직접 썼던 자전인 《전론》(典論)에서의 묘사를 후대 사서들이 그대로 따른 것이라 자화차찬의 면모가 있다. 일단 군사적 소양은 기마 사격이 가능할 정도로 일신의 무용을 가졌고 아버지와 동생과 함께 삼조의 일원으로 칭해질 정도로 문학적 소양은 충분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것이 최고 지도자로서의 자질을 보장해주지 않은것이 문제지만. 또한 친동생들인 조창과 조식이 각기 무재와 문재에 워낙 특출난 재능을 선보여서 본인 자체는 조조에게 그다시 주목을 받지 못했다.
소년기의 기록은 많지 않으나 자전의 내용에 따르면 조조가 완의 장수를 정벌(197년)할 때 10살로 종군하여, 큰형 조앙#s-1과 사촌 조안민이 죽는 와중에도 말을 타고 살아남았다고 한다.[1]
2.2. 견씨를 아내로 삼다
204년, 조조가 원소의 아들 원상#s-1을 칠 때 조비도 종군했다. 조조는 업을 점령한 다음 병사들에게 일체 약탈을 금지하고 원소의 가족들에게 손대지 말라고 명을 내렸다. 이는 비록 적이지만 젊었을 적 친구였던 원소에 대한 그 나름의 예우였다. 그런데 조비는 원희의 처인 문소황후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이때 조비의 나이 18세.
정사 삼국지 문소견황후전에 인용된 《위략》에 따르면 그 상황은 다음과 같다.
삼국지연의에서 조비가 문소황후를 보쌈하는 장면은 《위략》의 묘사를 거의 그대로 따르고 있다.황후(견씨)가 두려워하여 머리를 시어머니(유부인) 무릎 위에 묻고 있었고 원소의 부인은 양 손을 스스로 포박하고 있었다. 문제(조비)가 이르기를 '유부인께서는 어찌 이와 같이 하십니까? 명하셔서 신부께 머리를 들라고 하십시오.' 하니 시어머니가 이내 받들어서 황후에게 명하여 우러러보게 하니, 문제가 들여다보고 그 안색이 평범하지 않음을 보자 그녀를 칭찬하며 감탄했다. - 위략
《후한서》 〈공융열전〉에서는 "조조가 업성을 도륙할 때 원씨의 부녀자들이 강간당하는 일이 많았는데, 조조의 아들 조비는 사사로이 원희의 처 견씨를 맞아들였다"고 되어 있다.[2]
아예 전리품 취급 당하던 다른 원씨 일족의 여성들과 비교하면 그나마 상황이 나았을지도 모르지만, 남의 여자를 아내로 삼았다는 것도 웃기기는 마찬가지라 조조는 이 행위가 세간의 비웃음거리가 될 것을 염려했고 실제로 여론이 그랬다.
한편 공융은 이를 두둔해주는 척 하면서 조조를 경전도 제대로 모르는 무식한 사람으로 취급하는 등 이중으로 굴욕주며 조롱하기도 했는데, 《세설신어》에서 조조가 업을 점령한 이후 견씨를 품으려 했으나 이미 조비가 데려갔다는 말에 "이번에 전쟁을 벌인 것은 그 계집 때문이었는데 자식놈한테 빼앗겼다."고 분노하는 답없는 호색한으로 묘사되는 것은 이런 분위기에서 기인한 것.
《세설신어》의 내용에 대해서, 정사에 근거해 조조는 원가의 부녀자에게 손 대지 말라고 했으니 이는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오로지 정사만을 맹신한 결과이다. 《후한서》에 따르면 원가의 여자들은 강간당하는 일이 잦았다. 만약에 정사의 말대로 조조가 정말로 저런 명령을 내렸다면 조조는 누군가 가 견씨를 손댈까 두려워서 저런 명령을 내린 것이고 다른 여자들은 강간당하든 말든 관심도 없었다는 소리밖에 되지 않는다. 오히려 견씨를 얻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는 세설신어의 내용이 더 설득력 있어지는 것이다. 후한서의 내용은 날조이고 오직 조비만이 자신의 명령을 위반하고 견씨와 결혼하고 싶어하자 아들이라 할 수 없이 허락했다는 복잡한 전제를 달아야만 정사를 근거로 세설신어를 반박할 수 있다. 따라서 조조가 정말 저런 명령을 내리기는 한 것인지, 정말 조조가 이 약탈혼과 무관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구심을 품을 수밖에 없다.
다만 《정사 삼국지》에 기록된 원씨 일족의 여성들에 대한 처우와 《후한서》에 남겨진 내용이 마냥 모순되기에 어느 한쪽만 타당하다고만 볼 수는 없다. 하북의 패자였던 원소는 당대 최강자로 거의 왕이나 황제급의 권력을 누리고 있었고, 그에 걸맞게(...) 수많은 처첩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정사 삼국지의 내용대로 원소의 적실이었던 유씨를 비롯한 직계 일족 여성들은 보호받았고 나머지 여성들은 전리품 취급받았다고 절충해서 볼 여지도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후에 망국의 군주였던 촉한의 유선 같은 경우도 일족의 여성들은 철저히 보호받았지만 후궁들 같은 경우는 촉한 정벌군에 종군한 장수들에게 분배되었다. 또 손오의 손호 같은 케이스 역시 일족은 보호받았지만 그가 거느렸던 오천 궁녀는 모조리 사마염 몫(...)으로 귀속됐다.
여기서 좀 더 나아가 아무래도 서진 치하에서 조위에게 합법적(?) 선양을 받은 서진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던 진수가 자세한 내용을 적을 수 없었다는 점을 감안해 후한서에 좀 더 기록의 신빙성을 둔다면 애초에 조조가 명을 내린것은 사실이긴 하지만 조조의 아들 조비조차 원소의 직계 후손인 원희의 처를 명을 어기고 제 멋대로 취하는 마당에 그런 명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고 보는게 더 합리적일 수도 있다. 정사 삼국지에 따르면 촉한과 손오의 멸망 이후 확실히 유씨와 손씨 일족들은 각각 낙양과 수춘으로 이주했다는 기록이 명백히 남아 있지만 정작 원씨 일족에 대해선 조조가 일족을 보호하라는 명을 내렸다고 되어 있지 그 일족이 조조의 명대로 잘 보호되고 있었는지는 침묵하고 있기 때문이다.
2.3. 청년 시절부터 보이는 막장의 기운
이후 조조가 고간의 난을 진압하러 나간 사이에 업에서 사냥과 음주가무에 열중하는 것을 들어 아버지 위세가 강해지는 것만 믿고 사치향락에 빠졌던 원소의 자식들과 똑같다고 최염한테 까인 적이 있다. 조비는 당장 이를 시정했다고 하나 이런 행보는 황제 시절에도 계속되었기에 일시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장수의 최후에도 관련된 기록이 있는데, 장수는 207년 조조가 오환에게로 도주한 원상을 추격해 유성을 공격할 때 같이 종군했지만 유성에 도착하기 전에 죽었다. 〈장수전〉 본전에서는 그냥 오환을 정벌하러 유성으로 갔으나 이르기 전에 '죽었다'고만 나와서[3] 내막을 알기 어렵지만 《위략》의 주석에 따르면 조비가 형을 죽였다고 하도 갈궈댔기 때문에 불안감에 휩싸여 자살했다는 것.
적게나마 남아 있는 소년기의 기록들을 살펴보면 하나같이 아버지의 위세만 믿고 방약무인해 아버지인 조조의 정치적 입장을 다분히 곤란하게 만들 정도로 충동적인 성향이 강한데, 이후 후계 구도에서 동생들에게 위협을 받은 것은 이런 성품의 문제가 크다는 견해가 있다. 나이가 들어서도 근본적인 성격이 변하지는 않았다.
2.4. 세자로 책봉되다
건안 16년(211년) 한수와 마초의 난에 종군했고 이후 이 공으로 오관중랑장이자 부승상이 되었다.
211년 조비가 오관중랑장이 되었을 때 손님 30여 명을 불러서 연회를 열었는데 조비는 주건평에게 자신의 수명과 빈객들의 수명을 묻는다. 주건평은 하후위, 융거, 조표#s-2가 죽을 때를 예견했다. 그러면서 조비에게는 "장군의 수명은 여든인데 마흔 살에 작은 재난이 있으니 조심하여 보호하시기를 청합니다."라고 했다. 알다시피 조비는 장수하지 못하고 딱 마흔에 죽었는데, 죽으면서 '''낮과 밤 따로 따로 이틀 쳐서 여든이란 거구나!'''라고 하고는 죽었다고 한다(…).
공을 세웠어도 조비는 후계 경쟁에서는 아직 확고하지 못했다 이에 가후에게 대책을 물으니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언뜻 별거 없는 것 같지만, 말 그대로 괜히 조급해하다 눈 밖에 나지 말고 가만히 바른 모습만 보이라는 것. 결국 216년에 조조가 위왕에 오른 뒤, 가후가 조조를 설득하여[4] 다음 해 세자의 자리가 확고해졌다."바라건대 장군께서는 인덕과 관용을 발휘하고 숭상하며, 평범한 선비의 업을 행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쁘게 하며, 아들의 도리를 그르치지 않으면 됩니다."
조비는 의외로(?) 행동이 가볍고 감정 표현을 자제하지 못하는 일면도 있었다. 《자치통감》에 따르면 위왕의 뒤를 이을 세자로 낙점되자 너무나 기쁜 나머지 옆에 있던 신비의 목을 끌어 안고(…) 기뻐했다고 한다. 신비가 집에 돌아가 총명하기로 유명했던 딸 신헌영에게 이 일을 말해주니, 그녀가 평하길 왕이 되어 국사를 짊어진다는 게 고된 일인데도 그렇게 기뻐하는 것을 보니 위의 앞날이 오래갈지 걱정된다고 한탄했다고 한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물론 세자로 책봉되지 못하면 훗날 자기가 동생 조식에게 그랬던 것처럼 가혹한 결과가 기다릴 테니 기쁨을 드러내는 게 이상한 일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 관녕과 화흠의 설화를 보듯이 당대 사람들은 인간의 사사로운 감정을 자제하고 무게감있고 점잖은 사람을 추앙하는 풍조가 있었다. 물론 시대가 지나면서 이런 흐름도 바뀌면서 오히려 로봇같이 감정이 없고 무뚝뚝한 사람들을 인간미없고 나쁜 일도 서슴없이 한다면서 비판하는 얘기가 많아진다. 가령 조광조와 남곤, 정구와 정인홍의 얘기가 그렇다. 물론 그 시대 사람들이나 현대의 사람들이나 그렇다고 조비처럼 공적인 자리에서 자기의 입장을 망각하고 경박하게 구는 것이 무조건 용인되지 않으니 어떻게든 까이긴 했겠지만 말이다.
2.5. 조조를 잇다
220년 1월 아버지 조조가 죽자 곧바로 승상과 위왕에 올랐고, 가후를 태위, 화흠을 상국, 왕랑을 어사대부에 삼았다.
위서 문제기에 나오지 않고 진서 선제기(사마의전)에 나오는 이야기지만 조비는 즉위하자마자 얼마전까지 촉-위 양측의 치열한 싸움이 있었던 양양, 번성을 식량난을 이유로 포기하고 그 성을 다 불질러 버렸으며 조인을 완에 주둔할 것을 명하여 그대로 시행토록 했다. 이 명령의 시행 시점이 선제기에 따르면 '손권이 서쪽으로 군대를 움직일 때'이니 조비 즉위 직후 아직 손권이 서진한 지 얼마 안 되는 시점의 일이었을 것이다. 위서 조인전에서도 조인이 완으로 옮기고 그 사이 손권의 장수 진소가 양양에 진수했다고 하니 양번이 이 당시 위나라에서 버려졌다는 건 진서와 정사 삼국지 간 교차검증도 된다.
이때 사마의는 '손권은 우리 쪽에 붙으려하니 이 지역을 공격하지 않을 것이고 이곳은 요충지이니 버리면 안 된다'고 했는데 조비는 아예 손권이 대놓고 여길 얻으려 할 것이고 그냥 못 지킬것이라 생각하였는지 듣지 않았다가 정작 손권이 침범하지 않자 몹시 후회했다고 한다. 이는 병법에 통달했다 자뻑하는 조비가 정작 아버지가 그토록 말년에 걱정했던 요충지에 대한 이해도가 전혀 없었음을 뜻하는 것으로 보통 조비의 군재 수준이나 전략적인 시각이 실로 어땠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화로 꼽힌다. 손권이 남형주를 먹고나선 그냥 거기에 만족하고 양양, 번성을 적극적으로 공략하는 행동[5] 을 하지 않았으니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촉 대신 오가 위나라의 우환거리가 되었을 것이라 일반 사람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수준인데 이랬으니...어쨌거나 이후 조비가 조인과 서황을 보내 진소를 몰아내서 양번이 다시 위나라 땅이 되는 걸로 이 헤프닝은 종료된다.[6]
어쨌거나 조비가 아버지의 뒤를 이은 220년 3월에 황룡이 출현했다고 한다. 176년, 단양의 말을 기억하고 있었던 내황 은등이 그로부터 44년 뒤에도 살아있어서 "50년이 못되어 황룡이 나온다더니 맞네."하고 인증했다.
220년 3월에 하후돈을 대장군에 봉했으나 하후돈은 4월에 세상을 떠났다. 하후돈이 죽을 때 조비는 예법을 어기면서까지 곡을 하며 슬퍼하는 모습을 보였다.
당시엔 원소와 같은 군벌 조직이 도독/감군 관직체제를 사조직화한 경우도 있고 난세가 되니까 독군과 감군 모두 엉망진창이라고 해야 할 수준으로 남발됐다. 도독 관우가 도독 조루를 휘하에 두고 독했는 기록도 있을 정도니까. 조조군이라고 딱히 다르지도 않다. 조비는 이런 혼란을 정리하고 위제국의 독군/감군 체제를 확립했다.
220년 6월 열병하고 남방 정벌을 떠났으나, 실제적으로 개입은 하지 않았고 무력 시위 겸 헌제를 군사적으로 위협해 선양의 명분 다지기[7] 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8월에 봉황이 나왔다는 이야기가 또 나왔기도 하고(…), 조비는 초현, 곡려 정도에서 노닐다가 손권이 헌상하고 7월경엔 상용에서 4천 호 부곡을 이끌고 투항한 맹달과 하후상, 서황을 상용으로 보내 유비의 양자 유봉을 공격하여 서성, 방릉, 상용을 다시 탈환하고 맹달을 서성태수로 임명하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어쨌거나 이거 외엔 7월 이후에도 그냥 유람을 다니는 수준이라 이런 남정의 목적이 사실 헌제를 위협하는 본 목적 외에도 겸사겸사 사냥이나 잔치를 벌이고 싶어서 이랬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럼에도 이 무력 시위를 통한 상용 탈환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었는데 첫째로 위나라에서 촉의 명사가 투항했다는 걸 보여주어 맹달을 프로파간다로 쓸 수 있었고, 둘째로는 아버지 조조가 탈취당한 땅을 후계자로서 되찾았다는 명분을 챙기고, 셋째로는 한중군의 동쪽 부분인 상용을 빼앗아 한중왕 유비의 위상에 흠집을 내는데 도움이 되었다. 어쨌든 유비가 이끄는 한실 부흥 세력의 힘을 깎아 내리는 걸 헌제에게 대놓고 보여 줬다는 점에서 이후 이루어질 선양 작업에 매끄러운 기름칠을 해 주었다고 볼 수도 있다.
조비의 과시욕은 유별난 수준이었는데, 이 위왕 시절 남방 종군에서도 순욱#s-2(荀勗)이 칭찬했을 때 너무나 자연스럽게 자기 자랑을 할 정도로(…) 문무에 능하다는 자부심 혹은 자뻑이 강했다.
2.6. 헌제의 선양을 받다
조비의 여동생이 3명(조절, 조헌, 조화)이나 헌제의 아내였는데 조비가 헌제에게 선양을 강요할 때 사람을 보내 옥새를 내어달라고 하자, 조절은 몇 번이고 옥새를 내주지 않았으나 거스를 수는 없었기 때문에 사자에게 옥새를 내던지면서 통곡했다.
결국 헌제에게 220년 10월 28일 선양#s-1을 받았다. 연호를 황초로 삼고, 헌제를 산양공으로 삼고 상서에서 신(臣)이라고 쓰지 않게 했다.
이를 가리켜 무혈 선양이라느니 모범적 선양이라느니 하는 건 조조의 행각을 쏙 빼놓고 보는 눈가림일 뿐이다. 이미 조조가 동승, 복황후 등을 숙청하고 헌제의 아들까지 살해했으며 경기, 위황의 거병을 진압한 후 한의 관료들을 대학살 하면서 피를 다 뒤집어썼기에 조비는 더이상 피 흘릴 일도 없이 무난하게 선양 작업을 진행할 수 있었다. 어차피 선대 조조가 위왕, 구석에 주문왕 드립까지 쳐서 찬탈의 레일로드 다 깔아준 마당에 그 뒤를 이은 조비에게 그거 무시하고 선양 이상의 선택지도 사실 거의 없기도 했긴 했다. 지 애비처럼 나라를 구한 구국의 영웅이라 주변서 다들 어마 무셔라 하면서 통치 납득해주는 상황도 아니고.
그렇다고 뭐 황제 두고 아래서 위왕이 다 해쳐먹는 체제...그러니까 무슨 정이대장군 같은 거 애비 죽은 다음에 공식적으로 만들어낼 깜냥 되냐 하면 것도 아니고.[8] 선양이라도 안했으면 바로 아버지 조조를 넘어서지 못하는 도련님인 조비에게 있어선 헌제에 찰싹 달라붙어서 갈라먹기 시도할 경쟁자 치고 올라왔을 가능성도 있었다. 어쨌거나 선양 자체를 조조가 만들어낸 이해할 수 있는 흐름으로 받아들이더라도, 선양 이후 행보가 너무 졸렬해서 차라리 선양 안 받느니만 못했다는 인상이 강하긴 하다. 조비 선양이 까이는 것도 아마 이런 의미에서의 관점일 테고.
이런 조비 나름대로 난감한 관점을 보여주는 게 바로 맹달의 귀순과 조비의 지나칠 정도의 총애일 것이다. 투항 이전부터 맹달은 당시 위나라 시점에서 이미 촉 중진급 인사로 인식되고 있었을 만큼 네임드이긴 했고 더군다나 조비는 별로 한 것도 없던 듣보잡이 후계자로 등극하더니 1년도 지나지 않아 지가 천명을 받았느니 어쨌느니 소리하면서 선양까지 받으며 한나라 체제를 공식적으로 붕괴시켜 버렸는데, 일부 사족들이 상복을 입고 통곡하는 등 조비 너무 막 나가는 거 아니냐 하는 여론이 제법 존재했음은 사서에서 확인된다.
아니 굳이 이거 따질 거 없이 한나라 망하기 불과 1~2년 전에 허도에서 한의 충신들이 들고 일어나고 관우가 허도를 위협하자 관우의 무리들이 허도 근처에서 봉기하는 사태가 있었다. 사실 조조가 관우를 상대할 때 너무 과도하게 대응한 거 아니냐는 지적도 있는데 당시 상황만 보면 전혀 이상한 게 아니었다. 유비 진영에서 관우는 유비를 제외하고 한나라 조정의 정식 관직과 작위를 동시에 받은 유일한 인물로 애당초 관우와 연계하려 했던 경기와 위황의 난, 후음의 난, 관우의 진격 이후 그 짧은 시간에 너도나도 관우의 인수를 받은 허도 인근의 봉기들이 단순히 불과 1년 사이에 아무런 사전 계획없이 순식간에 발생할 수 있는 일이었다고 보긴 사실 어렵다. 차라리 관우가 그전부터 사전공작을 해야 가능했을 일이었다고 보는 게 합리적일 것이다.[9] 관우가 벌인 공작이나 한실부흥 세력이 그의 강성한 세력과 연계하려는 움직임을 보건대 관우가 언제든지 한실과 연계하여 천하에 영향을 끼치기 충분한 인물이었다고 보면, 이미 한중에서 유비에게 얻어맞은 조조 입장에선 아예 관우의 예봉을 어떻게든 꺾으려고 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며, 그만큼 유비-관우를 비롯한 한실부흥 세력들은 조조가 죽기 직전까지도 위협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조조가 한창 관우를 상대하기 위해 원기옥(?)을 끌어 모으던 219년 10월은 조조가 죽기 불과 3개월 전이다. 조조라고 자기 몸 상태를 모르진 않았을 테지만[10][11] 관우가 비록 서황에게 가로막혀 번성을 얻는 데는 실패하긴 했으나 이미 면수를 장악한 상태였기에 이를 경계로 양양을 조조로부터 빼앗아 조조군에 맞서는 기점으로 삼아 정면 대치와 긴장 구도를 유지할 가능성은 농후했다는 점을 감안하지 않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게 성공한 상태에서 관우가 경계로 삼은 면수를 넘을 방법도 없이 조조가 죽었다고 생각해본다면, 조조 입장에서는 죽기 직전에 유비와 그의 오른팔인 관우에게 연속으로 패배한 채 땅과 기세를 한실부흥 세력에게 빼앗기고 후계자에게 인수인계 하는 꼴이 된다. 이런 결과는 이제 막 태동하려는 위나라 입장에선 최악의 사태가 될 수가 있었기에 조조는 죽기 직전까지 온 힘을 다해 이 고비만은 넘겨야 했던 것이다.
결국 218년 정월부터 219년 12월까지 이르는 이 사태는 손권을 충동질한 결과를 통해 관우가 조조가 죽기 직전에 죽음으로서 어느 정도 막아낼 수 있었지만 그와 동시에 한나라 조정에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던 조조도 죽었다. 절대 다수의 백성들이 여전히 후한 신민 정체성 가지고 있던 시대였고 따라서 조비가 도련님이긴 해도 뒷통수 싸해지는 감각을 어느 정도 인지는 했었을 것이다. 실제로 이것 때문에 졸렬한 권위 세우기와 위대한 업적에 집착하다 가만 있었음 중간은 갔을 본인 평가 오지게 깎아먹은 면도 있고. 이런 상황에서 위대한 선대 조조가 끝내 토벌하지 못하고 죽은 촉한 중진급 네임드인 맹달이 조비에게 귀순 의사를 밝히고 선전하기 좋게 부곡 4천이라는 혼수품까지 챙겨온다? 조비는 맹달을 국가적 영웅으로 띄워줄 수밖에 없다. 유비가 맹달을 핍박해 위나라에 투항하게 했다고 유봉에게 죄를 물었을 정도로 거물이니까지 하니 '장군의 그릇입니다' 했다가 '재상의 그릇이옵니다' 했다가 '아니오. 필경 악의의 재림입니다' 하는 식으로 중신들의 맹달 평가가 점점 널뛰기하는 현상도 생겼을 것이다. 또 기록에 따르면 심지어 맹달은 꽤 잘생긴 데다, 투항해오는 주제에 의외로 위축된 모습도 없고 배운 티도 좀 나고 언변도 청산유수여서 신하들이 말하는 그릇에 적합한 인물인 것처럼도 보였다. 그러니 조비는 하고 진심으로 감동해서 막 수레 같이 타고, 스킨십도 하고, 온갖 선물에 벼슬 퍼주며 뇌절했던 거고 맹달 아니꼽게 보던 대표격인 사마의나 유엽이 조비한테 하며 맹달 너무 믿지 말라고 간하나 조비는 우리 맹달 그런 사람 아니라며 듣는 척도 안 하게 된 것이었다.[12]
어쨌거나 조비는 더이상의 피를 보지 않고 조씨 황실의 선조를 유우(有虞, 제순)씨로 높여 조위 황실의 통치의 정당성을 높이고 선대 황조를 우대했으며 선양을 받을 때 공경과 열후, 제장과 흉노의 선우, 네 오랑캐 사신 같은 사방의 이민족 사절들을 들이는 등 수만 인을 배석시키고 유교 경전을 적극적으로 인용하면서 정통성에 대한 정당성을 널리 알려 불협화음을 최소화하는 매끄러운 개국 퍼포먼스를 보였다. 여기에 오행설 및 도참설을 써가면서 한위선양의 정당성을 높이려 했다. 대표적인 예로 급사중 박사 소림, 동파가 이렇게 말했다.
촉한이 한나라를 계승한다는 명분을 댔지만 비시는 위나라를 치지 못한채 황제에 즉위하면 대의명분에 맞지 않는다며 반대했으며 유파도 그같은 일은 천하에 대해 기량이 좁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생각하고 느긋하게 하기를 원했다고 한다. 이렇게 조비의 등극과 달리 관우의 죽음으로 유비의 세력이 한풀 꺾인 상황이 오자 유비가 황제에 올라 한실을 잇는다는 명분을 잠시 유보해야 한다며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게 되었고 결국 유비의 제위 등극에는 잡음이 낀 모습이 보인다. 결국 촉한은 유씨 정통성 외에도 도참설에도 기대야 했고 오의 경우는 그런 것도 없었기에 도참설로 떡칠을 해서 간신히 제위에 오를 수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조비는 마지막까지 한나라의 천자가 가진 권위를 잘 써먹고 관우의 죽음으로 한실부흥을 외치는 강성한 유비의 세력을 한풀 꺾어 거의 마무리 단계에 오른 조조의 역성 쿠데타 작업을 충실히 마무리 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올해(220) 10월에 (북두성이 가리키는) 월건이 곧 전욱이 천명을 받은 분양에 해당하므로 바야흐로 위로써 시월에 선양을 받는다면 이는 시조가 천명을 받을 때의 징조와 합치됩니다. 위나라의 씨족은 전욱으로부터 나왔으며 순과 조상을 같이하는 것이 춘추세가에 나타납니다. 순이 토덕으로 요의 화덕을 이었는데 지금 위 역시 토덕으로 한의 화덕을 이으니 오행의 운행은 요순이 주고 받는 때의 차례와 부합됩니다.
(중략)
지금 한의 기운이 이미 끝났고 요상한 이변이 나타나 마지막임을 나타내는 것은 명백하니 폐하가 천명을 받으심은 상서가 거듭 충분히 반복해서 주도하게 아뢰었고 말로 설명했다 하더라도 그에 대신할 정도로 명백한 표현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지금 이미 조서가 발포되었는데 새수를 두르지 않고 위로는 천명을 거스르고 아래로는 백성의 바람을 어기십니다. 신은 삼가 옛 전적을 살피고 도위를 참고하니 위나라의 행운 및 천도가 소재한 바가 즉위할 징험이 이재 금년 이 달에 있음이 분명하옵니다.
조비는 후대 욕을 먹어가면서까지 헌제의 딸과 결혼하는 행위로서 요순의 선양을 헌제와 자신에게 투영시켜서 재현시키고 이렇게 만든 혈통론을 위나라가 망할 때까지(조예 때 한 번 삐끗하긴 하지만) 유지시켰다. 부족한 정통성을 보완하기 위한 알량한 행위지만, 조비가 여러모로 정통성 유지를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곤 평가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역시 조비가 한나라 황제를 협천자 한 위나라 군주였기 때문에 가능한 행위였으며 방계 유씨 황통만을 내세운 유비나 아예 그것도 없어서 도참에 의존한 손권과는 다른 조건이었기 때문이라는 평가를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조비는 수도를 허창[13] 에서 낙양으로 옮겨서 새롭게 궁을 지었다.
조비는 조강지처 문소황후를 내팽겨쳤는데, 결국 곽여왕의 모함에 221년 6월 28일에 사약을 내려 죽여버렸다.
221년 6월 29일, 일식이 나타나자 담당 관리가 태위(가후)를 면직시켜야 한다고 상주했다. 조비는 재해나 이변이 출현하는 것은 우두머리를 견책하는 것이지 신하들에게 허물을 돌리는 것은 부당하다고 거절한다.
2.7. 이릉대전
221년 11월, 손권을 오왕으로 봉했다. 오주전 주석에 의하면 손권이 신하들과 의논하니, 차라리 상장군(上將軍) 구주백(九州伯)이라는 이름을 스스로 칭하고, 위나라에서 주는 왕위를 받지 말라고 했다. 이에 손권이 대답했다. "구주백이라는 이름은 들어보지도 못한 이름이다. 예전에 유방도 한때 항우로부터 한왕(漢王)이라는 칭호도 받았는데 그것은 다 시세에 따른 것이오. 왜 받지 말라는 것이오?" 하고는 왕위를 받았다. 하지만 역시 오주전에 의하면 222년 3월 당초, 손권은 겉으로는 위나라를 의탁하고 섬겼지만, 진실된 마음으로 의지한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손권이 조비가 주는 작위를 받은 것은 진실된 항복이 아니라 그저 이릉대전을 앞둔 시세에 따라 조비를 농락했을 뿐임을 알 수 있다.
앞으로 주야장천 남방 정벌에서 깨질 조비이지만 의외로 이릉대전의 승패를 예측하기도 했다. 《연의》에도 나온 것으로 유명한 일화로 222년 윤달 5월 유비의 군대가 동쪽으로 내려와 손권과 교전하면서 7백여 리에 이르는 나무 울타리(樹冊)를 세워 진영을 이었다는 말을 듣고, 유비가 깨질 것을 예측하고 실제로 7일 만에 유비를 깨뜨렸다는 손권의 소식이 오기도 했다.
그러나 이릉대전 항목에도 나와있듯이 이를 곧이 곧대로 듣고 조비가 군사적 혜안을 보였다고 판단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백전노장인 유비가 병법을 모를리가 없으며 보급로를 지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여러 개의 진지들을 설치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병법은 상황에 따라 다르게 적용해야 하는 것이지 문자 그대로 적용한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니다.
만약 유비의 진영이 대놓고 병법을 어긴 허접한 것이었다면 진작에 오나라 군대에 박살나고 패퇴했을 것이다. 그러나 정반대로 촉한군은 초반에는 승승장구했고 이후에도 진영을 굳게 세우고 지키자 반년 이상 대치가 가능할 정도였다. 게다가 육손을 제외한 오나라의 수많은 베테랑 장수들도 ''''많은 요충지는 모두 유비가 굳게 지키고 있으므로 공격하면 반드시 불리할 것입니다.'''' 평할 정도였다. 수십년간 전장을 오고 간 장수들 눈에도 유비의 진영은 도저히 공략법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튼튼했다는 소리다. 심지어 그 육손마저도 첫 공격은 실패해서 장수들에게 "헛되이 병력을 소모시킬 뿐입니다." 핀잔을 들었다. 즉, 진영의 헛점을 유일하게 찾아낸 육손이 대단한 것이지 유비가 병법을 어겼거나 상황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한 것은 아니다. 조비의 발언은 훈수를 둘 때 원론적인 말을 하는 사람의 심리와 비슷했고, 승패 예상만 결과적으로 맞췄다고 봐야 할 것이다. 정사 삼국지는 위나라 쪽으로 편향되거나 포장해주는 부분이 많은데 이릉대전 관련 조비의 발언도 이런 경우라 봐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조비보다 훨씬 뛰어났던 위나라 1세대들은 매번 격돌한 유비를 가장 경계했고, 당장 위나라부터 유비가 죽자 촉은 이제 별거 없다고 판단할 정도였다.
더 큰 문제는 양 적국이 내분하는 절호의 찬스를 그냥 눈뜨고 지켜만 봤다는 것이다. 유엽전에 따르면 이릉대전을 앞두고 유엽은 촉을 도와 오를 멸망시키고 촉을 없애면 천하 통일이 가능하다고 조언했다. 촉이나 오나 둘 다 위에 비하면 약하지만 촉은 진공해서 들어가기가 힘들기 때문. 하지만 조비는 이 말을 전혀 듣지 않았으며 결국 이릉대전 이후 촉과 오가 다시 연합하고 삼국 시대가 시작된다.
222년 9월 3일에는 외척을 배제하겠다는 조칙을 내린다.
이에 대해서 외척의 발호를 억제한다는 긍정적인 면이 있는 반면, 《세설신어》 관련 떡밥을 생각하면 좀 이상한 추측이 들게 된다. 6일 후 곽여왕을 기어이 황후로 삼으니 그녀가 문덕황후다.부인이 정치에 관여하는 것은 혼란의 근본이 된다. 지금부터 모든 신하들은 태후에게 일을 상주하지 마라. 황후의 일족은 정치를 보좌하는 임무를 할 수 없고, 또 이유 없이 영토를 갖지 못하며 작위를 받을 수 없다. 이 조칙을 후세에 전하라. 만일 이 조칙을 위반하는 자가 있다면 천하가 함께 그 자를 주살할 것이다. - 문제기
2.8. 정치에 기울인 노력
선양을 통해 황제의 자리에 오른 조비는 재위 기간 내내 제도의 확립과 민심의 안정 그리고 유학의 부흥에 힘쓰는 등 난세를 끝내고 태평성대를 이끄는 통일 군주로서의 면모를 보이고자 했다. 제도적인 면에선 행정 구역을 재확립하고 인사 제도를 정비해 구품관인법을 실행한다. 한편으론 관료간의 상사 탄핵에 제약을 가했는데, 이는 고위 관료와의 타협이라고도 볼 수 있으나 어떤 측면에서 관료기구 내의 질서를 확립한 거라고도 할 수 있다.
조비는 주로 조조가 했던 정책을 유지했는데 이는 공도 될 수 있고 조조의 강압적인 정책을 유지했다는 점에서 과도 될 수 있다. 그는 구휼책이나 사면령을 종종 내려 민심의 이반을 제지하고자 했다. 심지어 연•예주 일부 지역 한정으로 세금 면제책도 시행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사병의 유해를 되찾아 제사를 지내게 한다든가, 사사로운 복수를 금지시키고 무고를 엄하게 다스리며 서역의 도시 국가들의 왕이 각각 사자를 파견하여 헌상품을 바치니, 무기교위를 설치하고 서역과의 무역을 재개하는 등의 업적을 남겼다.
유가 부흥책도 역시 사회의 안정과 전통적인 향촌 질서를 부활시키고자 한 정책으로 보인다. 유학의 부흥을 위하여 즉위 직후(221년 2월) 노군에 공자의 묘당을 다시 세우고 주변 일백호에 그를 관리하게 하는 한편 제사 규칙을 정하고, 더 나아가 장례 제도를 개선시킨다. 그리고 저술 사업을 시행해 모든 유학자들에게 경전을 편찬하도록 하여 유학 경전을 편찬, 천여편에 달하는 '황람'을 출간한다. 뭔가 괴리감이 들겠지만 치세 내내 유가적 덕목의 권장에 힘써 왔다. 한나라 말엽의 당시 비관적, 회의주의적 경향의 사고가 지식인계 전반에 만연했다는 점에서 조비의 유가진흥에 기울인 노력은 그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정통성 측면에서도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유가 부흥책으로 도덕성의 향상을 기치로 삼았음에도 스스로는 이와 반하는 패륜적 행위를 거듭 자행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지도 계급의 도덕성 향상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조비의 밑에서는 법률의 가혹함으로 말이 많았다고 한다. 하염없이 백성을 이주시켜 민초 사이에서는 불평불만이 있었다. 먹고 살게는 해주지만 그렇다고 마음과 몸이 편하게는 못 해주기 때문에 조비 역시 민담 등에서 이미 악역이 된 듯하다. 국경 지대에 있는 농민들 강제 이주는 예사였으며, 민둔제의 경우는 징발된 농민으로 하여금 황무지를 개간시키는 것 역시 계속되었다. 농민들을 강제 이주시키는 것은 예사였으며 척박한 자신의 고향을 백성들을 이주시켜 강제로 개간하려 하자 노육은 이를 반대했다. 그러자 조비는 그 의견에는 따랐지만 노육을 원망하여 좌천시킨다.
한편 전쟁은 해야겠는데 체계적으로 병력을 끌어모으기는 불가능한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조조는 자신이 깨뜨리거나 포섭한 호족, 군벌들이 거느린 사병과 사민, 토벌한 도적떼, 유랑민들을 끌어모아 병력으로 활용했다.이걸 병호제라고 하는데 병호제는 그렇게 편성한 병사들과 그 가족들을 일정한 지역으로 끌어모은 다음 어느 정도 생활수단을 마련해서 먹고 살게 해주는 대신, 병호의 남성에게는 병역의무를 부과해 병력으로 활용한 제도다. 아버지가 사망하면 자식이 계승하고 형이 죽으면 동생이 이어받아서 병역에 종사하는 세습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며 일반 백성들과 호적을 달리하여 군부에서 이들을 관장 했다. 이 제도가 제대로 시행되기 위해선 병사들에게 가정을 만들어 줄 필요가 있었기에 과부는 물론이요 백성의 딸이나 심지어 유부녀(!)까지 뺏아서 병사들의 아내로 던져주는 것은 덤. 원래 조조 때부터 있었던 제도이지만 조비 대에는 일반 여성을 강제로 다른 남자에게 결혼시키는 지방 관리들이 많아 백성들의 울음이 그치지 않았는데 두기만이 이를 따르지 않았다. 후에 조엄의 일로 이 사실을 안 조비조차 좌우의 신하들의 얼굴을 쳐다보고는 안색이 창백해졌다고 한다.
또 이런 일이 있었다. 병호제는 기본적으로 먹고 사는건 보장해 줘야 하는데 조비는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기주 병사들의 병호를 10만호 떼어다가 하남을 튼튼히 한다며 이주시킬 계획을 세운다. 당시 해충 피해로 흉년이 계속되어 백성들이 기아에 고통받고 있있던터라 신하들은 전부 옮길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조비의 고집은 꺽일줄 몰랐고, 신비가 나서서 조정 대신들과 조비를 만났지만 조비는 화를 내자 신하들은 아무도 말을 못했다. 신비가 나서서 "지금 병사들을 옮기면 민심을 잃게 될 것이고 또 그들에게 줄 식량도(거듭된 흉년으로) 없다고 반대했지만 조비는 끝내 5만호를 강제이주 시켰다. 신비가 그들에게 줄 식량이 없다고 했으므로 물론 가는 길에 식량 대주며 편하게 보내주진 않았을것이다. 이처럼 민심을 잃었기 때문에 위가 망한 이후 육조 시대 때 이미 각종 야사나 민담에는 조비를 비판하는 내용이 범람하게 된다.
후일 오나라의 마지막 승상 장제는 '조조가 공이 중국을 뒤덮고, 위엄이 사해를 뒤흔드나, 속임수를 숭상하고 계략에 의지하며, 정벌이 그치지 않아, 백성들은 그의 위엄을 두려워하나, 그의 덕은 품지 않았고 조비, 조예 부자가 참혹하고 지독한 짓을 계속하여, 안으로는 궁실을 일으켰고, 해마다 안정을 얻지 못했으니, 인심을 잃었다. 반면 사마씨는 백성들에게 은혜를 배풀어 민심이 그들에게 돌아가 수춘 3반과 조모의 죽음으로도 사방에선 움직임이 없으며, 위세와 무력이 성하여, 근원은 견고해졌고, 민심이 복종하여, 간사한 꾀가 세워졌다' 평가했다. 전반적으로 법이나 생활상이 각박했던 조위시대와 그래도 뭔가 조위보단 온건책, 민생안정책을 써보려다가 결과적으로 후한말부터 내려온 문벌귀족 등 내부 모순의 극대화와 이민족의 발호로 망하긴 했지만 어쨌든 처음 시작할때 의도는 좋았던 사마씨 서진시대의 차이라고도 할 수 있다.
2.8.1. 구품관인법에 대해서
한편 제도의 정비 측면에서는 많은 논란을 겪고 있는데, 1년에 10만 명당 효렴 한 명씩을 추천하게 했던 기존 후한의 향거리선과 달리 우수한 인재가 있다면 굳이 이런 제약을 두지 않았으며 또한 각 지역에 중정관이라는 심사관이 천거하고, 능력에 따라 아홉 등급으로 나눈 구품중정제(=구품관인법)는 지역 사회 내에서의 여론과 인품에 따른 채용을 하는 향거리선제의 기본 틀을 되살리되 여론보다 다소 낮은 향품을 내린 뒤에 그에 준하는 관품을 내리는 방식이다.
구품중정제가 시행 초에는 전란으로 흩어진 사족을 재규합하고 묻혀버린 인재들을 발굴하는 등 긍정적인 제도였고, 후대 사마씨가 집권하는 과정에서 심사관들을 친사마씨로 개편하여 사마씨의 탈법적 집권에 이용했지만 바로 그 이유로 서진 정권은 집권 후에 해당 제도를 개편하게 된다. 위나라 구품관인법의 본래의 의도는 순수 관료적인 성질을 띤 것으로, 문벌을 떠나 개인의 재능과 인덕에 따라 적당한 지위에 적당한 인재를 발탁하는 데 있었다. 그런데 한나라 이래 사회에 세력을 떨치고 있던 귀족주의는 갑자기 이 제도를 귀족적인 것으로 변질시켜 버렸다. 구품관인법은 그 실시 처음부터 사뭇 귀족적으로 운영되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던 듯하다. 세력가의 자제가 특별 대우를 받는 것이 귀족주의의 시작이고, 그러한 사실이 쌓여서 귀족제가 성립하는 것이다. 구품관인법의 운영이 귀족적이었다는 것은 다른 측면에서도 고찰할 수 있다. 그것은 한나라 이래의 다른 선거법, 즉 수재, 효렴, 현량, 태학시경(太學詩經) 등과 비교하면 알 수 있다.
수재, 효렴의 급제자는 한대처럼 낭에 임명되었고 각 주마다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주군에서 천거된 수재, 효렴은 중앙에서 시험을 본 뒤 성적에 따라 제(第)가 덧붙여졌는데, 제는 중정이 내리는 향품에 대응되었다. 그리고 수재의 성적은 3등으로 나누어졌던 듯하며, 가령 이것을 갑을병으로 이름 붙이면, 갑은 향품 2품에 상당한다. 특수한 사례를 제외하면, 보통 병에 급제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효렴은 수재보다 조금 자격이 낮다고 알려져 있다. 수재는 주에서 천거되고 효렴은 군에서 천거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중앙에서의 시험도 수재에게는 책(策)을 묻고 효렴에게는 경서의 뜻을 묻는다. 경서의 뜻을 파악하는 것은 보통 수준의 재능만 있어도 독서량을 늘려 달성할 수 있지만, 문학적인 대책은 천재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이라고 여겨졌다. 그러나 성적에 따른 향품은 수재와 별로 차이가 없었던 듯하다. 곧 효렴의 기가관을 보면, 역시 갑을병 3등이 있고, 그대로 수재의 그것과 대응했던 듯하다.
일반적인 선거였던 수재, 효렴 같은 과목과 달리 제과(制科)에 해당하는 방식으로서 때에 따라서 인재를 구한다는 취지였던 선거 방식은 이미 한대부터 존재하였고, 위, 진도 이것을 계승하였다. 위, 진에는 현량과가 많았는데, 이밖에도 방정(方正),직언(直言) 등의 과목도 있었다. 현량과도 역시 갑을병 3등으로 나뉘어 있었다. 다음으로 태학에서 학생에게 경서를 시험하는 제도가 있었다. 태학에서 학생에게 경서의 뜻을 시험하는 경우도 최하의 급제는 향품 4품자에 상당하였고, 다른 공거(貢擧)의 사례와 대비해서 생각하면 병이었을 것이다. 종합하면, 수재, 효렴, 현량, 시경은 모두 갑, 을, 병 3등으로 나누고, 병은 다시 상하로 나뉘어 있었던 듯하다. 그리고 그것이 향품의 2품,3품,4품에 대응되어 있었다.
이 당시 수재, 효렴을 천거하는 것은 주군의 장관인 자사와 태수의 책임이지만, 실제로는 중정이 고문을 맡았던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시험을 실시하는 것은 상서였다. 때로는 천자 스스로 책문을 행하는 일도 있었다. 수재, 효렴 및 현량 등의 제과에서도 규칙상으로는 그 성적에 의해 향품 2품 내지 4품을 줄 수 있게 되어 있었지만, 실제로는 2품,3품이 주어지는 경우는 매우 드물고 거의 대부분이 4품으로 제한되어 있었던 듯하다.
게다가 불리한 것은 당시 점차 귀족주의가 만연하여 개인의 재능에 따라 상품을 얻은 자에 대해서는 이부가 관위를 주는 데 인색하였던 듯하다. 이런 현실은 또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사도부와 상서의 차이가 이미 나타났다고도 할 수 있다. 사도는 단순히 자격을 심사하여 관리의 자격을 줄 뿐이지만, 실제로 임명하는 것은 이부의 일이다. 사도부는 이부의 인사에 간섭할 수 없기 때문에 단순히 관리의 자격을 줌으로써 일이 끝난다. 결국 인사의 실권을 쥐고 있던 이부 쪽이 강했던 것이다. 이부에 의한 인사권의 장악이나, 사도와 중정의 유명무실화는 이미 위, 진의 교체기에 그 단서를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세력 있는 집안의 자제로 이미 높은 향품을 얻은 자나 혹은 얻을 가능성이 있는 자가 다시 시험을 받는 것은 적지 않은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그래서 수재, 효렴이나 현량의 천거는 배경이 없는 빈천한 자제만이 응시하게 되고, 세가의 자제는 가령 천거되어도 사퇴하는 풍조가 일어났다. 이렇게 되면 점점 수재, 효렴의 지위는 하락하게 되고, 시험을 보는 것도 형식적으로 시행될 뿐이며, 대체로 채점은 병으로 정해졌다. 그렇게 되자 차라리 시험을 폐지해 버리려는 상황에까지 이른다.
한편, 위나라가 성립하여 강력한 군대를 배경으로 중앙 집권 정부를 수립하자 그것에 반비례해서 지방 세력이 약해졌다. 또 중앙은 의식적으로 지방을 억눌러서 중앙에서 통치하기 쉽게 군을 잘게 나누었다. 그리고 한번 중앙 정부에서 높은 지위를 차지한 세력가는 그대로 눌러앉아 자손에게 그 지위를 전하려는 경향이 강하였다. 이것은 중앙에서도 지방 피라미드를 디딤돌로 이용하여, 그 위에 전국적인 귀족 피라미드가 형성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이것에 대하여는 구품관인법이 처음부터 귀족적으로 운영된 것도 큰 원인을 이루고 있지만, 위나라 말기에 중정제도가 개정되어 군중정 위에 주중정이 다시 두어진 것이 점점 이 경향을 결정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위나라가 구품관인법을 시행하기 위해 지방에 설치한 중정은 처음에는 군중정뿐이었다. 하지만, 위나라의 대신 사마의의 건의로 위나라 말기에 주중정이 설치되었다. 아마 종실은 중정이 될 수 없는 것을 이용하여 사마의의 심복을 지방의 주대중정으로 많이 임명하여 자기 세력의 온존을 꾀하고, 또 지방 호족과 미리 연락망을 몰래 마련해 두려고 꾀하였는지도 모른다. 주대중정이 두어지게 되면, 이것은 군중정과는 성격이 다르다. 왜냐하면 한대까지 지방 자치의 단위는 군이고, 주는 단순히 이것을 감독하는 구분에 불과하며 결코 군 위에 두어진 행정 구분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위․진 이후도 군은 행정 단위였어도 자치단체적인 색채가 강하다. 주도 마찬가지로 행정 단위이기는 해도 중앙에서 파견한 기관이라는 색채가 농후하다. 따라서 새로 설치된 주대중정이 군의 여론을 종합하기보다는 중앙의 방침을 하달하고 군중정을 감독하는 입장에 놓이는 것도 자연스런 추세이다. 주중정이 설치되자 향품의 결정권이 점차 중앙으로 집중되고 동시에 귀족화되었다.
주대중정이 신설되어 군중정의 신분에 간섭하게 되면 여기에 사도-주대중정-군대중정-군소중정이라는 통속 관계가 생기고, 이른바 일종의 관료 조직이라고도 할 수 있는 계통 속에 편입되어 약간이나마 상하의 개인적인 관계가 성립함으로써 점차 그 독립성이 상실되어 갔다. 그리고 위로부터 억압된 울분은 때때로 아래로 내려가 배출구를 찾으려 하는 일도 있다. 따라서 임명된 중정이 지방의 관리 후보자에게 내리는 향품 또한 매우 자의적으로 결정되었다. 여기서 중정이 내리는 향품이 자의적이라는 것은 어떤 일정한 방향이 있었는데, 그것은 귀족주의였다. 중정의 원래 임무는 아래의 여론을 듣고 이것을 위에 전달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중앙의 사도가 주중정의 신분을 결정하고, 주중정이 읍중정의 신분을 결정하게 되자, 위에서 아래로의 통로가 크게 열리게 되었다. 따라서 중정이 내리는 향품도, 아래의 여론을 위해 전달하기보다는 위의 의향에 영합해서 아래의 여론을 날조하는 결과에 빠졌다.
중정은 말 그대로 중립을 지켜야 하지만 진짜로 완벽한 중립을 지키는 인사는 예나 지금이나 찾아보기 힘들었다. 때문에 각 중정들끼리 담합해서 자신들과 관련을 가진 사람들에게 상품의 상신서를 올리거나 서로를 중정으로 추천함으로써 자신들을 지지하는 파벌을 만들 수 있다. 사마의 일당이 바로 이런 식으로 조위의 기반을 허물었던 것이다.
구품관인법은 각 지역의 여론인 향론이 강력하면 그나마 제대로 돌아갈 수 있다. 하지만 삼국시대의 대혼란 속에서 향론은 각 지역이 황폐화되고 지역민들이 유랑하면서 붕괴된 지 오래였다. 역설적이게도 애초에 향론들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었다면 구품관인법을 만들 이유가 없다. 따라서 향론이라 해도 사실상 중앙정부의 중정이 생각한 향론이 되어버리므로 중앙정부에서 생각한 인물이 추천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원래부터가 중정 자체가 지방의 의견을 의도적으로 중앙정계의 의견으로 교체하여 호족들의 중앙정치 참여를 걸러 중앙 입맛에 맞는 사람만 선발하는 수단이자 중앙정치 내부의 균형을 유지할 수단이었는데 그러므로 시간이 지나면서 즉, 형식적으로만 지역민심을 감안하는 제도가 되었다.
거기에 뒤에서 말하겠지만 동진 이후 귀족사회가 완성되자 중정들은 사실상 무력화되었고 이부의 판단이 절대시되자 그야말로 지방 민심이 무시되는 빈도나 사태가 잦아지게 된다.
위진교체기 당시 그다지 큰 동요 없이 그대로 지위를 인정받았던 귀족 사회는 서진대에 들어가면서 점점 더 귀족적인 색채를 더해갔다. 사마의, 사마사, 사마소 3부자에게 탄압받던 청담풍이 다시 부활했을 뿐만 아니라 이전보다 더 강한 기세로 귀족 사회를 풍미했다. 게다가 이 청담은 구품관인법과 결합했다. 청담은 귀족의 특권이고. 구품관인법도 호족보다 귀족에게 우선적으로 적용되었다. 그 결과 담론 문화인 청담 담론에 뛰어난 자가 향품에서 윗품을 얻어 그대로 높은 관품에서 기가하게 된다. 이러한 풍조를 비난하는 관점으로 볼 때 바로 헛된 명성으로 사람을 취하는 것이었다.
귀족의 취미인 청담도 원래는 개인의 재능을 가장 중시해야 하지만. 그것이 귀족적인 취미라는 사실부터 곧바로 귀족제도로 이행할 수 있는 경향을 가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귀족의 취미는 대개의 경우 하루아침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대를 거쳐 세련되어지기 때문이다. 예컨데 서진 무제 중기부터 관리 등용의 선거를 장악한 산도는 죽림칠현의 한 사람으로 손꼽힐 정도로 청담에 뛰어났다. 하지만 정작 자신은 명족 출신이 아니고 귀족적 취미에도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공평한 인사를 시행했다고 일컬어진다. 그런데 무제에 이어 어리석은 혜제가 즉위하고 같은 죽림칠현의 한 사람이면서 명족 출신인 왕융이나 비슷하게 청담에 열중했던 왕연이 선거를 맡자 귀족주의가 대두하였다.
처음부터 귀족주의적인 경향을 가진 구품관인법은 점차 귀족적으로 운영되었다. 향품은 문벌에 따라 결정되었다. 문벌은 원래 세월을 두고 쌓여서 생기는 것이므로 고위의 귀족은 그 문벌이 더욱 높아져서 문벌 집안 가운데 다시 여러 등급의 계층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러한 가문의 지체를 문지라 하고. 문지의 높고 낮음을 유품이라 한다. 이것과 청담사상이 결합하여 위진시기의 귀족주의는 성행하게 된다.
구품관인법에서 중정의 힘이 미치지 않는 구름위의 인사가 있다는 것은 앞서도 언급했지만, 위나라 시대에는 종실이 정치에서 물러나 있었기 때문에 그다지 문제는 없었다. 그러나 서진에 들어가면 방침이 바뀐다. 위나라가 근친의 종실을 학대했기 때문에 고립무원에 빠져 일찍 멸망했다고 생각한 서진의 천자는 종실을 우대하여 먼저 그들에게 영토를 주고 봉건 군주로 삼은 뒤에 다시 병력을 갖게 하고 관료를 지배시키며, 게다가 관료의 지위까지 갖게 하였다. 이러한 종실의 관료생활은 일반 귀족과는 별개로 취급하여 아마 중정의 관할 범위 밖에 두어졌고, 종정경(宗正卿)이 관장하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다음에 중정의 권한으로부터 절반 가량 이탈한 것에 종실이 아닌 봉건 제후가 있다. 위대에는 종실인 근친자만 왕에 봉해지고 식읍을 받았으며, 이밖에는 명목적인 산후(散侯)가 있는 데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위․진 혁명의 직전에 혁명에 의한 동요를 막기 위해 사마씨의 의도로 대대적인 봉건제가 채택되었다. 이것이 역사상 5등작의 설치로 기록되어 있는데, 왕과 산후 사이에 5등의 개국작(開國爵)을 설치하여 사마씨의 동료를 봉건 제후로 세운 것이었다. 5등이란 개국공이나 개국후, 개국백, 개국자, 개국남을 말하며, 각각 봉읍을 받고 관품이 정해져 있다.
다음으로, 중정의 직무 범위에서 실질적으로는 일탈하면서도 또한 중정이 향품을 내려야 하는 것은 1품관인 삼공의 자제이다. 삼공의 자제는 대개 통념상 5품관 기가로 정해져있었는데, 삼공의 자제는 대개 통념상 5품관 기가로 정해져있었던 것은 앞서 말하였다. 이들은 주로 청담을 이용하여 사교계에서 활약하는 방법으로 향품을 받았다. 당시에는 보통 20세가 되면 관직에 나아갔기 때문에 그때까지 사교계의 꽃이 되어 있어야 했다.
이밖에 20세 이전의 청소년에 대하여 장래의 전망을 꿰뚫어 보고 향품을 주어야 한다고 하면 중정의 직분 또한 어려운 점이 있다.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불리는 것이 싫으면, 중정은 점쟁이가 될 요량으로 그럴싸한 구실을 달아 장래를 예언하는 향품을 내려야 한다. 한번 높은 향품을 내리면 자기의 인륜에 대한 현명함이 손상되지 않도록 상대를 출세시키지 않으면 곤란한 지경에 처한다. 동시에 낮은 향품을 받은 사람이 출세를 해서도 곤란하다.
구품관인법은 사대부 계층의 문벌 귀족화를 초래해 조위와 서진의 멸망과 오호십육국시대의 도래라는 최악의 결과를 내었으며 천하를 도탄에 빠뜨리고 수많은 폐단을 낳았다. 조예 사후 조방 대에 들어서야 하후현, 하안을 중심으로 하는 조상 내각이 개혁을 생각했던 것으로 보이나, 이미 이 시기에 들어와선 최소한의 안전 장치라도 마련하자는 주장마저 사마의에게 거부당할 정도로 문벌화가 심각하게 진행되어 있었으며, 조상 내각은 미숙한 국정 운영으로 난항을 겪다가 사마씨의 정변(고평릉 사변)으로 역관광을 타면서 위나라 자체가 멸망한다.
당연히 구품중정제로 세력을 키워 찬탈에 성공한 사마씨의 진 왕조는 바보들이 아니었기에 자신들처럼 구품중정제로 정권을 찬탈하는 세력이 나타나지 않게 구품관인법을 나름대로 손질했고, 이후 등장하는 찬탈자들은 다른 수단을 동원해서 찬탈해야 했으니 그 결과가 바로 진-유송 교체기부터 나타난 전 왕조의 왕족들을 모두 몰살시키는 현상이다. 남북조시대라는 혼란 속에서도 구품관인법은 유지된 건 이유가 있었다. 구품관인법은 그 이후 수백 년 동안 시행되면서 개편되고 조정되며, 수문제가 마련한 관료제의의 골자와 근간은 이렇게 남북조 정권들이 개선하고 고민하여 완비한 구품관인법에 기초하게 된다.
2.9. 조비의 남정
2.10. 너무 이른 죽음
226년 여름 5월 16일, 조비는 병세가 위중하자 조예를 황태자로 삼았고 유조는 진군, 대장군 조진, 정동 대장군 조휴, 무군 대장군 사마의에게 내려져 조예의 정사를 보좌하도록 한다. 낙양 가복전에서 붕어하니 향년 40세였다. 창업군주이면서 겨우 6년의 재위기간으로 죽은 것은 치명적이었다.
앞서 언급한 《삼국지》에 기록된 주건평과의 일화 이외에도, 야사집인 《위략》에 따르면 조비는 조조가 자신을 세자로 세웠을 때 급하다 생각하여 의아해 했다고 한다. 그 당시 관상을 잘 보는 고원려(高元呂)라는 사람이 있어 불러서 물어보자, 고원려는 "그 고귀함은 말할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수명을 묻자 "그의 수명은 마흔살 때 작은 고통이 있겠지만, 이때를 지나면 근심할 것이 없습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여러모로 조비가 마흔에 돌연 죽은 것이 당대 뿐 아니라 후대에도 사람들의 떡밥거리가 되었던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