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시/정치
1. 최근 선거 결과
1.1. 국회의원 선거
1.2. 지방 선거
1.3. 대통령 선거
2. 개요
경북답게 보수 지지 성향이 강하다.[15] 또 이명박 전 대통령의 고향이라 집권 당시엔 정치적 기반 역할을 하기도 했다.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명박은 포항시 북구[16] 에서 84%, 포항시 남구에서 80%라는 전국 최고 득표율을 기록했다. 한나라당의 6선 의원[17] 이자 이명박 대통령의 친형인 이상득 의원이 지역구(포항시 남구-울릉군)를 지낸 곳이기도 하다.
이명박 정부 들어서 포항이 입은 수혜는 신규사업은 별로 없고 지지부진하던 기존 사업들이 죄다 탄력을 받게 된 경우가 많다. 예로 10년째 공사하고 있는 도로를 이명박 정부 들어와서 예산을 따와서 완공하였고, 포항시에서 호미곶까지의 30km 남짓한 국도는 무려 14년 만에 완공되었다.
이명박 정부 이후 정치권의 소용돌이에 본의 아니게 자주 말려들어가는 편이다. 덧붙이자면 "대표적 형님예산"으로 거론된 곳들이 이런 곳들이다. 울산~포항 고속도로 건설 800억 원, 동해선 포항역~삼척역간 철도 건설 700억 원, 동해선 복선전철화 500억 원. 좀 논란이 있을 부분은 과메기 공장인데, 사실 이런 숙원 사업은 각 동네마다 하나씩은 있다. 저렇게 올린 것으로도 수십 년이라 숟가락 공사는 불가피하다는 의견도 있었다. #
이렇게 나열된 내용을 보면 국민의힘 지지 성향이 매우 강한 도시지만 포스코, 혹은 포스텍으로 인해 외지에서 유입된 젊은 층의 인구가 많은 관계로 오히려 1990년대에는 영남권에서 그나마 덜 보수적인 성향을 지닌 도시였다.[18] 1995년 1기 민선시장에 당시 민주당 후보였던 박기환이 당선된 것이 대표적 예.[19] 그리고 포스코와 생사여락을 같이 한 도시답게 박태준이 DJP 연합으로 들어가자 포항시민 역시 지지를 보내기도 했다. 허화평이 의원직을 상실하자 제15대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에 포항시 북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압도적으로 당선. 자유민주연합에 입당한 후에는 김종필 총재와 함께 김대중 당시 대통령 후보를 지지하였다. 이후 18대 대선에서도 포스코 주택단지가 있는 효곡동에서는 문재인 후보가 32.8%를 득표하기도 했고, 19대 대선에서는 득표율은 약간 떨어졌지만 이 지역에서 1위를 기록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와 홍준표 당시 자유한국당 대표의 강성 발언이 포항시민들 사이에서도 반감을 사면서 민주당 득표율이 40%대로 상승했고, 지역구 도의원이 2명이나 당선되었다.[20] 앞으로 민주당이 험지인 경상북도에서 구미시와 함께 집중적으로 공략할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21대 총선에서 포항 북구, 포항 남구-울릉군 지역구 모두 미래통합당이 압승을 거두면서 다시 예전처럼 보수 강세지역으로 돌아왔다. 비례대표 역시 보수정당이 60% 가량을 득표하며 20%를 간신히 넘은 민주당계 정당을 크게 눌렀다.
국회의원 선거구는 포항시 북구와 포항시 남구-울릉군[21] 의 두 개 선거구가 있으며, 포항 남-울릉에는 새누리당 이상득 의원(6선)이 18대를 끝으로 은퇴한 다음에 제수를 성추행한 김형태 의원(초선)이 당선되었다. 그 후로 이 성추행범 의원 타이틀로 1년을 더 울궈 먹다가 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을 상실하였다. 포항 북에서는 새누리당 이병석 의원이 19대 총선에서 4선에 성공하였으나 20대 총선에 불출마하면서 오랜 터줏대감들이 모두 교체되었다. 포항시장은 경찰대 1기 출신으로 해양경찰청장을 역임한[22] 국민의힘 이강덕 시장이다.
역대 총선을 보면 굉장히 보수강세 지역으로 분류된다. 새누리당계 정당의 제2본진이라 할 수 있다. 1대 총선에서 영일군 갑을 지역구에서 박순석, 김익노 후보가 각각 당선, 2대 총선에서도 포항시 일원에서 김판석 대한청년단 후보가 당선되고, 영일군 갑을 지역구는 무소속 최원수, 김익노 후보가 당선되었다. 3대 총선에서는 포항시에서는 무소속 하태환 후보가 당선되고 영일군 갑을 지역구에서는 자유당의 박순석, 김익노 후보가 당선될 정도로 보수성향이 꽤 강했다. 4대 총선에서는 포항시에서 자유당 하태환 후보가 재선에 성공하고, 영일군 갑을 지역구에서는 자유당의 박순석, 김익노 후보가 또 당선될 만큼 보수성향이 아주 강한 지역구였다. 보궐선거에서도 자유당 김장섭 후보가 당선되었다.
다만 5대 총선에서는 정권교체 영향으로 포항시에서 민주당 이상면 후보가 당선되고 영일군 갑을 지역구에서 민주당의 최태능, 최해용 후보가 당선되었다.
그러나 6대 총선에서는 포항시, 영일군, 울릉군 일원으로 통합되고 다시 보수성향이 강화되며 김장섭 민주공화당 후보가 당선되었으며 7대 총선에서도 같은 지역구에서 김장섭 민주공화당 의원이 재선할 정도로 보수성향이 꽤 강했다. 8대 총선에서도 포항시,울릉군 일원에서 김병윤 민주공화당 후보가 당선, 영일군 일원에서는 정무식 민주공화당 후보가 당선되며 박정희 대통령의 포스코 영향으로 보수성향이 꽤 강해졌다.
유신정권 이후 9대 총선에서도 중선거구제로 포항시,영일군,울릉군,영천군 일원에서 민주공화당 정무식 후보와 무소속 권오태 후보가 당선되어 보수성향이 꽤 강했다. 그러나 10대 총선에서는 무소속 권오태 후보와 신민당 조규창 후보가 당선되며 야권이 강해졌다.
하지만 11대 총선에서 이진우 민주정의당 후보와 이성수 한국국민당 후보가 당선되며 보수색채가 강해졌으며 12대 총선에서도 박경석 민주정의당 후보와 서종렬 민주한국당 후보가 당선되어 보수텃밭 중에서도 텃밭이었다.
직선제 이후 13대 총선에서는 이진우 민주정의당 후보가 포항시에서 재선에 성공, 이상득 민주정의당 후보는 영일군,울릉군 일원에서 당선되었다. 14대 총선 역시 허화평이 민주자유당 후보로 포항시에서 당선되고, 이상득 민주자유당 후보는 영일군,울릉군 일원에서 재선에 성공한다.
이후 15대 총선에서는 포항시 북구에서 허화평 후보가 무소속으로 옥중출마해 당선될 정도로 보수 색채가 아주 강했고, 남구에서는 신한국당 이상득 후보가 3선에 성공했다. 보궐선거에서는 박태준 자민련 후보가 당선되었다. 계속해서 16대 총선에서는 포항시 북구에서 한나라당 이병석 후보가 당선되고 남구에서는 한나라당 이상득 후보가 4선에 성공한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역풍이 불었던 17대 총선에서도 포항시 북구에서 한나라당 이병석 후보가 재선에 성공, 남구에서 한나라당 이상득 후보가 5선에 성공한다. 18대 총선에서는 포항시 북구에서 한나라당 이병석 후보가 3선에 성공, 남구에서는 한나라당 이상득 후보가 6선의 고지에 올랐다. 19대 총선에서는 포항시 북구에서 새누리당 이병석 후보가 4선에 성공하고, 남구에서 새누리당 김형태 후보가 당선되는데 김형태 후보의 당선무효로 남구 재보궐 선거에서 박명재 후보가 당선되었다. 20대 총선에서는 북구에서 새누리당 김정재 후보가 당선되고, 남구에서는 새누리당 박명재 후보가 재선에 성공했을 정도로 보수텃밭 중에서도 텃밭이었다.
지역 경제가 포스코의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에 정치적으로도 포스코의 영향이 꽤 큰 편이다. 가령 1997년의 국회의원 포항북 선거구 보궐선거 당시, 당의 엄청난 지원을 받았던 민주당[23] 의 거물 이기택[24] , 역시 이 지역의 만년 여당격인 신한국당(국민의힘)의 전신, 이병석에 맞서 '''무소속'''인 박태준 포스코 전 회장이 당선되는 저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덕분에 민주화 세력을 대표하는 인물인 김대중은 박태준과 손을 잡으면 자신과 대립했던 군부 세력과 경상도를 포용한다는 인상을 줄 수 있었고, 김영삼과의 차별화를 원했던 이회창 역시 김영삼에 의해 축출된 박태준을 포용함으로써 당내 결집을 꾀하고 역시 완벽한 자기편이 아니었던(충청도 출신이었다) 경상도를 포용하는 인상을 줄 수 있어 양측에서 러브콜을 받다가 최종적으로 김대중과 손을 잡고 자유민주연합에 들어가 DJP 연합에 도움을 주었으며(이른바 DTJ 연합), 국민의 정부에서 국무총리까지 지내게 된다. 김대중이 선거 유세 당시 박정희기념관 건립을 약속하고 박정희를 용서하며 긍정했던 발언을 한 것은 박정희의 군대 후배이자 제자였던 박태준의 작품이라는 말이 있다. 물론 이후 반대 여론에 부딪히며 용두사미가 된 경향은 있다만. 참고로 박태준 포스코 전 회장이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당선되기 바로 전 의원은 내란죄로 국회의원직을 잃는데, 그가 바로 29만원(...)을 소유하셨다는 분의 최측근인 허화평. 웃기게도 그는 1996년 15대 총선에서 옥중출마로 당선한다.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가 78.9%[25] 의 득표를 얻어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에게 압승을 거두었다. 여담으로 여기도 여촌야도 현상이 적용되는데, 읍면지역과 동지역의 득표 양상이 꽤 달랐다. 그 예로 남구 호미곶면에서는 박근혜 후보가 무려 '''92.7%'''의 득표율[26] 을 기록하였고 다른 읍면에서도 80%, 조금 높은 곳은 90% 가까운 득표율을 올린 반면, 시내동 지구에서는 문재인 후보가 대체로 20% 넘는 득표율을 올렸다. 앞서 말했듯 포스코 주택단지가 위치한 효곡동에서는 문재인 후보가 32.8%(박근혜 후보는 66.8%)의 득표율을 기록하기도 했다.
상술했듯 선거 당시 전라도당 운운해서 물의를 일으킨 5~6대 포항시장인 박승호 전 포항시장은 2014년 지방선거에서 경상북도지사로 출마하려 했으나 구미시를 박정희시로 만들겠다고 개드립을 치다 대중들에게 비웃음만 받고 '흰 것을 보고 희다고 말 못하는 현실이 참혹'하다며(...) 후보직을 사퇴했다. 그 뒤 박승호 전 시장은 20대 총선 포항 북구 지역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였지만 새누리당 김정재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더불어 박승호 전 포항시장 임기 말기 즈음 포항시 북구에 위치한 유일한 시립도서관 포은도서관을 포항중앙도서관으로 만들겠다고 공지하였다. 임시 도서관은 심지어 포항시 남구에 위치한 시청이라 더욱 곤혹을 치루게 되었다. 이 도서관은 2015년 10월에 개방했지만, 도서관 내에 열람실 구비도 없고 기존보다 공간이 더 줄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많은 불만이 존재하며, 전시행정이 아니냐는 불만도 나오고 있다.
2.1. 관련 문서
3. 같이 보기
[1] 지역구 국회의원 : 김정재 (새누리당 → 자유한국당 → 미래통합당, 초선)[2] 지역구 국회의원 : 박명재 (새누리당 → 자유한국당 → 미래통합당, 재선)[3] 지역구 국회의원 : 김정재 (새누리당 → 자유한국당 → 미래통합당, 초선)[4] 지역구 국회의원 : 박명재 (새누리당 → 자유한국당 → 미래통합당, 재선)[5] 97.4.17 의원직 상실(내란음모죄)[6] 97.7.24 재보궐선거[7] 13.7.25 의원직 상실(선거법 위반)[8] 13.10.30 재보궐선거[A] A B C D 관외투표 제외[B] A B 지역구 국회의원 : 김정재 (새누리당 → 자유한국당, 초선)[C] A B 지역구 국회의원 : 박명재 (새누리당 → 자유한국당, 재선)[9] 포항시내 (구 포항시)[10] 흥해읍, 연일읍, 오천읍 (인구 2만 이상 읍 지역)[11] 신광면, 청하면, 송라면, 기계면, 죽장면, 기북면, 구룡포읍, 대송면, 동해면, 장기면, 호미곶면 (인구 2만 이하 읍·면지역)[12] 포항시내 (구 포항시)[13] 흥해읍, 연일읍, 오천읍 (인구 2만 이상 읍 지역)[14] 신광면, 청하면, 송라면, 기계면, 죽장면, 기북면, 구룡포읍, 대송면, 동해면, 장기면, 호미곶면 (인구 2만 이하 읍·면지역)[15] 물론 김영삼 대통령 시절 反 민주자유당 - 신한국당 정서가 강해 1996년 15대 총선 때 12.12 등의 혐의를 받아 내란죄로 기소된 허화평이 옥중 당선된 적 있다.[16] 이명박은 포항 흥해 출신[17] 4년 임기이니 무려 24년.[18] 반대로 광양제철소가 있는 광양은 같은 사원주택단지의 영향으로 호남지역 중 가장 반자유한국당 성향이 약한 곳이다.[19] 하지만 이때는 상술되어 있듯이 TK지역에 반 김영삼 정서가 강했고, 여당 성향 후보가 3명이나 입후보했었다. 이후 민선 2기에서는 자유민주연합으로 이적해 출마했지만 IMF 이후 시기였음에도 한나라당 정장식 후보한테 석패했고, 이후로 한나라당의 텃밭화가 강하게 진행되었다.[20] 포항시 제7, 8선거구.[21] 정작 울릉도 가는 여객선은 북구에서 출발한다. 북구의 인구와 울릉군의 인구를 합치면 단일 선거구의 인구 기준선인 28만 명을 초과해 버리기 때문에 생긴 고육지책으로 보인다.[22] 원래 이명박 당시 대통령에게 형님 소리까지 할 정도로 친분이 있어 경찰청장으로 임명하려 했으나 영포회 관련 말이 많아 해양경찰청장으로 선회한 케이스.(...)[23]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소속이었다가 3당 합당에 반발해서 떨어져 나온 꼬마 민주당과 김대중의 신민주연합당(구 평화민주당)이 1991년 합당하여 만든 당이었다. 현재 민주당과는 다르다. 현재 민주당의 당시 명칭은 새정치 국민회의.[24] 포항 출신으로 부산광역시 해운대구를 지역구로 하던 거물 정치인이었다[25] 그런데 이 득표율이 경북(+대구) 전체에서는 영주시 다음으로 낮은 득표율이다.[26] 읍면동 기준으로 전국에서 박 후보의 득표율이 제일 높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