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폭력/원인

 




1. 인간의 선천적 공격성에 대한 문제
1.1. 분류되지 않은 집단 모임
2. 학생에 대한 적절한 개입의 부재
2.1. 제도적 개입 부재
2.1.1. 교육부의 소극적 개입
2.1.2. 경찰의 소극적 개입
2.1.3. 어린 나이로 인해 형사 처벌이 불가함
2.1.5. 폐쇄적인 공간에서 가해자와 피해자가 함께함
2.2. 부모의 개입 부재
2.2.2. 부모의 무관심
2.2.3. 부모의 미온적 대처
2.2.4. 가정폭력
2.2.4.1. 가해학생 부모의 아동학대
2.2.4.2. 피해학생 부모의 아동학대
2.3. 여론적 간섭의 부재
2.4. 교사의 개입 부재
2.5. 제3자 학생의 개입 부재
3. 도덕성, 사회성의 부족
3.1. 가해자의 도덕성과 몰지각성 부족
3.2. 피해자의 사회성 부족
4. 폭력을 미화하는 사회문화적 요인
4.1. 싸움의 스포츠화
4.2. 폭력에 대한 미화, 추억 보정
4.3. 기성세대의 학교폭력 인식 부족


1. 인간의 선천적 공격성에 대한 문제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이론에 따르면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하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요인이 성적 충동이나 공격적 충동이라고 한다[1]. 프로이트의 이론을 근거로 삼지 않더라도 생활 속에서 체감할 수 있듯이 개인별 격차는 있지만 누구나 선천적으로 어느정도 공격성을 갖고 살아간다. 게임이 대부분 몬스터를 죽이거나 적군을 죽이는 등 공격성과 관련된 이유도 사람들에겐 선천적인 공격성이 있기 때문에 이를 해소시키면서 재미를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회화가 중요한건데 청소년 시기는 사회화가 진행 중인 시기이다보니 이런 선천적인 충동에 의한 사고가 더 많이 발생할 수 있다.

1.1. 분류되지 않은 집단 모임


하지만 더 큰 원인은 학교라는 시스템이 개개인의 성향에 대한 구분없이 연령대에 맞는 아이들을 모두 의무적으로 끌어모은다는 것에 있다. 사회화가 덜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학폭이 발생한다면 그런 청소년들이 모여있는 학교라는 곳은 완전 정글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대다수의 학생들은 학폭을 하지않고 무난하게 잘 살아간다. 그 말인 즉슨 사회화 여부보다 태초에 가진 선천적 기질이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러면 어디서 문제가 생기는 거냐를 놓고 봤을 때 입학할 때 거름망이 없는 것이 가장 큰 원인이 될 수도 있다.
성인들의 사회에서는 학력이나 여러가지 요소들로 부적격자들을 어느정도 걸러낸다. 가령 기업에서 학력만으로 인재를 걸러낸다고 가정하자. 학력이 좋다고 꼭 그 사람의 인성도 좋다고 볼 순 없지만 그래도 주류 사회에 편입하려는 노력은 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적어도 그런 시도조차 하지 않은 사람은 걸러낼 수 있다. 실제로 교도소 수감자들 중에 학교중퇴자 비율이 높기때문에 아무 조건도 없는 것보다는 학력만이라도 봐서 조직을 구성한다면 비교적 더 안전하고 성실한 조직을 갖출 가능성이 높다. 설령 이 조직에 사회부적격자가 들어오더라도 학력이라는 1차 거름망으로 걸러낸 대다수의 성실한 사람들이 방파제 역할을 함으로써 소수의 부적격자가 문제행동을 할 여지를 크게 줄여준다.
하지만 학교는 의무교육이므로 사립학교나 일부 특수목적 학교를 제외하면 이런 식으로 사람을 걸러낼 수 없다. 그러다보니 폭력성이 강한 학생과 약한 학생이 같은 공간에서 자주 마주하게 되고 그로 인해 가해자와 피해자가 발생할 가능성이 자연스레 높아질 뿐더러 폭력성이 강한 학생들끼리 무리를 이뤄 집단을 형성하게 되면 그 성향은 더욱 짙어지게 된다.
이는 비단 청소년들이 다니는 학교에서만 생기는 문제가 아니고 성향 구분없이 다양한 사람들을 한 곳에 쑤셔넣을 경우 성인들에게도 동일한 현상이 나타나는데 대표적인 공간이 바로 군대다. 이찬희같은 아주 심각한 문제가 있는 사람이 걸러지지 않고 매일 마주해야되는 환경이라고 생각해보자. 그 속에선 무조건 피해자가 나올 수 밖에 없다.
물론 사회화를 위해 전 국민이 의무적으로 교육을 받는 학교에서 사람을 구분하는 것이 맞느냐, 설령 맞다고 해도 문제있는 아이인지 아닌지 어떻게 구별할 것이냐 등등의 문제로 들어가면 굉장히 복잡해지긴 한다.

2. 학생에 대한 적절한 개입의 부재



2.1. 제도적 개입 부재



2.1.1. 교육부의 소극적 개입


2020년 1학기부터 교육부는 경미한 학교폭력 사실은 학교생활기록부에 기록하지 않기로 결정하여 학교폭력을 사실상 부추기고 있다.#

2.1.2. 경찰의 소극적 개입


물론 학교폭력에 1차적 책임을 지게 되는 조직은 학교지만 학교폭력은 근본적으로 범죄며, 학교 조직은 자체 치안조직인 군사경찰을 두고 있는 군대와 달리 경찰의 치안권 아래에 있다. 따라서 학교폭력이 발생할 경우 경찰, 검찰 등의 치안기관에서 적극 개입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다. 공기관, 회사에서 범죄사건이 벌어져도 경찰이 수사하는데, 학교에서라고 다를 필요도, 법적 근거도 없다.
그러나 학교폭력을 그저 학생간 사소한 갈등으로 인식하는 경찰들이 많다는 것이 큰 문제이다. 이런 경찰의 시각은 최근 벌어진 부산 여중생 집단 폭행 사건, 강릉 여고생 폭행 사건에서도 여과없이 드러났다. '애기들이 해 봐야 얼마나 하겠느냐?', '친구들끼리는 싸우면서 크는 거야'라는 등의 근거 없는 믿음에서 온 경우가 많다. 실제로는 강간죄, 강도죄[2], 살인죄, 성적 수탈[3] 등 온갖 강력범죄의 온상임에도 불구하고 경찰은 매우 소극적 자세를 보인다. 학교전담경찰관 제도가 있으나 유명무실하다는 평가가 많다.
이는 한국의 경찰조직이 가정폭력과 같은 가정문제, 학교폭력과 같은 학생문제에 개입하고 싶어하지 않아하는 성향이 커서 발생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이 두 사건은 실적은 크지 않은 반면 잘못 개입할 경우 생기는 망신살은 엄청 크다는 점(하이리스크 로우리턴), 전통적으로 외부 개입을 '불필요한 개입 및 비겁한 수단'으로 치부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일진들이 그 지역 성인 조직폭력배와 연결고리가 있는 경우가 많고, 조직폭력배들 중에는 정치권 등과도 유착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는 점도 경찰이 함부로 못건드리는 요소일수도 있다. 그리고 시골지역 학교에서는 집단괴롭힘을 당하는 학생이 그곳 일진들한테 괴롭힘 당하는 것은 물론이요, 논두렁 조폭을 비롯한 그 지역 어른들한테까지 불려가서 노예로 착취당하는 경우도 많다.

2.1.3. 어린 나이로 인해 형사 처벌이 불가함


이른바 촉법소년. 현행법에서는 형사미성년자 기준이 만 14세이나, 미성년자 범죄의 심각성 때문에 이를 만 13세로 낮추는 법 개정을 대한민국 법무부에서 추진 중이다. 기사
하지만, 소년법 자체를 폐지했으면 좋겠다는 것이 오늘날의 국민 정서이며, 실제로 소년법을 폐지해 달라는 청와대 청원도 있었지만, 국제법상 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연령 기준만 낮추는 방향으로 가게 될 가능성이 높다[4]. 즉, 초등학교에서 벌어지는 학교 폭력은 앞으로도 법의 사각지대에 놓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오히려 성인 범죄보다 덮고, 또 묻히기가 쉬우며 피해자는 피해자대로 당하고, 가해자는 가해자대로 학교폭력을 저지르는 악순환이 이어진다.
매스컴에 보도되는 것은 피해자가 중상을 입거나 자살을 한 경우이니, 피해 정도가 그보다 가벼운 경우는 가해자가 선출직 공무원에 출마하거나 아이돌로 데뷔하지 않는 한 드러나지 않고 묻힌다고 봐야 한다.
그리고 설령, 어려서 몰라서 그렇다 하더라도 그건 그것대로 문제가 되는 게, 자신의 행동이 가져올 결과를 예측하지 못해 오히려 어른보다 더 큰 사고를 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나마 고등학생들은 대학 진학에 지장을 줄 수 있기에 알아서들 조심[5]하지만, 정말 아무 것도 모르는 초딩이라면 제어가 안 되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초등학교에서 벌어지는 학교폭력이 고등학교에서 벌어지는 것보다 더욱 위험하고 심각한 문제일 수 있다.

2.1.4. 학교 수련회



대표적인 사례가 나무위키에도 문서화되어 있는 서울 숭의초등학교 수련회 집단폭행사건.

2.1.5. 폐쇄적인 공간에서 가해자와 피해자가 함께함


수업과 수강 신청이 자유로운 대학교에서는 학교폭력 자체가 매우 드물다. 설령 폭력 상황이 일어나도 초중고교 시절에 비해서는 빈도 자체가 훨씬 드물다. 다분히 계획적이며 끊임 없이 오랜 기간 지속되는 초중고교와 달리 일회적, 순간적, 우발적인 폭력이 대부분이다. 그나마도 체대, 의대 등 서열 관계에 따른 군기가 매우 강한 곳으로 모든 학생들이 거의 교수 한 사람에게, 같은 과목을 수강 신청하게 되어 있고, 학년별 과목이 거의 정해져있는 곳에서 그런 일이 더 자주 발생한다.[6]
대학교와 달리 중고등학교는 아침 수업 시작 시간부터 학교 수업이 모두 마치는 그 순간까지 거의 같은 강의실에만 있게 된다. 일부 체육 등의 수업과 쉬는 시간, 점심 시간 정도를 제외하면 교내 시간의 거의 90%를 같은 공간 안에서 보내게 되므로 폐쇄성 및 작은 사회화는 매우 심해진다. 반면 학생과 달리 교사는 자신이 담당한 과목 하나만 수업하고 바로 다른 반으로 이동하게 되므로 교사는 학생들 간의 사정을 같은 반 학생들(가해자도 피해자도 아닌 제3자)만큼 잘 알 수도 없고, 짧은 시간만 같은 공간에 있을 뿐이라 상대적으로 무관심해질 수 밖에 없다. 따라서 학생들 수 십명이 폐쇄적인 공간 속에서 하루 10시간 넘게 공존하는, 이 폐쇄성이 학교폭력을 오랜 기간 동안 유발하며, 은폐하기도 쉽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대학교처럼 전 강의를 불규칙적인 수강 신청 시스템으로 바꿀 수는 없더라도, 최소한 고등학교 중 하나인 한국과학영재학교처럼 과목 신청제를 도입해서 반을 이동한다든가 하게 되면 지금과 같은 폐쇄성은 현격히 줄어들게 된다. 설령 폭력적인 학생과 겹치더라도 1년 내내 계속 겪는 것이 아니라 1주일에 한 시간이나 두 시간처럼 단기적이고, 피해 학생에게도 죽 같은 공간에 있음으로써 보복이 두려운 나머지 신고하지 못하여 폭력이 더 심해지는 것을 예방하는 데에도 효과적이다. 실제로 지금도 대한민국의 많은 중고등학교에서 수준별 수업, 합반 수업 등 일부 교과목은 성적 순으로 반을 나눠 수업하거나, 신청 인원이 너무 적은 제2외국어 등의 과목은 여러 반을 나누거나 합쳐서 수업을 진행하는데 이런 수업에서까지 폭력을 저지르는 가해자는 많지 않다. 자신의 반이 아니라 다른 모르는 학생들이 섞여 있기에 눈치도 보이기 마련이고, 쉬는 시간마다 이동해야 하는데 작정하고 괴롭히기에는 시간도 상대적으로 모자라기 때문이다. 당장 1층 가장 왼쪽 교실에서 10분 만에 교재 챙기고, 4층 가장 오른쪽 교실까지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해보자. 설령 가해자와 피해자가 우연히 전부 같은 수업을 신청했어도 같은 교실에서 계속 수업을 듣는 경우보다는 폭력이 줄어들 것은 명백하다. 따라서 고교학점제를 실시하면, 부수적인 효과로 학교폭력도 유의미하게 감소시킬 수 있다.

2.2. 부모의 개입 부재



2.2.1. 과잉보호


우리애는 착해요, 그럴리가 없어요. 우리 애는 착한데 친구를 잘못 만났어요 등으로 자식을 오냐오냐 키우는 경우에 자식을 가해자로 만들 수 있다. 아이에게 나쁜행동을 해서는 안되고 그저 자기자식이니 마냥 예뻐하기만 한다면 후에 그릇된 생각을 가지고 이기적인 사람으로 자라 학교폭력의 가해자가 될 수 있다.

2.2.2. 부모의 무관심


부모가 일에 바쁘면 자식에게 무슨 일이 생겨도 학교에 찾아가 해결을 할 수가 없으며, 부모가 자식에게 무관심한 경우, 학폭 가해자, 피해자가 되어도 모르고 지나치기도 한다.[7]
다만, 이는 워킹맘에 대한 편견으로 이어질 수 있는 부분이므로 주의해서 판단해야 할 부분이다. 오히려 자식에게 더욱 세심하게 신경을 쓰는 워킹맘도 많다. 후술하겠지만, 맞벌이 세대가 적었던 시절에도 학교 폭력은 심각했다. 다만 인식 부족으로 인해 매스컴에 보도되지 않았을 뿐이다.
부모가 돈벌이에 바쁜 것이 자녀에 대한 무관심으로 이어진다는 것은 우리나라의 경제 수준이 지금보다 낮았던 시절에는 얼추 맞는 얘기였으나, 21세기에 들어서는 급격한 환경 변화로 인해 양상이 다소 다르다.
첫 번째는 현재 30~40대 사이에서 확산된 개인주의 성향이 있다. 물론 개인주의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나, 그중에 이기주의를 개인주의로 포장하는 사람들이 섞여 있다는 게 문제다.
물론 엄마가 집에서 애를 지속적으로 잘 돌본다 하더라도 문제가 안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90년대 말부터 지속적으로 제기된 문제이다.
전업 주부가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브런치 카페에서 수다를 떤다는 식의 얘기들이 심심치 않게 올라오는 걸 보면, 과거와는 달리 자녀에게 신경을 쓰는 분위기가 약해졌다 볼 수 있다.
사실, 이보다 더 심각한 사례도 있는데, 가정 일을 털어놓기를 주저하는 분위기상, 은폐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과거에 어머니에게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한 것에 대한 반발심으로 인해, 전업주부가 기본 의무를 저버리는 것을 지적하기도 어려운 분위기가 된 것이 사실이다.
두 번째는 인터넷 문화의 급속한 확산과 변질이 있다.
특히, 정인이 사건의 경우처럼, 맘카페에서 착한 엄마 코스프레를 하고 다닌다든지, 맘카페 엄마들이 악성루머를 퍼트리는 맘충 행각을 벌이는 일들이 현재의 30~40대 젊은 엄마 세대에서 벌어지고 있는데, 이들이 인터넷에 과몰입하기 쉬운 세대임을 생각하면, 맞벌이 엄마들만의 문제가 아닐 것이다. 인스타그램 같은 SNS 과시 문화에 영향을 받는 것이 이 세대인데, 이건 맞벌이 여부와는 상관이 없으며, 정작 업무에 바쁜 맞벌이 부부들은 인터넷에 과몰입하기가 어렵다.
사실, 무개념 부모는 경제 수준, 맞벌이 여부와는 상관없이 어디서나 존재한다. 그나마 경제적으로 약자인 경우는 정상 참작이라도 되지만, 정인이 사건의 경우처럼 아이를 잘 키울 만한 환경적 조건이 갖춰졌음에도, 아이에 무관심하거나 학대하는 경우가 있다는 게 문제다.[8]

2.2.3. 부모의 미온적 대처


세대차이로 인해 신종 수법에 대한 이해가 미흡한 것도 문제다. 지금의 학폭은 과거와는 달리 소수의 아이들끼리 철없이 몸싸움이나 말싸움을 하는 단순한 유형의 다툼이 아니다.
단순히 철없는 행동이라 보기에는 너무나 지능적이고 악랄한 수법이 많으며, 다수가 한 명을 찍어 다구리하는 수법도 많다.
자신들의 어린시절에 흔히 있었던 다툼이라면 상대 아이의 부모님과 대화로 잘 풀어서 해결할 여지가 있으나, 이러한 수법이면 항의하는 피해 학생의 부모님만 이상한 사람으로 몰리기도 쉽고, 가해자가 여럿일 경우 일일이 만나서 대화로 해결하는 것도 한계가 있다.
그리고 피해 학생의 부모님이 여럿의 가해자들과 만나서 대화하더라도 초등학생 정도의 나잇대인 가해자들한테나 두려움을 안겨주는경우가 대부분이다. 중학생정도부터는 피해학생의 부모님이 가해자들에게 거칠게 혼을 내도 집안에 돈이 많거나 인맥이 좋지 않은 이상 가해자들이 두려워하거나 겁을 먹기보다는 오히려 피해학생의 부모님을 만만한 상대로 여겨 얕잡아보거나 비웃고 대들기도 하며 심지어는 욕설, 폭행을 하는 인간말종인 가해자도 있다.
또한 피해자인 자식이 자신을 괴롭히거나 위해를 가하는 가해자에 대해 정당하게 맞서 싸워도 현실적으로 봤을때도 학교폭력같은 문제를 해결하려 들지 않고 귀찮아하는 교사들이 널리고 널리고 심지어는 학생들이 교사를 만만하게 보거나 얕잡아보는 경우가 많은데도 자신들의 학창시절에 경험만 떠올리면서 교사나 부모님한테만 말하면 무조건 해결된다고만 믿으면서 차라리 선생님이나 부모님에게 말할것이지 왜 싸웠냐고 하면서 자식의 기를 죽이는 경우도 흔하다.

2.2.4. 가정폭력



2.2.4.1. 가해학생 부모의 아동학대

아동학대 피해자가 성장하면서 또래에 비해 힘이 강하고 외향적인 성격인 경우 일진이 되는 경우가 많고, 이에 학교가서 분풀이 목적으로 학교폭력을 가해하는 경우도 많다. 한마디로 아동학대를 당한 학교폭력 가해학생은 학교폭력 피해학생을 학대당한 자신의 울분을 배설하기 위한 변기로 활용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편하다.[9] 실제로 가해학생이 학교에서 선생님한테 또는 집에서 부모님한테 꾸중을 들은 후 피해학생에 대한 괴롭힘 강도를 이전보다 더 높이는 경우가 많다. [10]
쉽게 설명하기 위해 여기서 한가지 예를 들자면 가해학생이 시험기간 중에 밖에 나가서 친구들과 놀고싶어 나갈려고 했다가 부모님으로부터 공부안하고 놀려고 한다는 이유로 10대를 맞는 구타를 당한다. 가해학생은 자신의 집이 경제적으로 어렵고, 조금만 잘못해도 학대당하는 등 자신의 팔자가 사나운 것이 요망한 마가 끼여있는 왕따학생이 자신과 같이 학교를 다니는 탓이라고 여기고 다음날 왕따학생을 화장실로 불러내 그 전날 부모님에게 맞은 것의 2배에 해당되는 20대를 때리는 것으로 구타하는 내리갈굼을 가한다.
실제 아버지들의 경우 일터에서 상사나 원청업체 직원 등에게 꾸지람을 듣거나 갑질당하고 집에 와서 가족들을 갈구는 사례가 많은 것은 사실이다. 또 다른 예가 있다면 초등학생인 가해자에게 한살짜리 늦둥이 동생이 있고, 그 동생이 자꾸 찡찡거리는 바람에 가해자의 어머니는 육아스트레스를 받고, 육아스트레스를 받은 어머니는 가해자에게 아동학대를 가하고, 그 학대받은 가해자는 그 다음날 학교에서 피해학생을 무자비하게 구타한 사례도 있다. 실제로 일진이 이전보다 피해학생에 대한 괴롭힘 강도를 더욱 더 높인 것도 알고 보니 그 일진이 전날 아버지로부터 심하게 갈굼당한 것이 원인인 사례는 의외로 많다.[11]
이러한 이유 때문에 미국 플로리다주 여중생 자살사건때 가해자의 부모가 체포되었다. 평소 아동학대를 저질렀던게 원인제공이 되었기 때문.(#)

2.2.4.2. 피해학생 부모의 아동학대

학교폭력 가해자 외에 피해자의 경우에도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가정 폭력을 겪으며 자라온 경우가 상당히 많다. 정상적인 부모에게서 자랐다면 겪지 않았을 폭력과 학대를 경험하며 자라왔을 경우, 학교에서도 소극적이고, 수동적으로 행동하거나 심적으로 유약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이은석(범죄자)의 사례가 끔찍한 가정폭력으로 인해 발생한 대인기피증이 학교폭력으로까지 이어지게 된 대표적인 예시다.

2.3. 여론적 간섭의 부재


대한민국 사회는 폭력성에 상당히 무딘 사회 중 하나다. 그 근거로 한국 심의체계를 들어볼 수 있다. 성에 관련된 장면보다 폭력성에 관련된 장면이 덜 규제를 받는 경향이 있다.[12] 사람을 피가 터지도록 잔혹하게 두들겨패는 모습이 묘사되는 작품이라도 청소년 허가가 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전쟁물의 경우 그보다 더한 잔인함도 용납되는 경우가 있다. 어른을 주 타겟층으로 잡는 게임조차 폭력성에 매우 민감하게 심의해서 자국 게이머들이 "우리나라에 들여오는 게임은 죄다 총에서 꽃다발이나 날린다"며 자조하는 독일의 경우와 비교해보자.
그 원인이 일제강점기이다. 일본 제국일본군은 사람을 1회용으로 여길 정도로 인명경시풍조가 만연해 있었고 그 때문에 구타 및 가혹행위, 똥군기가 극에 달했다. 문제는 거기서 고관대작을 하던 친일파들이 해방 이후 대한민국에서 정권을 잡고 그들이 일제강점기로부터 배운 인명경시풍조를 기반으로 한 더러운 사고방식으로 국가를 운영한 탓에 대한민국 사회가 폭력에 대해선 무감한 사회로 전락한 것이다. 결국 일본이 한국을 침략, 정복한 것은 표면적으로 탄압, 수탈, 살육, 강제징용, 위안부 등의 가해를 가하기도 했지만 이런 더러운 문화를 구축시킨 것 역시 누적되는 가해이다. 20세기 초반의 동아시아 국제정세 역시 학교폭력에 견줄 수 있는데 일본이 가해자, 대한민국이 피해자인 상황이다. 아이러니한 점은 정작 가해자인 일본은 미국에게 교육을 받아서 그런 똥물을 빼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은 친미국가인 주제에 미국으로부터 학교폭력 관련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배울 생각은 안 하고 있으니 더더욱 대조적이다.
또한 현재 대한민국의 폭처법은 그 처벌이 아주 가볍다. 특히 미성년자에게는 더더욱 가벼워서 처벌이 거의 공짜 수준이다. 강제 전학, 퇴학 등의 가해자를 공포에 떨게 하는 방법이 아니면 학교폭력은 절대 근절되지 않는다. 학교폭력은 무거운 처벌만이 답이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한국 사회는 폭력성에 상대적으로 무딘 편이다. 어린애들이 서로 싸우는 걸 보며 어른들이 흔히 하는 말이 "어린애들은 원래 싸우면서 크는 거다"라고 말하곤 한다.[13] 사회의 인식 자체가 이런 판에 학교폭력에 대한 처벌이 제대로 이루어질 리가 없다.[14][15] 유소년~청년 시기에 폭력을 당해 몸이 상할 경우 골병이 빨리 들거나 지병이 많아지고 심하면 치매가 빨리 오는 등 평균수명 자체가 단축된다고 한다. 애들끼리 대등하게 싸워도 위험한데 하물며 학교폭력은 한쪽이 한쪽에게 일방적으로 가하는 폭력이다. 당연히 반격당할 걱정 없이 마음놓고 폭행하는데다, 폭행자의 가학심에 따라 싸울 때보다 더 심한 폭력이 가해진다.

2.4. 교사의 개입 부재


일단 학교폭력은 그 자체가 귀찮은 일이다. 뭐가 귀찮냐면 일단 교사 입장에서 학교폭력에 끼어드는 것은 그 자체가 어렵다. 호들갑 떨더라도 지들끼리 알아서 봉합하는 경우도 많고 적당히 문대다 보면 이럭저럭 1년 끝나는 경우가 보통이다. 교사 노릇도 몇십년 하다 보면 학생들로서는 하나뿐인 자기 인생이지만 교사로서는 매년 비슷한 일의 되풀이이기 때문에 아무리 교사라도 인간적으로 신물이 나기도 하고, 초임 교사 시절보다 열정이 떨어지곤 한다. 학교폭력은 결정적으로 일어났다고 인지하거나 공식적으로 인정했을 때 수적으로 소수인 피해학생을 제외하면 그 누구에게도 손해만 일어나지 이득이 없다. 학교폭력을 해결했다고 누가 금품이나 상장을 주는 것도 아니고 경력에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까딱하면 경력에서 손해를 입고 장기적으로는 금전적으로 혹은 더 많은 추가 노동을 하는 손해를 입을 수 있다. 그 지역 일대에 입는 이미지 실추 같은 건 이게 싫어서 괜히 갖다대는 소리에 불과하다. 애향심에 그렇게 넘치는 사람 얼마 없다. 하여튼 그런 까닭으로 학교폭력이란 것은 있다고 할 때 좋을 게 없기 때문에 은폐하기 마련이다. 사고가 일어나도 교사들 선에서 쉬쉬하고 문제를 해결하거나 끝낸다.
심한 사례로, 피해자 학생을 반 아이들과 단합하고 가해자와 교사와 함께 '피해자 학생이 성추행을 저질렀다'식의 단합문을 쓰게 해 학교폭력 피해자 부모의 속을 타들어가게 만드는 경우가 있었다. 고소당하기 싫으면 조용히 전학가라는 뜻이었고, 과거 이 사례가 TV에 보도되었을 때 당연히 수많은 사람들이 분노했다. 뭐 열 사람이 지켜도 한 도둑 못 막듯이 한 명만 양심선언하면 그만인 터라, 치졸한 수법이긴 하다.
학교폭력 관련해서는 교사든 교감이든 교장이든 학생이든 조용히 은폐하려고 한다. 이는 비단 한국뿐만 아니라 정도에 차이가 있을지언정 전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교사들은 학생들의 보호와 육성에 있어 사회적 책임을 가진 사람들이며, 학생들에게 있어 가장 기본적인 롤 모델 중 하나이다. 직업의식이 투철한 교사라면 자신의 체면이나 평판, 임금 등에서 불이익을 받더라도 학교폭력의 해결에 적극적으로 임하나, 사고가 터지면 기본적인 관리 부실로 제일 먼저 책임소재의 대상이 되고, 학교 이미지나 진학률 등을 이유로 학교 조직이나 학부모 조직의 압력을 받는 경우도 있기에 사건 해결에 적극적이지 않고 심지어 벌어진 학교폭력 사건을 자기 선에서 묻어버리려는 보신지향적 교사가 매우 많은 것이 현 교육현장의 실태이다.
특히 학교에 생활지도부가 있다면, 생활지도부장(생지부장)이 학교폭력 관련 업무를 보는데, 가능하면 조용히 넘어가기 위해 수를 쓰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원래 폭력자체가 큰일이고 교사들이 당연히 해결해야만 한다.
17년 12월 과천시의 한 고등학교에서는 학교폭력 피해자가 폭력신고를 하자 피해자를 협박한 교사가 나타났다. 다시말하지만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를 협박했다. 여기에 가해자를 옹호해주는 언행까지 저질렀다는 증언도 나왔다. 피해학생이 옆에서 보는 와중에!! 출처1 출처2 이쯤되면 학교폭력을 교육부는 예방만 맡고 처리는 무조건 법적으로 처리 해야할 상황이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이유를 몇가지 고찰해 볼 수 있다.
  • 학교폭력 해결이 '성과'가 아니라 '과실'로 처리됨
교사들이 학교폭력 사태를 인지하고, 해결에 노력해도 보통 성과보다는 과실로 취급되는 경우가 많다. 이는 사회에서 학폭을 두고 교사의 대응을 볼 때 '일이 터졌지만 잘 해결하였다.'로 보기 보다는, '일이 터졌다고? 그 학교/교사 수준 알만하네.'로 보기 때문이다. 사실 성인들의 사회에서도 툭하면 중범죄가 일어나는 것에서 알 수 있듯, 사람들이 모여사는 곳에서 폭력사건이 안 터지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이다. 사건의 원인이 교사에게 없고, 사태가 동네바보라도 모를 수 없을 정도로 장기화된 것이 아니라면, 학폭을 조기 발견해 철저히 처리한 것은 분명 잘 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음에도, 사고를 영리하게 해결한 교사에게는 어떤 보상도 없으며, 욕이나 안 먹으면 다행이다.
이런 문제는 사회에서도 쉽게 볼 수 있으며, 대표적으로 군대의 사례가 있다. 가령 동상자가 발생하였을 경우 지휘관이 이를 조기발견하여 훈련 중에라도 국군병원에 보내든가, 의무실, 급할경우 병원 응급실에 보내어 처리하면 꽤나 훌륭하게 처리했다고 볼 수 있다. 혹한기 훈련을 하면서 동상자가 안 나오는 것이 매우 이상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군 내부에서는 '애당초 왜 동상자가 나왔나? 병력관리부실 아니야?'라며 지휘책임을 묻거나 인사고과에 악영향을 주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지휘관에게는 병사들의 고통이나 상처에 적극 대응하는 것보다, '너 이새끼. 꾀병 아니야? 분대장 얘 관리 안 하고 뭐해?' 라며 윽박지르고 책임전가를 하는 것이 편하다.
앞서 사례에서, 불가피했거나 적어도 관리자가 최대한 주의를 기울였음에도 벌어진 문제였다면, 잘 해결한 것을 성과로 보아 긍정적 피드백을 주어야 함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학교현장은 여전하다.
  • 학년 진급에 따른 반별 학생 교체
교사의 태만을 일으키는 가장 큰 원인. 우리나라의 경우 학년이 올라가면 반이 해체되고, 반을 재편성하게 된다. 따라서 교사와 학생의 거리가 크게 가깝지 않은 편이다. 1년이 짧은 시간은 아니지만, 강력한 라포[16]형성, 교사의 책임감 증진에는 분명 부족한 시간이다. 당장 학교보다 더 병력관리체계가 철저 한 군대에서 업무숙련도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보병도 줄어드는 징집기간 때문에(그래봐야 1년을 아득히 넘는 시간이다) 숙련도와 군기가 떨어진다는 말이 나오는데, 보다 인격적으로 미성숙한 미성년자를 훈육하고, 교육하는 교육현장의 경우는 어떨까?
또한 1년은 '관할'의 문제이기도 하다. 가령 온갖 사고가 터진 문민정부 시절을 보자. 당시 사고 공화국이라 불릴 정도로 어마어마한 사고가 터졌으며, 성수대교 붕괴사고 당시 김영삼 정부는 '시공 잘못'이라 했다가 박지원에게 "경복궁이 무너지면 대원군 책임이냐."라는 말을 들었다. 성수대교가 건설된 시점은 군사정권 당시였고, 관리감독을 이어나가게 된 것은 문민정부였기 때문에 이런 촌극이 발생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군사정권 당시 성수대교는 무너지지 않았기 때문에 해당 사고들은 문민정부에서 독박을 써야 했다. 그런데 과연 시공 허가를 내 준 군사정권의 책임이 없을까? 물론 관리책임 및 사고 후 대처에 대해 문민정부의 책임이 없다고야 할 수 없지만, 가장 큰 원인(시공허가)을 제공한 것은 단연 군사정권임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지나 '관할'이 달라졌기 때문에 욕은 김영삼이 다 먹었다.
이를 교사 입장에서 보면 반에 어떤 문제 상황이 있다 하더라도 1년 후면 내 관할이 아니다. 따라서 귀찮게 이거 해결하고 저거 해결한다면서 설치느니, 적당히 1년 버티는 것이 낫다. 사건이 터진 후에는 내 관할도 아니니 입 싹 씻으면 그만이며, 후임 담임이 대신 욕 먹을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학교폭력을 다루는 기사나 여론 반응을 보면, 전임 담임에 대한 이야기나 비판을 찾기 어렵다. 사건이 얼마나 장기화 되었든, 언제 어떤 일이 벌어졌든 오직 현임 담임이 욕을 먹는다. 이런 상황에서는 학교폭력사건을 적극적으로 해결하려는 사람이 바보다.
따라서 강력한 교사/학생간 라포형성, 교사의 책임감 증진 등을 위해 학년별 반 재배정 철폐라는 카드를 살펴볼 필요도 있어 보인다.
  • 담임교사에게 주어지는 과중한 업무와 담임기피현상
가령 한 반에 30명의 학생이 있다고 가정하자. 담임교사가 한 명당 10분씩 면담해도 300분이 필요하며, 이는 5시간이다. 학생들의 수업도 있고, 담임교사의 수업도 있기 때문에 결코 적은 시간이 아니다. 학생과 상담하는 것만 해도 이런 시간이 필요한데, 담임교사는 각종 서류업무, 지도업무, 자신의 수업시수 때문에 시간을 많이 빼앗긴다.
따라서 평교사의 상당수는 담임업무를 기피하며, 특히 손이 많이 가는 각급학교 저학년 담임의 경우 선배 교사들이 후배 교사들에게 담임자리를 떠맡기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초등학교 같은 경우에는 너무 심해서 사회문제가 되다시피 할 정도로 상황이 심각하다. 이를 해결하려고 했던 것인지는 모르나 한국에는 '부담임'이라는 제도도 있는데, 부담임제도는 말이 부담임이다. 어쩌다 담임이 결근하게 되는 경우, 같이 서류를 꾸며야 할 경우에나 약간 바쁠 뿐, 실질적으로는 부장 맡기에는 경력이 그렇게 독보적이거나 길지는 않고, 담임 맡기는 귀찮은 교사들이 지나가는 자리이다.
담임교사에게 주어지는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에 담임에게는 사적으로 학생을 만날 시간이 거의 없다. 그나마 특수교과를 제외하면 수업을 담임이 직접 담당하는 초등학교에서는 다르나, 중학교와 고등학교 같은 중등학교에선 담임은 조례와 종례를 알리는 신호기, 특이사항이 있으면 학생들에게 알려주는 메신저, 가끔 학교 밖으로 나가거나 학교 행사가 있을 때 학생들을 지휘하는 지휘봉 역할이 되어버린지 오래이다.
보다 현장경력이 많은 선배 교사들이 담임자리를 기피하는 것도 문제이다. 담임수당 몇푼 받으면서 학급 하나를 책임지느니 그냥 안 해버리는 편이 편하기 때문이다. 업무능력이 쌓이고, 학생을 보다 잘 다룰 수 있는 선배 교사들이 정작 실전을 피해가니 현장의 질이 좋아지기 어렵다. 쌓인 호봉으로 대우는 많이 받으면서 일은 쉬운 것만 하려는 교사가 적지 않다.
따라서 학생 생활에 관여하는 상담관 제도를 보다 강력하게 시행하거나, 담임교사가 맡게 될 수업시수를 일반 교사에 비해 많이 줄여주는 방법, 몇년 주기로 필히 기피되는 학년 담임을 하도록 강제하는 등의 방식으로 해결할 필요가 있다. 학생을 관리할 시간이 없다면, 학교폭력을 감지하고 해결할 시간도 없기 때문이며, 고급인력이 뒤로 빠질수록 현장도 다루기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수습할 능력도 안 되면서 촌지를 주지 않는 학생을 집중적으로 괴롭히거나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는 방향으로 왕따나 학교폭력을 조장하는 교사가 비일비재했다. 그야말로 최악의 유형인데 현재도 그런 교사가 아주 없는 건 아니라는 것이 문제.

2.5. 제3자 학생의 개입 부재


사실 누가 학교폭력 가해자인지 누가 피해자인지 가장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사람들은 바로 학생들이다. 매 시간 대면하지 않고 업무로 인해 바쁜 교사들의 파악은 학생들의 간단한 외부적 성향 파악 수준 이상의 심층적 파악이 힘들고 누가 누구를 어떤 방식으로 폭력을 행사하는지 정확히 파악하긴 힘들다. 그러나, 대면 시간이 길고 파악 가능성이 높은 평범한 학생들도 동조자 또는 방관자가 된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싸움이 나면 방관하고 재밌어 하며 학교에 신고하기를 꺼린다. 2011년 모 고등학교에서 벌어진 사건으로 2명이 자살하는 끔찍한 사태가 벌어졌음에도 학교의 재학생들은 학부모들이 딱히 강요하지도 않았음에도 학생들 스스로가 자발적으로 '우리 학교는 알아주는 명문이라 다들 착하고 순한데 다른 학교 학생들이 우리 학교를 시기하는 게 분명하다'는 식으로 일방적으로 가해자를 응호하고 학교 이미지를 떨어트렸다는 이유로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피해자를 비판하고 공격하곤 했었다.
무슨 사건이 발생해도 학교 이미지 떨어진다는 사실 자체가 짜증난다는 식으로 반응하였고 학생들이 주도적으로 가해자편을 들면서 피해자를 매장시키고 사건을 무마하는데 최선을 다해서 앞장섰다. 인터넷에다가 우리들은 잘못 없고 우리 학교를 시기한 다른 학교의 모함이라 주장하는 상황까지 펼쳐졌었다. 그렇다고 재학생 전원이 학교폭력을 옹호하고 은폐를 시도하는 악질이라는 말은 절대로 아니지만 1~2명이 아닌 매우 다수가 학교폭력이 안타까워서 발을 동동 구르면서도 앞으로 나서지 못하는 방관자가 아닌 학교 이미지를 더욱 걱정하면서 은폐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었다. 결국, 외부로도 알려졌으며 상당한 임팩트를 보여준 사건이었음에도 교사와 학부모들의 노력까지 더하여 은폐하고 사건 자체를 매장시키는데 성공하였다. 학교의 이미지는 학부모와 교사들에게도 중요하지만 학생들에게도 매우 중요하게 작용하기 때문.
이런 방관자들과 동조자들이 문제가 생기는 것은 학교폭력, 정확히 집단 내부의 폭력은 목격자 개인이 나선다고 어떻게 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닌데다가 자신들도 결국 영향을 받는 구성원이기 떄문이다. 방관자들과 동조자들이 비겁한 것은 사실이지만, 학교폭력을 다루는 매체에서 '왕따를 도와줬더니 내가 왕따가 되더라.' 식의 상황을 흔히 찾아볼 수 있고 실제로 비일비재하게 벌어지는 일이다. 게다가 괜히 힘써 도와주다가는 학교 이미지 떨어지게 만드는 인간이라는 식으로 같이 매도 당하기도 한다.
예로부터 청소년들은 성인들에게 내부 집단의 일을 알리는 것을 비겁하고 부도덕적인 행위라고 여겨 왔기 때문에,[17] 신고하는 것이 꺼림칙하지 않은 것도 아니고, 들킬 경우 비겁한 배신자로서 본인이 학교폭력의 피해자가 될 수 있기 있다. 다음 타깃은 네가 될 거라고 협박을 당하는 것 또한 보기 힘든 일이 아니다. 또한 사건의 공론화를 시도하면서 내부에서 조용히 지나가는 경우가 아닌 이슈화되면서 언론에 보도될 경우 1~3학년 재학생 전체가 학교 이미지 하락 등 피해를 보는 입장이 되고 그렇다고 교육계에서 딱히 뾰족한 해결책을 제시하지도 못하는 상황이라 내가 당하지 않는 한, 쉬쉬하면서 조용히 잊히길 바라는 학생들이 많을 수밖에 없다. 대학교에서 벌어진 사건 사례만 봐도 사건이 발생하면 가해자들이야 당연히 욕을 먹지만 하등 상관이 없는 나머지 구성원 전체가 욕을 먹고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하곤 하는데 초중고도 비슷하면 비슷하지 다르지는 않다.
이런 이유로 인해 내부고발은 어른들도 쉽게 못하는 일이다. 당장 성인들의 사회인 군대에서도 기수열외에 거부하면 거부자가 기수열외의 대상이 된다. 성인들도 자신이 몸담고 있는 사회 조직의 각종 비리, 부적절한 관행, 높으신 분들의 갑질을 보고 있지만 내부고발에 나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안전을 버리고 정의를 챙길 정도로 양심적이거나 예민한 사람들은 보통 거의 없기 때문이다. 에드워드 스노든은 미국 헌법따위 무시한 초법적 도청, 감청 시스템 PRISM을 폭로했다가 러시아로 망명해야 했다. 보안사라는 이름의 종지부를 찍은 국군보안사령부 민간인 사찰 폭로 사건의 주인공 윤석양도 계속 숨죽이고 살아야 했다. 닫힌 사회에서 가해지는 배신자에 대한 보복은 일개 개인이 감당하기 어렵다.
'여러 학생이 단결해서 일진들 물리쳐야지.' 같은 말을 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게 쉽지 않다. 학교 조직이 학폭 신고자, 피해자를 제대로 보호해주지 못하는 것은 이미 알려질 대로 알려졌다. 이런 상황에서 신고자 본인이 학폭의 다음 피해자가 될 것을 알고도 적극적으로 첫번째 피해자를 감싸줄 수 있겠는가?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서도 일진인 엄석대가 몰락한 건 방관하던 5학년 담임과 달리 새로 바뀐 6학년 담임 김 선생의 개입으로 인해서였으며, 학생들은 담임이 바뀌기 전까지 엄석대에게 어떤 식으로든 굴종했고 한병태처럼 저항하는 학생은 고립됐다. 해당 작품에서 김 선생이 엄석대 1명만 혼내지 않고 엄석대에게 굴종했던 다른 학생들까지 혼낸 건 어찌보면 학생들의 학교폭력 방관에 대한 비판이라고 볼 수 있다.
조선일보의 기사에 따르면 학폭 목격자들도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으며 그 수준이 천재지변이나 생명의 위협을 받는 상황에 준한다고 한다. 학생 개인이 정의감을 가지고 있든 그렇지 않든 '다음 타깃이 내가 되면 어떻게 하나.'라는 인식 때문에 그런 경향이 큰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는 대부분의 학생들이 보복이 두려운 나머지 방관자가 되는 현상과 무관하지 않다.
이런 현상을 없애는 것에 있어 마냥 학생들에게 '비겁하다, 치사하다' 라며 욕하는 반응보다는 학교폭력 내부고발자에 대한 강력한 보호 및 학교와 경찰 조직의 강력한 학교폭력 대처 의지, 돈과 힘있는 가해자 측 학부모들의 외압을 강력하게 막을 장치가 필요하다. 그러나 아직 갈 길이 너무 멀다. 가해자 패거리는 대충 합의금 준 다음 사회봉사나 반성문•보복 금지 정도의 경징계를 받으며 학교에 남아 있고, 피해자는 끝까지 가해자 쪽 학부모들의 등쌀에 시달리다 푼돈 받고(그것조차 못 받는 경우도 많다) 전학가는 사례 등 이러한 장치 부족에 대한 경각심이 낮고, 몇몇 교육감들은 학폭사실을 생활기록부에 적지 말 것을 주장하고 있는 상황이다.[18] 이런 상황에서 학생들에게 '학교폭력을 방관하지 말고 용감하게 대응하라'라고 주문하는 것은 공허한 외침일 뿐이다.
여전히 학교폭력은 가해자는 당당하고 피해자는 숨어살아야 하는 불합리한 경우가 많다.

3. 도덕성, 사회성의 부족



3.1. 가해자의 도덕성과 몰지각성 부족


폭력을 통해 느끼는 피해자에 대한 우월감이 그 원인이다. 이는 폭력을 가하여 상대를 내가 원하는 대로 반응하게 만드는 행위이기에 원초적인 권력욕의 발현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런 사회병질자들의 가학심은 일반인들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일반 사회에서는 이런 원초적인 권력욕을 발현할 수 없도록 법, 주거 이전의 자유, CCTV 등에 의한 필터링이 펼쳐지게 마련인데, 그런 필터링이 잘 작동하지 않는 닫힌 사회가 몇 군데 있다. 학교, 군대, 교도소다. 이찬희(범죄자) 문서 참조.
가해자가 자신의 행위가 잘못이라고 인지 자체를 하지 못하는 몰지각함에도 원인이 있다. 자신이 잘못된 언행을 하며 타인에게 폭언을 하며 폭행을 휘두루는 민폐를 끼쳐놓고도 본인이 민폐라는 것을 전혀 모른다. 때문에 미성년자 시절에는 가해행위를 실컷 해놓고도 정작 성인이 되서는 갑자기 사회 도덕과 정의를 주장하며 자신을 괴롭힌다고 생각하는 가해자에 대해 비난하는 내로남불적인 인식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2021 배구계 학교폭력 폭로 사건 참조.

3.2. 피해자의 사회성 부족


또래에 비해 사회성이 떨어지거나 사고방식이 보편적인 기준과 다르다고 여겨지면 학교폭력을 당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유소년~청소년기의 잘못된 생활 습관, 그 외의 장애 등으로 인한 개인 위생 불량이나 신체적 결함도 사람을 학교폭력의 손쉬운 표적으로 만든다.
학교폭력은 약자가 대상이 되기 때문에 근절하기 힘들고 또한 상처도 깊게 남는다. 학교폭력으로 굴욕감에 젖은 피해자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그 그림자를 지우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학교폭력의 문제는 심각하다.

4. 폭력을 미화하는 사회문화적 요인



4.1. 싸움의 스포츠화


80년대 까지는 초등학교(5~6학년), 중학교에서 주로 남학생들끼리 "~~는 싸움 잘하더라" 등으로 폭력행위('싸움실력') 가지고 우열 혹은 서열을 가르는 행위가 보였다. 이런 사고방식 때문에 이 '싸움실력'이 또래 남학생들 사이에서 스포츠마냥 미화되면서 학교폭력에 대해 무감각해지는 경우가 많았다.
2019년대 현재에도 미성년 학생을 다루는 창작물에서 학생들간 싸움이 발생할 경우, 다른 학생들이 싸우는 학생들을 말리지 않고 종합격투기 경기를 관람하듯 환호성을 지르며 그 모습을 즐기는 장면이 등장하곤 한다. 청소년들은 자신들의 서열을 정하는 것에 있어 싸움실력이 주요한 기준이기 때문에 일진, 싸움 잘하는 학생들을 두고 다른 학생들이 서열정리 및 토론을 즐기는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 있으며, 발이 넓은 학생들은 학교 내의 랭킹을 정리하는 경우도 있다. 심지어 자신들의 지역에 있는 타 학교와 타 지역의 주요 인물들의 실력 또한 탐색하고, 랭킹을 매기는 경우가 있다.
전쟁이 외교전에 있어 가장 하책인 것처럼, 싸움은 권력다툼과 서열정리의 가장 세련되지 못한 방법이다. 따라서 현대 법치국가에서는 그렇게 큰 효용은 없는 편이고, 싸움으로 인해 얻을 수 있는 것보다 잃을 것이 더 많은 성인들에게는 크게 관심거리가 되지 못한다.[19] 그러나 싸워도 잃을 것이 크지 않고, 아직 성숙하지 못해 싸움을 권력다툼, 서열정리의 가장 주요한 수단으로 보기 쉬운 청소년들은 싸움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게 된다. 이런 이유로 인해 싸움을 말리기는 커녕 야유와 도발을 날려서 안 벌어질 싸움도 크게 조장하기도 한다. 또한 학생끼리의 싸움이란 당연히 교사의 눈에 띄지 않는 사각지대에서 이뤄진다.

4.2. 폭력에 대한 미화, 추억 보정


철이 없어서 그럴수도 있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철이 없는 거랑 폭력은 별로 상관이 없다.
그나마 21세기에 들어서 학교 폭력에 대한 인식 수준이 높아져, 비록 실효성 논란은 있지만 학폭위라는 내부 절차라도 마련되어 있는 것이지, 그 이전 시대에는 인식 부족 인해 초등학생 연령대에서 벌어지는 학교 폭력은 묻히기가 쉬웠다. 지금처럼 스마트폰이 있는 것도 아니니 애초에 증거 확보가 불가능해서 같은 세대라 할지라도 그 시절 회고담의 내용이 다를 수밖에 없다.
안 그래도, 가해자는 자기가 했던 일을 잊어버리기 쉬운데, 오래 전 일이면 더더욱 기억할 리가 만무하며, 본래 지난 시절은 추억 보정으로 미화되기 쉬우니, 과거에는 이러한 악질적인 범죄가 없었다고 착각하기 쉬운 것이다. 게다가 과거에는 매스컴을 통해 각종 사건 사고를 접할 기회가 없어서 모르고 넘어가기 쉬웠다. 그래서 세대가 바뀔 때마다 우리 어릴 때는 저러지 않았는데라는 말이 클리셰처럼 반복된다. 이는 학교폭력뿐만이 아니라, 흉악 범죄가 발생할 때마다 흔히들 나오는 이야기이다.
따라서 피해자가 뒤늦게라도 가해자에게 사과를 받기도 어렵고, 그 사실을 뒤늦게 털어놨다 하더라도 우리 동네에 그런 질 나쁜 애들이 있었을 리 없다며 오히려 피해자가 관종으로 몰리기 쉽다.
그런데 어떤 면에서는 20세기학교폭력에 취약했다고 볼 수 있다. 국민학교의 경우 한 학급 학생 수가 지금의 2배인 60명에 육박했던 적도 있었으므로, 선생님이 문제점을 파악하고 최선을 다했다 해도 완전히 해결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문제는 이를 망각하고 성장한 어른의 자녀들이 자라서 똑같은 짓을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이다. 어린이는 어른의 거울이란 말이 왜 있겠는가. 이 문서에 대표 사례로 언급된 서울 숭의초등학교 수련회 집단폭행사건 가해 학생들의 학부모들만 해도 1980년대국민학교를 다녔을 사람들이다. 당연히 저 시절이라고 학교폭력이 없었을 리는 만무하다.

4.3. 기성세대의 학교폭력 인식 부족


젊은층이나 자녀들을 둔 부모 세대들의 경우 학교폭력은 범죄라는 인식이 매우 강하지만 자녀가 없는 일부 중년층이나 노년층의 경우 학교폭력이 범죄라는 인식이 매우 부족한 편이다. 특히 노년층의 경우 학교폭력에 대한 인식 자체가 사실상 거의 없는 수준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노년층들은 학교폭력의 경우 맞으면서 크는 거다 혹은 예전에는 그렇게 해 봤다 등 구세대적인 가치관으로 포장하는 경우가 많으며 심지어는 학교폭력 자체를 매우 당연히 여기는 노인층들도 존재한다.[20] 그래서 실제로 조손 가정의 경우 다른 가정에 비해 학교폭력 가해자가 될 확률이 더 높다고 한다. 게다가 가해자를 완전히 감싸주는 반면 피해자나 학교 자체를 비난하는 노인층들도 문제라고 볼 수 있다.
다만 이것은 당시 자라온 환경이 영향이 더 크다. 실제로 노년층들이 태어난 1930년대~1940년대에는 일제 강점기로 당시에는 인권 자체가 거의 없는 수준이였다. 학교나 회사에서도 폭력이 굉장히 심했으며 이는 군사정권 시절인 1960년대~1970년대도 마찬가지이다. 폭력적 환경에서 자라온 노인들은 학교폭력에 대한 부재가 심각한 수준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상대가 때리면 나도 맞대응하면 된다고 인식해서 그렇다. 즉 맷집을 키우거나 주먹을 키우라는 것.
특히 남학교들의 경우가 그랬다. 1965년생인 표창원의 저서 '나는 셜록 홈스처럼 살고 싶다'에 당시 분위기가 나오는데, 본인이 학교의 싸움짱들을 상대한 일화가 나온다. 결국 맞대응 끝에 화해하고 절친이 되었다는 학원물스런 결말이 나왔고, 그때 싸움짱 친구들이 맘 잡고 건실한 사회인이 되었다고 회고한다. [21]
하지만, 시대가 변하면서, 누가 싸움을 건다고 맞대응을 할 수 없는 분위기가 되었다. 부모가 아이의 학업에 더욱 세심하게 신경을 쓰면서, 아예 싸움에 휘말리지 않도록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해 학생들도 과거와는 달리, 상대가 소위 '''쨉이 안 된다'''고 인식되면 싸울 이유를 못 느끼고 안 건드리는 게 아니라, 오히려 약자를 괴롭히는 쾌감을 느끼기 위해 더욱 집요하게 괴롭힌다.
'''표창원도 저서에서 지적했듯이, 과거에는 그래도, 싸움의 상대가 안 되는 약한 학생들은 싸움짱들이 안 건드리는 불문율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 선이 무너진 것이다.'''
그럼에도, 어르신들이 이런 시대 변화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으니, 앞서 언급된 미스트롯 출연자 진달래의 경우도 안이하게 인식하는 것이다.

[1] 이를 예술로서 표현하거나, 업무를 수행할 때 역량의 원동력으로 활용하거나, 운동할 때 에너지로 사용하여 심신을 단련시키거나 하는 것도 사람 자신의 선택에 따른 것인데, 프로이트는 사람의 이러한 행동을 승화(sublimation)라고 정의내렸다. 사람은 최적의 교육 환경과 다른 이들과의 원만한 상호 작용을 통한다면 얼마든지 이러한 충동을 다른 이에 대한 폭력이 아닌 승화된 행동으로 만들어낼 가능성을 지닌다. 학교폭력을 일삼는 비행청소년 무리에게 난타를 배우게 하여 폭력성을 예술 활동으로 전환시킨 사례가 있다.[2] 가해자가 삼삼오오 모여 금품 등을 갈취하는 것은 특수강도에 포함되는 중범죄다.[3] 가해자가 피해자를 협박하여 매춘과 성관계를 강요하고 금품을 갈취하는 경우. 가출한 학생들의 집단인 '가출팸'에서 흔히 발생한다.[4] UN 아동권리협약에 묶여 있다. 그러나 국가가 이 협약 자체를 어기고 있다는 사실(무국적 아동의 양산을 방치하는 것)을 지적하고 나서면 어느 쪽도 더 이상 할 말은 없어진다.[5] 당장 지역 준 명문 “일반계 고등학교” 조차 “싸움 실력” 만을 통한 서열 가리기(싸움의 스포츠화)는 생가부 때문에라도 자제하는 편이다.[6] 물론 성인은 더 이상 미성년자라는 법적인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장래 때문에라도 처벌을 두려워하여야 한다는 점 때문이기도 하다.[7] 참고로 국내 부부의 40% 정도가 맞벌이 부부라고 한다.[8] 정인이 사건의 경우, 친딸을 방치했다는 의혹도 있다. 자신이 직접 아이를 돌볼 수 있음에도, 도우미 아줌마에게 맡기고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9] 물론 아동학대 피해학생이 자신의 부모를 들이받을 수도 있지만, 대한민국의 경우 유교문화, 가부장제 위계질서 등으로 부모와 자식은 상하관계라는 구시대적인 인식이 있어 만약 학대를 받던 자식이 부모를 들이받으면 패륜아로 쌍욕을 얻어먹을 수 있다. 따라서 아동학대 피해를 받은 아이는 부모를 들이받지 않는 대신 일진에 가담해 학교에서 만만한 아이를 들이받는 것으로 자신의 스트레스를 풀고, 성인이 되고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에는 가급적 본가와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특히 공단이나 산업단지 인근) 원룸이나 고시원 방구해서 다른 또래들보다 일찍 독립하는 테크를 탄다.[10] 이러한 외향적인 사람이 을의 입장(아동학대를 당하는 쪽)에 있다가 갑의 입장(학교폭력을 가해하는 쪽)에 서면 더욱 더 악랄해지는 경우가 많다.[11] 아버지가 한 대기업 하청업체에서 근무할 경우 똥군기 서열은 회장 > 부회장 > 계열사 사장 > 계열사 전무 > 계열사 상무 > 계열사 부장 > 계열사 차장 > 계열사 과장 또는 대리 > 하청업체 사장 > 하청업체 간부 > 하청업체 직원인 아버지 > 장남 > 차남 > 삼남 > 막내(3학년 일짱) > 3학년 일진 > 2학년 일진 > 1학년 일진 > 1학년 왕따 및 빵셔틀 이렇게 이어진다.[12] 한국의 심의 자체가 어떤 일정한 기준을 가지고 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오락가락하는 경우가 많다. 어쨌든 이렇게 한국의 심의라는 것이 어떤 일정한 기준이라기보다는 심의 당사자들의 상당히 순간적인 심미적 윤리적 감수성에 좌우되곤 하는 터라 단언하기는 어려운 부분이 있으나, 체감적으로는 폭력에는 확실히 덜 민감한 경향이 있는 것도 같다.[13] 물론 다툼과 진심어린 화해가 계속되어 우정이 더욱 돈독해지는 경우도 있지만 여기서의 싸움은 그냥 일반적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지 다툼과 화해가 아니다.[14] 학생들과 어른은 세대가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서로에 대한 이해도 역시 떨어진다. 어른들 입장에서는 학생끼리의 사정을 잘 이해를 하지 못해서 문제를 해결하기도 어렵고 공감도 되지 않는다. 그리고 애들 싸움 중재나 판결 같은 건 어른들 입장에서는 그저 손해일 뿐이다. 미성년자들은 감수성이 민감한데다 사회생활 경험이 적어서 압박 상황에서 거짓말을 남발하거나 기상천외한 행동을 하는 등 예측하기 어려워서 잘 중재하고 판결하기 어렵다. 그리고 끼어들면 끼어드는 대로 우리가 알아서 할 일인데 왜 어른들은 우리 이해도 못하면서 끼어드냐고 성질내는 일이 부지기수인데 잘 해결한들 나오는 것도 없다. 오히려 가만히 있으면 알아서 봉합이 될 것인데 어른들이 끼어들어서 망치는 경우도 많다.[15] 물론 그건 서로 싸울 때 얘기고, 학교폭력 같이 일방적인 괴롭힘이자 스트레스 해소엔 통용되지 않는다. 당연히 이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아이들 보다 더 강한 물리력과 힘을 가진 어른의 객관적인 개입이다. 만약 그런 식이라면 사회의 법이 있을 필요가 없다. 대다수 학교 폭력은 어른들에 방관과 회피 그리고 합리화가 여실히 보여진다. 이를 해결해야 할 선생님과 공무원의 직무유기이다. 어차피 피해자 하나만 제거하면 시끄러운 것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이는 일하는 사람에게 너무 편하다. 그러니 피해자를 쳐내는 방식을 쓰는 것이다. 이 앞 주석의 주장이 바로 어른들의 잘못된 인식을 단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왕따는 싸우는 게 아니다.[16] 상호신뢰관계. 교육계에선 교사와 학생의 라포 형성을 매우 중요하게 본다.[17] 외부 공권력에 의존하는 것을 '비겁한 행위'로 치부하는 것은 닫힌 사회의 주요 특징이다.[18] 앞 기사의 주인공인 김상곤문재인 정부에서 첫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으로 내정되었다.[19] 다만 마초적 성향을 가진 업계에서 일할 경우에는 어떻게든 도움이 될 수 있고, 싸움을 잘한다는 것 자체가 기본적인 호신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개인이 자신감을 얻는 경우는 있다.[20] 당장 미스트롯 2에 나왔던 진달래가 학교폭력으로 인해 하차할 당시 일부 노인 세대들의 경우 그럴 수도 있지 원래 맞으면서 커야 정신 똑바로 차린다라는 표현이 많았으며 나머지의 학교폭력 사건도 비슷한 반응이 많았다.[21] 이 책에 나온 문제학생들의 사례는 같은 세대인 배우 정보석의 학창 시절 무용담과 비슷하다. 비록 정보석은 모범생은 아니었지만, 그냥 싸움 잘하는 애들끼리 싸우고 다닌 것이지, 약한 학생을 괴롭히는 짓은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