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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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前 야구인. '''선동열'''과 더불어 명실상부 '''KBO 역대 최고의 투수이자 롯데 자이언츠 역대 최고의 선수'''로 사후 영구결번을 주었다. 1980년대 초반 한국야구를 대표했던 대투수. 더 놀라운 건, '''이 사람은 아마 시절부터 상상을 초월하는[10] 혹사에 시달려 전성기에 약간 못 미치는 수준이 되어 프로에 데뷔했다는 것'''이다.그때 감독님이 그러더라고, "'''동원아 우짜노... 여까지 왔는데...'''"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알겠심더. 마, 함 해 보입시더."'''[9]
스포츠 2.0과의 인터뷰 중
그의 투구 폼은 용틀임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역동적이었으며, 자기 공에 대해 자신감을 가지고 공격적인 투구를 했다. 그것은 일본의 선진 야구를 배우게 한 아버지의 덕이 컸었다.[11] 부산에서 시청 가능하던 일본프로야구 중계방송을 보며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에이스 호리우치 츠네오의 투구폼을 아들에게 가르쳤다고 한다. 최동원의 전매특허인 드롭[12] 이 바로 호리우치의 주무기였다.
공격적인 투구 성향으로 '''피홈런율'''이 상당히 높았다.[13] 더불어 통산 고의사구가 15개밖에 안 된다. 1년에 2개도 안 던진 셈. 정말로 공격적이라는 걸 여실히 보여주는 기록이다.
아마 때부터 혹사를 달고 살았기 때문에, 프로 입단 당시부터 부상을 달고 살아서 구속이 많이 느려지고 고생했으나 시간이 지나자 진가가 드러나 몇 년간 선발 중간 마무리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나와 이닝을 소화했다. 덕분에 장명부 다음으로 많은 284.2이닝을 던졌으며, 한 시즌 개인 최다 탈삼진 기록인 223K를 기록한다. 이 기록은 2020 시즌 종료 후인 현재까지도 경신되지 않고 있다. 즉, 32시즌이 지나도록 여전히 깨지지 않은 불멸의 기록. 참고로 이 기록에 가장 근접했던 이가 1996년 221K를 기록한 주형광이었다. 현 시대 최고의 투수로 군림하고 있고, 나아가 역대 한국 최고의 투수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류현진조차도 200K 시즌은 2번(2006년, 2012년) 있었지만 끝내 최동원의 기록을 넘지는 못했다.
투구 전 송진가루, 신발끈, 겉양말, 안경, 모자챙을 차례로 만지고 공을 던지는 루틴이 있었다.
2. 선수 경력
2.1. 은퇴 이후
3. 플레이 스타일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최고의 마구를 던졌던 파워피쳐.''' 주 구종은 최고 155km/h까지 나오는 패스트볼과 커브였는데, 특히 커브는 선동열의 슬라이더와 함께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최고의 마구'''라고 평가받는다.[16] 150km/h에 육박하는 패스트볼과 더불어서 빠른 커브, 그리고 완벽히 타이밍을 뺏기 위한 느리고 폭이 큰 커브 등을 무기로 많은 삼진을 잡았다. 공격적인 투구 성향 때문에 그로 인한 좋지 않은 기록[17] 도 있지만 그만큼 많은 탈삼진을 뽑아냈다. 게다가 저런 커브볼 자체가 한국프로야구에서도 흔하질 않았기에, 어떻게 보면 최동원은 메이저리그로 따지자면, 커브볼이라는 구종을 도입한 모데카이 브라운이였다. 그 뒤로 정민철, 김상엽 등이 등장했으니..
최동원의 공식적인 최고구속은 1981년 메이저리그 스카우터가 측정한 155km/h이다. 하지만 1978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 시속 159km을 기록했다는 말이 있는데,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등지에 있는 당대 신문 기사에서 기자들은 최동원의 최고구속을 1981년 측정한 155km으로 보도했기 때문에 159km을 기록했을 가능성은 낮아보인다. 또한, 1981년 당시 메이저리그 스카우터는 최동원의 구속을 메이저리그 평균 수준으로 평가했었다. 당시의 메이저리그 1선발들의 평균 구속이 대략 147km 정도였으니, 아쉽게도 1980년대 프로야구는 스피드건이 귀했던지라 프로 시절 최동원의 최고 구속은 기록되어 있지 않으며, 프로시절 최고구속은 150km/h 대 초반으로 추정된다.
4. 최동원과 선동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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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기가 약간 지난 시점에서 프로데뷔를 했지만 그가 남긴 족적은 크며, 전성기 때의 선동열과 비교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선수일 것이다. 선동열은 최동원을 라이벌이자 존경하는 선배로 인식하였고 최동원 또한 선동렬을 라이벌이자 인정하고 존중하는 후배로 인식했다고.
4.1. 영상화
2011년 12월 22일에 개봉하는 영화 '퍼펙트 게임'에서 최동원과 선동열의 3번의 선발 맞대결을 그렸다. 조승우·양동근, '퍼펙트게임'서 최동원·선동렬 변신 최동원 역은 조승우가, 선동열 역에는 양동근이 맡았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두 레전드가 나란히 영화를 관람하는 것은 보지 못하게 되었다.
이와는 별도로 2011년 9월 25일 KBS 스페셜 '''무쇠팔 최동원 인생을 던지다''' 편이 방송되었다.[18] 야구팬이라면 무조건 감상하자. 이 방송에 나온 바로는 영화 퍼펙트게임 제작진에게 '내 투구폼이 워낙 와일드하기 때문에 배우가 다칠수도 있다. 꼭 정확하게 따라하지 않아도 된다'고 조언했다고 한다. 해당 다큐에서는 민훈기, 박동희[19] , 강병철, 유두열, 김시진, 김일융, 한문연, 송승준 등의 인터뷰도 곁들여져 있다. 대본은 스포츠 다큐멘터리 작업을 많이 하는 민혜경 작가가 썼다.
이후에도 2011년 11월 11일에[20] MBC 스페셜에서 '''불멸의 투수 최동원'''편이 방송되었다.[21] 직후에 만들어졌던 KBS보다 양이라든가 자료 면에서 풍부하니[22] 팬이라면 보는 것을 추천. 중간에 보면 은퇴 이후에도 팬들이 편지를 보내거나 하면 빠짐없이 답장엽서를 보낸 장면이 나오는데 그곳에 롯데 자이언츠라는 문구가 있다. 자신을 그렇게 내팽겨쳤던 구단임에도 불구하고 끝내 롯데 자이언츠를 기억하고 있었던 것.
5. 선거 이력
6. 여담
- 최동원의 부친 최윤식 씨는 6.25 전쟁에 참전했다가 한쪽 다리에 부상을 입은 상이용사였고 모친 김정자 여사는 초등학교 교사로 일했다. 특히 최윤식 씨는 생전 최동원의 실질적 에이전트를 자처하며[23]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늘 따라다닌 것으로 유명하다. 연봉 협상 때도 롯데 프런트와 만나 협상에 나섰다고 알려져 있다. 특히 1988년 초 연봉 협상 과정에서는 박종환 당시 롯데 전무와 갈등을 일으킨 적도 있다. 최동원 90만원 사건 참조. 김정자 여사는 교사 경력을 살려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하는 한글 강좌 등에도 나선다고 전해지며 후술하는 것처럼 아들의 동상을 자주 찾고 있다.
- 롯데의 계약금 미지급으로 시작된 최동원과 롯데의 갈등 역사는 연봉 협상 및 지급을 둘러싼 갈등, 선수협 창설 과정에서 보복성 트레이드 단행 등으로 뿌리가 깊다. 최동원의 팬들이 도저히 롯데를 좋아할 수 없게 만든 사건들이 많았는데 상세 내용은 롯데 자이언츠/사건·사고/구단 관련#s-1 문서 참조.
- 평소 생활도 소탈했다고 한다. 술, 담배는 물론이거니와 심지어 고기조차 거의 안 먹었다고... 가장 좋아했던 음식은 모친 김정자 여사가 해주던 김치쌈이었는데, 실제로 1980년대 모 잡지에서 프로야구 선수들의 여름 보양식에 대해 인터뷰를 할 적에 다른 선수들은 보약, 장어, 홍삼 등 오만 보양식을 논했지만, 최동원은 찬 물에 밥 말아서 김치 싸먹으면 그게 보양식이라는 대답을 했다고... 물론 고기나 보약 같은 선물들이 들어올 때가 있긴 했지만 항상 지인들에게 나눠줬고, 특히 1958년 개띠라서 개에 대해 애착을 보였던지라 누군가 개소주를 보내주면 진심으로 화냈다는 일화가 있다. 유일하게 보양식으로 먹었던 것이 인삼과 대추를 달인 물. 그런데 정작 서구화된 식습관이 주 원인으로 지목받는 대장암으로 세상을 떠난 게 참으로 아이러니하지 않을 수 없다. 이를 놓고 자존심이 강한 최동원이 롯데에서 트레이드된 이후 겪었던 엄청난 스트레스가 원인이 된 게 아니냐는 추측이 있기도 한데, 야구를 그만두고 평생 입에 대 본 적이 없는 술을 마셨을 때, 주변 사람들 모두 최동원이 술을 마시는 장면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말했을 정도.
- 그라운드에서의 자신만만하고 오만하기까지한 이미지와는 달리 사적으로 만나면 겸손하고 수수했다고... 1990년대 모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한 모습을 보면 구수한 말투에 주위 사람들과 어울리려고 노력하는 태도를 볼 수 있다.
- 이선희, 장효조와 더불어 프로야구가 5년만 일찍 생겼더라면의 단골 떡밥 중 하나다.
- 정치적 이유로 각종 데모와 시위가 많던 1980년대, 시위에 참여하는 군중속에 끼어있던 최동원 선수에게 놀란 행인들이 혹시 야구선수 최동원 아니냐고 묻자, "예, 저 최동원 맞심더." 하고 태연하게 시위를 계속하더라는 일화가 있다.(2011년 9월 방영된 KBS 스페셜 참조) 그리고 1980년대 말 노사분규가 극심했던 시기, 부산지역 언론노조에서 총파업을 했을 때 무기명 후원금을 기탁했다고도 한다.(MBC 다큐스페셜 '불멸의 투수, 최동원' 참조)
- 동료 선수들의 기본생계권을 보장하기 위해 선수협을 창단했던 것을 보면 야구실력뿐이 아니라 인간적인 정의감과 소명감도 있던 것으로 보인다. 실력뿐 아니라 인성까지 갖추었던 진정한 1인자.
- NC 다이노스 창단 당시 초대 감독 후보로 물망에 오른 사람들 중 1인이었다. 특히 NC의 김택진 구단주가 어린 시절부터 최동원의 오랜 팬이었기 때문에 영입이 강력하게 추진됐다. 당시에는 암 투병 중이었기 때문에 무산되고 그 대신 건강이 회복된 뒤에 프런트나 코칭스태프로 모셔올 계획이었다. 그러나 끝내 최동원이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별세하면서 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김택진 구단주는 김경문 감독과 함께 최동원의 빈소를 찾았는데 조문 후 인터뷰에서 "최동원 선수는 제 마음 속에 영원한 별이십니다"라며 눈물을 쏟았다. 결국 NC 다이노스가 2020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을 차지하자 김택진 구단주가 한국시리즈 트로피를 가지고 최동원의 묘소를 찾았다. 이에 최동원의 모친 김정자 여사가 김택진 구단주에게 감사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 2012년 9월 11일 사직야구장 두산 베어스 vs 롯데 자이언츠전에서 그의 아들인 최기호 군의 시구가 화제가 되기도 했다. 피는 못 속이는지 특유의 역동적인 투구폼과 묵직한 구위를 선보이며 팬들을 아련하게 만들었다.[24] 타석에 있었던 이종욱이 놀랐을 정도.
- 2012년 10월 25일, 매니지먼트 게임인 프로야구매니저는 원년시즌까지의 선수카드를 업데이트 했으며 최동원이 활약했던 시즌의 카드를 업데이트했다. 특히 한국시리즈 4승의 역투로 기억되는 1984년 카드는 EX카드로 나와 최동원을 모르는 어린 야구팬들도 최동원의 위대함을 간접적으로 알게 되었다.
- 2014년 4월 17일, 한국판 사이 영 상인 최동원 상이 탄생하였다. 자세한 사항은 항목 참조.
- 2015년 2월 5일, 불법 소금물 관장 시술을 하던 목사 부부가 체포되었는데 이들이 진행한 9박 10일 캠프에 암 투병 중이던 최동원도 사기를 당했던 사실이 확인되었다.[25]
- 2015년 3월 28일, 최동원 모친 김정자 여사가 2015 한국 프로야구 kt wiz와 롯데 자이언츠의 개막전 경기에 앞서 시구를 했다. 최동원의 현역시절 투구폼을 그대로 재현한다고 해서 많은 롯데팬들의 기대를 받았는데, 아니나다를까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비슷하게 투구폼을 소화해냈다. 투구폼 뿐만 아니라 생전 공을 던지기전에 버릇[26] 까지 똑같이 보여주면서 뭇 야구팬들의 눈시울을 붉혔다.
- 2015년 쿠바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인 빅토르 메사가 박동희와의 인터뷰에서 그에 관해 언급했다.(위 멘트 참고)
- 원년팬의 평가
-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하는 과정에서는 당시 감독이었던 박영길의 인맥이 작용했었는데, 박영길은 최동원의 조부가 부산 충무초등학교 교장으로 있었을 때 만든 야구부에서 야구를 배웠다고 한다. 이로 인해 박영길 감독이 최동원을 롯데로 데려올 때 조부의 도움을 받았었다고.
- 롯데 구단은 2016년 11월 1일자로 최동원의 아들 최기호 군을 육성팀 직원으로 채용하기로 결정했다.
- 어머니 김정자씨가 자주 사직구장 광장에 있는 아들의 동상을 보러 가시는게 포착되어 팬들의 가슴을 먹먹하게 하셨다.
- 2017년 부산KBS의 '부네스코 위원회'라는 프로그램에서 부산을 상징하는 인물로 최동원을 다뤘다.
- 조종규 전 심판위원장은 대한민국 최고의 투수 5명을 뽑아 달라는 질문에 그 첫번째로 서슴없이 최동원을 꼽았다. 카리스마 있는 피칭, 연투능력, 그리고 승리에 대해 투철했던 집념을 이유로 들었다. 참고로 나머지 4인은 선동렬, 김시진, 송진우(야구), 류현진 을 순으로 꼽았다.
- 마이 리틀 텔레비전에 출연한 허구연은 자신이 경험한 우리나라에서 빈볼을 가장 잘 던지는 투수로 최동원을 꼽았다. 최동원은 때리겠다고 하면 진짜로 때렸다고...최동원이 빈볼을 때릴 것 같은 조짐이 보이면 타석의 타자들이 멀찍이 물러서서 볼을 치지 않겠다는 의사표현을 할 정도였다고.
- 우여곡절 끝에 최동원 동상이 사직구장 앞에 세워졌지만 정작 그 대우는 헛웃음이 나온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동상 근처에서 담배를 피는 건 양반이고, 침을 뱉거나 쓰레기 투척에 대소변을 보는 일까지 빈번하게 터진다. 특히 2019년 5월 14일 부산대학교 총학생회에서 최동원 동상을 발로 밟고 인증사진까지 찍어서 부산대학교 전체에 망신살이 뻗쳤을 정도. 참고로 이곳은 최동원의 노모가 자주 들리는 곳이기에 그야말로 고인은 물론 유족의 가슴에 피멍을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나마 최근들어 팬들이 직접 쓰레기를 치우는 등 관리를 하고 있지만 안타까운 대우가 롯데 팬들에게는 씁쓸한 흑역사로 남았다.
7. 기록
- 5년연속 규정이닝 2배이상 투구
- 2년연속 225이닝-14완투-1점대 ERA-1점대 FIP
- 5년연속 208이닝-14완투-2점대이하 ERA-2점대이하 FIP
- 5년연속 전구단 상대 완투
- 6년연속 선발승 전경기 완투승
- 6년연속 선발등판경기 2/3이상 완투
- 3년 776.2이닝 66승 45완투 1.97ERA 1.86FIP (3년간 연평균 259이닝-22승-15완투)
- 4년 1000.2이닝 80승 60완투 2.16ERA 1.95FIP (4년간 연평균 250이닝-20승-15완투)
- 5년 1209.1이닝 89승 76완투 2.28ERA 2.05FIP (5년간 연평균 242이닝-18승-15완투)
- 1984년 324.2이닝 31승 6세 18완투 258탈삼진, 후기리그 우승, 한국시리즈 우승 (한국시리즈 40이닝 4승 4완투 포함)
- 단일 한국시리즈 8개 부분 1위 (이닝, 다승, 선발등판, 선발승, 완투, 완투승, 완봉승, 탈삼진)
특이한 기록은 1984년 8월 16일 MBC 청룡을 상대로 '4번 타자'로서 1사 만루 상황에 2타점 적시 2루타를 때린 기록. 4번타자 1루수였던 김용철이 자신이 친 타구에 부상을 당하여 물러나자, 지명타자였던 김민호가 1루수로 들어오면서 김용철의 타순에 투수였던 최동원이 들어가야 했던 것이다. 이것은 그대로 결승타가 되었으며, 유일한 프로에서의 타격 기록이다. 따라서 그는 타율이 10할, OPS가 3.000이다.[29]
8. 연도별 성적
- 푸른 글씨는 KBO 최다, 붉은 글씨는 1위 입상 성적. 진한 글씨는 리그 5위 내 입상 성적.
[1] 1987년 올스타전 당시 모 잡지사에서 찍은 사진으로, 그 다음 해인 1988년의 트레이드로 11번과 29번은 유니폼을 서로 바꿔 입게 된다. 이들의 손동작의 의미는 선동열의 등번호와 최동원의 등번호를 더하면 김시진의 등번호가 나온다는 뜻이다. 즉 '''18+11=29'''. [2] #,@[3] 국민학교 입학 직전에 부산으로 이주했다고 한다.[4] KBO 프로필. 소속팀이 한화 이글스라고 나오는데, 이는 한화 이글스 2군 감독이 그의 마지막 소속이었기 때문이다.[5] 문화방송에서 방영했던 국군 다큐멘터리 '전투도 과학이다'라는 프로에 1사단 기간장병으로 출연한 적이 있다.# 2012년에 상병이었으니 현재는 예비군도 끝났다.[6] # [7] 경상도는 다른 지역들에 비해 불교의 세가 매우 큰 지역으로, 그것을 반영하듯 경상도를 연고로 한 팀들인 삼성 라이온즈와 롯데 자이언츠는 역대 선수들 중 불교 신자가 많기로 유명한데, 최동원은 박정태, 조성환과 함께 (롯데의) 몇 안 되는 크리스천이었다고 한다.[8] # [9] 이 말은 롯데 자이언츠의 2017년 포스트시즌 캐치프레이즈가 됐다. '''마 함 해 보입시다!'''[10] 실업야구 코리아시리즈 6경기에 모두 등판(선발로 세 번)하여 무려 42.1이닝을 던졌다. 경기당 평균 7이닝을 소화한 셈.[11] 최동원 선친은 본래 소싯적에 축구에 재능이 있었으나 집안의 반대로 인해 꿈을 접어야 했고, 그 후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다리를 잃은 아픈 기억을 안은 사람이었다. 그 때문인지 아들의 재능을 발견한 뒤로는 누구보다도 강력하게 아들의 성장을 위해 헌신했었고, 구설수에 휘말린다 싶으면 "모든 욕은 내가 먹겠다"고 하며 아들을 감쌌다.[12] 낙차 큰 커브.[13] 이후 인터뷰에 보면 정말 대단한 자신감을 가졌다는 것이 보이는데 홈런을 맞으면 다음 상대 때 다시 똑같은 코스에 던져서 "칠테면 쳐봐라. 이번에도 또 치면 넌 실력이었고 못 치면 운이 좋아서 네가 쳤을 뿐이다."라는 마인드를 가졌었던 게 나온다. 홈런을 허용하고도 호탕한 웃음을 보여주었다.[14] 참고로 투심과 슬라이더의 영상은 지칠대로 지쳐있던 한국시리즈 7차전 영상이다. 그래서 그런지 투구폼이 상당히 무너져 있는 것을 볼수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슬라이더는 스트라이크존을 통과하는 저력을 선보였다. 심지어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저게 슬라이더야, 커브야?"라고 할 정도로 종으로 떨어지는 정도가 이미 한국프로야구 평균을 넘어섰다.[15] 흔히 슈트라고 부르는데 슈트는 구질이 아니라 구종을 말한다. 싱커나 포크볼 등이 슈트성 공에 포함된다.[16] 보통 최동원, 정민철, 김상엽을 역대 최고의 커브볼러 3순위로 꼽는다. 에스밀 로저스가 넥센 히어로즈에 있었을 때 굉장한 커브볼을 던져서 삼진을 많이 잡아냈었는데, 올드 롯데 팬들이 스트라이트존에 걸치는 커브볼을 보고, 최동원이 생각난다고 했을 정도.[17] 피안타, 피홈런, 볼넷[18] 자세히 보면, 처음 최동원의 투구 자세를 재연하는 장면에서 공을 던졌는데 글러브 안에 공이 있다거나 우완투수였던 재연배우가 좌완으로 바뀌어있는 등(이 경우는 다른 영상일 가능성도 있다.) 눈에 거슬리는 장면이 있다. 마지막 최동원의 대사. '''"승부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라운드에 들어와서 야구복을 입고 자기의 모든 것을 즐거워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게임한다 그러면 그보다 더 보람된 것이 없을 것 같아요. 저는 그것을 여러분에게 이야기해주고 싶습니다."'''[19] 과거 노리타 전적이 있어서 까이긴 하지만, 원래 이 사람은 최동원을 존경했었다고 한다. 그 증거가 바로 자신의 아들 이름을 '''동원'''이라고 지은 것이다. 매년 기일에 참석하는 것은 덤.[20] 정확히는 20'''11'''년 '''11'''월 '''11'''일 밤 '''11'''시에 MBC는 '''11'''번 채널이다. 등번호 '''11'''번의 최동원을 기념하기 위한 너무나도 완벽한 숫자의 조합. [21] 그러나 그시간에 부산MBC에서는 자체방송을 하였다.[22] 다른 것은 몰라도 MBC의 1980년대 KBO 리그 영상자료 보유량은 타 방송사가 넘볼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하다. 왜냐하면 그 당시 회사 산하에 MBC 청룡이라는 프로야구단을 운영하고 있었고 매주 화요일이나 수요일 저녁 시간대에 '''지상파 프로야구 생중계'''를 반고정 편성할 정도로 야구를 자주 보여줬다. 각 구장의 경기 영상을 종합해서 보여주던 프로야구 하이라이트 프로그램을 시작한 것도 MBC가 먼저였다. 그래서 영상자료가 많다. 이 때문에 유독 MBC에서 옛날 야구 영상을 쉽게 볼 수 있다. 다만 그 방대한 영상자료를 인터넷 다시보기로 제공하지 않는다는 게 단점.[23] 이 당시만 해도 한국프로야구 선수에 대한 에이전트 활동은 허가가 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24] 야구를 배우긴 했지만, 너무 늦게 시작한 탓인지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하고 그만뒀다고 한다. 이후로는 일본 도쿄의 데이쿄 대학교(帝京大学) 경영학과에서 스포츠 경영과 마케팅을 공부하고 있는 중이라고[25] 최동원이 불법 시술에 동조한 것이 아니라, 암 투병 중인 상태에서 시술을 받기 위해 캠프에 참여한 것. 참고로 캠프에 참여하면 9박 10일동안 매일같이 소금물 관장만 한다. 여담으로 SBS에서 방영된 궁금한 이야기 Y에서도 해당 소금물 관장에 관한 내용을 다루며 최동원의 자료를 인용하였다. 실제로 방영된 영상의 최동원을 보면 롯데팬들 입장에서는 씁쓸함이 절로 밀려올 정도다.[26] 투구 전 송진가루, 신발끈, 겉양말, 안경, 모자챙을 차례로 만지고 공을 던지는 버릇[27] 1983년 장명부의 30승 다음으로 한국프로야구 단일시즌 최다승 2위 기록이다.[28] 이는 2020년 현재까지 단일시즌 최다 탈삼진 기록이다.[29] 출루율 1.000 + 장타율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