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젠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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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성산읍관련기사 태생의 한국계 일본인 작가, 언론인. 1983년 일본으로 건너가서 호스티스를 했고, 1991년 한 일본인 사업가 옆에 앉아 접대한 것이 계기가 되어 그와 동거를 하게 된다. 이후 일본인 동거남이 술집보다는 자신이 운영하는 어학원에서 비서 일을 해 보라고 권유하였고, 어학원에서 일하며 동거남과 나눈 이야기나, 술집 손님과 오가던 잡담 정도의 이야기 등을 모아 치맛바람(スカートの風)이란 책을 써서 한국 비하 논란에 휩싸였다. 이후로도 한국재정복(韓国再征服), 고 젠카의 혐한론(呉善花の嫌韓論)등의 혐한저서를 썼다.
1998년 10월 29일 일본에 귀화했으며, 혐한 및 우익 대변성 강연 경력으로 2000년에는 타쿠쇼쿠대학 객원교수로 초빙되어 현재까지 이른다. 고 젠카의 한국학 이론의 수준이나[5] 타쿠쇼쿠대학의 성향을 보면 일종의 우익세력과의 정치 야합으로 교수가 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재직 중 혐한 강의, 우익 인사 대변, 우익 단체 출강 같은 일을 도맡으며 한국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2. 이름
한일 양국에서 이름의 한자를 한국식으로 읽은 '오선화(オ・ソンファ)'와 일본식으로 독음한 '고 젠카(ご・ぜんか)' 두 이름이 쓰이고 있다. 일본식 이름으로 통명을 만들지 않고 오선화라는 한국식 이름을 그대로 쓰는 것은 일본 내에서 지한파로서 활동하기에 한국식 이름인 '오선화'를 사용하는 것이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6] 저서 표지 등에서는 오선화의 가타카나 표기 'オ・ソンファ' 및 이의 로마자 표기 'O Sonfa'를 쓴다.
나무위키의 프로토타입이 된 리그베다 위키 게시판에서 이 인물의 이름을 어떻게 표기해야 하는지에 대한 토론이 있었다. 본 위키에서는 이 인물을 '고 젠카'라고 부르는 것으로 확정되었으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참고로 엔하위키 시절 이 인물이 본 위키에 맨 처음 등록될 땐 '오선화'란 이름으로 되어 있었다.
- 한국 국적을 포기한 일본 국적자임을 반영하며 '오선화'는 제외함.
- 고 젠카, 고젠카, 오손화[7][8] 중에서 문제가 되는데, 여권에 등록된 이름이 고 젠카(GO, ZENKA)임[9]
- 일본인의 이름을 표기할 때는 성과 이름을 띄어 표기하는 원칙[10] 을 반영하여 '고젠카'가 아닌 '고 젠카'로 함.
3. 호스티스 경력 및 학력위조
제주특별자치도 출신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대구광역시로 올라왔다. 1976년 '''대한민국 육군'''에 입대하여 하사로 복무하였으며, 1980년 전역하였다. 본인 이야기로는 대구대학교를 편입한 뒤 졸업했다고 주장했으나 PD수첩의 조사 결과 필명 오선화도 본명 오승일도 대구대학교에 다닌 적이 없는 것이 확인되어 거짓으로 밝혀졌다. 경향신문의 취재 결과 대구대학교가 아니고 1980년 2월 대구보건전문대학을 졸업한 '오승일'이라는 학생은 확인되었고, 결국 대구보건전문대학 임상병리과를 졸업한 것이 최종학력인 것으로 밝혀졌다.
졸업 후 1983년 일본으로 건너가서 호스티스로 일을 했고, 우에노의 뉴태양이라는 한국 클럽에서 한복을 입고 접대를 하며 본명인 오승일 대신 화류계 예명을 만들어 썼는데 이게 오선화라는 이름이다. 이후 본명과 경력, 학력 등을 속이고 일본의 극우 세력을 따라다니며 한국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이 행보의 첫 타자를 찍은 것이 위에도 적혀 있는 '치맛바람'의 출판. 그래서 전여옥의 일본은 없다의 주요 타깃이 되어 가루가 되도록 까이기도 했다. 그러나 전여옥의 일본은 없다도 표절작으로 밝혀져서 표절 작가가 학력위조범을 까는 병림픽이 되었다.
그나마도 PD수첩의 조사 결과, 자신과 동거하던 사업가가 운영하는 어학원에서 잠 깨라고 농담 삼아 주고 받은 얘기를 열심히 받아 적어 짜깁기한 것으로 밝혀졌다. 출판사는 오선화가 가져다 준 원고가 재밌어 출판을 결심했지만 일본어 실력이 너무 형편없던 나머지, 도저히 그대로는 내줄 수가 없어서 무려 1년 동안이나 문장 교정을 해주며 일본어를 가르쳐주다시피 했고 결국은 고스트 라이터, 즉 전문 대필 작가를 고용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후 자신에 대한 비난이 거세지자 곧 일본으로 귀화를 결정했다. 여담으로 그 대필 작가는 1권을 써 주다가 이건 좀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한 나머지 2권부턴 참여하지 않았다고 한다.
재미있는 점은 1991년 6월 11일 PD수첩이 일본의 한국 호스티스에 대해 취재했을 때, 호스티스 출신 작가로 이미 출연한 적이 있다.
1983년에 일본으로 건너가면서 이름을 '오승일'에서 오선화로 개명하였다고 한다. 이후 다이토분카대학(大東文化大学)[11] 의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도쿄외국어대학[12] 지역연구과 북미지역 전공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이후 도쿄도 분쿄구에 있는 타쿠쇼쿠대학(拓殖大学)의 국제학부 교수로 임용되어 재직 중이다. 이것도 본인의 실력으로 되었다기보다는 혐한 서적의 출판이나 방송 출연으로 인한 유명세로 인한 것이다. 한국이나 일본이나 아주 뛰어난 업적이나 경력이 있으면 모를까 4년제 대학 정교수가 되려면 학력이 박사는 되어야 하는데 고 젠카는 최종학력이 석사다. 게다가 대학의 연구업적 시스템을 조회해 보면 논문보다는 죄다 혐한을 주제로한 잡지, 책, 텔레비전 출연 대담으로 도배가 되어 있으며 이게 딱히 학문적으로 의미가 있다고는 보기 어렵다. 더구나 타쿠쇼쿠대학에서 오선화를 추천한 새역모 소속의 교수가 PD 수첩의 인터뷰에서 이러한 업적을 바탕으로 교수 임용을 했다고 밝혔다.
실제로 전남대학교 대학원 일어일문학과에 석사과정으로 유학 온 일본인 학생이 졸업논문에 고 젠카의 책을 참고문헌으로 인용했다가 논문심사 때 문헌의 신빙성이 의심된다며 한국인 교수에게 지적을 당하고 뺐는데, 그 학생은 "고 젠카의 책을 읽어보면 한국에 대한 애정이 넘친다"거나, "일본과 한국을 아주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모국을 사랑하기 때문에 비판을 하는 것"이라고 하는 등 황당한 글 구글 번역을 올리기도 했다. [13]
4. 고 젠카의 혐한관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나온 고 젠카 수업내용은 이렇다.
예를 들어 남대문 근처 거주지에 주민들이 봉투에 담아 버린 쓰레기를 보고 이렇게 가르친다.
이게 수업내용이다.저렇게 불결하고 지저분한 쓰레기를 보세요. 우리는 이 사진을 보고 한국인이 얼마나 비위생적으로 쓰레기를 배출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외에도 PD수첩에 나온 수업 녹화 영상을 보면 한국사람은 해산물을 먹지 않아 조개도 먹지 않았다거나, 한국사람은 어른 앞에서는 예의가 아니므로 안경을 쓰지 않는다거나 하는 황당한 말만 한다.[14]
참고로 위 두 주장에 대해서 반론하자면 다음과 같다. 그녀의 시각이 얼마나 시대착오의 극치를 달리는지 알 수 있다.
한반도는 삼면이 바다인 만큼[15] 예로부터 엄연히 해산물을 즐겨 먹어 왔다.[16] 애시당초 회라는 요리 자체가 한국 어부들도 잘 먹던 음식이다.[17] 조개도 전통적으로 많이 먹어왔으며 그 증거로 한반도 내 597개소에서 조개더미 유물이 발굴되었다. 특히 바다와 인접한 가야와 백제에서 즐겨먹다보니 일본 요리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물론 한반도의 전통적인 인구 밀집 지역들은 대개 내륙 분지이다보니 냉장기술이 발달하기 전까지 해산물을 싱싱한 형태로 접하기는 어려웠고 간고등어의 사례처럼 염장하거나 말린 뒤 익혀먹는 음식 위주였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고 젠카는 이를 과장하여 "한국인들은 지금도 해산물 자체를 아예 거들떠보지 않는다"는 식으로 왜곡했다. 냉장기술과 운송기술이 발달한 현대에는 그녀의 망상과 정반대로 수많은 한국인들이 활어회는 물론이고, 해물탕과 조개구이 등 다양한 해산물이 듬뿍 들어간 요리를 문제 없이 즐기고 있다. TV에는 낚시 프로가 나오며 맛집 소개에서도 가끔씩 해산물이 나와준다. 일부 특이 체질인 경우를 제외하면 단 한 번이라도 해산물을 먹어보지 않은 한국인은 없다.
안경도 한반도에 처음 보급되던 조선시대에는 남들 앞에서 안경 쓰면 '학식있는 척'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개화 이후로 그런 풍조는 급속히 사라졌다. 물론 왕실은 보수적이라 그런 풍조가 남아 순종도 심한 근시였지만 아버지 고종 앞에서는 안경을 쓰지 못했고, 남녀차별이 심했던 1970년대까지 여자들이 선을 보러 갈 때나 예비시가에 처음으로 인사갈 때 안경을 쓰고 가면 흠으로 여겨지기는 했다. 그러나 고 젠카가 대학 교수가 된 때는 2000년이라 이미 그런 풍조가 완전히 사라진 시대였으니... 아니 본인이 한국인이었던만큼 어른 앞에서 안경 쓴 어린이는(하다못해 초등학교 교실만 가도 있다) 단 한번이라도 본 적이 없지 않았을텐데 저런 말을 하는 거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5. 논란
일본에서 한국에 관련된 것들을 비하하는 강의를 하는 등 대표적인 친일 인사로 유명하다. 이미 일본으로 귀화한 일본인이니 친일반민족행위자라고 하기보다는 혐한이라 하는 것이 옳다는 주장도 있다. 혐한 매체가 늘어남에 따라 그 쪽 장사꾼인 본인도 한 몫 챙기려고 SAPIO 같은 잡지에 기고하거나 불쏘시개 혐한 책을 내는 빈도가 늘어났다. 예전에는 한글 비하를 주 레파토리로 쓰다가 요즘은 혐한 주제가 모자란지 한국에서 무슨 일만 벌어지면 마구잡이로 가져다가 까는데 쓰고 있다. 일본 아마존 같은 것에 가서 책을 검색해보면 그야말로 중구난방이다. 2006년 기준으로 고 젠카는 90분 특강 1회에 강연비 10만엔 정도를 받고 나가고 있으며, 신칸센표와 호텔 숙박비까지 주최측이 부담하는 조건이라 20~30만엔은 든다고 한다.
6. 현황
2006년 7월에는 제법 유명한 일본의 시사잡지 문예춘추 7월호에 자신의 우에노 소재 한인 유흥업소 근무[18] 경험을 바탕으로 배설한 한국 남성 비판론을 기고했다. 한 강연에서 그는 '한국 남성은 여자에게 잘해 줄 것처럼 굴지만 결혼 후에는 그렇지 않다'며 바람기와 폭력, 남아선호사상, 고부 간 갈등 등 여성의 인권 상황이 열악하다 주장했다.
2012년 4월 사쿠라TV에서 방영한 일한비교문화레포트 한국식문화에서 국내 입국이 확인되었다. 영상 초반부에 5년 만에 한국 땅에 왔다고 밝히고 있다.
PD수첩의 취재 등으로 이름이 알려져 한국에도 입국이 금지된 일본인이며 2007년 모친상을 당했을 때에만 외적으로 입국이 허용됐지 그 외에는 입국이 불허되고 있다. 이에 고 젠카는 한국은 인권이 없는 나라라는 증거라면서 연일 패악을 부렸다. 정작 본인이 한국인의 인권을 무시하고 비하하는 발언을 밥먹듯이 하는걸 보면 그야말로 내로남불
2013년 5월 2일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성산읍 고성리 일대 대지 974㎡ 중 743㎡를 매입했다. 매입 금액은 1억 9300만원으로 고 젠카의 국적과 주소는 일본으로 표기돼 있다. 고 젠카가 매입한 땅은 성산일출봉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어서 일출봉이 한눈에 들어오는 일반 상업지역으로 현재는 관리가 이뤄지지 않아 잡목과 잡초가 무성한 상태다. 그러나 이 토지의 용도는 일반상업지역이고, 토지 가장자리로 너비 15~20m 규모의 왕복 2차선 도로가 계획돼 있다. 지난 1999년 8월, 한국 국적으로 해당 토지의 일부를 매입한 것으로 알려진 고 젠카는 이번에는 일본 국적으로 나머지 토지를 사들인 것으로 전해졌다. 따지고 보면 이게 혐한 서적 인세나 혐한 강연을 하며 번 돈으로 산 것이니 기분이 묘하다.
2014년 4월 21일에는 일본에서 "왜 한일이 화해할 수 없는가"를 주제로 강연하던 중 "세월호 사태는 극한 상황에서 한국인들의 본모습을 보여준 일", "한국인들은 반일할 때는 단결하지 이럴 땐 저런 모습이다"라는 주장을 하여 빈축을 샀다.
2015년 들어서는 친일 와패니즈 미국인 켄트 길버트[19] 와 함께 놀아나고 있다. 켄트 길버트와의 대담 토크쇼에서 "한국은 일본의 스토커다. 강한 자에게 굽신거리는 민족이다."라는 웅변으로 일본 극우 매체에서 보도됐다.
2015년 11월에는 위안부 문제를 부정하는 글을 쓰고 미국이 일본의 적이라고 선동하는 내용을 담은 책을 내놓아 또 어그로를 끌고 있다.
2016년 12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및 탄핵정국에서는 뜬금없이 일본 우익인사인 사쿠라이 요시코 등과의 대담에서 한국은 망하기 일보직전, 더불어민주당의 문재인이 대통령되면 바로 북한같은 정권이 된다고 했다. 급기야는 한국 전문가로 일본방송에 초빙되어 해설까지 하게되었다. 여담으로, 일본에서는 한국 19대 대선 선거방송을 직접 생중계했다.
2017년 3월 탄핵이 결정되자 '이번 사태는 한국인들의 기질이 북한에 가까워지고있는 증거'라고 주장하며 이는 일본야후의 뉴스란 마토메 등을 통해서 큰 화제가 되었다.[20] 이 주장대로라면 진즉에 북한에서 민중혁명이 일어나서 김씨부자가 처단되어야 한다.
7. 관련 문서
[1] 본인 스스로는 일본어 이름을 오손화(オ・ソンファ, O Sonfa)로 쓰고 있으나, 대한민국 언론에서는 ‘고젠카’라는 독음으로 소개되기도 한다.[2] 귀화 전 본명: 오승일 → 오선화[3] 現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성산읍. 군위 오씨 집성촌이다.[4] 1998년 10월 29일 대한민국에서 일본으로 귀화하였다.[5] 넷 우익 자기개발서 수준의 정신분석을 갖다 쓰고 있다.[6] 이는 반대 성향의 인물인 호사카 유지의 전략과도 비슷하다. 한국에 귀화했음에도 일본이름을 유지하며 독도가 한국의 영토임을 주장하고 한일관계가 악화될 때 마다 각종 프로그램에 등장하며 토론 및 신친일파에 대한 경고를 한다.[7] 한국어 이름인 오선화를 일본어의 음운체계에 맞춰 부르는 것인데, 한국 태생인데도 본인의 이름을 저렇게 표기한다는 것의 의미는 명백하다. 스스로 한국인이었다는 과거를 부정하는 것. [8] 마루한의 한 창우 회장처럼 한국 태생으로서 한국어의 로마자 표기 관례 그대로 로마자 표기를 사용하는 사람도 있다[9] 당초에 주민등록증이 따로 있는 한국은 특수한 경우고,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자국내에서도 여권으로 주민등록증의 효력을 갈음한다. 그렇다면, 여권에 해당 인물의 이름이 고 젠카라고 등록되어 있다는 것의 의미는 명백하다.[10] 일본인의 성과 이름을 띄어 써야 한다는 규정은 맞춤법에 없다. 다만 일본식 성명은 성과 이름을 붙여 쓰면 구분이 안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관례상 성과 이름을 띄어 쓴다. 이는 맞춤법에 어긋나지 않는다. (한글 맞춤법 제48항: 성과 이름, 성과 호 등은 붙여 쓰고, 이에 덧붙는 호칭어, 관직명 등은 띄어 쓴다. 다만, 성과 이름, 성과 호를 분명히 구분할 필요가 있을 경우에는 띄어 쓸 수 있다.) [11] 소위 말하는 대동아제국 라인의 대학이다. 대략 중하위권의 대학이라 보면 된다.[12] 외국어를 전문으로 가르치는 대학. 이 학교는 도쿄에서 명문대로 꼽힌다.[13] 해당 블로그를 보면 이 학생은 한국인과 결혼한 듯하다. 다만 일본에서 살다 보면 아베와 한국의 친일 정치가들을 매우 싫어하고 반일 정책을 펴는 정치가들을 지지하는데도 일본에 이주한 뉴커머 교민들도 생각보다는 많다. 꼭 정치성향에 맞춰서 유학이나 이민을 간다고 생각하지는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14] 정확히 말하면 이런 예법이나 분위기가 딱히 한국에만 있었던 것도 아니고... 실제로 트로츠키의 자서전에서도 학생 시절 공부하더 시력이 나빠져서 안경을 쓰게 되었는데, 방학때 집에 돌아가자 젊은 학생이 안경을 쓰는 것을 '건방을 떠는 것'이라고 여긴 아버지가 (심지어 시력이 나빠져서 안경을 쓰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는다고 설명했는데도) 집에서 안경을 쓰지 못하게 했다는 일화가 소개되고, 괴테 같은 인물조차 안경을 쓰는 행위에 대한 악감정이 가득 담긴 기록을 남겼을 정도. 즉, 현대 이전까지 안경을 쓰는 것을 예법에 어긋나는 행위로 보는 문화권은 그리 드물지도 않았다.[15] 더구나 한국의 심장부인 서울 경기 지방은 한강을 끼고 있다! 한강 하구인 김포와 파주의 경우는 바닷물이 유입되다 보니 바닷고기와 민물고기가 섞여서 어족이 풍부하기도 했다.[16] 한국인이 해산물을 안 먹었으면 민어나 홍어라는 생선이 유명해질 이유도 없었다. 돔배기 항목도 참조. 그밖에도 청어나 웅어는 조선 내내 서민들의 중요한 단백질 공급원이었다. 특히 민어는 어획량 급감으로 인해 먹기 어렵게 되기까진 여름철 보양식으로 먹어온 생선이었으며, 청어는 저렴한 단백질 공급원이라 가난한 선비를 살찌운다는 뜻의 '비유어(肥儒魚)'라는 별칭으로 불렸을 정도.[17] 현산어보가 이러한 어부들이 즐겨 먹는 생선들에 대한 도감이다. 즉 조선 시대에도 엄연히 해안지방을 중심으로 해산물 요리들이 유행했음을 알 수 있다.[18] 맨 위 영상 참조.[19] 일본에서 국제 변호사 활동과 탤런트 활동을 하고 있는 친일 미국인. TBS 테레비의 퀴즈 프로그램 '세계 통째로 HOW 매치'와 기묘한 이야기등 유명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일본 중장년층에서 꽤 인지도가 있다.[20] 뉴스 액세스 랭킹 1위를 찍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