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균옹호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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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원균은 원래부터 능력이 부족하고 성질이 포악해 그다지 평가가 좋지 않은 편이었으며, 정치논리에 의해 원균을 고평가하던 일부 여론은 칠천량 해전의 대패 이후 전부 박살난 이후부터 원균은 까야 제맛인 존재로 격하된다. 하지만 현대에는 까가 빠를 만든다는 법칙 때문에 오히려 원균을 옹호하는 주장이 퍼지기 시작했다. 또한 잘 모르는 대중에게 원균 옹호론이 치우지지 않고 믿을 만한 논리로 받아들여지면서 잘 모르는 사람들은 아직도 여기에 낚인다. 모 소설가는 원균을 위해서 변명 비슷한 글을 썼더니 원씨 가문 사람이 와서 감사를 표하더라고 한다.
의외로 박정희 시절부터 이순신을 띄워주는 동시에 원균이 지나치게 옹졸한 소인배로 격하되었지 않았냐는 의심이 있었고,[2] 전두환 정권부터는 본격적으로 원균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진행되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악당으로 불린 인물은 피해자였고, 더 알아보니 영웅이었다'는 논리의 시작이었다. 이것은 20세기 후반의 기존 역사적 서술을 의심하던 역사수정주의가 한국으로 수입되면서 나온 흐름이라고도 볼 수도 있다.[3] 박정희라면 경기를 일으키며 민주화 운동을 하던 사람들 중에도 이걸 굳게 믿는 사람들이 다소 있었다. 물론 모든 좌파 진영이나 운동권에서 원균 옹호설을 지지한 건 '''절대 아니다'''. 게다가 지금의 원균 옹호를 주도하는 건 자유한국당의 원유철이며, 이 사람 역시 자기 조상이라서 이러는 것이다. 원균이나 원유철이나 둘다 똑같다.
이렇게 물밑에서 떠돌던 이론은 '''1980년대''' 이재범의 《원균정론》[4] 에서 첫 스타트를 끊었다. 소설가 고정욱의 《원균, 그리고 원균》[5] 소설가 김탁환의 《불멸》로 이어지며 원균 옹호론을 퍼트리는데 앞장섰다. 이덕일 또한 《우리 역사의 수수깨끼》에서 원균 옹호론을 전개한 바 있다.[6][7][8] 자세히 읽어보면 원균보다는 선조를 재평가했음을 알 수 있는데, 전체적으로 원균을 기용하고 칭찬한 선조가 무능하지 않았다는 서술이 많다.
원균 옹호론자들은 신빙성이 떨어지는 가문 기록인 《원균행장기》를 내세우며, 난중일기와 장계들을 비롯한 이순신의 기록들은 무시한다. 또한, 선조수정실록의 기록들은 이순신의 친척이 원균을 고의적으로 왜곡했다고 주장한다. 논파당하면 "역사는 승자의 역사", "옛날 일을 네가 봤냐? 어떻게 아냐?", "원균도 열심히 싸웠다"라는 소리로 일관한다. 악명 높은 환빠들과 주어, 목적어만 바꾸면 완전히 똑같다. (예 : 강단사학이 진실을 은폐한다. 숨겨진 진실을 찾아야 한다 등등)[9]
이러한 책이나 당시의 오류는 너무나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원균정론》''' : 원균 옹호론을 처음으로 묶어서 만든 책이다. 하지만 원균을 옹호하기 위해서 무리한 해석이 많다. 일례로, "이순신이 원균 몰래 장계를 올렸다" 면서 실록 기사를 내놓는데, "이전 한산도 해전(옥포의 오기)의 장계와 같습니다" 라면서, 이순신이 원균을 따돌렸다는 내용이 있다. 그런데 실제로 위의 기사가 적힌 날짜는 '''한산도 대첩 직후'''이다. 그 밖에도, 경상 우수영 병력이 1만이면 조선 수군은 10만이고 육군은 50만이다라는 주장이 실려있는데, 이건 일본 학자들의 주장으로서, 당시 조선 병력이 얼마였는지는 경국대전과 실록에 '''아주 잘 실려있다.'''
'''《선조수정실록》에 대한 이해 부족''' : 선조수정실록은 선조에게 미움을 받은 장수(이순신, 의병장)들에 대한 평가를 다시 쓴 기록이다. 1970년대 사학계에서는 이순신을 지나칠 정도로 찬양했기 때문에, 선조의 평가가 담긴 선조실록을 다시 연구하려는 움직임이 생겨났다. 원균 옹호론은 선조와 이순신을 심층적으로 연구하기 위한 방법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1980년대 이전에도 수정실록'''만'''을 참조해서 이순신을 찬양했던 학자들은 없었다. 학자들은 처음부터 실록에 버금가는 신뢰도를 가진 임진왜란 기록들을 교차검증하면서 연구했다. 결과적으로, 선조가 이순신과 의병장들처럼 능력자들을 숙청했던 이유는 왕권을 수호하기 위해서였음이 분명해졌다. 애초부터, 선조수정실록은 몇몇 충신들의 명예를 회복시켜준 기록일 뿐이고, '''원균의 평가는 선조실록의 원본을 보더라도 별다른 차이가 없다'''.
결국, 원균 옹호론은 한국 역사 재해석의 최대 흑역사로 남게 되었다. 그야말로 '''아폴로 계획 음모론에 필적할 만큼 근거 없는 의견'''이다.'''원균 칭찬에만 도취하는 이론''': 당시의 과도기적인 연구에는 이미 해답이 내려졌다. (원균은 왕권 강화를 위해서 이순신의 제거에 사용된 간신배가 맞다). 하지만 원균 옹호자들은 선조 - 원균 - 이순신을 재평가하려고 했던 1980년대의 연구 중에서,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이론들만 인터넷과 책에다 무작정 퍼나르고 있다. 원균 옹호론을 펼치는 사람들은 그동안 발전한 연구를 무시하거나, 원균에 대한 사학계의 결론마저도 부정하는 경향을 보여준다.
처음에는 선조를 재평가했던 이론에서 원균이 포함되자, 원균 옹호자들이 원균의 간신배적인 행보를 부정하고 이순신을 깎아내리는 통에, 반감을 느낀 역사학자들은 원균을 더욱 싫어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원균에 대한 평가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는데, 공식적으로 조선 정부에 보고된 기록에는 '''이순신과의 연합 작전을 제외하면 아무런 전공이 없기 때문이다.''' 시쳇말로 이순신 버스나 얻어탔을 뿐이다.
하지만, 불멸의 이순신 같은 작품에서는 원균을 이순신의 멘토로 만드는 상황이 벌어졌다. 공중파 대하사극에서 이런 짓을 저지르자 분기탱천한 김경진 등은 공저한 소설 《임진왜란》에서 원균 옹호론을 공격했고, 다음 토탈워 카페지기 도현신은 자신의 책인 《원균과 이순신》에서 원균 옹호론을 반박했다. 그럼에도 《원균, 그리고 이순신》, 재미교포 작가 백지원이 쓴 '''사이비 서적''' 《왕을 참하라!》, 《조일전쟁》 등 원균 옹호론 저서들은 계속 나오고 있다.[10] OTL. 이우혁은 자신의 홈페이지에 '슬픈 시각으로 본 원균 명장설'이란 글을 올렸으며 이 글은 토론할 때 종종 인용이 된다.보러가기
현대의 원균 옹호론은 자본주의 시장에서 '''마초적인 지휘관 동료로서''' 팔아먹기 좋은 캐릭터라서 유행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이우혁에 의하면 마지막에 싸움터로 향했으므로 '''군인에 대한 보편적인 동정심'''을 이용하는 사람들, 학문적으로는 '''박정희 정권이 이순신의 명성에 편승하려한 점'''에 대한 반발, 가장 최근의 사례로는 '''조선, 이순신, 한국인을 깎아내리기 위해서''' 국까 컨셉을 잡으려고 원균을 옹호하는 경우도 있다. 원균 옹호론을 보면 이러한 심리가 꼭 하나씩 섞여있다. 궁예, 광해군 등이 재평가 되는 것과는 질이 다른 것이다.
오해를 고치기 위해서 말하자면, 원균은 절대로 영웅이 아니었다. 그는 전형적인 권력 숭배자이자, 권력층과의 유착이 깊었던 간신배이다. 또한 철저한 이기주의자였기에, 부하와 백성들이 위험에 처하자 방패막이로 써먹고 도망치기만 했다. 당대의 같은 친척들도 원균을 부끄러워했을 정도였다.
근본적으로 따지면 원균 옹호론을 처음으로 만든 사람은 '''선조'''였다. 현대의 원균 옹호론은 선조를 재평가하는 이론에서 시작되었으며, 원균 옹호론자들이 내세우는 사료는 원균행장기와 선조의 변명을 짜집기한 것이다. 현대인들에게는 이해가 안 되겠지만, 원균은 이순신보다 권력자들의 이익에 부합되는 것이 많았고,[11] 결정적인 순간에 신뢰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12] 당시 조정에서는 이순신처럼 우리 편임이 명확하지 않은 장수에게 미련이 없었다.
정리하자면 '''나라 말아먹을 뻔한 정치 군인, 권력자에게 이쁨받은 꼴통, 혈연만 끝내줬던 간신'''. 원균 재해석 운운하는 소리가 나오면 혹시 왜곡된 정보로 억지 주장하는 것인지 잘 살펴보자.
똥별도 별은 별이라고 영어 위키에선 원균을 Korean admirals 카테고리에 등재시키고 있는데, 미국과 영국 해군 교과서를 집필한 이들이 쓴 책인 '해전의 모든 것'(휴먼 앤 북스 펴냄)에서도 이순신을 '''전설적인 명제독'''으로 설명하면서 원균은 조선 수군을 매장한 '''최악의 무능 제독'''으로 비꼬고 있다. (단, 여기에선 박홍도 동류로 까고 있는데 이 사람은 적어도 원균에 견주면 '''훨씬 유능한''' 편이며 억울한 점도 있다.)
2. 원균 명장설은 근거가 없다
원균을 이순신에 필적하는, 혹은 능가하는 장군이라고 보는 견해가 원균 명장론이다. 이순신의 전공은 모두 우상화한 승자측의 역사왜곡이라는 극단적인 주장.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대개 '''원균의 후손인 원주 원씨'''들이며, 근거는 주로 숙종때 대사헌을 지낸 김간의 통제사원균증좌찬성공행장(統制使元均贈左贊成公行狀)이다.
그러나, 행장기의 사료적 가치는 없다고 해도 좋다. 문중에서 조상들의 이름을 높이려고, 한참 후에 지어낸 책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이순신의 난중일기는 전쟁 당시 당사자가 쓴 기록이며 다른 공식 기록과 교차검증이 되지만, 원균행장기는 다른 기록과 교차검증되는 게 '''아무것도 없다.''' 행장기를 사료로 삼는 원균빠들을 놀리면서 나온 농담이 바로 김억추 명장설. 똑같이, 김억추 행장기를 근거로 하면 김억추는 '''항우를 한참 능가하는''' 판타지스러운 장수가 되어버린다. 검강으로 적선을 파쇄했다고 적혀있기 때문.
조선 시대의 선비들은 기록광이었다. 당장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 항목을 보자. 이런 기록을 남길만한 지식인들의 여러가지 전쟁기록을 보면, 원균에 대한 당시의 여론은 모조리 '''원균의 탐욕스러움, 권력 숭배주의(간신배), 권력자들의 감투 놀음이 나라를 망쳤음을 기록했다'''. 당대 지식인들도 그를 간신으로 분석했다는 뜻이다. 원균 명장론은 제대로 사료에 대한 교차검증만 해봐도 불가능한 이론이다. 선조가 "원균을 그 따위로 말하지 말라."고 했었으나, 역시나
결론부터, 원균은 명장이 아니다. 아군 학살과 도망의 명수 라고 보면 정확하겠지만 말이다. '''대관절 어떤 명장이 자신의 함대 70여척을 불태우고,[13] 이후에도 130척의 대함대를 버리고 도망치면서 전멸한다는 말인가?''' 참고로 원균이 불태우고 포기했던 배는 대부분이 판옥선이며 함포를 기본적으로 배치하고 있었다. 이에 반해 일본의 전선은 갑판 위에서 활이나 총을 쏘는게 전부인 사실상 수송선이나 다름없는 수준이었으니 지고 싶어도 지기 어려운 정도의 전력차였다. 굳이 충무공 정도의 전략 전술을 쓰지 않더라도 '''함포 사거리만 유지하면서 일방적으로 두들기기만 해도 이길 수 있는 전투들을 단 한 번도 이긴 적이 없으니 까놓고 말해서 졸장이라는 말 조차 쓰기 어려울 정도의 머저리다.''' 게다가 저 일에 대해 원균 옹호론자들은 권율이 패서 어쩔 수 없이 그랬다는 변명을 하긴 하는데 '''애초에 삼도수군통제사를 하겠다는 게 누구였더라?''' 되려 삼도수군통제사를 하기 싫다고 손을 휘휘 저었으면 차라리 지 활약상에 대해 양심은 있고, 현명하다는 소리라도 들었을 것이다. 권율이 원균을 팬 이유는 칠천량에 나가지 않아서가 아니라 '''원균 본인이 내뱉은 말에 책임을 지라고''' 팬 것이다. 칠천량에 나가겠다는 말을 먼저 꺼낸 건 원균이지 권율이 아니다. 그것도 그 말을 원균 본인이 직접 선조에게 했다.
원균옹호론자들이 역사에 대해서 발톱의 때 만큼도 모르는 좆문가인 것은, 원균이 임진왜란 초기부터 전투 조차 없이 '''75척 ~ 100척 가량의 경상우수영 함대를 불태우고 도망친 전례가 있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정발이 목숨 걸고 시간끌기를 하면서 침공 사실을 급보로 보냈을 때 그 것을 받은 것이 무려 원균이며, 성의 군민이 전멸하는 대가를 치룬 피묻은 급보를 받고도 싸우지도 않고 슈퍼 무기 판옥선들을 다 불태우고 도망간 인간이 어떻게 '명장' 취급을 받을 수 있는가? 그런 경우는 세계 어느 국가를 찾아봐도 존재하지 않는다. 원균이 겁에 질려 배를 버리고 도망가려 하자, 원균 휘하의 옥포만호 이운룡이 "나라의 중책을 맡은 장관으로서 강토를 사수할 것이며 더욱이 이 지역은 남방의 주요 방어선으로서 최대의 관문입니다. '''전라수군과 힘을 합쳐 왜적을 쳐부숴야지 도망은 직분과 국가에 대한 배신 행위입니다'''"라고 항언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당연히 원균은 쿨하게 씹어버렸다. 이런 걸 봐도 어떻게 원균 옹호론이 나오는지 의문스럽다.[14]
굳이 유능한 점을 찾으려 한다면, 혈연을 통한 주류 권력에 대한 후빨 능력, 자리보전, 낙하산을 이용하는 능력 정도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무관으로서 필요한 능력은 한없이 0에 수렴하면서 간신배의 필수 소양은 가히 만렙을 찍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조선 뿐 아닌 자기 자신에게도 재앙이 되었다.
원균을 비판하는 이들은 아예 한 술 더 떠서, '''명예 왜군 장수'''라고 일본식 이름까지 지어서 까기도 한다(...) 왜군에게는 칠천량 해전을 계기로 "이 거 해볼만 하겠는데?"라는 자신감을 쥐어주게 되었다. 왜군은 칠천량 해전을 벌일 예정이 없었기 때문이다. 뭔 소리냐면, 왜군은 준비 조차 안 하고 있었는데, 원균이 출정한다는 얘기만 듣고 규모를 알아본 후, "드디어 우리가 죽는가 보다."라며 죄 다 유서를 쓰고 방어전을 펼칠 생각이였던 것이다. 근데 실제로 전투를 해보니 이 건 뭐 오합지졸 그 자체. 어째, '''칠천량 해전이 터진지 약 352년 9개월 28일 뒤에 터진 전쟁을 선빵쳐서 일으킨 어느 머저리가 떠오르지 않은가?''' 원균과 똑같이 무능하고 전쟁을 일으켜놓고, 도망가버리고 맞고, 입만 살은 것까지 비슷한데 누가 그런 사람을 더러 명장이라고 하는지 의문.
3. 원균 맹장설도 근거가 없다
원균 명장설이 너무 말도 안 되고 쪽팔리니까, 명장은 아니었지만 차라리 용맹한 장수였다는 절충안(?)이 나왔다. 1980년대 MBC에서 방영한 조선왕조 500년에서도 원균이 무능한 밥벌레는 아니었고 맹장 타입이었다고 옹호를 해주었다. 불멸의 이순신에서 채택한 '해전에는 능숙하지 못하지만 육전에는 능숙해서 북방의 명장이었다'란 주장도 원균 맹장설에 포함된다. 하지만, 원균은 '''육전에서도 활약은 없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원균이 육군 전문이라는 말은 없다.[15]
이 경우는 안방준이 지은 은봉전서에서 원균이 안중홍에게 "적? 그까짓거 무기로 때려잡다보면 이기는거잖소?"[16] 라는 식으로 말했다는 내용이 근거로 제시된다. 허나 당연하게도 원균이 진심으로 이런 말을 한 건 아니고 그의 행실을 보면 알 수 있듯 당연히 허풍에 가깝다. 또 난중잡록 중 "한 끼에 밥 한 말, 생선 5마리, 닭이나 꿩을 3~4마리 먹는 대식가였다"는 내용도 한 말의 밥을 먹고 열 근의 고기를 먹으며 80넘은 나이에도 건장함을 과시한 염파나 하루에 1만 칼로리 이상을 먹는 마이클 펠프스 같은 여러 운동선수들의 식단과 비교당하며 그의 건장함을 나타내는 내용처럼 꾸며지지만, 원균의 경우는 안습하게도 그 다음 내용이 "평소에 배가 무거워 제대로 걷지 못했다."다. 즉, 앞뒤 잘라먹고 유리한 기록만 취사선택 한다는 것이다.
결론부터, '''원균은 맹장조차도 아니다. 猛將[17] 말고 盲將[18] 이라면 모를까.''' 당장 바로 위 카테고리에서 설명되는 '''수많은 적전 도주 사례[19] 나 자침 기록들만 봐도 용맹과는 거리가 한없이 멀다는 걸 세살배기 아기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도리어 장님 장군이라면 정말 기가막힐 정도로 말이 된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서는 신립이나 정기룡이 진짜 맹장이고[20] 원균은 맹장은 커녕 제 목숨만 챙기려던 똥별일 뿐이다.[21] 당장 신립은 니탕개의 난에서 얼마나 거대한 용맹을 보여줬는지 선조 임금이 직접 곤룡포를 벗어다가 신립의 몸을 감싸며 치하한 일화까지 있으며 정기룡은 말 그대로 임진왜란의 조운이었다. 다만 신립이 탄금대에서 최후를 맞이한 것은 조총 대 기병의 싸움인지라 안 봐도 비디오스러운 전투결과일 뿐이지 신립의 용맹이 약한 것은 아니다. 되려 녹둔도에서 종군하던 시절 이일의 후퇴명령을 무시하고 남아서 싸워 이긴 이순신과 이경록이 되려 원균보다 더 맹장같다. 적어도 이순신은 도망은 안쳤기 때문이다.
원균이 지상전을 잘하는 장수라는 가설은 헛소리에 가깝다. 조선 시대의 무관 시험에는 수군 무과, 육군 무과가 따로 있지 않았다.[22] 훈련 방법은 크게 차이가 났지만, 지휘관들이 배우는 기초적인 병법은 비슷했다. 물론, 해상에서는 군선이라는 별도의 도구를 써야 했으므로 이순신처럼 유연한 능력을 지닌 사람이 아니라면 적응 기간은 길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원균은 '''수군을 맡으면 잘 싸울 것 같다'''면서 가벼운 마음으로 수군을 맡았다.
되려 일각에서는 원균이 승마에 능하지 못해서 어쩔 수 없이 수군으로 배치됐다는 주장까지 나올 지경이고 실제로도 원균이 무과에서 부정을 저질렀다는 것도 승마 관련일 수도 있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칠천량 해전에서 패해 육지로 도망은 갔는데 뭐하러 말 놔두고 뜀박질로 도주했는가도 설명이 된다.
결국, 원균의 행적은 '''낙하산 인사의 파멸 기록'''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원균이 '최후에 군인으로서 싸우러갔다' 면서 옹호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원균의 지휘 기록이란 자신의 도주로를 우선하다가 전멸했던 황당한 사례밖에 남아있지 않다. 심지어, 원균은 걸핏하면 백성이나 군인들을 버렸으며, 이렇게 인명을 내팽겨친 만큼 성공한 업적조차 없다. 이런 장수에게 맹장이라는 평가를 붙여주는 것은, 그의 명령을 따르다가 허무하게 산화했던 군인들을 모욕하는 행위에 불과하다.
즉 원균은 맹장이라기보다는, 단순히 정치적인 유착과 권력 숭배에 취해서, 백성과 부하들의 목숨을 값싸게 낭비하면서 살았던 인물상에 가깝다.
권력은 맛보고 싶고 그렇지만 그에 상응하는 능력은 안되는 인물이 원균인데 이럴거면 차라리 글공부나 열심히 해서 문관이 되었어야 했지만 그러기엔 원균의 학식이 높은 것도 아니다.[23] 결국 원균은 관직부터도 가문과 인맥을 이용해 올랐고 그렇게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주제를 모르고 국가의 존망이 걸린 전쟁 상황에서 전투지휘관이 되길 고집했다. 거기에 탐욕이 지나칠 정도라서 부하들이 제대로 따르지 않아 지휘하는 데에 어려움도 많았다.
4. 옹호론이 나오는 이유
- 높은 인지도가 자본주의 시장에서 가지는 가치: 원균은 재평가를 들먹일 이유가 전혀 없는 간신배지만, 억지 논리와 사료의 취사 선택으로 '재평가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꾸준히 나오는 것은, 높은 인지도 때문에 '돈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인지도가 높은 화제에 대해서 기존과 전혀 다른 주장을 하는 것 자체가 충분히 화제성이 담보되는 행동이다. 때문에, 역사적 신뢰성과 관계 없이 마구잡이로 자극적인 주장, 기존 학계의 연구를 '강단사학' 운운하면서 마구 비난하는 재야저술가들은 그것만으로도 일정한 수입과 유명세를 얻을 수 있다.[24] 참고로, 환빠들도 기존 학계의 연구를 '강단사학'이라고 비난해댄 걸 생각해보면 의미심장한 부분.
- 종친회와 지역 사회의 이기주의: 원주 원씨 종친회와 평택시에서 '지역 위인'을 만들려고 원균을 적극적으로 후원하고 있다. 평택시의 5선 국회의원이자 새누리당 원내대표까지 지냈던 원유철은 원균의 직계 후손으로 원균 띄우기에 적극적인 인물중 한명 이다. # 이는 원균과 이순신을 동급으로 포장하여, 자신들도 그 후광을 얻어보고자 하는 심사의 발로이다. 그러나 원주 원씨는 정작 정말로 자랑스러운 조상인 원연에 대해서는 가문의 서자 또는 서얼로 여겨 취급 조차 하지 않고 외면한다.
- 당대 임금 / 권력층과의 친분: 원균이 이순신을 쳐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권력, 혈연적인 기반이 탄탄했기 때문이다. 물론 실력이 밝혀진 이후에는 원균이 선무공신 1등에 추서될 때 죄다 반대했지만, 이때는 선조 혼자 박박 우겨서 집어넣게 된다. 따라서, '원균이 엄청난 중책도 맡고, 죽고서도 공신이 되었는데, 찌질이로 나오면 이상하지 않겠느냐'하는 논리를 토대로 원균에 대한 선조의 호평을 팔아먹을 수 있게 되었다.[25] 당장에 원균이 저지른 짓은 족보에서 제명당해도 시원찮은 것이었지만, 선조의 두둔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평가가 유보되었다. 선조는 거의 원균빠돌이(...)에 가까웠다. 사관이 원균 비판을 하자, "원균 탓하지 말라"고 사관에게 욕을 날렸던 양반이다. 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했을 때도 이순신 이름이 나오자마자 나가버린 양반인데 오죽할까.
- 가공 매체에서의 극적 효과: 불멸의 이순신 부류라고 할 수 있다. 가공 매체에서는 원균을 약간 옹호해야 '작품의 재미'에서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아무리 원균 옹호론이 논파가 끝난 헛소리라도, '이순신의 라이벌' 운운하기에는 굉장히 좋은 캐릭터인 것은 사실이다. 지장 이미지의 이순신과 맹장 이미지의 원균[26] 을 대비시키면 흥미로운 전개가 만들어진다. 역사 그대로 묘사한다면, 원균은 처음부터 끝까지 찌질거리는 매우 평면적인 캐릭터라서, 현실적이고 재미있는 인물 설정을 위해서 조금은 옹호하는 각본을 짜는 것이다. 간단하게 말해서, 실제 이순신은 너무 비현실적으로 평면적인 먼치킨이고 실제 원균은 비현실적으로 평면적인 최악의 빌런이다. 따라서 현실적인(!) 설정을 위하여 현실을 왜곡해야 한다는 흠좀무한 부조리가 발생하는 것이다. 물론, 재미에서는 플러스가 될 수 있어도, 욕은 오지게 먹을 각오를 해야한다.
- 능동적이고 마초적인 맹장에 대한 갈망: 보편적으로, 군인 캐릭터가 등장하는 이야기는 멋있고 영웅적이어야만 팔린다. 속된 말로 찌질하거나 약한 캐릭터는 자본주의 시장에서 잘 통하지 않으며, 그것이 해당하는 장르에서 핵심 등장인물에 속한다면, 조금만 찌질한 행동을 해도 발암 을 유도한다면서 등을 돌리는 고객들이 많다. 당연히, 전쟁물의 주역인 군인 캐릭터인 원균은 이런 마초적, 자본주의적인 요구 때문에 시간이 흐를수록 막장도가 낮아지고 맹장으로 미화되는 측면이 생기게 된 것이다. [27]
- 지나친 프로파간다에 대한 반발: 박정희가 이순신을 존경[28] 하면서 프로파간다에 써먹었다는 의혹이 사회에 퍼진 점도 원인이다. 이후 이 프로파간다를 균형 있는 시각으로 분석해야 한다며 원균 옹호론이 사회로 퍼져나갔다. 하지만 이들의 주장은 당시의 프로파간다에서 나온 역반응에 불과하다. 반대로, 이런 흐름에 대한 비판자들도 이순신의 업적을 엿먹이는 경우가 있는데, 이 항목에는 북한에서도 이순신의 활약에 인민의 희생이 있다고 주장한다면서, 이런 여론에 대한 음모론을 써놓을 정도였다. [29]
- 왕권에 절대성을 부여하는 권위주의 혹은 권력자 중심적 시각: 선조실록과 권력자 중심적 시각, 국력지상주의를 견지하는 자들의 역사관이다. 사실 이 케이스는 원균옹호론보다는 선조 옹호론에 더 가깝다. 군사정권 프로파간다에 대한 반발심리로 인한 옹호가 진보 쪽에서 나타난 형태라면, 이쪽은 보수 쪽에서 간혹 나타나는 형태.[30] 이순신이 없어도 선조와 명의 힘으로 승리할 수 있으므로, 확실한 권력 배경을 지닌 원균을 이용해서 이순신처럼 아군임이 확실치 않은 실무자를 제거한 것은 타당한 책략이었다는 관점이다. 전형적인 선조 옹호론이자 강대국에 대한 종속주의를 드러내는 관점이다. 물론 이순신 없이도 승리했을 거라는 관점이 무조건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명나라 병사들에게는 조선 남부를 목숨 바쳐 지킬 이유가 없으며, 혼란기에 조선이 해체되는 입장에 놓였을 것이라는 점에서, 매우 무책임한 권력자 중심 이론이다. 당연히 중국이나 일본, 그리고 조선까들에게 매력적인 학설이기도 하다. 그러나 명군의 역할에 대한 해석과 상관없이 원균 개인의 졸렬한 행적은 바뀌지 않는다.
- 자칭 역잘알들의 지적허영: 남들이 상식처럼 알고 있지만 정작 깊이 있게 연구해 봤을 경우는 드물 경우 아는척하기 좋은 주제였다. 하지만 요즘은 오히려 인터넷에서 원균을 옹호하면 역알못이나 환빠 취급을 받기 때문에 이런 경우는 줄어들었다.
- 권위에 대한 반발: 원균옹호론과 동전의 한 면이라고 할 수 있는 이순신 폄하가 동시에 일어나는 이유는 바로 권위에 대한 반발심리 때문이다. 이순신이라는 영웅의 권위에 대한 반발, 박정희라는 독재자의 권위에 대한 반발, 민족주의라는 이념의 권위에 대한 반발. 이 세 가지 반발심에 기초하여 탄생한 이론이 바로 원균옹호론과 이순신 폄하론이다. 실제로 원균옹호론 및 이순신에 대한 폄하를 줄기차게 내세우는 인사들중에 '권위에 대한 반발'을 핵심 이론으로 삼은 포스트모더니즘과 그 하부 이론인 탈민족주의에 영향을 받은 진보 계열의 인사들이 있었다. 다만, 당시에 이러한 복합적인 반발심리로 연구되기 시작했던 원균 재평가의 큰흐름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으니 연구를 하면 할수록 드러나는 원균의 실책은 옹호해줄만한 여지가 없었기때문이다.[31]
- 유능하지 않았지만 무능하지도 않았다는 설: 아예 무능했다면 칠천량해전 때까지 원균이 조선의 군대에 붙어있지는 못 했으리라는 설이 원균옹호론의 큰 부분을 차지한다. 대표적인 반론은 조선은 너무 급속하게 전쟁준비를 하느라 조선 전체적으로 군사적 개념이 취약했고 그때문에 원균같은 존재를 미처 걸러내지 못했다 인데, 그러면 문제가 되는 점이 그런 환경 속에서는 상대적으로 무능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은 변함이 없지 않은가? 이다. 단적으로 말해, 이순신과 원균에게 빨리 부산으로 가서 싸우라고 닦달했던 사람들 중 누군가를 삼도수군통제사로 삼아 출정시켰다면 십중팔구 부산앞바다에서 조선 수군을 전원 수장시켜 아예 조선 수군을 재건조차 불가능한 수준으로 없애버렸을 것이다. 원균은 최소한 부산 앞바다에서의 작전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알았고, 미적미적대다가 곤장을 얻어맞고 강제로 출전한 뒤, 격군의 체력 방전을 감지하고 나서라도 어쨌든 후퇴를 시작해, 절대 좋은 작전이 아니었지만 아무튼 어떻게든 퇴각 작전을 수립한 뒤, 칠천량까지는 도달한 뒤에 섬멸당했다. 별 차이가 없어 보이고 원균이 더 추해보이긴 하더라도, 사소한 운만 개입되어도 전력을 온존한 패퇴 vs 완전한 몰살 까지 차이가 벌어질 수 있는 수준 차이이다.
5. 원균 옹호론의 사례(선양사업 포함)
5.1. 지역 사례(평택시)
- 평택에선 권력층과의 유착을 빼면 무능했던 원균을 지역의 유명인사랍시고 홍보하는 입장이고 지역 유지인 원주 원 씨에서 이것을 밀어주는 지라 심심하면 원균 옹호론을 들먹이고 행사를 여는 등, 세금이 아까운 병크를 자주 보여주고 있다. 졸장 이전에 간신배인 인간을 사당과 묫자리를 웬만한 위인 묘보다 깔끔하게 관리해놓은 건 덤. [34]
- '원균장군기념사업회'라는 곳에선 아래 그림에 적힌 발언을 '원균장군어록'이라며 홍보하고 있다. 굉장히 비장미 넘치게 묘사됐으나 일각에선 이순신 장군 몰아내고 당장 전쟁 나갈 거처럼 윽박지르다 정작 삼도수군통제사 되고 나니 무서워서 출정 자체를 하지도 않고 "밖에 적들 많으니까 육군 좀..."이라고 말도 안 되는 주장했다가 빡친 권율한테 곤장 맞은건 왜 빼먹었냐고 일갈하고 있다.(...)
- 2013년에는 평택문화원에서 원균을 미화한 서적인 '원균평전'을 발간하는 데 평택시에서 약 2,500만원 정도를 보조금으로 지급했다. (책 발간은 2014년) 이 책에 대한 평가는 을파소의 역사산책 블로그를 참조하면 좋다.
- 2016년 ~ 2017년 기간 동안 원균 무덤(시체 없는 가무덤) 정비를 위해 평택시에서 약 4억 5천만 원을 집행하였다.
- 2018년부터 원균 제사에 평택시에서 매년 300만 원을 보조금으로 지급 예정이다.
- 매년 원주 원 씨 종중 주관으로 진행하는 원균 제사의 모습이다. 이 행사는 2018년부터 평택시로부터 300만 원을 매년 지원받는다.
5.2. 인터넷 사례
- 위키백과마저도 상당히 오랫 동안 원균행장록을 근거로 원균 문서가 작성되어 있었다. 당연히 지금은 객관적인 비판이 훨씬 많다.
- 네이트 백과사전도 비슷한 내용이었지만 서비스가 중지되면서 사라졌다. 네이트 백과사전은 한국역대인물정보의 내용을 기본으로 작성했는데, 애초에 # 한국역대인물정보의 원균 내용의 집필자가 바로 원균의 재조명을 주장한 논문을 작성한 당사자이므로 이런 내용이 나온 게 당연하다.
- 불멸의 이순신 방영 때 역사를 제대로 모르고 원균 옹호론에 낚인 부녀자들이 실제 원균을 그네들 방식으로 모에화시켰다! 당시 부녀자들은 그들 방식대로 미화시킨 이순신과 원균을 가지고...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원균옹호론이 가진 시장성(?)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인기와 영향력이 큰 드라마가 남긴 오점이 현재진행형으로 발휘하고 있는 나비효과라 할 수 있다.
5.3. TV 프로그램 사례
- MBC의 예능인 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에서는 이순신을 주제로한 에피소드를 방영하였는데 원균을 당대의 이순신의 라이벌이라고 표현하였다. 덧붙여 자기보다 나이도 어리고 후배뻘인 이순신이 높은 직위에 먼저 오르니 원균이 불쾌했을법하다란 말같지도 않은 말도 나왔다.[35]
5.4. 대중 역사서 사례
위의 문단에도 설명되어 있지만, 현대 시장에서 원균이 뜨게 된 이유는 조금 더 복합적이다. 특히, 군인이면 보편적으로 강하고 좋은 존재라고 묘사되어야 '''팔린다는''' 자본주의적, 마초적인 측면에서 원균 캐릭터는 재창조되었다. 어찌보면 수동적인 이순신에 대응하는 화끈한 군인을 보고 싶다는 열망이 원균에게 투영되었고, 여기에 자본시장에서의 특정한 이익분야가 결합되자 걷잡을 수 없이 번진 것이다.
5.4.1. 이덕일의 서적
그의 여타 문제점에 대해서는 이덕일/비판 문서 참고.
그런데 원균이 선무공신 1등에 녹훈된 것이 신하들의 합의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선조의 무한 원균사랑 때문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마저도 원균은 본래 선무공신 2등이었는데,[36] 선조가 길길이 날뛰는 통에 1등으로 올라간 것이다. [37]『선조실록』 37년(1604년) 6월 25일자는 세간의 이런 평가가 정당한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해 준다. 임진왜란의 공신들에 대한 포상 기록인데…… 무신으로는 이순신 · 권율 · 원균이 선무일등공신이었다. …… 현재의 일반적 통념에 역적인 인물인 원균이 400년 전인 당시에는 당당히 일등공신으로 책봉된 것이다. 그것도 그가 모함했다는 이순신과 같은 반열에 올라 있다. 이 기록은 원균도 조조처럼 한 영웅을 위한 후세의 희생양인지 모른다는 의심을 갖기에 충분하다.
이덕일·이희근,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 1999년, 197쪽
원균은 1564년 무과에서 부정 시험 의혹[38] 으로 낙방했다가 15년 뒤인 1579년에 합격한 반면, 이순신은 1572년 무과에서 낙마 사고로 낙방했다가 고작 4년 뒤인 1576년에 합격했다. 따라서 원균 보다도 이순신이 선배다. 종성부사 원균은 인사고과에서 꼴찌를 기록한 반면, 발포만호 이순신은 인사고과에서 으뜸을 받았다. 시전부락 전투에서도 원균은 예비대인 계원장(繼援將)이었지만, 이순신은 포병대인 화열장(火烈將)으로 참전한데다 적장 우을기내까지 사로잡았다. 더군다나 이후 이순신은 부당한 이유로 픔계가 낮아진 적은 있어도 결코 합당한 이유로 떨어지지 않았다. 반면, 원균은 전라 좌수사에서 잘린 이유가 '''평판이 나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이런 점에서 볼 때 원균이 상대적으로 억울한 것은 사실이다. 그의 경력은 그가 불패의 신화를 지닌 용장은 아니지만 적어도 겁장(怯將)은 아님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이순신 보다 다섯 살이 많았던 그는 무과에 급제하여 조산만호로 있으면서 변방의 오랑캐 토벌에 세운 공으로 부령부사에 특진되었으며, 병사 이일과 시전부락을 격파한 공으로 선조 25년(1592년) 경상우수사가 되었다. 이는 이순신이 자신의 실력이 아닌 유성룡과 정탁의 추천을 받아 종6품 정읍현감에서 정3품 전라좌수사로 파격 승진한 것과는 비교되는 것이다.
이덕일·이희근,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 1999년, 200쪽
게다가 1591년 원균이 전라좌수사에 임명되자, 사간원은 인사고과를 들어서 그를 경질시켰다. 원균이 딱히 무슨 공적이 있어서 승진했던 게 아니었던 것.[39] 게다가 원균 다음으로 임명된 유극량도 실력은 있지만 성품이 무르다는 이유로 경질되었던 것을 보면 전라좌수사 임명이 어지간히 깐깐했음을 알 수 있는데,[40] 그 다음으로 온 이순신이 단지 승진이 빠르다는 것 만을 지적받았던 것은 오히려 그의 유능함을 보여준다. 이마저도 선조의 절대적인 지지로 유임되었다. [41]
주변 상황이 이런 마당에 원균은 착실히 전공을 인정받아 경상우수사가 된 인물이고, 이순신은 류성룡과 정탁이 앉힌 낙하산 인사라는 주장이 얼마나 웃긴 평가인지는 자명하다.[42] 실상은 오히려 그와 반대로 원균이 윤두수, 윤근수를 비롯한 조정의 서인 대신들과 교류가 많았다는 점 때문에 이들의 비호로 진급했다는 평가가 많다. 하지만 이들은 인과관계를 역전시켜 원균을 북인으로 만든다!
그렇다면 북인이 편찬한 선조실록과 북인 윤계선이 쓴 달천몽유록에서는 원균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선조수정실록』은 대체로 이순신에 대해서는 칭찬으로 일관하면서도, 원균에 대해서는 폄하를 일삼은 책으로서 '이순신 = 충신', '원균 = 역적'의 전거가 된다. …… 인조반정 직후 남인 이원익이 영상이 된 데서 알 수 있듯이 반정 정권은 형식상으로 서·남인 연합정권이었다. 이순신은 남인 영수 유성룡의 추천을 받았으므로 남인으로 분류된 반면, 북인이 집권했던 왜란 말기 조정에 비호자가 많았던 원균은 북인으로 분류되었으므로 『선조수정실록』이 이순신은 후하게, 원균은 박하게 기술했을 것이다.
이덕일·이희근,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 1999년, 201쪽 ~ 202쪽
사신은 논한다. 한산의 패배에 대하여 원균은 책형(?刑)을 받아야 하고 다른 장졸들은 모두 죄가 없다. 왜냐하면 원균이라는 사람은 원래 거칠고 사나운 하나의 무지한 위인으로서 당초 이순신과 공로 다툼을 하면서 백방으로 상대를 모함하여, 결국 이순신을 몰아내고 자신이 그 자리에 앉았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일격에 적을 섬멸할 듯 큰소리를 쳤으나, 지혜가 고갈되어 군사가 패하자 배를 버리고 뭍으로 올라와 사졸들이 모두 어육이 되게 만들었으니, 그때 그 죄를 누가 책임져야 할 것인가. 한산에서 한 번 패하자 뒤이어 호남이 함몰되었고, 호남이 함몰되고서는 나랏일이 다시 어찌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시사를 목도하건대 가슴이 찢어지고 뼈가 녹으려 한다.
그야말로 이게 무슨 지거리야! 게다가 선조 생전에 이순신에 대한 모함과 원균에 대한 비호의 선봉에는 서인 영수 윤두수와 북인 영수 이산해가 다투어 나섰고, 정유년에는 남인 영수 류성룡까지 소극적으로 편승했음은 잘 알려져 있다. 그렇다고 해서 윤두수가 북인이었다거나 윤계선이 서인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는 당파적 이해를 뛰어넘는 인식(이 경우에는 '선조에게 밉보이면 안 된다')이 있음을 인정할 필요가 있는 사안이다.[43]긴 시냇가에서 여러 귀신들이 손뼉을 치며 웃으므로 그 까닭을 물으니 통제사 원균을 기롱하고 있는 것이었다. 배는 불룩하고, 입은 삐뚤어지고, 얼굴빛은 흙빛이 되어 기어왔으나 퇴짜를 맞고 참여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언덕에 의지하여 두 발을 쭉 뻗고 주저앉아 주먹을 불끈 쥐고 길게 탄식할 뿐이다. 파담자 역시 크게 웃고 조롱하다가 기지개를 켜고 깨어나니, 그것은 한바탕 꿈이었다.
윤계선, 『달천몽유록』
기껏 중립적인 '''척'''을 하고 있지만 내용물을 뜯어보면 하나도 맞는 게 없이 엉망진창이다. 원균은 불패의 신장은 아니지만 개념 있는 장수는 더더욱 아니고,[44] 자신의 사사로운 감정으로 공익을 훼손시킨데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정치적 술수를 동원했다가 정작 싸움에서는 자기 혼자만 살겠다고 달아난 무다구치 렌야와 같은 민폐 개초딩 캐릭터다. 이런 사람을 전사했다는 사실만으로 추앙하는 건 반자이 어택을 조장하는 것이다. 5개의 주장에 대해 반박을 하면 다음과 같다.두사람에 대한 호불호의 감정을 배제하고 원균과 이순신을 정리하면 이렇다.
첫째, 원균은 용감한 무장으로서 이순신만큼은 못하지만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싸웠다. 둘째, 후배인 이순신이 상관으로 임명되자 반발하였다. 셋째, 이순신이 투옥된 후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삼도수군통제사로서 도원수 권율의 명령을 받아 재침하는 왜군과 싸우다가 전사했다. 다섯째, 선조의 호의로 선무 일등 공신에 책봉되었다.
종합해 보면 원균은 불패의 신장은 아니지만 공적이 되어야 할 이유도 없는 한 사람의 용감한 장수이자 왜적과 맞서 싸워 목숨을 바친 공신일 뿐이다. …… 이순신을 추앙하기 위해 다수의 문신들이 왜적의 침입에 놀라 달아나기 바쁜 와중에 힘을 다해 싸웠던 원균같은 무장이 희생양이 될 필요는 없다. 하물려 나라를 위해 전사했으니 더 말할 필요가 있으랴.
이덕일·이희근,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 1999년, 203쪽 ~ 206쪽
-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싸웠다.
- 후배인 이순신에게 반발했다.
- 이순신이 투옥되자 통제사가 되었다.
- 권율의 명령으로 싸우다 전사했다.
[image]
이 짓거리를 해서 진주성의 병력을 얻어다가 탕진하는 바람에 제2차 진주성 전투를 참패하게 만들었는데 이걸 군율대로 적용하자면 권율이 원균을 참수해도 아무 이상함이 없다. 전시에 탈영했던 배설이 수배령 떨어진 끝에 고향인 경상도 선산에서 체포되어 서울에서 참수형에 처해진걸 생각해보면...
- 선조의 호의로 일등공신이 되었다.
5.4.2. 기타 서적
- <원균이야기 칠천량의 백파>
- <난세에 간신 춤춘다>
...이지만, 원균은 애초부터 혈연, 파벌, 정권 후빨로 성공한 권력 출신 간신배였기에, 원균의 행적을 두고 무인들을 천시했던 분위기를 문제삼기에는 무리가 있다. 오히려, 그런 문제 때문에 불이익을 받은 사람은 주류 권력의 백업을 받기에 애매한 계층에 속했던 이순신이다.
- <교과서와 함께 읽는 만화 한국 역사 32권(임진왜란과 항전), 33권(성웅 이순신과 정유재란)>
아이들에게 소개하는 역사서로서, '조선 장수가 이렇게 무능할 리가 없어'라는 생각으로 만든 만화지만, 기본적으로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원균 옹호가 있는 책이다.
불멸의 이순신과 같은 원균 맹장론이다. 처음 적이 쳐들어 오자 부하를 보내 이순신에게 원군을 요청한다. (실제로는 적이 오지도 않았을 때 휘하 70여척 함대를 불태우고 도망갔다.) 그런데 이순신은 "전라도에도 적이 쳐들어 오면 막아야 하니 지원은 불가하오."라며 반대하고 결국 원균의 부하가 설득해서 이순신이 함대를 출동시켜서 적을 격파시킨 것처럼 나온다. 이순신이 원균과 육지(...)에서 처음 만나 "장군", "오~ 이순신 장군"이라고 부르며 해맑게 뛰어오며 서로 포옹할려는 장면도 있다.
기본적으로 이순신이 전과를 세웠다는 설명이 없다. 즉 이순신의 전과는 원균과 함께 싸운 전투만 공로를 인정하고 있다. 때문에, 원균이 꼴랑 배 4척 타고와서 이순신 뒤만 졸졸 따라 다니며 싸움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어린이들은 이 책을 읽고 이순신과 원균이 대등했던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50] 한산도 전투에서는 쌩뚱맞게 중위장 권준이 왜적 함선 수십척을 격파하였다고 써있는게 전부이며, 철저하게 이순신의 전과를 없애놓고 있다.
그나마, 이순신이 누명을 쓰는 장면은 "김응서는 왜국의 첩자 요시라의 말만 듣고 이순신으로 하여금 가토 기요마사를 잡게 하라는 청원을 상부에 올렸다."라는 부분으로 밝히고 있다. 그러나 두페이지 뒤에서 "이순신이 철저한 전략가라면 원균은 용장이였다."라며 원균 용장론을 주장한다. 이어 원균이 충청병사로 떠날 때는 부하들이 다같이 원균이 떠나간다며 운다(...). 나중에 원균은 삼도수군통제사로 돌아오는데, 원균이 싸우기 싫어서 병영에서 술만 먹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용맹을 자랑하던 원균도 신중을 기해 싸움을 준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배도 늘리고 지휘 체제도 바꿔야 해'"라며 아예 왜곡하기 시작한다. 게다가, 원균의 싸움 준비가 졸렬했던 이유는 전부 이순신이 거느리던 부장들과의 불화 때문이라고 하는 등 철저하게 원균의 책임을 면피해준다.
이어 도저히 싸울 수 없는 상황이지만 명령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출전한다는 점을 몇페이지에 걸쳐 설명한 후, 백여척을 이끌고 출전하여 웅천 앞바다에서 십여척의 적을 무찔렀다고 소설을 쓴다.[51] 위의 문장에도 나오듯이 이순신이 구체적으로 적 몇척을 격파하였다는 것은 원균과 합동으로 싸운 단 2건만 표기하고, 원균이 없는 전투를 소설을 써가면서 십여척을 무찔렀다고 표기하는 것을 보면 작가가 쓸데없이 원균을 옹호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후 풍랑이 심하여 군사들이 지쳐 있을 때 적의 함대를 만나 칠천량에서 적의 기습을 받고 결사적으로 싸웠지만 패했다고 나오는데, 역시 왜곡투성이의 거짓말이다. 조선의 대함대는 김완의 <해소실기>에서 나오는 것처럼, 일본군 40여척의 야습에 깜짝 놀란 원균이 명령하여 강제로 육지로 튀어서 도망갔고, 비어있는 배들은 전부 불타버렸다. 정말 결사적으로 싸웠다면 조선의 삼도연합수군 166척이 왜 일본군을 한 척도 격파하지 못한 걸까?
전반적으로 이순신의 전과는 축소되고, 원균은 없는 전과를 만들어서 양쪽의 균형을 잡으려고 했다. 이것은 어린이들에게 적당히 보기좋은(?) 조선 장수들의 우애를 보여주기 위해서 넣은 내용이라고 보는 것이 적당하다.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애초부터 원균을 이순신의 동료 장수로 설정하고, 원균을 팔아먹는 쪽의 지원을 받은 것이 실수였다고 볼 수 있는 책이다.
- <조선왕조실록 43 임진왜란과 이순신 장군>
교과서 따라잡기 논술 학습만화라는 모토는 위의 책과 비슷하다. "원균은 안골포 앞바다에서 기습을 감행하여 적의 선단 십여 척을 침몰시켰으나 중과부적으로 물러나야 했다."라는 구절부터 확실한 원빠 확정. 43권 제목이 이순신이지만 어지간히 이순신에 대해 쓰기 싫은지 거의 끝나가는 89페이지에서 처음 언급되는데 첫 구절이 "이때, 이순신과 원균 장군의 활약으로 기사회생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원균은 불과 십여 척의 전함을 기습 작전을 펼쳐 적선을 무너뜨렸다."로 원균과 공동 언급했고 그 아까운 페이지에 없는 원균의 전과를 두 번 언급했다. 그림만 보면 누가 이순신이고 원균인지 구분 못하게 비슷한 주인공 포스는 덤. 이어지는 장면도 모두 용감한 원균 사마께서 일본군을 물리치는 장면 뿐. 여기에 "원래 원균은 성미가 급하여 두려움을 모르는 맹장이었다."라는 구절은 덤. 이어서 4페이지에 걸쳐 계속 원균 사마가 싸우기 싫어하는 이순신을 억지로 끌어내어 싸우게 만들고 직접 선봉에 서서 일본군을 물리치는 등, 뒷목잡고 쓰러질만한 내용만 가득하다. 제목만 '이순신과 임진왜란'이지 작가가 이순신을 등장시키는 것이 참을 수 없는 치욕이기라도 한지 신립, 김시민보다도 적고, 그나마 등장할 때도 원균과 이순신은 동격이다. 이후 칠전량의 무너짐 챕터에서도 권율에게 곤장을 맞은 후 "더 이상 말하지 마라. 내가 죽는 것이 소원이라고 하니 죽어 주리라"라면서 주인공 포스 넘치게 읊조린 후 "이렇게 하여 원균은 1백 척 함대를 이끌고 출진하였으나 5백여 척의 왜군 함대에 대패하고 말았다."라며 끝까지 소설 쓴다. 아무리 학습만화 특성상 재미를 위해서 조작을 해야 되기 때문에 따지는 것 자체가 뻘짓이긴 하지만, 위의 두 학습만화 같은 것들을 읽고 자라는 어린이들이 걱정된다.
- <해군> 2017년 5월호
원균을 옹호한 사례 중에서도 가장 질이 나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른 기관도 아니고 대한민국 해군의 기관지에서, 한때 나라의 해군을 완전히 박살내 버린 인물을 기리니 코미디 수준이라고 할 만하다. 이런 것은 해군만이 아니라 육, 해, 공군 공히 흑역사라 볼 수 있는데, 아주 조선 시대 장군이건 대한민국 장군이건 그냥 별만 달았다 하면 일단 덮어놓고 물고 빨고 치켜세워주는 악습이다. 원균 옹호론이 군에서도 활개를 치고 있는 이유도 결국 이것에 뿌리를 두고 있다.
6. 관련 문서
[40] "유극량(劉克良)은 인물은 쓸만하나 가문이 한미하기 때문에 지나치게 겸손합니다. 그리하여 군관이나 무뢰배들과도 서로 너니내니하는 사이여서 체통이 문란하고 호령이 시행되지 않습니다. 비단 위급한 변을 당했을 때에만 대비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방어하는 군졸을 각 고을에 보낼 때에도 틀림없이 착오가 생길 것이니, 곤외(?外)의 일을 맡기는 것이 매우 염려스럽습니다. 체차시키소서."
[41] 사간원이 아뢰기를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현감으로서 아직 군수에 부임하지도 않았는데 좌수사에 초수(招授)하시니, 그것이 인재가 모자란 탓이긴 하지만 관작의 남용이 이보다 심할 수 없습니다. 체차시키소서."라 하니, 답하기를 "이순신의 일이 그러한 것은 나도 안다. 다만 지금은 상규에 구애될 수 없다. 인재가 모자라 그렇게 하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사람이면 충분히 감당할 터이니 관작의 고하를 따질 필요가 없다. 다시 논하여 그의 마음을 동요시키지 말라."고 하였다.
[42] 게다가 류성룡은 몰라도 정탁이 이순신을 추천했다는 말은 도저히 근거가 없다. 정탁의 문집인 약포집에 이순신을 대장(大將)으로 천거했다고 나오긴 하는데, 이 대목의 시점으로 보아 여기서의 대장이란 삼도수군통제사를 가리키는 것이다. 정작 정탁이 이순신을 추천했다면 좋아할 일이기는 하다. 각종 의병장 관련 사건이나 무고 사건에서 피해자를 두둔하는 건 정탁이었다. 이는 이원익이 자신이 이순신을 천거하여 통제사로 등용시켰다고 말했던 것(『승정원일기』 인조 9년 4월 5일)과 같은 맥락이다.[43] 이미 선조에게 밉보였다가 정권이 뒤바뀌는 일을 4번이나 보았다. 그나마 이때는 숙종식 환국이 아니었던지라 물러나도 재기할 기회는 있었지만 실각은 참으로 큰 타격이었다.[44] 적군의 시체에서 목을 잘라 전공이라고 하는건 당시의 논공방법이 그랬으니 당연하다 하더라도, 자기나라의 무고한 백성들의 목을 제 전공을 드높인답시고 잘라다 내놓고 있으니 이게 명장은 고사하고 사람새끼가 할 짓인가?[45] 물론 이건 아주 쉴드칠 구석이 없는것만은 아닌데 이미 조정에서는 "적이 쳐들어오면 육지로 끌어들여 싸워라! 우린 수군은 약해도 육군은 강하니까!" 라고 결론을 내렸기에 일단 육지로 달아나려고 한것 자체는 조정의 말을 잘 들은거다. 게다가 조정에 거짓 보고까지 올렸으니 이쯤되면 막장[46] 그나마도 역사에의 초대 임진왜란에서는 원균을 미화했다는 게 졸다가 기습을 당한 것으로 처리했다. 근무를 태만히 해 자다가 봉변을 당한 게 미화일 정도로 이 인간이 칠천량 해전에서 한 짓은 그야말로 막장 중의 막장이었다.[47] 참고로 나중에 요시라는 조선 측에서 분풀이로 삼으려고 했는지 수교 조건으로 압송을 요청했고 결국 요시라는 처형당한다.[48] 그렇지만 저항을 한들 얼마나 효과가 있었을지 미지수.[49] 다만 당시 동아시아는 일본 빼면 전부 문인 우대 국가였다.[50] 함선 숫자가 대등한 지휘관은 이순신(24척)과 이억기(25척) 함대였다. 원균은 연합 함대의 1/10 미만의 규모이며 그것도 전투마다 후방에만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교묘하게 호도한다. 그에 반해,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같은 만화이지만 이순신의 24척과 원균의 4척을 그려서 둘을 확실히 비교하고 있다.[51] 물론 이런 일은 없었다. 반대로 무서워서 도망치는 왜군을 무리하게 좇으라고 닥달하다가 조선군 12척이 떠내려 가는 비전투 손실을 입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