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레슬링/미국

 


1. 개요
2. 탄생부터 NWA 출범 전까지 (19세기 후반 ~ 1948년)
3. NWA의 분열, AWAWWWF의 탄생 (1950년대 ~ 1960년대)
4. NWA-AWA-WWWF 3강 체제 (1960년대 ~ 1980년대 초반)
5. WWF의 골든 제너레이션, WCW의 탄생 (1980년대 ~ 1990년대 초반)
6. 스테로이드 파동과 새로운 시대, 월요일 밤의 전쟁의 시작(1992~1995)
7. ECW의 등장과 대격변, nWo애티튜드 시대 (1996~2001)
7.1. 관련 문서
8. 인디 레슬링의 약진, WWE의 독주와 사건 사고 (2002 ~ 2007)
9. TNA의 몰락, PG와 리얼리티 시대 (2008 ~ 2014)
10. 변화의 시작? (2014 - 현재)


1. 개요


미국 프로레슬링의 역사에 대해 서술하는 페이지.

2. 탄생부터 NWA 출범 전까지 (19세기 후반 ~ 1948년)


기존에 단순히 힘이쎈 장사를 쓰러트리면 끝나던 개념이 오늘날의 쇼맨십이 가미된 경기로 발전한것은 1900년대 초반부터였다. 영국의 사업가 찰스 코크란은 당시 유럽의 그레코로만 레슬러로 이름을 알리던 게오르그 하켄슈미트를 영입하여 다수의 레슬링 경기를 주관하였다. 그러나 정직한 스타일로 경기를 펼치는 하켄슈미트로는 흥행에 한계가 있다는것을 깨달으면서 코크란은 하켄슈미트에게 박진감을 높이기위한 다양한 쇼맨십을 요구하였고, 그 과정에서 "레슬러들에게는 레슬링 실력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호응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쇼맨십 능력이 필요하다"라는 인식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1]
1차 세계대전 이후의 혼란 속에서 유럽에서는 더 이상 사업을 벌이기 어렵다는것을 깨달은 하켄슈미트 등의 많은 레슬러들은 미국으로 건너가기 시작했다. 이들은 유럽에서 배운 레슬링 기술과 쇼맨십 기술을 살려 각종 공연을 벌임으로써 미국에서 레슬링단체의 기반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미국에서의 프로레슬링의 인기는 골드더스트 트리오라 불리우는 에드 루이스(Ed Lewis), 빌리 샌도우 (Billy Sandow), 투츠 몬트(Toots Mondt)라는 세명의 레슬러에의해 크게 성장하게된다. 이들을 중심으로 미국의 레슬링단체들은 레슬링경기의 흥행을위해 태그팀매치, 심판방해, 난입, 선수 고유의 시그니쳐 무브 등을 개발하였고 이는 오늘날 프로레슬링의 근간이 되는 개념들로 이어지게된다. 특히 기존의 대부분의 레슬러 선수와 공연주최단체는 경기마다 계약을 하였지만,[2] 이 시점부터는 짧게는 수개월 길게는 년단위로 선수가 단체에 머물러 경기를 진행하는 장기계약선수가 등장함에따라 해당 단체의 공연을 자주 보는 지역주민들은 특정 선수에 더욱 관심을 가지고 더욱 자주 공연을 보러오게되었다.[3]
이러한 프로레슬링의 인기는 이후 미국 전역에 수많은 프로모터와 단체들의 범람으로 이어지는데, 그들은 서로의 지역구를 존중하는 불문율은 지키면서도 각자의 단체에 '세계' 챔피언을 지정하며 상호 경쟁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48년 프로모터 폴 '핑켈' 조지의 주장과 여러 프로모터들의 동조로, 상호간의 상업 지역을 존중하고 하나의 세계 챔피언만을 지정하는 체제의 '''NWA'''가 탄생하였다. 초대 NWA 세계 챔피언으로는 '''루 테즈'''를 앉히게 된다.

3. NWA의 분열, AWAWWWF의 탄생 (1950년대 ~ 1960년대)


이렇게 루 테즈를 챔피언으로 내세워 잘 나가던 NWA도 분열하기 시작했는데, 다름 아닌 루 테즈의 '''7년'''이 넘는 장기 집권이 문제였다. 이에 불만을 가진 프로모터 겸 레슬러 번 가니에가 NWA에 불만을 가진 여러 프로모터들과 함께 NWA를 탈퇴해 1960년 '''AWA'''를 창단하게 된다. 이후 1963년에도 또 다른 단체가 NWA를 탈퇴하는데, 빈스 맥맨의 아버지 빈스 맥맨 시니어의 단체 CWC가 당시 NWA 세계 챔피언이었던 '오리지널 네이처 보이' 버디 로저스의 타 지역 단체 출전 문제로 마찰을 빚자 NWA를 탈퇴해 단체명을 '''WWWF'''로 바꾸게 된다. '''그리고 이 단체는 훗날 전설이 된다.'''

4. NWA-AWA-WWWF 3강 체제 (1960년대 ~ 1980년대 초반)


이후 한동안 AWA와 WWWF는 탈퇴했지만 당장에 NWA를 이길 수 없기에 NWA와의 관계를 유지했으나, 이들이 경쟁력을 갖추자 한동안 북미 프로레슬링계는 여전히 건재한 NWA와, 신흥 단체 AWA와 WWWF의 3강 체제에 접어든다. '''브루노 삼마르티노, 더스티 로즈, 밥 백런드, 릭 플레어'''[4]와 같은 기라성 같은 레전드들이 이 시기 활동하였고, 또한 1979년, WWWF는 단체 이름을 WWF로 바꾸게 된다. 1970년대 한국인 레슬러 박송남NWA 지구에서 활약하기도 했다.

5. WWF의 골든 제너레이션, WCW의 탄생 (1980년대 ~ 1990년대 초반)


1982년, '빈스 맥맨 주니어가 아버지로부터 WWF를 물려받는다.
그 직후, 빈스 맥맨은 기존의 지역구에서 벗어나 공격적인 확장을 하며 업계의 불문율을 깨고 경쟁을 시작한다. WWF는 매디슨 스퀘어 가든을 벗어나 흥행을 열기 시작했고, 흥행 비디오를 지역구 밖에서 판매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앙드레 더 자이언트, 로디 파이퍼와 같은 선수들이 맹활약했고, 일본에서 이미 스타였으나 AWA에서 테크니션이 아니라는 이유로 메인 이벤터가 되지 못하던 선수를 영입해 단체의 탑 선역으로 만들기 시작했는데, 그 선수가 바로 '''헐크 호건'''. 이렇게 세력을 불러오던 WWF는 1985년, 레슬링계의 슈퍼볼을 꿈꾸며 '''역사적인 첫 레슬매니아를 개최했다.''' 가수 신디 로퍼, 복서 무하마드 알리, 배우 미스터 T를 섭외해 헐크 호건, 웬디 릭터와 엮어 '락 앤 레슬링 커넥션'을 만들고, MTV로 대표되는 당대의 팝 문화와 레슬링을 성공적으로 접목해 레슬매니아 1은 성황리에 개최되었다.
이후 전세계에 '프로레슬링 붐'이 일어 WWF는 세계적 관심을 받게 되어, 1987년 레슬매니아 3은 무려 9만명이 넘는 관중을 동원하며 '''공식적인 최다 관중 동원 프로레슬링 흥행''' 기록을 남기는 등[5][6] 성공가도를 달렸다.
한편 AWA는 WWF의 기세에 버티지 못해 결국 1991년 WWF에게 인수되었고, NWA는 WWF의 맹렬한 기세에 허덕이고 있었는데, 설상가상 NWA의 가맹단체 GCW가 테드 터너 산하의 케이블 방송사 TBS에 방영하던 프로그램 WCW[7]를 1984년 빈스 맥맨이 인수하며[8] NWA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이지만, 빈스 맥맨의 WCW가 삽을 푸면서(...) 1985년 NWA의 짐 크로켓 프로모션즈가 탈환한다.
하지만 짐 크로켓 프로모션즈도 WWF를 당해내긴 역부족이었고, 결국 파산하면서 NWA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것 같았지만... '''테드 터너가 직접 나서 1988년 11월 짐 크로켓 프로모션즈를 인수했다.''' 또한 '''단체명 자체를 WCW로 바꾸어''' 본격적으로 WCW가 출범하였다.

6. 스테로이드 파동과 새로운 시대, 월요일 밤의 전쟁의 시작(1992~1995)


하지만 식을 줄 모르던 1980년대의 프로레슬링 붐은 90년대에 이르러 식어가기 시작했다. 80년대의 여피 문화는 1991년 너바나의 'Nevermind'로 종말을 맞이했고, 프로레슬링도 시대의 흐름에 맞춰갈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헐크 호건의 바통을 받았던 얼티밋 워리어의 인기는 좋았지만 만족스럽지 않았고, 결국 헐크 호건이 다시 복귀하는 등 WWF의 세대 교체는 신통치 않았고, 설상가상으로 1992년 스테로이드 파동이 터지며 WWF의 이미지도 악화되었다.
상황은 WCW도 별반 다를 게 없었는데, TBS의 인사들과 테드 터너는 프로레슬링에 문외한이었기 때문에 초기엔 '''로보캅의 도움을 받는 스팅(...)''' 등 정말 주옥 같은 명장면(...)들이 탄생하고 있었다.
이렇게 위기를 맞던 와중, WWF는 상황을 바꿀 두 가지 수를 두는데, 하나는 '''80년대의 선수들은 배제하고 새로운 선수들을 메인 이벤터로 올리는 것'''이었다. 이 시기 푸쉬를 받은 선수들이 '''브렛 하트, 숀 마이클스, 디젤, 레이저 라몬, 브리티시 불독, 렉스 루거''' 등이었는데, 이들은 모두 80년대의 스타들과는 다른 부류의 카리스마와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고, 그 중에서도 브렛 하트와 숀 마이클스는 당시까지의 WWF, 아니 역대 모든 프로레슬러 중에서도 탑 클래스의 경기력이라 심심하면 데이브 멜처에게 별 0개를 받던(...) 골든 제너레이션 시절에 비해 WWF는 경기 측면에서 장족의 발전을 이루었다.
그리고 두번째는 '''생방송으로 주간 프라임타임 시간대 레슬링 프로그램을 신설하는 것이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레슬링 프로그램은 전부 사전녹화된 영상을 보여주고 스튜디오에서 인터뷰나 PPV 홍보를 하는 식이었는데, 1993년 1월 WWF가 '''최초의 생방송 레슬링 쇼''' RAW의 첫 에피소드를 방영하며 생방송 시대를 연 것이다.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RAW는 이전과는 모든 게 달랐다. 선수와 관중은 서로 가까이 연결돼 있었고, 선수들은 매주마다 경기를 치뤘으며, PPV에서나 나타나던 챔피언이 매주 개근을 했다.
이렇게 상황을 타파할 전략을 짠 WWF였지만, 부작용도 있었다. 80년대의 검증받은 레슬러들이 소외됐던 것이다. WWF의 '뉴 제너레이션' 시대가 열리며 기존의 선수들은 기회를 받지 못했고, 헐크 호건을 시작으로 아직 충분한 능력이 있는데도 RAW 해설이나 보던(...) 랜디 새비지 등 많은 골든 제너레이션 시대의 메인급 선수들이 테드 터너의 자본에 힘입어 마구 선수들을 영업하던 WCW로 이적한 것이다. 이는 WWF에게 뼈 아픈 실수가 됐는데, 이미 이름이 전국적으로 알려진 베테랑들을 잃어 선수들의 네임밸류가 WCW에 비해 떨어지게 된 것이다.[9]
이렇게 '''릭 플레어, 헐크 호건, 스팅, 랜디 새비지'''라는 다시 없을 메인이벤터 진에 더해 WCW는 테드 터너를 대신해 WCW를 총괄할 인물을 뽑게 된다. 바로 '''에릭 비숍'''. WCW의 부사장이 된 비숍은 경기장을 구식 경기장에서 세련되고 관객들과 가까운 경기장으로 이주하고, 본인 말로는 '전형적인 남부지역 레슬링 쇼'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남부 억양의 해설진을 갈아치우고[10][11] 바비 '더 브레인' 히넌과 민 진 오클런드를 고용하는 등 여러 방면에서 개혁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95년, WCW는 WWF의 RAW와 같은 생방송 레슬링 쇼 나이트로를 신설한다. '''RAW와 똑같은 월요일에, RAW와 똑같은 프라임 타임에, 북미 프로레슬링 양대 단체의 메인 쇼가 같은 날 같은 시간대에 배치된 것이다.'''
'''이로써 두 단체의 사활을 건, 프로레슬링 역사상 다시는 없을, 아니 방송 역사상으로 따져도 다시는 없을 전무후무한 시청률 전쟁이 시작됐다.'''

7. ECW의 등장과 대격변, nWo애티튜드 시대 (1996~2001)


이 무렵, 'Eastern Championship Wrestling' 이라는 필라델피아를 본거지로 하는 독특한 단체가 있었다. 폴 헤이먼의 주도하에 화려하고 하드코어한 경기를 선보이던 이들은 컬트적인 인기를 끌었으며, 밥줄이었던 WCW에게 버림받은 NWA의 새 돈줄로 매니아들의 지지하에 소소한 흥행을 해오던 단체였는데...
'''1994년 8월 27일 모든 게 달라졌다.'''
이 날 NWA 월드 챔피언십을 건 매치에서 승리한 셰인 더글러스는 대뜸 타이틀을 던져버리고는 '''"NWA는 죽은 단체이며 ECW 타이틀만이 세계 타이틀이다"'''란 폭탄 발언을 남겼다. '''당시 운영자였던 토드 고든, 폴 헤이먼, 셰인 더글러스 세 사람이 짜고 NWA를 엿먹인 것이다.''' 이후 이름의 Eastern을 '''Extreme'''으로 바꿔 ''''Extreme Championship Wrestling'을 출범한 후 NWA에서 탈퇴해버렸다.'''
이후 본격적으로 '''비주류의, 비주류에 의한, 비주류를 위한''' 단체의 길을 걷기 시작한 ECW는 비단 하드코어 레슬링 말고도 '''에디 게레로, 크리스 제리코, '''와 같은 북미에서 인정받지 못하던 테크니션들과 메이저 단체에서 외면받던 선수들을 데려와 스타로 만들고, '''북미에서 최초로''' 멕시코 루차 리브레 스타일을 선보이고, 프로레슬링에서 최초로 탭아웃 시스템을 도입하는 등[12] 혁신적인 행보를 걸어왔고, 또한 아직 만화적인 각본과 기믹들이 난무하던 시기에 ECW는 '''현실적이고 날이 서있으며 어디로 튈 지 모르는''' 각본과 기믹들을 선보였는데, 이를 1996년 WCW가 먼저 받아들인 후 그야말로 대박을 터뜨린다. '''바로 nWo.'''
WWF의 간판 스타였던 스캇 홀케빈 내쉬가 '아웃사이더즈'라는 이름으로 WCW의 침입자들처럼 데뷔해 시청자들의 관심을 끌던 nWo 각본은, '''헐크 호건의 악역 전환과 nWo 창단'''이란 충격적인 각본을 선보이며 WCW가 WWF를 압도하는데 결정적 도움을 줬고, 이후 nWo의 충격적 행보와 스팅의 역대급 기믹 전환까지 합쳐지며 '''WCW는 83주동안 WWF를 시청률로 압도했다.'''
경기력 면에선 그래도 WCW보다 나았지만, 각본 면에선 프랑스 귀족 헌터 허티스트 험슬리, 치과의사 아이작 양켐, 닭벼슬머리의 열혈청년 락키 마이비아(...)[13] 등 어처구니없는 기믹을 선보이던 WWF도 스티브 오스틴을 시작으로[14] 트렌드를 맞추기 시작해 원래부터 온갖 망나니 짓은 다하던 숀 마이클스트리플 H, 차이나와 함께 DX를 결성해 더 막나가기 시작했고(...) 막가파 악역이었던 스티브 오스틴은 어느새 Bad Ass한 희대의 반항아로 변해있었으며, 영웅 브렛 하트는 이런 세태에 못마땅해 하더니 결국 냉혹한 독설가가 돼 버렸다.[15][16] 이렇게 변화를 해오며 WCW를 추격해왔지만 역부족이였던 WWF였는데... '''몬트리올 스크류잡이 일어났다.'''
평생을 WWF에 헌신해온 충신 브렛 하트가 배신을 당한 것에 레슬링계는 충격에 빠졌고, 백스테이지는 어수선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는 WWF의 대반격의 시발점이 되는데, '''이왕 이렇게 된 거 제대로 막나갔기 때문이다.''' 브렛을 엿먹인 역적 중 하나인 DX는 얘네가 과연 어디까지 막나가나 궁금할 정도로 매주마다 방송사고급 만행(...)을 일삼았고, 남은 한 명인 빈스 맥맨은 아예 그의 악덕 회장 이미지를 캐릭터화 시켜 스티브 오스틴과 전설적인 대립을 하며 초대박을 쳤다. 이 시기 WWF는 최고 시청률이 '''8%'''를 넘는 등 엄청난 인기를 구가했고, 이 반격을 이겨내지 못한 데다 추가로 자기들끼리 정치싸움에 삽질까지 한(...) WCW와, WWF와 WCW의 이중압박을 견디지 못한 ECW를 인수하면서 월요일 밤의 전쟁은 WWF의 승리로 끝이 났다.

7.1. 관련 문서



8. 인디 레슬링의 약진, WWE의 독주와 사건 사고 (2002 ~ 2007)


2002년, WWF는 세계 야생동물 기금과의 소송에서 패소해 단체명을 WWE로 바꾼다. 비록 ECW는 사라졌지만, ECW 이후로 무수히 많은 인디 레슬링 단체들이 생겨났는데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게 ROH.
ECW의 후계격으로 시작한 이 단체는 CM 펑크, 대니얼 브라이언, AJ 스타일스, 사모아 조, 새미 제인, 케빈 오웬스, 세스 롤린스, 세자로와 같은 수많은 선수들과 CM 펑크와 사모아 조간의 60분 시간제한 매치와 같은 수많은 명경기를 배출했으며, 한때는 세상에서 경기력으로 가장 좋은 평가를 받는 단체이기도 했다.
그리고 북미 내 2인자 자리를 수성해'''왔던''' TNA도 빠질 수 없다. 특색 있는 육각 링과 한때 TNA를 먹여살리던 X 디비전 및 넉아웃 디비전, 리썰 락다운, 킹 오브 더 마운틴 같은 고유한 경기 방식이 공존하던 특색 있는 단체'''였으나''' 그분이 오고 나선...
하지만 상업적인 면에선 경쟁 상대가 없어진 WWE의 독주 체제다. 이제 WWE는 명실상부한 업계의 No. 1 단체로 군림 중이며, 더 이상 WWE가 흔들릴 일은 없는 듯 했으나... '''크리스 벤와 사건이 터져버렸다.'''
사건 자체의 충격과 크리스 벤와의 뇌가 알츠하이머 환자 노인 수준이었다는 부검 결과로 WWE는 청문회에 끌려다녔고, 비단 WWE 뿐만 아니라 '''북미에서의 프로레슬링 자체가''' 흑역사로 남을 뻔했다. 이곳저곳서 잡음이 터지던 WWE는 이후 머리에 하는 체어샷과 같은 많은 기술을 봉인하고 시청 등급을 TV-14에서 PG로 낮춘다.

9. TNA의 몰락, PG와 리얼리티 시대 (2008 ~ 2014)


TNA는 경영진의 실책 및 헐크 호건 등 거액을 주고 영입한 노장 레슬러 등의 영향 행사로 인해 그 팬덤을 잃기 시작한다. ROH 역시 수를 키우는 족족 WWE에 빼앗기며 그 영향력이 줄기 시작했다. 이로써 WWE는 그 독주 체제가 더욱 심화되었다.
WWE가 PG로 등급을 내린 후 무적 선역 기믹존 시나는 매니아 팬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폭넓은 팬들에게 인기를 끌며 아이콘으로서의 자리를 굳힌다. 더불어 2011년 이후로 ROH 출신의 레슬러 CM 펑크[17], 대니얼 브라이언은 각각 파이프밤과 'Yes Movement'[18]라는 영향력 있는 행적을 남기며 이른바 '리얼리티 에라'를 주도한다.
한편 서바이벌 쇼였던 NXT가 육성 단체 FCW와 통합되면서 본격적인 WWE 산하단체로서의 NXT가 탄생한다. 트리플 H의 주도로 인디 곳곳에서 타일러 블랙, 존 목슬리, 클라우디오 카스타뇰리, 케빈 스틴 같은 명선수들을 영입함에 따라 산하단체 NXT는 괴물집합소로 거듭나기 시작한다. 더불어 AJ 리 등의 활약으로 WWE 여성부에서도 아이캔디의 시대가 저물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다.

10. 변화의 시작? (2014 - 현재)


2015년 이후 WWE는 새로운 무적선역 캐릭터인 로만 레인즈를 계속 밀어주고 있으며 이때문에 부침을 겪고 있다. 존 시나 때보다 더한 밀어주기와 부족한 개연성 탓에 계속해서 야유를 받는 것이 대표적인 이유다.[19] 심지어 2017년 레슬매니아에서는 언더테이커마저 이겨버리는 각본으로 매니아층에게 어마어마한 야유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로만의 푸시는 줄지 않았고, 끝끝내 미즈를 꺾고 그랜드 슬램을 달성하면서 WWE는 로만을 계속해서 단체의 얼굴로 밀겠다는 뜻을 간접적으로 천명한다. 2017년 10월엔 인도캐나다인 프로레슬러 진더 마할에게 스맥다운의 메인 챔피언을 쥐어주며 인도 시장에 진출하려는 의욕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인도 시장의 흥행은 그저그런 정도로 끝나고 말았고, 진더 마할도 타이틀을 AJ 스타일스에게 내주고 만다.
그러나 의견이 분분한 메인 로스터와 달리, NXT는 지속적으로 세계 곳곳의 선수들을 매우 적극적으로 영입하며 매니아들의 폭발적인 인기를 얻기 시작한다. 2014년부터 시작한 단독 PPV 이벤트인 NXT 테이크오버는 해가 갈 수록 높은 평가를 받으며 급기야는 레슬매니아 같은 메인 로스터 이벤트 이상의 호평을 받기 시작하는데 이른다.
더불어 샬럿 플레어, 사샤 뱅크스, 베키 린치, 베일리라는 '포 호스위민'을 위시한 NXT 출신의 여성 레슬러들을 중심으로 한 "위민즈 레볼루션"은 여성부 레슬링의 위상이 급격히 올라가기 시작하는 계기가 된다. UFC 파이터 출신인 론다 라우지의 합류는 이런 추세에 쐐기를 박았으며, 이는 여성 단독 이벤트인 WWE 에볼루션 개최를 통해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다른 한편 WWE의 손이 닿지 않는 북미 틈새시장에 영향력이 늘기 시작한 것은 ROH와 협약을 맺은 신일본 프로레슬링이었다. 특히 2014년TNA 출신의 AJ 스타일스가 신일본에 건너가 불릿 클럽의 리더가 되고 단숨에 IWGP 헤비웨이트 챔피언십을 딴 사건은 북미 레슬링 팬들 상당수가 신일본 프로레슬링을 주목하게 된 계기였다. 이런 인기에 힘입어 ROH와 신일본은 2019년, WWE의 근거지였던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공동 주최로 G1 슈퍼카드를 열기에 이른다.
이런 경쟁의 심화는 유튜브, 그리고 2014년을 기점으로 본격화된 WWE 네트워크 등의 인터넷 영상 보편화와 함께 전세계 레슬러들 경기력의 급격한 상승을 가속화시킨다. 데이브 멜처 또한 이때를 기점으로 '별점 인플레'라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단체를 막론하고 더 후한 별점을 주기 시작한다.*
그리고 2019년에 ROH 및 신일본에서 불릿 클럽의 유닛으로 활약하던 디 엘리트올 엘리트 레슬링 창설을 발표한다. 2018년에는 단독 흥행인 ALL IN을 성공시키기도 했던 디 엘리트는 풀럼 FC의 구단 관계자이기도 한 토니 칸의 주도로 본격적인 단체 구성에 돌입하며, 미국의 TNT, 영국의 ITV와 TV 계약을 맺는데 성공하며 더블 오어 나씽 2019로 성공적인 첫발을 내딛는다.
2020년에 코로나바이러스-19로 인해 다른 종목들 처럼 위기가 생겼다. 그러나 다른 종목들은 중단 및 취소크리를 맞았지만 프로레슬링은 무관중 경기로 그대로 진행하면서 사실상 북미에서 유일하게 진행하고 있는 프로스포츠가 되면서 자가격리를 하고 있는 시청자들에게 유일한 볼거리가 될 전망이다.

[1] 사실 프로레슬링은 그 태생부터가 쇼맨십과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여기서 말하는 쇼맨십이란 퍼포먼스 뿐 아니라 기믹, 캐릭터 연기 등이 포함된 개념일 것이다. 사실 릭 플레어같이 '거만한 캐릭터'는 이미 이 시점부터 존재했다.[2] 이때문에 본래 직업을 가지면서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레슬러들이 상당히 많았다. 우리가 잘 아는 에이브러햄 링컨도 파트타임 프로레슬러로 활약했던적이 있다.[3] 일종의 단체 프랜차이즈선수의 개념이 이때 등장한것이다. 이 선수들은 주로 전국을 떠도는 떠돌이 레슬러들이나 파트타임 레슬러들을 상대로 주로 이기는 경기를 펼침으로써 지역주민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제공했다.[4] 아시다시피 플레어는 이 시기 후로도 왕성히 활동하였고, 배클런드 또한 90년대 중반 WWF에 복귀했다.[5] 비공식적으론 WCW의 북한 흥행이 '''15만 명'''을 동원했지만, 관객들은 강제동원됐을 확률이 높고 반대로 관람이 자유롭지도 않아 인정되지 않았다.[6] 이후 레슬매니아 32에서 공식 기록이 경신되었다.[7] 이 시기 WCW는 그저 GCW의 프로그램 이름이었다.[8] 이를 '프로레슬링의 검은 토요일'이라 부른다.[9] 단, 이건 선후관계가 명확하지 않은데, 헐크 호건 등 몇몇 기존의 베테랑 레슬러들이 WWF에서 스테로이드 사건에 대해 빈스 맥마혼에게 불리하게 증언한 다음 WCW에 거액의 돈을 받고 튀었다는 말도 있다. 또 WCW에서도 WWF의 유명 레슬러들을 돈으로 끌어모으기도 했고. 한마디로 빈스가 세대 교체를 위해 베테랑을 내보냈다기보다는 대부분의 베테랑들이 돈을 쫓아 WCW로 가는 바람에 2선급의 레슬러들을 급히 메인으로 올린 것이다.[10] 원래 WCW의 전신이었던 NWA는 기반을 미국 남부에 두고 있었다. 현재 AEW의 코디를 남부의 적자라고 부르는 것도 아버지인 더스티 로즈가 NWA의 맹주이자 전설적인 레슬러였기 때문이다.[11] 반대로 미국 북부에 자리잡은 단체가 바로 뉴욕 메디슨 스퀘어 가든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WWWF(현 WWE)였다.[12] 이전까진 항복 개념은 있었지만 탭아웃 개념은 없어서, 관절기에 걸린 선수가 링 바닥을 마구 치고 있는데 경기가 안 끝나는 요즘 기준에선 묘한 광경을 볼 수 있다.[13] 웃기게도 이들은 모두 기믹 변경 후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뒀다.[14] 이쪽도 사실 처음에는 칠리 맥브라이드라는 어처구니없는 링네임을 받을 뻔했지만 오스틴 본인이 이를 거부하고 오스틴의 아내가 생각한 '스톤콜드'를 링네임으로 삼았다.[15] 실제로 브렛은 WWF의 애티튜드 정책을 못마땅해 했다 한다. [16] 사실 브렛 하트는 프로레슬링을 가족들이 볼 수 있는 쇼가 되는 쪽을 선호했기 때문이었다.[17] 특히 이때 레슬링을 보던사람이라면 알겠지만 펑크의 상품 판매량이 잠시나마 존 시나를 뛰어 넘었을 정도로를 펑크의 인기는 엄청났다 [18] yes movement의 정점은 레슬메니아 30때 경기를 2번이나 한끝에 챔피언등극으로 레슬메니아의 엔딩을 장식하여 많은 사람들이 꽃가루를 휘날리는 대니얼과 yes챈트를 외치는 것을 떠올릴 수있다[19] 존 시나 때도 비슷하긴 했지만 이때는 에티튜드 시절의 유산과 존 시나의 개인 능력으로 그럭저럭 현상태를 유지해 왔지만 로만 레인즈는 능력이 존 시나에 미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