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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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韓菓, Hangwa
한국의 옛날 전통 과자 종류들, 전통 간식거리들을 일컫는 총칭. 대표적으로 강정, 약과가 있다.
2. 유래와 역사
유래와 역사
유사 이래 문명의 발달 과정을 보면, 일단 먹을 것이 안정되면 입을 것을 찾고, 입을 것이 안정되면 살 집을 찾기 마련이다. 특히 과자류는 달콤한 것을 좋아하는 인간의 특성상[1] 쌀이나 밀 같이 주식을 만드는 재료와 여러 가지 재료를 이용해서 과자를 만들어 먹게 되었다. 사회학적으로도 과자를 만든다는 것은 아직도 그날그날 먹을거리를 찾는 데 여념 없는 다른 이들과 달리, 자신은 남아도는 밥으로 과자도 만들어 먹는다는 분명한 계급적 메시지가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애초에 과자는 안 먹어도 생활에 지장이 없는 사치재니까.
그것도 그럴 것이 어떤 종류의 과자를 만들든 떡을 치는 것 이상으로 쌀이 많이 필요하고, 하다못해 과자에 단맛을 내는 엿과 조청, 그리고 과자를 반죽할 때 흔히 쓰는 술도 죄다 쌀로 만든다. 가령, 조청 3 kg을 뽑아내기 위해서는 쌀 12 kg(!)으로 지은 고두밥과 보리 싹을 틔워서 숙성시킨 엿기름 1 kg을 섞어 하루 온종일 숙성시키고, 이튿날을 꼬박 불을 때서 졸여야 한다. 여기에 드는 쌀값과 보리값, 연료비를 차치하더라도 어마어마한 일품이 드니 보통 사람들로는 엄두를 못할 지경이다. 특히나 조선시대나 그 이전 시대엔 한 끼 식사량이 현대인들 이틀치 혹은 그 이상으로 많았고, 고대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식사량이 더 많았기에 더욱... 다른 감미료인 꿀과 설탕도 근대 이전에는 아주 값비싼 사치품이었는데 설탕은 사탕무가 전래되지 않았던 데다가 사탕수수는 열대작물이라서 조선에서 재배가 불가능했기에 전량 중국이나 류큐, 일본 등을 비롯한 외국에서 수입해야 했고, 꿀은 자급이 가능했지만 대량생산되기 이전인지라 쌀 수가 없었다.
게다가 기타 잡곡과 견과류, 과일, 기름이 들어가기 때문에 양반들조차도 명절이나 제삿날에만 마음 놓고 먹을 수 있었다고 한다. '''물론 왕조시대의 임금은 아침, 점심, 저녁, 밤으로 '다소반과'와 '다별반과'라는 다과상이 나와서 매일 먹었다. 수라상의 후식으로 항상 떡과 과자를 올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궁중의 육처소(六處所)에서 생과, 전과(煎果), 다식(茶食), 죽 따위의 별식(別食)을 만드는 생과방(生果房)이 있었다.'''
하지만 가뭄이 들거나 홍수가 들어서 그 해 작황이 좋지 않으면 술과 함께 제일 먼저 제조금지 목록에 올랐다. 그만큼 쌀을 많이 잡아먹기도 했고, 백성들이 고통받는데 사치를 경계하는 차원에서 한과의 제조를 금하여 민심을 위로한다는 의미도 있었다. 상술했듯 조선시대 및 그 이전 시대엔 한 끼 식사량이 현대인들 기준으로 이틀치 혹은 그 이상으로 많았으며, 특히 고대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식사량이 더욱 많았다. 이 때문에 한과는 한국 요리에서도 최고급으로 간주되어 제사나 명절 음식으로 귀한 대접을 받았다. 당시의 고기와 해산물도 한과에 비하면 일상 음식으로 봐도 되었을 정도.
물론 양반들이나 일개 고을의 사또들중 부정부패를 저지른 경우가 많았고, 그로인해 그들중에는 고작 자기 생일상이나 술안주에 한과를 올리는 엄청난 사치를 부리는 경우도 많았다. 심지어 흉년으로 인해 국가로부터 한과 제조 금지령이 내려져도 일단 만들어 먹은뒤 후에 문제가 생기면 금지령에 대한 전달을 늦게 받았다는 식으로 대충 얼버무렸기에 잘 지켜지지 않았다.
흔히 한과는 튀기고, 지지고, 졸이는 3가지 요리법으로 구분된다. 이 때문에 한국에서는 민간인 한정[2] 으로 튀김과자를 선호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한과나 떡의 끈적한 식감을 대체로 서양권 사람들은 별로 안 좋아하며 문화가 비슷한 아시아권 사람이라면 좀 다르겠지만 사실 온갖 간식에 익숙해진 한국 젊은층은 서양권 사람과 마찬가지로 별로 좋아하지 않고 한과를 굳이 찾아 먹는 또래를 발견하면 신기하게 본다. 그나마 식혜나 약과 정도가 선전하는 편.
지리적 표시제/대한민국에는 강릉 한과가 등록되었다.
용수당이 한과로 오해(?)받기도 하는데, 자세한 건 해당 문서 참고.
3. 상세
한과에 사용되는 재료는 주로 가을철에 나는 것들로, 서양식 과자나 일본의 화과자에 비해 달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류큐에서 설탕을 착취하며 긁어모을 수 있었던 일본과는 달리 한국은 기후 때문에 사탕수수의 재배가 불가능했던 데다가 사탕무도 전래되지 않았기 때문에 설탕이 생산되지 않았고, 꿀 생산도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대신 단맛을 보충하고자 사용한 엿과 조청은 오늘날 흔히 쓰는 물엿보다 싱겁다. 단맛에 길든 현대인의 미각으로는 조청의 단맛을 거의 못 느낄 정도로.
전통 한과가 잊히고 있다고 말이 많지만, 정작 조상들 절대다수는 그나마 길거리 음식으로 어느 정도 대중화 된 엿을 제외한 나머지 한과를 먹고 싶어도 먹을 수가 없었고 일부 종류는 먹기는커녕 구경조차 할 수 없었다. 애초에 과자를 만드는 비법이나 요리법도 궁중과 양반가에서 내려오던 것으로 지배계급의 문화였을 뿐, 그것이 평민들에게까지 널리 보급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잊어버리기도 쉬웠다.[3] 그나마 노비들은 주인을 잘만날경우 명절이나 제사때 주인으로부터 얻어먹을수도 있었지만 평민들은 양반 밑에서 일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그런것도 없었다. 그나마 인심좋은 양반들이 고을 주민들한테 나눠주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 인심좋은 양반들도 분배대상이 자기 밑의 하인, 노비까지가 전부인 경우가 많았다. 더구나 위에서도 언급했다시피 들어가는 재료들 자체도 고급이었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엄청난 양의 쌀이 소모됐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될 것이다. 영조 임금 당시 귀한 쌀을 가지고 술 빚는 데 낭비한다며 금주법을 내려 엄중하게 다스렸을 정도인데, 필수식량도 아닌 기호식품에 불과한 한과를 만든다고 쌀을 낭비했다간 그야말로 바로 그자리에서 귀싸대기 맞을 일이다. 하다못해 현대에도 엿을 제외하면 유밀과와 유과, 강정만 대중화 되었을뿐 다식이나 숙실과, 과편등은 유밀과나 유과, 강정과 달리 마이너한 편이다. 심지어 당의 경우도 외국 과자들을 접하기 쉬워지면서 마이너해졌다. 그나마 정과의 경우 고급 한과의 대명사에 가까운 위치이긴하다.
이는 비단 한국뿐만이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 인도나 유럽, 아랍권에 이르기까지 비슷했다. 상당수 과자들이 손으로 하나하나 만들기에는 굉장히 시간이 걸리고 힘이 많이 들기에 무지 비싸서 부자나 귀족층에서나 즐겨 먹곤 했다. 티타임 같이 달디단 과자들을 차와 즐기던 영국이나 유럽인의 이미지에 귀족 신사숙녀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는 것도 이런 이유였다. 그나마 중국에서는 대운하가 확장개통된 이후로 장강 이남으로부터 설탕을 손쉽게 나를수있게 되면서 이런류의 먹거리가 어느정도 퍼지기는 했다. 호떡이 대표적인 예로 만두마냥 속을 넣어서 주식으로 먹기도 하지만 안에 시럽을 넣어 간식용으로 먹기도 하는데 이러한 호떡이 구한말에 청나라로부터 전해지면서 지금의 호떡이 된것이다.
갑오개혁 이후로 반상 구분이 사라지고, 평민들도 양반들 모양대로 제사를 지내면서 한과의 소비량은 늘었지만, 그들에게 한과는 양과자와 달리 평상시에 먹는 과자가 아닌 제사상이나 잔칫상에나 쓰이는 귀한 과자 정도로나 생각되었던 것. 오늘날 현대인들의 인식과 크게 다르지 않은 수준이다. 아무리 서구화된 한국인이라도 외국에 나가있지 않은 한 제사상에 양과자를 올리지는 않고, 반상의 구분이 철폐되었다고 해서 한과의 생산량이 갑자기 늘어나지도 않았기 때문에.
사실 한국에서 달콤한 과자류가 크게 발달하지 않은 이유 중 하나는, 고려시대 불교의 융성과 함께 차 문화가 발달하고 차에 곁들여먹는 다과류도 어느 정도 발달하였으나, 조선시대에 숭유억불 정책이 이뤄지며 이런 문화를 사치스럽다고 여겨 기피하게 되었기 때문도 있다. 그리고 이 차를 대체한 것이 유교의 제사에서 쓰이는 술이었는데 술은 다들 알다시피 이런 달콤한 과자가 아니라 식사류와 주로 마신다. 그러므로 다과류가 주요 역할을 잃어버린 것. 실제로 고려시대 기록에 남은 간식류를 조선시대 문헌에서는 찾아볼 수도 없어서 이름으로나마 그 형태를 추측해볼 뿐이다. 일례로 쌍화점에서의 쌍화는 흔히 알려진 만두가 아닌, 이슬람 문화권에서 넘어온 설탕을 사용한 디저트라는 주장도 있다. 한자로 '霜花', 서리꽃이라고 표기하기도 한다.
4. 종류
4.1. 유과(油果)
4.2. 유밀과(油蜜果)
4.3. 강정(羌飣)
4.4. 다식(茶食)
4.5. 숙실과(熟實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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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나 여러 과일을 엿이나 꿀과 함께 약한 불에 졸인 다음 그 과일 본래의 모양으로 다시 만들어놓은 과자를 총칭한다. 과실을 그대로 꿀이나 설탕에 졸인 것을 초(炒)라고 하고, 과육을 다지거나 으깬 것을 란(卵)이라고 한다. 유명한 찐 밤을 꿀과 함께 졸인 율란(栗卵)과 대추를 꿀이나 설탕에 졸인 다음 사탕처럼 만들어 굳힌 대추초(대추炒)가 잘 알려져 있다.
4.6. 정과(正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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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일이나 생강, 도라지, 감초 같은 약초를 설탕에 졸인 다음 그 위에 설탕을 입혀서 완성시킨 한과이다.
한국에서는 생산되지 않는 설탕을 사용했기 때문에 한과들 중에서도 특히나 제일 귀했다. 특히 인삼을 절인 인삼정과(人蔘正果) 가장 귀한 한과였다. 인삼정과의 재료인 인삼의 경우, 현시대에 반도체가 있다면 조선시대엔 인삼이 있었다고 할정도로 수출품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컸다. 심지어 독립군 지원세력들이나 조선시대의 도적들이 군자금을 버는 방법 중 인삼을 판매하는 것이 있었을 정도로 값이 비쌌다. 큰 판매수익을 낼 수 있는 무역품이었기 때문에 이걸로 한과를 만든다는 건 당연히 왕족이 아니면 꿈도 못 꿀 일이었다.
사실상 이 한과는 왕족이 아니면 구경도 못해본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인삼정과처럼 귀한 식재료로 만들어진게 아니더라도 양반 중에서도 높은 위치인 경우가 아니면 구경도 못해본 귀한 한과이다.
현재는 옛날과 반대로 설탕이 흔해지고 꿀이 비싸져서 꿀로 절인 것이 더 비싸다.
중국에 탕후루라는 비슷한 요리가 있다.
4.7. 과편(果片)
과실이나 열매를 삶아 거른 즙에 녹말가루를 섞거나 설탕이나 꿀을 넣은 후 조려 엉기게 한 다음 그릇에 쏟아 식혀서 알맞은 크기로 썬 음식. 젤리와 비슷하며, 과즙으로 만든 묵이라 볼 수 있다. 재료가 되는 과실은 앵두, 살구, 오미자, 모과, 포도, 머루, 딸기, 복분자, 산사, 들쭉, 유자, 생강, 홍시 등으로 다양하다. 드물게 호박으로 만들기도 한다. 사과나 배, 복숭아 등은 가열하면 색과 질감이 좋지 않아 쓰이지 않는다. 과일즙과 녹말을 쓴다는 점에서 터키의 로쿰과도 비슷하다.
4.8. 엿
4.9. 당(糖)
설탕을 여러 모양으로 고형화시킨 것. 사탕, 대사탕, 옥춘당, 팔보당, 온당, 줄병, 원당 등이 있다.
[1] 달콤한 음식은 대체로 칼로리가 높아 영양 섭취에 유리하기 때문에 곡물이나 과일을 통해 설탕, 과당 등 단맛의 탄수화물을 먹는 동물은 단맛을 좋아하는 것으로 진화되었다고 한다. 여기에는 인간도 포함되며, 대다수의 영장류 역시 단맛에 환장한다고 한다. 잡식성인 개나 여우, 곰도 단 것을 아주 좋아하는 동물이다. 그러나 육식성인 고양잇과 동물들은 단 것에 반응하지 않는다. 이는 고양잇과 동물들이 완전히 단 맛을 감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진화심리학의 시초 가운데 한 명으로 일컬어지는 데즈먼드 모리스가 이러한 내용을 그의 저서 '털 없는 원숭이'에서 언급한 바 있다. 간혹 집에서 키우는 고양이가 단 것을 좋아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고양이가 사람을 따라하거나, 단 것 속 지방 맛을 느끼는 것이다.[2] 군인들은 갑과자류나 빵과자류를 더 좋아한다.[3] 만약 평민들한테까지 널리 보급되었더라면 평민들도 한과를 접하기가 비교적 쉽긴 했겠지만 평민들 상당수는 하루하루 끼니를 걱정해야 했기에 역시 육류보다 쉽게 접할정도는 아니엇을것이다. 다만 엿을 제외한 한과들도 유과나 강정, 유밀과 정도는 잔치때가 아니더라도 한번쯤 맛보는게 가능한정도였을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