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구연/경력
1. 개요
허구연의 생애 및 경력을 다룬 문서. 그의 별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허구연 본인의 주장한 생애와 실제 기록 사이에서 환단고기와 삼국사기의 차이만큼이나 많은 간극과 상충, 오류, 모순, 왜곡, 구라가 발견되고 있다. 따라서 본 문서를 읽는 사람들은 매우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본 문서를 읽을 필요가 있다.
2. 선수 시절
2.1. 경남고 - 상업은행(1970)
현역 때 포지션은 내야수. 특히 2루수가 주 포지션이었다. 경남고등학교 야구부(1967년 ~ 1969년) - 상업은행 야구단(1970년) - 고려대학교 야구부(1971년 ~ 1974년) - 한일은행 야구단(1975년 ~ 1978년)을 거쳤다.
8살이었던 1959년에 야구계에 입문했다고 한다.
경남고 야구부 시절부터 준수한 배팅 능력을 지닌 선수였다. 1학년이던 1967년에 황금사자기에서 경남고가 우승을 차지했다. 다만 이때는 1학년에 불과했던 만큼 팀의 우승을 이끌었다는 주장은 다소 걸러 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 1학년 때인 황금사자기 때 얼마나 활약했느냐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동기들 중에서 야구선수로서 실력이 뛰어났던 것은 사실이다. 청소년대표로 발탁되기도 했다.
경남고 졸업 후 실업야구 상업은행에서 입단하여 1년간 선수생활을 했다. 상업은행 장태영 감독이 "네가 오면 경남고 팀 동료 한 명을 상업은행에 넣어주겠다"고 통보했고, 이에 허구연은 우정을 저버릴 수 없어 1970년 상업은행 야구단에 입단했다고 한다. 허구연은 이 사실은 인터뷰에서 누차 말했다. 다만 그 친구가 누구인지, 어떤 친구인지, 나중에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어렴풋이라도 언급한 적은 없다.
허구연의 공부에 대한 미칠듯한 집념과 학벌, 학력에 과도할 정도로 집착하는 모습으로 볼 때, 그가 대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실업야구로 직행한 것은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사실 당시 고려대나 연세대 야구부는 요즘과 달리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프로야구가 생기기 전에는 최고의 야구 엘리트만이 들어갈 수 있었던 곳이 연고대 야구부였다. 박철순, 최동원, 선동열, 이순철, 조계현 등 당시 고려대와 연세대 야구부를 나온 기라성 같은 선수들의 면면을 보면 알겠지만 당시 고교 4대 메이저대회에서 우승한 후 MVP 정도는 차지해야 들어갈 수 있는 곳이 고려대와 연세대 야구부였다. 개인성적도 특출나야 했고 아울러 소속 고등학교의 성적도 매우 중요하게 작용했다. 당시 장효조, 이만수, 김재박, 김성한, 한대화, 김시진 같은 야구 엘리트들도 고3 때 우승 및 MVP 같은 확실한 경력이 없어서 연고대에 가지 못하고 한양대나 동국대 등에 입학해야 했다.
허구연은 청소년대표로 선발된 경력이 있을 정도로 뛰어난 선수임은 분명했다. 하지만 그가 몸담고 있던 경남고 야구부는 그가 1학년때인 1967년 제 21회 황금사자기 고교야구대회에서 우승한 것을 제외하면 4대 고교야구대회인 대통령배, 청룡기, 황금사자기, 봉황대기에서 한번도 4강안에 든 적이 없다. 사실 1학년때의 우승기록은 거의 무의미하고 대학 진학에 있어서 3학년때 성적이 결정적으로 작용하는데, 당시 야구대회에서 실적이 없었던 경남고 출신인 허구연이 고려대를 비롯한 명문대 야구부에 합격할 가능성은 매우 희박했다.
때문에 허구연은 실업야구에서 1년간 선수로 뛴 후 실업야구 경력을 바탕으로 고려대 야구부에 재수했을 가능성을 점쳐볼 수 있다. 다른 선수도 아니고 도서관이 불끌때까지 공부했던 허구연이기에.
2.2. 고려대 야구부(1971~1974)
실업리그 상업은행에서 1년간 선수로 뛴 후 이를 바탕으로 1971년에 고려대학교에 체육특기자로 진학했다. 1971년 고려대에 입학한 허구연은 그해 고려대 야구부에서 3, 4번 타자로 발탁되었는데, 이는 '''고려대 야구부 역사상 처음으로 1학년이 4번타자로 기용된 것'''이다. 허구연은 1972년 '''대학 야구 홈런왕'''에 등극했다.
2.2.1. 고려대 입학 관련 허위주장
허구연 본인은 1971년 고려대 체육학과에 들어갔으나 공부 안하는 분위기가 마음에 안들어 그만두고 1972년 예비고사를 보고 정식으로 고려대 법대에 다시 입학했다고 수차례 주장했다. # # #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여러 자료와 정황증거에 의해 구라인 것으로 판명된다.
허구연은 다른 여러 매체에서 일관되게 1971년 고려대 체육학과에 들어갔다가 1972년 정식으로 대입 시험을 쳐서 고려대 법대에 진학했다고 말하고 있는데, 유일하게 조금 다르게 말한 적이 있다. 바로 고려대학교 학보인 '고대신문'과의 인터뷰에서였다. 우선 일반 언론에 실린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저는 이제 상업은행 처음 갔다가 1년 있다가 대학으로 갔거든요. (중략)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상업은행에) 갔다가 이건 도저히 아니고 공부를 해야 되겠다. 그래서 반대를 무릅쓰고 대학을 다시 간 거예요. 은행에서 뭐 '''난리 났죠'''. 하도 은행에서 잡아가지고 예비고사를 못 쳤어요. 잡으니깐. 예비고사를 쳐야 대학을 가잖아요. 예비고사를 안 치면 체육학과밖에 못 갔어요. 그래서 제가 체육과를 들어간 거에요. 그래도 난 가겠다. 그러니까 (은행에선) 할 말이 없는 거죠. 그래서 체육과를 또 다니다 보니까 아 이건 공부를 별로 안 하는 것 같아요. 그당시에는 특기자만 다 모아놨으니까. '''그래서 또 다시 시험을 쳤어요. 예비고사를 쳤어요. 그래서 법대를 갔어요.''' 그러니까 학교에서도 고대에서도 또 놀란 거에요. 이거 뭐 4번 타자가, 제가 1학년때부터 3,4번을 쳤는데, 아니 뭐 또 과가 마음에 안 든다고, 공부하겠다고 갔어요.
- [1]
결국 나는 도망치다시피 상업은행을 떠나 이듬해 71학번으로 고려대 체육학과에 체육 특기자로 들어갔다. 그리고 '''1년 뒤에는 같은 학교 법학과 72학번으로 두 번째 입학식을 가졌다'''. (중략) 1971년 3월 체육학과에 입학하면서 나는 야구선수와 수험생의 생활을 병행했다. 말하자면 ‘주야야독’(晝野夜讀)이었다. 정식으로 예비고사, 본고사를 거쳐 법과대학에 들어가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사법고시에 합격'''한 최초의 국가대표 야구선수’가 되고 싶었다. “운동선수들은 무식하다”는 세간의 편견을 깨고 싶었다. 신문 인터뷰에서 “판검사나 변호사를 못 하는 게 아니라 야구가 더 좋아서 안 하는 것뿐입니다”라고 말하는 꿈을 꾸기도 했다. '''이듬해 나는 고려대 법대에 신입생으로 다시 들어갔다'''. 체육 특기자 출신이 고려대 안에서도 입학하기가 가장 어려운 학과로 통했던 법대에 시험을 봐서 합격하자 나를 아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교내에서도 '''난리가 났다'''.
- 서울신문 인터뷰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처음에는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실업팀에 들어갔다가, 대학 수업을 듣고 싶어서 체육 특기자로 고려대학교 체육교육과에 들어갔어요. 그런데 그 당시에 전 ‘내가 좋아하는 야구도 하면서 '''사법고시 합격'''을 해보자’라는 꿈이 있었습니다. '''다시 공부를 해서 고려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했지요'''. 그런데 야구부 활동을 하다 보니 합숙 훈련도 많고 원정 경기도 많아서 사법고시와 병행은 하기 힘들더라고요.
'''사법고시에 패스'''한 야구선수가 되고 싶었다. 71학번 체육 특기자로 고대에 입학했지만, '''예비고사를 다시 봐서 72학번으로 법대에 들어갔다'''. 야구선수 생활을 하면서 수업을 들으려고 무진 애를 썼다. 아침 9시에 중간고사를 보고 낮에 동대문야구장에 가서 홈런을 2개 친 날도 있었고.
1년간 실업 선수로 뛰는 동안 그는 이것이 자신의 길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공부를 하고 싶다는 열망이 너무 컸다. 결국 허구연은 대학 입학 시험을 치르겠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받아들여질 리 만무했다. 팀은 허구연의 예비고사 응시를 막았다. 그렇지만 이미 결심이 선 허구연은 예비고사를 치르지 않아도 되는 고대 체육과를 선택했다. 그렇게 대학생이 된 허구연은 1년이 지나고 다시 한 번 ‘사고’를 친다. 자신은 ‘공부하러’ 간 건데 체육과의 분위기는 공부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래서 그는 '''선수 생활을 하면서 1학년 때 아무도 모르게 예비고사를 치렀다. 결과는 법학과 합격'''. 정상적이라면 70학번이어야 하는데, 체육과 71학번, 법학과 72학번이 된 것이다.
“전 '''사법고시 합격'''을 해보고 싶었어요. 고시 합격하고 야구를 해도 되잖아요. 자기 공부를 하면서 운동도 하는 그런 선수가 되고 싶었던 거죠.”
1년 뒤. 그는 대학문을 노크한다. 상업은행 장태영 감독이 펄쩍 뛰며 말렸다. 모처럼만에 들어온 복덩이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잔류요청을 정중히 거절한다. 우여곡절 끝에 고려대학교 체육교육학과에 특기생으로 입학한 허구연.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니었다.
그는 특기생이란 ‘딱지’가 싫었다. 이왕 대학생활을 한다면 자신이 관심 있는 분야를 공부하고 싶었다. 다음 해 그는 '''일반학생들처럼 예비고사를 쳐 자력으로 고려대 법학과에 입학한다'''. 고려대가 '''발칵 뒤집힌''' 건 두말하면 잔소리다.
이처럼 허구연은 언론 인터뷰에서 공부로 다시 고려대 법대에 들어갔다고 누차 강조했다. 아울러 사법고시에 합격하는 것이 꿈이었다는 포부도 여러챠례 밝혔다. 하지만 고려대학교 공식 학보인 '고대신문'과의 인터뷰 내용은 다른 언론들과는 사뭇 다르다.허구연은 1971년 고려대학교에 체육교육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다시 대입 시험을 치러 공부로 고려대학교 법학과에 72학번으로 재입학'''하는 엄친아의 면모를 드러냈다.
- MK 스포츠 2014.01.28
'고대신문'의 인터뷰 내용은 다른 언론 인터뷰들과는 비슷한 듯 하면서도 상당히 다르다. 서울신문을 비롯한 다른 매체에서 허구연은 일관되게 1970년 상업은행에서 선수생활을 하다가 1971년 고려대 체육학과에 들어간 후 공부해서 예비고사를 보고 1972년 고대 법대에 들어갔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고대신문과의 인터뷰에서는 그런 내용들이 상당 부분 생략되어 있고, 대학은 한번만 들어간 것으로 나온다. 사실 고대신문과의 인터뷰도 온전한 사실은 아니다. 일단 공부해서 시험쳐서 고려대 법대에 들어갔다고 말하고 있으나 여기에도 맹점이 있다.상업은행에서 1년하고, 고려대로 대학을 간거죠. 은행에선 안 놔줄려고 시험을 못 치게 했어요. 그래도 뛰쳐나온거죠. 학교에서도 깜짝 놀랬지요. 공부해서 시험쳐서 법대로 들어갔으니까요. 학교가 뒤집어 졌어요.
- 고대신문 인터뷰
사실 허구연의 인터뷰를 보면 상당히 교묘한데, 정확하게는 대입, 또는 시험을 쳐서 법대에 들어갔다고만 나올 뿐이다. 허구연은 슬쩍 본고사를 언급하면서 마치 본인이 본고사를 쳐서 법대에 들어갔다는 인상을 주지만, 사실 조금 면밀히 살펴보면 본고사를 치기로 결심했다고만 말했을 뿐 '''허구연 본인이 '직접 본고사를 쳤다'는 워딩은 절대 나오지 않는다.''' 반면에 본고사의 경우와 달리 예비고사는 직접 쳤다고 누차 말했다.
1970년대의 대입제도는 기본적으로 1단계 국가 예비고사 +2단계 대학별 본고사 시스템이다. 우선 1단계로 국가에서 시행하는 예비고사를 친다. 그리고 2단계로 일반계(문과/이과) 학생들은 자신이 지원한 대학에 가서 본고사를 친다. 즉 예비고사는 소수의 예체능계 학생들을 제외하면 오늘날의 수능처럼 대입 수험생이라면 누구든지 기본적으로 보는 시험이었다. 그런데 당시 예체능계 등 특별전형을 제외한 일반전형에서는 본고사를 보지 않고 예비고사만으로는 지원할 수가 없었다. 한편 체육특기자가 특기자 전형으로 대학에 입학하는 과정도 모두 엄연히 '시험'이자 '대입' 전형이다. 체육특기자가 서류전형으로만 합격했던, 면접 및 실기 시험을 봤던 간에 이러한 실기 전형 및 면접, 서류 전형도 모두 '대입'이자 '시험'이기 때문에 체육특기자로 합격했더라도 '시험쳐서 고려대 법학과'에 들어갔다'는 말은 거짓말은 아니다. 또 허구연은 '공부'해서 시험쳐서 대학에 갔다고 말했는데, 참고로 예체능계 학생들은 실기 연습하는 것도 '공부'한다고 표현한다. 이는 실제로 예체능계에서 빈번하게 쓰는 표현이다. 일반인들은 실기를 공부로 생각하지 않지만 이런 얘기를 예체능계 학생들에게 실제 해보라. 그러면 십중팔구 대단히 화를 낸다.
의외로 모르는 사람들도 많은데, 과거에는 체육특기자라고 해서 체육 관련 학과만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과거에는 자신이 원하는 아무과나 선택할 수 있었다. 체육특기자의 경우 졸업 후 교사직 등을 염두에 두고 황규봉(체육교육학과 73학번), 마해영(체육교육학과 89학번), 이상훈(체육교육학과 89학번), 조원우(체육교육학과 90학번), 손민한(체육교육학과 93학번)처럼 체육교육학과를 선택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간판학과를 선택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이광환(경영학과 67학번), 김용희(행정학과 74학번), 김경문(경영학과 78학번) 양상문(경영학과 79학번), 박종훈(경영학과 79학번), 선동렬(경영학과 81학번), 박노준(경영학과 82학번), 김경기(법학과 86학번), 염경엽(법학과 87학번), 조성민(경영학과 92학번), 김동주(경영학과 94학번), 최희섭(법학과 98학번), 박용택(경영학과 98학번) 등 다수의 선수들이 경영학과 아니면 법학과를 선택했다. 물론 이들은 모두 체육특기자로 고려대에 입학했다. 자신이 고대 법대를 나왔네, 고대 경영학과를 나왔네 하고 자랑하는 이는 허구연 말고는 아무도 없다. 대부분의 야구팬들도 이들이 고려대 야구부 출신이라는 사실만 알지 무슨 과를 나왔는지는 모른다. 다만 99학번 이후에는 체육특기자들은 체육교육과로 일괄 배정되고 있다. 그래서 정근우(01학번), 박세혁(08학번), 문승원(08학번), 윤명준(08학번)은 모두 체육교육과 출신이다. 이러한 사정은 라이벌인 연세대도 마찬가지다. 대표적으로 박철순은 연세대 법학과 74학번이고, 최동원은 연세대 경영학과 77학번이다.
고려대학교 공식 학보인 '고대신문'에는 허구연에 관한 기사가 여러차례 실렸지만 일관되게 허구연을 '고려대 법학과 '''71학번''''으로 기재하고 있다. 고대신문 2007월 11월 4일, 고대신문 2014년 10월 6일. 고대신문에서 연재한 추억의 그라운드-야구해설가 허구연①을 보면 모교를 빛낸 동문인 허구연을 칭송하기 위한 목적으로 쓰여진 연재물인 만큼 그에 대한 여러 칭송이 있지만 입학에 대해서 만큼은 1971년 ''''야구특기자''''로 입학했다고 명확하게 서술하고 있다. 고대신문을 비롯하여 고려대학교에서 공식 발간한 문서에서 허구연을 법학과 72학번으로 기재하거나 허구연이 72년에 다시 재입학했다는 사실을 언급하거나 암시하는 문서는 한 건도 발견되지 않는다.
군기가 쎄기로 유명한 고려대 야구부에서 허구연은 1학년 때부터 주전 중의 주전인 4번 타자로 활약하며 홈런왕까지 석권했다. 그런데 동시에 몰래 입시 공부를 병행해서 입시를 치뤄 고려대 법대에 갔다는 것은 아무리 천재라 하더라도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이라 보기는 어렵다. 특히 당시 대학입시는 단순암기식 시험의 끝판왕인 예비고사 + 악명높은 난이도의 본고사였다. 당시에는 암기식 예비고사와 고난이도 본고사 공부를 병행해야 했기 때문에 명문대에 들어가려면 단단히 공부해야 하던 시절이었다. 학습시간과 성적이 비례했고 때문에 당시에는 4당5락과 같이 수면시간을 줄여가며 공부하는 것이 강조되었던 시절이었다. 때문에 시험 경향이 상이한 예비고사와 본고사에서 모두 좋은 성적을 거두기 위해서는 많은 학습시간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했다. 학습량이 무척 많았기 때문에 당시에는 반수라는 개념이 없었고 충분한 수험시간 확보를 위해 1년 풀재수가 일반적이던 시절이었다. 허구연 본인의 말에 따르면 낮에는 전공과목을 공부하면서 야구연습도 하고, 연습을 마치면 밤에 도서관에 죽치고 앉아서 공부하여 예비고사를 봤다고 한다. 훈련은 차치하고서라도, 전공 공부와 예비고사 공부를 함께 한 것도 놀랍고, 체육과 선배들과 교수들 몰래 예비고사를 공부해서 봤다고 하는데, 버젓이 학교 도서관에서 대입 입시 공부를 한 것도 놀랍다. 요즘도 대학 도서관에서 반수하는 용자는 드물지만, 당시에 더 좋은 학교에 가기 위해 대입시험을 다시 보는 것은 배신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다른 곳에서 공부를 했지 학교 도서관에서 대놓고 대입 공부를 하는 경우는 전무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다가 같은 학과 친구나 선후배가 보기라도 하면 배신자로 반쯤은 학과에서 매장되었다.
게다가 허구연은 1975년 2월에 고려대를 졸업하고 실업야구 한일은행에 입단하여 1975년과 1976년 2년 연속으로 실업야구 올스타에 선정되었다. 만약 허구연이 72학번으로 다시 대학교에 들어갔다면 75년 2월 졸업을 하기 위해서는 '''3년(6학기) 조기졸업'''을 해야 한다. 요즘도 조기졸업은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당시에는 조기졸업 제도 자체가 아예 학칙에 없어 허용되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일단 1974년 당시 고려대 학칙상 조기졸업이 가능했는지는 확인이 필요하지만, 학칙상 조기졸업 제도가 있었다 하더라도 실제로 조기졸업을 하기 위해서는 평균 A0 이상의 매우 우수한 성적을 거두어야 하고, 한 학기에 23학점 이상 미친듯이 수업을 들어야 한다. 당시에는 계절학기를 여는 경우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여기서 땜빵하기도 힘들다. 계절학기가 열린다 하더라도 전공과목은 없기 때문에 한계가 있다. 게다가 야구부는 특성상 방학 때 훈련을 하고 전지훈련을 가기 때문에 계절학기에 참여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한 경우가 많다. 고려대 야구부에서 4번 타자로 활약하면서 홈런왕까지 차지했던 허구연이 고려대 법학과에서 한 학기에 23학점씩 수업을 들으며 사법고시 준비를 병행하여 법학 지식이 빠삭한 고대 법대생들 사이에서 평균 A학점 이상의 우수한 성적을 거두며 3년만에 조기졸업을 했다는 것은 만화에 나와도 욕먹을 만한 설정이다. 아랫 단락을 보면 허구연이 대학을 다니던 70년대 전반기 당시 데모, 휴강, 휴교령 등으로 제대로 수업에 나가는 경우가 드물었던 시절이라고 하지만 예외적이었던 것이 법대였다. 서울대 법대와 고대 법대는 당시 수십명 밖에 뽑지 않던 사법고시에 합격이 가능했던 유이한 학교였고[2] 때문에 이 양교 법학과 학생들은 입학하고 나서 죽어라 공부하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에는 대한민국에 대기업이라 할만한 대기업이 없었고, 의사가 지금처럼 고수익을 얻는 경우도 드물어서 사법고시가 유일한 출세길로 통했다. 당시 운동권은 법대 학생을 기득권에 영합해 출세하려는 속물들이라는 비난을 서슴치 않기도 했다. 어쨌든 이때문에 당시 법대에서만큼은 좋은 학점을 따는게 정말 어려웠다. 허구연 본인이 방송하는 한 말에 따르면 고려대에서 야구부 학생인 자기가 '어쩌다가'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면 다른 일반 학생들이 크게 놀랐다고 한다. 본인의 입으로 어쩌다가 도서관에 가서 공부를 했다고 하니 당시 공부를 안하던 분위기를 고려하면 아예 공부를 안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조기졸업을 할 정도로 열심히 한 것도 아닌 것으로 보인다. 또 당시 야구부의 특성상 선배들과 함께 조기졸업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3] 참고로 선후배 관계가 끈끈하고 엄격하기로 유명한 고려대는 운동부가 아닌 일반학과도 철저히 학번에 의해 선후배가 결정된다. 고려대에 다니다가 다시 시험을 쳐서 같은 고려대 다른 과로 들어오는 경우도 새로 들어온 학번이 기준이다. 당시 운동부는 일년 더 선수로 써먹으려고 유급시키지 않고 제때 졸업이나 시켜주면 다행이었다.[4]
다만 허구연이 대학을 다녔던 70년대 전반기에 고려대가 데모로 인해 휴강이 일상적이었고, 대다수의 학생들이 데모를 핑계로 수업에 출석하지 않을 정도로 막장 상황이었음은 참작할 필요가 있다. 당시 대학을 졸업한 한 교수에 증언 따르면 당시에는 데모하느라 대부분 수업을 쨌기 때문에, 출석만 제대로 하면 거의 A였다고 한다. 비록 동기들에게 배신자라고 욕은 먹었지만 자신은 그렇게 올A로 졸업해서 교수가 되었다고 한다. 실제로 허구연이 고려대를 졸업한 직후인 1975년 4월 8일, 박정희 정부는 고려대에 휴교령을 내리기까지 했다. 70년대 전반기 고려대 상황이 이렇게 막장이었기 때문에 학부모들과 학생들도 고려대를 다소 기피하여 고려대 입결도 좋지 않았는데, 당시 신문기사 배치표를 보면 1974년 고려대 입학 커트라인은 서울대, 연세대, 부산대, 이화여대, 경북대보다 낮은 수준이었다. 어쨌든 이러한 방식으로 허구연이 올A로 조기졸업을 했을 수도 있지만, 만약 실제로 그랬다면 자기과시와 구라의 달인인 허구연이 그 사실을 전혀 생색안할 리가 없다. 하지만 허구연은 수많은 자기자랑 와중에 자신이 대학을 조기졸업을 했다거나 대학시절 성적이 올A 수준으로 우수했다는 얘기는 한번도 한적이 없다. 만약에 그정도로 성적이 좋았다면 대학원 입학은 자동 패스이기 때문에, 자신이 밝혔듯이 나중에 대학원에 들어가기 위해 하루에 10시간씩 공부할 필요도 없었다.
'''종합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허구연은 1971년 체육특기자 전형으로 고려대 체육학과 또는 체육교육학과에 입학한 후 1972년 시험을 봐서 고려대 법학과에 다시 진학했다고 누차 주장하고 있지만, 고려대 측에서 나온 여러 공식적인 자료에서 허구연의 이같은 주장은 모두 부인된다. 고려대 측에서 나온 자료들은 일관되게 허구연이 1971년 야구특기자 자격으로 고려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했다는 사실을 기재하고 있으며, 1972년에 재입학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거나 암시하는 내용은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허구연이 1971년 체육학과 또는 체육교육학과에 입학했다가 중도에 그만두었다는 주장 역시 고려대 측의 자료에서는 이를 지지하거나 뒷받침하는 내용이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허구연이 1972년에 법학과에 재입학한 후 야구부 4번 타자와 주장을 겸하면서 모든 훈련과 시합을 정상적으로 소화함과 동시에 고려대 법학과에서 전과목 평균 A0 이상의 우수한 성적을 받으며 3년만에 조기졸업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게다가 허구연 본인의 주장을 보다 정확히 반영하자면 허구연은 이 3년이라는 기간동안 사법고시 공부까지 병행했다.
이같은 사실들을 종합하면 허구연은 1971년에 한 차례 고대에 입학해서 4년을 재학한 후 1975년 졸업하여 그해 실업야구 선수로 입단했다는 사실 이외에 다른 사건이 발생할 수 있는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허구연의 대입 관련 인터뷰 내용을 보면, 허구연은 본고사까지 언급해 가면서 본인이 공부만으로 고려대 법대에 들어갔다는 뉘앙스로 누차 얘기하고 있다. 당시 예체능계를 제외한 일반계로 고려대 등 상위권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예비고사와 본고사에 모두 필수적으로 응시해야 했다. 허구연은 본고사를 언급하긴 했지만, 본고사를 볼 결심을 했다고만 말했을 뿐, 본인이 직접 본고사를 쳤다고는 한번도 말한 적이 없다. 반면 허구연은 예비고사는 직접 쳤다고 여러차례 말했다. 예비고사는 오늘날의 수능처럼 대학교에 들어가길 원하는 일반계 학생이라면 누구나 봐야하는 시험이었다. 허구연의 인터뷰 발언을 문자 그대로 보면 허구연은 본고사를 쳤다고 한 적은 한번도 없다. 그러나 예비고사를 쳤다고 말한 적은 여러번 있다. 이를 바탕으로 허구연이 예비고사만 쳤고, 본고사는 치지 않았다고 하면 허구연은 체육특기자 전형이 아닌 일반전형으로는 고려대 법학과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이 되지 못한다. 예비고사만 치고 본고사를 치지 않았을 경우 고려대 법학과에 지원할 수 있는 방법은 체육특기자 전형 뿐이다.
허구연은 모든 인터뷰에서 허구연 본인이 체육특기자로 고려대 법학과에 들어갔다는 사실과 배치되지 않는 발언을 하고 있다. (단지 입학 연도에 있어서만 배치되는 발언을 하고 있을 뿐이다.) 허구연은 '공부'해서 '시험'을 봐서 고려대 법학과에 들어갔다고 누차 말하고 있다. 그런데 예체능계 학생들은 실기 준비도 '공부'라고 말한다. 게다가 예체능계 전형 및 특기자 전형도 모두 '입시'이며, '시험'이다. 따라서 허구연의 인터뷰 발언들은 허구연이 체육특기자 전형으로 고려대 법학과에 들어갔다는 사실과 전혀 배치되지 않는다.
이같은 내용들을 근거로 도출될 수 있는 결론이 어떠한 사실을 의미하는지는 쉽게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2.3. 한일은행(1976~1978)
고려대학교를 졸업 후 1975년 김응용 감독이 이끌던 한일은행 야구단[5] 에 입단했다. '''미사일 타선'''의 일원으로 활약하며 1975년, 1976년 2년 연속으로 올스타전에 출전하는 등 실업무대에서 잘 나가는가 싶었는데... 1976년 대전광역시에서 열린 한일 올스타전에서 선수 생명을 위협하는 큰 부상을 입었다.[6] 당시 2아웃 주자 1루인 상황에서 평범한 유격수 땅볼을 유격수가 1루로 던지지 않고 2루로 송구했고, 엉겹결에 2루에서 공을 받은 2루수인 허구연이 후속 동작을 취하지 못한 와중에 일본 팀 1루 주자의 거친 슬라이딩에 받히면서 정강이뼈가 바스라진 부상을 입은 것. 당시 공주고에 재학중이었던 김경문이 이 경기를 직관하고 있었는데 부딪힐 때 '빡' 소리가 경기장 전체를 울릴 정도였다고 하니 엄청난 충격이었다. 당시 구급차가 없어서 야전용 들 것에 실려나갔고, 이때 다리가 덜렁거릴 정도로 심한 부상이었는데, 대전에서 서울까지 올라오는 차안에서 마취를 했음에도 엄청난 고통을 느꼈다고 한다. 이후 4차례의 수술 끝에 겨우 일상 생활이 가능한 정도로 회복되었다.
1978년, 재활시스템도 제대로 없던 시절에 잘 뛰지도 못하는 나를 김응용 감독이 대타로 기용했고 그 타석에서 홈런을 쳤는데 그것이 허구연의 마지막 타석이었다. 같은 해 5월 김감독이 말렸으나 정상적인 걸음도 완벽하지 않은 상태였기에 의사의 권유대로 은퇴를 했다.
한일은행에서 선수를 은퇴한 후 관행대로 은행에서 직원으로 계속 일할 수 있었으나 자신과 맞지 않다고 생각해서 포기했다. 한 인터뷰에서는 계산에 약해서 은행 일은 자신이 없었다고 말했다.
3. 대학원 입학 및 관련 구라
그후 대학원에 들어갔다. 병상에서 하루에 10시간 이상 공부해서 대학원에 들어갔다고 한다. 허구연이 대학원에 다닌 시점에 대해서는 본인의 여러 증언이 서로 상충된다. 허구연 본인의 증언을 바탕으로 그의 일대기를 상세하게 다룬 MK 스포츠의 응답하라 레전드 시리즈 등 여러 언론 매체에서 허구연은 1976년 부상을 당하여 병상에서 10시간 이상 공부한 끝에 대학원에 들어갔다고 말했다.그래서 이제 발칵 뒤집혀진 겁니다. 사실은 고대 법대 대학원이 아무나 가는 건 아니잖아요.
4차례의 수술을 받는 엄청난 부상이었어요. 야구 선수로서 재기는 힘들었죠. 그래서 나의 미래에 대한 고민을 다시 시작했고, 그때부터 병원에서 하루에 10시간씩 공부를 했던 것 같아요. 고려대 법학 대학원에 시험을 쳤고, 사실 붙은 거라는 생각은 전혀 못 했는데 운 좋게도 합격을 해서 대학원 졸업 후에는 학부에서 강의를 하면서 대학교수를 꿈꿨습니다.
허구연은 좌절했다. 앞이 깜깜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 그는 주저않는 대신 책을 들었다. 병원에서 하루 10시간 이상 공부에 매달렸다. 덕분에 고시생도 들어가기 어렵다는 고려대 법학대학원에 입학한다.
고려대 대학원 입시에서는 2000년대 초반까지 지필고사를 치렀고, 영어시험이 어렵기로 악명이 높았다. 허구연이 대학원 시험을 위해서 하루에 10시간 이상이나 공부했다는 것은 참으로 신기하면서도 기특한 일이다. 헌데 이 내용 역시 '고대학보'에서만 다르게 말했다.그러나 1976년 대전에서 있었던 한일 실업야구 올스타전에서 정강이뼈가 부러지는 부상을 당해 선수 생활을 접어야 했다. 4번의 수술이 받아야 했던 큰 부상. 그러나 허구연은 병상에서 하루 10시간 이상의 공부를 통해 고려대학교 법대 대학원에 합격했다.
다른 언론에서는 병상에서 하루에 10시간 이상씩 공부해서 시험쳐서 합격했다고 말했지만, 모교 신문에서는 할게 없어서 공부 좀 했다가 대학원 시험을 한 번 시험을 쳐봤는데 합격했다면서 매우 다른 어조로 말하고 있다.그게(다친게) 76년인데, 다치니까 할 게 없어서 병원에서 공부하고 책보고 영어공부를 했죠. 이러다가 시험을 한 번 쳐볼까 해서 고려대 법대 대학원에 시험을 친 거에요. 이제 학교가 정말로 뒤집어 진거지요. - 고대신문 인터뷰
1978년에 석사 학위를 땄다고 나오지만, 실제로 남아있는 허구연의 석사 논문은 1981년 2월로 기록되어 있다. 게다가 실제로 허구연은 1978년 5월까지 부상과 복귀를 반복하며 실업야구에서 선수로 경기에 출장했었기 때문에 1978년에 석사 학위를 받았다는 본인의 증언은 잘못된 내용인 것으로 보인다.[7]
대학원 전공은 상법으로 이윤영 교수가 지도교수였으며 석사학위 논문은 「이사회 제도에 관한 연구」였다.
4. 극히 의심스러운 대학 강사 경력
나는 뭐 프로야구 해설한다 생각을 안 했어요. 그 때는 제가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82년도에. 그런데 82년 프로야구 개막쯤 해서 방송을 해달라고 해서 "나는 대학에서 지금 '''대학에서 강의'''하고 있는데 별로 관심없다" 그랬죠.
본인의 주장에 따르면 석사 졸업 후, 교수를 꿈꾸며 강의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 강의를 했던 기간은 인터뷰에 따라 다른데, 1년이라고 하기도 했다가 다른 인터뷰에서는 2년이라 하기도 하는 등 오락가락하고 있다.대학원 졸업 후에는 학부에서 '''강의'''를 하면서 '''대학교수'''를 꿈꿨습니다. #
일부 언론에서는 경기대에서 강의했다고 밝히기도 했지만, 다른 몇몇 언론에서는 '경기대'를 생략하고 그냥 대학에서 강의했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고려대 학부에서 강의했다는 말로 오해하기 쉽상이다. 보통 박사 과정 재학 중인 대학원생이 학부 강의를 할 경우 소속 학교 내에서 강의하는 경우가 보통이기 때문이다. 요즘엔 대부분 박사학위 소지자만 강사를 지원할 수 있어서 박사 과정 수료는커녕 박사 과정에 입학한 일도 없는 허구연의 강사 경력 자체가 대한민국에서 가능한 일인지 의심받기도 한다.
대학 강사를 했다는 허구연의 주장에 대해 인터넷에서는 아무리 80년대라지만 석사 나부랭이가 시간강사를 맡는 경우는 없다면서 이러한 주장에 의문을 품는 경우가 많다.[8] 하지만 70년대에는 명문대 석사 졸업 예정자라면, 시간강사 정도가 아니라 지방대 전임 자리는 골라 가기도 했을 정도의 호시절도 있었고, 특히 80년대 초반에는 졸업정원제의 여파로 교수 수요가 폭증하기도 했으므로 여기까지는 이해할 여지가 있다. 지금 대학에 남아있는 교수들 가운데에서도 80년대 초반 이전 학번 교수들 중에는 임용 후 박사학위를 받은 이들이 제법 된다.[9] 그러므로 허구연의 주장이 정황상 아예 말이 안되는 것은 아니므로, 구라 여부를 확인하려면 경기대에 직접 확인해보는 수밖에 없다.
다음은 허구연의 주장이니 참고
병상에서 법전을 들고 공부를 시작해 고려대 대학원에서 법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선수생활을 접은 그가 법대 교수가 되고 싶어 강의에 매진할 즈음 프로야구가 태동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MBC로부터 해설 제의가 들어왔다. “'''전임강사'''가 되기까지 불과 몇 달을 앞둔 시점이라 마음이 흔들렸다. - #
허구연이 '''전임강사'''를 불과 몇 개월 앞둔 시점에 해설자가 되기 위해 그만두었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또 그냥 있으면 대학교수가 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허구라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허구라는 한술 더 떠서 이미 '''전임강사 즉 교수가 되었다'''라는 말을 직접 했다.고려대를 졸업한 그는 경기대에서 강의를 했다. MBC에서 연락이 왔다. "곧 출범하는 프로야구 해설을 맡아달라." 허 위원장은 가끔 동아방송 라디오에서 야구해설을 했다고 한다. 그 모습을 눈여겨 본 MBC 측에서 해설가 자리를 제안했던 것. MBC에서 1회 해설에 3만 6천500원을 주겠다고 했다. 처가에서 반대가 심했다. '''그냥 있으면 대학교수가 될 텐데''' 왜 야구해설가를 하려느냐는 것이었다. 야구해설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낮은 시절이었다. 허 위원장은 프로선수처럼 연봉제로 하자고 역제안했다. 연봉은 당시 프로야구 최고선수 수준과 맞먹는 2천200만 원을 달라고 했다. 깜짝 놀란 MBC와 협상을 한 끝에 연봉 1천400만 원을 받기로 했다.
- 부산일보
전임강사는 요즘은 사라진 직책이지만, 조교수 이전의 단계이며, 전임강사부터 전임교원 즉 정년이 보장된 교수 테크를 탄다고 볼 수 있다. 수많은 시간강사들이 결국 교수가 못되고 비정규직으로 커리어가 끝나는데 반해, 전임강사로 임용된다면 큰 결격 사유가 발생하지 않는 이상 거의 대부분 조교수, 부교수를 거쳐 정교수까지 승진하여 정년퇴임까지 가고, 퇴임 후에는 교원연금을 받는다. 때문에 전임강사는 직함은 강사지만 실질적으로 강사가 아닌 교수로서 대우받는다.나는 '''전임강사'''로 대학에서 강의하다가 하루만 하는 줄 알고 해설을 한 게 지금까지 왔다. - #
전임강사로 임용되었다는 허구연의 이같은 발언은 지금이라면 어림도 없지만, 80년대 초반이라면 경우에 따라 가능할 수도 있다.
허구연은 한 매체에서는 이미 교수로 임용된 것처럼 이야기하기도 했다.
현재 전국 4년제 대학교 법학과나 로스쿨에서 실무경험없이 순수 석사학위만 소지하고 교수로 재직했던 사람은 설사 있었더라도 대부분 은퇴했을 것이다. 90년대 이후 아무리 허접한 지방 대학교라 하더라도 4년제 대학교라면 실무경험없는 순수 법학석사 학위 소지자를 교수로 뽑을 가능성이 별로 없다. 하지만 80년대초라면 가능했을 수도 있으니, 구라 여부는 경기대에 문의해봐야만 확인할 수 있겠다.대학에서 강의를 하던 중, 1982년 프로야구가 출범하면서 방송국으로부터 야구 중계 해설을 해달라고 제안을 받았다. 한번 방송을 해보니 방송국에서 계속 같이하자는 제안이 왔고 그는 또다시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야구계로 돌아갈 것인가, '''교수로 남을 것인가'''? 아마도 프로 야구가 생기지 않았다면 우리는 해설 위원 허구연이 아닌 '''법학 교수 허구연'''을 만났을지도 모른다.
"해설을 해보니 '''대학교수와 야구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할 순간이 왔죠."
5. 금성계전(주), 해설자
참고로 본인이 밝히지 않았지만, 실은 허구연은 회사원 생활을 하였다. 금성계전(주)[10] 을 다녔다. 이때 회사 생활을 하면서 대학원을 다녔다고 되어 있다. 당시 사내 야구 동호회를 만들어 대회에 나가 선수 겸 감독으로서 우승도 쉽게 하자 경기에 직접 나오지 말라는 상대팀의 불만까지 생긴 적이 있었다고 한다. ## 허구연은 1984년 금성계전을 그만두었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또 여러가지로 앞뒤가 안맞는 현상이 나오는데, 1982년 프로야구가 개막되었을 때 곧바로 해설위원을 활약하게 된 것. 그렇다면 2년 이상을 직장인 생활을 하면서 프로야구 해설가로 활약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앞에도 나와있지만 허구연은 1981년 석사 학위를 받고 나서 교수를 꿈꾸며 경기대에서 2년간 강사 생활을 했다고 말하고 있다. 이를 종합하면 '''프로야구 원년인 1982년 허구연은 금성계전 인사과 직원, MBC 프로야구 해설위원, 경기대학교 법학 강사 이렇게 쓰리잡'''을 뛴 것이었다.
허구연은 본인이 대학원에 다니고 있다고 말하던 1978년 동아방송에서 야구 해설을 시작했다. # 그런데 한편으로 허구연은 1978년 병상에서 대학원에 들어가기 위해 하루에 10시간 이상씩 공부를 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어쨌거나 당시에는 실업야구였고, 주로 라디오 중계였다. 1982년 KBO 리그 원년부터 MBC 야구 해설위원이 되어 KBO 리그 중계활동을 하며 야구팬들에게 '''해설가 허구연'''으로 다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였다.
[image]
초창기 김용 MBC 아나운서와 함께
6. 흑역사인 지도자 시절
[image]
청보 핀토스 감독 시절.
허구연 본인의 주장에 따르면 1985년 MBC 청룡으로부터 감독 오퍼가 왔지만 고사했다고 한다. # 1985년 4, 5월경 MBC 이웅희 사장이 독대를 여러 번 하면서 감독을 해달라고 간절히 요청했으나, 감독은 아무나 하는게 아니라고 거절했다고 한다. 물론 허구연 본인의 주장 이외에는 이를 뒷받침하거나 지지하는 어떠한 다른 증언이나 기록도 전무하다.
그렇게 MBC 이웅희 사장의 요청을 간절히 거절했던 허구연은 불과 몇 개월 후에 돌연 청보 핀토스 감독직 제의를 수락하고 감독에 취임했다. 1985년 삼미 슈퍼스타즈를 인수하여 청보 핀토스를 창단한 청보식품 회장 김정우 구단주는 팀을 인수하기 전 삼미 시절 임명된 감독인 김진영을 낙마시키고, '''참신한''' 새 감독 후보를 탐색했는데, 그의 눈에 들어온 이가 당시 야구해설가로 해박한 이론을 자랑하던 허구연이었다.(...) 이에 박정삼 청보 단장이 허구연에게 수차례 감독직을 요청했다.
허구연 본인의 말에 따르면 박정삼 청보 단장이 정말 집요하게 설득해서 결국 감독직을 수락했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청보가 원래 못하는 팀이기 때문에 감독을 맡아서 성적이 안나와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고 한다.
계약기간 3년에 계약금, 연봉 각 3000만원, 총액 1억2천만원이라는 당시로서는 비교적 상당히 후한 조건으로 계약했다. 참고로 1986시즌 7개 구단 감독 중 최고 연봉자는 삼성 라이온즈의 김영덕 감독의 4천만원이었는데, 김영덕 감독의 1985시즌 연봉은 2850만원이었으나, 프로야구 역사상 최초로 전후기 통합 우승을 달성한 공로로 연봉이 무려 40%나 올라 4천만원이 되었다.“박정삼 단장의 제의를 놓고 한 달 간 고심했다. 감독직을 수락하는 대신 코치진 인사권과 계약기간 3년 보장을 요구했다. 코치 경험도 없는 판이어서 시행착오가 불가피하다는 점을 감안한 것이다.”
청보 감독을 맡았던 당시 허구연의 나이는 불과 '''35세'''였다. 정확히는 1985년 10월 17일 청보에 부임했을 당시 허구연은 만 34년 7개월의 나이였다. 이는 지금까지도 역대 최연소 감독 취임 기록으로 남아있다. 당시 팀의 최고참 선수인 장명부 보다 허구연의 나이가 어려서 논란이 야기되기도 했다.
감독 취임 당시 허구연은 초짜 감독임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자신감이 넘친 나머지, 젊은 지도자의 패기 내지는 시행착오라고 감싸기에는 다소 너무 무례하고 오만하게 보일 수 있는 행동을 하기도 했다. 이미 계약할 때부터 지도자 경력이 일천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경험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시행착오 기간까지 감안해서 3년이라는 기간을 보장해달라고 주장하는 뻔뻔함을 보인 바 있다. 사실 연봉 협상이나 계약을 할때 허구연은 의외로 철판을 깔고 어불성설한 이유들을 천역덕스럽게 갖다 대고 나오는 경우가 많은데, 해설가 시절에도 연봉 협상과 관련한 몇가지 좀 특이한 일화들이 있다.
게다가 허구연은 초짜 감독임에도 불구하고 코치임명에 관한 전권도 함께 요구했다. 당시에는 경험이 많은 감독이라 하더라도 코치 임명권을 가지는 경우는 상당히 드물었다. 대표적으로 OB 베어스 창단 당시 김영덕 감독은 자신이 원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구단주가 선임한 김성근 코치와 한솥밥을 먹어야 했다. 후임으로 감독이 된 김성근 역시 구단이 자신을 견제하기위해 정적인 이광환을 코치나 2군 감독 등으로 계속 돌리는 것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대부분의 경우 감독 본인이 원하는 한두명의 코치를 영입해달라고 구단에 사정하는 정도였다. 요즘도 감독이 코치임명의 전권을 갖는 경우는 매우 드문데, 한화 이글스의 김성근 감독을 제외하면 감독이 모든 코치를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임명하는 경우는 사실상 없다. 대부분의 감독들은 자신이 원하는 코치를 3인 내외로 꾸리고 나머지는 구단이 결정하는 경우가 많다.
청보 핀토스 감독에 취임한 직후에 허구연은 김정우 구단주와 신현철 구단주 보좌관, 임완 사장, 박정삼 단장과 같이 모여있던 자리에서 누가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김 구단주에게 "구단주님, 구단 내에서 저와 사장 중에 누가 더 높은 위치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라고 당당하게 물었다고 한다. 일반 야구팬들도 아는 상식이지만 당연히 사장 아래가 단장이고 단장 아래가 감독이다. 물론 경험이 많은 유명 감독인 경우 어느정도 단장과 맞먹는 권한을 갖기도 하지만 명목상 단장이 감독 위에 있다. 허구연이 아무리 야알못이라지만 이런 사실을 몰랐을 리는 없다. 구단의 권력 구도에서 조기에 기선을 제압하려는 섣부른, 하지만 어설플 정도로 철없는 시도였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시작부터 허구연은 구단에서 자신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 정치질부터 시도했던 것이다. 당시 김정우 구단주는 어이가 없었는지 허구연의 당돌한 물음에 대해 대답을 하지 않고 조용히 웃고 넘어갔다고 한다.
또 자신감에 넘치던 초보 감독 허구연은 감독을 맡자마자 자신의 핸디캡인 나이가 걸렸는지 팀의 베테랑들을 정리하는 작업을 벌였다. 감독에 취임한 허구연은 꼴지팀을 벗어나기 위한 체질 개선이라는 명분 하에 선수단 개편을 추진했고, 그 선수진 개편의 핵심은 허구연 자신보다 나이가 많았던 장명부를 정리하는 것이었다. 또 장명부 다음 고참이었던 김무관을 은퇴시키고 코치로 임명했다.
또 초보감독 허구연은 자신에게 주어진 코치임명권을 십분 발휘하여 기존 청보 코치진들을 모두 물갈이하고, 김명성, 강태정 등 자신과 친분이 있는 야구 선배들로 새로 코치진을 꾸렸다. 자신의 나이가 어리다는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경험 있는 이들로 코치진을 꾸린 것이었다.
[image]
[image]
이렇게 허구연은 야심차게 시즌을 시작했으나 '''개막전부터 내리 7연패'''를 당하는 등 전반기에만 8승 23패란 처참한 성적을 거두었다. 결국 전기리그 도중인 5월 10일 휴양이라는 명목하에 강태정 수석코치에게 지휘봉을 넘기고 일본 연수를 떠났다. 당시 언론 보도는 구단에 의한 사실상 경질 통보로 해석되었다. 일부 언론은 5월 11일 사퇴로 보도하기도 했다. #
하지만 6월 18일 후기리그 개막과 함께 감독에 복귀했다. 그러나 7승 2무 17패라는 전기리그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초라한 성과를 남겼다. 결국 시즌이 한창 진행 중인 1986년 8월 6일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이에 대해 허구연 본인은 스스로 부족함을 느끼고 자진해서 사의를 표명했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당시 언론 보도에 의하면 김정우 구단주가 직접 허구연의 해임을 결정, 통보한 것이었다. 청보 허구연 감독 전격해임
전후기를 합산한 통산 성적은 57경기 '''15승 2무 40패. 승률 0.273[11] '''이다(…) 그래서 인천팬들 사이에 "'''허구헌'''날 지는 '''허구연'''"이란 드립이 한때 유행하기도 했다고. 당시 삼성 라이온즈의 감독이었던 김영덕은 그런 허구연에게 '''"구연아, 프로 감독은 무조건 센 팀에서 하는거다."'''라는 희대의 명언를 남기기도 했다.
원래 청보는 허구연 임기 전이나 후나 못하는 팀이라면서 허구연을 옹호하는 의견도 있지만, '''허구연은 청보 역사에서 압도적인 최저 승률을 기록한 감독'''이다. 1986 시즌 청보가 기록한 승률인 0.302은 구단 최저 승률인데, 허구연이 지휘봉을 잡았을 때의 승률만 계산하면 0.273이다.
역시 제 3자 입장에서 야구를 논하는 것과 현장에서 직접 지휘를 하는 것은 넘사벽급의 괴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허구연 자신도 가끔 해설 도중에 청보 시절의 이야기가 나오면 매우 좋아하지 않는 기색이 역력하며, 자신에게 상당히 아픈 기억이라고 털어놓았다. 허구연 야구 인생 최대의 흑역사로 남아 있는듯.[12] 실패의 이유를 코치 등 실전 지도자 경험 없이 현장에 바로 뛰어든 것을 들었다. 또 자신은 감독에게 필요한 단호하고 모진 성격을 가지지 않아서 애초에 자리와 맞지 않는 사람이었다고.
훗날의 인터뷰에서 회고하길, 당시 주심들이 "허구연에게 지면 안된다"라고 하여 청보 핀토스에 불공정한 편파판정을 내리는 경우가 많아서 마음 고생이 매우 심했다고 한다. # 이후 2015년 5월 30일 한화 이글스 대 롯데 자이언츠와의 해설에 참여했을 당시에도 옆에 같이 해설하던 정민철이 표를 구하지 못 해 문수 야구장 외야석 뒤에서 야구를 관람하는 사람들을 쳐다보며 숭의야구장[13] 이야기로 화제를 바꾸려는 순간, 청보 감독 시절이 떠오른 나머지 숭의야구장 이야기를 하고 있는 정민철의 입을 다급하게 막은 적도 있었다. 1시간 48분 40초부터
여담으로 청보 감독 시절, 모기업의 청바지 브랜드 '핀토스' 광고에 출연한 전력이 있다.
[image]
1987년부터 3년 동안 롯데 자이언츠 수석코치직을 맡았는데 재임 마지막 해 롯데의 성적은 꼴찌…. 이후 1년 간 토론토 블루제이스 마이너 팀에서 지도자 연수를 받은 후 1991년 다시 해설계로 복귀하였다.
본인의 주장에 따르면, 이후 삼성, LG, 모팀과 현대까지 4개의 팀에서 감독 제의가 왔으나 감독 경험에서 느낀 것이 있어서 모두 거절했다고 한다. 현대가 태평양을 인수해 프로야구에 진입했을 때도 감독직 제의가 왔지만 거절했는데, 심지어 '''정부 고위 인사'''까지 찾아왔다고 한다. 정주영 현대 회장도 관심을 많이 보였던 상황. 허구연 본인의 주장에 따르면 자신이 감독직을 고사하면서 대신 김재박을 추천해서 감독이 되었다고 한다.[14]
7. 해설자 경력
1982년 MBC 야구 해설위원을 맡아 1985년까지 활동하다 1986년 청보 핀토스 감독이 되면서 해설위원을 그만두었다. 1989년 롯데 자이언츠 코치에서 물러난 후, 1991년 해설위원으로 복귀하여 지금까지 활동 중이다.
1990년대에는 KBS에서 야구 해설을 담당하던 하일성과 더불어 대표적인 야구 해설위원이었다고는 하나, 대중적인 인지도와 선호도에서는 하일성에게 넘사벽급으로 많이 밀렸다. 대부분의 일반인이나 라이트팬들은 하일성은 알아도 허구연은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다만 허구연 특유의 경상도 발음을 흉내내면 들어는 본적이 있다는 반응 정도. 본인에 말에 따르면 해설계의 2인자라는 이미지가 강했다고 한다.[15] 허나 사실 확실한 2인자라 말하기 조차도 어렵다. 다만 변화구 그립이나 해외야구의 흐름 등 접하기 쉽지 않은 지식을 전달해주는 역할을 하였기에, 당시 일부 젊은 야구팬층에서는 더 지지를 받기도 하였다.
2000년대 중반, 하일성이 KBO 사무총장에 임명되며 해설계를 잠시 비운 사이에도 허구연은 계속 야구중계를 하였는데, 많은 젊은 해설위원들과 비교되며 비판을 받기도 하였으나, 오랜 해설 경력과 국제 경기 중계에서의 좋은 반응, 그리고 국내의 열악한 야구 환경에 대한 거침없는 쓴소리로 많은 지지를 받아 해설계의 1인자 자리에 올랐다고 평가받기도 하였다.
2000년대 후반 하일성이 해설계에 복귀하고, 허구연 본인의 해설 방식에 대한 논란[16] 이 야구팬들 및 커뮤니티 사이에서 많이 부각되면서 2000년대 초중반기에 비해 그의 해설에 대한 선호도가 많이 떨어진 상태이다.
인터넷을 중심으로 한 야구팬들로부터 편파 중계가 '''매우 심하다'''고 평가받는다. 엘롯기 같은 팬이 많은 인기팀들은 상당히 편파적으로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는 반면, 샴셩 라이온즈, 하나 이글쓰, 에쑤께이 와이반슈, 녝쉔 히로즈 등은 상당히 편파적으로 마치 WBC같은 국제대회 때 일본戰에서 일본 팀 바라보듯 해설 중계한다는 원성이 많았다.
그래도 2014년에는 삼성 라이온즈도 호의적인 해설을 해 주는 편.
여담으로 LG에서 은퇴한 차명석을 해설가로 이끈 사람이기도 하다. 2014시즌 이후 FA가 되었지만 잔류했다. 또한 MLB, NFL를 한 '''손건영 해설위원'''도 해설가로 이끌기도 했다.
8. 기타
- 1991년 국내 최초 ARS 스포츠 정보 서비스 업체를 창업해서 성공을 했다.
- 2000년 일간스포츠와 함께 '허구연 야구발전 장학회'를 설립했다. 2002년에는 야구정보회사인 KSN주식회사의 대표이사로 취임했다.
- 2009년 MBC 연기대상에서 공로상을 받았다. 윤태영이 나온 주말 드라마인 2009 외인구단에서 구수한 해설을 한 공로로 받았다(…).
- 2010년 3월부터 일구회 부회장을 맡게 되었다.
- 2011년 7월 22일 목동 야구장에서 한국 고교야구 부흥 및 1976년 청룡기 대회의 재대결의 의미로 가진 군산상고와 경남고 레전드 리매치에서 경남고 감독으로 나왔다. 이날 경기는 경남고가 스코어 4:0까지 앞서다 5회에 들어와 군산상고가 단번에 4:4로 동점을 만든 뒤 다음 회에 역전, 결국 5:7로 경기가 끝났다. 5회에 동점을 허용했을 때의 감독 허구연의 표정은 심히 압권(…). 국내야구 갤러리에서는 그 표정 때문에 개념글에 갔다. 사나이 눈물.JPG , 허구라 고급 표정, 허구라 공황장애 , 요리왕 허구라 등(...) 어이없는 실책(나이생각하면 당연한 실책)이 나와서 놀라는 표정도 히트를 쳤다. 여담으로 이 레전드 리매치는 최동원이 살아 생전 대중들에게 마지막으로 모습을 보였던 행사였다.
- 야구에 대한 대중 해설서를 몇 권 집필한 적이 있다. '홈런과 삼진 사이', '허구연의 재미있는 야구교실', '프로야구 10배로 즐기기', '허구연의 야구', '여성을 위한 야구 교과서', '여성을 위한 야구 설명서' 등이 있다. 여느 스포츠들이 그렇듯 KBO 리그도 팬덤이 남초 성향에 가깝다보니 여성 팬들의 확충을 기대하고 책들을 집필한 것으로 보인다.
- 2020년 4월 7일부터 개인 유튜브 채널을 개설했다. 채널 이름은 구독허구연[17] 으로, 앞서 유튜브를 시작한 김선신, 박지영, 정용검과 함께 자축하는 영상을 찍기도 했으며,[18] 본인 특유의 발음을 적극적으로 살려서 영상을 제작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