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역사귀속과 계승인식
1. 개요
우선 이 문제에 대하여 유념해둘 점이 있다. 발해의 기원과 계승은 현재 한-중간의 역사적 문제로 비화된 상태다. 양국은 모두 제각기 발해를 자국의 역사로 설명하고 있다. 한국은 발해를 고구려 유민이 세워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라고 보고 있으며, 중국은 중국의 지방 정권의 형태로 발해를 이해하고 있다. 이 문서를 읽으며 주의해야 할 것은, 발해의 귀속의식 문제는 고구려의 귀속 문제와는 성격이 조금 다르다는 것이다. 고구려는 세계적으로 거의 명백히 한국사의 일부라고 인정되고 있으나, 발해는 그렇지 않다. 중국 역사의 일부라고 보는 시각이 없지 않은 것이다. 또는 발해는 한국과 중국 양국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만주 지역의 역사로 보는 지역사적 관점이 존재하기도 한다. 또 중요한 점은 발해사의 귀속성 논쟁 때문에 발해의 중국적 성격과 한국적 성격을 따지다보니 발해만의 독자적 성격을 논하지 못해선 안된다는 것이다.
2. 기원
2.1. 사서
2.1.1. 중국
2.1.1.1. 당서
한국에서는 일반적으로 흔히 발해의 지배층은 고구려인, 피지배층은 말갈인이라는 식으로 건국 세력이 고구려의 유민이라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지만, 사실 발해의 족원(族源)을 따지는 문제는 그리 간단치 않다. 왜냐하면 여러 사서에서 대조영이 말갈 출신 내지 말갈과 연이 깊은 인물임을 시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 신라와 발해는 충돌이 거의 없었지만, 당나라의 빈공과에선 라이벌 의식이 있었다.
《구당서(舊唐書)》 발해말갈전의 기록은 이렇다. 참고 자료.
《구당서》의 기록을 풀이하면, "발해말갈의 대조영은 고구려 지파 출신이라는 뜻이다.발해'''말갈''' 대조영은 본래 '''고려 별종'''이다.
渤海靺鞨大祚榮者 本高麗別種也
《신당서(新唐書)》 발해전의 기술은 이렇다.
《신당서》의 기록을 풀이하면, 대조영을 비롯한 대씨 왕족은 원고구려인이 아닌 속말말갈 출신으로 나중에 고구려에 복속하게 된 집단에 속하는 것이 된다. 한국에서는 흔히 《신당서》의 기록을 인정하지 않는데, 그것은 《구당서》의 기록과 다르다는 점 때문이다. 즉 《구당서》에는 "말갈족이 주축이 된 나라지만 건국자는 고구려인"이라고 사실에 충실하게 기록한 반면 《신당서》에는 "말갈족의 나라이며 지배층도 말갈인"이라는 식으로 일관성을 지키려고 했다는 것이다. 《구당서》와 《신당서》 중 《구당서》 쪽이 신뢰도가 높기 때문에 《구당서》의 기록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 한국 사학계의 일반적인 입장이다.발해는 본래 '''속말말갈'''로 '''고려에 더부살이하던 것들'''로서, 성은 대씨다.
渤海 本粟末靺鞨 附高麗者 姓大氏
하지만 중국 사학계는 《구당서》의 문장이 대조영을 '고려인'이라 하지 않고 '고려 별종'이라고 지칭한 점을 지적하고 있다. 즉, 그냥 '고구려인'이라면 굳이 '별종'이라고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한국 사학계는 '별종'을 '다른 종족[異種]'이라고 보는 것은 잘못된 해석이라고 반박한다. 백제나 고구려를 부여 별종이라고 한 것에서 미루어 알 수 있듯이 오히려 고구려에 대한 계승성을 나타내는 표현이라는 것이다. 수서에서는 백제를 고구려 별종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고고학적 연구 결과로도 충분히 증명되거니와 건국 설화 등을 볼 때 고구려 지배 세력이 부여에서, 백제의 지배 세력이 고구려에서 나왔다는, 최소한 아주 강한 친연성을 가진 일족이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적어도 '별종'으로 표현한 이유가 고구려와의 차별성뿐만 아니라 연결성을 강조할 수 있는 이중 표현의 의미란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구당서》의 찬자가 대조영의 출신지를 고구려의 '본류'[1] 로 생각하지 않고 일종의 '지류'[2] 로 취급했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또한 대조영에 대해서는 단순한 계승을 나타내는 표현으로만 볼 수 없는 것이 '본래[本]' 고려 별종 즉 고구려 지파 출신이라고 하여 건국 이전부터 대조영이 고구려와 분리시켜서 볼 수도 있는 어떠한 집단의 소속임을 강하게 시사하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구당서》의 같은 기사에서 대조영이 나라를 세운 후 모여든 고구려 유민에 대해서도 '고려 별종'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다.
《신 / 구당서》에, 영주를 탈출할 때 걸걸중상이 걸사비우와 더불어 거느렸던 집단이, 말갈인들이 아닌 고구려 유민으로 나와 있는 것도, 걸걸중상이 말갈계가 아닌 순수 고구려계 사람이었거나 말갈계라고 하더라도 이미 말갈인과 따로이 고구려 유민들을 친솔할만큼 고구려에 동화된 사람일 가능성에 힘을 실어준다.
《구당서》의 기록에는 "각자 망명자를 거느리고"라고만 나와 있어 영주 탈주 당시 걸걸중상 - 대조영 계열 지도부의 통솔을 받았던 세력의 정체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으나,萬歲通天年,契丹李盡忠反叛,祚榮與靺鞨乞四比羽各領亡命東奔,保阻以自固。
만세통천년(萬歲通天年 : 696년)에 거란(契丹)의 이진충(李盡忠)이 반란을 일으키자, 대조영은 말갈의 걸사비우(乞四比羽)와 함께 각자 망명자를 거느리고 동쪽으로 달아나서 스스로를 굳게 지켰다.
《신당서》에는 보는 바와 같이 그 대상이 고구려 유민[高麗餘種]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공동 지도자였던 걸사비우가 말갈 추장[靺鞨酋]으로 나와 있다는 점에서 걸걸중상은 고구려 유민을, 걸사비우는 말갈족을 이끌었다는 해석도 있다. 《구당서》의 각자 거느렸다[各領]라는 표현을 감안하면 충분히 개연성 있는 해석이긴 하다. 아무튼 분명한 것은, 중국 정사에서 걸걸중상이 이끈 것으로 확인되는 집단은 어디까지나 고구려 유민이었지 속말 말갈이든 뭐든 말갈은 아니었다는 점이다.萬歲通天中,契丹盡忠殺營州都督趙翽反,有舍利乞乞仲象者,與靺鞨酋乞四比羽及高麗餘種東走,度遼水,保太白山之東北,阻奧婁河,樹壁自固。
만세통천 중에 거란의 이진충이 영주 도독 조홰(趙翽)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키자, 사리(舍利) 걸걸중상(乞乞仲象)이라는 이가 말갈 추장 걸사비우 및 고구려 유민과 함께 동쪽으로 달아나서 요수(遼水)를 건넜는데, 태백산(太白山) 동북쪽을 차지하고 오루하(奧婁河)를 막아 성벽을 쌓아서 스스로를 굳게 지켰다.
이상의 기록들에 대한 합리적인 해석은 1. 걸걸중상과 걸사비우가 각기 다른 고구려 유민 집단을 이끌고 영주를 탈출했다거나 2. 걸걸중상은 고구려 유민 집단을, 걸사비우는 말갈족 집단을 이끌고 영주를 탈출했다거나 둘 중 하나이지, 걸걸중상이 말갈족 집단을 이끌고 영주를 탈출했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게다가 《신당서》에서 걸사비우에 대해서만 굳이 따로 말갈 추장이란 표현을 사용한 것은 걸걸중상이 그와 같은 신분이 아니었음을 시사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설령 걸걸중상이나 대조영이 말갈이었어도 이들은 고구려의 계승을 일컬으며 발해를 세웠다. 그만큼 고구려인이란 정체성을 지니고 있었던 셈이니 종족과 계승성 문제를 연결짓는 것은 사실상 무의미하다고 할 수 있다.
구당서 현종본기의 태산 봉선의식의 '조회하러 온 외국'에 신라, 일본과 함께 말갈이 있는데 발해로 추정된다.
2.1.1.2. 통전
《통전》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이다. 그 우두머리인 대조영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스스로 진단(震旦)이라고 불렀다. 선천(先天) 연간[당나라 현종 임자년(서기 712년)이다.]에 비로소 말갈이라는 국호를 버리고 오로지 발해라고만 불렀다. 개원(開元) 7년[기미, 서기 719년]에 대조영이 죽자 시호를 고왕(高王)이라고 하였다.
2.1.1.3. 송사
발해부흥운동의 정안국이 송사에 마한의 한 종족이라는 기사가 나온다. 삼국시대 때부터 고구려의 별칭으로 한#s-1, 삼한, 마한, 변한 등이 있었음을 생각하면 흥미로운 대목이라 할 수있다.[3]정안국(定安國)은 본래 마한(馬韓)의 한 종족이다. 거란(契丹)에게 공파되자 그 서비(西鄙)를 지켰다.
定安國本馬韓之種.
爲契丹所破 保其西鄙.
송사(宋史) 정안국전(定安國傳)
2.1.1.4. 금사
《금사(金史)》에서 등장하는 발해 관련 기술.
金之先,出靺鞨氏。靺鞨本號勿吉。勿吉,古肅慎地也。元魏時,勿吉有七部:
曰粟末部、曰伯咄部、曰安車骨部、曰拂涅部、曰號室部、曰黑水部、曰白山部。
隋稱靺鞨,而七部並同。唐初,有黑水靺鞨、粟末靺鞨,其五部無聞。粟末靺鞨始附高麗,姓大氏。>李績破高麗,粟末靺鞨保東牟山。後爲渤海,稱王,傳十餘世。
금의 선조는, 말갈씨(靺鞨氏)에서 나왔는데, 말갈은 본래 물길(勿吉)이라 불렀다. 물길은 옛날 숙신 땅이다.
원위(元魏) 때, 물길은 7부가 있었는데, 말하길 속말부(粟末部), 말하길 백돌부(伯咄部), 말하길 안차골부(安車骨部), 말하길 불열부(拂涅部),
말하길 호실부(號室部), 말하길 흑수부(黑水部), 말하길 백산부(白山部)이다.
수(隋)가 말갈이라 칭하였는데, 7부는 모두 같다.
당(唐) 초에, 흑수말갈과 속말말갈이 있었는데, 그 5부는 듣지 못 했다.
'''속말말갈'''은 처음에 고려(高麗)에 속하였는데, 성(姓)은 대씨(大氏)다.
이적(李績)이 고려를 파하자, 속말말갈은 동모산(東牟山)을 차지하였다.
후에 발해(渤海)를 다스리고, 왕을 칭하였으며, 십여세를 전하였다.
2.1.2. 한국
2.1.2.1. 사불허북국거상표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최치원이 쓴 글이다. 최치원은 당나라 황제에게 올린 글 "발해(渤海)가 신라의 윗자리에 거함을 불허함을 사례하는 표(사 불허 북국 거상 표, 謝不許北國居上表)"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참고 자료 이 글은 최치원이 쓰기는 했는데, 신라 왕이 당나라 황제에게 보내는 국서의 형식이다. 따라서 당시 신라의 공식적인 견해라고 해도 무방한 것이다.
이 글에서는 발해의 원류를 말갈이라 말하는 동시에 고구려에 내사(內徙) 즉 들어갔다고 하여 발해의 모체가 고구려의 일부였음도 밝히는 이중적인 시각을 드러내고 있다.臣謹按渤海之源流也。句驪未滅之時。本爲疣贅部落。靺羯之屬。寔繁有徒。是名栗末小蕃。嘗逐句驪內徙。其首領乞四羽及大祚榮等。至武后臨朝之際。自營州作孼而逃。輒據荒丘。始稱振國。
발해(渤海)의 원류(源流)는 고구려(高句麗)가 망하기 전엔 본시 사마귀 만한 부락(部落)으로 말갈(鞅鞨)의 족속이었는데 이들이 번영하여 무리가 이뤄지자 이에 속말(粟末) 소번(小蕃)이란 이름으로 항상 고구려를 좇아 내사(內徙)하더니, 그 수령 걸사우(乞四羽) 및 대조영(大祚榮) 등이 무후(武后) 임조(臨朝) 때에 이르러, 영주(營州)로부터 죄를 짓고 도망하여 문득 황구(荒丘)를 점거하여 비로소 진국(振國)이라 일컬었나이다.
2.1.2.2. 태사시중께 드리는 편지
《삼국사기》 최치원전의 '태사시중께 드리는 편지[上太師侍中狀]' 중.
발해의 건국 세력을 고구려 잔당[高句麗殘孽]으로 표현했다.총장(摠章) 원년(서기 668)에는 영공 이적(李勣)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격파케 하고 안동도독부(安東都督府)를 설치하였으며, 의봉(儀鳳) 3년(서기 678)에 이르러 그 사람들을 하남과 농우(隴右)에 옮겼습니다. 고구려의 남은 무리들이 모여 북으로 태백산(太白山, 백두산) 아래를 근거지로 하여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발해(渤海)라고 하였습니다.
2.1.2.3. 삼국유사
《삼국유사》에서는 〈기이(紀異)〉 제1 '말갈·발해' 편에서 발해를 다루고 있다. 주석에 인용한 신라의 고기(古記)에는 대조영을 고구려의 옛 장수, 즉 구장(舊將)으로 말하고 있으나, 인용자인 일연 본인의 개인 의견[按]으로는 발해를 말갈의 '별종'으로 간주했다.
여기서 '별종'이라는 표현을 중국 학자들의 주장처럼 '혈통적으로 관련이 없는 별개의 집단'으로 보게 되면 발해는 말갈의 '분파'나 '후계 집단'일 수 없게 된다.新羅古記(신라고기)에, 高句麗(고구려)의 舊將(구장) 祚榮(조영)의 姓(성)은 大氏(대씨)니, 殘兵(잔병)을 모아 나라를 太伯山南(태백산남)에 세우고 國號(국호)를 渤海(발해)라 하였다 한다. 以上(이상) 諸記事(제기사)를 보면 渤海(발해)는 靺鞨(말갈)의 別種(별종)인바, 다만 開合(개합)함이 같지 않았을 뿐이다.
위 서술에 대해 '말갈·발해'라는 편명을 강조하여 신라에서 발해=말갈로 인식했다고 보는 의견도 있으나, 그와 같은 편명은 어디까지나 고려 사람인 일연이 임의로 붙인 것일 뿐이다. 그와 별개로 인용한 신라 당대의 기록은 엄연히 대조영을 고구려인으로 표현한만큼, 그러한 편명을 신라인들이 발해가 고구려에서 기원했다는것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증거로 취급할 수는 없다. 이는 최치원의 '사불허북국거상표'의 嘗逐句驪內徙 운운과 상통하는 것이기도 하다. 만약에 新羅古記를 '신라(新羅)의 옛 기록[古記]'이 아닌 고려 시대에 편찬된 신라 역사서의 제목으로 본다면 이는 고려인들이 발해를 고구려의 후계국으로 봤다는 증거가 되며, 이는 고려 사회에 발해의 원류를 일연의 按과 다르게 보는 시각이 있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결정적으로 일연이 발해를 말갈 국가로만 보고 고구려와는 무관한 존재로 여겼다면, 기본적으로 고려의 전사(前史)를 다루고 있는 〈기이〉편에서 다룰 리가 없다. 고려인들은 숙신-읍루-물길-말갈-여진으로 이어지는 퉁구스계 여러 종족에 대해 한 번도 동족 관념을 표출한 바가 없고 따라서 이들의 역사를 자국 역사의 일부로 취급한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4]
2.1.2.4. 고려사 절요
《고려사절요》에서의 발해와 대조영.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인데 건국 주체는 고구려에 속했다는 것. 이러한 관념은 '사불허북국거상표'에서 나온 발해의 기원관과 동일하다.발해는 본래 속말말갈(粟末靺鞨)인데, 당 나라 무후(武后) 때에 고구려 사람 대조영(大祚榮)이 달아나 요동(遼東)을 지키니 당 나라 예종(睿宗)이 발해군왕(渤海郡王)으로 봉하였다. 그 뒤에 스스로 발해국이라 일컬으며 부여(扶餘)ㆍ숙신(肅愼) 등 10여 나라를 아울러 다 차지하고 문자ㆍ예악(禮樂)과 관부(官府)의 제도를 세웠다.
2.1.3. 일본
발해 왕 대무예가 부여의 풍속을 이어받았다고 일본에 밝힌바가 있다.
2.1.3.1. 속일본기
발해 측은 국서에 스스로를 ‘고려국왕(高麗國王)’이라고 칭했다. 그리고 "발해가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고 부여의 풍속을 간직하고 있다(復高麗之舊居 有夫餘之遺俗)"라고 하였다.
2.1.3.2. 유취국사
지배층인 고구려계가 소수이고, 피지배층인 말갈계가 다수였다는 식의 기록은 기본적으로 일본 사서인 《유취국사》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 부분만 봐도 단순히 고구려계 소수설을 확정하기가 쉽지 않다. 어느 시대의 이야기인지, 에이츄(泳忠, 永忠)는 발해에 대해서 얼마나 알았는지, 어느 길을 지나서 왔는지 등이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당시 발해의 수도인 상경용천부와 일본으로 가는 동경용원부의 항구[6] 를 잇는 일본도는, 옛 고구려의 최변방으로서 원(原) 고구려인의 비중은 비교적 낮고 말갈을 비롯한 비고구려계 종족이 많이 살았던 지역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당서》는 용천부는 숙신의 옛 땅으로, 용원부는 예맥의 옛 땅으로 기록했다. 숙신이든 예맥이든 발해 건국기에 존재했던 종족은 아니지만, 그 후손이거나 친연성이 강한 집단이 거주했다고 보면 될 것이다.[7] 일본 사신인 에이츄는 당연히 이 일본도를 지났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에이츄가 본 발해의 풍경은, 숙신의 후손일 가능성이 있는 불열(拂涅)말갈이나, 예맥에 속하는 부여·옥저계가 많이 살았던 두만·무단(牡丹) 강 유역 일대, 즉 동부 발해의 모습일 가능성이 높다.또 재당학문승 에이츄 등이 덧붙여 보낸 글을 받들어 전하였다. 발해국은 고려의 옛 지역에서 일어났는데, 아메미코토히라카스와케노스메라미코토(덴지 덴노) 7년 고려왕 고씨가 당나라에 의해 멸망했으며, 그 후 아메노마무네토요오호지노스메라미코토(몬무 덴노) 2년 대조영이 비로소 발해국을 세웠다. 화동 6년에 당나라에서 책립받았다. 그 나라는 사방 2천리이며, 주, 현과 관역이 없으며, 곳곳에 촌리가 있는데 모두 말갈 부락이다. 그 백성은 말갈인이 많으며, 토인(土人)[5]
은 적다. 모두 토인이 촌장이 되었으며, 대촌에는 도독, 다음에는 자사이며, 그 아래는 백성들이 모두 수령이라 부른다. 토지는 극도로 춥고, 논이 마땅치 않다. 자못 풍속에 글을 안다.又傳奉在唐學間僧泳忠等所附書, 渤海國者高麗之故地也. 天命開別天皇七年, 高麗王高氏爲唐所滅也. 後以天之眞宗豊祖夫天皇二年大祚榮始建渤海國, 和銅六年受唐冊立. 其國延袤二千里, 無州縣官驛, 虛虛有村里, 皆靺鞨部落. 其百姓者, 靺鞨多, 土人少, 皆以土人爲村長, 大村日都督, 次日刺史, 其下百姓皆日首領, 土地極寒, 不宣水田,俗頗知書.
이와 같이 고구려 유민의 구성비도 대조영 시기, 문왕과 무왕 시기, 흑수 말갈을 흡수한 이후 등을 모조리 고려해야 한다. 또한 고구려 멸망 이후 사람들이 어떻게 움직였는가를 추측해야 한다. 이 단계로 나가지 못했기 때문에 《유취국사》 내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봐도 좋을 정도. 중국의 동북공정의 연구 보고서는 고구려 인구를 거의 모조리 당나라로 잡아가서 과거 고구려 영역이 무주공산 지경으로 변했다는 수준으로 표현하고 있다.[8]
애초에 말갈이라는 말이 당대인들이 자신들을 일컬어 사용한 말이 아니라, 부르는 쪽에서 편한 대로 지어 부른 것이며 고구려 변방민을 가리키는 범칭· 비칭이라는 주장도 존재한다. 최치원이 사용한 발해 말갈이라는 표현도 그러한 비하 의식과 관련되어 있다는 추측도 있다. 최치원이 쓴 '사불허북국거상표'은 기본적으로 발해를 비방할 목적으로 작성되었기에 걸러 들어야 할 필요도 있다는 것이다. 고구려와 말갈 양 집단 모두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국가라면, 당연히 중국의 통일 왕조와 당당히 맞서 여러 번 승리를 거둔 고구려보다는 야만인 취급을 받는 말갈과 연관성을 강조하는 것이 그러한 목적을 이루는 데 유리할 것이기 때문이다.
2.2. 말갈 비칭설
사서에서 언급된 말갈의 의미에 대한 문제이다. 당시 말갈에 대해 다방면으로 생각해보아야 한다.
중화중심의 역사관은 대부분의 이민족은 중국 왕조에서 붙여준 타칭으로 기록되어져 있다. 말갈의 최초 조상은 숙신으로 이들은 진 이전의 종족이다. 이들이 한대에는 읍루였고, 남북조시대 후위에는 물길 그리고 수·당대에는 말갈이라 불린 것이다. [9] 참고 영상
한규철 교수는 말갈이란 종족적인 측면에서 기록상의 말갈로 불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구려와 발해인을 의미하며 고구려와 다른, 현대에 인식되는 전통적인 말갈이란 흑수말갈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현재 중국에서는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발해의 시조인 대조영과 피지배계층이 말갈인이었다하여 발해는 고구려를 잇는 계승국가가 아니라는 주장을 펼치는 중이다. 여기서 대조영은 과연 말갈인이었는가에 대한 의문은 위의 항목에 나와 있는 구당서에서는 이미 대조영을 고려별종이라 칭하고 있듯이 그는 말갈계 고구려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평양"으로 돌아가게 하였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는 고구려군이란 단순히 고구려의 군대가 아닌 평양사람으로 보아야 마땅한데 만약 저 고구려군이 고구려의 군대를 뜻하는 것이라면 "고구려"로 돌려보냈다고 하는 것이 맞기 때문이다.당나라 황제가 안시성에 진군하여 치니, 북부 욕살 고연수(高延壽)와 남부 욕살 고혜진(高惠眞)이 고구려군과 말갈병 15만을 거느리고 안시를 구하려 하였다. (중략) 연수와 혜진은 그 무리 3만 6천 8백 명을 거느려 항복을 청하고 군문(軍門)에 들어와 엎드려 절하며 명을 청하였다. 당나라 황제가 욕살 이하 관장(官長) 3천 5백 명을 가려서 (당의) 내지로 옮기고 나머지는 모두 놓아 평양으로 돌아가게 하고, 말갈 사람 3천 3백 명은 거두어서 모두 구덩이에 묻어 죽였다.
'''『삼국사기』 권21, 고구려본기9 상'''
비슷한 예로 경순왕 9년, 신라를 고쳐 경주로 했다는 기록을 보아 신라가 곧 경주라 생각했음을 알 수 있는데 이와 같은 맥락에서 "고구려 = 평양"으로 보았다는 점이다.
결론적으로, 발해의 주민은 발해 건국 30년 전에 멸망한 고구려인들이 그대로 그 지역의 주민으로서 발해인이 된 것이고 그 당시 흑수말갈을 제외한 말갈인이라 불린 주민들은 고구려와 다른 종족이 아닌 고구려 변방민을 멸시적인 호칭으로 부른 것이다.[10][11]
하지만 이 주장대로면, 물길과 말갈의 외교 기록은 고구려 중앙정부가 변방민 하나 통제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고, 속말말갈과 고구려의 전쟁, 이로인해 궐계부를 중심으로 한 속말말갈 8부가 수나라로 이탈한 점은 변방민이 중앙정부와의 싸움에서 패하여, 그 일부가 중국으로 망명한 것이다.
의견들을 종합해 보면 말갈 부족들과 고구려는 기본적으로는 정치적으로 이질적인 집단이었으나 고구려의 통치체제 아래 변방민으로 있었던 기간이 있었고, 이 기간동안 고구려의 직간접 지배를 통해 고구려인 정체성을 형성한 [12] "말갈계 고구려인"들이 일부분 존재한다는 것이다.[13] 그리고 해당 집단이 고구려 정체성을 가지고 발해를 세웠다는 것이다.
2.3. 고분
고구려의 석실은 독특한 천장형태로 유명하다. 궁륭형이라 불리는 아치형 천장에서 시작하여서 모서리가 있는 절천정형 천장, 집모양을 딴 맞배지붕형 천장, 고임천장, 고임천장 가운데서도 삼각고임, 평행고임이 있으며 고임천정의 형태는 이중, 삼중으로 다양하게 나타난다.
고구려가 멸망할 즈음의 고구려 석실들은 대부분 삼각고임과 평행고임이 이중으로 베풀어진 양상의 천장을 보이고 있다. 발해의 고분에서도 이와 마찬가지로 삼각고임과 평행고임을 조합한 천장으로 축조하며, 벽화의 재제 또한 고구려 멸망시점의 벽화들과 같은 주제로 그려진다. 구조적으로도 초창기의 발해 고분은 고구려 고분과 거의 같다.
발해가 고구려인들과 말갈인으로 구성되어있지만 분명 '''고구려의 별종인 말갈'''이라고 되어있는 것처럼 발해의 초기 고분문화도 고구려의 고분문화와 거의 같고 사실상 계승하고 있는 것이다.
2.4. 결론
결국 발해는 당대와 직후의 시대를 다룬 송과 고려에 이르기까지 '''고구려의 후예'''임이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나라였다. 중국 측에서는 인종적으로 "말갈인"이라는 이유로 발해를 고구려와는 별개의 나라라고 정의하나, 상기한대로 자타칭 고구려의 계승자로 인정되었으며 고구려 문화도 계승하였다.
이런 케이스는 의외로 역사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 극히 일부 만주인계 지배층과 대다수 한족계 피지배층으로 이루어져있던 청나라의 경우가 바로 이런 케이스다.[14]
3. 계승
3.1. 현대
3.1.1. 남북한
남북한 모두는 역사 교과서에 발해를 자국의 고대사의 영역으로 다루고 있다.[15]
발해나 고려 모두 고구려의 후신국임을 천명했기 때문인지 가끔씩 누가 진짜 후신국인지를 가지고 키배를 벌이는데, 둘모두의 정통성을 인정하는 사람들은 중국의 전한-후한-촉한과 같은 관계를 비유로 설명한다. 이중 발해는 후한의 경우에 해당되는데 일단 후한의 전신인 전한이 중원을 200년이상 통치하며 존재감을 과시했듯이 발해의 조상국인 고구려 역시 한반도 북부 요동 요서 지방을 700년이상 다스리며 존재감이 묵직하던 나라였고 게다가 후한은 전한이 멸망한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서 광무제라는 희대의 영웅이 나타나 각지의 군벌을 격파하고 후한을 건국했듯이 발해 역시 대조영이라는 희대의 리더가 나타나 유민들을 통합하고 천문령전투에서 당나라군을 격파하고 발해를 건국한 점도 비슷하다.
게다가 멸망 이후의 일도 비슷한데 후한이 멸망한 이후에는 후한을 멸망시킨 위나라가 세워지고 그리고 또한쪽에서는 후한의 시조인 광무제와 같은 한나라 황족인 유비가 위나라의 탄압을 피해 도망친 후한의 이주민들을 바탕으로 후한의 형제국인 촉한을 건국했다. 위나라는 중원을, 촉한은 익주지방을 점거하며 두나라는 서로를 원수취급했고 조상의 땅을 수복하려는 촉한과 이를 저지하던 위나라는 40년동안 서로 피튀기는 전쟁을 계속했다.
발해 역시 멸망한 후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이 요를 건국했고 또한쪽에서는 대조영과 같은 고구려유민의 후손이자 고구려계 호족인 왕건이 고려를 건국했고 요는 발해의 영토인 요동, 요서, 연해주 지방을 차지했고 고려는 발해의 남방영토인 평안도 일대를 비롯한 압록강 이남 일대의 영토를 차지했고[16] 두나라 역시 서로를 원수취급하며 끝내는 27년이 넘는 전쟁을 치르고 말았다.
형제국들의 운명도 비슷한데 촉한, 고려 모두 전한/후한, 고구려/발해의 영토를 차지하기위해 노력했지만 끝내는 국력의 한계로 실패한점 역시 비슷하다. 다만 고려는 동북9성과 제1차 요동정벌을 통해 아주 일시적으로 대업을 완수한 적이 있다.
3.1.1.1. 남한
한국은 상당기간 국사교육에서 발해의 시대를 통일신라시대와 발해로 가르쳤으나 2000년대 들어 남북국시대로 시대명을 바꾸어 발해를 이전보다 조금 더 강조하고 신라가 통일을 한것이 맞기는 하지만 불완전한 통일이였다고 해석하고 있다.[17]
다만 발해의 강역은 현재 대한민국이 실효지배하고 있는 영역이 없어 지역적 계승의식은 고사하고 고고학적 연구는 사실상 어려운 형편이다. 다만 발해와 일본의 해상로를 재현하는 연구는 몇차례 시도 되었다.
3.1.1.2. 북한
북한은 남한이 백제, 신라의 강역과 조선왕조의 수도인 서울을 점유하고 있는 역사적 정통성에 대비되어 고조선, 고구려의 강역과 고려의 수도인 개성을 점유하고 있는 지역적 특성으로 인해 고조선-(부여)-고구려-(발해)-고려-조선-북한을 잇는 계보를 강조한다. 그래서 고조선이나 고구려나 만큼은 아니더라도 북방에 있었고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를 중요시 여기고 있다.[18]
북한 학계에서는 '후기신라'라는 명칭을 본격적으로 사용했고, 초기에는 신라가 당과 결전을 벌여 이를 몰아낸 사실을 적극적으로 평가하다가 1960년대 이후부터는 발해사를 강조하고 신라통일론을 부정하였다. 나중에 가면 오히려 더 발해에 비중을 두는 식으로 전개가 되었다.
3.1.2. 중국
2005년부터 중국은 옛 상경 성터 출입을 통제하고[19] 발해의 궁성(宮城)을 복원하는 작업을 실시했는데, 2008년 복원이 완료된 상경의 궁성이 발해 궁성인지 당 장안성(長安城)의 궁성인지 알 수 없을 정도다. 당시 장안성의 구조나 건축 양식은 동아시아 전반에 걸쳐 영향을 미쳤으며, 발해의 유물들 또한 당풍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측면이 드러나기 때문에 당의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이 사실이다. 발해뿐만 아니라 신라의 금성이나 일본의 헤이안쿄도 당나라의 장안성에서 영감을 많이 받았다.
또 발해의 한반도 영역인 평안도와 함경도 지방은 그 나라의 중심 지역이 아니었고, 발해의 5경 중에서 4경은 엄연히 만주에 존재했다. 그리고 그 4경의 위치는 현재 중국 영토로 비정된다. 한반도에 속하는 곳은 남경남해부 하나뿐이다. 또 고려·조선의 사가들은 발해에 대해 고구려만큼 일관적으로 자국사로 다루지 않았으며, 발해를 '우리 조상'이라기보다는 '우리 조상인 고구려의 또다른 후손'이라는 관점으로 바라보는 태도가 일반적이었다. 꼭 고구려 후손으로 본 것만도 아니고 말갈의 '별종'이라는 인식도 공존했다. 이런 점들을 본다면 발해사의 중국사 편입을 꼭 '역사 왜곡'으로 치부할 수만도 없다.
그렇다고 발해사를 중국사로만 한정해서 보기도 어렵다. 고구려인보다 말갈족이 주체였다고 하더라도, 발해는 중원 국가를 표방하지 않았고, 한족이 주체인 나라도 아니었던만큼 중국사에 포함될 건덕지란 그냥 만주의 옛 나라 겸 말갈족의 후손 중 하나가 현대 중국의 소수민족이라는 점 뿐이다. 그런데 퉁구스계인 말갈 후손들은 만주족만 있는 것도 아니고, 만주에만 잔존하다가 중국에 흡수된 것이 아니라 연해주·한반도·몽골 지역에도 퍼져 나가 그곳을 영유한 국가의 구성원이 되었던만큼 로마제국처럼 다국이 공유하는 공동의 역사가 아니라 "말갈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소수 민족인 만족의 선대 집단이므로 말갈의 역사는 곧 중국의 역사이며 따라서 발해는 중국사의 일부다."라고 말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중·근세 한반도 왕조에서 발해사를 일관적으로 자국사로 기록한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중국 통일왕조의 경우에는 아예 발해사를 최근세까지 일관적으로 자국 역사에서 제외하여 외국·이역 열전에 기록했다. 1778년의 만주원류고에 와서야 자국사로 취급한 것인데, 이것도 중국의 전사(前史)가 아니라 만주족의 전사로 다룬 것이다. 발해의 후손들이 현재 중국 영토에 가장 많이 남아 있을 것이라는 것도 막연한 추정일 뿐, 명확한 당대의 통계나 유전자인류학적 분석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후대 한국사에 발해가 끼친 영향이 크지 않다지만 그런 식으로 따지면 중국사에 끼친 영향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중국이 단순히 자국의 지방사나 자국 내 소수민족의 역사로서 말갈사를 다루면서 발해를 언급한다면 몰라도 문제는 중국 학자들이 발해의 독자성을 무시하고 자국의 중앙정부가 설치한 변방 지역 통치 기구 정도로 취급한다는 것, 더 나아가 국제적인 공동 연구를 가로막고 현재의 세 나라에 걸쳐 존재했던 고대 왕조의 역사를 배타적으로 점유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전근대에는 발해의 역사가 극소수 역사가들의 관심을 끌거나 단편적으로 언급되는 수준이었다. 한반도나 중국의 왕조가 국가적으로 발해사에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주목하여 발해 역사서를 편찬하고 대대적으로 자국사로 끌어안으려는 시도를 한 적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20세기 이후 내셔널리즘이 대두되면서 발해사를 배타적으로 점유하기 위한 동북아시아 각국의 대립이 심화되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중국의 경우 민족구성을 연구한 논문까지 발표하며 발해를 말갈-여진-금-청 으로 이어지는 중국사의 일부로 편입시키고 있다. 다만 밑의 링크를 타고 들어가봐도 보이지만 일본에서는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점은 인정하고 있으며 일본 사학계에서도 대체로 인정하고 있다. 일본어 위키백과에서는 한국사로 서술하기도 했다. 그 시대를 '통일신라 시대 혹은 남북국 시대'라고 지칭했다[20]
다음은 중국의 대표적인 교과서 제작사인 인민교육출판사의 중학교 1학년(初一) 역사 교과서에서 발췌한 발해 관련 내용이다. [21]
[image]
발해가 중국 영토로 표시되어 있다.
[image]
주요 내용: 말갈이 건국한 국가이다.. 당나라 문화의 영향을 받아 제법 높은 문화를 이룩하였다. 당에 왕자를 유학 보내기도 하였다. 수도인 상경부는 장안을 베껴 만들었다. 농업 등의 별 시덥잖은 이야기도 다 나와 있으나, 고구려나 한반도와의 관련성 및 계통성에 대해선 언급이 없다.
발해는 말갈족 수령 대조영이 건국한 말갈족 나라이다… 일본과 교류 시 스스로를 "고려국"이라고 칭하였으나 학자들은 이 명칭이 일본에서 일방적으로 부른 명칭으로 보고 있다. 중국 바이두 백과』[22]
3.1.3. 일본
8~10세기, 퉁구스계 말갈족 대조영이 건국한 나라이다.
일본 goo 사전[23]
일본은 발해를 대체적으로 한민족 계열의 국가보다는 만주족계열의 역사로 보고 있다. 다만 일본어 위키백과에는 한국어 발음도 병기되어 있는 걸로 보아 경계사 정도로 보는 해석이 우세한 편이다. 사실 일본은 발해의 귀속 문제에 별 관심이 없는 편이다.[27]퉁구스계 말갈족 대조영 고구려를 계승하며 건국한 나라이다.
일본 세계사의 창문 [24]
[25][26]
3.1.4. 러시아
러시아와 일본 사학자들은 발해를 강제 이주한 고구려인들의 왕국이며 중국과는 독립적인 정치 체제로 간주한다.
러시아는 발해를 연구할때 단순히 변경지역 역사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 아닌 중앙아시아와 연계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발해와 소그드인 간의 실크로드 무역 관련한 부분은 한국어 관련 연구 자료보다 러시아쪽 자료가 더 많다(...)Scholars from South and North Korea, Russia and Japan assert that Balhae was independent in its relations with the Tang Dynasty. Most Russian archaeologists and scholars describe Balhae as a kingdom of displaced Goguryeo people. They do admit that Balhae had a strong Chinese and Central Asian influence.
남한과 북한, 러시아 그리고 일본의 학자들은 발해가 당과는 별개의 독립적인 왕국이었다고 주장한다. 대부분의 러시아 고고학자들과 석학들은 발해를 고구려 유민들의 국가라고 설명하지만, 동시에 당과 중앙아시아의 강한 영향을 받았음을 인정하고 있다.
『영어 위키피디아 Balhae 부분』
3.1.5. 서구권
영문 위키백과에서는 한국 역사로 처리되어 있으며, 고구려 유민과 말갈의 연합으로 성립되었다고 서술되어있다.
이외에도 서구권이나 터키에서는 보통 발해를 한국의 역사로 보는 반면, 동구권에서는 중화주의의 영향을 받았는지 중국의 역사로 보는 편이다.
예를 들어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등 서구권에서는 발해(Balhae)로 표기하는 반면, 러시아,우크라이나등 동구권에서는 주로 발해의 중국식표기인 보하이(Бохай)로 표기된다[28] . 2019년에 러시아측에서 한국 측에서 적극적으로 발해의 러시아어 변경 표기에 나선다면 러시아 학계에서도 이를 검토하고 바꿀 수 있다고 밝혔다.#[29]
3.2. 현대이전
3.2.1. 한국
3.2.1.1. 고려
발해 멸망 이후 왕세자로 추정되는 대광현 외 대화균, 대균로, 대원균, 대복모, 신덕, 대심리 등 다수의 발해 관료와 수 만의 발해 백성이 고려에 귀부하였으며, 고려는 그들을 우대하여 조상들의 제사가 끊어지지 않도록 해주었고, 대광현에게는 왕씨를 사성하고 새로 이름을 하사하여 왕계(王繼)[30] 라는 새 이름으로 살게 하였다.
일각에서는 대광현의 투항을 두고 고려가 고구려 계승 의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의 후신인 발해의 유민을 적극 포용한 결과로 해석하기도 한다. 만부교 사건를 봐도 초기 고려가 기본적으로 발해를 기본적으로 우호 국가로 인식했음은 분명하다. 고려 시대에는 발해에 대해 계승·동류 의식을 표방한 바가 전혀 없다가 조선 시대에 이르러서야 자국의 역사 체계에 편입시켰다거나, 고려가 고구려 계승을 천명했기 때문에 발해의 존재를 부담스러워 했다는 식으로 말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낭설일 뿐이다.
고려 정부에서는 발해의 역사를 공식적으로 편찬한 바는 없다. 다만 발해멸망 이후 고려로 내투하는 발해유민들 중에서 발해의 역사서를 가져왔을 가능성은 있다.[31] 하지만 당시 고려는 후삼국으로 인하여 후백제와 혈전을 벌이고 있었고, 실제로 왕건이 죽을 뻔한 적도 있었다. 또한 후삼국을 통일한 직후에는 왕건의 아들들의 왕위계승 분쟁과 권력다툼으로 인하여 내부가 혼란상태였고, 광종때 호족탄압정책으로 인하여 겨우 수습이 되었으나, 이후에는 그동안 미루었던 내치에 신경쓰다보니 발해의 역사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그 과정에서 거란의 침입까지 받으면서 고려실록 등의 자국의 역사서마저 소실되어 전후에 소실된 사서를 재편찬하고 복구하느라 발해의 역사에는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32] 물론 그 과정에서도 살아남은 발해관련 기록들이 있었을 지도 모르지만 몽고와의 전쟁에서 소실됬을 가능성도 높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고려 내에서도 발해에 대한 인식이 희미해져갔고 그로 인해 발해에 대한 기록이 매우 부족해져 버렸기 때문에, 유득공은 이를 두고 고려를 비판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일연의 《삼국유사》는 고려 이전의 왕조들에 대한 일종의 통사로서 작성된 기이(紀異) 편에서 발해를 다루고 있으며, 이승휴의 역사 서사시 《제왕운기》에서도 한국사를 다룬 하권에 후백제 다음에 발해를 언급함으로써 자국의 역사임을 분명히 했다.
고려의 시조인 왕건부터 발해를 두고 "본디 우리 친척 나라[本吾親戚之國]"[33] 라고 언급한 적도 있다. 이를 두고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실제로 고려 왕실이 발해와 혼인 관계를 맺은 것으로 보는 학자도 있지만,[34] 일반적으로 그 발언은 고려가 발해와 더불어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동류 의식을 나타낸 것으로 여겨진다. 윤관의 아들인 윤언이가 자신이 과거에 주장한 칭제건원 건의의 정당성을 역설하면서 내세운 '전례'에도, 고려 국초인 태조·광종대의 사례, 신라의 사례에 더하여 발해의 사례를 들은 것[35] 역시 고려가 발해를 자국의 전대사(前代史)로 인식했다는 증거가 될 만하다.
다만 1300년을 전후한 시기의 인물인 충선왕과 이제현이 만부교 사건에 대해 그 역사적 배경을 잘 이해하지 못했음을 보면, 고려의 발해 계승 의식은 후대로 갈수록 희미해진 것이 아닌가 싶다. 고려가 발해의 중심 지역인 동만주 지역을 끝내 영유하지 못했던 반면에, 투화한 발해인 집단은 점차 고려 사회에 동화되어[36] , 고려인의 의식 세계에서 발해의 존재감이 점차 약해져 갔을 것을 생각해 보면 이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할 수 있다.
발해가 일찍 멸망한 탓에, 발해와 고려의 외교관계는 제대로 수립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는데, 만약 두 나라가 꽤 오랫동안 공존했다면 어떠한 관계를 형성했을지는 추측하기가 쉽지 않다. 왕건은 고구려 계승국이라는 이유로 발해에 친근감을 드러냈지만 바로 그것 때문에 양국이 첨예하게 대립했을 수도 있다. 신라에서 갈라져 나온 후삼국이나, 서로 부여의 후손임을 자처했던 고구려·백제의 상호 항쟁을 보면 그랬을 만도 하다. 하지만 요·금이라는 공동의 적에 맞서 손을 잡았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아무튼 고려가 고구려 계승 문제 때문에 발해를 내심 경원시했다는 문헌적 증거 같은 것은 없다. 오히려 발해를 멸한 요나라 사신들이 보내온 낙타를 굶겨 죽일 정도로 발해에 대한 동족의식이 있었다. 예를 들면 거란을 금수의 나라[37] 로 본 훈요10조가 그러했다.
3.2.1.2. 조선
조선후기 안정복은 《동사강목》, 범례에서 발해의 역사가 우리의 역사가 아님을 밝히고 있다.
다만 안정복은 발해를 두고 "우리 역사에 기록하기는 부당하다"며 한국사의 범주로 인정하지 않은 것 치고는 발해사에 대한 분량이 조선 초기의 동국통감이나 삼국사절요에 비해 훨씬 많아졌을 뿐 아니라, 발해사의 주요 사건들도 중국의 구당서, 신당서 및 성경통지와 최치원의 문집인 계원필경이나 고려사 등을 인용해서 시간 순서에 따라 모두 적고 발해사의 흐름을 볼 수 있도록 했으며, 신라가 당으로부터 패강 이남에 대한 영유권을 완전하게 인정받는 데는 발해의 강성함이 영향을 주었다거나 병자호란의 사례를 들어 '거란의 발해 공격은 중원 공략을 앞두고 후방을 안정시키기 위한 '선행 조치 차원'에서 행한 것이었다'는 해석은 현대 한국 사학계의 해석과도 들어맞으며, 문왕 때인 790년 신라가 사신을 보냈다는 ‘북국’이 발해라고 주장한 것도 의외로 안정복이 류득공보다 앞선다. 따로 '발해국군현고'라는 항목을 두어서 발해의 지리 강역 변동에 대한 최초의 총괄적 분석을 시도한 것도 동사강목이 최초. 오히려 동사강목에서 발해의 역사나 지리에 대한 기록을 상세하게 조사해 남겼기 때문에 훗날 류득공이 발해고를 편찬하는데 도움이 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38] 안정복의 입장은 발해사를 한국사로 인식하는 입장이 정리되기까지의 과도기적인 측면이 들어있어 주목된다.渤海不當錄于我史, 而本爲高勾麗故地, 與我壤界相接, 義關唇齒, 故通鑑備書之, 今從之.
발해는 우리 역사에 기록할 수 없는 것이나, 본디 고구려의 옛 땅으로 우리의 국경과 상접하여 의리가 순치지세(唇齒之勢)이므로, 《통감》에서 갖춰 썼기 때문에 이제 그대로 따른다" 《동사강목》, 범례
유득공은 발해고를 편찬하며 발해가 한국사에 포함되며 통일신라시대를 남북국시대로 정의하였다. 또한 외국인인 장건장(張建章)도 발해국기를 저술하여 발해 역사서를 편찬하였는데 전조 고려에서는 발해 역사서 하나 쓰지 않았다고 비판하였고 발해고 서문을 쓴 박제가 역시도 유사한 주장을 하였다. 그러나 이는 조선의 주된 의견은 아니었고 실학자 중에서도 소수의 의견에 불과하였다. 이는 위 단락의 안정복의 동사강목에서 발해를 부록으로 다룬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발해 유적인 러시아 '체르냐찌노 고분'에서 발굴된 철검이 크기와 형태에서 조선의 보검인 전어도와 상당히 유사해서 두 검의 관계에 대해서 이런 저런 추측이 나오고 있다. 이러한 유물과 유적[39] 들은 문화적 계승을 보여주는 증거가 될 수있다.[40]
3.2.2. 중국
현대이전에 중원의 왕조들은 발해에 딱히 계승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다만 한족이 아닌 요나라나 후에 발흥한 금나라는 발해에 친연성을 가지고는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발해에 계승의식과 동족의식도 없었다. 요나라는 발해를 멸망시키고 부흥운동도 탄압했고, 금나라는 요나라를 멸망시키면서 발해 유민의 도움을 받았지만 요나라 멸망이후 발해인들을 한족과 동화시켜서 소멸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