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몬 막사이사이

 


'''필리핀의 제7대 대통령
Ramón Magsaysay
KGCR
'''
'''본명'''
'''라몬 막사이사이 이 델 피에로
Ramón Magsaysay y del Fierro'''
'''국적'''
필리핀 [image]
'''출생'''
1907년 8월 31일
필리핀 제도 도민정부 잠발레스 주 이바
'''사망'''
1957년 3월 17일
필리핀 제3공화국 세부 주 발람반
'''학력'''
호세 리잘 대학 (경영학 / B.A.)
'''정당'''
'''국민당''' (1953 ~ 1957)
'''직업'''
군인, 자동차 정비사, 정치인
'''가족'''
배우자 루즈 막사이사이
슬하 1남 2녀
'''종교'''
가톨릭
'''재임기간'''
1953년 12월 30일1957년 3월 17일[1]
'''서명'''
[image]
1. 개요
2. 생애
3. 평가
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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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필리핀의 제7대 대통령이자 사실상 (완전 독립 이후인 제3공화국부터 치면) 제3대 대통령. 재임 1953년 12월 30일 - 1957년 3월 17일. 청백리로 유명하다.

2. 생애


1907년 루손섬 리바의 유복한 가톨릭신자 가정에서 6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순혈 말레이인 출신으로서는 극히 드문[2][3] 중류층(아버지가 기술학교 교사)이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1913년 미국인 교장과의 갈등[4]으로 실직한 후로는 어려운 시절을 보내며 고학으로 야간대학을 졸업했다.[5] 1933년에는 버스정비사로 일했으며, 이때 만난 루스 반손(Luz Rosauro Banzon)과 결혼했다. 부부 사이에는 차례대로 테레시타, 밀라그로스, 라몬 2세가 태어났다. 이후 부지런함을 인정받아서 마닐라 운송회사의 총지배인으로도 있었다.
태평양 전쟁 때는 1942년부터 항일 유격대로 활동하기도 했었다.
고향인 삼발레스 주의 군정 장관으로 임명되었다가 1946년에 부인의 소개로 정치에 입문해 필리핀 자유당 하원의원, 1950년에는 국방장관을 역임했다.
당시 항일 유격대 중 공산주의를 추종했던 '후크발라하프' 그룹(이른바 '후크단')의 토벌 등 우익적인 행보를 이어가며 정부의 정화에 힘썼다.[6] 무엇보다 공산주의 세력의 기반이 될 수 있는 민심을 되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고, 이는 실제로 큰 성공을 거뒀다. 이때의 별명이 '태평양아이젠하워'. 기동성과 유연성을 중시한 것도 특징이다. 하지만 이런 개혁 정책으로 견제를 받아 해임되었으며, 그 해 선거에 나갔다.
1953년의 대선에서는 국민회의당(Nacionalista Party) 후보로 출마하여, 내가 먹기 전에 국민이 먹어야 한다며 자신의 아버지라도 부정을 저지르면 법대로 하겠다는 유세로 화제를 모았다. 결국 선거에서 현직 대통령인 엘피디오 키리노를 물리치고 대통령에 당선돼 그 이후로 복지 정책에 노력하였다. 대외적으로는 미국의 안보 정책에 협력하였다.[7] 1954년마닐라에서 창설된 동남아시아 조약기구(SEATO)에 가입하였다.
1954년에는 후크단의 지도자 루이스 타룩을 투항시켜 유화책에도 놀라운 수완을 보여주었다. 이때 협상 테이블에 앉아 4개월 동안 협상을 이어간 사람이 바로 베니그노 아키노.
그러나 불과 4년만인 1957년, 재선 운동을 위한 지역 순방을 마치고 세부에서 돌아오는 중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하였다.[8][9] 시신은 사고 현장에서 수습되어 장례식이 국장으로 치루어졌고 유족들과 많은 필리핀인들이 그의 죽음을 슬퍼했다.
이후 부통령인 카를로스 P. 가르시아가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하지만 가르시아는 막사이사이 사후에 일어난 정국 혼란을 수습하지 못했고, 가르시아와 마카파갈 등 그의 뒤를 이은 후임 대통령들 모두가 연임에 실패했으며, 이후 마르코스 독재 정권이 들어서면서 필리핀은 발전 가능성을 모두 잃어버린 채 동남아시아의 희망 없는 후진국으로 추락해버린다.

3. 평가


그의 노력으로 당시 필리핀은 그럭저럭 안정되고 평화로운 시대를 누릴 수 있었다고 평가받는다.
필리핀에서는 국부로 추앙받으며, 집권기에 복지, 토지 개혁과 같은 좌파적 정책과 반공이라는 우파적 정책을 고르게 펼치려 했다. 당시의 아시아권 국가에서는 공산주의를 지지하면 좌파, 반공하면 우파라는 식의 이분법적인 사고가 팽배했고, 그래서 오늘날에는 좌파 사회민주주의로 분류됐을 사람들의 상당수가 우익으로 분류되곤 했다[10]. 막사이사이도 이런 케이스로, 토지 개혁이나, 복지정책을 벌였다는 점에서 무작정 그를 우익이라고 보긴 힘들다. 물론 현실적 어려움도 있었다. 높은 국민적 지지에도 불구하고, 상류층으로 구성된 상, 하원은 그의 정책(특히 토지 개혁)에 비협조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권위주의적 우파 독재자인 이승만도 공산주의를 막기 위해 조봉암의 급진적 농지개혁을 수용하기도 하였고, 당시에는 오히려 21세기 기준으로 봤을때 진보적이라고도 볼 수 있는 개혁적인 경제 아젠다가 유행이였을 시점이라서, 막사이사이가 우익이 아니라는 근거로 보기는 또 애매하다. 일단 그는 국민당 소속이고 국민당은 당시에도 중도보수, 국민주의 포지션이였다. 하지만, 이것도 애매한 것이 막사이사이는 좌파 성향인 자유당 정권에서 국방부 장관으로 임용되어 일하기도 했고, 그랬던 그가 자유당이 아닌 국민당 소속으로 출마한 이유가 순전히 자유당도 기득권층과 단단히 유착 관계를 맺고 부정부패에 찌들어있던 터라서[11], 이에 환멸을 느끼고 그냥 반대 세력인 국민당으로 이적한 것일 뿐이었고 이 시기의 국민당은 우파적 색채를 그다지 드러내고 있지는 않던 시절이다[12]. 그러니 그가 정말 우파인지는 다시금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일단 기득권층과 정면으로 대적했다는 것부터가 그의 정치 성향에 대해 의심할 여지를 주는 부분이니 말이다.
막사이사이는 청백리로 유명하다. 개인적으로 그는 무척 검소했으며, 청년 시절에는 구두가 닳는 것을 아까워 하여 종이로 신발 깔창을 만들어 신고 다녔을 정도이다. 게다가 가족이나 친척에 대한 비리도 일절 봐주지 않는 청렴한 인물이었다.[13] 또한 부인이 영부인이 된 뒤에 필리핀 내의 지주, 대기업 총수 및 유력 정치인의 부인들과의 커넥션을 만들려고 그들을 대통령 관저에 초청했는데, 막사이사이가 이에 노발대발하며 이들을 모조리 내쫓은 일도 있었다[14]. 정치인의 청렴함은 국가의 발전에 매우 큰 영향을 끼친다. 막사이사이는 서거 당시 50살에 불과했을 뿐더러, 재선이 가능한 상황이었다. 필리핀의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몰락의 시작은, 막사이사이의 죽음과 뒤이은 대통령들의 연이은 재선 실패, 그리고 결국 '''마르코스'''라는 희대의 독재자의 등장에서 비롯되는 측면도 있다. 물론,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막사이사이와 같은 청렴한 인물이 정상적으로 재집권에 성공하고 그 뒤에도 '국가의 큰 어른'인 전직 대통령으로서 영향력을 행사했다면 적어도 국가 청렴도라는 측면에서는 매우 긍정적인 기여가 있었을 것이다.

4. 기타


막사이사이의 아시아 평화 정책을 기리는 의미로, 록펠러 재단의 지원을 받아 설립한 막사이사이상이 제정되어 있다. 한때는 "아시아의 노벨상"이라고 불렸을 정도로 아시아 지역에서는 권위있는 상이었다. 대한민국 국민 중 수상자는 장준하, 김활란[15], 김용기, 이태영, 장기려, 엄대섭, 제정구, 정일우, 김임순[16], 오웅진, 법륜, 윤혜란, 박원순, 김선태 목사[17], 김종기 등이다.
그의 이름을 놓고 한국에서는 "막 사이사이로 가는 사람"이라는 공대개그가 있다. 생2 세포 호흡 파트의 산화적 인산화 과정을 공부하는 학생들도 이따금씩 들어봤을 법한 드립이다. 왜냐하면 H+(수소 이온)가 미토콘드리아 내막에서부터 '''막 사이''' 공간으로 능동수송에 의해 이동하기 때문(...).
한때 대학가에서는 막걸리 + 사이다를 섞은 칵테일(?)을 막사이사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
그의 아들 라몬 막사이사이 2세와 형제 제나로, 삼촌 비센테, 종손 조셉 또한 정치가로 유명하다.
아내 루즈 또한 적십자사와 함께 수많은 사회 활동에 참가하여 국민들에게 존경받았다.
[1] 재임 도중 사망[2] 필리핀 상류층은 대부분 스페인계 혼혈인이었다.[3] 다만 어머니 쪽으로 스페인계 혈통이 약간 섞였다. 그러나 막사이사이 본인이 순혈 말레이인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용모를 가지고 태어났던 관계로, 막사이사이 가문은 사실상 순혈계통으로 취급된다.[4] 교장이 낙제점을 기록한 자기 아들을 유급시키지 않는 조건으로 좋은 자리를 주겠다고 제안했는데, 막사이사이의 아버지가 이 제안을 씹고 교장의 아들을 유급처리해버렸다. 그 일로 인해 막사이사이의 아버지는 교사직에서 해고당했다. 막사이사이는 이렇게 일평생을 청렴하고 강직하게 살았던 아버지에게 막대한 영향을 받아서 뒷날 정치인이 되었을 때도 그는 청백리로서 자신의 신념을 지키면서 살았다.[5] 어렸을 때 아버지를 따라서 도로 공사장의 인부로 뛰었는가 하면, 아버지가 목공소를 겸한 수제 도구 공장을 열자, 아버지의 공장에서 제작한 제품을 발주처에 전달하는 일도 한 적이 있었다. 거기에 물소를 키우는 축산업자 노릇을 하거나, 전술한 아버지의 공장에 공급할 을 굽는 일까지 하는 등, 안 해본 일이 없었다.[6] 다만 아래 평가를 보면 알겠지만, 막사이사이를 우익으로 정의내리기는 어렵다.[7] 그는 키리노가 부패하여 공산주의가 자랄 토양을 만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를 후보로 삼아주겠다던 자유당의 제의도 거부했고 자유당을 탈당해 선거를 치렀다.) 일본 하토야마 이치로 총리와 국교 회복 조약인 네리-타카자키 협약을 맺은 것도 임기 중.[8] 비행기 사고의 원인이 비행기뇌물을 많이 실어서 이륙중량 초과가 되어서였다는 소문이 있다. 하지만 추락 시점이 이륙 직후가 아니라 6천피트 상공 순항 중이었던 점을 볼 때 반대파의 흑색선전으로 생각된다.[9] 여담으로, 사고 직전에 비행기에 오르려는 남편에게 영부인 루즈 여사는 돌아올 때는 비행기 대신 배를 타고 오라고 조언하자, '''"나는 놀러가는 게 아니라, 공무집행 중이오. 그렇게 한가하게 놀다 올 시간이 없소."'''라고 말하고는 기어이 비행기에 오르고 말았다. 사고가 있기 1년 전에도 자칭 예언자라는 사람이 '''"조만간 대통령님의 신변에 이상이 생길 것이오."'''라고 말한 바 있는데, 막사이사이 본인이 이를 혹세무민한 자의 개소리라고 여겨 무시했다고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후 비행기 사고를 당하고 만다.[10] 대표적인 경우가 좌우합작운동의 주역인 안재홍이나 조소앙, 김규식 등이다. 이들은 객관적인 관점으로 보면 우익과는 거리가 멀지만, 반공주의자라는 점 하나만으로 당대에는 우익 소리를 들었다.[11] 좌파 정당이 어찌 이럴 수 있냐고 하겠지만, 멕시코제도혁명당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무늬만 좌파고 수뇌부들은 애저녁에 우경화된 당들은 개발도상국에서는 매우 흔하다. 이런 곳에서는 기득권층의 눈치를 보지않고는 정치를 하기가 어려워서, 정치인들이 쉽게 뇌물 유혹에 빠지기 때문이다.[12] 기성 진보주의 정당의 어두운 이면에 환멸을 느끼고 중도주의나 온건 보수주의를 표방하는 정당으로 이적하는 사례는 생각보다 많다. 물론 이러다가 그대로 변절하는 사례도 적지는 않지만, 원래의 성향을 버린 게 아니라면, 한때 몸담았던 정당이 내부 쇄신에 성공하거나 아예 더 괜찮은 새로운 진보 정당이 나타나는 순간, 다시 진보 진영으로 되돌아가는 경우도 있다.[13] 키리노 대통령의 재임 시절에 막사이사이의 삼촌이 국영 시멘트 회사의 사장직에 임명된 일이 있었는데, 막사이사이가 대통령으로 취임하고 나서 사장으로 내정된 과정이 수상쩍다는 이유를 들어서 삼촌을 모가지해버렸다. 대통령의 친척이 공직에 있으면 필연적으로 부정부패로 이어진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러한 점은 부패로 얼룩졌던 페르디난드 마르코스와 굉장히 대비되는 면모라 할 수가 있다. 그리고 그의 강직하고 청렴한 모습이 그의 아버지로부터 유래했던 만큼, 막사이사이 가문 자체가 부정부패와는 담을 쌓고 산 집안이기도 하다. 이 점도 오늘날까지 권력과 부를 탐하다가 이멜다 마르코스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에 의해 코로 바나나를 먹을 정도로, 여전히 부패에 찌들어 있는 마르코스 가문과는 대비되는 면모다. 그야말로 마르코스의 안티테제.[14] 위의 각주에서 언급된 비행기 사고에 대한 음모론이 개소리 취급받는 이유 중의 하나가 이것이다. 가족들의 부정부패를 지극히 경멸했던 사람 본인이 직접 뇌물을 돌리러 다녔다는 게 말이 되지 않는다. 되려 뇌물이 안 통하는 강직한 인물이라는 점 때문에 지주들과 결탁한 부패한 정치인들의 훼방이 있었고, 이로 인해 그의 개혁이 지지부진해지기도 했다.[15] 공공봉사 부문의 상을 받았는데, YWCA와 각종 감리회 계열 학교 이사장으로서 받은 것이다.[16] 거제 애광원 설립자이자 원장으로 52년 원아원으로 건립 이후 지금까지도 원장을 지키고 있다. 73년에 애광원으로 명칭이 바뀌었으며 90이 넘어간 나이에도 정정하시고 있다.[17] 시각장애인이자 실로암안과병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