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나기하라 뱌쿠렌

 

柳原白蓮
1885년 10월 15일, 도쿄도 미나토구 ~ 1967년 2월 22일, 도쿄도 도시마구(향년 만 81세)
1. 개요
2. 생애
3. 첫 번째 결혼 : 기타코지 스케타케(北小路資武)[1]
3.1.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다
3.2. 문학 기질의 발견
4. 2번째 결혼 : 이토 덴에몬(伊藤伝右衛門)[2]
4.1. 벼락부자의 후처가 되다
4.2. 또다시 순탄치 못한 부부관계
5. 3번째 결혼 : 미야자키 류스케(宮崎龍介)
5.1. 평생의 동반자와의 만남
5.2. 2번째 재혼, 뱌쿠렌 사건이라 불리다
5.3. 결혼 생활
5.4. 패전 이후
6. 미디어


1. 개요


일본 메이지 시대에서 다이쇼 시대, 쇼와 시대에 걸쳐 살았던 여성, 와카(和歌) 작사, 시인. 본명은 야나기하라 아키코(柳原燁子)[3]이다. 뱌쿠렌(白蓮)은 집필 활동을 할 당시의 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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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경의 뱌쿠렌, 옆의 탁자에 보면 두꺼운 책[4]이 놓여 있는데, 이는 당시 일본 여성이 사진을 찍으면 항상 동반되는 것으로, 여성의 정절을 강조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여성에게 정조를 지키라는 뜻으로 갖다놓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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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의 뱌쿠렌. '다이쇼 시대의 3대 미인'[5] 중 하나라 불릴 정도로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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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의 뱌쿠렌. 80세 넘게 살아 비교적 오래 살았다.

2. 생애


※ 이름을 뱌쿠렌으로 바꾸기 전까지는 본명인 아키코로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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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야나기하라 사키미쓰(柳原前光, 1850 ~ 1894) 백작은, 교토에서 다이나곤(大納言)[6] 정2품 구교(公卿)[7]인 야나기하라 미쓰나루(柳原光愛, 1818 ~ 1885)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사키미쓰는 메이지 정부의 외무대신을 지냈다. 청일 간의 조약의 부재로 양국 교역이 불편함을 건의해 청나라에 파견되어, 청나라 대신 이홍장, 증국번과 청일조약을 체결했다.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이타가키 다이스케(板垣退助)와 함께 정한론(征韓論)을 강력히 주장한 인물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당시에 기도 다카요시 등과 함께 '조선이 감히 일본을 상국(上國)으로 모시지 않다니, 괘씸하다. 이럴 때 조선을 정벌해서 영토도 늘리고 본때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한국에는 여러모로 인식이 안 좋은 사람.
사키미쓰의 여동생 야나기하라 나루코메이지 덴노의 측실로, 다이쇼 덴노의 생모이다. 따라서 사키미쓰는 다이쇼 덴노의 외삼촌, 아키코는 다이쇼 덴노의 외사촌 여동생이 된다.
어머니 오쿠쓰 료(奥津りょう)는 사키미쓰의 이다. 그녀는 본래 에도 막부의 잡일을 거들던 신미 마사오키(新見正興)의 딸로 태어났으나, 집안이 몰락하자 교토 야나기바시(柳橋)의 게이샤로 활동하다가 사키미쓰의 첩이 되었다.
1885년 10월 15일(메이지 18년), 도쿄(당시 도쿄부)에서 오쿠츠 료가 야나기하라 사키미쓰 백작의 딸을 낳았다. 사키미쓰 백작은 로쿠메이칸(鹿鳴館)에 있다가 딸의 탄생 소식을 들었다. 로쿠메이칸이란 본래 서양 외교 사절을 접대하기 위해 메이지 시대에 지어진 서양식 건물이었는데, 점차 화족들의 사교장 겸 무도회장으로 쓰이게 되었다. 화려한(燁) 곳에서 딸의 탄생 소식을 들었기 때문에 '아키코(燁子)'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첩의 딸인 아키코는 사키미쓰 백작의 정실(正室)인 하츠코(初子)의 딸로 입양되었다. 아키코의 생모 료는 일찍 죽었고, 아키코는 곧 화족 가문의 양육 방식대로 보모에게 맡겨져 길러진다. 6살이 되자 아키코는 본가로 돌아왔고, 8살이던 1892년에 소학교에 입학한다. 9살에 기타코지 요리미쓰(北小路隨光)[8] 자작(子爵)의 양녀로 입양되어 13살에 화족 여학교[9]에 입학한다. 그런데…
그녀의 파란만장한 남자 이력이 시작되는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했으니 그것은 바로…

3. 첫 번째 결혼 : 기타코지 스케타케(北小路資武)[10]



3.1.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다


요리미쓰의 아들 기타코지 스케타케와 결혼한 것이다. 본래 아키코는 입양될 때 스케타케와 결혼하게 될 줄은 까맣게 몰랐다. 그런데 아키코가 남학생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자, 이를 본 스케타케는 화를 내고 폭력을 휘두르기도 했다. 며칠 후, 아키코는 자신이 기타코지 집안에 입양된 것이 사실 스케타케와 결혼시키려는 의도 때문임을 알게 되고, 양부모(요리미쓰 부부)에게 "결혼하기 싫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를 안 스케타케가 홧김에 아키코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 네가 의 딸인 건 알고 있냐??

아버지의 정실 하츠코가 자신의 친어머니라고 철석같이 알고 있었던 아키코에게, 이 말은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리였다. 이 말에 아키코는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이 시대의 정략결혼은 당사자가, 그것도 여자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결국 결혼하게 된 아키코는 임신을 하게 되어 화족 여학교를 자퇴하고 15살(1901년)에 아들 기타코지 이사미쓰(北小路功光)[11]출산한다.
아들 이사미쓰는 아키코가 아니라 스케타케의 어머니, 즉 친할머니인 히사코(久子)에 의해 길러지고, 스케타케는 아내 아키코에게는 관심도 안 가지고 하녀와 어울린다. 아키코는 고독과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결혼 5년만에 이혼하고 친정 도쿄로 돌아온다.

3.2. 문학 기질의 발견


도쿄친정으로 돌아온 아키코는 행복할 줄 알았지만 전혀 아니었다. 이혼한 그녀에 대해 친정은 좋지 않은 시선을 보냈고, 집으로 들어갈 수 없어 집 근처에서 숨어 살며 지내야 했다.
그나마 이복 언니 이리에 노부코(入江信子)[12]가 다수의 문학책을 보내주어, 독서를 하면서 고독을 이길 수 있었다. 이때 읽은 책들이 아키코의 문학적 재능을 키워주었다.
그 와중에 친정에서는 아키코를 다시 시집보내려고 하였고, 아키코는 참지 못하고 그곳을 탈출해 오빠인 야나기하라 요시미쓰(柳原義光) 백작 부부의 집에서 지내게 된다. 비교적 평화로운 분위기에서, 아키코는 도요에이와(東洋英和) 여학교[13]편입학해서 조금이나마 행복을 느끼게 된다. 도요에이와 여학교에 다니면서 아키코는 문학 동아리에 들어 많은 활동을 하였으며, 그때부터 아키코의 문학적 소질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때 무라오카 하나코(村岡花子)[14]와 친분을 맺는다.

4. 2번째 결혼 : 이토 덴에몬(伊藤伝右衛門)[15]



4.1. 벼락부자의 후처가 되다


몇년 후 아키코는 미쓰비시 광업의 한 직원의 중매로 50세의 규슈의 탄광 부자 이토 덴에몬과 재혼한다. 이토 덴에몬은 아내와 사별하고 아키코와 재혼했다. 덴에몬의 신분은 화족도 아니고 심지어 무사계급도 아닌 일반 평민(상인)으로 비천했던 반면, 아키코는 비록 첩의 딸이지만 당시의 천황이였던 다이쇼 덴노의 외사촌 여동생이며 지체 높은 화족 가문의 딸이었다. 둘의 결혼은 일본 전대미문의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이 결혼 뒤에는 아키코의 오빠 요시미쓰의 숨은 의도가 있었다. 요시미쓰는 귀족원 의원에 당선되기 위해 선거 자금을 마련해야 했었는데,[16] 이토 덴에몬은 일본에서도 손에 꼽는 부자라, 요시미쓰가 선거 자금의 공급원 이 될 수 있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시 아키코는 20대의 한창 나이였다. 반면 덴에몬은 50살도 넘은, 아키코의 아버지뻘 되는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키코가 결혼을 결심했던 까닭은, 덴에몬이 막대한 자금을 바탕으로 카호(嘉穗) 군립기예여학교[17]를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었으며, 여성교육과 봉사에 힘쓴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또 덴에몬은 신사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아키코는 매우 만족스러웠고 덴에몬이 마음에 꼭 들었다. 아키코는 '이제 행복한 결혼생활을 누릴 수 있겠구나!!' 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덴에몬의 진실을 알게 된 아키코는 또다시 충격을 받는다.

4.2. 또다시 순탄치 못한 부부관계


친자식이 없다던 덴에몬은 이미 전처 츠지 하루(辻ハル)와의 사이에서 시즈코(靜子)라는 딸이 있었으며, 2명의 아들을 입양했다. 또한 덴에몬은 너무도 성적으로 문란하고 방탕하여 아이를 가질 수도 없는 몸이 되었다고 했다. [18]
덴에몬의 집안이 비록 일본 국내에 수많은 별장을 가지고 있고, 돈이라면 아무 문제가 없었지만, 이 가정에는 인간미가 부족했다. 그리고 덴에몬은 여성 편력이 매우 심했던 고로, 아내인 아키코와 좀처럼 가까이 하지 않았다. 게다가 덴에몬이 사창가에서 옮아온 성병이 아키코에게 옮자, 자존심이 강했던 아키코는 다시 고뇌에 빠져들고 말았다.
덴에몬과의 결혼 생활도 순탄치 않게 돌아가는 와중에, 아키코는 많은 문학활동을 하며 이름을 날린다. 아키코는 , 와카, 수필, 희곡 등등 여러 분야의 문학에서 저술활동을 하였다. 이때 '하얀 연꽃'이라는 뜻의 뱌쿠렌(白蓮)을 필명으로 정한다. 이때부터 본명인 아키코는 쓰지 않고, 거의 뱌쿠렌이라는 필명을 사용했다.

5. 3번째 결혼 : 미야자키 류스케(宮崎龍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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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키 류스케와 뱌쿠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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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키 부부와 자식들.

5.1. 평생의 동반자와의 만남


뱌쿠렌은 자신이 쓴 희곡을 <해방>이라는 잡지에 게재하려는 과정에서, 그 잡지의 주필을 맡고 있었던 미야자키 류스케라는 7살 연하의 청년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 류스케는 쑨원일본인 동지이자, 중국에 건너가 신해혁명을 지원한 미야자키 도텐(宮崎滔天)[19]의 아들로, 도쿄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수재였다. 또한 류스케는 자유분방한 사고방식을 지니고 있었으며, 뱌쿠렌과 마음이 척척 들어맞았다.
류스케에게 어느날 뱌쿠렌이 하소연을 하였다.

이렇게 매일 글쓰기만 하는 인생은 재미가 없어…

게재 문제로 규슈 벳푸의 덴에몬의 별장에서 며칠을 보낸 후, 뱌쿠렌은 류스케를 기차역까지 배웅했다. 이 일 이후로 둘은 점차 연애 편지로 사랑을 속삭이게 된다.
도쿄에서 뱌쿠렌이 잡지에 올린 희곡을 바탕으로 한 연극이 상연되어, 뱌쿠렌이 도쿄를 방문해 류스케를 만났다. 류스케는 뱌쿠렌의 스스럼없고 솔직한 성격에 반했다.
그러나 뱌쿠렌은 어디까지나 덴에몬의 아내였고, 외출도 덴에몬의 허락 없이는 할 수 없었다. 류스케와 자주 만나지 못하자, 뱌쿠렌은 잡지 <해방>에 류스케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글을 올렸다. 그 글을 많은 사람들이 보고 류스케와 뱌쿠렌의 관계를 눈치채, 먼저 류스케가 뭇매를 맞았다. 류스케는 잡지의 편집부, 문학 협회 등에서 제명당했다.
이때부터 뱌쿠렌과 류스케의 사랑의 감정은 더욱 깊어졌다. 뱌쿠렌은 문학 활동을 하면서 비슷한 처지의 쿠죠 다케코[20]와 만나 벳푸의 별장으로 초청해 이야기를 나누는 등 친해졌다.
그리고 마침내 뱌쿠렌과 류스케가 일을 저지르고 만다.

5.2. 2번째 재혼, 뱌쿠렌 사건이라 불리다


뱌쿠렌은 1921년 교토에서 류스케의 아이를 임신했다. 임신한 뱌쿠렌은 류스케와 살림을 차리기 위해, 벳푸 별장을 탈출하려고 준비하였다. 먼저 하카타의 한 게이샤를 끌어들여 4천엔[21]을 주고 덴에몬의 아내로 대신 들어가게 하고, 뱌쿠렌은 벳푸를 빠져나와 교토로 도망쳤다. 류스케도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뱌쿠렌을 빼내오는데 성공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뱌쿠렌 사건이다. 뱌쿠렌은 아사히 신문에, 덴에몬에게 보내는 다음과 같은 공개 절연 선언문을 게재했다.

'''나는 금력(金力)을 가지고 여성의 인격적 존엄을 무시하는 당신에게 영원한 결별을 고합니다. 나는 나의 개성과 자유를 보호하고 북돋우기 위해 당신의 곁을 떠납니다.'''

이 사건은 보수적이던 당시 일본 사회 및 화족 사회로부터 큰 비난을 당했고, 뱌쿠렌의 오빠 요시미쓰 백작은 이를 진정시키느라 사과하고 애를 먹었다. 요시미쓰 백작은 귀족원 의원직, 백작 작위까지 사임했고[22] 뱌쿠렌은 아예 화족에서 영구제명되었다. 이 때문에 한동안 두 남매는 의절하고 지냈으나, 1935년 들어서 화해하게 된다.

5.3. 결혼 생활


류스케와 뱌쿠렌은 1922년 아들 카오리(香織)를, 1925년 딸 후키(蕗苳)를 낳았다. 둘은 순조롭고 행복한 결혼생활을 보냈으나, 갑자기 류스케가 결핵에 걸려 병상에 눕는다. 뱌쿠렌은 작품 집필 등을 통해 어려운 살림과 남편의 병간호를 둘 다 해결해 나간다. 류스케는 뱌쿠렌의 정성스러운 병간호 덕분에 몇 년 지나지 않아 씻은 듯이 회복한다.
그러나 위기가 이번에는 외부에서 닥쳤다. 태평양 전쟁 당시, 1945년에 장남 카오리가 학도 특별지원병 제도로 참전하였다가 23살 나이에 폭격으로 전사한 것이다. 그로 인해 뱌쿠렌의 머리카락은 하루아침에 새하얗게 변했다고 한다.

5.4. 패전 이후


패전 이후에는 NHK 라디오 방송에서 연설하는 등 사회 운동가로 활동하였으며, 집필 활동도 멈추지 않고 문학열을 불태웠다. 그러다 돌연 녹내장이 찾아와 시력을 잃었다. 류스케는 뱌쿠렌을 정성스레 간병했고, 뱌쿠렌은 1967년 만 81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여담으로 1959년 아키히토 황태자가 평민 쇼다 미치코와 결혼할 때, 반대운동에 가담하여 극렬하게 활동하기도 하였다. 뱌쿠렌은 화족여학교 시절 친구였던 수필가 시라스 마사코(白洲正子)[23]에게 전화하여, "어떻게 평민 여자가 황실로 시집올 수 있지?!"라며 길길이 날뛰었다고 한다. 화족에서 제명된 지 오래였지만, 뿌리 깊은 특권 의식은 버리기 어려웠던 것이다.[24] 웃긴 건, 뱌쿠렌 본인도 미천한 [25]의 딸이고, 본인도 마찬가지로 신분을 가리지 않은 결혼을 그것도 여러 번이나 한 남성편력을 벌였다는 건데 그건 다 잊어버렸나 보다.(...)

6. 미디어


NHK 연속TV소설로 친우였던 무라오카 하나코(요시타카 유리코가 연기)의 일대기를 그린 작품 하나코와 앤의 조연 '하야마 렌코'가 바로 이 뱌쿠렌이다. 해당인물과 주변 인물 이름만 조금씩 바꾸어서 나온다. 결혼 및 재혼 이야기, 여학교 시절, 친구, 가정사 등 위에서 이야기한 사건들이 모두 극화되었다. 나카마 유키에가 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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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에서 2번째.

[1] 일설에는 지능이 낮았다고도 한다.[2] 후쿠오카 번(現 후쿠오카현) 출생, 아카비키(일종의 방범대)의 자식으로 태어나 신분이 비천했다. 그러나 탄광 개발로 막대한 재산을 벌어들이고 벼락부자가 된다.[3] 柳原은 야나기하라(やなぎはら) 또는 야나기와라(やなぎわら)로 읽는다. 야나기하라 씨(氏)는 교토 조정의 문관(文官)에 해당하는 계층인 구게(公家) 중 메이케(名家)에 속하는 가문으로, 메이케는 구게 중에서도 수준이 낮은 하급 계층이었다. 후지와라 북가(藤原北家)가 그 뿌리이며, 후지와라 북가의 유력 인사였던 곤 다이나곤(権大納言) 히노 스케아키라(日野資明)가 가마쿠라 막부 말기에 야나기하라 가문을 창시한 것이 그 시초. 메이케에 속하는 다른 가문으로는 간로지(甘露寺) 씨, 세이칸지(清閑寺) 씨, 가쥬지(勧修寺) 씨 등이 있다.[4] 메이지 덴노의 정실 쇼켄 황후의 사진에서도 볼 수 있다.[image][5] 야나기하라 뱌쿠렌, 쿠죠 다케코, 에기 킨킨(江木欣々). 하야시 키무코(林きむ子)를 이에 추가하기도 한다.[6] 대납언, 원래는 사마천이 저술한 중국 고대 역사서 사기(史記)에 등장하는 벼슬의 이름인 납언(納言)을 본따 중국 당나라의 문물 수입이 적극적이던 헤이안 시대에 생긴 관직명. '납언' 이라는 말을 직역하면 '말씀을 바치다, 드리다' 라는 말로, '신하가 황제(또는 왕)에게 말씀을 드린다'는 뜻이다. 교토 구게(公家) 중에서도 이름 있는 가문의 인물이 역임한 일본 조정의 주요 관직. 다이나곤 말고도 위로 천황에게 직접적인 조언과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간바쿠(關白), 다이조다이진(太政大臣, 조선의 영의정), 사다이진(左大臣, 조선의 좌의정), 우다이진(右大臣, 조선의 우의정) 등이 있었고, 아래에 츄나곤(中納言), 쇼나곤(少納言) 등의 관직이 있었다. 다이나곤의 조정 내 위치는 조선의 관직으로 따지면 정 3품 정도인 통정대부(通政大夫)의 직위에 해당한다.[7] 공경, 교토 구(舊) 황궁에서 관직에 종사하던 일본의 문신(文臣)을 가리키는 말. 구교의 집안이 바로 위에서 언급한 구게(公家)이다.[8] 사실 기타코지 가문은 에도 시대 초기에 야나기하라 가문에서 갈라져 나온 방계 혈통이다. 곧 아키코는 먼 친척 집안에 시집간 것이다.[9]가쿠슈인 여자 중등과, 여자 고등과, 여자대학교의 전신이다.[10] 일설에는 지능이 낮았다고도 한다.[11] 도쿄대학 문학부를 중퇴하고 오스트레일리아시드니 대학교에서 강의를 하기도 했다. 다수의 시집, 가사집을 쓴 시인. 야나기하라 뱌쿠렌의 친아들인 까닭으로 꽤 이름이 알려져 있다.[12] 사키미쓰의 정실인 하츠코의 딸. 이리에 노부코의 3남 이리에 스게마사(入江相政)는 훗날 쇼와 덴노의 시종장을 지냈으며, 이때 스게마사가 궁중에서 보고 들은 것을 저술한 일기가 유명하다. 한편 스게마사는 쇼와 덴노의 막내동생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의 아내인 미카사노미야 유리코 비의 외삼촌이기도 하다.[13] 現 도요에이와 여학원. 개신교미션스쿨로,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전 교육과정을 운영하고 있는 일관제 여학교이다.[14] 일본의 여성 번역가, 다수의 영문학 작품을 일본어로 번역했으며, 초대 일본 개신교 펜 클럽의 회장을 지냈다. 그 유명한 빨간머리 앤을 일본에서 처음으로 번역했다. 하나코의 이야기는 하나코와 앤이라는 드라마로도 만들어졌다.[15] 후쿠오카 번(現 후쿠오카현) 출생, 아카비키(일종의 방범대)의 자식으로 태어나 신분이 비천했다. 그러나 탄광 개발로 막대한 재산을 벌어들이고 벼락부자가 된다.[16] 당시 일본 귀족원에서는 화족공작, 후작은 귀족원의 종신 의원 자격이 있었지만, 백작 이하는 자신들끼리 대표의원을 선출하였으며 임기도 7년으로 제한되었다.[17] 現 후쿠오카 현립 카호히가시(嘉穗東) 고등학교.[18] 김동인의 단편 "발가락이 닮았다"를 생각하면 된다. 서술로 봐선 아마도 성병.[19] 본명은 미야자키 토라조(宮崎寅蔵), 구마모토 번 출신으로, 번의 무사 미야자키 마사카타(宮崎政賢)의 4남.[20] 쿠죠 다케코에게도 몰래 사귀는 애인이 있었고, 다케코의 남편도 바람을 피웠으나, 두 사람은 이혼하지 않고 살았다.[21] 지금의 엔화로 환산하면 약 2천만엔 정도.[22] 요시미쓰 백작은 3년 뒤에 백작 작위와 귀족원에 복귀하지만, 그 뒤에 또 일이 터진다. 본인은 동성애 의혹에 휘말리고 차녀가 초대형 불륜 스캔들을 터뜨린 것... 이러면서 야나기하라 가문 자체가 손가락질을 받게 되었다.[23] 쇼와 덴노의 바로 아래 남동생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친왕의 아내인 세츠코 비의 친구이기도 하다.[24] 시라스 마사코도 화족 가문 출신으로, 백작 카바야마 아이스케(樺山愛輔)의 딸이다. 그러나 마사코는 평민 출신 쇼다 미치코를 반대하는 뱌쿠렌의 발언에 놀라며 "그런 건 이제 상관없지 않아??"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정작 그런 마사코도, "다른 일은 몰라도, 가사노동만은 도저히 못하겠다."는 말을 했다고.[25] 게이샤, 그것도 몰락한 잡일꾼 집안 출신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