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타 사토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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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닌텐도의 제4대 사장. 야마우치 히로시를 이어 2002년 5월 24일에 사장이 되었다. 별명은 '야쿠자'인 야마우치 히로시에 이어서 '인텔리 야쿠자'다.
2. 상세
1959년 12월 6일 홋카이도 삿포로시 출생. 그의 아버지는 한 때 시장직에까지 올랐던 인물이고, 본인 역시 명문 도쿄공업대학 정보공학과 출신의 엘리트다. 어린 시절 HP의 전자계산기에 흥미를 가져 신문배달 끝에 구입해서 프로그래밍을 마스터하고, 대학에 갔을 때는 이미 다 아는 것만 가르치고 있어 시시해질 정도의 실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래서 당시 컴퓨터 고수들이 모인다는 세이부백화점 전자상가에서 죽치던 와중, HAL 연구소에 대한 소개를 받아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대학 졸업 후 그대로 HAL 연구소에 취직. 하지만 자그마한 벤처기업이었던 HAL 연구소가 부모님 성에는 안 찼는지 그의 아버지는 6개월 동안이나 아들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고 한다.
생전에 ''''게임은 어렵고 복잡해선 안 된다. 게임은 만인에게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사상을 갖고 있어서 그가 닌텐도의 사장이 된 이후 닌텐도는 저연령층과 고연령층은 물론, 여성에게도 어필할 수 있는 게임을 주로 제작하여 게임인구 확대에 열을 올리는 모습을 보였다. 다만 젊은 코어 게이머들은 닌텐도의 이런 모습을 딱히 반기지 않아서 그가 취임하고 난 이후의 닌텐도 게임기 유저층 조사를 보면 초등학생층은 매우 두텁지만 이후 점점 줄어들다가 고교생 이후로는 반토막이 나고, 30대 이후 다시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경향을 보인다.[3]
여담으로 양손을 앞으로 뻗으며 '''"직접(直接)"'''[4] 이라고 말하는 것이 그의 상징. 닌텐도 다이렉트 등에서 자주 써먹는다. 참고로 이걸 사쿠라이 마사히로가 따라하려다 2번씩이나 포기했다. 영어 다이렉트 때는 '''"Directly"'''라고 한다. 닌텐도 스위치에 이와 관련된 이스터에그가 존재했었다.[5]
2013년 8월 7일(#)과 10월 29일의 닌텐도 다이렉트에서 # 대합주 밴드 브라더스 P를 소개하기 위해 직접 보컬로이드가 되었다.
2014년 2월에 소니 인터랙티브 엔터테인먼트 재팬 아시아, 일본 마이크로소프트 지사 대표와 함께 공동으로 자녀 보호 캠페인을 전개하였다.
2014년 5월 2일에 공개된 일본 다이아몬드誌와의 인터뷰에서 닌텐도 다이렉트가 해외보다 먼저 일본에서 퍼진 큰 이유 중 하나로 니코니코 동화를 꼽으며, 처음에는 니코동에서 자기가 진지하게 말하는 걸로 꼬투리를 잡거나 조롱하는걸 꽤 복잡한 마음으로 봤지만, 이것도 포함해서 "전달하는 것이 엔터테인먼트로 변화한단 것은 이런 것인가?"라고 느끼게 되고, "이런 일을 하면 즐겁게 해 줄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하며 장난기를 가지고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고.[6] (원문/번역) 그 결과, 위에 나온 자신의 레고 3D 모형이나 역전재판 시리즈의 이의 있음!을 패러디한 일러스트를 채택하는 등으로 베리에이션이 점점 발전하고 있다. 기어이 닌텐도의 E3 2014 홈페이지에서는 대문부터 등장해 '직접'을 시전한다. E3 2015에서는 머펫 버전이 본인 대신에 등장했다.
3. 경력
3.1. HAL 연구소
3.1.1. 입사 초기
대학 시절 아르바이트로 HAL 연구소에서 프로그래밍을 하다가 졸업 후 정식 입사. 당시부터 뛰어난 프로그래밍 실력의 일화로 당시 후지모토 켄이라는 고교생이 자신이 만든 PC-8001용 사운드 보드와 프로그램을 들고 팔아줄 곳을 찾다가 HAL 연구소와 인연을 맺게 되는데 자신이 몇 주간 힘들게 만든 프로그램을 단 몇일만에 깨끗하게 고쳐쓰고 숨겨둔 커맨드까지 발견하여 '응 지웠어' 라고 해주는 등 이 창창한 고교생이 대학생이 되어서도 '프로그래머는 다 이렇게 똑똑한가. 나는 엔지니어에 맞지 않는가보다' 라고 생각하게 만들 정도로 대단한 포스를 가지고 있었다. #
이와타는 HAL은 물론이고 닌텐도에 있어서도 구세주같은 존재였는데 당시 패미컴의 CPU였던 모스 테크놀로지 6502는 닌텐도는 물론이고 일본 안에서도 도쿄대와 교토대의 몇 명만이 이해하고 있을 뿐이라는 풍문이 돌았을 정도로 제대로 다룰 줄 아는 프로그래머가 적었는데[7] , 이와타가 대학시절 30만엔을 들여 구입했던 기기인 코모도어의 PET2001의 CPU가 6502였던 것이 큰 행운이었다. 새파란 24세의 청년 이와타는 당시 HAL의 출자회사의 연줄을 이용하여 닌텐도에 자신을 소개하고 무언가 만들게 해달라고 부탁하고 닌텐도는 흔쾌하게 개발킷을 들려보낸다. 이와타는 구현하지 못했던 닌텐도의 기획들을 실제로 만들어내며 소프트하우스도 못한다는 패미컴용 골프를 비롯하여 수많은 히트작을 만들어낸다. 또한 이와타가 패미컴용으로 이식한 벌룬 파이트가 아케이드용보다도 더 매끄럽게 움직이자 오히려 닌텐도에서 배우러 왔을 정도. 당시의 노하우를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의 수중 스테이지에 적용했다고 한다.
'''"프로그래머는 'No'라고 말하면 안 된다"'''는 지론을 갖고있어서 기획서에 적혀 있는 대로 구현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어도 '이것은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말을 하기 보다는 최대한 원 기획서에 제시된 것과 가까운 모양으로 프로그래밍하는 방법을 연구하였다고 한다.[8] 실제로 그동안 다른 회사라면 구현하기 힘들다며 반려되던 여러가지 기획들을 성공적으로 구현시켰다는 듯. 이처럼 완전히 코딩덕후라 사장직에 올라서 일선에서 멀어졌을 때도 취미삼아 프로그래밍을 하려고 휴일에 혼자 출근했을 정도라고 한다.
이와타는 MOTHER 2의 메인 프로그래머였는데 내부 (프로그램) 문제로 개발이 중단된 상태에서 그는 프로그래머 겸 프로듀서가 되어 "지금 이 상태로 계속하면 3년은 걸리지만, '''처음부터 다시''' 나와 함께 개발을 한다면 '''반년''' 이내에 완성할 수 있다."[9] 고 발언하였고, 실제로 개발기간을 단축하기 위한 각종 개발툴을 먼저 만들어 도입했다고 한다.
MOTHER 2를 개발하면서 가장 문제가 되었던것이 여러대의 컴퓨터로 작업하면서 파일을 덮어씌우고, 한명의 리드 프로그래머가 전부 다 확인하고 관리를 진행했는데, 마더2의 문제점은 프로젝트가 사람이 관리할 수준을 넘어서게 돼서 해당 부분을 담당하는 리드 프로그래머가 폭주한 나머지 빤쓰런했던 것이다. 그리고 프로젝트 추가는 고사하고 해당 프로그래머가 맡았던 일 마저 꼬일대로 꼬이고 어셈블리어 코딩도 엉망상태로 접근조차 힘든 상황에 놓이게 된것.[10] 그래서 이와타는 아예 게임을 갈아엎고, 우선 연구실간 퀵서비스로 직접 배달되던 데이터 문제를 해결하기위한 인터넷 도입, 자연스러운 업무교류를 위한 e메일 적용, 작업자간 소스코드가 꼬이는걸 방지하기위해 당시에는 신규 개념이었던 버전 관리 시스템을 적용하고 사무실 인사구조부터 분할형식으로 바꾸어 그간 작업환경부터 바꾸기 시작했다고. 이때 버젼관리시스템에 쓰일 기본 툴 프로그램을 툴을 만들게 지시해서 적용했는데, 후에 다른 게임회사에서 "버전 관리 시스템 이런거 어떻게 만들었냐" 라는 문의에 "이와타씨가 미국에서 배워와서는, 이렇게 만들어 보라길래 시킨데로 만들었더니 됐다."라고.
그 와중에 MOTHER 2에 색다른 장치를 하게 되는데 그 자세한 내용은 여기를 참조. 반면 MOTHER 3의 프로젝트 중지를 결정한 것 또한 이와타이기도 하며, 프로젝트 재개의 계기를 만든 사람도 이와타다. 그리고 2006년에 MOTHER 3를 발매할 수 있게 해준다.
3.1.2. 대표이사 취임 이후
1992년에는 HAL 연구소가 파산해버리고, 닌텐도의 재정 지원을 받게 된다. 이때 닌텐도의 야마우치 히로시 사장이 HAL 연구소를 지원해주는 조건으로 내놓은 게 '이와타 사토루를 사장 자리에 앉힐 것'. 결국 그렇게 해서 당시 개발 이사였던 이와타는 1993년 3월에 HAL 연구소의 대표이사로 취임. 하지만 사장임에도 프로그래밍에 빈번히 참여하며 여러가지 게임 개발에 관여했다.
포켓몬스터 금·은의 개발에도 도움을 줬는데, 참고로 이때 이와타 사토루는 MOTHER 2을 개발하던 중 잠깐 놀러간거라고 한다.... 게임 프리크에서 게임보이 컬러의 롬 카트리지 용량 문제로 관동지방의 배경 맵, 포켓몬 스프라이트 등을 넣을 공간이 매우 적어 관동지방을 포기하고 성도지방 하나만을 주무대로 잡으려던 기획이었는데, 용량 문제가 해결되면 관동지방을 넣을수 있을 것이라 판단한 이와타 사토루가 자기 프로젝트는 할만큼 하고 퇴근 후 남은 시간 동안 짬짬히 '''혼자서 열흘만에 개선된 이미지 압축 프로그램을 만들어 주면서''' 관동 지방이 들어갈만한 용량을 확보시켜 결국 기획을 바꾸게 됐다고 한다.[11] 2020년 7월에 이 소스코드가 유출 되었는데, 1989년에 별의 커비용으로 만든 프로그램을 98년 즈음에 최종적으로 고친 것이라고 한다.
또한 포켓몬 스타디움의 개발에도 관여했는데, 포켓몬스터 적·녹의 전투 시스템을 닌텐도 64에 이식하기 위한 목적으로 '''혼자서 일주일만에''' 어셈블리어 코드를 해석하여 C언어로 코딩했다. 심지어 그 때는 포켓몬스터 적·녹의 영어화를 위한 소프트웨어 프로그래밍 지휘도 동시에 하고 있었을 때였다. 금·은 시리즈가 포켓몬스터 시리즈 최대 판매량인 적·녹에 이어 2위를 차지하고, 이를 그래픽을 일신하고 컨텐츠를 추가해 리메이크한 하트골드·소울실버가 시리즈 역대 최고의 완성도를 가졌다고 극찬받는 것을 보면 포켓몬스터 시리즈의 명운을 혼자서 좌지우지한 것이다.[12]
또한 동료인 사쿠라이 마사히로와 주말에 취미 삼아 게임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훗날 스매시브라더스 시리즈가 된다. 여기서도 이와타 사토루는 프로그래머 역할을 담당했다. 모두 HAL 연구소의 사장 시절에 한 일로 당연히 업무외 시간에 한 일들이다. HAL 연구소 시절 이와타 사토루의 천재 프로그래머로서의 활약에 대한 자세한 증언들은 이곳(원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
3.2. 닌텐도
2000년에 야마우치 사장의 스카우트로 닌텐도에 경영기획실장으로 입사했다. 그리고 2002년, 물러나는 야마우치 사장의 부탁으로 사장이 되었다. 사실상 HAL 연구소의 사장으로 앉힐 무렵부터 후계자감으로 찍어놨던 모양이다.
사장이긴 하지만 야마우치가 퇴임하며 회사를 이사회가 경영하는 방식으로 바꾸고 간 덕분에 회사를 좌지우지하던 야마우치만큼의 영향력은 발휘하지 못했다. 하지만 적극적으로 대외활동을 하며 미야모토 시게루와 함께 닌텐도의 광고탑으로 활동했었다.
사장 취임 후 NDS & Wii의 폭발적 성공 때는 비교적 조용한 경영을 하였으나, 시장 상황이 바뀐 3DS & Wii U 때는 전면적으로 나서 마케팅에 열을 올리기도 했었다. 다만 닌텐도 3DS는 나름 이름을 날렸으나 Wii U는 사실상 실패작이라고 단언하고 새 콘솔을 서둘러 준비하게 되어 8세대 게임기 시장의 황혼기에 늦지 않고 발매할 수 있었다. 생전에는 사장으로서 직접 닌텐도 다이렉트에 출연하여 뽐내는 예능감은 유카와 전무에 못지않게 강력했었다.
3.2.1. 사장이 묻는다
역대 《사장이 묻는다》인터뷰 목록
이와타 사장이 직접 닌텐도나 관련 기업의 크리에이터들을 상대로 게임 개발의 비화라든지 에피소드들을 인터뷰하는 항목. 한국닌텐도의 홈페이지에도 일부 번역되어, 올라오고 있다. 가깝게는 직계 하부 팀에게 가서 묻기도 하고, 멀게는 게임센터 CX 팀에게 가서 물어본 적도 있었다. '''과장사장 특집'''으로 게임 개발의 뒷이야기를 듣고 벌룬 파이트에 도전하기도 하는 등 양쪽의 컨셉을 적절하게 믹스한 느낌.
4.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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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통신원리포트에서 나온 이와타의 사망[13]<사장이 묻는다> 한 편 한 편이 그가 별세한 후에도 친애하는 우리의 동료, 친구이자 멘토인 '''이와타 사토루'''를 생각나게 한다.
- 닌텐도 <사장이 묻는다> 페이지
2014년 6월 건강진단에서 담관암이 발견되어 수술을 받았다. 수술 후 요양을 거쳐 동년 10월 경영방침 설명회를 통해 복귀했는데, 이후 닌텐도 다이렉트에 불참하거나 살이 빠진 모습으로 등장하는 등 병세가 나빠졌다. 2015년 E3 때는 조금 좋아진 모습을 보여[14] 팬들을 안심시켰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결국 같은 해 7월 11일에 향년 56세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후임으로는 미야모토 시게루, 다케다 겐요가 거론되었으나[15] 최종적으로는 키미시마 타츠미로 결정되었다. 관계자의 말에 의하면 죽기 전까지 사장으로서 자신이 버린 쓰레기를 자기가 치우는 마음으로 닌텐도 스위치의 개발에 앞장서서 지도했다고 한다.
갑작스럽게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전세계의 많은 게이머들의 추모가 이어지고 있으며 트위터에서는 '''#ThankYouIwata'''란 해시태그가 월드 와이드 트렌드에 올라가기도 했다.(#) 소니를 비롯하여 많은 게임 회사에서도 애도를 표하였고(#), 마인크래프트의 아버지 마르쿠스 페르손 등 게임계의 유명한 인물들도 애도를 표하였다. 동년 진행된 Games Done Quick에서 크로노 트리거 관련 Donation Bid중 크로노의 이름을 무엇으로 할 것인가를 정하는 투표에서 압도적인 차이로 '''Iwata'''가 1위를 차지했다. Wii U용 게임 스플래툰 내의 스플래툰 광장에서는 이와타 사장을 추모하는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다.(#) 더 게임 툰에서도 그를 추모하는 만화를 올렸다.
이후 7월 13일에는 닌텐도 본사 건물 하늘에 무지개가 나타났는데, 팬들은 이를 보고 이와타 사토루가 무지개 로드를 건너 천국으로 갔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 (관련 팬아트: #1 #2)
한국에서도 부고와 관련된 여러 기사가 나왔으며 그중에서도 한국일보에서 대략적인 발자취를 보도한 기사를 내기도 했다. "게임의 본질에 충실하라" 닌텐도 신화 이룩한 영원한 게이머 여담으로 2015년은 닌텐도의 대표적인 게임 중 하나인 마리오 시리즈가 30주년을 맞은 해이다. 이와타 사토루가 갑자기 죽는 바람에, 코드네임 NX에 숨은 뜻을 알 길이 사라졌다. 본인만 아는 정보라서 후임자인 키미시마 타츠미도 모른다고 했다. 그가 남긴 기록이 발견되지 않는 한, NX란 이름을 함부로 정하기 난해해서 다른 이름으로 정해질 가능성도 있다는 의견도 있었으며, 실제로도 닌텐도 스위치로 명칭이 확정되었다. 가설일 뿐이지만 닌텐도 스위치가 보여주는 포지션을 고려할 때, 거치형 게임기와 휴대용 게임기를 '크로스(X)' 시킨다는 의미가 아니었을까 싶다. 즉 닌텐도 크로스(Nintendo Cross)로 여기자는 뜻이다. N을 닌텐도, X를 크로스로 치환하면 아주 그럴싸한 논리가 태어난다. Wii U에서 선보였던 화면이 매립된 형태의 컨트롤러를 닌텐도 스위치로 가는 과도단계의 기기라고 가정해본다면 Wii U에서 좀 더 진화된 형태인 닌텐도 스위치를 떠올리며 이러한 코드네임을 부여했을 것이라는 점이 납득이 된다.
이후 4년이 지난 2019년 7월 그에 관하여 일간 이토이 신문과 사장이 묻는다를 정리한 책 '이와타 씨'가 출간됐다. .
5. 평가
"Iwata san is one of the few giants in the game industry who not only believe we needed to make games more appealing to non-gamers, but also the one who have shown us how it could be done. He will be missed by those who love video games to heart and those who want to spread their love to others."
이와타씨는 '''게이머가 아닌 사람들에게도 다가갈 수 있는 게임을 만들어야 한다고 믿었고 그것을 어떻게 할 수 있는지 우리에게 보여준 게임 산업의 몇 안 되는 거장 중 한명입니다.''' 진심으로 게임을 사랑하는, 그리고 그 사랑을 다른 이들에게도 알려주고 싶은 사람들이 그를 그리워할 것입니다.
— 제노바 첸[16]
"One of the most overused words in the English language is "unique". That's what all of us want to be, in some level or another, but very few of us truly are. '''Mr. Satoru Iwata is one who clearly was unique, in the fullest meaning of the word.'''"
영어에서 가장 남용되는 단어 중 하나가 '''"독특하다"(unique)'''입니다. 우리 모두가 어느 정도 독특하고 싶어하지만, 진정으로 그런 사람은 극소수입니다. '''이와타 사토루씨는 진정한 의미에서 독특했던 사람입니다.'''
6. 어록
'''직접!'''
-이와타 사토루의 '''상징'''과도 같은 표현이다.
"On my business card, I am a corporate president. In my mind, I am a game developer. But in my heart, I am a '''gamer.'''"
(私の名刺には社長と書いてありますが、頭の中はゲーム開発者です。心はゲーマーです。)'''명함 속에서 저는 한 회사의 사장입니다. 제 머릿속의 저는 게임 개발자입니다. 하지만 제 마음 속의 저는 게이머입니다.'''
''''불가능을 가능하게 보여주는 것’이 제가 생각하는 혁신입니다. 제가 직원들에게 강조하는 것은 다양한 각도에서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찻잔을 다양한 각도에서 보면 형태가 달리 보이듯이 말이죠.'''
-출처
'''위기의식을 강조하되, 패배의식을 심어서는 안 된다.'''
-출처
'''단 한번도 아이들이 닌텐도를 지지하는 것에 대해 부끄럽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좋은 제품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출처
'''우리는 위험으로부터 도망치지 않는다. 우리는 위험을 향해 달려간다. 우리는 새로운, 그리고 기존의 플레이어들에게 도달하기 위해 게임 산업의 경계를 넘어서는 위험을 감수한다.'''
-출처
'''만약 그 게임이 정말로 흥미롭다면, 오직 그 하나의 게임만을 위해 사람들은 하드웨어를 구매할 것이다.'''
-출처
'''우리는 소니나 마이크로소프트와 경쟁하지 않는다. 우리는 게임에 흥미를 느끼지 못 하는 사람들의 무관심과 싸운다.'''
-출처
'''어떻게 우리가 회사를 운영해야할 것인지에 대해서 닌텐도는 확고한 관점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스스로를 가장 우선적으로 '게임을 만드는 회사'라고 정의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다른 콘솔 회사들은 우선적으로 그들 스스로를 테크 기업으로 정의하는 것 같다.'''
-출처
'''최선을 다하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운'이 없으면 좋은 결과를 낼 수 없을 때가 많다. 우리는 운이 좋을 때는 행운에 감사할 줄 알고 결과가 좋지 않을 때엔 자신에게 무엇이 부족한지 반성하는 마음가짐을 회사 선배들로부터 배워왔다. 본래 행운을 잡기 위한 노력에는 끝이 없는 법이다. 스스로 성공했다고 생각하게 되면 거기에서 만족하고 노력을 멈춰버리게 마련이다.'''
-출처
'''좀 더 강하게 이야기하면 닌텐도가 만드는 것은 사람이 살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생활 필수품은 아니다. 게임이 없어도 생활에는 지장이 없다. 사람은 어떤 형태로든 엔터테인먼트를 추구하지만, 그것이 꼭 비디오 게임이라는 법은 없다. 바로 이 점이 우리의 변신을 재촉했다. 고객의 불확실한 니즈에 빠르게 대응하지 않으면 회사의 생존이 힘들기 때문이다.'''
-출처
'''엔터테인먼트란 사람을 '즐거운 의미'에서 놀랍게 하는 것이다. 사람들을 놀라게 할 수 있는 일은 많지만 그 모든 것이 닌텐도가 가야할 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출처
7. 관련 문서
- 2006년에 Wii가 발매되기 전 현 게임시장에 대해 본인의 관점을 적은 칼럼
- 레지 피서메이
- 벌룬 파이트
- 응원단 시리즈[17]
- 포켓몬스터[18]
- MOTHER 시리즈 - 시리즈 전체가 이와타 사토루와 연줄이 깊다. 특히 MOTHER 2와 3.[19][20]
- 이와타 사토루 - 네이버 캐스트
- 아이작의 번제[21]
- 포켓몬 GO[22]
- 후쿠다 히로유키[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