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테라(밴드)
1. 개요
미국의 텍사스 에서 결성된 4인조 메탈 밴드.[3] 81년도에 결성하여 당시 유행했던 글램메탈 장르의 음악으로 커리어를 시작해 본인들만의 독자적인 스타일을 구축하여 드림시어터와 함께 '''메탈이라는 본질을 한순간에 바꿔버린 그루브 메탈의 전설.''''''The Trend is Dead'''[2]
필립 H. 안젤모 (Philip H. Anselmo)
결성 초기엔 자신들도 마저도 부정하는 일반적인 글램메탈 밴드로 커리어를 시작했으나, 어느 한순간 90도 방향을 꺾어 특유의 독특한 사운드와 묵직한 그루브를 앨범 전체에 도입한 사운드로 갈아탄 뒤 미국 헤비메탈씬의 판도를 단숨에 뒤집어, 그루브 메탈을 대중화 시키며 '''헤비메탈 역사상 가장 성공적이고 영향력 있는 밴드들 중 하나가 되었다.'''[4]
활동하는 동안 총 4회 그래미 어워드 베스트 메탈 퍼포먼스 부분에서 4회 노미네이트 [5] 되었으며, 전 세계적으로 약 4000만장의 판매고를 올리면서 성공적인 밴드로 거듭났다.
그러나 1990년대 중후반부터 커리어의 정점을 찍으며 보컬 필립 안젤모의 독단적인 행동으로 인해 애벗 형제와 잡음이 나기 시작했고 불화로 발전해 2003년, 멤버교체가 아닌 팀의 해체로 길었던 커리어의 종지부를 맞이한다. 또한 형제였던 기타리스트 다임백 대럴과 드러머 비니 폴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인해 재결합 마저도 불가능해졌고, 결국 영원히 전설로 남게됐다.
2. 음악 스타일
결성 초기에는 흔히 LA메탈이라 불리는 글램 메탈을 했었고, 5집부터는 본격적으로 그루브 메탈을 하기 시작했다. 거기다 온전히 순수한 메탈만을 추구하지는 않고, 중간중간에 발라드 트랙도 몇 개씩 끼워넣는다. 그러나 보통 생각하는 발라드라기보다는 마쵸스러움을 극도로 끌어올린, 조용조용히 나가다가 어느 순간부터 빵 터지는 반전요소가 있는 서던 록 풍 발라드이다.
음악 전체적으론 스래쉬 메탈보다 대체적으로 그루브와 무게감이 더 강조되었다. 이러한 특징은 6집 때 가서 극대화된다. 하지만, 판테라 특유의 그루브 스타일은 미국인들(+베이시스트)은 환장하는 요소긴 하지만 질주감과 속도를 더 선호하는 한국의 록 리스너들은 선호하지 않는 타입이었다. 차로 치면 파워 메탈이나 스래쉬 메탈은 유럽식 슈퍼카 스타일이지만 그루브 메탈은 미국의 묵직한 머슬카 스타일이다.
3. 배경
90년대에 들어와 너바나와 펄 잼, 앨리스 인 체인스, 사운드가든을 위시한 얼터너티브 록, 또는 그런지가 예상치 못한 큰 히트를 치자, 메탈은 매우 빠르게 메이저 음반 시장에서 쇄퇴했다. 과도한 상업주의와 쾌락주의, 그와 반비례하는 음악적 부실함으로 점철된 글램 메탈씬에 대해 많은 불만을 가지고 있던 락 음악 순수론자들은 이런 변화에 긍정적인 반응을 비췄다.
하지만 이는 결코 좋은 일만은 아니었다. 상업주의 락앤롤, 메탈에 대해 적잖은 적대감을 드러내며 같은 80년대를 살았던 스래시 메탈,데스 메탈 까지 싸그리 퇴출을 당했기 때문이었다.[6] 음악적 가치가 높은 메탈 사운드는 상업성이 굉장히 떨어지는 이유로 설 자리를 잃었다.
이런 얼터너티브 열풍은 '''메탈을 역사상 가장 초라한 위치에 떨어트리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7] ''' 메탈 역사상 가장 어두운 이 시기가 바로 오기 직전, 판테라는 메이저 입성을 하게 된다.
4. 평가
우선적으로 할수있는 것은 '''당시 까지의 공식처럼 존재했던 메탈의 일부 고정관념을 깨는 새로운 메탈 사운드의 제시''' 라는 점이다. '''Cowboys From Hell''' 에서 보여준 사운드가 적당히 새로운 것이었다면,''' Vulgar Display Of Power''' 는 지금까지의 메탈 사운드와는 다른 독특함을 가진 새로운 영역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지금까지의 하드락, 메탈의 영향력을 완벽하게 단절하고 이 모든걸 판테라 혼자 해냈다는 말은 절대 아니다. 하지만, 밴드의 이런 강한 색채는 평론가와 팬들로 하여금 새로운 장르로 취급 할 수 밖에 없었고, 결국 판테라는 “그루브 메탈” 이란 장르로 불리우게 된다[8] . 그리고 이 앨범을 기점으로 훗날 나오는 신예 메탈 밴드 및 메탈적 요소가 들어있는 다양한 밴드들은 그루브 메탈의 공식을 너도 나도 참고하여 사용하게 된다.
드림 시어터의 6집에 실린 'The Glass Prison' 은 이들의 음악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본인들이 앞서 말했고, 스키드로우 같은 과거 LA메탈 쪽으로 분류되던 밴드 중 일부도 판테라의 어프로치를 적극 수용하는 면모를 보였다.[9] 판테라 본인들의 우상이자 롤모델이였던 블랙 사바스, 반 헤일런, 키스같은 전설들의 찬사를 받았으며 기존의 헤비메탈 히어로 마저도 영향을 받았음을 어필하는 매우 고무적인 일들이 일어나기도 한다. 쥬다스 프리스트, 앤스랙스, 네이팜 데스, 오버킬 과 같은 밴드는 물론이거니와 심지어 임펠리테리와 같은 밴드 까지도 판테라의 새로운 메탈 사운드에 호평을 보냈고, 많은 메이저 밴드들이 이들의 스타일을 자신들의 사운드에 적용 해보려는 노력과 리스크를 짊어 매는 모습까지도 보여 주었다.
이러한 사운드의 원동력이 되는 다임백 대럴의 캐릭터는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새로운 사운드를 만들어 냈다는 점도 중요하지만, 얼터너티브로 인해 소홀히 되던 기타 연주의 화려함과 세심함을 다시 부각시켰다는 점, 그리고 그동안의 화려한 플레이들을 선보이는 주자들의 지나친 음악적 자위를 통해 거리감이 느껴지던 메탈 기타 속주를 강력한 사운드의 메탈에도 어울리는 것이라는 인식을 제대로 안착시켰다는 점은 어마어마한 의미를 지닌다.
사운드적 메시지 뿐만 아니라 상업적인 부분에서도 두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았다. '''얼터너티브로 초토화 되던 90년대에 유일한 메이저 메탈''', 게다가 새로움과 강경함으로만 점철된 이 밴드가 메이저에서 먹혔다는 점은 의미가 엄청났다. '''이 밴드를 기점으로 새로운 사운드와 메시지에 걸맞는 새로운 형태의 메탈헤드들이 탄생했고''', 이들은 메탈 암흑기를 밝혀 나가 또다른 메탈의 새로운 면모를 뽐냈다.
판테라가 닦아놓은 성공으로 가는 길을 통해 머신 헤드, 세풀투라, 슬립낫, 헤이트브리드 가 성공 했다는 점, 어벤지드 세븐폴드[10] 같은 밴드들의 지속적인 언급, 램 오브 갓 같은 메탈 코어쪽 후배 밴드들은 이들의 영향을 안받은 밴드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락 메탈 전반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경이로운 상업적, 차트적 위세를 떨치는 메탈 밀레니엄의 분위기의 초석이 되었다는 점 역시 의미가 깊다. 또한 이들의 롱런은 차기 앨범 '''Far Beyond Driven''' 이 강력한 사운드로 빌보드 앨범차트 1위를 첫주에 거머쥐게 만드는 큰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순위는 메탈 역사상 둘도 없는 암흑기인 90년대에 이뤄진 말도 안되는 사건중의 하나였다.''' 이런 강력한 메탈 1위의 기록은 슬립낫의 앨범 All Hope Is Gone 이 나오기 전까지 14년 동안 깨어지지 않았다. 메탈이 메이저에서 먹혔다는 점은 의미가 크다. 메탈 황금기인 80년대엔 정통 메탈, 스래시 같은 강력한 메탈조차 메이저에서의 상업적 어필을 신경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판테라는 끝까지 비타협적이었고, 본인들의 음악을 보여주며 결과적으로 성공했다.
이 밖에도 당시 판테라의 인기는 기존 메탈헤드들의 이미지가 가녀리고 불편해 보이는 미형의 가죽의상에서, 굵직하고 근육질의 메탈셔츠, 체크셔츠와 카고팬츠같은 '''전체적으로 단순하고 간소화된 복장으로 변화시키고, 무엇보다 근육질의 마초스러움이 강한 이미지로 부각시켰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사운드의 한 특징인 블루스, 서던락적인 코드로 인해 그쪽 사운드가 메탈의 새로운 영감의 원천으로 다시금 새롭게 부각 되었다는 점, 너무나도 뛰어난 음악적 오리지널리티와 기량으로 인해 메탈헤드와 전혀 관계없는 얼터너티브, 힙스터 계열 언론들의 호평으로 인해 '''90년대 대표 밴드로 자리매김 하는데 성공했다는 점,''' 그로 인해 메탈헤드용 밴드의 이미지와 동시에 누구나 접할 수 있는 메탈 밴드로의 이미지를 가지고 그에 합당한 대중적 팬들을 엄청나게 보유하여 앞서 말한 빌보드 앨범차트 1위와 이어지는 성공을 하게 만들었다는 점 등 다양하다.
5. 멤버
멤버는 보컬 필립 안젤모, 기타 다임백 대럴, 베이스 렉스 브라운, 드럼 비니 폴이다. 비니 폴과 다임백 대럴은 형제 관계이다. (이들의 본명은 각각 빈센트 폴 애벗(Vincent Paul Abbott), 대럴 랜스 애벗(Darrell Lance Abbott)이다.)
필립 안젤모의 샤우트, 그로울링같은 익스트림 메탈 창법 뿐만이 아니라 부드러운 발라드까지 소화가 가능한 폭발적인 가창력과 폭넓은 범용성, 비니 폴의 섬세한 테크닉과 엄청난 파워가 조화된 드러밍[11] , 렉스 브라운의 파워풀 하면서도 단단한 고난도의 스트링워크를 자랑하는 베이스라인, 다임백 대럴의 면도날을 연상시키는 피킹과 그루브감 넘치는 리프가 합쳐져서 메탈 역사에 길이 남을 밴드가 되었다.
기타리스트 다임백 대럴은 천재로 불린다. 대부분의 밴드들이 트윈 기타, 혹은 원 기타에 원 키보드 체재로 밴드를 운용하는데 반해서, 판테라는 다임백 대럴 오직 한명이 맡고 있다. 하지만 원 기타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트윈 기타를 능가하는 강렬한 리프, 솔로를 보여 준다.
하모닉스 또한 예술이라 기교파 기타리스트로 분류되기도 한다. 사실 스튜디오 연주는 대부분 투 기타, 혹은 쓰리 기타 연주로, 원 기타 곡은 찾아보기 힘들다. 물론 연주는 모두 다임백이 오버더빙 했다. 무려 메가데스의 데이브 머스테인이 그를 탐내기도 했다.
다임백은 당시의 기타리스트들 중 좀 특이한 케이스이라 할 수 있다. 당대의 라이벌로 꼽힌 잭 와일드의 경우 브리티쉬 헤비 메탈의 카피로 시작해서 미국의 고전 헤비 메탈 스타일을 계승해왔지만 다임백 대럴은 어쿠스틱 팝, 포크, 하드 락, 블루스로 시작해서 고전 헤비 메탈을 거쳐서 스래쉬 메탈, 글램 메탈까지 섭렵하며 굉장히 폭넓은 연주를 할 수 있는 테크니션이 되어 독자적인 스타일을 창시했다.[12]
다임백은 어렸을 때 동네 기타 연주대회에서 우승해 상으로 Dean ML을 받은 후부터 쭉 Dean ML을 개조하여 사용했으며, 이후 유명해지자 워시번에서 이를 바탕으로 한 시그내춰 모델을 공급받았다. 워시번과의 계약이 끝나고 나서 다시 Dean과 계약하였으나 얼마 안되어 사망하였다. 사실 다임백 시그네쳐는 여러 회사에서 수도 없이 많이 나온다. 기타에서부터 와우 페달까지, 죽고 나서도 새로운 시그네쳐가 나오는 거 보면 제대로 뽑아먹을려고 작정한 듯.
유명한 다임백의 시그네쳐라면 위에서 언급한 Dean ML 과 Razorback. Dean 특유의 엄청 큰 기타 헤드에다가 깁슨 익스플로러와 플라잉브이를 합쳐놓은 듯한 생김새를 하고 있다. Razorback은 이걸 바탕으로 훨씬 더 뾰족뾰족하게 디자인한 물건. 물론 사운드는 익스플로러나 플라잉브이와는 상관 없다. Razorback은 다임백이 디자인에 참여해서 만든 물건이지만 정작 자기자신은 얼마 써보지도 못하고 사망하였다.
6. 디스코그라피
- Metal Magic (1983)
- Project in the Jungle (1984)
- I Am the Night (1985)
- Power Metal (1988)
- Cowboys From Hell (1990)
- Vulgar Display of Power (1992)
- Far Beyond Driven (1994)
- The Great Southern Trendkill (1996)
- Official Live: 101 Proof (1997)
- Reinventing the Steel (2000)
6.1. 메이저 데뷔 전 역사
지금의 판테라 라는 밴드명을 가지기전엔 'Pantera Metal magic' 이라는 긴 이름을 사용했으며, 거슬러 올라가면 'Gemini', 'Eternity' 등의 이름을 거쳐 지금의 'PANTERA' 라는 밴드명이 완성 됐다. 이렇게 드럼의 비니 폴, 리드 기타의 다이아몬드 대럴, 리듬 기타의 테리 글레이즈, 리드 보컬의 도니 하트, 베이시스트 토미 브레드포드와 함께 판테라의 원형이 완성된다.
본인들은 물론이거와 팬들도 이 시절을 부정하고 싶어하고[14] 까들은 이 시절을 문제삼아 판테라가 슬레이어처럼 순수한 어그레시브 & 헤비 밴드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 시절 다임백 대럴의 이름은 다이아몬드 대럴 (Diamond Darrell), 렉스 브라운은 렉스 락커 (Rex Rocker) 였다.
판테라는 메이저 데뷔 전에는 그루브 메탈이 아닌 당시 주류였던 글램 메탈 스타일이었다. 보컬도 테리 글레이즈였고, 3개의 정규 앨범과 기타 커버곡들을 냈으나 자신들의 고향인 텍사스 근방에서나 언더그라운드 씬에 겨우 알려질 정도로 인기는 전무했다.
1988년작 Power Metal은 테리 글레이즈가 나간 뒤 필립 안젤모를 영입해 낸 첫 앨범으로, 이전작들과 마찬가지로 Metal Magic Records라는 자체 레이블을 통해 발매한 인디 시절 앨범이다. 이 때부터 서서히 글램 메탈을 벗어나 지금 판테라하면 떠오르는 그런 자신들만의 고유한 스타일로 바뀌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글램 메탈에 가까웠고,[15] 결정적으로 인기도 없었다.
하지만 1990년에 발매한 정규 5집이 모든 걸 바꿔놓는다.[16]
6.2. 5집 COWBOYS FROM HELL
판테라의 5번째 앨범이자 메이저 데뷔곡. 이전의 스타일에서 완전히 탈피한 판테라의 시작를 세상에 알린 앨범이다. 최초의 그루브 메탈 앨범중 하나로 간주되며, 판테라 스타일의 초석을 닦은 앨범이라 할 수 있다.
앨범 제작 초기에는 총 11개의 트랙으로 제작되었으나, 녹음 초반 "The Will to Survive" 라는 곡이 폐기되고 앨범의 막바지에 "Clash with Reality" 와 "Primal Concrete Sledge" 을 추가로 녹음해 앨범을 발매한다.
동명의 타이틀 곡인 Cowboys From Hell은 다임백 데럴의 면도날 피킹이 뭔지를 제대로 보여준다. 여기에 비니 폴의 더블베이스에서 나오는 빈틈없는 드러밍과, 렉스 브라운의 단단하면서도 그루브한 베이스 라인, 필립 안젤모의 천부적인 보컬재능이 합쳐져서 길이 남을 명곡이 되었다. 하지만 진정한 명곡은 Domination으로, 단순하지만 엉덩이를 들썩거리게 하는 그루브한 연주와 곡의 후반부에 묵직한 브레이크 다운을 보여주어 앞으로 판테라의 음악적 비젼을 보여주었다. 이 두 곡 뿐만이 아니라 장난끼 넘치는 트랙인 Heresy나 넘실거리는 리프가 인상적인 Psycho Holiday, 끝이 보이지 않는 초고음 샤우팅을 자랑하는 Shattered, 이들의 전매특허인 반전 발라드곡의 첫 시작인 Cemetery Gates 도 공전의 히트를 쳤다.
2010년에 앨범 발매 20주년 기념판이 발매되었다. 기존 앨범과 비교해볼 때, 북클릿에 1집 앨범을 작업하고 있을 때에 대한 멤버들의 술회[20] 가 수록돼있고, DISC 2에 라이브 버젼이 수록되어 있다. 몇몇 라이브 트랙들은 여태까지 미발표였던 것들이므로 소장가치는 어느 정도 있기는 하지만 이미 구매해뒀던 사람이 다시 구매하기에는 조금 메리트가 부족한 것은 사실.
6.2.1. Monsters Of Rock Moscow (1991)
판테라 커리어상 가장 큰 스테이지에서의 공연, 최고의 임팩트. 그리고 메탈 역사에도 두고두고 회자될 전설의 공연. 이들은 그 중심에 서있었다.
'''"Cowboys From Hell" '''앨범이 성공을 거두고, 기세를 몰아서 판테라의 맴버들은 이 성공을 이어갈 후속 앨범''' "Vulgar Display Of Power"''' 의 제작에 몰두하고 있을 무렵, 판테라의 커리어에 있어서 절대 거절하지 못할 제안이 들어오는데, 그것이 바로 '''"Monsters Of Rock 1991"''' 모스크바 투어.
이 라이브는 판테라의 커리어나 락,메탈 음악의 역사적 가치로써도 동시에 인정받는 콘서트이다. 영상에 나온 것 같이 끝이 보이지 않는 구름 떼 같은 관중 속에서 콘서트 오프닝 밴드로 처음 무대에 나선다. 뿐만 아니라 메인 라인업도 상당했는데, 이날 판테라 이외에도 AC/DC, Metallica, The Black Crowes, 그리고 러시아 헤비메탈 밴드인 E.S.T.가 라인업을 담당했다.
특이한 점은 다른 밴드와 달리 판테라의 라이브 영상만 모두 흑백으로 남아있다. 라인업에 포함된 다른 밴드들에 비해 판테라는 메인 스트림에 등장한지 오래되지 않은 밴드였다. 하지만 멤버들 모두의 폭발하는듯한 에너지를 더불어 프론트맨 안젤모의 미친 활동량과 호응유도가 더해져, 선배 밴드들에 뒤지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며 판테라는 쾌조의 스타트를 끊고 공산권의 청년들과 전 세계인들을 열광케 하며 판테라 라는 밴드의 이름을 리스너들의 뇌리에 깊게 각인시킨다.
경찰의 공식적인 추정치는 아니지만 이날 공연 당시 추산 관객만 적게 잡으면 약 15만명에서 최대 160만명 사이에 육박했다고 전해진다. 어마한 관객수를 감당하기 위해 무대 주위와 관중들 사이에 수천명의 군경들이 배치되었고 군용 헬기를 동반하여 관중들의 질서정리를 도모하였으나 상상을 초월하는 관객수로 관중을 통제하는데 난항을 겪었으며 일부 극단적인 관객들은 술과 마약에 취한체 과격한 모싱과 난동을 부리는 바람에 군경들이 야경봉과 같은 근접무기들로 무력제압하는 모습이 주변에서 포착되기도 하였으며 실시간으로 체포되기도 하였다.
여담으로 80년대 중 후반부터 90년도는 러시아의 역사에서도 상당히 혼란스럽고 암울한 시기였는데. 소련의 마지막 서기장인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주도하에 펼쳐진 개혁·개방정책인 글라스노스트/페레스트로이카의 실패에 의한 여파로 고르바초프 본인의 실각과 더불어 공연 약 한 달 전 8월엔 8월 쿠데타가 일어나 사실상 무너져가던 소련 정부의 체제의 숨통을 끊어버리게 되며, 결과적으로 공연 약 3달 후에는 소련 해체가 선언되고 길고 길었던 냉전의 종지부를 찍게된다. 게다가 소련은 공산정권의 특성상 외부의 문화에 대해 폐쇄적이며 미디어에 대한 제제가 상당했다. 때문에 서방 문화가 소련에 퍼지기 시작한 시점이 80년대 중후반을 기점으로 꽤 느린 축에 속했는데, 해체 직전인 90년도 초 부 터 서구권의 문화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런 암울한 시대의 흐름과 현실적으로 처한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콘서트를 성공적으로 유치하며. 성황리에 마무리 지었고, 궁극적으로 소련과 동유럽의 문화 체계를 뒤바꿔놓는 역사적인 라이브로 기록되었다.
6.3. 6집 VULGAR DISPLAY OF POWER
'''Vulgar Display Of Power''' 속칭 '아구창 앨범'은 이들의 최고 히트 앨범으로, 전작에서 급격히 높아진 기대에 상응하는것을 넘어 어마어마한 대박을 친다. '''판테라의 역사에 있어 본 앨범은 가장 중요한 앨범으로 점철되어 왔으며 메탈이 죽어가던 90년대의 메탈씬에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90년대 메탈씬의 선봉장으로써 입지를 굳힌 앨범이라고 볼수있다.''' 전작에서 기초를 다졌던 그루브 메탈의 음악적 특성을 완성 후 정립 시켰을 뿐만 아니라 이들의 음악적 특성을 완전하게 집대성한 앨범이다. 이렇게 바뀐 이들의 스타일을 가장 잘 엿볼 수 있는 곡이 3번째 트랙 「Walk」.
이전에 남아있던 일부 스래시 스러움을 배제하면서, 전체적으로 그루브를 한층 끌어올려 좀 더 정돈되고 강력해진 사운드를 동반한 것이 특징. 기존에 존재하던 이미지를 완전히 탈피하며 지금 우리가 떠올리는 판테라의 모습으로 완벽하게 거듭난다. 이 시기에 Diamond Darrell과 Rex Rocker라는 이름을 버린 그들은 다임백 대럴과 렉스 브라운으로 본인들의 활동명을 교체한다.
Vulgar Display of Power 앨범 출시 20주년 기념 디럭스 에디션이 출시되었다. 판테라의 미공개곡 'Piss'[31] 가 싱글의 형식으로 발표되었다. 무려 12년만의 판테라의 새로운 노래.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 앨범을 통해 판테라는 메탈의 전체적인 음악적 특징들을 싸그리 다 바꿔버렸다.''' 물론 직선적인 음악을 선호하는 완전 극소수의 올드스쿨 메탈 팬들이나 소위 '까' 로 일컬어 지는 이들에게는 이와같은 판테라 특유의 그루브함이나 음악적 특색이 욕을 먹는 이유이기도 하지만, 음악성이 좋고 나쁨을 떠나 이 앨범은 기존에 유래없던 거대한 변화를 가져 왔단 점에서도 상당히 중요하고 판테라 디스코그라피중 가장 중요한 앨범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32]
앨범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큰 성공을 하자 앨범의 커버에 대한 궁금증 역시 많았다. 앨범표지의 모델이 실제로 주먹으로 한대씩 맞을때 마다 10달러정도의 돈을 받고 사진을 찍었다 라는 루머가 퍼졌는데, 이는 정확한 정보가 아니다. 실제로는 머리를 헝클어 트리고 그냥 주먹을 얼굴에 강하게 밀고있는 정도였던것. 여담으로 원래는 흑백의 표지가 아닌 빨간색 배경의 컬러판 이였다고 한다. 컬러판 원본은 정황상 찾는것이 불가능해 보인다.
6.4. 7집 FAR BEYOND DRIVEN
이전작 '''VULGAR DISPLAY OF POWER''' 가 판테라에게 대성공을 가져다 준 앨범이라고 한다면 '''FAR BEYOND DRIVEN''' 은 그 대성공을 뒷받침 함과 동시에 그 한계를 넘어선 앨범이라 칭한다.
'''FAR BEYOND DRIVEN''' 앨범에 이르러서는 자신들이 추구하는 사운드 노선이 완전히 바뀌어서, 2집보다도 더 질주감을 줄이고 특유의 그루브감과 거기에다 서던풍을 강조한 전면적으로 조금 더 헤비해졌으며 본격적으로 밴드의 어두운 면을 강조한 앨범을 내놓기 시작한다.
결과적으로 이앨범은 판테라를 메탈씬의 정점으로 올려놓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만, 변화한 스타일 때문에 판테라 팬들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갈리는 앨범이다.
이 앨범의 곡중 하나인 Becoming의 도입부는 '''무릎팍도사'''에 자주 쓰이는 음향효과이기도 하다.
판테라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빌보드 1위'''라는 영예를 안겨준 앨범이기도 하다. 더 영예로운 건 메탈이 서서히 침체기를 걷고있을 무렵, 소위 헤비메탈이 죽었다라고 여겨지고 있을 무렵에 발매된 이 앨범이 발매 첫 주에 앨범차트 정상에 오른 두번째 메탈 앨범이라는 것이다. [38]
이전 앨범들과 마찬가지로 20주년을 기념하여 디럭스 에디션을 발매했다. 구성은 리마스터한 기존의 곡들과 Donington 라이브가 실려있다. 원래 앨범 커버 이미지는 드릴이 항문을 꿰뚫는 이미지 였으나 너무 선정적 이라는 이유로 두개골을 꿰뚫는 이미지로 수정되어 발매되었다.
6.5. 8집 THE GREAT SOUTHERN TRENDKILL
'''THE GREAT SOUTHERN TRENDKILL'''은 커버가 인상적인 앨범으로, 여느 밴드들이 메인스트림에 정착하고 나서는 스타일 자체가 부드러워지며 본래의 음악성이 약해지며 상업적으로 변모하는 경우가 많은데, 판테라를 평가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제 슬슬 음악이 약해질 때가 되었지' 라고 생각할 때, 여느 익스트림 메탈 밴드 저리 가라고 여겨질만큼 여태까지의 앨범 중 판테라가 보여줄 수 있는 가장 헤비한 앨범을 발매하여 충격을 줬었다.
초반부터 쉴 틈 없이 질러 주면서 폭발하는 것이 압권인 Suicide Note Pt. II. 하지만 시종일관 귀가 터져라 달려대는 것은 아니고 나름 완급 조절을 잘 해놓았다. 어쿠스틱 곡도 있고 이중 Floods의 중후반부에 나오는 기타 솔로가 상당한 수작으로 평가받는다.[44] 『롤링 스톤즈』 같은 곳에서 하는 '최고의 기타 솔로 랭킹' 같은 것에 순위권에 상당히 자주 랭크되는 노래다.
앨범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그루브 메탈이지만 스래시 메탈과 데스 메탈의 어프로치를 적극 수용하고, 보컬에서는 안젤모 뿐만 아니라 좀 더 악마 스러운 분위기를 만들어 내기 위해 오버더빙을 강조했는데, 그라인드코어 밴드 애널 컨트의 보컬 Seth Putnam[45] 이 보컬 피처링을 담당함으로 악랄하면서도 지독한 앨범을 창조 해냈다.
6.5.1. 무너지기 시작하는 밴드
연이은 앨범의 대박과 함께 승승장구 하였고 그들의 인기와 영향력이 절정에 도달했을때, 이 앨범을 기점으로 전성기의 가도에서 조금씩 내려와 이후 침체기의 국면에 접어들게 된다.
1995년 당시 안젤모는 본인의 슈퍼그룹 ''''DOWN''''의 앨범 ''''Nola''''로 활동 후 판테라에 다시 돌아왔다. 애벗 형제들의 말에 따르면 "복귀후 안젤모가 평소와는 다르게 변덕스럽게 행동했으며, 밴드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라고 언급했는데, 안젤모의 행동에 대해서 좀체 짐작 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한마디로 정말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람이였다.
이 무렵, 안젤모는 밴드와의 음반작업도 독단적으로 행하기 시작했는데, 혼자 다른 지역으로 가서 녹음을 한다던가 밴드와 소통을 끊는다던가 하는 일부러 밴드를 피하는듯한 경향을 보여줬다.
상황을 조금 살펴보자면 보컬 안젤모에게 문제가 있었는데, 그의 스타일을 보면 알수 있지만 공연 스타일이 상당히 과격하면서 격정적이였고, 절정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던만큼 스케줄 역시 살인적이였다. 때문에 이 시기에 안젤모의 건강과 정신상태가 급격하게 나빠졌고 그 대가는 무대 위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결국 이것이 퇴행성 디스크 질환으로 되돌아왔고 지속적인 통증을 겪게된다. 밴드 멤버들이 자꾸 본인을 걱정하기 시작하자 처음에는 멤버들에게 이사실을 숨겼고 나중에는 본인도 인정 할 만큼 상태가 나빠져 자신의 몸상태에 의학적인 도움을 얻으려 노력했지만 수술이 불가피하며, 복구까지는 최대 18개월이 걸릴지 모른다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접하게 된다.
전성기의 가도를 달리고 있는 와중에 수술이란 결정은 그들의 커리어에 있어서 상당한 제약이었고, 이를 거부한 안젤모는 결국 허리통증을 잊어버리기 위해서 각종 술들과 마약성 진통제, 근육 이완제, 헤로인에 의존하게 된다. 결국 안젤모의 이 행동은 엄청난 후폭풍을 몰고 오게된다.
1996년 7월 13일 달라스에 위치한 코카콜라 스타 플렉스에서 공연 후 헤로인 과다 복용으로 심장 마비를 일으키는데 구조대원들에 의해 기적적으로 소생시켜 다행히 살아나게 되고, 그날 밤 안젤모는 동료들에게 사과하고 약물 사용을 그만둘 것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이후로도 한동안 약물 사용은 계속 돼 두번이나 더 죽을 뻔 한 고비를 넘기기도 한다. 유독 이앨범에서 약물과 자기파괴가 주제로 반복되는 이유로 이와 같은 이유이다.
이당시 안젤모는 위험한 발언으로도 악명이 상당히 높았다. 무대위에서 간혹 하지 말아야할 실언을 하기도 했는데, 한 콘서트에서는 "랩 음악이 백인의 살인을 옹호한다" 라는 인종차별적인 실언을 하기도 하는등 기타 논란을 살만한 발언을 서슴없이 해 밴드의 이미지를 실추 시키는등 언론의 많은 지탄을 받았다.
6.6. 라이브 앨범
6.6.1. OFFICIAL LIVE: 101 PROOF
판테라의 유일한 라이브 앨범. 1번부터 14번 까지는 5집부터 8집까지의 베스트 곡들을 추려놨으며, 두곡의 스튜디오 녹음 곡이 추가됐다. 유튜브에 돌아다니는 많은 부틀렉과는 달리 상당히 양질의 음질을 들려주며 특히 보컬 안젤모의 성량과 완급조절, 비니 폴의 폭발적인 투베이스 드러밍, 다임백의 날카로운 피킹을 동반한 변칙적인 리프, 렉스 브라운의 묵직한 베이스 연주를 더불어 최상의 라이브를 보여준다. 중간중간 안젤모의 관중들과의 소통도 감상 포인트.'''"All I’ve been sayin’ for fuckin’ Years, to all these stupid fuckin’ experts,
내가 씨발 몇 년 동안이나 이 병신같은 음악 전문가 새끼들한테 했던 말들 말이야,
hey, you know what the experts are tellin’ you?
야, 그 전문가 새끼들이 뭐라고 한지 알아?
Heavy music is dead and gone.
헤비한 음악들은 다 죽었고 이제 끝이래.
But y’all do me a favor,
그렇지만 내가 너희들 한테 부탁 하나만 할께,
y’all turn around and look at each other, turn around and look at all these fuckin’ people here,
지금 여기 모인 모두 돌아 서서 서로를 봐, 돌아 서서 여기 이 빌어 먹을 사람들을 봐"'''
'''"Official Live: 101 Proof - Sandblasted Skin" 中'''[52]
앨범커버가 독특한데, 와일드 터키 라는 아메리칸 위스키, 버번 위스키의 도수 함량을 나타내는 "101 Proof"(50.5%)와, No.5 라고 지칭한 전체적인 커버 이미지는 잭 다니엘스 Old No.7을 래퍼런스 한 것인데 No.5를 지칭 함으로써 밴드가 이를 다섯 번째 '공식' 발매라고 여기며, ''''Cowboys From Hell' 이전의 디스코그라피를 철저히 부정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6.7. 9집 REINVENTING THE STEEL
마지막 스튜디오 앨범인 '''Reinventing the Steel'''은 판테라답게 끝까지 양질의 음악을 들려준다.
사운드로 따지면 지나치게 헤비해졌던 4집의 연장선상이 아니라 초반 1~2집 때로 회춘하였지만, 그 때 앨범들보다는 그루브를 전체적으로 강조 하였으며 더 깔끔하게 정돈된 사운드를 선보이며 꽤 높은 완성도를 선보인다.
하지만 메이저 4집 앨범 레코딩부터 서로 다른 스튜디오에서 따로따로 녹음했을 정도로 데럴 형제와 안젤모 사이의 감정에 골이 깊어진 상태였고 몇 년 동안 활동이 없다가 갑툭튀한 앨범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다른 앨범에 비해 묻혀버린 경향이있다. 때문에 판테라의 메이저 디스코그라피중 유일하게 100만장을 판매하지 못해 플래티넘을 받지 못한 앨범이기도 하다.
앨범의 표지가 꽤 웃기게 찍혔는데 표지 그림은 필립 안젤모의 친구인 Scott Caliva (1967-2003)가 찍은 사진으로, 스콧은 모닥불이 세워진 필립의 집에서 파티에 참석하면서 사진을 찍었는데, 후원자 중 한 명이 모닥불을 뛰어 넘어다니는 장난을 하게 되고, 스콧은 그 순간을 포착하여 사진을 남겨 후에 Reinventing the Steel의 표지로 쓰게 된다.
6번 트랙인 "Death Rattle"이 네모바지 스폰지밥시즌 2의 '다람이의 겨울잠' 편에 수록되었다.
6.8. 내한 공연
당시 Reinventing The Steel의 'Revolution is My Name' 으로 그래미 베스트 메탈 퍼포먼스 부분에 노미네이트 되었던 판테라는 마지막 앨범 Reinventing The Steel의 5월 한달 동안 이뤄질 아시아 투어의 첫 공연으로, 한국에 방문했다. 원래 4월15일 체조경기장에서 열릴 예정이였지만, 폭설로 체조경기장의 천장이 붕괴되는 바람에 5월 6일로 딜레이 되버렸다.우리는 공연이 얼마나 이어지는가에는 관심이 없다.
우리의 이기심이나 주머니를 채우기 위한 큰 공연장은 필요 없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우리처럼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앞에 서는 것이다.
Rock N' Roll을 사랑하고 우리의 공연을 보고 싶어하는 사람이
단 한명이라도 있는 한 우리는 거기 있을것이다.
'''필립 H. 안젤모 (Philip H. Anselmo)'''
당시 내놓라는 메탈 밴드가 락 불모지였던 한국에 와서 공연한다는게 장안의 화제였고 당시 티겟값이 6~7만원 상당했음에도 불구하고 테니스 경기장 1~2층이 꽉 차고도 남을정도로 많은 인파가 몰렸다. 멤버전원이 판테라 빠돌로 유명한 한국의 헤비메탈 밴드인 디아블로가 당시 게스트로 참여했다. 판테라를 보러온 한국인 말고도 외국인들도 꽤많이 참석했는데 과도한 모싱과 충돌로 한국인들과 외국인들 사이에서 분쟁이 일어 날 뻔 했다고도 한다.
진행이 매끄럽지 못했다는 평가가 많은데, 당시 5월 6일 오후 7시가 공연 시작이였고 제 시간보다 공연이 약 30 ~ 40분정도 딜레이 됐다. 또 하필이면 저 날이 일요일이였고 공연은 공연대로 늦게 끝난 마당에 설상가상으로 많은 인파가 한번에 빠지면서 일대 교통이 정체되기도 하였는데 다음날이 출근이였던 직장인들이 콘서트에서 진을 빼놓고 새벽늦게 귀가하여 직장에 대거 지각을 하는 웃지못할 헤프닝도 있었다.
내한 당시에 M.net의 Time to Rock에서 프로그램의 진행자이자 크래쉬의 베이시스트 안흥찬이 판테라와 인터뷰를 했는데 이 때, 필립 안젤모가 한 인종차별 발언이 미본토에서 문제가 된 적이 있다. 대충 락은 백인의 음악인데 백인 꼬마들이 락 안 듣고 랩이나 한다며 백인이 왜 흑인들 음악 듣냐라는 투였다. [56]
답게 상당한 폭발적인 반응을 보였고 공연자체도 성황리에 끝났다. 한국 팬들의 반응에 만족한 안젤모가 "언젠간 너희들을 보러 다시 돌아오겠다" 라고 직접 언급 하기도 하였다.
공연 직후 팬 서비스 차원에서 관객에게 뿌렸던 비니 폴의 드럼 스틱을 현재 메탈음악과 아티스트 리뷰를 주제로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시는 "헤드뱅어" 님 께서 소장 중이라고 한다.
7. 해체
마지막 스튜디오 앨범의 발매후 판테라는 앨범의 홍보를 위해 바쁜 스케줄을 보낸다. 이시기에 오지 오스본이 주최하는 Ozzfest에서 좋은 라이브를 펼치기도 하였으며 2001년에는 동료 메탈 밴드인 모비드 엔젤 ,스크레이프 ,슬레이어 및 스테틱-X 와 함께 북미 Extreme Steel 투어를 진행했다. Extreme Steel 투어에 이어 유럽투어 일정이 잡혀있었는데,당시 9.11테러의 여파로 유럽투어 계획이 단축되고, 이로 인해 밴드는 모든 항공편이 결항되면서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6일간 발이 묶이게 된다.
2001년 8월 28일 일본 요코하마에서 열린 '비스트 페스티벌' 에서 마지막 공연을 했다. 판테라 멤버들이 다같이 공연 한 것은 이번이 마지막이였다. 모든일정을 마치고 돌아온 밴드는 2002 년 여름에 네 번째 홈 비디오를 발표하고 그해 연말에 또 다른 스튜디오 앨범을 녹음할 계획 이었으나 둘 다 나오지 않았다.
이무렵 안젤모는 밴드를 1년정도 떠나 쉬었다 오겠다고 비니 폴에게 말하고 밴드를 떠나는데, 쉬고 오겠다는 말과는 다르게 그해 5월, 본인의 프로젝트 밴드 Superjoint Ritual의 데뷔 앨범 Use Once and Destroy를 발매하고, DOWN의 투어일정을 잡는 등 본인의 발언에 모순되는 행태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 사실을 알아챈 애벗 형제는 좌절했고 안젤모가 돌아올것을 희망하면서 기약없는 기다림을 시작하는데, 그 기다림은 2년이상 지속되고 그 와중에 설상가상으로 안젤모가 다른 밴드원들과의 소통마저 차단해버리는 독단적인 행동까지 보인다. 안젤모가 밴드를 내려놨다고 느낀 애벗 형제는 더이상 기다림을 지속하지 않고 안젤모의 해고가 아닌, 밴드의 해체. 잠정적이었던 휴식은 결국 영구적인 결별의 형식으로 2003 년 11월에 공식적으로 해체발표를 하며 길고 길었던 판테라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게된다.
8. 비극적인 다임백 대럴의 죽음
8.1. 배경
판테라의 씁쓸한 해체선언 이후 애벗 형제는 데미지플랜 이라는 새로운 메탈밴드를 창립한다. 그리고는 2004년 2월 데뷔앨범인 ''''New Pound Power'''' 발표하며 앨범 홍보 차원에서 투어를 돌며 누구보다도 바쁜 한해를 보낸다.
총격사건이 벌어지기 8개월전인 2004년 4월 5일 용의자 나단 게일은 오하이오 주 신시내티에 있는 Bogart의 나이트 클럽에서 데미지 플랜의 공연중 무대에 오르려는 돌발행동을 한다. 하지만 이때 게일은 무장하지 않았고 그로인해 무대위에 오르기전 경비원들에게 제제당한다. 하지만 공연장 밖으로 끌어내려는 경비원들에게 저항하느라 무대의 조명장비를 넘어뜨려 약 2000달러 상당의 금전적인 피해를 입혔다.
이때 데미지플랜의 보컬리스트 '패트릭 라흐만'은 이일을 가볍게 넘겼는데, 고소를 진행하면 언젠간 다시 신시내티로 돌아왔어야 했고 귀찮음을 감소하면서까지 고소를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게일에 대한 고소를 취하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렸다.
8.2. 사건 발생
- 2004년 12월 8일 나이트 클럽 알로사 빌라 에서는 그날의 헤드라이너인 데미지플랜이 약 250명의 관객앞에서 공연을 펼치고 있었다. 그날 공연의 첫번째 곡이였던 "Breathing New Life"를 연주하자 클럽 옆문을 통해 몰래 클럽안으로 침입한 게일은 그대로 무대위로 달려가 9mm 베레타로 다임백을 저격한다.[61] 공연을 시작하자마자 다임백은 총 4번의 총격[62] 을 받고 그자리에 쓰러진다. 타겟이였던 다임백이 쓰러지자 용의자 게일은 곧바로 주변인들을 향해 권총을 쏘기 시작한다.
- 에린 홀크 (Erin Halk .29) : 게일이 권총을 들고 무대에 올라 갔을때 클럽 뒷문을 지키고 있었으며, 다임백을 저격한 게일의 무장해제를 시도하다가 장전을 끝마친 게일에 의해 6발[63] 의 총상을 맞고 사망.
- 나단 브레이 (Nathan Bray .23) : 당시 공연을 관람하던 관객. 다임백의 총격을 목격하고 스테이지로 뛰어들었다가 가슴에 총상을 맞고 사망.
- 제프 "메이헴" 톰슨 (Jeff “Mayhem” Thompson .40) : 당시 데미지플랜 보안요원. 총상을 입은 다임백을 지키기 위해 달려들 때 세 발의 총상을 맞고 사망.
- 나단 게일 (Nathan Gale .25) : 다임백을 포함한 4명의 사상자를 낸 게일은 다리에 두발의 총상을 입은 데미지플랜의 드럼 기술자 존 브룩스 (John Brooks .30)를 인질로 잡고 경비원들과 대치하고 있었다. 당시 신고를 받은 경찰중 사고현장에서 3분안쪽의 거리에 있던 경찰관 제임스 니그마이어 (James Niggemeyer)는 클럽의 뒷문으로 몰래 잠입해 대치중이던 게일의 뒤쪽으로 돌아가 게일의 머리에 총격을 가해 현장에서 사살됨.[64]
8.3. 사건 이후
한때 정말 잘나갔었고 상당히 인지도가 높았던 촉망받던 기타리스트가 무대위에서 공연중 광팬에 의해 무대위에서 살해당했다는 소식은 정말 엄청난 충격이였다. 또한 살해의 동기가 명확하지 않은 한낯 정신병자에 의한 살해라는 사실은 많은 메탈 팬들과 동료 뮤지션들의 공분을 샀다.
게일은 사건 이전부터 상당히 문제가 많았다. 어린 나이부터 마약에 손을대 마약중독에 시달렸고 재활원으로 보내 재활치료를 받아야 할만큼 그증세가 심했다. 또한 후에 편집증 같은 정신분열증도 앓고 있었다고 밝혀졌다.[65]
나단 게일는 고등학교 때부터 판테라의 팬이었고, 2003년 해체 후에도 밴드에 심하게 집착했다. 게일의 전 친구는 평소 게일이 본인이 작곡한 곡을 봐달라고 했었고, 이를 살펴본 친구중 한 명이 판테라의 가사를 베꼈다고 언급하자 격분한 게일은 판테라가 그의 가사를 배꼇고 판테라의 멤버들이 자신의 아이디어를 훔치려고 한다는 주장을 했다고 진술했다.
또한 사건 이전에 애벗 형제와 사이가 좋지않았던 안젤모가 메탈 해머 인터뷰에서 "다임백은 좀 쳐맞을만 하다"[66] 라는 뉘앙스의 발언을 한것이 문제였는데 평소 정신병력이 있던 나단게일이 이를 확대해석해서 다임백을 암살했다라는 루머가 퍼져 안젤모가 여론에 심한 질타를 받았다. 후에 경찰 조사 결과, 판테라의 분열이나 안젤모와 애벗형제 사이의 분쟁에 의한 총격이라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고, 게일이 인터뷰를 읽었다는 증거 역시 찾을수 없었다.[67]
하지만 이소식은 사실여부를 따지기도 전에 다임백의 형이 였던 비니 폴 에게로 흘러들어갔고, 비니는 후에 메탈 헤머의 안젤모 인터뷰의 오디오 녹음본을 듣길 요청했다. 안젤모의 쳐맞을만 하다라는 발언을 들었을때 그 발언을 할 당시 만큼은 안젤모가 진심이였다고 결론지은 비니는 그시점 이후로 안젤모와 일체의 소통을 거부했고, 2017년 인터뷰에서 전 판테라 베이시스트 렉스브라운은 비니가 자신과 안젤모에게 말을 걸지 않을것이라고 말하며, 판테라의 재결합이 실현되지 못한 이유로 이일을 가장먼저 언급했다.
아무리 사이가 안좋았어도 10대 후반부터 30대초 중반을 같이 보낸 친구의 갑작스러운 사망소식에 안젤모는 큰 충격을 받았고, 걷잡을수 없이 커져버린 안젤모를 향한 대럴 유족들의 분노와 당시 그를향한 좋지않은 여론덕에 안젤모는 장례식장에 초대조차 받지 못했다.
불의의 다임백 총격사건은 음악 공연장의 보안에 관한 논쟁으로 이어지게되는 계기가 됐다. 그로부터 시간이 지난후 미국의 유명한 가수육성 프로그램 더 보이스 출신의 크리스티나 그리미가 2016년 다임백 대럴과 비슷한 상황에서 살해된 후, 판테라는 페이스북을 통해 홍보 담당자와 행사장 주인들에게 예술가들의 보안 향상을 촉구하는 글을 공개했다.
- 전성기에 엄청난 족적을 남긴 밴드이니만큼, 많은 동시대의 밴드들도 유감을 표했다. 다임백의 절친한 친구 잭 와일드는 'In this river'라는 곡으로 다임백을 추모했다.[68]
- 니켈백은 Side Of a Bullet이란 곡으로 다임백 대럴에 대한 추모와 '그의 형이 보고 있었는데 너는 어떻게 방아쇠를 당겼느냐, 소식을 듣고 나는 울면서 칼로 총알에다 네 이름을 새겼어' 라는 가사로 범인에 대한 분노를 담았다. 중간의 기타 솔로는 다임백의 리프를 샘플링 한 것.
- 메가데스의 데이브 머스테인과 드림 씨어터가 대럴을 추모하며 Cemetary Gates를 커버했다.
8.4. 이후 행보
남겨진 비니 폴은 대미지플랜을 해체한 후, 현재 Hellyeah라는 마초스러움으로 도배된 헤비 메탈밴드에서 활동 중이다.
필립 안젤모는 렉스 브라운과 다시 만나서 Down이라는 끈적한 슬러지 메탈 밴드를 구성해 활동하는 중. 필립은 판테라로 한창 전성기를 달리고 있을때도 음악적인 욕심이 상당했는데 본인 스스로가 기존 판테라 스타일에서 벗어난 밴드활동을 상당히 활발하게 했다. 이런 대외활동에 몰두하게 되면서, 아이러니 하게도 판테라 본연의 활동에 오히려 소홀해져 결과적으로 밴드 구성원과의 갈등을 초래했다고 볼수있다.
판테라 이후부터 목관리 실패와 과한 스케줄로 인하여 너무 상해버린 목소리로 인해서 현재 활동작의 세간의 평은 썩 좋지 않다고한다. Down 외에도 솔로 활동[69] 도 하고 있으며 프로젝트 밴드 Superjoint Ritual도 재결성하였다. 또한 필립 안젤모는 2008년 하우스코어 레코드(Housecore Records) 라는 레코드 레이블을 설립, 소유주로써 레이블을 이끌고있다[70]
2011년 렉스 브라운은 Down을 탈퇴하고 Arms of the Sun이란 밴드에서 잠시 활동을 했고 현재는 Kill Devil Hill에서 활동 중이다.
2018년 6월 22일에 드러머 비니 폴이 세상을 떠났다. 비니의 유족들은 사인의 공개를 거부했는데 사인은 심장 발작인 것으로 추정된다. 판테라 해체 이후 몸 담던 헬예에서 추모 공연을 연다고 밝혔다. # 폴의 빈자리는 스톤 사워의 로이 마요르가가 채운다고 알려졌다. #
9. 필립 안젤모 White Power 나치 퍼포먼스 논란
안젤모는 2016년 할리우드에서 열렸던 다임백의 추모공연인 Dimebash에서 또 다시 인종차별 논란에 빠졌다. 공연 끝무렵 마무리 단계에서 술기운이 오른 안젤모는 나치식 인사를 하며 "White Power" 라고 소리치는 추태를 보였는데 이 사건은 당시 공연장에 있던 한 관객의 휴대전화 카메라에 포착돼 유튜브에 영상으로 올라왔다.
이후 인종차별 혐의로 기소가 되는등 사건이 심각해지자 필립 안젤모는 당시 공연중에 무대에 있던 화이트 와인에 관한 본인들 끼리의 농담이 였다고 급하게 해명을 했는데, 당시 그자리에 있던 머신헤드의 프론트맨인 롭 플린(Rob Flynn)이 "그 자리엔 화이트 와인은 없었다. 벡스같은 맥주밖에 없었다." 라고 직접 그날의 진상에 대해 언급[71] 하자 여론은 겉잡을수 없을 만큼 나빠졌다.
판테라 해체 후 안젤모와 말도 하지 않던 비니 폴 마저도 "판테라가 이뤄내고 상징한 모든 것에 먹칠했다. 슬프다"며 "나는 그를 대변할 수 없다"며 필립 안젤모와 그날의 사건에 대하여 아예 외면했다.
평소에도 뒤가없는 언행으로 인해 자주 논란을 샀던 안젤모 였지만 당시 그자리가 다임백 대럴의 추모와 모터헤드의 프론트맨이였던 레미 킬미스터를 기념하는 공연장 이였다는 점으로 인해 메탈 커뮤니티에서 엄청난 질타를 받게됐다.
안젤모는 이후 유튜브 영상을 통해서 공식적인 사과영상을 업로드하며 과거 나치 퍼포먼스에 따른 논란을 "당연하다"고 인정했다.
또한 웹진 '케랑' 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논란은 당연했다. 말 그대로 내가 히틀러처럼 보였으니까" 라고 말했다.
3년이 지나고 안젤모는 자신이 나치를 추종하지 않는다고 또 한번 해명했다. "내 마음속엔 사랑이 있다. 내 정치성향에 의심이 있다면 모두 버려라" 라며 "난 각계각층의 다양한 인물들 사이에서 자랐다. 이제 이 나이면 피부색이나 종교따위로 사람을 판단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라고 말하며 또한 "난 해로운 사람이 아니다. 반동일 뿐이지 말썽꾸러기는 아니다" 라고 덧붙였다.
10. 여담
- 판테라의 음주 사랑은 여느 밴드들 저리가라 할 정도로 독보적이였다. 판테라가 콘서트를 했다고 하면 그날은 백스테이지가 소규모 주류 판매장으로 변할만큼 빡센 파티를 벌여 술을 미친듯이 먹어댔는데, 사실상 술때문에 밴드의 수명이 반쯤 까였다고 봐도 무방하다.
- 밴드 맴버들 자체가 술을 정말 좋아했으며 그중에서도 다임백은 씬에서도 극한의 주당으로도 유명했다. 다임백 사후 안젤모의 회고에 따르면 다임백은 오후6시부터 그다음날 정오까지도 술을 마실정도로 극단적으로 술을 마실수 있었으며 마신후 잠을 자고 다시 일어나 빵과 수프를 먹고 스트레칭후 또 그짓을 반복할수 있을정도의 그야말로 미친 주당이였다고 한다.[72]
- 술을 이정도로 마셔댔으니 인사불성이 되어서 사고를 치고다니는건 비일비재 했고, 이런 일들을 겪으며 밴드의 말로를 지켜본 렉스 브라운은 술을 완전히 끊었다고 하며, 필립 본인역시 술과 약물에 몸이 많이 망가진걸 인지하고 16년도 11월부터 음주를 중단했다고 한다. 또한 안젤모의 고질병이었던 허리 디스크 역시 2005년 수술에 들어가 지금은 많이 좋아 졌다고 한다.
- 판테라의 기타리프는 대부분이 다임백이 만들었지만, 의외로 보컬인 안젤모가 상당수의 곡의 메인리프를 다임백에게 제안을 하며 곡의 제작에 기여 했다고 한다. 본인이 만든 리프를 다임백에게 들려주고 다임백은 필립의 리프를 기반으로 리프를 수정하고 사운드를 보강하는등의 작업으로 많은 명곡을 뽑아내기도하며 서로에게 좋은 시너지를 내기도했다.
- 필립 안젤모는 가운데 머리만 남기고 나머지는 밀어 버린 채, 남은 가운데 머리를 레게 파마하는 독특한 헤어 스타일로 유명하다. 필립 안젤모가 아나콘다를 몸에 두르고 찍은 흑백사진이 퓰리처상을 받기도 했다. 사진 작가는 존 카플란이다. 사진의 제목은 "Age twenty-one in America", 즉 미국의 21살이라는 의미이다. [73]
- 한국에서 1집 'COWBOYS FROM HELL' 과 2집 'VULGAR DISPLAY OF POWER' 는 금지곡이 너무 많아 발매되지 못했다. 금지곡을 추려낸 남은 곡들이 한 장 분량밖에 되지 않자 수입사는 이 곡들을 모아 'Vulgar Display of Cowboys' 라는 편집 음반을 냈다. '지옥에서 온 카우보이들'과 '힘의 천박한 노출'이 합쳐져 '카우보이들의 천박한 노출'이 된 것. 의외로 이 앨범은 해외 판테라 팬들에게 희귀반 취급을 받고 있다. 1집과 2집은 사전심의제도가 폐지된 이후에 정식 발매 되었다.
- 'VULGAR DISPLAY OF POWER' 앨범 수록곡 중 첫번째 트랙인 'Mouth For War' 의 전주 부분이 한때 해피 선데이 시그널 곡으로 사용되었다.
- 밴드가 해체된지 17년이 넘었지만 여느 대기업 밴드들과 마찬가지로 부틀렉들이 쏟아져 나온다.
39TH ANNUAL GRAMMY AWARDS (1996)
40TH ANNUAL GRAMMY AWARDS (1997)
43RD ANNUAL GRAMMY AWARDS (2000)[6] 당시 메탈은 그저 누가 더 복잡한 리프를 만들 수 있고, 더 빠른 속주를 할수 있는가를 경쟁하는 듯한 경향이 팽배했으며, 갈수록 난해해지는 음악에 '서커스 락' 이라는 오명까지 쓴다.[7] 비록 메탈 밴드들의 앨범 판매량과 메탈 팬 자체의 수는 줄어들었을지라도 90년대에 메탈은 여전히 다양한 장르가 탄생하고 있었다. 익스트림 메탈 장르들이 탄생하였고 이에 해당하는 밴드와 앨범이 꽤 나와서 오히려 음악적인 완성까지 이루었다. 뿐만 아니라 유러피언 파워 메탈 계열에서는 기존의 사운드에 자신만의 색체를 더한 카멜롯, 랩소디, 앙그라, 스트라토바리우스 등 여러 밴드가 태동, 발전하고 있었다.[8] 물론 판테라 이전에도 올드스쿨 그루브 메탈은 존재했다[9] 스키드로우의 1집 'Skid Row'와 2집 'Slave to the Grind'와 비교해보면 3집 'sUBHUMAN rACE'가 얼마나 판테라의 영향을 크게 받았는지 확연히 드러난다. 물론 여기에는 스키드로우의 보컬인 세바스찬 바흐가 판테라와 상당히 친분이 있었다는 것도 한몫한다.[10] 어벤지드 세븐폴드의 "Walk" 커버 라이브, 스튜디오 버젼, 그리고 생전 비니 폴과 함께 했었던 "Mouth for war" 커버.[11] 파워드러밍을 위해 항상 2B 드럼스틱을 거꾸로 쥐고 드럼을 친다.[12] 한국과 달리 영미권의 기타리스트들은 보통 프로 데뷔 후에 장르나 스타일을 바꾸는 케이스가 적다.[13] 필립은 판테라 이전 Razer White 라는 밴드에서 활동중이였다. 렉스와 더불어 판테라의 원년 멤버는 아니다.[14] 차후에 나올 앨범의 스타일이나 밴드의 방향성을 고려했을때 기존의 글램메탈 스타일이 남아있다면 앞으로의 밴드의 이미지 메이킹이나 그들의 음악에도 제약이 많이 걸렸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때문에 글램 메탈 이미지를 탈피하는것은 사실상 불가피했다.[15] 주다스 프리스트 느낌이다.[16] 종종 메이저 1집이란 꽤나 기묘한 표현도 사용된다. 물론 Destruction의 Neo-Destruction 시기처럼 변절한 시기를 디스코그라피에서 삭제하는 경우는 종종 있다. 하지만 판테라처럼 소속 레이블을 Atco로 갈아탄 뒤 메이저 레이블 데뷔 이전의 행보를 철저하게 부정하는 경우는 메탈계에서 매우 드물다. Sepultura 같은 경우 Beneath The Remains를, Slayer의 경우 Reign In Blood를 메이저 1집이라는 식으로 표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 않은가. 그런다고 판테라가 내놓은 이 앨범의 가치가 부정되어야 할 것도 아니고, 이전까지의 디스코그래피나 정체성을 이렇게 이상하게 해석하는 것은 지양해야한다.[17] 80~90년대 메탈의 흥행을 함께했던 락 메탈 음악 분야의 명 프로듀서로 손꼽힌다. 그와 작업한 밴드 들만해도 판테라, 슬레이어, 드림시어터, 림프 비즈킷, 데프톤즈, 화이트 좀비, 슬립낫, 사운드가든, 오버킬 등등 이름만 대면 알만한 명밴드와 작업을 하였는데, 특히 판테라의 디스코 그라피에서 5집부터 8집까지 프로듀싱을 담당했기에 판테라의 행적을 거론 할 때, 빼놓고 말할 수 없는 필수적인 인물 이기도 하다.[18] 미국의 마스터링 엔지니어. 200개 이상의 골드 플래티넘을 보유하고 있으며 약 19000여 개 이상의 마스터링 크레딧을 보유하고 있다 세기 말 명반들의 마스터링 대부분이 그의 작품이다.[19] 20주년 기념앨범에 Demo로 존재하지 않음. 곡의 초반 전개가 상당히 특이한데, 곡 시작 초반 1분동안 드럼라인에서 스네어를 배제한 비니폴의 드러밍이 상당히 돋보이는 곡이다.[20] 애석하게도 지금은 고인이 된 다임백 데럴의 것은 실려있지 않다.[21] 앨범의 제목은 윌리엄 피터 블래티(William Peter Blatty)의 소설이 원작인 1973년작 공포영화 엑소시스트 에서 악마에게 빙의된 상대의 소녀의 "That's much too vulgar a display of power." 라는 대사에서 유래했다. 당시 호러 영화 마니아였던 안젤모가 지었다. [22] 바이닐 마스터링 담당[23] 2016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에서 뮤지션들이 스테이지에 등장할 때의 배경음악으로 이 노래의 인트로가 사용되었다. 그리고 게이머라면 익숙한 곡으로, DOOM의 에피소드 3 미션1의 OST로 쓰였다.#[24] 많은 리스너들이 모르는 사실중 하나인 이곡의 메인리프는 다임백이 아닌 보컬인 안젤모가 만들어낸 리프라고 필립 본인이 직접 인터뷰로 밝혔다. 필립이 짜온 메인리프를 다임백이 직접 수정하고 사운드를 정돈해 이곡이 탄생했다.[25] 다임백 대럴 사후에 스래쉬 메탈 밴드 앤스랙스가 대럴을 추모하는 뜻으로 한동안 이곡을 그들의 콘서트에서 연주했다. [26] 곡의 탄생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는데 "Cowboys From Hell" 투어에서 콘서트를 위한 사운드 체킹중에 다임백이 즉흥적으로 연주한 리프가 그 시작이였다고 한다. 맴버들 역시 리프를 마음에 들어했고 그렇게 곡으로 쓰여 판테라의 대표곡이 되었다. 다임백 대럴의 천재성을 내다볼수 있는 부분[27] 미들템포의 육중하면서도 그루브한 리프가 인상적인 「Walk」는 훗날 그루브 메탈을 비롯해 상징적인 메탈의 명곡이 된다. 판테라의 모든 디스코그라피중 유튜브 조회수가 가장높은 곡이기도 하다.[28] 당대 미국의 부조리한 상황이나 정치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내용으로, 가사중 "white man, white man, no stand" 라는 구절 덕분에 인종차별 논란이 있었던 곡이기도 하다. 때문에 당시 국내에 들어올때 당연히 금지곡이였다. [29] 판테라의 콘서트에서 연주된 이력이 없다. 라이브 역시 찾아 볼 수가 없다.[30] 필립 안젤모가 교통사고를 당해 혼수상태에 빠진 자신의 친구를 위해 쓴곡. 판테라식 반전 발라드곡 중 하나. 풀버전으로 부른 라이브 버젼을 찾아보기 힘들다. 데럴과 폴이 사망한 이후에는 웹상에서 이들에 대한 추모곡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31] 앨범발매 당시에 이곡은 미포함 이였던 관계로 이곡의 메인리프는 다음 앨범 'Far Beyond Driven' 의 'Use My Third Arm' 에서 쓰인다.[32] 여기서 중요하다는 것은 기존에 있는 메탈의 특성을 아예 다른 형태로 변환시켰다는 점에서 중요하단 뜻.[33] 후술할 허리통증을 가졌을때의 심정을 그대로 담은 곡. 안젤모는 이당시 기분을 상당히 무서웠다고 표현했다. 또한 본인의 인생에 있어 처음으로 스스로가 취약하다고 느꼇을때 라고 언급했다.[34] 선정적인 곡의 내용과 더불어 상당히 독특한 곡의 전개로 라이브로 연주된 이력은 적지만 이곡은 판테라의 콘서트 초반 인트로 곡으로 상당히 많이 쓰이게 된다.[35] 판테라 디스코그라피에서 박자 자체도 흔하지 않으며 본 앨범에서도 상당히 헤비한 축에 속하는 노래다. 당시 종교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을 고수하던 안젤모의 반신앙적 가사로 인해 논란이 있었다. 혹자는 The Great Southern Trenkill의 예고편 이라고 칭하는 리스너도 많다. [36] 유튜브에서 현존하는 유일한 라이브 버젼[37] 블랙 사바스의 Pananoid 앨범에 수록된 동명의 노래를 커버한 곡. 멤버 전원이 헤비메탈의 개척자인 블랙 사바스를 가장 좋아하는 밴드라고 언급해왔는데 그 애정은 이들의 디스코 그라피에서도 드러난다. 총 3곡의 블랙 사바스 곡을 커버했는데 Planet Caravan, Eletric Funeral, Hole In The Sky가 있다. [38] 이건 1991년 메탈리카의 '''The Black Album'''에 이어 3년만에 나온 값진 기록. 그 3년 동안 메가데스가 본인들의 최고 성적인 '''2위''' ''' Countdown to Extinction'''으로 기록한 게 1위에 가장 근사값이었다.[39] 라이브 이력 없음[40] 이 음악은 드래곤볼 극장판 8기 북미 더빙판에서 브로리가 변신할 때 쓰인다.[41] 이 앨범의 발매이후 라이브에서 시작 전 인트로 곡으로 쓰이게 되며, 곡이 끝나면 무대의 장막이 떨어지며 파트 2로 넘어가는 형식으로 공연을 선보였다.[42] 라이브 이력 없음[43] '''"I Hate Alternative Music"''' 이라고 떡하니 써져있는 티셔츠를 입고 공연했다. 판테라가 당시 음악 주류 시장의 얼터너티브 열풍에 얼마나 비판적이였는지, 당시 메탈씬에서 얼마나 큰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는지 단번에 보여준다.[44] 이 곡의 기타 아웃트로는 그야말로 베스트 중의 베스트. 엄청나게 유니크한 사운드를 들려준다. 곡의 사이 사이에 빗소리, 천둥 번개소리를 동반하며 필립 안젤모의 블루지한 보컬, 렉스의 육중한 베이스, 비니폴의 강력하면서 섬세한 드러밍이 합쳐져 더욱더 암울한 분위기를 연출한다.[45] 평소 필립 안젤모와 친분이 두터웠다. 8집 발매후 동명의 타이틀곡 The Great Southern Trendkill 을 커버하기도 했다. 2011년 6월 11일 갑작스럽게 사망했는데 사인은 심장마비로 추정된다.[46] Corrosion of Conformity의 기타리스트[47] 슬러지 메탈 밴드 크로우바의 베이시스트[48] 코로나 이전 내한했었던 Eyehategod의 드러머[49] 크로우바의 기타리스트. Hatebreed의 제이미 자스타와 함께 Kingdom of Sorrow 라는 밴드도 하고있다.[50] 이 당시 안젤모 스타일. 왠만한 하드코어 펑크 밴드 라이브 보다 더 과격하다.[51] 기적적으로 죽다 살아난 후 인터뷰에서 소감을 밝혔다.[52] 당시 안젤모는 얼터너티브 광풍에 초토화된 당시 상황에 대하여서는 상당히 비판적이고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였으나, 아이러니 하게도 얼터너티브 락이나 그런지 음악성 자체에 관해서는 긍정적이였다. 앨리스 인 체인스, 사운드가든 같은 밴드 들과도 개인적으로 친분이 두터웠고 너바나의 음악성을 극찬하기도 했지만, 당시 얼터너티브 열풍에 편승한 메탈리카나 메가데스 같은 밴드들에게 변절자라고 노골적으로 표현하며 메탈음악에 상당한 프라이드를 보여줬다.[53] 마지막 앨범에서는 이전 앨범 엔지니어링을 총괄했던 테리 데이트가 빠지는데, 20주년 앨범에는 테리 데이트 믹스 버전이 새롭게 추가됐다.[54] 평소 판테라 멤버들과 친분이 있었던 슬레이어의 케리 킹이 아웃트로 기타 피쳐링을 담당했다.[55] '''We'll Grind That Axe fora Long Time''' 은 어떤 면에서 우리 밴드의 모토이자 좌우명이다. - Philip Anselmo[56] 그런데 록 뮤직의 뿌리가 되는 로큰롤 자체는 흑인 음악이다. 리틀 리처드, 척 베리, 패츠 도미노 등이 흑인이라 저작권에도 무지하고 인기를 얻지 못할 무렵 나타나 황제 자리를 차지한 사람이 바로 엘비스 프레슬리이며 이때서야 백인이 록 뮤직의 주류가 된 것이다. 그래서 몇몇 흑인 뮤지션들은 엘비스 프레슬리나 팻 분 같은 초기 백인 록 가수들을 흑인 노래 훔쳐서 뜬 도둑쯤으로 보기도 한다.[57] 연도만 다른 존 레논의 사망일자와 같은 12월 8일이다. 광팬에 의한 살인이라는 점까지도 똑같아서 종종 같이 거론된다.[58] 용의자 포함[59] 용의자[60] 정말 눈깜짝할 사이에 무대로 걸어들어가 공연중인 다임백에게 권총을 난사한다.[61] 이때 당시 관객들은 다임백을 향한 게일의 총격이 공연 연출의 일부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62] 오른쪽 뺨, 왼쪽 귀, 후두부, 오른쪽 손[63] 가슴에 4번, 손과 다리에 각각 한발씩[64] 용의자 사살후 그의 몸을 수색했는데 약 30발이 넘는 여분의 총알이 추가로 발견돼, 더 큰 피해를 막을 수 있었다.[65] 그의 시신을 부검한 결과 처방받은 처방전을 오랫동안 복용하고 있지 않다는것이 밝혀졌다.[66] "deserves to be beaten severely" 라고 말했다.[67] 안젤모는 이 루머를 믿는 메탈팬들과 네티즌에게 지금까지도 질타를 받고있다.[68] 뮤비에는 두 사람의 어린 시절의 모습을 한 두 꼬마의 모습과(어린 잭 와일드의 모습이 정말 필견) 공연 장면들이 교차편집되는 가운데 잭 와일드가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부른다. 분노와 슬픔으로 도끼로 피아노를 때려부수는 잭 와일드의 모습도 또한 명장면.[69] 필립 H. 안젤모와 범법자들(Philip H. Anselmo and the Illegals), 스코어(SCOUR), EN 마이너(EN Minor)외 기타등등[70] 공식 홈페이지#[71] 사건 이후 롭 플린(Rob Flynn)은 "심각한 양아치"라며 11분에 이르는 영상으로 필립을 인종차별주의자라 비난하며 다시는 판테라 곡을 연주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72] 그냥 일반 맥주같은 상대적으로 약한술이 아니라 위스키, 보드카, 독한 와인들같은 술을 저정도로 먹어대고도 멀쩡했다는걸 보아하니 일반적인 주당의 수준을 넘어섯다.[73] 이 작품은 사실 단독 작품이 아니라 서로 다른 삶을 살아가는 미국 21세 청년 8명의 사진을 모은 사진집의 제목이다. 가장 유명한 필립 안젤모의 사진 외에, NFL 선수, 불법체류자의 자녀로 태어나 미국에서 자란 청년, 뉴욕에서 가장 잘 나가는 모델이 된 아동 성범죄 생존자, 학교를 졸업하지 못하고 낙오된 청년, 마약을 구하기 위해 매춘을 하는 젊은 남자 등의 사진을 모은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