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인
1. 개요
아랍어 : الفلسطينيون
히브리어 : פָלַסְטִינִים
팔레스타인인은 팔레스타인 지역에 전통적으로 거주해오던 주민들을 지칭하는 어휘[1] 로 팔레스타인인이라는 어휘를 어떻게 정의하고 해석해야 하는지에 관련하여 여러 논란이 있다. 일단 팔레스타인인들은 순니파 무슬림이 다수이기는 하지만 기독교를 믿는 팔레스타인인도 적지 않으며, 기독교를 믿는 팔레스타인인들도 종파가 각기 달라서 한 가지로 정의하기 힘들다. 이스라엘 아랍인들 중에서도 자신을 팔레스타인인으로 정의하는 경우가 있고 팔레스타인인으로 정의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오늘날 사마리아인과 가장 '''혈연'''적으로 가까운 민족집단은 팔레스타인인을 들 수 있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이후 팔레스타인인 인구 상당수가 고향을 떠나 해외 각지로 이주하였으며, 이로 인해 오늘날 전 세계의 팔레스타인인 인구의 절반 가까이는 팔레스타인/이스라엘 외 지역에 거주하고 있다. 서안지구와 가자지구에 거주하는 팔레스타인인들의 입지나 상황도 서로 상당히 다른 편이다. 팔레스타인 기독교인들은 가자지구에도 소수 거주하지만 절대다수는 서안지구에 거주한다. 베들레헴 같은 경우 주민 상당수가 기독교인이다. 물론 팔레스타인 인구의 대다수는 무슬림이다. 팔레스타인 무슬림과 기독교인의 차이는 주로 이민에서도 나타나는데 팔레스타인 무슬림들은 같은 아랍 무슬림 국가로 이주를 선호하는 반면 팔레스타인 기독교인들은 레바논의 마론파 등과 마찬가지로 남미 이주를 선호하는 편이었다.
의외로 놓치지 쉬운 사실이지만 '''팔레스타인인과 이스라엘 베두인은 서로 같은 민족이라는 동질감이 없다.''' 이스라엘 베두인들의 경우 이스라엘군에 적극적으로 복무하는데, 전통적으로 네게브 사막을 중심으로 거주해온 이들은 원래 농촌에서 농경 혹은 도시에서 상공업에 종사하는 팔레스타인 아랍인들과 전통적으로 상당히 적대적인 관계였다.
2. 기원
팔레스타인이라는 지명은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의 기록에서 페니키아 이남에서 이집트 이북에 이르는 지역을 의미하며, 플리니우스를 비롯한 로마 제국의 지리학자들도 해당 지역을 팔레스티나라 명명하고 로마 제국에서도 이 지역에 팔레스티나 속주를 건설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 학자들은 반아랍 성향이 강할 수록 고대 팔레스타인과 오늘날의 팔레스타인 아랍인 사이의 직접적인 연관성이 없다고 주장하는 편이다.
일단 해당 지역 주민들은 아랍인이 아니었으나 이 지역 원주민들은 중세 이후 문화적, 언어적으로 아랍화되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동로마 제국 시기 이 지역은 소수의 유대인 인구와 다수의 기독교인 인구가 거주하던 지역으로 동로마 제국 황제들은 정기적으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을 박해하고는 했다. 이슬람의 발흥 이후 칼리프조에서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팔레스타인 지역을 점령하고 우마이야 왕조에서 다마스쿠스와 이스라엘을 중심지로 삼으면서 이 지역의 기독교인 인구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이슬람교로 개종하고 기존에 사용하던 아람어나 그리스어 대신에 점차 아랍어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아랍화되었다. 물론 해당 지역에 고대부터 베두인 유목민들이 거주하지 않던 것은 아니었으나, 팔레스타인 인구의 중추는 시리아나 레바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엄연히 농민이었다.
우마이야 왕조, 압바스 왕조, 아이유브 왕조, 오스만 제국에서 기독교인과 유대인 신민들에게 부과하는 인두세의 일종인 지즈야는 화폐로 납세해야 했는데, 도시민에게는 큰 부담이 아니었을지 몰라도 건조지대에서 농사를 짓는 농민들에게는 얼마 안되는 소출로 화폐를 구입해서 납부해야 하는 이중의 수고를 의미했다. 팔레스타인 농촌 지대의 주민들은 무슬림 위정자들의 박해와 지즈야 세금 부담을 피하기 위해 점점 기독교/사마리아인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하기 시작하는데 오스만 제국 말엽 통계에 의하면 팔레스타인 전체 인구의 10% 정도만이 기독교인이었으나 예루살렘 시민 중 45%가 기독교인이었다고 한다.
도회지에서도 점점 그리스어, 아람어의 입지가 약화되고 아랍어가 통상 거래 용어로 폭넓게 사용되고, 지중해 레반트 지역에서는 유대인들조차도 아랍어를 일상 생활 용어로 사용할 정도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팔레스타인에 거주하던 주민들이 점차 아랍화된 것은 당연했다. 즉 일부 이스라엘 극우파들이 외부에 선전하는 팔레스타인인들이 근현대에 갑자기 뚝딱하고 나타난 베두인들의 후손이라는 식의 프로파간다는 이스라엘 국내에서조차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으며,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선동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수준의 논리적 비약이라고 비판받아도 할 말 없는 주장이다. 오늘날 약 800여 명 정도 남아있는 사마리아인들이 보존하고 있는 민족 전승에서는 무슬림 위정자들에게 박해와 학살을 당할 뻔 했다가 사마리아인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한 친척들이 말려서 간신히 목숨과 재산을 부지했다는 내용의 전승이 흔하며, 20세기 이전부터 예루살렘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은 이웃한 아랍인들과 방언을 비롯한 여러 풍습과 관습을 공유하고 서로의 종교 명절 때 함께 초대하고 어울리던 사이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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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말라의 기독교인 가정
3. 팔레스타인계 기독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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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리스마스를 기념하는 베들레헴의 기독교인들
팔레스타인계 기독교인들은 종파가 상당히 다양한 편이지만 1922년 통계에 의하면 일단 절반 가까이는 정교회(오리엔트 정교회 말고 비잔틴 예법을 따르는 그리스 정교회) 신도이며, 나머지 대부분은 로마 가톨릭 신도 혹은 멜키트 그리스 가톨릭교회 소속이다. 의외로 시리아 정교회 혹은 시리아 가톨릭 교파에 속한 신도들은 얼마 되지 않는다. 물론 오늘날 기준으로는 해외로 이민간 팔레스타인인 중에서 개신교나 로마 가톨릭으로 종파를 옮긴 경우, 혹은 미국 등으로 이민한 팔레스타인인들이 이슬람에서 아예 개신교로 개종한 경우도 드물지 않기 때문에, 이를 오늘날의 경우에 그대로 대입하기에는 곤란하다.
레바논의 기독교인들이 주로 브라질로 이민을 많이 갔다면 팔레스타인의 기독교인들은 상당수가 칠레로 이민을 간 편이다. 이들 팔레스타인인들이 칠레 사회에 가지고 있는 영향력이 생각보다 큰 편인데 칠레 코카콜라 등 칠레 주요 대기업의 지분을 팔레스타인계 가문이 가지고있는 경우가 많고 데포르티보 팔레스티노라는 프로축구팀이 있을 정도이며 팔레스타인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뛰고있는 축구선수 상당수가 칠레출신인것도 이와 연관이 있다. 정계진출도 꽤 활발한 편이라서 칠례 정계에 팔레스타인계 출신들이 상당수 진출해있기도 한다. 그래서 팔레스타인이 독립국가로 발돋움한다면 칠레기업들이 팔레스타인에 진출할것이라는 말이 나온다. 다만 칠레에서 대통령직까지 배출하지는 않았는데 대통령직을 배출한 나라는 엘살바도르으로 그것도 두명씩이나 나왔다. 안토니오 사카와 나이브 부켈레가 엘살바도르계이다.
오늘날의 유대-기독교 이데올로기를 주장하는 대안우파의 주장이나 희망사항과는 다르게 이스라엘의 기독교인 인구 대다수(약 78% 가량)는 원래부터 해당 지역에 거주하던 정교회나 가톨릭 등을 믿던 아랍계 기독교인 인구가 대다수이다. 그 외의 기독교인들은 대부분 예루살렘 신드롬 때문에 혹은 결혼이민 등의 이유로 이스라엘로 이주한 동유럽의 러시아 정교회 신도들이며, 정작 유대인이 기독교 혹은 이른바 "메시아주의 유대교" 등으로 개종한 경우는 선교단체의 과장과 다르게 이스라엘 사회 내에서 실질적인 비중은 크지 않다.
4. 팔레스타인계 무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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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팔레스타인인 대부분은 순니파 무슬림이며, 그중에서도 샤피이파 마드하브를 따른다. 팔레스타인계 기독교인들이 시리아 기독교인들과 좀 경우가 다르다면, 팔레스타인 지역의 이슬람 역사는 시리아의 순니 이슬람 역사와 상당 부분이 겹친다.
초기 이슬람 제국의 우마이야 왕조는 수도는 다마스쿠스였지만 우마이야 칼리프들은 예루살렘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겼는데, 그 이유는 예루살렘의 종교적 상징성 외에도 당시 기독교인 인구가 많던 예루살렘은 역설적으로 아랍인들 입장에서 헬레니즘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대표적인 장소이기도 했기 때문이다.[3] 상술한대로 우마이야 왕조를 거치며 팔레스타인인들은 점차 기독교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하기 시작했다.
우마이야 왕조가 압바스 왕조로 교체된 이후에는 이슬람권에서 예루살렘의 정치적 중요성이 비교적 감소하기는 했으나, 종교적인 상징성 때문에 예루살렘과 팔레스타인 일대는 수피들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예루살렘을 다스렸던 튀르크계 군벌 정권들은 기독교인 순례자 외에도 수피 순례자들로부터 막대한 수입을 거두었으며, 한 때 예루살렘은 수피즘의 중심지로 각광받기도 했다. 이러한 추세를 반영하던 알안달루스(오늘날의 스페인) 출신 수피 사상가 이븐 아라비가 예루살렘에서 자신이 천국으로 승천을 했다고 주장하면서 이슬람 사회에 큰 논란과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다.
예루살렘은 십자군 전쟁 당시 주요 전쟁터이기도 했으며, 동시에 몽골 제국의 침략으로부터 발생한 난민들이 몰려들고 십자군과 함께 파견된 유럽계 성직자들에 의해 가톨릭 선교가 진행되던 지역[4] 으로 그 결과 14세기 무렵 이 일대는 이슬람 신학이 발달하는 중심지이기도 했다. 한발리파 학자 이븐 타이미야는 기독교나 유대교에 대해서는 비교적 유화적인 입장이었으나, 일 칸국의 몽골인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한 일이나 맘루크 왕조에서 튀르크계 군인들이 아랍인들을 차별하던 것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기던 인물로서, 튀르크인들이 선호하는 수피즘을 직접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븐 타이미야는 자신의 저서 "하나님의 동반자와 사탄의 동반자"[5] 에서 이븐 아라비가 사탄의 동반자라고 직접 저격하였으며, 예루살렘은 무슬림에게 있어서 엄연히 메카나 메디나에 비해 중요성이 낮은 장소로서 예루살렘을 순례하고 예루살렘에서 예배한다고 해서 특별한 기적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6] 을 피력하다가 맘루크 왕조와 사이가 틀어져 다마스쿠스의 감옥에서 옥사했다.
이븐 타이미야의 주장은 레반트 지역 아랍인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는데, 그 결과 이븐 타이미야의 제자들 이븐 카이윰 알 자우지야, 이븐 카시르 등의 영향으로 수피즘은 점점 주류 종파에서 밀려나고 시리아와 마찬가지로 이 지역은 샤피이파 중심 지역이 된다. 19세기 이후에는 이슬람 모더니즘이 부흥하면서 시리아의 라시드 리다를 중심으로 초기 형태의 살라프파 신학이 부흥하면서 팔레스타인/시리아 일대의 수피즘은 철퇴를 맞고 몰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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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기준 팔레스타인인 무슬림들은 다른 지역 무슬림들에 비해 아랍계 기독교인이나 시아파에게 훨씬 관대한 편이다. 이스라엘이라는 공공의 적이 있기 때문에 이집트의 이슬람주의자들과 다르게 팔레스타인의 이슬람주의자들은 아랍계 기독교인들과 유화적인 편이며, 레바논 헤즈볼라의 영향으로 주류 순니파의 시아파에 대한 적개심도 다른 지역에 비해 훨씬 약한 편이다. 2012년도 퓨 리서치 센터의 조사에 의하면 팔레스타인에 거주하는 무슬림 인구 중 15%는 이슬람 모더니즘 성향이라고 한다.
5. 팔레스타인계 유대인
유대인 디아스포라 이후에도 계속 팔레스타인 땅에 남아 살아가던 유대인들. 오늘날 이스라엘의 미즈라힘 대다수는 이들의 후손이다. 이들은 팔레스타인 독립전쟁을 기점으로 이스라엘 본토나 해외(특히 유럽이나 아메리카)로 망명한 경우가 많았다. 전자의 경우 이스라엘 정부 주도의 히브리어 부활 이후 히브리어를 쓰면서 팔레스타인 아랍어를 잊어버린 경우가 많으며, 후자의 경우 팔레스타인 아랍어를 온전히 유지하기도 한다.
6. 디아스포라
이스라엘 건국과 중동전쟁 이후 팔레스타인 난민 상당수는 오늘날의 요르단을 중심으로 거주하고 있다. 2017년 통계 기준 공식적으로 요르단에 등록된 팔레스타인인 난민 인구는 2,175,491명에 달하며, 2009년 통계에서는 요르단 내 거주하는 팔레스타인인 인구를 3,240,000여 명으로 추산했다. 난민은 아니지만 요르단의 라니아 왕비도 팔레스타인계이다. 시리아에서도 2018년 기준 55만 2천여 명의 팔레스타인인 난민들이 등록되어 있다고 한다. 레바논의 경우 원래 순니파 무슬림 인구 비중이 낮고 시아파와 드루즈교 및 다양한 아랍계 기독교인들이 주로 거주하던 지역이었으나, 팔레스타인인 난민들이 이스라엘/팔레스타인에서 유입되면서 순니파 인구가 크게 증가했다. 2016년 기준 458,369명의 팔레스타인인 난민들이 등록되어 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카타르의 경우 명목상으로는 수십만여 명의 팔레스타인인 난민들을 받아들였다고 선전하지만 관련 통계의 신뢰성이 낮은 편이다. 오히려 팔레스타인인 이민자들이 많은 나라들은 (특히 상술된 팔레스타인계 기독교인) 칠레와 미국으로 팔레스타인계 혈통을 지닌 칠레인 인구는 50만여 명 정도에 이른다고 한다. 물론 칠레에 정착한 팔레스타인인인들은 따로 자신들끼리만 통혼하는 것은 아니고 칠레 현지인들과 통혼하는 경우가 많고, 그저 자신의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팔레스타인계 기독교인이었구나 정도로 인식하는 경우가 더 많다고 볼 수도 있다. 오늘날 팔레스타인계 칠레인 중에서 무슬림 인구는 5% 미만에 불과하다.
미국에 거주하는 팔레스타인인 인구는 약 25만5천여 명 정도로 추정되기도 하나, 유대-기독교 이데올로기로 인해 팔레스타인에 대한 거부감이 강한 미국 사회 특성상 자신을 팔레스타인계라고 직접 응답하는 경우는 8만여 명 정도에 불과하다고 한다. 에드워드 사이드 교수는 팔레스타인계 기독교인으로서 서구 사회 내에서 이슬람을 넘어서 아예 아랍권 전반에 대한 혐오와 편견을 지적하는 명저 오리엔탈리즘[7] 등을 집필한 적이 있는데, 팔레스타인계 기독교인이라는 그의 백그라운드가 다양한 시각으로 서구 사회의 오리엔탈리즘을 분석하는데 영향을 주었다 볼 수도 있다. 이 외에도 라시다 탈리브 같은 진보 정치인의 경우 에드워드 사이드에 비해 훨신 더 강경한 진보좌파 노선에 해당하며 린다 사서같은 이슬람주의 활동가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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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작 팔레스타인계 미국인 중 대중적으로 가장 유명한 인물로는 지지 하디드, 벨라 하디드, 앤워 하디드 같은 경우가 있는데, 하디드 남매 같은 경우는 부모님 중 아버지 무함마드 하디드 쪽이 팔레스타인 세속주의자(어머니는 네덜란드인)인 경우로 셋 다 이슬람과는 담을 쌓은 경우이긴 한데 자신의 할아버지 여권에 팔레스타인이 찍혀있었다고 인스타그램 상에서 삭제당하자 이를 공개적으로 항의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유럽 기준으로는 독일에 팔레스타인인 후손들이 많이 거주하는 편이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약사에다가 여자 축구심판이라는 커리어를 동시에 가진 걸로 유명한 리엠 후세인이 있다.
7. 오해 및 편견
7.1. 팔레스타인인들은 아라비아 반도에서 이주한 베두인의 후손이다
20세기 초부터 종교시오니스트, 수정시오니스트들이 현재까지 해오고 있는 '''유사역사학''' 주장이다. 그들을 대개 우파시오니즘이라고 불리우는데 그들은 팔레스타인은 원래 무주공산이었다고 우기며 팔레스타인인들을 불법체류자로 간주하고 있다.
노동시오니스트, 리버럴시오니스트는 20세기 초 당시 팔레스타인인들을 외세의 탄압에 대항하여 땅을 지키다가 정체성을 상실하여 아랍인, 무슬림이 되어버린 유대인의 후손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츠비 미시나이같은 이스라엘 내 학자들도 실증적 근거로 팔레스타인인들은 베두인이나 아라비아 반도의 아랍인보다는 이스라엘 아랍인, 아슈케나짐, 세파르디 유대인에 가깝다고 증명했다.[8]
팔레스타인인 중에서 반이스라엘 성향이 심한 사람은 자신이 유대인과 공통 조상이라는 것을 부정하고 있으며 이는 아랍민족주의, 이슬람주의 둘 다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현재 이스라엘의 아슈케나짐은 하자르의 후손이며 이스라엘은 서양제국주의가 만든 식민지라고 생각하고 있다.[9]
7.2. 팔레스타인은 백인이 아니다
우파시오니스트, 대안우파, SJW에서 통용되는 편견으로, 이런 편견은 대개 고의로 이집트인 중 피부색이 짙은 사람들 사진 가져다가 팔레스타인 사람이라고 우기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레반트 지역은 헬레니즘 제국과 로마 제국의 일부로 고대부터 무역이 발달한 지역이었고 인적 자원의 교류가 활발했던 영향으로 흑발, 흑안만 있는게 아니라 적발이나 벽안 등도 드물지 않다. 아헤드 타미미, 나탈리 란티시처럼 금발이나 녹안이 있고 이 문서의 사진을 봐도 팔레스타인 전원이 흑발흑안이 아니고 피부색도 사우디인보다는 남유럽인과 유사하다.
현재 팔레스타인인들은 자신을 백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그 이유는 이집트의 아랍민족주의 시절부터 이어진 옥시덴탈리즘부터 시작해 이슬람주의자들이 '''"아랍인은 서양인이 아니다."''''식으로 타자화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7.3. 팔레스타인인들은 이슬람주의가 대세이고 이스라엘을 없애려고 한다
1947년 이후로 이스라엘이 현재까지도 팔레스타인을 학살, 탄압하고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에 대한 증오가 심각한 것은 현실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에 대한 증오는 팔레스타인 내 이슬람주의자들뿐만 아니라 세속주의자들도 하고 있다. 하마스와 파타가 서로 대립 중이지만 둘 다 이스라엘을 혐오하는 것은 같다.[10]
무슬림 시오니즘을 예시하지 않아도 일부 팔레스타인인들은 츠비 미시나이의 연구를 수용하여 이스라엘과 전쟁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하고 팔레스타인은 고대부터 이스라엘과 조상이 같았다고 생각하며 하마스와 파타의 이스라엘 혐오를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주류 팔레스타인인들로부터 이스라엘 첩자로 의심받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11]
팔레스타인 중앙 정부와 대립하는 가자 지구를 제외하고는 공식적으로 세속주의를 표방하고 있으며 팔레스타인 여성에게 히잡을 강제하지 않고 있다. 대안우파 온건파는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과 다르게 이슬람 국가라서 여성의 노출의 자유가 없다는 식으로 비하하려 하지만, 해변도시로 유명한 텔아비브 근교 주민들과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비교한다는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이스라엘/문화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이스라엘 내륙 예루살렘 일대 주민들은 텔아비브 근교의 주민들과 다르게 사회보수주의 성향이 강하며, 반대로 레바논의 경우 시아파 무슬림이 주류이지만 여성의 복장과 노출이 상당히 자유로운 편이다.
7.4. 팔레스타인인은 바위의 돔을 무슬림만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이슬람주의자의 생각이고 세속적인 팔레스타인인들은 바위의 돔이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의 성지라고 생각하고 있다. 일단 이슬람의 2대 칼리파 우마르부터가 예루살렘 내 기독교와 유대교 유산을 보존, 보호할 것을 명령했었다. 참고로 이 우마르는 순니파 무슬림들로부터 존경받는 사람이자 근본주의자로도 유명했던 사람이다. 바위의 돔은 예루살렘의 유대교와 기독교 역사를 계승한다는 의미로 건설한 것이지, 무슨 땅밟기 목적으로 건설한 것이 아니다. 우마이야 왕조는 동로마 제국에 요청하여 초빙된 기독교인 화가들을 이용해 바위의 돔 내부를 장식한 적도 있다.
팔레스타인에서 사이드 쿠틉 스타일의 이슬람주의가 보급되면서 바위의 돔은 메카의 하람 사원과 마찬가지로 무슬림만이 독점해야한다는 이데올로기가 보급된 적도 있는데, 유대교 근본주의자들과 우파 시오니스트들이 바위의 돔 파괴 위협은 이런 생각을 확산시키는 데에 도움이 되고 있다. 정작 이슬람 교리에서는 메카의 하람 사원 내 비무슬림 출입은 교리상 금지해도, 비무슬림들의 바위의 돔 출입 자체에는 제한이 없다.(바위의 돔은 이슬람 교리상 메카와 메디나 모스크 다음가는 권위를 지닌 모스크이지만 메카나 메디나의 경우와 다르게 비무슬림 출입 방문에 제한이 없다.)
8. 관련 문서
[1] 1919년 인구 조사 결과 오늘날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지역 거주 인구의 90%는 이슬람 혹은 기독교를 믿는 팔레스타인인이었다.[2] 일과 단식시간 종료 후 물을 마시고 간단히 식사를 한 후 예배하는 절차[3] 출처: 실크로드 세계사 / 피터 프랭코판. 예루살렘 세계사 / 사이먼 시백 몬테피오리[4] 당장은 아니었지만 장기간의 지속적인 가톨릭 선교 괄과 결과적으로 레반트 지역의 아랍계 기독교인 상당수가 오리엔트 전례는 유지하되, 교황수위권을 인정하는 동방 가톨릭으로 종파를 갈아탔다.[5] 책의 아랍어 제목은 Al Furqan bayna Awliya Ar-Rahman wa Awliya Ash-Shaytan, 번역하면 ‘가장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동반자와 사탄의 동반자를 나누는 기준과 증거’[6] 정확히는 "예루살렘은 경건한 방문으로서의 지위만을 가질 뿐이며 메카를 방문하는 핫지와 동등한 것이 아니다."라고 발언했다.[7] 국내 번역판만 보면 이딴게 왜 명저인가 의문스러울 수도 있는데, 영어 원문은 문체가 아주 유려한 편이다. [8] 아슈케나지 중에서도 개종자들이 있었지만 당시 로마인의 유대교 혐오를 피해 유대-로마 전쟁이전과 이후에도 자발적으로 로마의 행정이 미치지 못했던 중부유럽으로 간 팔레스타인 유대인도 있었다. 그래서 일부 아슈케나지의 DNA가 팔레스타인인과 유사한 결과가 나온 것이다. 다만 유대-로마 전쟁 이후로 팔레스타인 유대인들이 모두 북아프리카나 유럽전역으로 추방되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 아닌 시오니즘이 내세우는 민족신화이다.[9] 하자르 가설은 이미 반박되었지만 아직도 반유대주의나 반이스라엘, 반시오니즘 사이에서는 유대인이 금발벽안이 나올 수가 없다는 이유로 통용되고 있다. 유대교 역시 선교를 했기 때문에 유라시아 각지에서 개종자들이 있었고,(근대 러시아의 문맹 농노들이 유대교로 개종한 숩보트닉 같은 경우도 있었다) 아슈케나짐은 중부유럽 일대에서 거주하던 유대인들인데, 폴란드-리투아니아 시절에는 유대인의 권리가 농노보다 높았기 때문에, 부유한 유대인 상인이 현지 농노 사이에서 사생아를 두거나 아니면 코사크들이 유대인 촌락을 약탈하는 와중에 생긴 아이들을 유대교 사회에서 그냥 유대인으로 받아들이는 경우 등등이 많아서 혼혈이 많이 생길 수 밖에 없었다. 정작 카스피해 일대의 하자르 칸국 후손들은 상당수가 셀주크 튀르크(!) 혹은 오늘날 아스트라한의 볼가 타타르족 등으로 흡수된 것으로 보인다.[10] 노동자연대는 하마스를 옹호하면서 하마스가 이스라엘과 공존을 원한다고 전했지만 이는 하마스의 거짓말이다.[11] 박유하가 제국의 위안부를 저술하기 전에도 한국의 혐일, 반일을 비판했기 때문에 당시 한국인들도 그녀를 비난했다. 제국의 위안부 사건으로 그 정도가 심해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