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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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국왕의 자황포(柘黃袍)
청동인으로 찍은 인문.[1]

''''군왕만세, 천하태평.''''

''''君王萬歲, 天下太平.''''

- 고려 당악정재 왕모대가무 중.

''''한 사람에게 기쁜 일이 있으면, 팔표가 내정하며 천하가 태평하다.''''

''''其一人有慶, 八表來庭, 天下太平.''''

- 고려 중동팔관회 중.

1. 역대 국왕
2. 계보도
2.1. 태조 이전
2.2. 초기
2.3. 중기
2.4. 후기
3. 원 심왕 작위 보유자
4. 재위하지 않고 추존된 군주
5. 제후왕 목록
6. 비정통 국왕
7. 왕족들의 후일담(야사)
8. 여담
9. 참고항목


1. 역대 국왕


고려사에 기록된 고려 군주들의 시호는 국왕의 '''총서'''와 '''세가 마지막 조'''에 서로 다르게 기록되어 있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땐 총서 기준으로 작성했고 세가 마지막 조 기준은 각 왕 문서에서 볼 수 있다.
대수
묘호/칭호
시호
휘(이름)
재위 기간
능호
01
태조
(太祖)
응운원명광렬대정예덕장효위목신성대왕
(應運元明光烈大定睿德章孝威穆神聖大王)
왕건(王建)
918년 6월 15일 ~ 943년 5월 29일
현릉(顯陵)
02
혜종
(惠宗)
인덕명효선현의공대왕
(仁德明孝宣顯義恭大王)
왕무(王武)
943년 5월 30일 ~ 945년 9월 15일
순릉(順陵)
03
정종
(定宗)
지덕장경정숙문명대왕
(至德章敬正肅文明大王)
왕요(王堯)
945년 9월 15일 ~ 949년 3월 13일
안릉(安陵)
04
광종
(光宗)
홍도선열평세대성대왕
(弘道宣烈平世大成大王)
왕소(王昭)
949년 3월 13일 ~ 975년 5월 23일
헌릉(憲陵)
05
경종
(景宗)
지인성목명혜헌화대왕
(至仁成穆明惠獻和大王)
왕주(王胄)
975년 5월 13일 ~ 981년 7월 11일
영릉(榮陵)
06
성종
(成宗)
강위장헌문의대왕
(康威章憲文懿大王)
왕치(王治)
981년 7월 12일 ~ 997년 10월 27일
강릉(康陵)
07
목종
(穆宗)
정공극영위혜효사선양대왕
(靖恭克英威惠孝思宣讓大王)
왕송(王誦)
997년 10월 27일 ~1009년 2월 3일
의릉(義陵)
08
현종
(顯宗)
달사덕위대효원문대왕
(達思德威大孝元文大王)
왕순(王詢)
1009년 2월 3일 ~ 1031년 5월 23일
선릉(宣陵)
09
덕종
(德宗)
광장강명선효경강대왕
(光莊剛明宣孝敬康大王)
왕흠(王欽)
1031년 5월 23일 ~ 1034년 9월 17일
숙릉(肅陵)
10
정종
(靖宗)
홍효안의강헌용혜대왕
(弘孝安毅康獻容惠大王)
왕형(王亨)
1034년 9월 17일 ~ 1046년 5월 18일
주릉(周陵)
11
문종
(文宗)
장성인효대왕
(章聖仁孝大王)
왕휘(王徽)
1046년 5월 18일 ~ 1083년 7월 18일
경릉(景陵)
12
순종
(順宗)
정헌영명선혜대왕
(靖憲英明宣惠大王)
왕훈(王勳)
1083년 7월 18일 ~ 1083년 10월 23일
성릉(成陵)
13
선종
(宣宗)
안성사효대왕
(安成思孝大王)
왕운(王運)
1083년 10월 24일 ~ 1094년 5월 2일
인릉(仁陵)
14
헌종
(獻宗)
정비공상대왕
(定比恭殤大王)
왕욱(王昱)
1094년 5월 2일 ~ 1095년 10월 7일
은릉(隱陵)
15
숙종
(肅宗)
강정문혜명효대왕
(康正文惠明孝大王)
왕옹(王顒)
1095년 10월 8일 ~ 1105년 10월 2일
영릉(英陵)
16
예종
(睿宗)
제순명렬문효대왕
(齊順明烈文孝大王)
왕우(王俁)
1105년 10월 2일 ~ 1122년 4월 6일
유릉(裕陵)
17
인종
(仁宗)
극안공효대왕
(克安恭孝大王)
왕해(王楷)
1122년 4월 6일 ~ 1146년 2월 28일
장릉(長陵)
18
의종
(毅宗)
강과장효대왕
(剛果莊孝大王)
왕현(王晛)
1146년 2월 28일 ~ 1170년 9월 기묘일
희릉(禧陵)
19
명종
(明宗)
황명광효대왕
(皇明光孝大王)
왕호(王晧)
1170년 9월 기묘일 ~ 1197년 9월 계해일
지릉(智陵)
20
신종
(神宗)
경공정효대왕
(敬恭靖孝大王)
왕탁(王晫)
1197년 9월 계해일 ~ 1204년 1월 13일
양릉(陽陵 )
21
희종
(熙宗)
인목성효대왕
(仁穆誠孝大王)
왕영(王韺)
1204년 정월 가사일 ~ 1211년 12월 계묘일
석릉(碩陵)
22
강종
(康宗)
준철문열단총명헌이모목청원효대왕
(浚哲文烈亶聰明憲貽謀穆清元孝大王)
왕오(王祦)
1211년 정월 기사일 ~ 1213년 8월 9일
후릉(厚陵)
23
고종
(高宗)
안효대왕(安孝大王)
충헌왕(忠獻王)[A]
왕철(王㬚)
1213년 8월 무인일 ~ 1259년 6월 30일
홍릉(洪陵)
24
원종
(元宗)
순효대왕(順孝大王)
충경왕(忠敬王)[A]
왕정(王禎)
1259년 6월 임인일 ~ 1274년 6월 18일
1269년 11일 ~ 1274년 6월 18일
소릉(昭陵)
25
충렬왕
경효대왕(景孝大王)[C]
충렬왕(忠烈王)[B]
왕거(王昛)
1274년 6월 계해일 ~ 1298년 1월 갑진일
1298년 8월 임신일 ~ 1308년 7월 갑인일
경릉(慶陵)
26
충선왕
헌효대왕(憲孝大王)[C]
충선왕(忠宣王)[B]
왕장(王璋)
[2]
1298년 1월 병오일 ~ 1298년 8월 임신일
1308년 8월 갑인일 ~ 1313년 3월 갑인일
덕릉(德陵)
27
충숙왕
의효대왕(懿孝大王)[C]
충숙왕(忠肅王)[B]
왕만(王卍)
[3]
1313년 3월 갑인일 ~ 1330년 7월 갑자일
1332년 2월 갑자일 ~ 1339년 3월 계미일
의릉(毅陵)
28
충혜왕
헌효대왕(獻孝大王)[C]
충혜왕(忠惠王)[B]
왕정(王禎)
[4]
1330년 2월 초하루 임오일~1332 2월 갑자일
1339년 3월 계미일~1343년 12월 계축일
영릉(永陵)
29
충목왕
현효대왕(顯孝大王)[C]
충목왕(忠穆王)[B]
왕흔(王昕)
[5]
1344년 2월 정미일 ~ 1348년 12월 5일
명릉(明陵)
30
충정왕
충정왕(忠定王)[6]
왕저(王胝)
[7]
1348년 12월 ~ 1351년 10월 임오일
총릉(聰陵)
31
공민왕
인문의무용지명열경효대왕
(仁文義武勇智明烈敬孝大王)[8]
공민왕(恭愍王)[9]
왕전(王顓)
[10]
1351년 10월 ~ 1374년
현릉(玄陵)
32
우왕
-
,<여흥왕(驪興王)>,[11]
왕우(王禑)[12]
1374년 9월 병술일 ~ 1389년 6월 경술일
-
33
창왕
-
,<윤왕(允王)>,[13]
왕창(王昌)
1388년 6월 ~ 1389년 11월 무인일
-
34
공양왕
공양왕(恭讓王)[14]
왕요(王瑤)
1389년 11월 ~ 1392년 7월 17일
고릉(高陵)

2. 계보도


  • 이름인 휘(諱)만 기재되어 있다.

2.1. 태조 이전


  • 굵은 글씨는 추존되었거나 즉위해서 왕이 된 인물이다.
호경
강충
보육
덕주
'''이제건'''
'''작제건'''
'''왕륭'''
'''왕건'''
고려 건국 설화를 기반으로 구성했기 때문에 사실과 거리가 멀 가능성이 높다.

2.2. 초기


성씨는 모두 왕(王)이다.
'''1.
'''
'''2.
'''

'''3.
'''
'''4.
'''



­
'''5.
'''

'''6.
'''
'''8.
'''
­
'''7.
'''
'''9.
'''
'''10.
'''
'''11.
'''


2.3. 중기


'''11.
''' ­
'''12.
'''
'''13.
'''
'''15.
'''



'''14.
'''

'''16.
'''



'''17.
'''
'''18.
'''

'''19.
'''
'''20.
'''



'''22.
'''
'''21.
'''


'''23.
'''

­'''24.
'''
'''-'''
''''''

2.4. 후기


­'''24.
'''
'''25.
'''

'''26.
'''

'''27·28.
'''

'''27.
'''
'''-'''
''''''
덕수
'''28.
'''
'''31.
'''
'''31.
토크토아
부카
'''
'''29.
'''
'''30.
'''
'''32.
'''

'''33.
'''


2.5. 양양공 계열(공양왕)








'''34.
'''




2.6. 정간왕 계열(승화후)











3. 원 심왕 작위 보유자


순서
휘(이름)
재위기간
생몰년도
비고
01
왕장(王璋)
왕이지르부카(王益知禮普花)
1307년 혹은 1308년 ~ 1316년
1275년 ~ 1325년
고려 충선왕
02
왕고(王暠)
왕올제이투(王完澤禿)
1316년 ~ 1345년?
? ~ 1345년?
충렬왕의 손자
심양왕 → 심왕으로 격상
03
왕흔(王昕)
왕바스마도르지(王八思麻朶兒只)
1345년? ~ 1348년?
1377년 ~ 1348년
고려 충목왕
04
왕저(王胝)
왕미스젠도르지(王迷思監朶兒只)
1348년? ~ 1352년?
1337년 ~ 1352년
고려 충정왕
05
왕토크토아부카(王篤朶不花 / 王脫脫不花)
1354년 ~ 1376년
? ~ 1376년
연안군 왕고의 손자

4. 재위하지 않고 추존된 군주


묘호
시호
휘(이름)
생몰년도
능호
시조(始祖)
원덕대왕(元德大王)
?[15]
? ~ ?
-
국조(國祖)
의조(懿祖)
경강대왕(景康大王)
작제건(作帝建)
? ~ ?
-
세조
원렬민혜위무대왕(元烈敏惠威武大王)
왕륭(王隆)
? ~ 897
창릉(昌陵)
대종
현헌공신화간예성선경대왕(顯獻恭愼和簡睿聖宣慶大王)
왕욱(王旭)
? ~ 969
태릉(泰陵)
안종
성덕헌경효의대왕(聖德憲景孝懿大王)
왕욱(王郁)
? ~ 996
무릉(武陵)
국조, 의조, 세조는 각각 태조의 조상들을 다룬 고려세계(高麗世系)를 통해 알려져 있다.

5. 제후왕 목록



작위
휘(이름)
생몰년도
비고
문원대왕(文元大王)
왕정(王貞)[16]
? ~ ?
-
정간왕(靖簡王)
왕기(王基)
1021 ~ 1069
평양공(平壤公)
조선국양헌왕(朝鮮國禳憲王)
왕도(王濤)
? ~ 1099
조선공(朝鮮公)
1997년 강원도 영월군 수주면 흥녕사지에서 발견된 징효대사탑 비문이 2000년 이후에 판독되면서 태조의 자녀 중 필영대왕弼榮大王이라는 사람도 있던 것이 확인된다. 고려사고려사절요에 등장하지 않는데, 징효대사탑 비문에 왕요군(정종), 왕소군(광종), ??대왕, 필영대왕이라는 이름이 나타나면서 알려졌다. 흥녕사지 징효대사탑비는 924년(태조 7년)에 비문을 지었으나 944년(혜종 2년)에 비석이 세워졌다. 비석에는 비석 수립에 기여한 사람의 명단을 새겼는데, 왕요군이나 왕소군 등으로 기록된 당시 왕자군이나 태자 칭호가 아닌 대왕으로 추존되어 탑비가 세워진 944년 이전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죽고 나서 왕의 호칭을 받은 것으로 보아 당대에는 상당한 권위가 있던 것으로 보이지만, 문원대왕과 마찬가지로 자세한 것은 아무것도 알 수 없다.

6. 비정통 국왕


정상적인 방법으로 즉위하지 않고 반란을 일으켜 왕위를 찬탈하고자 한 왕족들이다. 이들은 묘호도, 시호도 받지 못했으며[17] 외부 세력에 의해 옹립된 처지라 고려의 정식 국왕으로 보지 않는다.
묘호/작위
휘(이름)
재위기간
비고
영종(英宗)
안경공(安慶公)
왕창(王淐)
1269.06.21 ~ 1269.11
권신 임연의 압력에 의해 강제로 퇴위당한 원종이 양위하여 잠시 왕위에 올랐었다.
승화후
(承化侯)
왕온(王溫)
1270년 6월-1271년 5월
삼별초에 의해 추대됨.
덕흥군
(德興君)
왕혜(王譓)[18]
1351년
원혜종기황후에게 왕으로 책봉되어[19] 공민왕에게서 찬탈하려 했으나 실패

7. 왕족들의 후일담(야사)


조선의 반체제인사(?) 남효온의 <추강냉화>나 야사수집가 이긍익의 <연려실기술>등 각종 야사에 의하면, 고려가 망하자 왕씨들이 다시 자신의 왕위를 빼앗을까봐 겁먹은 이성계가 왕씨들을 불러 섬에서 살게 해주겠다고 구라친 뒤 배에 구멍을 뚫어 몰살시킨다. 하지만 일부 왕씨들은 아시다시피 전씨(全, 田)나 옥씨(玉), 아니면 왕을 상징하는 용씨(龍), 심지어는 심문을 받게 되자 당황해서 "네?"라고 반문하여 내씨(乃) 등으로 성을 고쳤다고는 하나, 어디까지나 야사다.
물론 왕씨들을 대거 몰살시킨 것은 맞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태조 3년에 왕씨 중 한 명이 연루된 반역사건이 일어나는데 이때 사헌부와 형조 등에서 왕씨들을 몰살하여 화근을 제거하자고 거듭 상소를 올리자 고려의 왕족이 불안했던 태조가 결국 버티지 못하고 명을 내려 그해 3월에 강화도와 거제도에 귀양가 있던 왕씨들을 죄다 물에 던져 죽이게 하였다. 대신 한 집안만은 남겨서 제사를 이어가게했다. 그것도 자기 사돈 집안. 우왕과 동명이인인 왕우 집안으로 조선초기 잘먹고 잘살다가 왕자의 난에 휘말려 멸문 당했으며 이후 조선은 고려왕의 제사를 위해 방계왕씨를 찾아야 했다 이렇게 남겨서 왕씨들의 혼을 위로하기 위해 수륙재를 봄과 가을마다 지내게 하였다.
이성계가 왕씨를 멸족시킨 그날 밤, 태조 왕건의 귀신이 그의 꿈에 나타나 "왜 죄없는 내 후손까지 죽이느냐? 너도 죽을래?"라는 협박[20]에 혼난 이성계가 왕씨 족보에서 한 장을 찢어 그 왕씨들은 무죄방면(?) 해주었다는 야사도 있다. 이 일로 인해 조선시대 내내 출세한 왕씨가 드물었다. 아예 없는 것은 아니어서 고등학교 때 왕방연이란 금부도사가 지은 시조를 배운 것을 기억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후의 고려 왕족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는 개성 왕씨 문서 참조.

8. 여담


  • 훈요 10조에서부터 형제 상속의 가능성을 명시했기 때문인지, 현 국왕에게 어린 아들이 있음에도 대신 동생이 왕위를 물려받은 사례가 상당히 많다.
태조의 아들. 혼인정책에 따른 호족들의 갈등으로 형제 상속이 불가피했을 것이다. 혜종에게는 흥화궁군과 왕제라는 두 아들이, 정종에게는 경춘원군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현종의 아들. 정종은 애상군, 낙랑후, 개성후라는 아들이 있었다.
문종과 인예태후의 아들. 선종의 아들 헌종이 1년 남짓 왕위에 올랐지만 외척과 종친 양파의 대결 끝에 숙종에게 양위하게 된다.
인종과 공예태후의 아들. 명종과 신종은 무신정권에 의해 형이 폐위되고 옹립된 것이라 형제 상속에 따른 것이라고 보기는 약간 애매하긴 하다. 명종의 아들 강종은 왕위 계승에서 밀렸다가 후일 왕으로 추대된다.
  • 고려 왕 34명의 평균 재위 기간은 14년이 채 안된다. 그나마도 중간에 폐위되었다가 복위되었던 경우까지 따진다면 만 12년까지 떨어질 수도 있다. 조선의 만 19년 2개월에 비하면 정말이지 짧다.[21] 고구려, 백제, 신라, 발해 등 한국사 메이저급 국가들과 비교했을 때도 제일 짧다.[22] 왕들의 재위 기간이 긴 편에 속하는 고구려와 비교할 경우 두드러지는데, 고구려보다 230년 짧게 존속했으면서 왕은 6명이 더 많다![23]
  • 재위 직후 단명한 왕이 (특수 사례인 강종을 제외하고) 혜종, 정종(3대), 경종, 덕종, 순종, 헌종, 충목왕으로 7명, 시해당한 왕이 목종, 의종, 충정왕, 공민왕, 우왕, 창왕, 공양왕 7명, 폐위당한 왕이 명종, 희종, 충선왕(1기), 충혜왕(1기/2기)의 4명이다. 결국 곱게 살지 못한 왕이 자그만치 18명이다. 여기에 신종이나 강종, 고종은 무신정권 치하라 곱게 왕위를 보내지도 못했다.[24]
  • 반면 8대 현종 말기 부터 15대 숙종, 16대 예종까지 덕종, 순종, 헌종의 단명과 정치적 혼란을 제외하고 총 94년, 100여년간 7명의 명군들이 줄지어 왕위에 올랐다. 이 일곱 왕들의 평균 재위 기간은 16년(덕종 제외시 18년), 수명은 만 40.6세, 덕종 제외시 만 45세에 달한다. 기록이 부족한 것도 있지만 《고려사》나 《고려사절요》, 《동국통감》과 같은 국내 사서와 《송사》, 《요사》등의 기록만으로도 11세기는 문화적으로나 외교적인 측면에서나 고려에서 가장 강성한 시기였다. #, ## 참고. 동시에 문벌귀족 가문의 세력이 강화되면서 훗날 인종, 의종 때의 혼란과 무신정권이 탄생하는 계기가 된다.
  • 최단 재위는 12대 순종(1083년, 약 3개월), 2위는 14대 헌종(1094년 음력 5월 ~ 1095년 음력 10월, 1년 5개월)과 33대 창왕(1388년 음력 6월 ~ 1389년 음력 11월, 1년 5개월), 4위는 2대 혜종(943년 ~ 945년, 만 2년 4개월(111일)) 5위는 22대 강종(1211년 ~ 1213년, 만 2년 7개월), 6위는 30대 충정왕(1348년 ~ 1351년, 만 2년 10개월) 순. 강종은 아이러니 하게도 대단히 늦은 나이에 왕위에 올라 만 61세까지 살았다.
  • 최장 재위는 고종(1213년 ~ 1259년, 만 45년 339일), 문종(1046년 ~ 1083년, 만 37년 79일), 명종(1170년~1197년, 만 27년 23일), 충렬왕(1274년~1308년, 만 23년 5개월 + 만 9년 11개월 = 만 34년 4개월), 태조(918년~943년, 만 24년 350일) 순이다.
  • 수명이 제일 길었던 왕은 25대 충렬왕(만 72세 119일), 19대 명종(만 71세 25일, 단, 만 66세에 폐위), 23대 고종(만 67세 185일), 태조 왕건(만 66세 155일), 문종(만 63세 263일) 순이고, 수명이 제일 짧았던 왕은 33대 창왕(만 9세 127일), 29대 충목왕(만 11세 234년, 재위 4년 10개월), 14대 헌종(만 13세), 30대 충정왕(만 14세) 순. 다만 창왕은 자연사가 아니었던 것을 감안하면 실질적으로 가장 단명한 왕은 충목왕. 덕종을 포함해 5명의 왕이 20세를 넘기지 못하고 요절했다.
  • 최고령으로 즉위한 왕은 22대 강종(60세), 20대 신종(51세), 34대 공양왕(45세) 순이고, 최연소 즉위는 29대 충목왕(8세), 32대 우왕과 33대 창왕(9세), 14대 헌종(10세) 순.
  • 가장 많은 부인을 둔 왕은 태조 왕건(총 29명). 또한 왕건은 가장 많은 아들을 둔 왕을 둔 왕이기도 하다.(25명) 이는 다양한 호족들을 포섭하기 위한 정략이었으며, 그리고 또 상당수 호족들이 먼저 자진해서 자신의 딸을 왕건에게 바쳐 혈연 관계를 맺고자 했다. 이 혼인 정략이 고려 초기 왕실 혼란의 원인으로 작용해 버렸다는 단점도 있었다.
  • 원 간섭기에는 거의 원 황실의 방계 가문쯤으로 전락해 버렸다. 원 간섭기에는 고려가 원의 부마국이라 하여 고려의 왕은 원나라 공주나 종친의 딸[25]을 정비로 삼아야 했는데, 이 사이에서 나온 왕자는 몽골 혼혈이고, 이 왕자가 왕이 되어 다시 원나라 공주나 종친의 딸과 결혼하면 이 사이에서 나온 왕자는 고려 왕실의 피는 1/4밖에 남지 않는다. 이 과정이 몇 번 반복되면...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 실제 고려 왕실의 피가 가장 희미한 왕은 1/4인 충숙왕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충숙왕의 아들인 충혜왕과 공민왕은 순수 고려인인 명덕태후 소생이라, 고려인의 피가 1/4뿐인 충숙왕보다 혈통상 훨씬 더 고려인에 가깝다.(충혜왕과 공민왕이 5/8의 고려혈통을 가지고 있고, 충혜왕과 몽골인 덕녕공주 사이의 아들인 충목왕도 5/16의 고려혈통을 가지고 있어서 충숙왕보다 고려왕실의 피가 진하다.)
  • 태조, 혜종은 각각 신라, 태봉 출신으로 처음부터 고려 출신이 아니다. 정종, 광종은 후삼국시대의 고려에서 태어났다. 통일 고려에서 태어난 국왕은 경종이다.
  • 옛 고려의 수도 개경이 현재의 북한령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고려 왕들은 북한 땅에 묻혀 있다. 단 4명의 군주만이 남한에 잠들어 있는데 희종, 강종,[26] 고종이 강화도에, 그리고 공양왕이 고양시(혹은 삼척시)에 묻혀 있다. 우왕과 창왕은 비정통이라 하여 이성계 일파에 의해 살해된 후 아예 능이 조성되지 않았고, 그 시신은 아예 들에 버려져 방치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9. 참고항목


[1] 에서 각각 자국이 만든 국인(印)를 고려국왕에게 보냈으나, 고려는 자체적으로 국새(璽)를 만들어 사용했다.[A] A B 원이 충선왕 때 강제 하사한 시호.[C] A B C D E 공민왕 6년에 추시된 고려 국왕으로서의 시호.[B] A B C D E 원 제후로서의 시호.[2] 몽골식 이름은 왕이지르부카(王益知禮普花)[3] 몽골식 이름은 왕아라트나시리(王阿刺訥忒失里)[4] 몽골식 이름은 왕부다시리(王寶塔實里)[5] 몽골식 이름은 왕바스마도르지(王八思麻朶兒只)[6] 원에서 내려준 시호 밖에 없다.[7] 몽골식 이름은 왕미스젠도르지(王迷思監朶兒只)[8] 고려서 독자적으로 추시된 고려 국왕으로서의 시호.[9] 명 제후로서의 시호.[10] 몽골식 이름은 왕바얀테무르(王伯顔帖木兒)[11] 우왕이 유배된 지역을 따서 불려진 사시(私諡).[12] 조선이 편찬한 <고려사>에는 '신우', 창왕 또한 '신창'이라고 표기 되어 열전의 끄트머리 '''반역조'''에 들어가 있는데 이는 이성계 일파가 우왕과 창왕이 신돈 아들이라고 우겼기 때문이었다. 물론 지금은 이러한 주장을 이성계의 왕위 찬탈을 정당화하기 위한 조작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단 현전하는 자료만 놓고 봐서는 진위 여부를 따지기 어렵다는 시각도 있다.). 조선 당시에도 이러한 공식 사관에 대해서 불만을 가진 선비들이 있었다. 대표적으로는 성호 이익이 <성호사설>에서 우, 창왕을 반역 열전에 수록한 <고려사> 찬자들을 비판한 바 있고, 안정복은 이러한 스승의 뜻을 받들어 자신이 저술한 역사서 <동사강목>에서 우, 창왕대를 각각 '폐왕 우', '폐왕 창'이라는 편명으로 다루며 임금 취급을 해줬다.[13] 창왕을 따르는 신하들이 바쳤던 사시(私諡).[14] 조선 왕조 태종이 추시.[15] 국조는 정확한 이름이 뭔지 불분명하다.[16] 태조의 아들로 정종(定宗), 광종의 친동생. 경종의 2비 헌의왕후의 아버지로 사후 추존.[17] 안경공이 영종이라는 묘호와 영종대왕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나, 이마저도 나중에 취소되었다.[18] 몽골식 이름은 왕타스테무르(王塔思帖木兒)[19] 기황후의 조카인 기삼보노(奇三寶奴)는 덕흥군 왕혜의 세자로 책봉.[20] 이후 이성계는 수도가 개경이라 이런 꿈이 나타났다고 여겨 한성으로 옮긴다.[21] 고려는 조선보다 존속기간이 44년 더 짧은데 정작 왕은 7명 더 많다.[22] 단 발해의 경우 대위해대인선 사이에 왕이 더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23] 단 삼국시대 왕계보의 경우 왜곡이 있었을 가능성을 고려할 필요는 있다. 고구려의 경우 태조왕, 차대왕, 신대왕대의 비정상적인 수명과 재위 기간 등을 근거로 보았을 때 추가적으로 누락된 왕이 더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는 백제 또한 마찬가지로 백제 초기 왕계보 역시 비정상적으로 긴 재위 기간으로 의심을 받는 편이고 신라 역시 초기 계보의 신뢰도가 높은 편은 아니다.[24] 더군다나 단명한 왕들 중 혜종이나 정종은 시해설이 뒤따르는 임금들이다. 이외에도 충혜왕 역시 정황상 원에 의해 사사된 것으로 보인다.[25] 사실 제국대장공주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종친의 딸을 고려로 시집보냈다.[26] 개경에서 사망했으나 강화도에 묻혔다. 다만 현재로선 능이 유실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