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전쟁범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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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2.2. 슈츠슈타펠의 전쟁 범죄
2.3. 국방군의 전쟁범죄
2.3.2. 육군의 전쟁범죄
2.3.2.1. 민간인 및 포로 학살
2.3.2.2. 무차별 강간
2.3.2.3. 초토화 전술
2.3.3. 해군공군의 전쟁범죄
2.4. 강제 노동


1. 제1차 세계 대전(독일 제국)의 전쟁범죄


사실 독일 국방군의 선배인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의 '''독일 제국군도 국방군처럼 악질은 아니다뿐 전쟁범죄에 관해서 100퍼센트 자유로울 수는 없다.''' 1914년 8월 4일 당시, 독일 제국 육군은 슐리펜 계획에 의거하여 프랑스를 치기 위해, 중립국인 벨기에를 불법적으로 침략하는데, 독일 육군이 약체 초콜릿 군대라고 얕본 벨기에 육군에게 뜻밖의 봉변을 당하게 되고, 생각보다 큰 피해를 입게 된다. 벨기에 침공 리에주 요새에 대한 자료 참고. 여하튼 리에주 요새를 함락한 이후, 독일 육군은 벨기에인에 대한 증오와 짜증을 품게 되고, 벨기에 빨치산에 의해 독일의 한 육군 병사가 사망하는 일이 벌어지자, 그에 대한 보복으로 무고한 벨기에 민간인들을 죄다 게릴라 세력으로 몰아 총살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물론 여기에는 누가 봐도 파르티잔이라고 볼 수 없는 여자, 아이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심지어 교회 종탑에서 총탄이 날아왔다고 주장하며 사제를 총살하는 경우도 있었다.
약 400명 되는 벨기에 민간인들이 루뱅에서 죽었다고 알려져 있으며 제국 육군이 빨치산 잡는답시고 여기저기 불을 놓는 바람에 불에 타서 없어진 가옥도 수 십채였다고 한다. 루뱅 시의 유서깊은 대학인 루뱅대학교과 루뱅도서관도 이 때 제국 육군이 놓은 불로 인해 불탔었다고 한다. "루뱅 독일 병사 사망 사건"으로 잔뜩 예민해진 제국 육군은 벨기에 전역에서 빨치산 토벌에 열을 올리는데 빨치산 토벌 명목으로 민간인들이 가장 많이 죽은 곳이 바로 디낭 시, 무려 674명의 민간인이 무고하게 사살되었다고 하며, 희생자 중에는 아이아기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 사건은 영어권에서 'The Rape of Belgium'(벨기에의 강간)이란 별칭으로도 알려져 있다. 독일 육군은 벨기에의 여러 도시들을 불태우고 파괴하고 학살을 저지르고 강간을 서슴치 않았다. 벨기에의 강간으로 인해 루뱅(Louvain) 시에 살고 있었던 사람들 370여명이 사망, 그리고 루뱅대학교와 도서관이 불타는 일이 벌어졌으며, 디낭(Dinant)에서는 674명이나 되는 무고한 민간인들이 고의적으로 학살당했다. 이로 인해 독일 제국에 대한 대외적인 이미지는 매우 좋지 않았으며, 영국은 이것을 선전 프로파간다로 아주 잘 써 먹었고, 훗날 미국의 1차 대전 참전에까지 영향을 끼친다.
황당한 건 당시 제국 육군이 저렇게 해서 진짜 빨치산을 한 명이라고 잡았는지도 의심스럽지만, 과연 루뱅에서 제국 육군 병사를 쏜 사람의 정체가 벨기에 빨치산인지도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 사건이 밤에 일어난 것으로 미루어볼 때, 피아식별이 잘 되지 않는 상태에서 자기들끼리 총을 쏜 것이였다는 설도 존재한다. 이 때문에 루뱅에서는 백년이 지난 지금도 독일 국기를 게양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 또한 제국 육군과 해군 항공대는 세계 최초로 민간인을 상대로 폭격을 가한 군대이기도 하다. 파리와 런던에 하루가 멀다하고 폭격을 가했는데 당시 독일 제국 육군 폭격기와 해군 체펠린 비행선의 조종사와 승조원들 가운데 프랑스와 영국 민간인들에 대하여 양심의 가책을 느꼈던 인간은 거의 없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독일연방공화국의 국방부 차관이었던 발터 콜보(Walter Kolbow)는 2001년, 디낭 학살 피해자 유족들을 찾아가 직접 사죄를 표하였다.
그리고 조목조목 따지고 보면 '''세계 최초로 민간인을 상대로 무차별 폭격'''을 가한 나라가 독일인데, 독일 제국 해군은 1915년부터 1918년 4월까지 꾸준히 그라프 체펠린 비행선고타 폭격기파리런던을 폭격한다. 그리고 이는 뻔히 민간인이 다치고 죽을 것을 알면서도 저지른 행위다. 그리고 무제한 잠수함 작전 때에도 민간 상선임을 뻔히 알면서도 그것을 격침시켰으며, 이는 수많은 나라를 분노케 하였다. 그리고 독일 제국의 이 어리석은 행위는 결국 자신들의 제국을 파멸로 이끌고 만 원인이 되었다.
그 뿐만이 아니다. 최초로 1915년, 제 2차 이프르 전투 때에 헤이그 협약을 어기고 살상용 가스를 먼저 살포한 것도 독일 육군이었다. 1915년 제2차 이프르 전투에서 독일 제국 육군은 포스겐을 살포하는데, 살상용 가스의 살포는 이미 1899년 헤이그 협약에 의해 엄연히 금지된 사항이였다. 물론 가스 자체로만 보면 1914년 국경 전투 도중 프랑스 육군이 먼저 살포하긴 했는데 그것은 살상용이 아닌 엄연한 최루탄에 지나지 않은 것이였다. 결정적으로 1914년 프랑스가 살포한 최루탄은 제국 육군의 진격을 늦추는 효과는 있었어도 그로 인한 제국 육군 사망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반면 1915년 이프르 전투에서 제국 육군이 뿌린 포스겐에 의한 연합군 사망자는 무려 1시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15,000명이나 되었다. 그후 연합군도 독가스를 뿌리긴했으니 연합군도 잘못이 있긴하겠지만,싸움은 먼저 때린 사람이 잘못한거로 되듯 독가스를 먼저 뿌린 독일 제국에게 가장 큰 책임이 있다.
그 외에도 독일 제국군만 하더라도 1917년 3월 22일, 러시아 제국 포로들을 대상으로 생체 실험을 자행하기도 했다. 바로 쾨니스베르크(現 칼리닌그라드)에 위치한 '''뮌스터 포로수용소''' 에서. 뮌스터 수용소의 환경은 매우 열악했고 하루가 멀다하고 제국군들의 구타가혹행위가 이어졌다고 전해진다. 제국군들은 '''인종 별로 분명히 목소리 발성하는 방법이 다를 것이며, 당연히 독일인들이 가장 우월한 발성 능력을 가졌을 것이다!''' 라는 말도 안 되는 논리를 내세우며, 러시아 포로들에게 인종 별로 나누어 노래를 부르게 하였고 그것을 녹음하였는데, 당시 러시아군 포로들 가운데에는 일본 제국의 압박을 피해 제정 러시아로 망명하여 러시아군에 입대한 고려인들도 있었다. 때문에 당시 고려인들이 한국말로 부른 아리랑이나 민요가 아직까지 남아있는데 가장 유명한 것이 그레고리 김이 부른 아리랑. 제국군들은 포로들에게 강제로 노래를 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의사랑 상관없이 그들의 얼굴을 강제로 석고로 본을 뜨기까지 했다. 매일 같이 강제 노동에 시달린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1차 대전이 끝난 이후, 러시아군 포로들과 고려인들의 행방은 묘연하였고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았다. 단, 추측되는 바로는 열악한 수용소 생활로 인해 병사하였거나, 제국군의 생체 실험에 이용당해 죽었을 거라는 의견이 압도적이다. 현재 독일 동부지역에는 당시 러시아군 포로들의 넋을 기리는 추모비가 세워져 있는데, 상당수가 이름 없는 정확히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는 포로들이다.
게다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맺고 동부전선의 독일 제국군이 죄다 서부전선으로 재배치받기 전, 우크라이나 민간인들로부터 온갖 생필품을 강제로 빼앗았으며, 사람들까지 잡아가서 강제 노역을 시켰던 전적도 존재한다.
나미비아(당시 독일령 남서아프리카)에서 저질러진 원주민 집단 학살 사건도 제국군이 저지른 대표적 전쟁 범죄 중 하나이다. 엄연히 최악의 제노사이드 중 하나로 인정받지만 홀로코스트와 달리 독일측에서 전혀 사과도, 보상도 하지 않는 상황.
가끔 나치가 갑자기 툭 튀어나온 학살자들인 것으로 여겨질수도 있는데, 사실은 반유대주의 문서에서 볼 수 있듯 예전부터 있던 민족감정과, 보어전쟁 문제에서 볼 수 있듯 영국이 하던 집단 수용소, 그리고 위에서 나온 독일 제국의 짓거리를 전부 섞어서 당시 최신의 기술로 체계화 및 효율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봐야 한다.

2. 제2차 세계 대전(나치 독일)의 전쟁 범죄


''' '''

2.1. '''홀로코스트'''



2.2. 슈츠슈타펠의 전쟁 범죄


국방군과 공모한 범죄(☆)

2.3. 국방군의 전쟁범죄



2.3.1. 국방군 무오설


항목 참고.

2.3.2. 육군의 전쟁범죄



2.3.2.1. 민간인 및 포로 학살

국방군 무오설이나 국방군이 그래도 일본군보단 깨끗했지...라는 물타기가 개소리인 이유. 게다가 또이또이한 정도도 아니라, 일본군은 개판 조직과 똥군기에 기인한 통제불능이 주 원인이었던 반면 국방군은 대놓고 일부러 저질렀다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당장 대전 초기인 폴란드 침공 당시만 놓고 보더라도 '''국방군은 폴란드 포로와 민간인을 학살하거나 인간방패로 삼는 등 수많은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폴란드 침공 당시 벌어진 전체 민간인 학살 행위의 60%가 국방군에 의해 벌어졌다고 한다. 참고로 폴란드 침공 당시 폴란드 민간인 사망자는 20만 명으로, 그 중 10만여 명은 공습으로, 2만여 명은 국방군과 친위대에 의해 조직적으로 학살당했다. 또한 적어도 3천여 명 이상의 폴란드 포로들이 학살당했으며, 적게는 수십여 명 규모에서, 많게는 독일 육군이 행한 쳉스토호바(Częstochowa) 학살 사건에서처럼 1천여 명이 넘게 학살당하는 일이 매우 자주 벌어졌다. 일례로 독일군이 자행한 '100 polakow za 1 niemca'[5] 학살은 폴란드 국내군이 SS장교 1명과 독일 경찰을 암살한것을 복수하기위해 폴란드인을 100명을 죽인 것으로 말도안되는 행보를 보였다.더 자세한 상항은 폴란드 침공 항목 참고할 것. 반대로 육군상급대장 요하네스 블라스코비츠 장군 처럼 친위대의 학살, 약탈 만행을 히틀러에게 보고하며 이를 금지할 것을 호소했다가 이후 진급에 실패하고 힘러에게 낙인이 찍혀서 한직만 떠돌게 된 경우도 있다.
특히 독일 국방군의 전쟁 범죄 대부분이 발생한 독소전쟁의 남부집단군 전역의 경우, 당시 육군 제6 야전군 사령관이었던 발터 폰 라이헤나우 장군은 "독소전쟁에서 독일군은 유대인-볼셰비즘을 말살하는 전사로 싸워야 하며, 이는 통상적인 전쟁방식을 벗어나도 무방하다." 즉 학살을 저질러도 무방하다는 소위 "강조명령"을 예하부대에 내렸으며, 그의 상관인 남부집단군 사령관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장군이나 11군사령관 에리히 폰 만슈타인 장군은 이 강조명령에 별도의 지지성명까지 발표했다. 중부집단군 사령관 페도어 폰 보크 장군 같은 일부 지휘관들은 여기에 반대를 표명했으나, 남부집단군엔 이런 지휘관이 없었고 결과적으로 대규모 학살이 발생했다. 라이헤나우 장군 사후, 그의 후임이었던 육군상급대장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장군은 라이헤나우 장군의 강조 명령을 폐기했다.
또한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예프에서는 엄청난 규모의 민간인 및 포로 학살이 벌어졌다. 1941년 키예프 포위전 후 53만명의 소련군 포로가 잡혔다. 그 중 유대인이나 공산당원으로 판명된 자들은 재판 없이 그 자리에서 쏴 죽였다. 살아남은 포로들도 캠프에 가두고 굶겨 죽였다. 살아서 소련으로 귀환한 사람들은 2만명도 되지 않았다. 홀로코스트 명단이 정확하지 않은 게, 소련에서 사살된 유대인을 홀로코스트 피해자로 보느냐, 그냥 학살 피해자로 보느냐에 따라 평가가 갈라지기 때문이다. 키예프 외곽의 바비야르 골짜기에서는 수십만의 민간인들을 쏴죽이고 사체를 불태워 증거 인멸을 시도한 바비야르 학살이 일어났다. 또한 독일판 신멸작전 혹은 난징 대학살이라 불리는 대규모 제노사이드인 벨라루스 초토화를 저지른 것도 육군이었다.
여기에 국방군이 직접 학살을 저지르지 않았더라도 국방군 점령지 하에서 벌어진 SS 소속의 아인자츠그루펜의 학살을 모른체 하거나 구경만 한 것도, 엄밀히 말하면 살인방관행위에 해당하는 전쟁범죄이다.[6] 예를 들어 독소전쟁 초중반의 북부집단군 사령관인 빌헬름 리터 폰 레프 원수는 국방군이 수행하는 직접적인 학살에는 반대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예하 국방군 부대의 학살을 금했다. 하지만 그는 예하 친위대가 학살을 수행하는 것은 알면서도 묵인하고 방조하여 발트 3국 지역에서 수십만 명의 유대인과 민간인이 학살당하도록 놔두었다. 또 그는 레닌그라드 공방전 당시 아사 작전을 기획해 100만이 넘는 소련 민간인들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

2.3.2.2. 무차별 강간

잘못 알려진 상식을 있는 그대로 믿는 자들은 슬라브인에 대한 나치의 인종적 편견 때문에 독일 국방군은 민간인 학살은 했지만 강간은 빈도가 드물었다고 주장한다.[7] 살인과 성범죄의 죄중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슬라브인은 짐승이나 다름없는 존재라는 나치의 세뇌 때문에 장병들에겐 타인종과의 성접촉이 '''수간'''으로 인식되어 강간을 피했을 거라는 논리인데, 물론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국방군은 슬라브인을 인간으로 안 본 것이 아니다. 단지 '하등한' 인간으로 봤을 뿐. 그리고 애초에 타인종과의 성접촉을 수간으로 인식하는 것도 지극히 인종차별적인 사고방식이라서 결코 좋게 보기 힘들며, 그에 따라 결코 나치 독일을 옹호하기 위한 근거가 될 수도 없고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된다.
종전 이후 반공적인 영미 언론에 의해 널리 선전된 베를린 강간의 임펙트에 묻힌 감이 없잖아 있지만 동부전선의 국방군 역시 그보다 훨씬 더한 전방위적 강간을 자행했다. 동부전선에서는 독소전쟁이 벌어졌을 때 수많은 소련 민간인 여성들과 소련군 간호사와 간호병, 그리고 기타 여군들이 포로로 사로잡힌 채 강간의 희생양이 되었고, 그 뒤에는 대부분 살해당한 채 길거리에 버려졌다. 국방군에 저항하던 여성 파르티잔은 아예 강간 후에 고문을 가한 후 죽여버리기도 했다.
  • 스몰렌스크, 러시아 : 독일군 사령부가 장교들을 위한 매음굴을 개설하였다. 수백명의 여성들이 팔이나 머리채가 잡혀 끌려가 강제로 매춘부가 되었다.
  • 리비우, 우크라이나: 독일군이 공공 공원에서 옷 공장에서 일하는 32명의 여성들을 집단으로 강간하고 살해했다. 이를 막으려 하던 사제 또한 살해했다. 독일군은 리비우에서 유대인 여성들 또한 강간했으며, 임신하면 쏴 죽였다.
  • 바리사우, 벨라루스: 독일군을 피해 달아나던 75명의 여성들이 사로잡히자 독일군은 그 자리에서 36명을 죽여버렸다. 그 후 독일군은 16살 L.I.멜츠코바를 숲으로 끌고 들어가 집단으로 강간했다. 다음으로 끌려간 여성이 발견한 것은 표지판에 못박혀 죽어가는 멜츠코바였다. 독일군은 그 여성 앞에서 멜츠코바의 가슴을 잘라냈다.
  • 케르치, 크림 반도: 사로잡힌 여성들은 강간당하고 고문을 받았다. 그다음엔 잔혹하게 죽였는데 가슴을 잘라내고, 배를 가르고, 사지를 자르고, 안구를 파냈다. 나중에 1941년 12월 케르치를 탈환한 소련군은 주위를 둘러보다 알아볼 수도 없게 훼손된 젊은 여성들의 몸뚱아리가 교도소 뜰에 쌓여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경악을 금치못했다. 1942년 1월, 집단 매장터가 다시 조사됐는데, 바게로보 마을 외곽의 길이 1km, 너비 4m, 깊이 2m의 대전차호에 여성, 아이, 노인, 청소년 7000명의 시체가 가득 메워져 있는 매장터를 발굴하였다.
무엇보다 국방군 지도부는 전쟁이 시작되기 전부터 '''소련 민간인에게 범죄를 저지른 장병들을 적극 적발 및 처벌할 필요가 없다'''는 방침을 세웠고 그런 마당에 군인은 물론 민간인이라고 성폭행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 있을 리는 없었다. 물론 처벌이 있기도 했으나 가벼운 수준. 따라서 독일 장병들은 마치 가로수의 열매를 따먹듯 점령지의 여성들을 겁탈했으며 그것을 마치 자랑거리인 양 떠들고 다녔다.

윌루스: "바르샤바에서 우리 장병들은 여자들이 있는 한 건물 앞에서 길게 늘어서 기다려야 했다. 무작위로 첫 번째 방이 가득 찼고 그 사이 밖에서는 트럭 하나를 다 채울 정도의 사람들이 줄서 기다렸다. '''여자 한 사람마다 시간당 14명에서 15명의 남자를 상대해야 했다.''' 그들은 이틀마다 여자들을 교체했다.

뮐러: 제가 하르코프[8]

에 있었을 때, 시가지를 제외하고는 모든 게 부서져 있었습니다. 정말 멋진 도시였고, 멋진 추억들도 많았죠. 거기 사람들은 학교에서 배운 독일어를 약간 구사할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타간로크[9]에는 멋진 극장들과 멋진 해안 카페들이 있었죠. 전 트럭을 타고 여기저기를 돌아다녔습니다. 어딜 보든 여성들이 강제 노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파우스트: "오, 세상에!"

뮐러: "정말 쭉 빠진 환상적인 소녀들이 도로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옆으로 차를 몰고 가서, 강제로 트럭에 태우고 마구 겁탈한 뒤 밖으로 내던졌죠.''' 이야, 정말 엄청나게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출처

영문 위키피디아에 인용된 1942년 독일 국방군 기록에 따르면 소련 한 국가에서만 1천만 건이 넘는 집단 강간과 간살(강간 후 살해)이 발생했다. 해당 보고서에서는 독일 군인과 소비에트 연방 국가의 여성 사이에 생긴 신생아 75만명 가량을 독일인 혈통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고 서술하고 있다.[10] 그나마 요식 행위로 한 얘기지만 뒤늦게 '독일인에 대한 보복 금지'를 공표한 스탈린과 기강 해이가 조직력 붕괴로 이어지기 전에 보복 행위자들을 즉결 처형하고 효수한 NKVD정치장교들 덕택에 동독인 전원이 소련인 부친을 가지진 않았다.
동부전선에서 독일군이 자행한 성 범죄에 관해서 무려 400쪽 분량으로 다룬 권위적인 논문으로 ''Victims, Heroes, Survivors: Sexual Violence on the Eastern Front During World War II''가 있다.미네소타 대학의 Wendy Jo Gertjejanssen이 쓴 것으로 인터넷에 무료로 공개되어 있다(최하단의 full text 클릭). 단순히 강간만을 다룬 것이 아니라 매음굴 같은 주제도 다루었다. 내용이 매우 어려우나 전문적으로 알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읽어 보면 좋은 논문이다.

2.3.2.3. 초토화 전술

점령지를 포기하거나 점령지의 원주민들이 게릴라전으로 저항할 경우, 독일군은 그 지역의 모든 것을 파괴했다. 이러한 파괴와 학살은 폴란드,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발트 인근 등 독일군이 점령했던 모든 지역에서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특히 독일군 점령지의 저항군이 게릴라전으로 괴롭힐 경우 이를 뿌리 뽑으려고 이러한 초토화 전술을 자주 사용했다. 이러한 초토화 전술에 대해서는 벨라루스 초토화작전 문서를 참고.[11]
가령 1943년 3월, 르제프 돌출부에서 후퇴하는 들소 작전에서 초토화 작전이 동반되었다. 대규모 사전 파르티잔 토벌 작전에서 다수의 민간인이 처형되었으며, 들소 작전을 지휘하던 발터 모델은 노동 적령기의 남성과 식량을 차출하고, 우물에 독을 풀고, 마을을 파괴하라고 지시했다.[12] 르제프를 탈환한 소련군의 보고서에 따르면 지역에 있던 대다수의 건물들이 파괴되었으며,[13] 이 세 도시에서만 15000명이 강제 노동을 위해 독일로 수송되었다.[14] 철도 거점과 1,000km에 달하는 철로, 전주와 1,300km의 전화선과 전선이 파괴되었다. 소련은 발터 모델을 전범으로 선포하고 법정에 세울 생각이 만반이었으나, 모델이 항복하지 않고 자살하면서 무산된다.[15]

2.3.3. 해군공군의 전쟁범죄


이런 대다수의 범죄는 그 특성상 국방군 가운데서도 육군에 의해 주도적으로 저질러졌지만 해군과 공군 역시 전쟁범죄에서 자유롭진 못했다.
일반적인 경우 공군은 그 군종의 특성상 전쟁 범죄를 저지를 여지가 적은 편이기는 하다.[16] 그러나 헤르만 괴링의 욕심으로 공수부대 뿐 아니라 공군 야전사단 같은 비 정상적인 편제가 등장할 만큼 대규모의 지상전 병력을 보유한 데다, 이들이 육군의 집단군 등에 배속되어 지휘를 받았고, 항공기 승무원 및 조종사들 역시 비전투원에 대한 학살 임무(ex : 민간인 거주 구역의 폭격, 병원선 등 의료 시설 및 인원에 대한 공격 등)를 맡은 경우가 있기 때문에 무작정 깨끗한 군대라 보기 힘들다. 그러나 일단 괴링이 이런 잔혹 행위를 엄격히 금지시키기도 했던지라 유럽 동부 전선에서 육군이 아닌 공군에게 사로잡힌 지상군 포로들[17]이 상대적으로 관대한 대우를 받은 편이었고, 민간인 학살 등에 대한 혐의는 육군에 비하면 확실히 적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독일 공군도 민간인 학살을 크게 저질렀다'''. 대표적으로 공군 원수였던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스페인 내전 당시 '''게르니카 폭격'''을 지휘한 전력이 있으며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독일 육군이 스탈린그라드에 진격하기 이전 스탈린그라드에 무차별 폭격을 퍼부어 1주일 만에 민간인 5만 명을 죽였다. 그 대가로 독일이 받은 것은 스탈린그라드에서의 참패, 그리고 드레스덴 공습.
해군은 규모 자체가 미약했고 당시 해군들이 서로에게 상대적으로 신사적이었고 땅 밟을 일도 적었던지라 공군과는 다른 이유로 전쟁 범죄를 저지를 여지가 적다. 3군 가운데서 공격이 끝난 후 포로나 민간인 피해자 등을 구조하는데 그나마 적극적이었던 군종이 해군이었으며, 이는 독일 해군과 교전 혹은 일방적으로 공격당했음에도 많은 연합군 해군 장병이나 상선사관 등 참전자들이 크릭스마리네 출신자들에 대해 우호적인 시선을 보내거나 심지어 변호하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물론 이는 크릭스마리네가 특별히 깨끗한 것이 아니라 2차 대전 기간 동안, 전반적으로 해상전 분야가 육상과 항공전 분야에 비해 좀 더 분위기가 인도적인 편이었던 이유가 크다. 태평양 전쟁의 경우 일부 일본 해군의 또라이짓과 이 때문에 열받은 미 해군이 교전이 끝난 일본 해군의 구조를 거부하는 등의 사례도 있었으나, 그래도 대부분 일단 익수자라면 피아 구분없이 적극적으로 구조하는 등 일단 교전이 종료되면 해상에서는 적 항공기나 잠수함의 위협 등(이는 적뿐 아니라 표류 중인 아군에 대한 구조까지 포기된 경우도 있다.)으로 인해 급히 철수하지 않는 이상 어느 국가든 최대한 적극적으로 구조에 임했으며, 이 때문에 육,공군에 비해 보다 적성국 장병들에 대한 우호적인 분위기가 형성된 편이다. 또한 라코니아 사건과 같이 자함이 격침될 수도 있는 위기에서도 침몰시킨 선박의 승객과 승무원들을 적극적으로 구조한 사례도 있다. [18]
그러나 국제법을 위반하고 중립국의 민간 상선등에 대한 공격을 시작한 점이나[19] 라코니아 사건 이후 되니츠는 인도적 구조 활동을 금지시키는 지시를[20] 내리기도 했으며 포로에 대한 부당한 처우 역시 존재했다는 점에서 크릭스마리네도 마냥 깨끗했다고 볼 수 있는것은 아니다. 따라서 크릭스마리네 또한 육,공군과 마찬가지로 무작정 정의의 군대 같은 시선을 보내는 건 위험하다. '''애초에 나치 독일군인 시점에서 정의의 군대가 되는게 불가능하다.'''

2.3.4. 비밀 야전 경찰의 존재


국방군의 게슈타포라 불린 조직으로, 대중의 인지도는 떨어지지만 하는 짓은 게슈타포 못지 않았다.
이 외에도 국방군의 전쟁범죄를 상세히 조사하고자 한다면 이 영문위키 자료를 보면 된다. 자료에는 정치장교 즉결처분 명령 등 국방군의 반인륜적 범죄명령(Criminal Order)과 포로 및 민간인 학살(보면 알겠지만 소련, 폴란드, 벨기에, 프랑스, 그리스, 이탈리아 등등 각지에서 벌어졌다), 강간 등의 내용이 매우 상세하게 나온다.

2.4. 강제 노동


"이 인원들을 먹이고 재우는 것은 최소한의 지출로 최대한의 결과를 얻는 방향이어야 한다" - 프리츠 자우켈, 제국 전권 노동 감독관[21]

"1만명의 러시아 여자들이 대전차호를 파다가 지쳐서 죽는다면, 내 관심을 끄는 것은 어찌 됐든 독일에게 대전차호가 생겼다는 것 뿐이다." - 하인리히 힘러

나치는 노동력 착취를 위해 유럽 점령지에서 수많은 민간인들을 강제로 잡아왔다. 해외 노동자들은 계급제로 분류되었는데, 독일 계통 국가나 이탈리아 같은 동맹국은 방문 노동자(Gastarbeitnehmer)라고 불리며 동등한 대우를 받았다. 하지만 동원된 민간인, 폴란드 포로 등은 강제 노동자(Zwangsarbeiter)라고 불리며, 더 오래 일해야 하면서도 적은 급료와 배급을 받았다. 또한 대중교통이나 식당, 교회 등의 공공시설 이용이 금지되었다. 그리고 동부 점령지, 특히 우크라이나 국가판무관에서 끌려온 '''열등인종''' 슬라브인들은 동부 노동자(Ostarbeiter), 오스트아르바이터로 불리며 더욱 혹독한 취급을 받았다.
오스트아르바이터들은 대기업 소유나 사설 경비가 지키는 캠프에 갇혀 지냈으며 동쪽을 뜻하는 독일어 형용사 "OST"라고 새겨진 배지를 달고 다녀야 했다. 평균 하루에 12시간, 일주일에 6일을 일했고, 독일인 노동자의 30% 가량의 임금이 지급됐지만 이는 간신히 의식주를 해결해 굶어 죽지 않을 수준이었다. 게다가 진짜 돈이 아니라 캠프 내에서 제한된 물품만을 구매할 수 있는 표 형식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아, 과로, 폭격(오스트아르바이터는 방공호에 들여보내지 않는 경우가 잦았다), 학대, 처형으로 죽었다. 특히 "열등 인종"으로 분류된 슬라브인들은 작은 규정 위반으로도 무자비하게 구타당하거나 다른 사람들 앞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오스트아르바이터의 절반이 여성이었지만, "열등 인자"를 남길 수 있는 허가되지 않은 성행위나 임신은 무자비하게 처벌되었으며 아이는 낙태되거나 출산 후 바로 처분되었다.
1944년 여름, 노동력이 될 수 있는 사람은 닥치는 대로 잡아오기 시작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신입 오스트아르바이터는 16세 이하로 매우 어렸다. 30% 가량이 12~14세에 불과했으며, 1943년 10살로 낮아진 연령 제한 때문에 그보다 더 어린 아이들도 얼마든지 있었다. 일정 이상 나이를 먹었다면 독일군에서 노동력으로 쓰기 위해 차출되었다. 당시 독일의 기록에 의하면 '''집계 가능한 외국인 노동자와 포로가 760만명이었다'''. 확인 가능한 최소한의 수치인데도 강제 노동자들이 독일 노동력의 1/4를 차지한다는 것에서 그 규모를 알 수 있다. 그 중 강제 노동으로 인해 죽음에 이른 소련인의 수는 무려 216만명에 달한다.

2.4.1. 전범기업


  • 바이엘
  • 블롬 플루스 포스: 당시 명칭은 "블롬 운트 포스(Blohm & Voss)"였으며, 군함 및 항공기를 생산했다.
  • 도르니에: Do 17, Do335 등 폭격기와 전투기를 생산했다.
  • 도이체방크
  • 자이스: 총기 및 화포에 쓰이는 망원조준경을 제작했다.
  • 지멘스: 유대인에 대한 노동력 착취와 군수물자를 제공했다.
  • 라이카: 카메라, 거리측정기, 기타 광학기기를 제작해 납품했다.
  • 라인메탈: 전차포로 유명하며 제2차 세계 대전 시기부터 유명했던 MG34, 8,8cm FlaK과 5호 전차 판터의 7,5 cm KwK 42 포를 만든 기업이다. 현재 120mm 활강포의 경우 독일의 레오파르트2 계열, 미 욱군 M1A1 전차, 한국 육군 K1A1 전차의 주포(같은 전차포이다.) 등이 라인메탈의 것이거나 라이센스 제품으로 서방국가 주력 전차에 장착된 120mm 주포의 표준 같은 무기이다.
  • 루프트한자: 공군 조종사를 양성했다.
  • 메르세데스-벤츠: 대부분의 전차용 가솔린 엔진 제작. VK 16.02 레오파르트 등 전차 포탑, 항공기용 엔진 제조, 뿐만 아니라 동유럽인들과 유대인들을 상대로 나치 친위대 감시 하에 무임금 강제노동을 한 만행도 있다. 또한 히틀러가 벤츠를 의전차량으로 이용하고 다녔다.
  • 메서슈미트: Bf109, Me 262등 전투기를 생산했다.
  • 아우디
  • 오펠: 오펠 블리츠를 비롯한 군용 트럭 등 각종 군용차를 생산했다.
  • 융커스: Ju 87을 비롯한 군용 항공기와 항공기용 엔진을 생산했다.
  • 콘티넨탈 AG: 군용차의 타이어를 생산했다.
  • 크루프: 장갑차, 경차량 생산. 구스타프 열차포도 크루프가 만들었다.
  • 포르쉐: 군용 경차량 및 전차를 생산했다. 다만 전차 개발은 신통치 않았기 때문에 나치 독일의 전력 증대에 큰 도움은 되지 못했다.
  • 폭스바겐: 애초에 히틀러의 지시로 만들어진 회사. 포로들이나 점령지 주민들을 이용한 노예노동을 굴렸고 공장에 '사망실'이라는 것을 두어서 공장 노예노동자들이 임신을 하거나 하여 가진 아이들을 거기에 가둬 죽을 때 까지 방치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 하노마크: 장갑차, 군용차를 생산했다.
  • BMW: 군용 이륜차 및 항공기용 엔진을 생산했다. Fw 190의 공랭식 엔진도 BMW사의 제품. BMW 지분을 가진 크반트 가문의 귄터 크반트(Günther Quandt)는 1933년 나치당에 가입해 강제수용소의 노동자들을 동원해 공장을 굴렸다. 그의 둘째 부인 마그다 리첼은 국가선전장관 파울 요제프 괴벨스와 재혼해 마그다 괴벨스가 되었고, 귄터와 마그다 소생인 하랄트 크반트(Harald Quandt)는 의붓아버지 괴벨스와 어머니 마그다의 자결 이후에도 살아남아 이복형과 함께 크반트 가문을 이끌게 된다.
  • MAN: 2호 전차, 판터 제작사. 뿐만 아니라 유보트 등 대부분의 장비의 디젤 엔진을 제작했다.
[1] 사진 속 맨 앞의 소년은 '츠비 누스바움(Tsvi Nussbaum)'(당시 7세)으로 알려져있으며, 부모는 살해되었으나 본인은 살아남아 뉴욕에서 의사로 살다가 2012년 사망했다. 그러나 그가 아니라는 전문가들의 의견이 많으며 본인 역시 확실치 않다고 증언했다.[2] 이들을 연행하는 부대는 바로 나중에 36 SS 디를레방어 사단으로 승격하는 디를레방어 SS 특수연대. 항목에서 보면 알 수 있듯 이 부대는 동부전선에서 너나 할것 없이 학살, 강간을 묵인, 조장하던 국방군과 SS들마저도 경멸했을 정도로 나치 독일 상층부에서 찍힐 정도의 미친 부대이다, 그 SS가 '일원'이 아니라 '밑에 두었을 뿐'이라고 표현할 정도니...애초에 사단장부터가 2차 대전 한참 전부터 아동 성폭행 및 강간 미수 전과로 수용소를 들락날락 거리고, 나치당에서도 여러 번 제명되었다가 유일한 친구인 고틀로프 베르거의 도움으로 여러차례 구제된 전과가 있다. 그리고 국방군은 좀 더 무거운 형벌로 형벌부대가 있었으며, 형을 유예하는 대신 형벌부대로 보냈다가 전공을 세우면 다시 원 부대로 돌려보내는 방식으로 운영하였는데, 이 형벌부대에서조차 구제불능인 미치광이들한테 무기를 쥐어줘 싸우다 죽으라고 만든 사단이 바로 이 36 SS 디를레방어사단이다.[3] 소년 옆에 총을 든 자는 요제프 블뢰체(Josef Blösche)출처라는 자로, 아인자츠그루펜에도 참여했다. 전후 소련의 포로가 되었다 동독으로 보내졌고, 이후 사고를 당해 얼굴이 심각하게 변형되었다. 그 와중에 결혼하고 아이를 둘 낳고 살다가, 1961년 함부르크에서 전직 SS 동료가 그의 범죄행각을 재판에서 폭로했고, 동독 경찰에 의해 신분이 발각되어 1967년 체포되었다. 1969년 동독 Erfurt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라이프치히에서 총살형이 집행되었다.[4] 정확히는 게슈타포의 포로 학살이다.[5] 1명의 독일인을 위해 100명의 폴란드인을...[6] 게다가 국방군이 아인자츠그루펜의 활동을 지원하기도 했다.[7] 독일 국내의 유대인으로 한정하면 이건 말이 된다. 나치는 전쟁을 일으키기 전에 독일 국내의 유대인을 대상으로 여러 번 집단 박해(pogrom이라고 하며, 원래는 제정 러시아의 유대인 집단 박해를 말하는 단어다)하였는데, 유대인을 죽인 나치 당원은 무죄로 방면되었지만 강간한 나치 당원은 출당되었다.[8] 현재의 우크라이나 하르키우. 즉 당시의 소련 영토. 제2차 하르코프 공방전,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이 벌어진 곳이다.[9] 러시야 영토[10] 이러한 혼혈아들의 출생 증명서에 프레드리히, 루이즈 등의 독일식 이름을 중간에 끼워넣는 정책을 계획됐던 적도 있다. 슬라브인들을 아리아인으로 교체하기 위한 인종 청소가 목적이었다.[11] 물론 이 초토화 전술이 게릴라전을 상대하는데 좋은 효과가 있었다. 특히 독일군 점령지의 게릴라들은 연합군과의 전쟁이 없었다면 진즉에 전멸했을 정도였다. 사실 게릴라 문서를 보면 알다시피 아무리 강대국이라도 게릴라전에 맞서는것은 전면전보다 더 힘들기에 게릴라의 근원을 파괴하는 섬멸전을 수행하지 않는한 포기할수밖에 없다. 베트남 전쟁아프간 전쟁, 이라크 전쟁도 공통점이 섬멸전과 초토화가 없었기에 강대국들이 포기할수밖에 없었다.[12] Вели́кая война́ (2013)[13] 뱌즈마: 5500채의 건물들 중 51채, 그차즈크: 1600채 중 300채, 르제프: 5400채 중 500채 생존.[14] 《Hitler's Commander: Field Marshal Walther Model》 스티븐 H. 뉴튼[15] 이에 대해서는 소련 공군이 자국 민간인들에게도 폭격을 감행하는 일이 발생했으므로 피난민들이 소련군과 NKVD 위원들로부터 자기들을 지켜 달라고 요청했다는 독일 측 주장과, 9군이 민간인을 강제로 끌고 가면서 초토화 작전을 저질렀다는 소련 측 주장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16] 직접 적과 전투하는 인원은 비교적 소수인 전투조종사들이고 대부분의 지상 요원은 기지에서 벗어나지 않으므로 직접 교전할 일 자체가 적다.[17] 소련 해, 공군 조종사나 항공기 승무원들의 경우 주적이 주적이었던지라 마찬가지로 학대받은 경향이 크다.[18] 대한민국 해군의 경우, 장보고급 잠수함을 인수하는 과정에서 접한 유보트 전사 등을 통해 인수단원을 통해 꽤 긍정적인 이미지로 크릭스마리네가 국내에 소개된 점, 우방국 군대인 미합중국 해군 등도 크릭스마리네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하는 분위기가 대세인 점 등으로 인해, 3군 중 가장 우호적인 시선을 받는 경향도 있다.[19] 이건 '국제법을 장식으로 아는 히틀러조차도 하지 말라고 했던 짓'이다. 물론 히틀러가 그렇게 말한 의도는 이게 '''미국을 자극할 수 있어서'''이다.[20] 물론 이 경우 구조 활동 중 공격을 받은 상황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고 공식적인 명령으로 구조 활동을 금지시킨게 잘한 것은 아니다. 다만 되니츠도 명령은 했으나 구조 활동을 하는걸 묵인했다는 이야기도 있다.[21] 향후 이 혐의로 전범재판에서 사형에 처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