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한국당

 

'''대한민국 여당'''
민주자유당
(1990.2~1992.9)
(1993.2~1995.12)


'''신한국당
(1995.12~1997.11)
'''

새정치국민회의
(1998.2~2000.1)
'''신한국당'''
'''공식명칭'''
신한국당
(新韓國黨, New Korea Party)
'''창당일'''
1990년 1월 22일 (민주자유당)
'''당명 변경'''
1995년 12월 6일 (신한국당)
'''해산일'''
1997년 11월 21일
(통합민주당과 합당, 한나라당 창당)
'''이념'''
보수주의, 자유보수주의, 자유민주주의, 경제적 자유주의

'''내부계파:'''
보수자유주의, 국민자유주의, 반공주의
'''중앙당사'''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의사당대로 18
(여의도동, 아시아원빌딩)
'''대통령'''
김영삼 / 14대 (1995.12~1997.11)
'''의석 수'''
'''152석 / 298석''' (한나라당 창당 직전)
'''당 색'''
파란색 (#003990)
'''정책 연구소'''
여의도연구소
'''국제 조직'''

1. 개요
2. 상세
3. 당가
4. 역대 지도부
4.1. 총재
4.2. 대표최고위원
4.3. 원내총무
4.4. 사무총장
5. 역대 선거결과
5.1. 국회의원 선거
6. 비판
7. 관련 문서
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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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95년 12월부터 1997년 11월까지 존재했던 대한민국 보수정당. 3당 합당으로 탄생한 민주자유당이 단순 당명변경하여서 만들어진 보수정당으로 결국 실질적으로 민주자유당 법인은 1990년 1월 22일부터 1997년 11월 21일까지 7년 10개월간 존속했다.
당의 역사상 손꼽힐 만큼 개혁적이었으며, 대구/경북에서 가장 외면(?)받았던 보수정당이기도 하다. 그 이유는 신한국당이 TK 출신이 대부분인 5공, 6공 시절의 군인 출신 정치인들을 숙청한다는 불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여파로 TK에서 자유민주연합무소속 후보들이 약진하는 돌풍이 일어나기도 했다. 하지만 5공, 6공 출신의 인사들을 밀어낸 자리에 신세대 정치인들을 대거 공천해서 당의 분위기를 바꾸는데 성공했고 이때 당선된 초, 재선의원들중 상당수가 중량감 있는 정치인으로 자라나면서 보수정당이 정권을 빼앗아오는데 성공하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그러나 1997년을 전후로 해서 노동법 및 안기부법 날치기, 김영삼 대통령의 아들인 김현철이 비리에 연루되어 구속되는 사건이 발생하고 이 여파가 IMF 외환위기까지 이어지면서 문민정부와 신한국당의 이미지는 상당히 실추된다. 결정적으로 신한국당과 통합민주당이 합당하면서 새롭게 총재직에 취임한 조순에 의해 한나라당이라는 이름으로 창당하였다.
당시 홈페이지 도메인은 'www.nkptel.or.kr', PC통신(신한국텔) 접속 명령어는 'go nkptel'이었다.

2. 상세


가장 짧게 존속 했던 여당의 당명 가운데 하나로, 비슷한 예로는 열린우리당(3년 9개월), 대통합민주신당(6개월)이 있다. 그런데 대통합민주신당은 사실 대통령이 입당한 적은 없어서 엄밀한 의미의 여당이라고 하긴 어려우므로, 신한국당이 '가장 단명한 대통령 소속당명'이라 볼 수 있다.
김영삼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문민정부'''가 출범한 이후에도 여당인 민주자유당의 다수파는 여전히 민주정의당 출신의 민정계였는데, 1995년 12월 김영삼은 '''5.18 광주민주화운동 특별법'''을 제정하여 전두환, 노태우를 비롯한 12.12 군사반란 가담자들을 전격 구속했다. 그리고는 자신이 노태우와 함께 만들었던 민주자유당의 간판을 내려버리고, 김영삼 정부의 국정 슬로건이었던 '''신한국 창조'''에서 따온 신한국당으로 이름을 고친다.# 로고 또한 중도노선으로 방향을 돌리는데 이는 당시 야당이던 새정치국민회의도 취한 태도였다. 어찌보면 좋은 현상일지도 모르나 이 현상은 철새 국회의원의 대량 생산 원인이 되었다.[1]
1996년 실시된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수도권에서 선전했음에도[2] 전두환, 노태우 구속의 역풍을 맞고 대구광역시, 경상북도에서 자유민주연합무소속에게 대거 의석을 내주는 바람에 과반수 확보에 일단 실패했으나, 선거 후 자민련과 민주당, 무소속 의원들을 끌어와 과반수를 확보하였다.[3]
1996년 12월 크리스마스 노동법 및 안기부법 "날치기"(직권상정) 파동[4]1997년 외환 위기로 지지율이 떨어지자,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1997년 11월 통합민주당과 합당하여 한나라당이 된다.
집권 여당으로서는 사상 최초로 경선을 통해 대선 후보를 선출했었다. 이 때 선출된 후보가 이회창. 당시 9명의 후보가 치열한 각축전을 벌인다 하여 '''9룡'''으로 불렸다. 마침 명사극 용의 눈물이 인기리에 방영될 때라서, 이들을 다룬 만평 중 용의 눈물 버전으로 된 9룡 풍자도 꽤나 등장했었다.
신한국당은 1997년 대선 당시 전두환 사면을 추진하여 논란을 빚었다. 김영삼 정부이회창, 김대중, 이인제 후보가 이 전노 사면을 추진하고 전노사면에 여야 모두 찬성의사를 밝혔던 것이라 전노사면은 이미 기정사실화되었다.[5]

3. 당가


후렴구만 바꾸었을 뿐 민자당 시절과 가사가 동일하다.
(1절) 새시대 새역사의 아침을 열고
우리는 달린다 세계로 미래로
개혁의 큰 물결로 꿈과 희망을
민주 복지 통일의 선봉에 서서
세계속의 한국을 이끌어 나가자
(후렴) 아 세계로 미래로 힘차게 가는 그 길
그 길에 우뚝 선 신한국당
(2절) 새시대 새역사의 아침을 열고
우리는 뭉쳤다 하나로 뭉쳤다
희망의 새 정치로 더 크고 넓게
자유 평화 통일의 역군이 되어
세계속의 한국을 드높여 보자

4. 역대 지도부




4.1. 총재



4.2. 대표최고위원


  • 1대 : 김윤환 (1995.12.6 ~ 1996.5.6)
  • 2대 : 이홍구 (1996.5.7 ~ 1997.3.12)
  • 3대 : 이회창 (1997.3.13 ~ 1997.6.30)
  • 권한대행 : 이만섭 (1997.7.1 ~ 1997.7.20)
  • 4대 : 이회창 (1997.7.21 ~ 1997.9.29)
  • 5대 : 이한동 (1997.9.30 ~ 1997.11.21)

4.3. 원내총무



4.4. 사무총장



5. 역대 선거결과



5.1. 국회의원 선거


'''연도'''
'''선거명'''
'''지역구 (비율)'''
'''비례대표 (득표율)'''
'''총 의석 (비율)'''
'''결과'''
1996년
15대
121 / 253 (47.8%)
18 / 46 (34.5%)
139 / 299 (46.5%)
'''원내 1당'''

6. 비판


  • 신한국당은 1996년 노동법 날치기를 통해 오늘날 대한민국의 노동환경을 헬조선으로 전락시켰다. 이들이 도입한 파견근로제도의 정착으로 비정규직문제가 본격적으로 양산되기 시작했으며, 과시간 근로를 조장할 수 있는 탄력적 근로시간제 또한 이들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당시 직권상정 했던 시기는 시장에 고용의 탄력성이라는 효과를 통해 부실기업들의 도산을 막기 위한 고육지책이었으나 야당의 보이콧[6]과 유력 인사들이 정치적으로 악용하면서 결국 원점으로 돌아간다. 이후 야당과의 영수회담을 통해 사실상 달라진 게 없는 합의안이 국회에 통과되고 외국 투자자들은 이 기간 동안 한국정부의 리스크 관리 능력에 의문을 품으며 투자금을 빠르게 회수하기 시작했다.
그 외에도 신한국당 소속의 국회의원들이 1997년 8월 10일 대한항공 801편 추락 사고[7] 이후 추락한 사고기의 잔해 앞에서 단체로 기념사진을 찍은 적이 있다.
  • 신한국당은 1997년 대선 당시 전두환 사면을 추진하여 논란을 빚었다. 김영삼 정부이회창, 김대중, 이인제후보가 이 전노 사면을 추진하고 전노사면에 여야 모두 찬성의사를 밝혔던 것이라 전노사면은 이미 기정사실화되었다.[8]

7.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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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자유당

'''신한국당'''

한나라당

국민신당

[1] 양당이 서로 중도화하면서 성향차이가 거의 없어지다보니까 소속 정치인들 또한 당적 변경에 거리낌없어지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2] 모래시계 검사로 떴던 홍준표, 민중당 출신의 이재오, 김문수 등 정치 신인들을 대거 공천하고 야권이 새정치국민회의통합민주당(1995년)으로 분열한 영향이 컸다. 대략 수도권에서 30여개의 선거구가 야권 분열로 승패가 뒤집혔으며, 심지어 야권 단일화를 가정한 최상의 시나리오에서는 야당에게 1당을 내줄 수도 있었다.[3] 이 때문에 김종필 자민련 총재가 이회창 신한국당 대표를 증오하게 되었으며 훗날 김대중과의 관계가 틀어졌음에도 이회창에 대한 적개심을 풀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불과 2년 만에 김대중 정권이 거꾸로 한나라당(신한국당의 후신) 의원 영입을 통해 정계개편을 인위적으로 감행할 때는 이에 반발하던 하순봉 한나라당 원내총무를 향해 구천서 자민련 원내총무가 '''"우리는 원금 받으려면 아직 멀었다."'''라고 일갈하는 굴욕적인 상황도 있었다. 당시 MBC 뉴스데스크 보도[4] 그냥 "날치기"라고 하면 와 닫지 않을지 모르겠으나 '''비정규직(변형근로제) 및 파견근로제를 골자로 한 새 노동관계법, 그리고 불고지죄 및 찬양고무죄 수사 부활을 골자로 한 새 안기부법'''이 이 때 통과되었다. 당시 안기부장은 하나회를 분쇄해버린 권영해. 대신 복수노조 허용이란 순기능이 있었다.[5] 전노 사면에 대한 청와대 정치권 반응 1997.12.21 동아일보[6] IMF의 요구이기는 했지만 아이러니한 것은 당시 이를 비판했던 야권인사들 또한 본인들이 집권하여 기득권층이 되자 이런 막장스런 노동제도들을 그대로 유지한 채 정권을 이어갔다. IMF는 진즉에 끝났지만 제도들은 없어지지 않았다. 2019년에 이르기까지 이런 기조는 계속 이어지고 있다.[7] 참고로 이 사고로 인해 새정치국민회의신기하 의원이 사망하였다.[8] 전노 사면에 대한 청와대 정치권 반응 1997.12.21 동아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