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 서울 올림픽/유치 과정
1. 개요
1988 서울 올림픽의 유치 과정을 정리한 문서.
2. 국내 변천사
1979년 4월, 서울특별시 잠실실내체육관에서 당시 세계 여자농구선수권대회 결승전을 관람하러 왔었던 박정희 대통령은 당일 박종규 대한체육회장 겸 사격연맹회장, 김택수 당시 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 겸 민주공화당 국회의원, 정상천 서울특별시장과의 저녁 식사 자리에서 올림픽 개최를 직접 논의하게 된다.
육영수 여사 피격사건으로 대통령경호실장에서 물러나면서 권력 중심부에서 밀려났던 박종규는 이후 사격연맹 회장으로 1978년 제42회 세계사격선수권 대회를 유치해서 한국에서 성공적으로 개최하는 성과를 거둔다. 특히 이 대회는 당시 1인당 국민소득 1000달러대의 후진국으로 변변한 경기장조차 없었던 대한민국에서 개최한 최초의 세계적 규모의 스포츠대회이자 이벤트로 상당히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다.[1] 박종규는 이 공로로 박정희의 신임을 되찾으면서 바로 이듬해인 1979년 2월에는 대한체육회장으로 취임해서 국내스포츠계의 수장이 된다. 그리고 곧바로 올림픽 유치를 기획하게 된다.
박종규는 국가 스포츠 기반 활동의 저변 경쟁력 강화와 더불어 성장이라는 목표의 일환으로 박정희를 설득, 대한민국 최초의 올림픽 유치관련 구상안을 직접 전담하면서 준비의 초석을 다지기 시작, 1979년 6월 직접 푸에르토리코 ANOC 총회에 참석해 직접적으로 서울 올림픽 유치 가능성을 타진, 같은 해 9월 1일, 정상천 당시 서울특별시장은 기자회견을 통해 올림픽 유치를 천명했다.
게다가 스포츠계와 별도로 이미 유신정권 핵심부에선 장기적인 올림픽 유치 구상이 있었다. 당시 수도권 인구과밀로 고민하던 정부는 <행정 수도 건설을 위한 특별조치법>을 통과시켜서 실제 수도이전 작업을 준비하고 있었고, 오원철 제2경제 수석 비서관이 수백명의 전문가 그룹을 동원해서 충남 장기지구에 임시행정수도를 건설한다는 일명 '''백지계획'''을 만들어서 박정희 대통령의 재가까지 받은 상태였다. 그리고 이 백지계획에 이미 '''1996년 올림픽 주경기장 및 선수촌 부지'''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10.26 사건으로 박정희가 사망하면서 정치적 혼란속에서 올림픽 계획은 표류하게 된다.[2] 국민들의 관심은 전부 개헌과 민주화 일정에 쏠리게 되었고, 갑작스레 정권을 인계받은 최규하 대통령은 1980년 1월 19일에 공식적으로 "올림픽 유치 포기"를 선언한다. 게다가 5월달에는 올림픽 유치를 추진하던 박종규 대한체육회장이 실권을 장악한 전두환과 신군부 세력에게 권력형 부정축재자로 지목되면서 모든 공직에서 추방되기까지 한다.[3] 이렇게 올림픽 유치 계획은 백지화된다.
하지만 얼마 안가서 올림픽 계획은 다시 부활하게 된다. 국민들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총칼로 무자비하게 짓밣고 정권을 장악한 전두환과 신군부 세력은 민심수습책에 골몰하게 된다. 이때 막후에서 한국과 일본의 우익세력을 연결하는 밀사 역할을 하던 세지마 류조 이토추 상사 부회장이 극비리에 내한해서 전두환을 만난 자리에서 1964 도쿄 올림픽과 1970 오사카 엑스포를 예로 들면서 한국도 '이런 거대이벤트를 유치해서 사람들의 관심을 다른데로 돌려보라'고 조언한 것이다. 신군부 세력은 이 조언을 받아들여서 최규하 정부의 유치포기 결정을 뒤짚고 올림픽 유치에 정권의 사활을 걸게 된다. 불법적으로 집권한 군사정권이었기 때문에 부족한 정통성을 서울올림픽이라는 세계적인 이벤트로 메꿀려고 했던 것이다.
곧바로 정권 차원의 준비가 진행되서 1980년 11월 30일에 전두환의 지시에 따라 IOC에 올림픽 유치신청서를 내고 12월 2일에 접수를 완료시켰으며, 1981년 1월 6일 KOC가 올림픽 유치계획을 위한 실무반을 편성했다.
하지만 개최 도시가 될 서울특별시가 당시 가치로 2조 원에 육박하는 예산 부담을 이유로 하여 올림픽에 소극적인 행보를 보이는데, 이는 결국 1980년 1차 올림픽 실사단 조사에서 중앙정부 및 올림픽 위원회와 서로간 최악의 불협화음을 내버린다. 또한 남덕우 국무총리가 '올림픽 망국론'을 제기하면서 반발하자 '우린 총리부터가 유치에 반대하고 있으니 상대가 되겠는가?"라는 여론이 대두되었다.[4] 또한 대부분의 경제관료와 전문가, 기업인들도 하나 같이 막대한 비용부담을 이유로 올림픽 개최에 회의적인 입장을 보였다.
또한 남북대립 상황을 고려했을 때 공산권이 서울 유치에 격렬하게 반발할 것이라는 현실은 명백했으며,[5] 게다가 새롭게 등장한 전두환 정부는 반민주적이고 정통성 없는 독재정권(5.17 내란, 5.18 민주화운동 유혈 진압 등)이라는 페널티가 존재했기 때문에[6] 유치하기 힘들 것이라는 전망이 오히려 정상적인 상황이었다. 물론 당대 서유럽과 선진국들을 제외한 대다수의 중남미와 동유럽, 그리고 제3세계 국가로 간주되던 아프리카, 동남아 국가들, 거기에 같은 동아시아 국가인 대만, 중국도 독재정치가 펼쳐지는 상황이었기에 남한과 정치적인 상황이 크게 다른 점은 없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특히 당시 공산권은 서방권에 속하던 한국을 찍어주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으로 인해 여간 신경 쓰이는 부분이 아닐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불만들과 우려의 전망에도 불구하고 "일단 하고 보자!!"는 식으로 올림픽 유치에 나서기로 결정했다.[7]
무조건 올림픽을 유치하기로 결심한 전두환 정부는 정권의 2인자였던 노태우 정무장관을 전면에 내세우고, 그 뒤에는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인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이 뛰어들면서 정부와 현대그룹의 인력을 총동원하여 본격적인 유치전에 뛰어든다. 노태우는 올림픽 유치 결심을 국내에 보여주기 위한 단순 얼굴마담이었기에, 실질적인 유치는 정주영과 전 대한체육회장 박종규의 공이 크다. 그 외에 유학성 안기부장도 음지에서 로비를 벌이며 적극적으로 활약했다고 한다.
그런데 1987년 대선에서 노태우는 올림픽 유치를 전적으로 혼자만의 공로로 내세우고 그동안 고생해온 정주영을 무시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이것이 훗날 정주영이 정계에 진출하게 되는 하나의 계기로 작용한다. 그리고 노태우보다 공헌한 바가 큰 인물이면서 정주영 회장 못지않게 올림픽 개최의 필요성과 초석의 역할을 해오던 박종규는 신군부 정치세력에 의해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 정치생명이 끝났고, 1985년에 올림픽을 3년 앞두고 숨졌다.[8]
3. 개최지 경쟁 및 관련 이슈
앞선 국내 변천사 문단에서 언급되었지만 한국은 당시 아시안 게임과 올림픽 그리고 월드컵과 같은 국제적인 대규모적 스포츠 대회 개최라는 경험이 아예 전무한 상태였기 때문에, 이에 "먼저 1986년 아시안 게임을 유치한 후, 1996년 혹은 2000년 올림픽을 노리는 것이 어떻겠냐"는 의견을 제시받는다. 또한 당시 아시안 게임 개최를 위한 유치전의 상대국이 하필이면, 북한의 평양직할시라 한국 입장에서는 올림픽만큼이나 아시안 게임에서도 유치지를 추진하는데에도 더욱 신경써야 하는 대목이기도 했었다. 또한 이라크의 바그다드도 경쟁지로 참여한다.[9][10]
그리고 한국은 1988년 올림픽 관련 개최신청 초기에 이미 일본과는 서로 게임이 되지않을 것이라 판단하여 아시안 게임과 올림픽의 빅딜을 제안해야 할 정도로 올림픽 관련하여 전망이 좋지 않았던 상황이었다. 특히나 한국의 해당 제안은 1986년 아시안 게임 서울 개최를 일본이 지지하고 대신 한국은 1988년 올림픽에서 일본을 지지하겠다라는 권유였다.[11] 그러나, 일본은 이를 거부한다.
여기에 당시 박정희 대통령 시절부터 줄곧 한일관계를 조율하던 자민당 계열 일본인 정치인 세지마 류조가 정작 자국의 올림픽이 아닌 오히려 자신들 국가의 유일한 경쟁지역이었던 서울의 올림픽 유치를 오히려 돕겠다는 뜻을 보이면서 서울 올림픽 개최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쳤다고 전해진다. 특히 전두환 대통령에게 1964 도쿄 올림픽과 1970년 개최되었던 오사카 만국박람회를 그 예로 들면서 이처럼 한국에도 올림픽이나 만국 박람회 즉 지금의 엑스포와 같은 세계적인 수준의 대형 이벤트를 유치해야 한다는 조언을 해주었다고 전해진다.[12][13][14]
그리고 당시의 일본은 자국이 당연히 올림픽 유치에 성공할 것이라는 자만과 건성스러운 태도 때문에 대한민국에 참패하고 유치에 실패하였다. 이 때문에 뒷날 일본의 일부 세력은 "당시 올림픽에 관련된 사람들이 너무나 무능하고 무관심했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그리고 결국에 1986 서울 아시안 게임도 유치하고 동시에 88년 올림픽도 유치하는 역사상 전례가 없는 유일무이한 전례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결과론적으로 따져 보면 당시 일본 입장에서는 이에 너무나 무능함을 보여주었다는 사실을 충분하게 드러냈고 이에 대한 인과 관계까지 확실하게 나뉘어진다.[15][16]
참고로 당시 일본의 상황은 나고야의 시민들과 일부 시민단체를 통해 올림픽 유치와 경기장 건설 등으로 인한 환경파괴 문제 등의 논란으로 지속적으로 올림픽 반대의 여론이 팽배하면서 대대적인 반대 활동을 벌였다고 전해진다. 또한 일본 내부에서도 정치적으로 나고야 올림픽 개최에 대한 심리적 피로와 외국 뉴스를 통한 각종 견제에 따른 심한 압박을 논하면서 올림픽 유치에 소극적이거나 아예 반대하는 행보를 보였다. 참고1, 참고2
결국 올림픽 유치에 실패한 나고야는 이후 20년 이상을 부단히 노력한 끝에 등록박람회인 2005 아이치 엑스포 유치와, 이후 대륙별 권위 국제대회라 할 수 있는 2026 아이치·나고야 아시안 게임까지도 개최를 성공시키면서 과거의 한을 어느 정도 푸는데 성공한다.
4. 국내외적 여러 시련 및 정국 혼란
분단 상황에 대한 우려를 오히려 한반도 평화를 위해 올림픽이 필요하다는 논리로 극복했지만, 북한의 방해는 여전히 심했다. 이미 올림픽 개최 과정에서 대한민국 서울이 개최될 경우 분단이 고착화된다는 논리로 자신들의 입지가 좁아질 것을 우려해[17] '''일본을 지지했던 북한'''은 1987년까지 뜬금없는 '''공동 개최론'''을 주장하며 대회 명칭을 '''평양-서울 올림픽'''으로 해야 한다는 등,[18] 한국에는 에이즈(AIDS·후천성면역결핍증) 환자가 60만 명에 달한다고 방해 선전을 하는 등 근거 없는 소문을 퍼뜨렸다.[19] 결국 포기한 북한은 대신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을 개최하여 올림픽보다 더 규모가 컸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하였으나, 해당 대회를 무리하게 개최하여 바로 직후 떠안은 상황과 후폭풍은 상당히 크게 작용한다.
그리고 서울이 올림픽 유치에 성공한 이후 북한은 아주 과격한 행보를 보이는데 특히 1986년에 열리는 서울 아시안 게임을 방해하고자 아랍계 테러리스트에게 김포국제공항 폭탄 테러를 사주. 공항 청사 앞에서 폭탄이 터지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이 테러로 5명이 사망하고 32명이 부상당했으며,[20] 또한 북한은 급기야 올림픽 보이콧 운동까지 시도하기에 이르는데. 앞에 나온 사례 정도는 사실 그냥 단순 애교 수준이었고, 그간 북한의 공작 활동들 중에서도 'KAL기 폭파 사건'으로도 널리 알려진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과 사실 그 이전이었던 1983년에 직접적으로 전두환 대통령을 암살하고자 시도했던 현재 미얀마인 과거 버마에서 발생했던 '아웅산 묘지 테러 사건'와 같은 가장 유명했던 사건들이 이에 포함된다.'''
이러한 북한과의 관계와 테러 위협을 이유로 소련과 인도에서 불거진 올림픽의 아테네 영구 개최설 등으로 잠시 올림픽 개최가 흔들리기도 했다. 특히 6월 항쟁의 와중에 한국의 정치적 혼란을 이유 삼아 LA와 베를린 등에서 유치권을 가져오려는 시도가 있었다. 또한, 사마란치 IOC 위원장이 만약 한국에서 소요사태가 일어날 시에 올림픽 장소변경을 고려했을 정도로 이는 상당히 심각한 문제로 대두될 뻔했다.
이처럼 당시 한국의 심각했던 국내외적 상황은 IOC에서도 1988년은 어렵고 1996년으로 연기하자는 말도 나왔는데 당시 노태우가 IOC로 가서 문제없다는 연설을 하고[21] 이후 6.29 선언으로 정치적 혼란이 수습되면서 예정대로 1988년 9월 서울에서 개최될 수 있었다.
또한 국내적으로 올림픽이 열리기 1년 전이었던 1987년 6월 민주 항쟁에서는 당시 명동성당에 민주화 시위대가 정부의 공권력을 피해 주둔해 있었는데 또한 당시 김수환 추기경이 이러한 정부의 공권력 투입에 직접 맞선다. 이처럼 만약 정부가 이들을 무력으로 진압했다고 가정한다면 결국 서울 올림픽은 3번 연속으로 반쪽 올림픽이 될 뻔 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더군다나 이 올림픽은 전두환의 최대 역작이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았을 정도의 세계적으로 권위가 있는 대회 행사인데 만약 시위를 무력진압함으로 자기가 불러온 복을 자기가 걷어차 버리는 상황이 될 뻔했다고도 볼 수 있다.[22]
그리고 당시 특전사령관이었던 민병돈 중장은 정부의 군대 출동 명령에 대한 적극적인 거부 의사를 육군사관학교 동기였던 보안사령관 고명승 중장에게 밝히게 되는데, 이처럼 군인 세력마저도 폭력 사태가 일어나 자국에서 처음 치뤄질 올림픽을 무위로 그르치는 행동은 피해야 한다는 움직임까지 일어났다. 이는 결국 특전사의 무력진압사태를 사전에 봉쇄하고 큰 사건과 사고 없이 이후 6.29 선언의 가장 결정적인 역할로서 작용되며 진정으로 민중과 국가에 헌신하는 든든한 방패막이자 수호자로서 또한 자국 올림픽 개최 성공에 지대한 역할을 만드는데에 크게 공헌한다.
5. 당대 이데올로기적 문제와 반등
1976 몬트리올 올림픽은 남아공의 흑인 인종차별 문제로 아프리카 국가 대부분이 보이콧하였다. 그 다음 1980 모스크바 올림픽에서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문제 삼아서 자본주의 진영의 서방권이 대거 불참하였다. 그리고 1984 LA 올림픽은 모스크바 올림픽 불참에 대한 보복으로 이번에는 공산주의 진영의 동구권 대부분이 참여를 거부하였다. 이렇듯 국가간의 갈등으로 올림픽이 연달아 파행되는 와중에 다음번 개최지가 분단국가인 대한민국 서울로 정해지자, 이번에도 공산권의 불참으로 또다시 반쪽 대회가 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었다.
일단 중화인민공화국이 1984년 7월에 가장 먼저 참가를 선언했지만, 애당초 이 당시의 중국은 소련과 대립하면서 독자 노선을 걷고 있었기 때문에 공산권 전체에 별다른 영향은 없었다. 게다가 중국은 이미 1990년 아시안게임의 베이징 유치 및 이를 토대로 2000년 올림픽 유치를 노리고 있었기에 괜히 서울 올림픽에 불참해서 일을 그르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리고 1986 서울 아시안 게임의 경우 중국은 참가했으나 그 외의 소련과 관계가 돈독한 아시아 공산주의 국가들[23] 이 죄다 불참했던 전례가 있었고, 비록 아시아 스포츠계에서 중국 한 나라의 위상이 워낙 크다 보니 딱히 다른 큰 문제가 없어 보일 수도 있겠지만 '''올림픽의 경우는 아시아만 국한된 대회가 아닌 그 이상의 국가와 의미를 포괄하는 대회이기 때문에''' 중국의 참가만으로는 공산권 전체의 참가에 대한 확신을 가지기는 힘든 상황이었다.
그러다가 1985년 3월 동유럽의 대표적인 공산주의 소련의 대표적인 위성국가였던 동독이 참가를 확언하면서 실마리가 풀릴 것으로 기대했으나 이는 사실 동독 내에서 과거 1984 LA 올림픽을 보이콧했던 것을 두고 논란이 거셌던 것을 그저 무마하려는 목적으로[24] 소련과의 협의도 없이 발표된 상태였다는 것. 이에 결국 공산권의 참가 여부에 대한 최종 칼자루를 쥐고 있었던 것은 당연하게도 그들의 대표격이었던 소련이었다.
그러나 만약 이번에도 소련이 보이콧하게 될 경우 베트남이나 폴란드 등의 소련과 연관이 깊은 다른 공산 국가들 모두가 보이콧할 우려가 컸기 때문에 1987년 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에 취임했던 김운용이 그것도 러시아어까지 배워가며[25] 당시 소련의 IOC 위원을 만나 집중적으로 그에게 올림픽에 참여해줄 것을 간곡하게 설득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에 부응하듯 비록 본래 이념이 첨예하게 반대되는 적성 국가였지만 소련 자국의 언어까지 배워가며 설득에 나선 김운용의 모습은 도리어 소련 위원들에게는 좋은 인상으로 다가왔고, 때마침 당시 소련은 개혁파인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집권한 상황이었던지라 마침내 1988년 초에는 '''소련의 참가가 확정되었고''' 이에 여러 공산 국가들도 올림픽 참여 의사에 동참할 것을 밝히면서 서울 올림픽은 총 160개 국가가 참가하는 역대 최대 규모임과 동시에 8년 만에 서방 진영과 공산 진영이 함께 참가한 대회로 기록된다.
허나 소련을 포함한 여러 유럽의 동구권 공산권 국가의 참가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계속 올림픽 보이콧 의사를 굽히지 않자, 급기야 대한민국 정부는 인공기 게양과 북한 국가 연주 허용이라는 엄청난 제시를 내세우며 북한의 올림픽 참가를 종용했다.[26] 그럼에도 북한은 결국 참가하지 않았다.[27] 또한 2018년에 공개된 외교문서에 따르면 당시 북한은 김영남이 이를 주도하여 동구권 공산주의 국가들에게 서울 올림픽에 대한 보이콧을 촉구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이와 반대로 북한은 같은 공산&사회주의 국가들에게 그저 냉담한 반응만을 전달받았다고 전해진다.#[28]
6. 유치지 선정 및 과정
이 당시에는 세계적으로 여러 이유에 따른 올림픽에 관한 부정적인 회의론과 각종 문제가 일파만파 퍼지고 있었다. 특히나 1972 뮌헨 올림픽에서 벌어진 검은 9월단의 테러로 인해 그 다음번 1976 몬트리올 올림픽에서는 보안경호 비용이 무려 40배 이상 폭증했다.
거기에 제2차 오일 쇼크로 인한 세계적 경기침체라는 엄청난 여파까지 겹치면서 해당 올림픽은 '''사상 최악의 적자'''를 기록하였고, 또한 캐나다 중앙정부의 지원 없이 올림픽을 유치했던 도시였던 몬트리올[29] 은 결국 올림픽 이후 파산에 이른다. 이 때문에 1988년 올림픽 유치를 계획하던 오스트레일리아의 시드니, 알제리의 알제, 그리스의 아테네가 이러한 몬트리올 올림픽 이후의 참담한 후폭풍의 현실을 직시하게 되면서 모든 계획을 전면적으로 철회하게 된다. 이로 인해 일본의 나고야와 대한민국 서울. 딱 이렇게 아시아의 두 도시만이 올림픽 유치 경쟁 후보지로 남는다.
이렇게 되자 IOC는 올림픽 회의론의 확산 그리고 경쟁 유치지가 없는 상황에서 단번에 올림픽 단독 개최지로 확정이 이루어질 경우 일어나게 될 논란을 우려한다. 이는 즉 유치지 선정 과정에서 영 모양새가 좋지 못한 결과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기존의 올림픽 개최지 선정은 유치 희망 도시들이 계획안을 제출하면 IOC에서 심사해서 최소 기준에 미달하는 도시들을 걸러내고 후보군을 3~4개 정도로 압축한 다음에, IOC 위원들의 비공개 투표로 결정하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1988년 올림픽 유치전에서는 처음부터 후보가 서울과 나고야 겨우 두 도시밖에 없었던 상황이었고, 또한 당시 서울의 계획안은 낙제 수준이었다.
그러나 IOC 위원회가 서울을 유치 후보에서 최종 탈락을 시키면서 나고야를 단독으로 개최지로 확정시켰다고 가정하면 '''오히려 위원회에 부정적인 사안으로도 언급되었을 것이다.''' 이는 당시 올림픽 개최지에 강대국 유럽에서는 후보가 등장하지 않았던 상황이었고 올림픽 유치를 포기한 국가들을 제외하면 유치 지원에 힘쓴 지역이 무려 아시아에서만 단 2곳만이 남았던 상황이었다. 그리고 이를 더 복합적인 경우를 따져 보았을시엔 미국과 유럽의 선진국을 포함한 강대국들의 여러 우려와 반발의 목소리가 쏟아질 뿐만 아니라 매우 높은 확률로 세계적으로 이 스포츠 축제라 불리는 올림픽의 존립 자체에 관한 근간을 무너뜨릴 수도 있는 극단적인 상황으로 번졌을 가능성 또한 당시 상황을 통해 지레짐작할 수 있다.
당시의 올림픽 회의론은 분명 제3세계쪽이나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가 아닌 서방 진영 즉 미국과 같은 유럽 진영 강대국에서 유독 더 많이 나왔던 말이었다. 그러니 올림픽 유치에 대하여 또 관련된 대륙 간 안배원칙 즉 지역 할당제가 있다 하더라도 아시아권을 평가절하하면서 오히려 자신들의 힘을 과시했을 가능성이 컸을 것이고, 만약 올림픽이 위신을 완전히 잃게 되면서 이에 따른 극단적이면서 부정적인 여파와 국면이 일어난다면 자본주의 진영인 미국과 유럽 강대국 vs 올림픽 위원회 vs 사회주의 진영 vs 제3세계 국가들의 대결 양상 구도로 나타났을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
더군다나 한 국가가 자국의 올림픽 개최로 인해 이에 투입이 될 국내의 기업들뿐만 아니라 참가국과 그 밖의 지원상 들어올 가능성도 높은 타국의 기업들까지 범주에 포함시키면서 이를 복합적으로 따졌을 경우에 그 수가 얼마나 많은지 그리고 이에 따른 경제적 효과와 이득을 얼마나 얻게되는지 이는 어느 정도 고민하고 생각해보더라도 답은 뻔하게 나온다. 즉 그동안 연속적으로 반쪽 올림픽의 오명 등과 같은 여러 문제로 인해 더 이상 올림픽의 질적 요소와 그리고 위신을 떨어뜨릴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는 바로 현재에서 최선의 방법이자 가장 좋은 판단은 단 두곳뿐이었던 유치 경쟁지인 나고야와 서울의 경쟁 구도를 지속적으로 유지시키면서 오직 서로가 치열하게 승부를 펼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장려해야 한다는 의미를 뜻하게 된다. 그래야지만 적어도 올림픽 유치 위원회에서도 자신들의 결정에도 그에 대한 조금의 명분이라도 챙기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대책 없이 불리함 속에서 무작정 유치전에 나선 서울과 달리, 나고야는 이미 1977년부터 올림픽 유치를 준비해왔었기 때문에, 서울로서는 승산이 없다는 예측이 지배적이었다. 오죽했으면 유치 도시가 어디인가보다는 나고야가 몇 표까지 얻느냐에 관심이 집중될 정도였고, 서울의 경우에는 '''달랑 3표''' 나올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까지 존재했었다. 그리고 그 3표의 정체는 한국, 미국, 중화 타이베이라고 추측되었는데, 한국이야 '''설명이 필요 없고''', 미국은 서방 진영의 대표격으로 자신들 턱밑까지 쫒아온 당시 일본의 급성장과 독식을 견제하려는 목적으로 서울을 지지하는 경우가 많았고, 특히 대만의 경우는 수교국이 갈수록 줄어드는 상황에서[30] 대한민국이 외교상 최후의 대국이었기에 당연히 서울을 절대적으로 밀 것으로 예측했었다.
한국은 당시 남미, 중동, 아시아 등 개발도상국으로부터 많은 지지를 얻었으며, 일부 선진국도 아시아에서 일본을 제외하고 올림픽 개최국가가 거의 없는 상황에서, 1964년에 하계올림픽과 1972년에 동계올림픽을 이미 치른 일본이 얼마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연달아 올림픽을 개최하는 것에 대해 노골적으로 세 번씩이나 올림픽을 개최하려는 일본에 대해 불만과 형평성의 문제에 대한 이야기가 부상하기 시작했다.
특히 정주영 당시 현대 회장 특유의 뚝심 있는 행보가 압권이었는데, 유치위원들이 서독의 바덴바덴에 도착한 와중에 런던으로 날아가 영국의 IOC 위원들과 식사를 했을 때의 일화이다. 당시 식사 도중 영국의 IOC 위원 한 명이 정주영 회장에게 "체육계에서 얼마나 일했는가"를 묻자, 이에 정주영 회장은 "올림픽 유치를 위해서 처음 일하는 것"이라는 대답에, 그 위원은 오히려 이에 "초보자를 내보냈다"고 말하면서 정주영 회장에게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그렇게 서먹한 분위기가 계속되던 와중에 정주영 회장이 대뜸 '''"일본은 이미 올림픽과 같은 엄청난 세계적인 행사들을 개최한 이후 엄청난 경제 대국으로서 발돋움하고 또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데, 만약 이번에도 유치한다면 일본의 경제발전을 더 가속화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라고 직언하자 이에 돌연 관심을 가지고 정주영 회장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서 들어주었다고 한다. 이는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당시 영국의 기간사업들의 상당수가 일본과 서로 경쟁을 하고 있었던 시기였기 때문에 이는 영국 측에서도 귀가 솔깃한 발언이었으며, 그리고 이를 통해 미국과 유럽의 수많은 선진국들은 엄청난 성장 속도를 이룩하면서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무려 자신들을 뛰어넘는 제2의 경제 대국이자 최고 선진국으로 성장한 일본을 '''이제는 견제해야 된다'''는 위기의식과 경쟁의식을 심어주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는 사실로도 일컫어진다.
서울시가 유치지 선정 과정 초기의 불리함을 적극적인 유치 노력을 통해 극복하여 나고야의 백중세 혹은 절대 우세 분위기는 갑자기 개최지 결정 당일에 상황이 반대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특히 당시 일본 측 프레젠테이션 연사는 일본어만 할 뿐 영어는 못했고, 반대로 한국 측은 영어를 유창하게 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당시 박종규 IOC 위원 겸 대한체육회장은 군 시절 미국 유학에 다녀온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영어를 유창하게 할 수 있었기 때문. 특히 컨벤션과 프레젠테이션에서 한국이 잇따라 우세를 점하면서 상황을 호전시켰다. 그리고 아울러 양자 대결 구도에서 처음 개최하는 쪽에게 기회를 달라는 호소가 먹혔다. 물론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절묘하게 위기를 모면했다.
그리고 당시 소련 출신 국제체조연맹 회장 겸 IOC 위원이었던 티토프가 일본과 공조하여, '''"당신들은 일본에서 빌린 차관 60억 달러도 갚지 못하는 주제에 무슨 올림픽을 개최하겠다는 것인가?"'''라고 하자 서울 올림픽 유치단 일원이던 당시 무역협회장 유창순 회장이 '''"우리나라와 일본이 장사하는데 우리가 200억 달러 정도 적자이다, 그래서 그걸 고쳐보겠다고 60억 달러를 빌려 간 것이며, 우리나라는 매년 수백억 달러를 수출하는 나라이다. 그 정도 돈은 얼마든지 갚을 수 있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그런 질문하지 마시오!"'''라고 반박하며 티토프를 데꿀멍시킨 것이었다. 그리고 사실 이때의 한국은 인구수 때문에 소련보다는 경제적인 규모에서는 밀렸지만. 인당 GDP와 실질적 삶의 질을 따졌을 때는 결코 크게 뒤떨어지지 않는 상황 아니 그 이상의 자본주의 국가로 부상하면서 점점 윤택한 삶을 이어나갔기에 이러한 소련의 지적은 그저 어불성설에 불과했다.
그 결과 1981년 9월 30일 서독의 바덴바덴에서 열린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제84차 총회[31] 에서 일본의 나고야를 52 대 27로 꺾고 결국 최종 개최지로 결정되었다.[32] 특히 득표수에서 무려 52 대 27이라는 상당히 놀라운 결과가 나왔는데 당시 자유주의 세력이었던 대한민국의 서울을 결코 지지하지 않을 세력이었던 공산권 국가들이 IOC 위원의 약 2할을 차지하는 상황과 북한의 여러 방해 공작 속에서도 이루어낸 쾌거였다.
또한 일본보다는 '''한국과 사정이 비슷한 비동맹 제3세계 국가들의 지지 속에 압도적인 결과가 나왔다'''는 분석도 있었다. 그리고 이에 대한 결정적인 이유로는 일본이 올림픽 유치 준비를 앞두고서 쿠웨이트의 IOC 진출을 반대하는 바람에 이에 쿠웨이트가 한국 쪽으로 완전히 돌아서면서 같은 이슬람 문화권이면서 유대감이 강한 나머지 제 3세계의 중동 국가들의 모든 표가 단숨에 한국으로 몰리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시 급성장하는 일본을 경계한 미국, 영국, 프랑스와 같은 서방 선진국 계열 국가들을 비롯해 그간 일본의 표밭으로 여겨지던 유럽 지역, 그중 특히 동구권 표심 공략에는 당시 스포츠 용품의 절대 강자였던 아디다스의 지원을 받는데 성공했다는 점이 컸다는 점이다. 거기에 이미 올림픽이 열리기 이전부터 당시 선진국 계열에 오른 일본에서는 아시아권에서 거의 유일하게 세계적인 스포츠 브랜드로 군림하던 미즈노와 아식스가 있었던 것과는 다르게 한국에는 오직 국내에서나 유명했던 프로스펙스 정도가 거의 유일했다.[33] 때문에 우리나라 올림픽 유치단은 특히 대한민국 정부의 특사격이던 박종규가 아디다스의 회장으로서 국제 스포츠계에 막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34] 홀스트 다슬러[35] 와의 여러차례 협상을 통해 스포츠마케팅 관련 이권을 보장해주고 그가 영향력을 유지하던 많은 IOC 위원들이 한국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도록 기틀을 마련했다고 한다.
결국 올림픽이 서울로 개최되면서 결과적으로는 서로간 이해관계를 통한 협약을 통해 이후 Win-Win의 결과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아디다스의 입장에서는 만일 일본으로 올림픽이 넘어가면 휘장사업 등에서 일본업체가 독차지할 것이 분명했기에 그들은 한국으로 올림픽이 넘어가는 것을 희망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한국과 아디다스의 서로의 이해 관계에 따라서 올림픽에 노력을 다했던 것이고 특히 아디다스 입장에서는 당시 한국에 독자적인 스포츠 브랜드가 많지 않았다는 점을 간파하였고 블루 오션으로 간주하였다. 그리고 이를 만약에 한국이 올림픽 유치에 결국 성공하게 될 시에 큰 의미로는 한국에 아디다스가 사업권을 따내면서 이러한 자신의 브랜드를 새롭게 런칭하면서 한국 시장에 진출이 가능해지는 교두보가 열린다는 뜻이거나, 혹은 적어도 경쟁하는 일본업체의 승승장구를 막을 수 있다고 판단하여 한국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면서 힘을 실어주었다는 것이고 이후에는 올림픽으로 인한 한국 시장의 브랜드 진입로 확보와 여러 방면의 상업적인 파트너쉽을 펼칠 수 있는 중요한 국가로서 인식되었다.[36]
여담으로 서울 올림픽 유치를 계기로 홀스트 다슬러가 1982년 설립한 스포츠마케팅 기업 '''ISL'''은 이후 2001년까지 올림픽과 월드컵의 방송중계권과 각종 스포츠 이권을 독점하면서 어마어마한 수익을 남겼고, 또한 타국 기업인 아디다스도 이러한 올림픽을 통해 전세계 스포츠계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물론 2001년 FIFA와 아디다스의 유착와 부정부패가 폭로되면서 ISL은 결국 파산한다. 하지만 그 이후 타브랜드의 반등에도 국제스포츠계에서 아디다스의 영향력은 여전히 굳건한 상황이다. 당장 IOC의 토마스 바흐 위원장도 아디다스 출신이다.
참고로 대만은 전망과는 다르게 오히려 "한국이 올림픽을 개최하면 안된다"고 입장을 밝히면서 노골적으로 일본 나고야를 공개적으로 지지했고, 실제로도 서울에 반대표를 던졌다. 그럼에도 대한민국 서울이 24회 올림픽 개최지로 확정되자 이후 일부러 쓰레기가 많이 쌓여있는 서울의 종로 등의 뒷골목과 서울의 달동네들을 대만 방송사가 취재하며, 이런 나라에서 올림픽을 개최한다며 비아냥대기도 했다. 그리고 더러운 거리의 도시라는 식으로 한국을 비하하거나 조롱하는 방송을 올림픽 특집으로 꾸며서 당시 대만에 거주하던 한국인들에게 항의를 받았다.
그리고 여담으로 당시 대만은 한국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경제발전에 성공하여 1970년대에 컬러 TV가 보급되었고 1980년대 들어서면 자가용 자동차가 대중화될 정도로 1인당 국민소득 수준에 있어서 한국을 훨씬 앞서고 있었던 상황인데다가 전통적으로 과거부터 한국은 조공국으로 여기던 중화사상까지 겹치며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한국을 깔보는 경향이 만연해있었는데, 그렇게 얕잡아보던 나라가 올림픽을 유치해버린데다가. 중국의 부상 이후 대만의 국제적 고립이 불붙은 상황 속에서 배가 아팠을 것이다. 그리고 결국 1992년 들어 한국이 중화민국과 국교를 단절하고 중화인민공화국과 국교를 수립했으니 이러한 고립상태는 더더욱 심화되었다. 물론 한국이 중화민국과 단교한 게 결코 이것 때문만은 결코 아니었지만.
[1] 이때 대회 개최를 위해서 국제규격의 사격장을 서울 태릉에 서둘러 짓는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문화재보호 구역에 대회경기장을 만드는 말도 안되는 짓거리지만, 당시 분위기엔 그냥 서울에서 한적하고 땅값 싼 동네였을 뿐. 결국 태릉국제사격장은 2000년대 들어서 문화재청의 요구로 철거된다. [2] 더불어 수도이전방안(백지계획)도 표류하다가, 전두환 정권이 폐기해버린다.[3] 이때 박정희 정권의 버팀목이었던 김종필, 이후락, 오원철 등이 모두 추방된다.[4] 정주영이 제14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면서 출간했던, 자전적 홍보 책자에서 회고한 말이다.[5] 예비군 탄생의 기점이 된 김신조 사건이라 불린 1968년 1.21 사태, 1976년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등등.[6] 이 때문에 중국이 과거 천안문 사태로 인해 2000년 올림픽 유치를 신청했다가 실패한 전적이 있었다. 물론 이후에 2008 베이징 올림픽 개최에는 성공하지만 말이다.[7] 서울 올림픽 30주년 다큐 88/18에서 당시 5공 정권의 실세였던 허화평은 '''언제 대한민국이 준비해놓고 뭐 제대로 한 일이 있나요? 우리는 해놓고 봤다고. 우리는 그것 밖에 길이 없는 나라야'''(...)라고 회고했다.[8] 물론 노태우도 저렇게 나올 만한 게, 그동안 올림픽을 개최 성공과 의의에 자신이 철저하게 관여했다고 생각했기 때문. 허나 올림픽 개최의 공로에는 그간 박종규나 정주영 그리고 김운용의 공이 오히려 지배적으로 더욱 컸다는 점이다.[9] 그러나 북한의 경우는 그저 노이즈 마케팅에 불과했고, 이라크는 당시 중동 관련 이슈로 인한 페널티로 인해 타국의 압박을 받았기에 결국 이후 두 국가는 아시안 게임 유치를 중도에 포기한다.[10] 이 당시의 이라크의 바그다드는 걸프 전쟁, 이라크 전쟁을 치르기 이전으로 아직 지금과 같은 폭탄 터지는 소리만 요란한 세기말의 폐허가 아닌 정상적인 도시였다.[11] 대한민국은 1970년 아시안게임을 유치했다가 경제적인 이유로 포기, 태국에게 개최권을 넘겨준 전례가 있다. 그 때문에 아시안게임 유치전에 참여했다가 또 상황이 어렵다고 중간에 빠지기는 힘들었기에 일본에 올림픽 ↔ 아시안게임 맞교환 제안을 했던 것이었다.[12] 심지어 당시 일본의 나고야가 하계 올림픽 유치를 위해 맹렬히 준비하던 시점이었는데, 올림픽 개최를 주도하던 나고야 시장인 모토야마 마사오가 일본사회당과 일본 공산당의 지지를 받던 혁신계 인사라서 자민당이자 골수 우익인 세지마가 서울을 밀었다는 해석도 있다.[13] 특히나 당시 일본 내부에선 나고야의 올림픽 유치 문제로 사회당이 여세를 몰아 일본 자민당의 55년 체제를 무너뜨릴 것을 우려했다. 그러나 자민당은 이후 정권을 지켜내는데 성공하였고 올림픽 유치 실패 이후에도 모토야마 마사오는 시정은 괜찮게 처리하던 인물이었기 때문에 1981년 시장선거에서 혁신계뿐만 아니라 자민당의 지지도 얻으며 압도적으로 재선에 성공했고, 이후에는 자신의 후임자도 12년간 시장직에 계속해서 재임했다. 반면 당시 아이치현 지사였던 나시야 요시아키도 나고야 올림픽 계획구상을 이끌던 인물이었는데, 나고야 올림픽 개최실패 이후로 모든 책임을 지고 1983년 지사 선거에서 불출마했고, 서울 올림픽이 끝난 뒤에 돌연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14] 이게 사실이라면 국가적 역량을 총동원해서 올림픽을 준비한 한국과 달리 일본은 그저 도시 차원에서 올림픽을 유치하려 했다는 설을 방증할 수 있다. 물론 이 사실을 전혀 모르던 당시 정주영은 "일본은 내각이 일치단결하여 나고야에 유치하고자 한다고 간주하고 있었다."[15] '한국에게 설마 지겠어? 와 같은 생각의' 그저 느긋한 자세로 자국 유치에 별 관심도 적극성도 보여주지 않은 방심함과 오만함을 풍기던 일본 정부의 무능함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또한 이후 일본은 타 세계대회였던 월드컵의 개최지 선정 과정에서도 과거 서울 올림픽 유치 과정 때와 비슷한 행보를 보이게 되는데 2002 월드컵 유치전에서도 크게 자만한 나머지, 그것도 한국보다도 무려 5년이나 일찍 조직위원회를 구성했음에도 불구하고(일본: 1989년, 한국: 1994년) 공동개최를 허용하는 실수를 반복한다. 더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의 유치 과정 문단 참조바람.[16] 일본의 입장에서 당시 한국의 정세로 봤을때 분단국가라는 것과 북한이라는 존재로 인해 개최권을 얻기 힘들다고 봤다. 실제로 북한은 서울 올림픽 개최 확정 후, 여러가지 사건들을 일으켜 불안감을 조성해 어떻게든 서울 올림픽 개최 취소를 위해 별의 별 짓을 다했다. 나중엔 이것마저 안 통하자 공동개최까지 운운하며 생떼를 부리는 지경에 까지 이른다. 내부적으로도 6월 항쟁과 같은 독재정권 종식에 대한 민주화 운동이 활발한 때였으니 '이렇게 불안한 나라에서 과연 올림픽이 제대로 치뤄지겠는가'란 논리로 밀고 나왔다. 심지어 미국의 어느 신문에는 만평에 "지금 성화 점화를 기다리는 순간입니다'란 자막과 함께 성화대에 화염병이 날아드는 만화가 그려진게 나올 정도였다. 2002년 월드컵의 경우는 구상이 당시 회장이었던 조앙 아벨란제에게서 나온데다 세계 최강 축구 국가 브라질이 지지를 보냈다는것이 일본이 믿고있던 구석이었다. 물론 아벨란제의 장기 집권에 염증을 느끼던 유럽세를 간과한것과 '월드컵 본선에 한번도 진출한 적도 없는 나라가 어떻게 대회를 개최한단 말인가'란 논리에 반론을 세우지 못했다는 문제는 있었지만.[17] 북한의 서울올림픽 개최 비방[18] 2019년에 공개된 외교문서에 따르면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이 88올림픽의 남북 분산개최를 북한이 수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견하면서도 사회주의 국가의 대회 참가 명분을 제공할 목적으로 이를 북한에 제안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특히나 당시 IOC의 사마란치 위원장은 1984년 9월에 방한하여 한국의 고위인사와 자리를 통해 만나게 되는데 이때 남한이 일부 종목의 남북 분산 개최안에 대해 지속적으로 부정적인 견해를 보이자 "북한은 결코 이 제안을 수락하지 못할 것"이라며 대답하면서 "한국은 '안 된다'고만 이야기하지말고 'IOC가 공식적으로 제안해올 때 이를 적극적으로 검토해 볼 용의가 있다.' 정도로만 답하면 된다"고 조언했다고 한다. 또한 그는 "사회주의 국가들이 LA 올림픽 보이콧 이후 서울 대회에 참여하기를 원하고, 올 준비를 하고 있는데 단 한 가지 장애물이 북한"이라며 "그래서 한 가지 핑계를 찾고 있는데 만약 북한이 2∼3개 종목 개최를 수락하지 않으면 서울에 갈 구실이 되는 것"이라고 덧붙여서 설명했다.참고#[19] 이 당시만 하더라도 북한은 남한에 대해 "헐벗고 굶주리며 거리에서 사람들이 미제가 먹다 버린 것까지 주워 먹으려고 쓰레기통을 뒤지는 곳"이라는 거짓선전을 날이면 날마다 해대던 실정이었다. 게다가 북한도 올림픽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는 상황인지라 "헐벗고 굶주려 쓰레기통을 뒤진다는 나라에서 올림픽?"이라 의문을 들 수 있어 이런 발악을 할 수밖에 없었다.[20] 이 사건을 계기로 서울 올림픽 때 공항 경찰이 비상사태에 들어가기에 이른다.[21] 노태우는 이후 1988년 대통령 선거 당시 이걸 자랑하듯이 홍보 만화에서 큼직하게 다뤘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외교적으로 충분히 논란이 될 만한 발언을 남기기도 했다. 이를테면 노태우가 비장하게 가서 연설하길 "1988 올림픽이 서울에서 못 열리면 잠실종합경기장을 IOC 위원들 무덤으로 쓰겠다"고 연설했다.[22] 후술될 독재 정권 종식 문단 참고바람.[23]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몽골 등[24] 동독뿐만 아니라 여러 공산권 국가의 경우 스포츠 대회에서의 좋은 성적을 토대로 국력도 과시하고 국민들을 단합시키는 효과를 노렸는데, 한편으로는 세계 스포츠 대회에 출전하게 되면 사실상 해외를 자유롭게 다닐 수 있다는 점에서 관계자 및 선수들 또한 그 무대가 선망의 대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1984 LA 올림픽에 나가지 못한데 대한 스포츠계의 실망은 엄청났고, 동독 또한 예외는 아니었던 것.[25] 이때 김운용 위원의 나이는 50대였다. 물론 기존에 5개 국어를 유창하게 했을 정도로 언어적 감각이 탁월한 인물이었지만, 새로운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라는 사실. 또한 러시아어는 세계에서 어려운 언어 중 하나로 꼽힌다는 것도 감안해야한다.[26] 지금이야 어느 정도 용인이 된다 쳐도,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와 정권의 반공 성향을 감안하면 대한민국에서 적성 집단(대한민국 헌법상 북한을 '국가'로 보지 않으므로 '적'''국''''이라고 보지도 않았으며 이는 지금도 유효하다.)으로 인식되는 북한의 인공기를 게양하고 또한 북한 국가를 연주하는 것은 그야말로 경천동지할 일. 물론 북한은 엄연한 IOC 회원국이었기 때문에 만약 참가했다면 인공기와 북한 국가 연주는 무조건적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스포츠는 정치색을 배제해야 한다는 것은 신성한 의무와 다름이 없기 때문이며, 실제로 1966 FIFA 월드컵 잉글랜드 대회 당시 '''북한 축구 국가대표팀'''이 본선에 진출했을 때도 북한을 적성 국가로 간주해 수교 자체를 하지 않은 영국의 경기장에서 북한 국가가 연주되고 국기가 게양되었다. 물론 영국 정부가 당시 한국 정부에 양해를 구하긴 했다.[27] 그리고 대한민국에서 인공기가 게양되고 북한 국가가 연주된 것은 14년 뒤에 열린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때에야 이루어졌다. 그리고 12년뒤 시드니 올림픽에서는 '한반도 기'를 이용하여 동시에 입장하였고 30년 뒤인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에 북한이 참가했다.[28] 당시 공산권의 중심인 소련은 1985년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집권하면서 개혁, 개방 노선을 걷고 있는 상황이었다. 비록 아프가니스탄 전쟁 등 미국과 소련 사이의 물밑 대결은 치열했지만, 공개적으로 1987년 중거리 미사일 감축에 대한 협정을 체결하는 둥 유례없이 분위기가 훈훈했다. 이런 데탕트 분위기에서 이념논쟁을 이유로 서울 올림픽을 보이콧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북한을 공산권 국가들이 곱게 봤을 리가 없다. 소련이 1988년에 들어서야 참가 선언을 선언헀던 것도 나름 동맹국인 북한을 배려해서 시간을 끈 것이었다. 게다가 스포츠를 통한 국력 과시에 집착하던 소련과 동구권 입장에선 LA에 이어서 2회 연속으로 불참한다는 것은 국내외적으로 부담스러웠던 것도 사실이다. 즉 로스앤젤레스와 서울의 개최 순서가 뒤바뀌었다면 반쪽 대회는 로스앤젤레스가 아닌 서울 대회였을 수도 있었다.[29] 한 국가의 거점 도시가 아닌 그냥 잘나가는 도시 수준이었다.[30] 당시 중공의 부상으로 수교국을 대거 상실한 대만에게 가장 존재감이 큰 국가는 대한민국이었다. 당시 서울에는 미국, 영국, 서독, 일본 등 주요 열강의 대사급 외교관이 상주하고 있었다. 따라서 사실상 대만이 국제무대에서 제대로 교류할 수 있는 유일한 창구가 대한민국이었던 것. 오죽하면 대만 외교관이 외교부장으로 영전하는 마지막 관문이 주한대사였을 정도였다.[31] 참고로 이 총회는 올림픽 의회를 겸하고 있는 총회였다. 올림픽 의회에 대한 설명은 위키백과 올림픽 의회 문서 참조.[32] 그리고 그 유명한 '''쎄울!''' 당시 사마란치 IOC 위원장의 발음. 참고로 총회는 프랑스어로 진행되었는데, 다만 상세한 득표수를 발표할 때는 프랑스어-영어순이었다.[33] 지금이야 세계적 브랜드에 속하는 FILA가 있긴 하지만, 휠라는 본래 이탈리아 회사였고 훗날에 한국에 인수되어 넘어오게 되면서부터 한국 회사로 바뀐 것이었다. 즉 이때의 휠라는 엄연하게 유럽 브랜드에 속했었다.[34] 당시에는 나이키의 사세가 미약했다.[35] 아디다스 창립자 아돌프 다슬러의 슬하 자녀[36] 이와 똑같은 이유로 2022 FIFA 월드컵 개최지 선정 때도 유럽국가들은 대부분 카타르를 지지하였다. 카타르는 2006 도하 아시안게임을 제외하면 이런 대형 이벤트를 개최한 경험도 적고, 관련 자국 기업도 많지 않기 때문에 만일 대회를 유치한다면 경기장, 교통, 통신 인프라 건설과 방송 중계 및 IT 관련 사업, 스포츠용품 사업 등을 유럽 업체가 수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한 것이다. 당시 경쟁국이었던 한국, 일본, 미국이 대회를 유치했다면 거의 대부분 자국 업체들이 사업을 도맡아 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