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제아 토마스(1961)

 




'''디트로이트 피스톤즈 No.11 '''
'''아이제이아 로드 토머스 3세
(Isiah Lord Thomas III)
'''
'''생년월일'''
1961년 4월 30일 (63세)
'''국적'''
[image] 미국
'''출신지'''
일리노이시카고
'''키'''
185cm (6' 1")
'''체중'''
82kg (180 lbs)
'''출신학교'''
인디애나 대학교
'''포지션'''
포인트 가드
'''드래프트'''
'''1981년 NBA 드래프트 1라운드 2순위
디트로이트 피스톤즈 지명'''
'''등번호'''
'''11번'''
'''역대 소속팀'''
'''디트로이트 피스톤즈 (1981~1994)'''
'''지도자 경력'''
인디애나 페이서스 (2000~2003, 감독)
뉴욕 닉스 (2006~2007, 감독)
플로리다 국제대학교 (2009~2012, 감독)
'''프런트 경력'''
토론토 랩터스 (1995~1998, 부사장)
뉴욕 닉스 (2003~2008, 단장 겸 사장)
'''수상내역'''
'''NBA 챔피언 2회(1989, 1990)'''
'''NBA 파이널 MVP (1990)'''
NBA 올스타 12회 (1982–1993)
NBA 올스타전 MVP 2회 (1984, 1986)
'''올-NBA 퍼스트 팀 3회 (1984–1986)'''
올-NBA 세컨드 팀 2회 (1983, 1987)
NBA 올-루키 퍼스트 팀 (1982)
J. Walter Kennedy Citizenship Award (1987)
NBA 올해의 어시스트왕 (1985)
NBA's 50th Anniversary All-Time Team
NCAA 챔피언 (1981)
NCAA Final Four Most Outstanding Player (1981)
Consensus first-team All-American (1981)
USA Basketball Male Athlete of the Year (1980)
McDonald's All-American (1979)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 (2000)'''
'''1990년 NBA 파이널 MVP'''
조 듀마스

'''아이제아 토마스'''

마이클 조던
'''1984년 NBA 올스타 MVP'''
줄리어스 어빙

'''아이제아 토마스'''

랄프 샘슨
'''1986년 NBA 올스타 MVP'''
랄프 샘슨

'''아이제아 토마스'''

톰 챔버스
[image]
'''1989'''
'''1990'''
'''디트로이트 피스톤즈 영구결번'''
No. 11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
[image]
'''아이제아 토마스'''
헌액 연도
2000년
1. 소개
2. 플레이스타일
3. 초기 생애 및 대학 경력
4. 선수 경력: 배드 보이스의 보스
5. 흑역사 및 논란
5.1. 래리 버드와 관련된 인종차별 논란
5.2. 1991년 동부 컨퍼런스 파이널 퇴장 사건
5.2.1. 셀틱스의 퇴장과 피스톤즈의 퇴장
5.3. 국가대표 및 드림팀 탈락
6. 행정가 및 감독 경력
6.1. 토론토 랩터스
6.2. CBA
6.3. 인디애나 페이서스
6.4. 뉴욕 닉스
7. TNT 해설가 시절
8. 이것저것


1. 소개


'''ZEKE '''
NBA 농구 선수. Zeke[1], Baby-faced Assassin[2] 등의 별명으로 유명한, 1980년대를 대표하는 포인트 가드인 동시에 전직 감독GM. NBA가 선정한 '''50인의 위대한 농구선수''' 중 한 명이며 1980년대 말을 주름잡던 디트로이트 배드 보이스의 리더. 선수시절 활약상은 가히 전설이지만, 은퇴 후 행정가로서나 감독으로서는 그리 성공했다고 보기 힘들다. 뉴욕 닉스 팬들에게는 스콧 레이든과 함께 금지어공공의 적이다.

2. 플레이스타일


팀이 배드 보이즈시절 피스톤즈고, 본인이 마피아 보스처럼 팀을 장악했기에 본인의 농구 스타일까지 터프하고 지저분한 타입으로 오해받기 쉬운 선수지만 선수 토마스는 굉장히 정석적이면서도 화려한 농구를 할 줄 아는 선수이다. 그를 싫어하는 마이클 조던조차 매직 존슨에 이어 최고의 PG로 꼽는 선수.[3]
토마스에 관해 얘기하는 것중에 의외로 운동능력을 등한시하는데 아이재아는 엄청난 운동능력을 갖고있던 선수였다. 스피드는 배드보이즈 시절에 상대였던 조던의 수비를 겪음에도 불구하고 나름 할거 다 할 정도로 빠르고 날랬으며 키가 작은 가드라도 틀어막을 수 있었던 조던도 토마스를 속도에서 완벽히 제압하지는 못했다. 그만큼 토마스가 빨랐기 때문에. 점프력도 엄청났는데, 점프볼 상황에서 상대 7푸터 짜리 센터를 이기고 점프볼을 딴 적이 있다. 아래 영상을 보면 각도빨이 있기는 하나, 제자리 점프임에도 그 신장으로 머리가 림 근처까지 올라간 것을 알 수 있다.
[image]
더불어 공격에 있어서는 포인트 가드의 기본기에 매우 충실한 선수이다. 포인트 가드는 드리블로 찬스를 만들면서도, 드리블 중에도 언제든지 팀원을 살리기 위한 다음 전술을 이어갈 수 있는 시야 확보와 패스 전개를 위해 '''공은 낮게 드리블 하고 고개는 세운채로 팀원들의 위치를 볼 수 있으며 항상 다음 플레이를 준비해야한다.''' 토마스는 이런 포인트 가드의 기본 자세가 완벽했던 선수로 뛰어난 드리블과 스킬로 다소 투박한 타입의 선수들이 많던 피스톤즈의 오펜스를 진두지휘했다.
여기에 팀 특성상 1옵션 역할을 하면서 포인트 가드로서 어려운 슛을 성공시키는 골 결정력과 에이스 기질이 탁월했던 선수로 수비지향적인 팀에 느린 페이스의 팀이다보니 1차 스탯상으로는 평득 20점대를 꾸준히 기록하지 못한 선수일지 몰라도 NBA 2회 우승에 빛나는 피스톤즈의 에이스는 누가 뭐래도 토마스인 셈. 하이라이트에서 보여주는 집요한 드리블 끝에 보여주는 풀업 점퍼나 마무리는 그만의 전매특허이다.
굳이 약점을 찾자면, 포인트 가드 1옵션으로서 현시대의 덕목인 3점 슛이나 캐치앤슛같은 장거리 슛 능력은 떨어지는 편이고 체격이 탄탄한 편은 아닌지라 골밑까지 파고들어 결정을 보는데는 약간 약한 점이 있었고 본인의 대인수비력 자체는 평균보다 좀 나은 정도였다는 것. 특히 장거리 슛의 부재로 인해 TS등의 2차 스탯은 이름값에 비해 약한 편이다. 필드골 자체는 통산 45.2%로 낮진 않지만 3점슛이 29.0%에 불구하며 자유투 역시 75.4%로 좋은편이 아니었다.[4] 또한 턴오버도 통산 평균 3.8개로 턴오버가 많은 선수였다.
만약 토마스를 현시대 선수와 비교한다면 크리스 폴과 공통분모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포인트가드로서의 기본기와 패싱능력이 완벽하고 정석적인 게임 조립에 능하면서[5][6], 필요하다면 본인의 득점으로 게임을 풀어나가기도 한다는 점에서 유사한 것. 물론 내구성은 잔부상이 많은 폴보다 월등하게 위다. 여담으로 NBA의 공식 YouTube 채널에 Top 10 올스타전 어시스트 영상이 있는데 그 10개중 4개가 아이제아 토마스의 어시스트이다. 매직의 화려한 패스에 가려서 그렇지 토마스의 패싱 실력도 최상급이었다.

3. 초기 생애 및 대학 경력


토마스는 일리노이시카고에서 태어났다. 대가족의 막내로 어린 시절은 가난했다고 한다. 굉장히 불우한 가정에서 자랐는데 형들은 마약을 하기도 하고 나쁜 생활을 하였으며 실제 한 형은 어렸을때 폭력으로 인해 죽임을 당했다. 실제로 한 대학팀의 코치가 토마스를 스카우트하기 위해서 토마스가 살던 동네로 간 적이 있었는데 거리가 더럽고 무시무시하여 깜짝 놀랐다고 한다. 아이러니 하게도 이러한 환경 가운데서도 본인들은 나쁜 길을 가고 있음에도 막내는 잘 나가게 하기위해 막내인 아이제아가 나쁜 짓을 하면 호되게 혼냈다고 한다.
대학은 인디애나 대학교로 진학했다. 당시 인디애나 대학 농구팀에는 열혈 감독인 밥 나이트가 있었다. 밥 나이트는 강력한 카리스마와 조직적인 농구로 유명했고 코트 위에서나 밖에서나 다혈질이었다. 그런 나이트도 토마스를 보자마자 한 말이 딱 이랬단다. '''"토마스, 넌 네가 하고 싶은 플레이를 해라."'''
감독의 지원 아래 토마스는 2학년 때 학교를 NCAA 챔피언 자리에 올려놓았고, 자기 자신도 MOP에 선정되었다. 그 후 바로 NBA 드래프트를 신청했다.

4. 선수 경력: 배드 보이스의 보스


1981년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2순위로 [7] 지명된다.
여담으로 그는 처음에는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에 오는 것을 탐탁치 않았다. 그래서 피스톤즈와 인터뷰에서 일부러 건성건성 대답하였다고 한다. 시카고 출신이었던 그는 시카고로 가고 싶어했으나 오히려 그런 모습을 본 맥클로스키 단장은 "니가 무슨 짓을 하던지 상관없어. 만약 우리 차례때 니가 아직 드래프트 되지 않았으면 너 뽑을꺼야" 라고 단정지었다고 한다. 결국 배드 보이스의 리더가 되어 자기가 가고 싶어했던 시카고 불스를 그리 여러번 좌절시켰던거 보면 참...
어쨋든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에 지명된 토마스는 전시즌에 21승에 그쳤던 팀을 39승까지 끌어올렸다. 하지만 토마스가 루키였던 시즌과 2년차 시즌에 팀의 전력은 아직 배드 보이스 1기 시절의 그것이 아니었다. 토마스가 드래프트 된 다음해에 훗날 악명을 떨치게 되는 빌 레임비어가 팀에 합류하면서 기본 토대는 만들었지만, 여전히 팀은 중하위권 전력이었고 플레이오프는 꿈도 꾸지 못했다. 그러다가 3년차 시즌에 NBA를 대표하는 명장이자 토마스의 은사 척 데일리가 감독으로 취임하면서 팀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토마스도 평균 21.2점 11.1 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커리어를 통틀어 첫번째 더블 더블 시즌을 보냈고 팀도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플레이오프에서는 1라운드에서 뉴욕 닉스에게 패배해 탈락했지만 5차전까지 가는 접전이었다.
이후 피스톤즈는 맥클로스키 단장의 주도 하에 차근차근 팀의 전력을 꾸려가기 시작하는데, 1985년 드래프트에서 토마스와 함께 백코트 전력의 핵을 이루게 되는 조 듀마스를 18순위로 뽑았다. 득점과 볼 핸들링이 준수한 듀마스의 합류로 팀의 득점과 볼 배급, 경기 리딩까지 막대한 짐을 혼자 짊어지고 있던 토마스의 부담을 크게 덜 수 있었고, 가드 포지션 최고의 수비수 듀마스 덕분에 인사이드의 거칠고 강력한 수비와 백코트의 일선 수비가 조화를 이루면서, 비로소 배드 보이즈의 골격이 갖춰졌다. 또한 폭발적인 슈터 '마이크로웨이브' 비니 존스, 레임비어와 함께 악명을 떨친 인사이드의 터프가이 릭 마혼 등이 핵심 전력으로 자리잡으면서 익히 알려진 배드 보이즈의 팀 컬러가 완성되었다. [8] [9] 1987-1988 시즌, 마침내 디트로이트는 동부의 강호들을 아작내고 파이널에서 LA 레이커스와 맞붙었다. 당시 레이커스는 매직 존슨, 카림 압둘 자바, 제임스 워디 등이 포진한 최고의 팀이었다. 3승 2패로 앞선 채 맞은 6차전에서 토마스는 도중에 발목이 나가버리지만 출전을 강행, 3쿼터에만 25점을 넣으며 파이널 한 쿼터 득점 최고기록을 경신하는 대활약을 보였지만[10] 결국 디트로이트는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두 경기를 연속으로 내주며 아쉽게 패배했다.[11] 이 때 토마스는 매우 큰 굴욕감을 느꼈다고 한다.
그리고 바로 다음 시즌인 1988-1989 시즌에 두 팀이 다시 맞붙었는데, 이때는 매직 존슨을 비롯한 레이커스의 주축들이 모두 부상을 달고 있었고 복수의 칼을 갈던 토마스와 배드 보이스에게 자비란 없었다. 파이널에 진출하며 토마스가 한 말이 ''''레이커스 외에 다른 팀이 올라오는 건 원하지 않는다. 우리가 원하는건 복수다''''였다. 결국 디트로이트가 4전 전승으로 레이커스를 처참히 발라버리고 우승. 이 시즌은 플레이오프에서 시카고 불스에게 2패한 거 빼면 전승이었다.그리고 의도치 않게 아래 선수의 이름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그 다음시즌인 1989-1990시즌에는 같은 동부지구 시카고 불스의 강력한 도전이 있었으나 이겨내고 파이널에서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를 맞이하여 4승 1패로 다시 우승. 2년 연속으로 우승을 차지한다. 토마스는 파이널 MVP에 올랐다.
하지만 1990-1991 시즌 이후로 토마스와 배드 보이스 1기의 번영은 끝이 났다. 시카고 불스에 의해 4전 전패로 컨퍼런스 결승전에서 무너지고 난 뒤 팀의 성적은 내리막을 걸었다. 1991-1992 시즌을 끝으로 척 데일리도 사임하면서 배드 보이스 1기는 사실상 해체되었다. 토마스는 1993-1994시즌까지 뛴 후 현역에서 은퇴한다. 참고로 이당시 조던이 이끌던 전성기 불스, 버드가 이끌던 전성기 셀틱스, 매직 존슨이 이끌던 레이커즈를 상대로 포스트시즌 승률 50%를 넘겼던 팀은 배드 보이스 1기가 유일하다.

5. 흑역사 및 논란



5.1. 래리 버드와 관련된 인종차별 논란


1987년 동부 결승에서 피스톤즈가 셀틱스에 패한 당시 무명의 백업이던 루키 데니스 로드맨의 발언으로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로드맨은 벤치에서 출격해 버드의 맨투맨 마크 임무를 맡았지만, 나올때마다 버드에게 그야말로 영혼까지 탈탈 털릴 정도로 처절하게 농락당했는데, [12] 경기후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버드는 매우 과대 평가되었다. 그가 백인이기 때문에 3연속 MVP를 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누군가가 그 발언을 토마스에게 언급했고 그의 의견을 물었는데 여기서 보여준 토마스의 발언이 바로 기름을 부은 격이 되었던 것.
토마스는 기자들과의 자리에서 이에 동의한다면서 "버드는 매우 뛰어난 농구선수지만, 만약 그가 흑인이었으면 리그 최고의 선수가 아니라 그냥 잘하는 선수 정도로 비춰졌을 것"이라고 한 바 있다. 사실 로드맨이 한 말이었으면, 듣보잡 루키가 한 철없는 소리 정도로 넘어갈 수 있었는데[13] 슈퍼스타 토마스가 이에 한 술 더 뜨면서 "인종차별" 논란이 일어난 것이다.
실제로 이후 언론의 포격 대상이 된 건 로드맨이 아니라 토마스였다. 토마스는 이후 이에 "농담이었다"며 수습을 시도했으며, 로드맨 역시 "패배 직후 감정적이 되어서 한 말"이라며 버드에게 사과했다. 워낙 심하게 논란이 된 사건이라 '''파이널이 진행되는 도중''' 토마스가 LA로 날아와 버드와 공동 기자회견을 할 정도였다. http://www.nytimes.com/1987/06/05/sports/thomas-explains-comments-on-bird.html 이때 토마스는 자신의 의도가 "흑인 선수들의 노력에 대해서는 '타고난 재능'이라고만 표현하면서 백인 선수들의 노력에만 주목하는 편견을 꼬집기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했고 "내가 농담을 하는 것이라고 이해 못한 사람에게 농담을 한게 실수"라고 했지만, 저 멘트는 누가 봐도 저런 식으로 해석될 수 없었기에 더욱 욕을 먹었다.
정작 버드는 사건 직후, "신경쓰지 않는다"면서 그렇게 극적으로 패한 경기 이후엔 그럴 수도 있다고 쿨하게 넘겼다. 버드는 저 기자회견에서 오히려 토마스를 쉴드쳐주면서 "중요한 건 내가 그 발언을 신경쓰지 않는데, 그렇다면 누구도 신경쓸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라면서 "아이재아가 저한테 농담이었다고 하면, 그건 그대로 너배려두면 그만이에요. NBA에서 뛰는 건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런 경기 다음에, 라커룸에서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상황은, 우리(선수들)과 대화하기 최적의 순간은 아닐 거에요. 그것(발언)에 대해 질문도 많이 받아봤고 저희 가족에게 얘기도 했지만, 저희 가족은 여전히 아이재아 토마스를 사랑합니다"라고 말했다.
토마스를 인종차별자로 보기는 그런게 당장 친한 동료인 빌 레임비어 역시 백인이었고 그 당시 코치였던 척 데일리, 단장 잭 맥클로스키 등은 모두 백인이었다. 그 당시 말투도 인종차별 말투보다는 그저 기분도 상했고 (다 이긴 게임을 버드의 스틸로 졌다.) 로드맨도 지원사격하는 마음으로 한 것에 가깝다 볼 수 있다. 여담으로 이 사건으로 인해 피스톤즈는 팀워크가 더 강해졌다고 한다(...).
로드맨은 이 사건으로 "아이재아가 무슨일이 생겨도 날 도와줄 것이라는 확신이 생겼다"고 표현했다. 사실 로드맨의 멘트는 정말 바보같은 멘트였다. 디트로이트의 기자는 이를 두고 "섬세하지 못한(unsophisticated) 로드맨이 처음으로 백인에게 압도당하고 나서 한 멘트"라고 표현했는데, 당시 루키이던 로드맨은 세련되게 말을 표현하는 재주가 없었다. (로드맨은 이후에도 계속 말재주는 없었다) 무엇보다 실력으로 압도하고 나서 "저 녀석 백인이라서 주목받을 뿐이다"라고 하면 일침을 가하는게 되지만, 당시 버드는 최종전에서 37점 9리바운드 9어시스트로 양팀 통틀어 최고의 활약을 했으며, 시리즈 통틀어 27점 10.4리바운드 7.6어시스트 야투율 48.6%로 마찬가지로 맹활약을 했다. 경기당 16분 뛴 로드맨은 말할 것도 없고 아이재아 토마스도 23.1점 3.7리바운드 9.1어시스트 야투율 42.3%로 거의 모든 분야에서 버드에게 밀렸다. 게다가 5차전에서 시리즈 최고의 플레이를 한 버드와 최악의 턴오버를 한 토마스였는데, 실력으로 압도당하고 나서 저런 소리를 하니 "네깟게 뭔데 그러냐"면서 언론의 포화를 맞은 것. 보스턴도 아닌 시카고 언론인 시카고 선타임즈의 헤드라인은 "인정해라! 버드는 놀라운 선수야(Admit it! Bird is an incredible player)"였으니, 전국적으로 등을 돌린 것.
뒤집어 말하면 저 정도로 멍청한 멘트조차 쉴드를 쳐줄 정도의 리더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줄 것이란 신뢰를 준 것이다.

5.2. 1991년 동부 컨퍼런스 파이널 퇴장 사건


토마스의 승부욕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건이자 그의 인생의 가장 큰 흑역사로 꼽힐 정도로 비매너 행위로 꼽히는 사건.
http://www.youtube.com/watch?v=h_z_68NdbqM (7분 44초부터)
1991 동부 컨퍼런스 파이널 4차전에서 승부가 기울자 데일리 감독은 주전 멤버들을 모두 뺐고 이들은 홈 관중들로부터 기립박수를 받으며 코치진과 포옹을 하는 등 훈훈한 분위기였다. 그런데 토마스와 레임비어를 필두로 한 주전 멤버들은 모여서 무슨 결정을 내렸고 이 결정이 바로 코트를 퇴장해버리는것. 결국 게임 종료 7.9초를 남겨두고 토마스와 레임비어를 필두로 한 주전 멤버 대부분은 퇴장해버렸다. 이때 심지어 불스 벤치 앞을 지나갔는데, 위의 영상을 보면 조던을 포함한 불스 주전 멤버들의 표정이 썩어들어가는 걸 감상할 수 있다.
사실 퇴장 자체는 그렇게까지 큰 문제는 아니었지만 이들이 경기 직후 관례로 되어있는 상대팀과의 악수[14]를 거부한것 때문에 비난을 받았다.[15] 아이러니한 점은 사실 2년전 래리 버드의 셀틱스도 똑같이 퇴장을 했다는 점이다. 이때 제대로 악수를 한 사람은 맥케일정도... 단 버드의 셀틱스와 달랐던점은 대부분의 셀틱스 멤버들은 조용히 나갔던 반면에 토마스와 피스톤즈는 하필 코드를 가로질러(...) 나가는 바람에 셀틱스와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욕을 먹은 것. 셀틱스와 피스톤즈는 실제 형태가 굉장히 다르다 자세한 상황은 후술.
왜 토마스가 퇴장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가설이 나온다. 단순히 게임을 져서 그렇다기에는 조금 복잡한 면이 있는데 토마스는 나중에 NBA Open Court란 프로에 출연해 이 때 자신들의 행위에 대해 직접 "조던과 필 잭슨 등 불스 전원이 우리에게 챔피언에 합당한 대우를 하지 않았다. 그들은 기자회견에서 레임비어가 깡패(thug)다, 우리가 (피스톤즈)가 농구 전체에 나쁜 영향을 준다느니 무례하게 굴었다"고 자신들의 행위에 대한 이유를 밝히면서, 이런 태도에 화가 나 당시 벤치에 앉아있던 주전선수들이 "그냥 나가자"고 결정을 내렸다고 한 바 있다.http://www.youtube.com/watch?v=lFK82GvfYyc
나중에 촬영된 다큐멘터리 "배드 보이즈" 에서도 토마스는 "나는 그 어떤 팀이 자신들이 우승후보에서 끌어내리려는 팀을 그런식으로 말한 적을 본적이 없다" 라고 말하며 그 이유를 밝혔다. 그 발언은 바로 불스가 3-0으로 동부 지구 우승전에서 앞서며 1승을 남겨놓은 상태에서 한 발언으로 조던과 불스는 "피스톤즈는 지저분한 농구로 리그를 망치고 있다" / "피스톤즈가 사라진다면 디트로이트를 제외한 모든 리그는 기뻐할 것이다" 라고 공개적으로 피스톤즈를 디스한 것을 가리킨다. 바로 전 해에 피스톤즈가 불스를 7차전에서 이겼을때 아이제아 토마스와 마이클 조던은 포옹을 주고 받았던 점을 생각해보면 아이제아의 반응은 동부 결승전에서 진 분노보다는 압도적으로 앞서있는 상태의 불스 측이 상대적으로 약자에 있었던 자신들을 매장시키려 했다는데 더욱 더 분노했던 것. 이 사건의 주동자가 토마스였을 것이라고 기정사실화 했지만 정작 본인들은 정작 레임비어와 토마스 등 당사자들은 그것을 부인하며 주동자가 누구인지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평소 토마스의 성향을 보면 충분히 토마스였다고 추측해볼 수는 있다.
이 점과 관련하여 토마스는 나중에는 후회하는 입장을 보이며 "Should we have been bigger? Yes" 라고 이야기로 하였다. (더 대인배 적인 모습을 보였어야 했나? 아마도... 정도로 해석) 그러면서 "다시 동일한 상황이 온다면 악수를 하겠다"면서 비록 불스가 자신들에게 무례하게 굴었더라도 똑같이 대해주면 안되었으며 상대의 행동에 관계 없이 우리가 올바른 행동을 했어야 했다(take the high road)고 한 바 있다.
사실 토마스는 이날 방송에서 옛 팀에 대해 좀 지나칠 정도로 쉴드를 쳤는데 피스톤즈가 폭력에 가까운 수비와 부상을 유발하는 비매너 플레이로 악명을 떨친건 엄연한 사실임에도 토마스는 "모든 팀이 거칠게 플레이했음에도 피스톤즈의 경우 이미지가 그렇게 박혀서 욕을 더 먹었다"는 요지로 말하기도 했다.http://www.youtube.com/watch?v=ozCXf2zH-94
까놓고 말해 저 정도 디스를 갖고 "무례하다" 운운하는 건 어이없는 발언이다. 배드보이즈를 욕한 건 조던뿐만 아니라 '''당시 모든 NBA의 선수가 그랬다'''. 호레이스 그랜트는 레임비어의 은퇴소식에 아무나 초대할 테니 집에서 파티를 열겠다고 했으며, 찰스 바클리는 아예 빌 레임비어에게 "Dear Laimbeer. Fuck you(친애하는 빌에게, 씨발 좆까)"란 공개편지를 보낸 적도 있었고, 보스턴의 레전드 센터 로버트 패리쉬 역시 레임비어와 맨날 싸우는 게 일이었다. 래리 버드 역시 레임비어를 포함해 피스톤즈 선수들과 허구헌날 맞붙었으며 , 심지어 배드보이즈 출신인 릭 마혼조차 필라델피아로 팀을 옮긴 '''첫 시즌''', 친정팀을 상대로 한 '''첫 경기'''에서 레임비어(...)가 공을 마혼의 얼굴에 들이미는 등 시비가 붙었다. 이 경기에서 배드 보이즈는 불과 몇달전까지 한솥밥을 먹던 마혼을 마치 죽일듯 시비 걸었는데, 심지어 애써 멀뚱히 반응 안하는 마혼에게 토마스가 주먹을 휘두른 적도 있다. 지금에야 추억 보정이 들어가니 "사나이답다"고 하는거지 배드보이즈는 터프한 팀이 아니었다. '''진짜 나쁜 놈들이었다.''' 게다가 팬덤또한 특유의 팬문화가 있는 닉스와는 다르게 미시건, 디트로이트, 악명높은 플린트를 연고를 둔 만큼 팬들 자체가 공장 노동자등 3D업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원정팀들은 험악하게 노려보며 쌍욕을 하는 디트로이트 다섯명과 그것을 독려하며 미친듯이 응원하는 팬들을 동시에 감내하고 버텨내야 했다.
조던 얘기가 나오니 그가 어떤 피스톤즈에게 어떤 짓을 당했는지 살펴보자. 30초 부근에 피스톤즈가 트리플팀을 하는 과정에서 마크 어과이어가 팔꿈치로 슬쩍 때리고 뒤에서 로드맨은 아예 조던을 내동댕이치면서 조던이 엉덩이뼈로 떨어져 크게 고통스러워했다. 놀랍게도 당시에 이 플레이는 '''파울이 안 불렸다.''' 80년대 당시엔 현재와 비교도 못하게 터프했기 때문에 이런 플레이를 해도 그냥 파울이 불리는 수준이었다. 물론 이 때문에 토마스는 "다들 피지컬했는데 우리만 욕한다"고 물타기를 시도하지만, 배드보이즈는 피지컬해서 욕을 먹는게 아니다. '''더티해서 욕을 먹는 것'''이다. 버드는 그가 레임비어를 싫어하는 이유에 대해 설명하면서 그가 상대방을 다치게 하려고(hurt) 설명했다. 여기서 그는 레임비어보다 훨씬 피지컬했던 릭 마혼은 욕하지 않았는데, "마혼이 당신을 때릴 거라는 건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실제로 부상을 입히려고(maim)하진 않았죠"라고 설명했다. 마혼, 바클리, 찰스 오클리는 터프하고 거칠기로는 레임비어, 데니스 로드먼, 토마스 같은 선수들보다 훨씬 더 했던 선수들이나 이들은 배드보이즈처럼 욕을 먹지 않았다. 슛하는 선수 밑에 발을 집어넣어 부상을 유도하고 점프하면 내동댕이쳐서 다치게 하는 더티플레이를 일상적으로 하는 이들은 배드보이즈 뿐이기 때문이었다.[16]
현재 이런 식으로 불필요하게 거칠거나 부상을 입히는 더러운 플레이는 플래그런트 파울l을 받으며 플래그런트1 두개를 받으면 퇴장, 더 심한 행위는 플래그런트2로 즉시 퇴장이다. 문제는 플래그런트 파울이 도입된게 1990-91시즌이었다는 것이다. 그때까지는? '''그냥 파울'''이었다. 실제로 조던룰은 기본적으로 조던이 돌파하면 페인트 존에서 둘러싸는건데 그렇게 둘러싸면서 툭 치는 건 양반이고 아예 목을 잡아 거꾸러뜨리거나 밀어 내동댕이치거나, 주먹으로 때리는게 보통이었다. 유명한 한 사진에서는 피스톤즈 세명이 조던을 둘러싼 가운데 아이제아 토마스가 조던의 고간을 주먹으로 가격하는 것도 있다. '''그렇게 해봤자 그냥 파울이니까.''' 2011년 플레이오프에서 앤드류 바이넘이 공중에서 JJ 바레아를 잡아채거나 자자 파출리아가 카와이 레너드를 아웃시키던 더러운 짓들을 일상적으로 하던게 바로 피스톤즈다. 이들이 2년 연속 우승을 차지하자 NBA가 다음 시즌 플래그런트 파울 규정을 도입하고, 도입 직후 59승에서 50승으로 승수가 떨어지고 불스에게 스윕당하며 탈락한게 우연일까?[17][18] 실제로 배드보이즈 선수들이 사라지자 리그의 선수들은 기뻐했고, 이들은 지저분한 플레이로 선수들에게 해를 끼쳤다. 당시 배드보이즈는 리그 전체에서 욕을 먹고 있었는데, 불스가 그런 식으로 얘기했다고 악수조차 안 하고 경기도 안 끝났는데 획 나가버리는 건 정말 치졸한 짓거리이다.
게다가 "챔피언에게 그런 얘기를 한다"며 분개하고 있는 토마스 본인도 상술했듯이 래리 버드에게 인종 차별성 멘트를 했다. 조던과 불스의 멘트는 사실인 피스톤즈의 더티플레이어를 비난하는 수준이지만, 토마스의 발언은 미국 내에서 민감한 '''인종요소'''를 건드린 점에서 훨씬 문제가 되는 발언이며, 디펜딩 챔피언의 실력 자체를 평가절하했다는 점에서 더 치졸한 발언이다. 본인은 불과 4년 전에 이런 속좁은 발언을 해놓고 이제와서 불스가 저 정도 말을 했다고 선수단 거의 전원을 이끌고 경기 끝나기도 전에 악수도 안하고 나가는 비매너짓을 한다? 이는 변명할 길이 없는 토마스의 병크이다. 실제로 이 행위 이후 토마스와 피스톤즈는 엄청나게 욕을 먹었고, 2012년 드림팀 다큐멘터리에서도 나오지만 토마스의 드림팀 탈락에는 해당 사건 이후 여론이 매우 안 좋아진 점이 결정적이었다는 로드 손의 발언이 나온다. (드림팀 선발은 91년 여름에 이뤄졌다)
2020년에 방영된 다큐멘터리 마이클 조던 - 더 라스트 댄스에도 해당 사건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는데, 토마스의 자기 변호에 대해 마이클 조던은 굉장히 불쾌한 표정으로 '나는 2년 연속으로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그들에게 졌지만 그들 모두와 악수했었고 그게 내가 아는 스포츠맨십이다.'라며 토마스의 발언을 일축했다. 해당 다큐멘터리 다른 회차에서 조던에게 2년 연속으로 가로막혀 준우승에 머무른 칼 말론이 불스 버스에 올라타면서까지 축하해주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시청자들 입장에서는 많이 비교된다는 반응이 대부분.

5.2.1. 셀틱스의 퇴장과 피스톤즈의 퇴장


셀틱스의 퇴장은 88년, 피스톤즈의 퇴장은 91년이다보니 워낙 옛날 일이기도 하고, 결정적으로 토마스가 자신들의 퇴장이 언급될 때마다 "셀틱스도 똑같이 했는데 우리는 신경 안 썼다"라고 한 것 때문에 "둘 다 똑같은 비매너지만 이미지 때문에 피스톤즈만 욕 먹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이 둘은 엄연히 다른 케이스이며, 실제로 셀틱스가 퇴장할 당시에는 해설진도, '''디트로이트''' 관중들도, 선수들도 아무도 문제삼지 않았다.
왜냐면 두 케이스는 "경기 종료 전에 패자들이 떠났다"는 것을 제외하면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일단 영상으로 확인하자.
셀틱스의 퇴장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atIYb45ZzIk
피스톤즈의 퇴장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4K9jm1pFjSE
셀틱스의 경우, 종료 직전까지 경기가 정상적으로 흘러갔다. 그러다 보스턴이 6초를 남겨두고 득점을 했고, 인바운드 패스를 받은 에이드리안 댄틀리를 보스턴 선수가 수비하다가 파울을 해서 3초 전에 시간이 멈췄다.
문제는 당시 관중들이 경기가 끝났다고 착각했는지 일제히 코트 위로 몰려들었다는 것. 당시만 해도 홈에서 중요한 승리가 나오면 관중들이 일제히 플로어로 몰려들어 같이 축하하는 것이 어느 정도 허용되었다. 관중들과 더불어 카메라까지 코트 위로 몰려들어 도저히 경기를 진행할 수가 없었고, 경기 진행요원들이 관중들에게 아직 안 끝나고 안내를 하는 동안 1분 넘게 경기가 지연된 후에야 댄틀리가 마지막 자유투 2개를 던지며 마지막 플레이가 이뤄졌다.

셀틱스의 퇴장은 이 때 이뤄진 것이었다. 당시 셀틱스 벤치는 퇴장로와 정반대 방향에 있었고, 케빈 맥헤일의 증언에 따르면 팬들이 마구 몰려들자 누군가(영상에서 보이는 파란 제복을 입은 안전요원인 것으로 보인다) 선수들에게 "위험할 수 있으니 퇴장하라"고 안내를 했고, 이에 따라 퇴장한 것이다. 실제로 디트로이트 관중들은 당시에도 거칠기로 유명했고, 오랜 숙원대로 보스턴을 상대로 승리를 거둬 극도로 흥분한 상태라, 수백명의 흥분한 팬들이 몰려있는 코트를 가로지르는 건 위험하다는 판단이었던 것.[19]
실제로 당시 '''해설진도''' 상황을 모른채 해설할 때 "셀틱스 선수들이 퇴장하는군요. '''안전문제 같습니다.(possibly for safety reasons)'''. 누가 다칠 수 있으니까요(Someone could get hurt)"라고 코멘트를 했다. 당연히 셀틱스 편을 들 이유가 없는 전국방송 해설진도 그렇게 멘트를 했다는 건 누가봐도 그렇게 보일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맥헤일은 퇴장 도중 토마스와 친근하게 악수를 하는데, 둘은 오랜 친구 사이였으며 이때 맥헤일은 파이널에서 잘하라고 덕담을 해줬다. 경기 장면을 보면 셀틱스가 나가는 것에 대해 토마스 정도를 제외하면 피스톤즈에서 그 누구도 신경조차 쓰지 않고, 실제로 당시엔 이슈도 안됐다.
그리고 맥헤일만 악수를 했다는 것도 낭설이다. 위 영상의 16분 47초 지점을 보면 주전 PG 데니스 존슨이 누구보다 먼저와서 피스톤즈 선수들과 하이파이브를 하는게 명확히 보인다. (이후 중계진이 전체 화면을 잡아 또 누가 하이파이브를 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렇다면 피스톤즈의 퇴장은 어땠을까? 시계가 멈추고 경기가 지연된 상태에서 퇴장한 셀틱스와 달리 피스톤즈 vs 불스전 당시는 인플레이 상황이었다. 종료를 앞두고 공격권을 가진 불스가 17초 정도를 보내는 사이 '''시계가 돌아가고 있는데''' 피스톤즈 선수들은 코트를 밟으며 경기장을 가로질러서 갔고, 이들을 따라 코칭스태프와 팀관계자들, 카메라도 따라오기 시작해 경기가 진행이 불가능해진 걸 본 심판이 일시적으로 경기를 중지시켰다. 이후 어리둥절한 불스 선수들이 일어서있는 것을 레임비어는 고개를 꼿꼿이 들고 지나가면서, 토마스는 고개를 살짝 숙이면서 '''개무시하며''' 지나갔다. 그 와중에 팬들과 하이파이브를 하거나 GM 잭 맥클로우스키와 격하게 포옹하는 건 잊지 않았다.
영상 뒤쪽에 보면 존 샐리만이 불스 벤치 쪽으로 와서 축하를 해주고 있는데, 실제로 샐리와 조 듀마스만이 피스톤즈에서 불스 선수들과 악수를 했으며, 이 둘은 성격이 좋기로 유명하다.
당연하지만 이들은 홈팬들의 환호를 받으며 퇴장했기 때문에 셀틱스와 달리 몰려든 사람들로 인한 안전 문제도 없었다.
정리하자면 셀틱스는 1. 자신들의 잘못이 아니라 팬들의 실수로 경기가 지연된 상황에서 경기에 지장을 주지 않고, 2. 안전 문제가 불거지자 퇴장하라는 안내를 받아 안전요원의 경호를 받으며 퇴장했으며, 3. 도발이 아닌 안전문제로 어쩔 수 없이 신속하게 퇴장했다.
반대로 피스톤즈는 1. 멀쩡히 진행되는 경기 중 굳이 코트 위로 올라와서 경기를 지연되게 만들었으며 2. 홈코트고 코트 위에 사람도 없어서 안전문제도 없는 상황에서 독단적으로 알아서 나갔으며 3. 신속히 퇴장하는 것도 아니고 통로 앞에서 서로 포옹하는 등 홈팬들의 환호를 듣다가 나갔다.
실제로 셀틱스는 갑자기 팬들이 코트 위로 몰려들기 전인 '''경기 3초전까지''' 퇴장하려는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상황이 정신없이 돌아가니까 어쩔 수 없이 퇴장한 것이다. 반면 피스톤즈는 룰을 어기고 경기 진행을 방해하면서까지 퇴장하는 걸 보면 도발 의도가 없다고 볼 수 없으며, 실제 토마스의 인터뷰로도 불스를 괘씸히 여겨 도발하는 의도가 있다는게 명확하다.
즉, 결과적으로 종료 직전에 퇴장하는 형태가 된 것은 같지만, 셀틱스는 자신들의 책임이 아닌 문제 때문에 진행요원의 안내에 따라 퇴장한 것이고, 피스톤즈는 아무 문제도 없는데 불스를 엿먹이려는 의도만으로 퇴장한 것으로 전혀 의도가 다르다. 의도를 떠나 셀틱스는 '''관중들이''' 경기를 지연시킨 가운데 인플레이 상황이 아닐때 리그 측의 통제에 따라 움직였고, 피스톤즈는 '''본인들이''' 인플레이 상황에서 경기를 지연시켰는데 이걸 동일시하는 건 물타기일 뿐이다.

5.3. 국가대표 및 드림팀 탈락


토마스는 1980년에 올림픽 국가대표에 뽑혔었는데 하필 그때가 냉전 시대였고 올림픽 개최지가 구 소련모스크바였다. 결국 미국이 1980 모스크바 올림픽에 불참하면서 토마스는 결국 국가대표로 뛰지 못했다.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때는 토마스는 간절히 선발되길 원했지만 석연치 않은 이유로 드림팀 탈락. 1994년 세계선수권대회에 출전하는 드림팀2에 뽑히긴 했지만 결국 부상으로 뛰지 못하는 등 유독 대표팀과는 별로 인연이 없는 편이었다.
물론 가장 큰 논란이 되는 건 드림팀이라 불리는 1992년 농구 대표팀 탈락. 이 당시 토마스는 리그 최고의 수퍼스타 중 하나였으며, 기량도 여전했으며, 감독 역시 그의 보스인 척 데일리였지만 영 석연치 않은 이유로 제외되었다. 대부분의 전문가와 팬들은 마이클 조던의 강력한 반대가 그 이유라고 기정 사실화하고 있다. 조던 룰을 통해 조던을 폭행 수준으로 괴롭혔던 배드 보이즈의 리더였고 위에 언급한 퇴장사건만 봐도 조던과 토마스는 융화가 될 수 없었다. 당시 조던이 원하지 않는 선수는 드림팀에 뽑힐 수 없었다는 소리도 돌았는데 어째 그냥 루머 같지는 않다. 실제로 조던은 여러 인터뷰 등에서 아이제아 토마스와 드림팀에 관한 질문을 받았는데 다소 신경질적인 정도로 거부 반응을 보였다. 한 인터뷰에서는 "아이제아 토마스에 대한 질문은 하지마세요." 라고 이야기하고 인터뷰 하는 측에서 그렇게 하겠다고 하자 그제서야 인터뷰를 하였다. [20] [21]
위와 같은 상황때문에 리그에서의 위치나 실력, 네임 밸류와 상징성 모두에서 토마스와 감히 비교할 수 없는 피펜이 대신 선발되자, 조던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다는 것을 모두가 짐작할 수 있었다. 사실 드림 팀 멤버 중 피펜의 경력과 네임밸류보다 못한 선수는 한 명도 없었고, 앞서 언급한 것처럼 토마스는 물론 선발되지 못한 '휴먼 하이라이트 필름' 도미니크 윌킨스의 위상과도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22] 심지어 NCAA 역대 최고의 수퍼스타 크리스찬 레이트너의 선발 보다도 훨씬 논란이 많을 정도였다.
올림픽에 프로 선수 참가를 강행하긴 했지만, 구색 맞추기 용으로 드림팀에 아마추어를 1명 선발했다. 즉 전원 프로선수가 아니라는 보여주기 식이었던 것. 그렇긴해도 전미 스포츠계 최고의 미남으로도 유명했던 레이트너의 당시 전국적 인지도나 인기는 조던이 부럽지 않을 정도였기에 여론은 무척 호의적이었다. 드림팀 선발 전 레이트너는 전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얼굴 50인에 뽑힐 정도의 빼어난 외모로 연예인 뺨치는 유명인이었다. 따라서 레이트너의 전국적 인지도나 네임밸류는 피펜은 물론, 드림팀의 어떤 스타들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한국에서는 NCAA에 대한 접근성이 떨어져서인지 이전 주석에 얼굴 이야기만 줄창 나와서 마치 외모빨로 뽑힌 것 같지만, 레이트너는 대학 4년 동안 Final Four에 못간 적이 없으며, 2년 연속 우승과 한번의 준우승을 이뤄낸 듀크 대학교의 에이스였다. 현재까지도 3월의 광란이라고 불리는 NCAA 디비전1 남자 농구 토너먼트의 최고 득점 및 최다 경기수 및 최다승리 기록 보유자일 정도. NBA에서는 특별한 성적을 못냈지만 NCAA 무대에서는 역대 탑급 선수 논쟁이 나오면 꼭 언급되는 선수니 아마추어 쿼터가 있는 이상 레이트너가 뽑히는걸 이상하게 여기는건 NCAA에 대해 모르는 사람들이나 할 의문. 다만 경기장 밖에서의 문제가 없었는데도 이례적일 정도로 많은 안티팬들이 있긴 했다.
사실 조던뿐 아니라 불스 구단도 이제 막 올스타에 추천되고, 리그 최고 수준의 선수라기엔 거리가 있던 피펜이 뽑히길 바라고 있었으며, 선발 결과에 크게 환영했다. 불스와 조던은 아직 여러면에서 미숙한 피펜이 드림팀의 수퍼스타들과 함께 플레이 하면서, 그들의 노하우와 농구에 대한 시야를 배워 한단계 더 발전할 것이라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기대대로 피펜은 드림팀 합류 이후 전반적인 실력과 함께 농구를 보는 시야가 일취월장 했고, 올림픽을 마치고 리그에 복귀한 후 비로소 조던의 조력자, 불스의 2인자로 알고있는 그 피펜이 된 것이다. [23]
드림팀 선발 논란과는 별개로, 조던 룰 못지 않게 피펜 괴롭히기로 크게 당했던 피펜도, 평소 토마스라면 이를 갈 정도로 싫어했다. 조던과는 다르게 피펜은 노골적으로 "나는 토마스가 합류하는걸 원치 않는다" 라고 말했고 [24] 조던과 관련해서는 "아마 조던도 원치 않을 것이다" 라면서 반대하는 입장을 보였다. 그는 자서전에서 조던 등 몇몇이 강경하게 토마스의 드림팀 합류를 반대하고 있을 때 '''다들 이를 묵인하고 있었다고 한다.''' 라고 밝혔다. 사실 피스톤즈를 싫어한 건 조던만은 아니었다. 칼 말론은 이미 토마스에게 팔꿈치를 사용해 얼굴을 피투성이로 만들며 복수할만큼 사이가 안 좋았고,[25] 패트릭 유잉도 배드 보이즈 비디오에서 토마스와 배드 보이즈라면 치를 떠는 모습을 보여줬다. 나중에 NBA Open Court에서 농담도 주고 받으며 친해진 바클리도 그 당시에는 배드 보이즈라면 학을 뗄 정도로 싫어했으며, 실제로 싸움이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울 바클리였기에 난투극도 여러차례 마다하지 않았다.
사실상 배드 보이즈는 거의 그 당시 외톨이라고 불릴 정도로 좋아하는 팀이 없을 정도였으니 다른 멤버들도 좋아할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나마 아이제아와 사적으로 친했던 매직 존슨만 토마스를 옹호하는 인터뷰를 했지만, 몇년 후 그의 자서전에서 "어느 누구도 아이제아와 플레이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이제아가 올림픽에 참가하게 되더라도 그는 기회를 받지 못할 것."이라고 당시 토마스를 옹호한 것은 단지 립서비스였다고 고백했다.
또한 대표팀을 구성하기 시작한게 1991년 플레이오프 종료직후였는데 이 때 토마스를 필두로 한 피스톤즈 선수 상당수가 게임 종료되기 몇초전에 라커룸으로 퇴장, 여론으로부터 격렬하게 까이던 중이었다. 위에 언급된 다큐멘터리에서는 이런 여론도 토마스의 탈락에 크게 적용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26]
1992년 드림팀 탈락은 NBA의 뒷이야기를 털어놓는 토크쇼 Open Court에서 늘 아이제아 토마스를 놀리는 소재이기도 하다.[27] 스코티 피펜이 "조던을 대변할 수는 없지만, 아마 그도 아이제아의 합류를 반대했을 것"이라고 인터뷰했을 당시, 다른 패널들의 놀림에 아이제아 토마스는 "나는 마이클 조던이 아이제아 토마스가 드림팀에 합류하는 게 싫다고 하면 받아들일 수 있고, 매직 존슨이 아이제아 토마스가 드림팀에 합류하는 게 싫다고 하면 받아들일 수 있다. 근데 스코티 피펜이? Maaaaaaaaaaan, Come on!"이라고 받아친 적이 있다. [28]
수십년 뒤에 아이제아와 한솥밥을 먹었던 존 샐리는 아이제아가 드림팀에 선발되지 못한건 조던 때문이 아니라 매직 때문이라고 주장을 했다. 샐리의 주장에 따르면 원래 조던은 자신의 의견을 그렇게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사람이 아닌데다가 매직이 1차로 은퇴했을때 그가 절친이라고 믿었던 아이제아가 매직의 HIV와 관련해 그의 성 정체성을 의심했기 때문에[29] 그에 큰 상처를 받은 매직이 그를 막았다는 주장이다. 마침 위의 자서전에서도 매직이 아이제아에 대해서 좋은 발언을 하고 있지는 않기는 하다. 물론 샐리는 조던과도 한솥밥을 먹은적이 있으므로 아예 관계가 없는 매직보다는 조던을 옹호하는게 맞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걸 단순히 "조던 옹호"라고 보기엔 샐리가 조던과 함께 뛴 세월이 너무나 짧다. [30] 반면 토마스와는 데뷔 이후 6년동안 같이 뛰었다. 위 발언은 단순히 매직을 탓하는 것이 아니고 "토마스가 매직의 성 정체성을 의심했다"는 민감한 내용이 들어가 있는데, 고작 4달도 같이 안 뛴 동료를 위해 6년 같이 뛴 동료에 대해 안 좋은 얘기를 했다고 보긴 무리다. 즉, 샐리가 조던을 옹호하기 위해 이런 발언을 했다고 보긴 여러모로 무리가 있다.
또 드림팀의 구성을 보면 대학생인 레이트너와 등 부상으로 정상적으로 뛰기 힘든 버드를 제외하면 한 포지션 당 2명으로 구성된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따라서 토마스가 뽑힌다면 포인트가드 중 한명이 대신 빠지거나 다른 포지션에서 한명 빠져야 하는데 후자의 경우 팀 자체 연습에서 균형이 맞지 않게 되고 해당 포지션에서 부상 등 문제가 생겼을 시 대처가 힘들다. 따라서 빠진다면 포인트가드인데 드림팀 결성에 큰 영향을 끼치고(참가에 회의적이였던 조던을 같이 뛰어보는게 버킷리스트였다고 설득, 버드도 우리가 은퇴 전 미래 세대들을 위해 남길 유산이라고 설득) 최고 스타였던 매직은 빠질 수 없다. 남은 것은 스탁턴인데 86년부터 연속으로 어시스트 1위 92년까지 스틸 1위 두번 하고 전술적으로도 말론과 픽앤롤, 토마스보다 뛰어난 외곽 옵션인 그를 제외하는 것이 팀에 도움이 될까? 88올림픽 설욕과 NBA의 세계화 두가지를 노렸던 드림팀 입장에서는 스타 파워에서는 이미 조던, 매직, 버드가 있기에 필요 없었고 전술적으로는 스탁턴이 다 활용도가 높았기에 다른 선수들과 갈등이 없었더라도 안뽑혔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선수들과 사이까지 안좋았으니 어쩌면 뽑히지 않는게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 [31]
  • 다만 드림팀은 구성 자체가 로스터 밸런스가 아닌, 당대 탑급 선수들을 뽑는 상징적인 팀이었다. 실제로 당시 미국과 다른 세계의 격차를 생각하면 올스타급 이상이면 그냥 아무나 뽑아도 금메달은 따놓은 당상이었고, 전력을 생각하면 건강 문제가 심각해 잘 뛰지도 못하는 래리 버드를 굳이 뽑을 필요도 없었다.(실제로 버드는 이미 프로무대에서 은퇴를 선언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포지션 밸런스를 걱정할 필요도 없는게, 저 중 가장 합류이유가 빈약한 피펜이 빠져도 가드인 매직, 조던, 드렉슬러 모두 풀타임 스몰포워드가 가능한 선수들이다. 팀 자체 연습에서 균형도 신경쓸 이유가 없는게, 팀 연습이란게 꼭 PG1명, SG1명...이런식으로 5포지션을 상세히 나눠서 하는게 아니다. 실제로 드림팀이 결성 초기에 몬티 칼로에서 실전처럼 한 전설적인 연습경기에서 조던 팀의 구성은 조던. 스카티 피펜, 크리스 멀린, 래리 버드, 패트릭 유잉으로 슈팅가드 한명, 스몰포워드 세명에 센터 한명이었다. 결정적으로 당시 드림팀은 대회 내내 타임아웃조차 한번도 안 부른 팀이다. 즉, 전술이고 뭐고 따질 필요도 없이 그냥 세계 무대의 팀들과 상대조차 안되는 미스매치였던 것. 실제로 로스터 중 유일하게 198 미만 선수라 전략적으로 활용도가 높은 스탁턴은 경미한 부상으로 네 경기, 그것도 평균 7분씩만 뛰었는데 아무 지장이 없었다. 그리고 이건 당시 농구계가 모두 알고 있었다. 괜히 "꿈의 팀"이란 별명이 붙은게 아니다. 즉, 토마스가 빠진 것은 로스터 밸런스나 전력 때문이라고 보기 힘들다. 오히려 토마스는 매직, 버드와 더불어 80년대의 거물 중 하나로서 상징적인 의미로 합류하는게 더 적합했을 인물이다. 괜히 농구계가 토마스 탈락 이후 일제히 수근거린게 아니다. 누가봐도 탈락될 선수가 아니었으니까 온갖 소문이 돈 것이다.

6. 행정가 및 감독 경력



6.1. 토론토 랩터스


토마스는 딱 1년 후인 1995년 당시 신생팀인 토론토 랩터스의 부사장으로 취임해서 많은 팬들을 놀라게 했다. 누구도 토마스가 이렇게 현장에 빨리 복귀할 줄 몰랐거니와 감독이 아닌 구단행정가로 돌아올 줄은 더욱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놀라움이 컸다.
같은 캐나다를 연고로 창단된 밴쿠버 그리즐리스가 주로 한물간 노땅들을 확장 드래프트로 선발한 데 반해 토마스의 토론토는 젊고 재능있는 선수 위주로 로스터를 꾸렸다. 물론 로스터에 깊이를 더하기 위해서 1985-1986 시즌에 수비수상과 기량발전상을 동시 수상했던 33세 노장 가드 앨빈 로버트슨을 데려오기도 했다.
1995년 드래프트에서는 당시 토론토 팬들이 간절히 뽑기를 바랐던, UCLA에이스였고 1995년 NCAA 파이널 MOP 수상자였던 에드 오배넌[32]을 버리고(?) 애리조나 대학교의 단신 가드 데이먼 스타더마이어를 지명하는 파격적인 선택을 했다. 이 때 팬들은 야유를 퍼부었지만 스타더마이어가 신인상을 수상하는 등 대활약하면서 야유가 쏙 들어갔다. 이 해 팀은 21승 61패라는 하위권 성적을 거뒀지만 시카고 불스, 올랜도 매직, 시애틀 슈퍼소닉스, 휴스턴 로키츠 등 강팀들을 한 번씩 제압하는 등 소소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고, NBA 구단 중 관중동원 3위를 기록하면서 나름대로 흥행에 성공했다.
1997년에는 고등학생 선수인 트레이시 맥그레디를 지명하면서 다시 한 번 팬들을 놀라게 했다. 스타더마이어 때처럼 야유는 없었지만 궁금증을 자아내긴 했다. 토마스는 '맥그레디는 지금 여러 모로 부족하지만 몇 년 뒤에 엄청난 선수로 성장할 것' 이라고 자신의 소견을 밝혔다. 그러나 토마스는 맥그레디의 성장을 지켜보지 못하고 1998년에 구단 부사장직을 사임하고, 잠시 NBC 농구해설위원으로 일했다.

6.2. CBA


그 뒤 토마스는 1998년에 미국의 독립 리그인 CBA(Continental Basketball Association)의 커미셔너로 취임해서 세간을 놀라게 했다. 하지만 비록 독립 리그라고 해도 리그를 경영하는 것과 구단을 경영하는 것은 달랐는지 토론토 랩터스에서처럼 성공적인 모습은 전혀 보여주지 못하고 2000년에 CBA를 떠났다.

6.3. 인디애나 페이서스


CBA의 실패 이후 토마스는 래리 버드가 건강상의 이유로 감독직에서 물러난 뒤 공석이 된 인디애나 페이서스의 감독으로 취임한다. 전임 래리 버드가 3시즌 연속 인디애나를 컨퍼런스 결승, 파이널 1회로 이끌었기 때문에 감독직이 처음이며 전력 약화가 우려되는 상황에서 감독으로 선임된 토마스에게 많은 이들이 기대반 걱정반의 시선을 보냈다. 토마스는 감독으로 있는 동안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에서 썩고 있던 저메인 오닐을, 시카고 불스에서 론 아테스트를 트레이드해왔으며 알 해링턴, 자말 틴슬리 등의 젊은 선수들을 발굴하면서 팀 리빌딩을 진행했다. 토마스 재임 3년동안 인디애나는 플레이오프 1라운드용 팀이 되었고 매년 1라운드 탈락.
인디애나는 그렇게 토마스의 팀이 되고 있었으나 2003년 건강이 회복되어 다시 현장에 돌아오길 원했던 래리 버드가 구단 사장이 되었고, 래리 버드는 자신이 만들었던 레지 밀러 중심의 강력한 조직력과 수비를 내세운 농구와 달리 자유분방하고 공격적인 농구 스타일을 정립한 토마스를 경질하고 릭 칼라일(現 댈러스 매버릭스 감독)을 선택했다.
'''토마스의 경력은 여기까지는 그런대로 괜찮은 편이다. 문제는 그 후였으니...'''

6.4. 뉴욕 닉스


토마스는 2003년 12월 22일 뉴욕 닉스의 사장으로 취임한다. 당시 뉴욕 팬들은 스콧 레이든의 돌아이짓에 미치기 일보 직전까지 가있었다. 팬들은 '레이든만 아니면 된다!'고 생각했다. 레이든보다 더 못할 수는 없을 테니.
의견이 갈리기도 하지만 여러 일이 있지만 레이든의 뻘짓은 대개 3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닉스의 상징 패트릭 유잉을 트레이드시켜 버린 것, 둘째가 2002년 드래프트에서 네네를 지명하고 마크잭슨과 마커스 캠비를 얹어서 덴버에 안겨주고 안토니오 맥다이스 하나 달랑 받아온 일[33], 셋째가 사상 최고라는 2003년 드래프트 9번으로 마이크 스위트니를 지명한 것[34] .2번의 경우 부상 이전의 맥다이스는 훌륭한 포워드였으므로 결과론적으로 문제일 수 있다. 문제는 3번인데 당시 뉴욕은 포워드진이 거의 포화상태였고 206cm의 포워드 커트 토마스가 센터 알바를 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 스위트니라는 203cm의 단신 파워포워드를 뽑았으니 팬들이 대체 목적이 뭐냐고 비난하는 것이 무리가 아니었다.
토마스는 달라보였다. 토론토 랩터스 시절에 데이먼 스타더마이어와 트레이시 맥그레디를 지명했던 선견지명, 인디애나 페이서스 감독 시절 성적은 그저 그랬지만 저메인 오닐, 알 해링턴과 같이 재능있고 젊은 선수들을 중용한 점 때문에 뉴욕 팬들의 기대는 매우 컸다. 토마스 또한 취임 일성으로 팀을 빠르게 재정비해 성적을 끌어올리겠다고 약속했고, 발빠른 무브를 보였다.
토마스는 사장으로 취임하자마자 곧장 스테판 마버리를 트레이드로 영입했다. 그러면서 당시 팀의 골칫거리 중 하나였던 안토니오 맥다이스를 처분했다. 비록 마베리를 받아오면서 연봉 먹는 잉여나 다름없었던 페니 하더웨이까지 덤으로 데려오긴 했지만, 마베리는 리그 최고의 포인트 가드 중 하나였고 뉴욕 브루클린 출신이라는 플러스 요소까지 있었기 때문에 당시 언론은 호평 일색이었고 마베리 또한 고향팀에서 뛴다는 사실에 매우 기뻐하며 열정적으로 뛰었다. 또한 돈 체니 감독을 경질하고 명장 레니 윌킨스를 데려왔다. 팀은 비록 1라운드에서 탈락하긴 했지만 오랜만에 플레이오프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2004-2005 시즌의 전망을 밝게 했다. 그러나... '''이것들이 토마스가 뉴욕에 있는 동안 그나마 잘한 일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그것도 그나마다.'''
2004-2005시즌부터 뉴욕은 다시 처절하게 몰락해갔다. 시즌 전 불스로부터 마베리와 포지션이 겹치는 자말 크로포드를 영입한 것부터가 좋지 않은 조짐의 시작이었다. 우려대로 마베리와 크로포드는 눈에 띄는 시너지를 보여주지 못했고 팀은 시즌 초반부터 하위권을 맴돈다. 이 와중에 레니 윌킨스는 중도 경질. 게다가 선수들 사이에도 잡음이 많아 구단 분위기가 엉망이었다. 여러 모로 곤란한 상황 속에서 토마스는 2005년에 불스로부터 향후 1라운드 드래프트릭을 2개나 내주는 강수를 두며 에디 커리를 영입했고 명장 래리 브라운을 5년간 5천만 달러라는 최고 대우로 데려오는 무브를 보여줬지만 이미 막장 중의 막장이었던 뉴욕 닉스를 되살리기는 무리였다. 여기에 원래부터 사이가 나빴던 마베리와 브라운 감독 간의 갈등이 나중에는 선수단 전체와의 갈등으로 심화되면서, 결국 래리 브라운은 23승 59패라는 최악의 성적을 찍고 한 시즌만에 해고당했다.
덤으로 2005년 오프시즌에 전 시즌 플레이오프에서 잠깐 활약상을 펼쳤던 센터 제롬 제임스를 연 600만 달러에 5년 계약으로 모셔와 팬들이 어이를 잃게 했다. 제임스의 2004-2005시즌 성적은 4.9점 3.0 리바운드 수준이고 선수경력 내내 고만고만한 기록만 낸 평범한 선수였다. 단지 2005년 플레이오프에서 대활약했다는 이유만으로 거액을 안긴 것. 제임스는 결국 평범한 성적만 남기고 NBA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35]그리고 제몫을 하지 못하는 페니 하더웨이를 처분하였으나 그 과정에서 영입한 선수가 스티브 프랜시스. 팬들은 더욱 어이없어했다. 이 둘은 플레이 스타일이 너무 비슷했고 당연히 별다른 교체 효과를 누리지 못했다. 오히려 뉴욕 닉스의 페이롤 1위 자리만 공고히 했다.(...)[36] [37] 프랜시스에 이어 선수생활의 황혼기에 접어든 제일런 로즈까지 데려오면서 팀 페이롤은 무려 130M을 초과했다. 팀 구성은 고려하지 않고 그냥 좀 한다싶은 베테랑이면 무조건 수집하고 보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무브를 보여줬다.
2006년에는 아예 토마스 본인이 감독까지 겸했지만 성적은 더 떨어져갔다. 이 기간중에 역시 평범한 경력을 가진 제러드 제프리스를 또 연 500만 달러에 영입하는 이해할 수 없는 행보를 보였다. 2007년에는 잭 랜돌프까지 데려오면서 에디 커리와 함께 리그 최고의 골밑 자동문(...) 콤비를 결성케 하면서 다시 한번 팬들이 뒷목을 잡게 했다.
토마스에게 무한신뢰를 보내던 뉴욕 닉스 구단도 잇단 삽질을 참을 수 없었는지 2008년에 토마스를 해고하였다.
그 후 토마스는 플로리다 국제 대학교(FIU) 농구팀의 감독 제의를 수락했고, 2012년까지 그곳의 감독으로 있었지만 별반 성적은 올리지 못했다. 중간에 뉴욕 닉스의 사장으로 복귀하려고 한다는 얘기가 나돌면서 닉스 팬들을 '''식겁'''하게 했으나 이내 다시 FIU로 돌아갔다.

7. TNT 해설가 시절


행정가로서 활동하기 전후로 TNT에서 해설가 역할을 하였다. 한때 샤킬 오닐, 크리스 웨버, 레지 밀러 등과 함께 Inside the NBA 패널로 함께 했으며, 포인트 가드와 감독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날카로울때는 날카로움을 제대로 보여주기도 했고 전반적으로 괜찮은 입담을 보여주었다.
여기 나오는 사람들이 늘 그렇듯 그와 관련돼서 자주 언급되는 인물은 스카티 피펜칼 말론.[38] 드림팀 다큐멘터리에서 아이제아가 팀에 들어오는걸 원하지 않았다는게 회자가 되면서 피펜 이야기만 나오면 토마스는 흥분하고 패널들은 "워워워" 하는 사이.[39] 칼 말론은 팔꿈치에 맞아서 눈 주위가 크게 찢어진 적이있다. 아직도 앙금은 남아있겠지만 주로 다른 패널들이 놀리는 개그포인트로 쓰인다.

8. 이것저것


선수시절에 승부근성 하나만큼은 누구에게 뒤지지 않았다. 동시대에 활약한 선수가 매직 존슨, 래리 버드, 마이클 조던 등등이었지만 전혀 밀리거나 하진 않았다. 오히려 마이클 조던을 세번이나 좌절시킨 배드 보이스 1기의 리더라는 버프도 있어서 올드팬들에게 사랑도 많이 받았다.
현역시절이나 지금이나 조폭 보스뺨치는 강력한 리더쉽을 가졌던 선수이다. 다만 보스 기질이 강하다고 해서 불합리 한 명령을 내리거나 독단적으로 찍어 누르는 타입은 아니었다. 토마스가 가장 중요하게 추구하는 것은 팀(조직)의 성공과 승리. 이를 위해서는 모두가 자신의 이기심을 버리고 팀을 위해 희생해야 한다고 믿는 타입이었으며, 본인부터 솔선수범해 팀을 위해 희생하는 자세를 몸소 보여줬다. 자신의 철학을 스스로 적극 실천하는 행동파 보스였던 셈이다.
그렇게 팀을 위해 본인부터 모든 것을 희생하는 만큼, 자신의 말을 따르지 않는 선수는 용납하지 않는다고 알려졌다. 대표적인 선수가 유타 재즈에서 득점왕을 2번이나 했던 스몰포워드 애드리안 댄틀리. 댄틀리는 70년대말부터 유타에서 대활약하고 86~87 시즌부터 피스톤즈에 합류하여 두 시즌을 함께 했다. 하지만 88~89 시즌을 치르면서 댄틀리가 팀의 보스인 토마스에게 자신의 공격 롤을 더 늘려달라고 요구하자, 토마스가 화를 내며 구단에 댄틀리의 트레이드를 요청해 결국 자신이 댈러스로 떠나게 되었다며 하소연 했다. 그러나 토마스가 댄틀리의 트레이드를 요구했다는 이야기는 댄틀리의 일방적인 주장일 뿐이었으며, 그 당시 단장인 잭 맥클로스키는 "절대 그런적이 없다. 댄틀리 트레이드 때 아이제아는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라며 전면 부정하고 토마스를 변호했다. 한편으로 댄틀리가 감히 척 데일리의 지시에 공개적으로 불만을 표했고, 이 때문에 데일리와 댄틀리의 사이가 벌어지자 토마스가 나서서 그의 트레이드를 요구했다는 설도 있다.
다만 당시 댄틀리는 다른 선수들과 관계는 좋은 편이었으며, 그의 놀라운 포스트업과 탁월한 자유투 유도능력 등 수준 높은 공격 기술 덕분에 동료들에게 선생님으로 불리면서 존중받는 분위기였다. 또한 구단 역시 크게 줄어든 공격기회 속에서도 20점 이상을 계속 보장할 수 있는 댄틀리를 굳이 트레이드할 이유가 없었다. 일부에서 레이커스에게 패하고 분위기 쇄신을 위해 마크 어과이어와 트레이드를 단행한 이유도 있다고 했지만, 상식적으로 구단에서는 그럴 이유가 전혀 없었다. 어과이어 역시 뛰어난 득점력으로 20점 이상 기대할 수 있는 탁월한 득점원이었으나, 아무래도 기량이나 경력, 명성에서 댄틀리의 한 수 아래였다. [40]
사실 댄틀리는 70년대 말부터 전형적인 약팀의 에이스로 자리하면서, 196cm의 크지 않은 신장으로도 엄청난 포스트업 기술로 상대 골밑을 박살내고, 탁월한 파울 유도 스킬과 돌파능력, 준수한 미들슛까지 겸비하여, 무려 4년 연속 평균 30점 이상을 올리고 두번의 득정왕을 차지한 리그 최고 수준의 득점기계이자 스타였다. 특히 득점왕을 차지했던 두 시즌을 포함, 4년연속 30득점을 올릴 당시, 무려 연평균 57%의 야투율을 기록했으며, 통산 야투율이 54%에 달하는 효율성 높은 기술을 가진 엘리트 스코어러였다. 디트로이트 합류 이후 공격 점유율이 3분의 2 수준으로 감소했음에도, 2시즌 모두 20점 이상을 올려줬을 정도로 댄틀리의 기량 자체는 거의 하락하지 않았다. 88~89 시점의 댄틀리는 여전히 공격 기회만 충분히 보장되면 25점 이상 뽑아줄 수 있는 특급 스코어러였다. 그러나 타이트한 수비 성공 이후, 속공을 전개하며 토마스를 축으로 최적의 득점 위치에 볼을 배급하거나, 철저한 협업 플레이 속에 오픈 찬스를 끌어내는 것이 장기인 디트로이트의 시스템에서, 뛰어난 개인기로 공격적인 포스트 업 구사와 돌파가 장기인 댄틀리의 공격 옵션을 그보다 더 늘릴 경우, 토마스가 오랫동안 손발을 맞춰가며 구축한 팀의 공격시스템이 망가질 우려가 있던 것이다.
상대팀들에겐 악명을 떨친 배드 보이즈였으나, 팀을 상징하는 정신은 '희생' 이었다. 보스 기질이 강한 토마스는 경기장에 들어서면 팀과 동료에게 가장 좋은 찬스를 만들기 위해, 팀원들이 유기적으로 만들어 준 찬스를 해결하기 위해, 자신의 몸은 전혀 돌보지 않고 덤벼드는 투지의 화신이었다. 듀마스는 마음 먹으면 30점 이상 올려줄 수 있는 득점력이 있었으나, 공격 기회에 전혀 욕심을 내지 않은 채 철저한 백코트 수비의 핵이자 상대팀 에이스 전담 마크맨 역할을 기꺼이 수행했으며, 동료들과 연계한 헬핑 디펜스 상황이 벌어질 때마다 제일 먼저 뛰어드는 등 팀을 위해 아낌없이 희생했다. 인사이드의 핵 레임비어와 마혼은 무수한 비난을 감수하고 기꺼이 팀을 위해 누구도 맡기 싫어하는 악역을 스스로 자처했으며, 개인 기록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팀을 위해 온갖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았고, 때로는 행동대장이자 보디가드로 동료들을 적극 보호했다. [41]
이러한 팀 컬러 속에서 댄틀리의 요구대로 공격 옵션을 더 늘려준다면 필연적으로 모두가 희생하는 팀 분위기가 깨질 우려가 있었다. 또한 댄틀리의 탁월한 개인 기에 의존하는 것이 늘어날수록, 수비와 공격의 타이트하던 흐름이 느슨해 질 수 있었다. 무엇보다 당시 배드 보이즈에는 댄틀리에 크게 뒤지지 않는 득점력을 갖춘 스코어러가 여럿 있었기 때문에, 무리해서 댄틀리의 의존도를 더 높일 이유가 전혀 없었다. 토마스는 팀의 절대적인 에이스이자, 리그에서 손꼽히는 클러치 능력을 갖추고 있었으며, 두 자릿수 어시스트를 하면서도 언제나 20점 이상은 기본으로 뽑아줄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조 듀마스 역시 팀이 필요로 할때는 30점 이상이 가능한 득점력이 있었으며, 실제 여러 중요한 경기에서 토마스 대신 1옵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했다. 그리고 벤치 에이스 비니 존스 역시 마이크로웨이브(전자레인지)라는 별명에 걸맞게, 한번 달아오르면 순식간에 연속으로 6,7개의 슛을 연속으로 림에 꽃아넣는 무서운 득점력의 슈터였다. 이렇게 한정된 역할 속에 자신을 희생하면서, 적재적소에 능력을 갖춘 선수들이 포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댄틀리 역시 현재 위치 그대로 토마스를 보좌하며 20점 이상 올려주는 제1 스코어러 역할만 해줘도 팀에는 더없이 충분한 상황이었다.
결국 아쉬운 준우승 다음 88~89시즌 중, 댄틀리는 마크 어과이어와 맞 트레이드 되어 댈러스 매버릭스로 떠나게 된다. 어과이어는 어렸을때부터 토마스와 절친이었으며, 소속팀 댈러스와 역할 문제로 트러블을 겪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 역시 댄틀리에 버금가는 득점력을 갖춘 스몰포워드였고, 무엇보다 팀을 위해 자기욕심을 희생하고 팀 승리에 전력을 다하길 요구하는 토마스의 성향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어과이어의 합류로 댄틀리의 공백을 큰 타격없이 메운 배드 보이즈와 토마스는 결국 꿈에 그리던 88~89시즌 우승을 일구게 된다. [42] 아마 댄틀리가 그대로 남아 있었어도, 매직존슨이 결장하고 주전 다수가 부상병동이 된 레이커스라면, 디트로이트의 압승이라는 결과는 바뀌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데일리, 토마스와의 루머는 차치하더라도, 자신의 성격을 잘 알고 순순히 맞춰주는 어과이어 쪽이 토마스에겐 더욱 마음 편한 동료였다고는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차피 토마스와 공격에서 호흡을 맞추며 20점 언저리를 기대할 수 있는 준수한 스코어러가 필요했던거지, 팀의 운명을 책임져 줄 강력한 에이스를 필요로 했던 것이 아니었다.[43] 여기에 댄틀리와는 달리 어과이어는 피스톤즈에 온 이후로는 자신의 자존심을 내려놓을 줄 아는 선수였다. 팀이 슬럼프에 빠지고 있을때 당시에 신입으로 여겨졌던 로드맨의 앞길을 자신이 막고 있다고 생각하여 자신의 주전 자리를 내줄 정도로 피스톤즈에서는 자신보다는 팀이 우선인 선수로 토마스와는 이해관계가 정확히 맞았던 것이다.[44]
매직 존슨과 매우 각별한 사이다. 존슨이 초창기 버드가 이끄는 셀틱스에게 우승을 헌납하면서 크게 좌절하고 있을 때 옆에서 많이 위로해주곤 했다. 존슨이 에이즈 감염으로 은퇴한 후, 1992년 올스타전에서 팬들의 성원으로 올스타에 뽑혀서 경기에 나서게 되었을때, 몇몇 선수들은 그의 출전을 내켜하지 않았다. 하지만 토마스는 마이클 조던과 함께 에이즈에 대한 여러가지 잘못된 점을 바로 잡아주는 등 많이 노력했고, 실제로 코트위에서 매직과 포옹도 하는 등 이런 우려를 불식시켜주었다. 매직이 이 올스타전에서 터트린 마지막 3점슛을 던질때, 그를 막고 있던 선수는 바로 토마스였다. 한 번 매직 존슨이 토마스의 뒷통수를 후리는 인터뷰를 해서 (요약하자면 토마스 성격이 드러워서 올림픽에서 아무도 토마스가 오기를 원하지 않았다고 인터뷰에서 말했다) 사이가 틀어지긴 했었지만 요새는 좀 나아진 편.
ESPN에서 실시한 포인트 가드 순위에서 토마스가 올라왔는데, 토마스가 스탁턴과 커리(!) 보다 낮게 측정되었다 (스탁턴 3위 커리 4위(!) 토마스 5위). 이에 매직은 트위터로 "스탁턴과 커리가 아이제아 보다 낫다고? 뭘 말도 안되는 소리를. 내가 한마디만 하지. 내가 결승전에서 토마스랑 붙은 적이있는데 다치고 다리 저는 토마스였어. 그런데 걔가 한 쿼터에 25점을 넣었지." 라고 말하며 토마스를 저 둘보다 치켜세우기도 했다. 실제 토마스를 까는 사람들 조차 인성이나 그의 경영 / 감독으로서의 실패에 대해서 까지 실력으로는 까지는 않는다.
다만 포인트 가드 순위에서 아이제아가 밀린 이유는 바로 기록. 여러 지표에서 그가 팀 오펜스에 차지한 비중이 아주 크진 않았다는 점이고 효율성 역시 높지 않다는 점이다. 또한 1차 기록을 비롯해 2차 기록도 별로 높지 않다는 점도 포함이다. 그가 뛰어난 포인트 가드인건 사실이지만 팀의 에이스로서 공격에서 캐리를 다 했다는 건 의문이라는 것. 디트로이트의 우승이 아이제아의 에이스 기질보다 팀플레이나 디펜스의 힘이라고 보는 경향이 있는 건 사실이다.[45][46] 비교적 낮은 USG%에도 불구하고 TS%가 높지 않다는 점을 꼽았다.[47] 선수의 평가라는 게 한 순간의 임팩트만으로 평가를 하는게 아닌 커리어 전체를 놓고 평가를 하기 때문에 밀린점도 없지않아 있다. 반대로 스탯은 낮아도 순위가 높은 제이슨 키드가 있긴 하지만 아이제아의 순위가 키드보다 높게 측정되고 있으며, 키드도 그 스탯 때문에 컨퍼런스 파이널 한 번 못가서 조롱을 받는 크리스 폴과 비슷한 레벨로 취급을 받는다.
즉 같이 농구를 했던 내부자들 입장에서는 높게 취급을 받지만 동시대를 보지 못하고 숫자와 통계로 평가하는 사람들에게는 평가가 상대적으로 박한 선수이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당시 피스톤즈의 운영방식이 지금의 스퍼스의 운영방식과 비슷했다고 보면 된다. 지금 포포비치의 방식처럼 배드 보이즈의 데일리는 선수층을 폭넓게 사용했고, 주전 선수였던 토마스, 듀마스 등도 에이스치고는 아주 많은 출장 시간을 받지는 않았다. 또한 팀의 공격성향도 공격위주보다는 수비위주에 가까웠다. 그러니 개인 스탯 축적에 불리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토마스는 팀과 승리를 위해 개인기록이나 자신의 욕심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선수였다.''' 그가 속한 팀의 동료들 모두가 그런 리더의 철학에 따라, 철저한 희생으로 자신의 욕심을 배제했다는 점을 잊으면 안된다. '''통계에서 숫자는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숫자만으로는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앞으로 토마스에 대한 '국내평가'는 계속 낮아질 것 이다. 이미 30년전 선수이고 오직 스탯과 개인수상으로 평가하며 무엇보다 토마스의 플레이를 직접 체감하지 못했다. 또한 대부분 10~20대 연령층이 활발히 활동하고 현역선수들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기에 토마스에 대한 평가는 상당히 각박해질 것 이다. 팀의 에이스로 우승 2회를 차지 했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을 일이며 역사적으로도 이런 선수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48] 10년차 이상의 동포지션에서 존 스탁턴, 제이슨 키드, 스티브 내시, 게리 페이튼, 토니 파커, 크리스 폴 등 토마스와 같이 '''에이스'''로 우승을 이끌지 못했다.[49] 파커의 경우 팀 던컨이라는 역대급 선수가 있었으며 실제로 던컨이 팀의 핵심이였다.[50] 게다가 '''정규시즌 에이스 + 파이널mvp까지 차지한 포가''' 로 기준을 더 강하게 두면 이는 정규시즌 백투백 mvp와 3번이나 우승을 차지한 커리도 해내지 못했을만큼 80년대 후반 토마스의 위상이 얼마나 높았는지를 체감할수 있을 정도다. 토마스는 선수경력이 상대적으로 짧아서 누적 기록 등에서 손해를 보았지만 선수경력 중 리그 MVP를 제외한 다른 부분에서 성과를 보였기에 무의미한 말년시절을 보내기 않고 깔끔하게 은퇴했다.
웃음이 굉장히 매력적인 남자이다. 그가 한번 미소 지으면 아무리 화난 사람이라도 그 미소를 보고 화를 풀 수 있을 정도. 미소를 지을 때 들어가는 보조개도 포인트. 여기에 잘생긴 외모와 동안도 한몫 한다. 실제로 토마스의 선수 시절과 은퇴 후의 사진을 보면 별 차이가 없다. 거기다가 현재 50세임에도 불구하고 얼굴에 주름살이 거의 없다.
젊은 아이제아 토마스와도 친분이 있는 걸로 알려져 있다. 문자를 통해 격려의 말을 전한 적이 있다는 듯. 실제로 한 TV쇼를 통해 직접 만남을 가진 적도 있었는데 젊은 아이제아 토마스가 이름 때문에 팬들에게 부자관계 아니냐는 오해를 받는다고 말하자 자신이 직접 친아버지라는 루머를 퍼트린다고 답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녹화는 계속되었는데 영상을 찾아보면 둘이 훈훈한 선후배 사이인 것을 알 수 있다.
선수 시절 NBA에서도 손꼽히는 싸움꾼인 릭 마혼(208cm)에게 겁도 없이 대놓고 안면 죽빵을 날린 걸로도 회자되고 있다. 웬일로 마혼이 그때 대응을 안하고 참았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다면 토마스의 사지가 뜯겨 나갔을지도...어쨌든 당시 업계에서 알아주는 주먹꾼 릭 마혼에게 겁도 없이 주먹을 날린 토마스도 대단하긴 했다.[51]
훗날 매직존슨과의 인터뷰에서 존슨이 91년에 디트가 시카고에게 맥없이 스윕을 당한점에 대해 무척 의아해하자 토마스는 "백투백우승을 차지하고 난 뒤 3peat의 큰 욕심이 있었다. 3peat은 매직도 버드도 못해본 거라 기합이 단단히 들었고 무리하게 슛연습을 시도하다 손목이 이상하다 싶어 병원가보니 의사가 절대 공 던지지 말라고 할만큼 본인 커리어의 처음으로 심각한 부상을 입었던게 크다"고 답변했다. 사실 88년 파이널에서는 오심논란이 나온 6차전에 1점차 분패로 결국 7차전끝에 준우승(총 득실차는 디트가 우세)을 한 점도 있어 여러모로 토마스는 3peat할 팔자(...)는 아니었던 모양.
르브론 제임스를 높게 평가하기로도 유명하다. 특히 마이클 조던과의 비교에서 르브론을 세간의 인식보다 높여주기에 혹자는 토마스와 조던의 관계때문에 토마스가 어그로(...)를 끄는게 아니냐는 지적도 있었는데 이에 대해 토마스는 그런거 없고 나와 조던의 사이가 좋지 않은건 사실이지만 그는 내 아들에게만큼은 상냥하게 대해주었고 나는 거기에 대해 감사한다. 그에게 악감정은 없다고 하며, 르브론과 조던 둘이 같이 드래프트에 나온다면 누구를 선택하겠냐는 질문에 르브론을 선택하며 말하길 그가 명전급 감독[52]을 만나거나 대학을 나왔다면 지금의 커리어보다 훨씬 좋은 성적을 찍었을 거라고 말한바 있다.
[1] 조폭 보스. 실제로 성장 과정이나 인물이 조폭 보스에 가깝다.[2] Charlotte Observe에서 취재한 상대팀 감독이 "I call him the baby-faced assassin because he smiles at you, then cuts you down."이라고 말한 데서 유래한다. 2014년 이후에는 이 별명을 어떤 슛 잘던지는 동안 농구선수가 가져갔다.[3] 마이클 조던 - 더 라스트 댄스에서 그를 실력으로는 리스펙한다고 말했다.[4] 물론 이 시대가 삼점슛을 그리 많이 쏘지 않았던 시대임을 감안해야 한다. 삼점슛 잘 쏜다는 버드도 100개 이상을 던지지 않았다. 레지 밀러등의 선수들이 등장하기 전까지 80년대 농구의 기초적인 원칙은 가능한한 가까운 곳에서 슛을 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걸 감안해도 적게 쐈는데 성공률이 떨어졌기 때문에 확실하게 3점슛 능력은 현대 가드들에 비해 많이 떨어지는 건 부정할 수 없는 팩트이다.[5] 특히 전술한 ''''공은 낮게, 허리는 높게''''라는 포인트 가드의 기본 드리블 자세를 완벽하게 할 수 있는 선수는 현역중 폴 뿐이다. 동시대 뛰어난 포인트 가드인 커리나, 스티브 내쉬는 공이 높은 편이고, 카이리 어빙같은 선수는 자세가 지나치게 낮아서 돌파 뒤 골밑 트래픽을 찢는 킥아웃 패스 정확도 및 시야확보에 약점을 보인다.[6] 참고로 폴은 어렸을 때부터 아이제아 토마스의 플레이 영상을 보면서 연습해왔다. 어찌보면 폴의 플레이 원천은 아이제아라고 봐도 무방하다.[7] 참고로, 토마스를 제치고 전체 1순위가 된 선수는, 후일 아드리안 댄틀리와의 트레이드되어 피스톤즈 유니폼을 입고 토마스와 함께 2회 우승을 차지한 댈러스 매버릭스 출신의 스몰 포워드 마크 어과이어(Mark Aguirre). 둘은 같은 도시에서 자란 절친이었으며 어과이어가 피스톤즈로 트레이드 되었을 때 썩 내키지 않았던 팀 동료들에게 어과이어를 소개해주고 관계를 좋게해준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8] 데니스 로드맨은 배드 보이즈가 동부의 강자로 명성을 떨치던 87~89년 시점에는 백업 수비수로 막 성장하던 무명의 블루컬러 워커였을 뿐이다. 수비를 지휘하는 것은 주전이자 배드 보이즈의 행동대장 릭 마혼이었는데, 로드맨은 마혼이 이적하기 전까지 그저 마혼의 꼬붕들 중 하나로 여겨질 뿐이었다. 따라서 배드 보이즈를 대표하는 주축이라 하기엔 맡고있는 롤이나 네임밸류가 한참 떨어졌으며, 그가 팀의 핵심으로 완전히 자리한 때는 이미 배드 보이즈의 끝물인 1991~1992 시즌부터였다.[9] 게다가 이 당시 로드맨은 헤어스타일이나 기행은 커녕, 리그에 흔하디 흔한 거친 수비수들 중 하나일 뿐, 외모도 수수했고 플레이 역시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스타일이라 전혀 주목을 받지도 않았다. 게다가 파워포워드로는 체격이 상당히 작은 편이라(찰스 바클리보다 키는 조금 더 크지만 체격은 호리호리했다), 주전으로 중용하기 시작한 것은 1991~92 시즌부터였다.[10] 훗날 그의 친구이자 라이벌이었던 매직은 이 경기를 언급하면서 아이제아 토마스가 스테픈 커리보다 역대 포인트 가드 순위가 낮은게 도저히 이해가 안간다고 회상할 정도였다.실제 그 경기를 보면 아이제아 토마스를 싫어하는 사람도 인정할 수 밖에 없을정도로 말도 안되는 사기슛들이 들어가고는 했다. 그것도 한발을 절으면서...[11] 실제로 이 6차전 경기는 그 당시 상당히 말이 많았던 경기였는데, 빌 레임비어가 카림 압둘자바를 밀었다고 받은 파울이 영 시원치 않은 파울이었기 때문이다. 모든 디트로이트 선수들은 그 파울을 인정할 수 없다고 했고 여러 농구 관계자들도 이해할 수 없다고 했으며 파울을 받은 레이커스의 제임스 워디도 "심판이 인정했으니 파울이다" 라고 하면서 딱히 강하게 부정하지 않는 모습도 보여줬다. 이에 "조던 룰" 이라는 책을 기록한 농구 저술가는 빌 레임비어가 파울을 받은것은 카림 압둘자바를 밀어서가 아니고 그 전이 수없이 많은 선수들을 밀치고 반칙해서 받은 파울이이었을 것이다 라고 저술하였다.[12] 사실 90년대 초반까지 로드맨은 나중에 알려진 이미지와는 많이 달랐다. 식스맨 수비수로 다소 거친 수비와 허슬 플레이에 최선을 다하는, 드러나기 어려운 유형의 선수였을 뿐이다. 인터뷰 자체도 로드맨의 생각이 궁금하다기 보다는, 듣보잡 신인이 하도 버드에게 농락당하는 걸 본 기자들이 짓궂게 말을 건넨 것이다.[13] 사실 후에 인터뷰에서 로드맨은 자신이 무슨말을 하는지도 제대로 몰랐으며, 자신이 한말이 이렇게 큰 파장을 가져올거라 생각해보지도 못했다 라고 할 정도로 그냥 감정에 겨워 한 발언에 가깝다.[14] 친한 선수들의 경우 포옹[15] 피스톤즈에서 매너 좋은 극소수에 꼽혔던 조 듀마스와 존 샐리만 악수를 했다. 이 중 샐리는 훗날 불스에서 뛰기도...[16] 조던 룰 그리고 피스톤즈가 확실히 더티한건 맞았지만 80년대의 대부분이 90년도 그리고 2000년도 팀과 비교했을때 거칠었던 것 역시 사실이다. 이를테면 버드가 보스턴이 레이커스에 뒤지고 있자 동료들을 "기집애들 같이 뛴다" 하고 디스했는데, 바로 다음날 맥해일이 램비스에게 클로스라인을 선보이는 파울을 했다. 근데 그게 테크니컬 파울도 아니고 그냥 개인 파울 하나로 그쳤다.[17] 하지만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점은 피스톤즈가 실력도 없는데 지저분한 반칙만을 통해서 이겼다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만약 실력이 없었더라면 예전부터 비슷한 전략을 써왔던 피스톤즈는 우승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아이제아는 물론이고 듀마스도 재능이 뛰어난 선수였고, 피스톤즈는 더티함과는 별개로 실력도 있는 팀이었다. 플래그런트 파울 규정 도입이 영향을 준건 사실이지만 단순히 그 점 하나가 우승을 했느냐 못했느냐를 결정할 수는 없다는 점. 게다가 피스톤즈는 3년 연속 파이널 진출이라는 꽤나 체력적으로도 힘들어 질 나이이기도 했다.[18] 르브론이 파이널에 7-8년 연속으로 진출했는데 이게 뭔 소리인가 하겠지만, 80년대는 2000년대에 비해 매우 거칠게 경기를 운영하던 시절이고, 지금처럼 정규시즌을 내다버리면서 "Load Management" 같은 체력관리를 하던 시절이 아니었다. 그 당시는 데뷔후에 12, 13년을 정말 빡세게 뛴채 은퇴하는 일이 꽤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19] 래리 버드빌 레임비어는 오랜 앙숙이었고, 불과 1년전에 레임비어가 공중에 뜬 버드를 고꾸라 뜨려서 둘이 싸우다 쌍방 퇴장이 일어나기도 했다. 실제로 이때 퇴장하는 버드를 향해 관중들이 노골적으로 조롱하고 있을 정도로 감정이 안 좋았다. 흥분한 관중들이 대거 코트 위에 있고, 이들과 적대적인 선수가 지척에 있는 것이 위험하다는 건 누구라도 알 수 있다.[20] 래리 버드도 레임비어와 마혼에게 린치에 가까울 정도로 거친 플레이를 하도 많이 당해서 토마스를 지지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다만 버드는 1992년 시점에 이르러 치명적인 등부상으로 아예 코트에서 뛸 수가 없는 지경이었고, 은퇴를 결심하고 있었으나 '드림' 팀의 일원으로 네임 밸류와 상징성을 고려해 명예 선발 된 것이다. 따라서 공개적으로 토마스에 탈락에 대해 코멘트를 하지는 않았다. [21] 사실 이건 그 전까지 언론이 집요할 정도로 토마스 관련 질문을 했기 때문이다. 당시 토마스의 실력이나 위상으로 보면 드림팀 탈락이 상식적으로 말이 안됐기 때문에 루키시절부터 서로 숙적이었고, 대표팀 구성위원회가 가장 눈치를 봤던 (실제로 드림팀을 결성하면서 가장 먼저 연락한게 조던이었다) 조던에게 화살이 간 것. 어딜가도 토마스 관련 질문만 해대니 짜증이 안 날 수가 없다.[22] 다만 윌킨스는 아킬레스건 부상으로 인해 드림팀에 합류하지 못했다.[23] 이 영향은 바로 1992~93 파이널에서, 피닉스 선즈가 조던 수비에 집중하다 피펜에게 빈번하게 허를 찔리는 장면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이전과 달리 트라이앵글 오펜스에서 피펜의 영향력이 호레이스 그랜트보다 더 확대된 것을 알 수 있다.[24] 지금이야 피펜이 호프집에도 갔고 그만한 위상을 쌓았으니 이해가 안가지만 그 당시 피펜은 토마스와 비교해서는 실력이나 인지도에 비해 한참 뒤떨어진 수준이었다. 위에 윌킨스가 언급되었는데 만약 윌킨스가 부상을 당하지만 않았어도 동포지션의 피펜은 합류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 당시 위치에서 누군가를 떨어뜨려야 했으면 경력과 실력으로 볼때 피펜이 가장 떨어지기 쉽다.[25] 토마스가 매치업 상대였던 존 스탁턴에게 심한 파울을 하자 말론이 대신 복수했다.[26] 하지만, 오히려 배드 보이즈의 감독이었기에 드림팀의 감독을 맡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더 많다. 그 성깔있는 배드 보이즈를 맡을 수 있다면 개성이 제각각인 드림팀을 코치하는 것도 가능하게 보였던 것. 실제로 바클리는 "배드 보이즈 그 새X들을 코치할 수 있다면 우리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다" 라고 까지 하였다.[27] 나머지 하나는 칼 말론, 현역 시절 말론이 육중한 팔꿈치로 토마스의 얼굴을 찍어버려서 수십 바늘을 꼬맨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방송에서 칼 말론 이야기만 나오면 패널들이 아이제아의 오래된 상처가 쑤시고 있다!!!(...)라면서 놀리는 게 일상이다.[28] 위에서 상세하게 부연한 것처럼 토마스는 당시 조던, 매직, 버드와 어깨를 나란히 하던 NBA 최고의 스타였다. 피펜은 드림팀에 뽑힐만한 자격이 있던게 아니고, 드림팀에 다녀오고부터 그에 어울리는 선수가 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나중에야 피펜이 커리어가 쌓여 토마스 못지않은 레전드가 되었지만, 드림팀 당시 4년차에 불과한 피펜의 리그 내 위상은 생애 처음으로 올NBA팀에 선정이 되었고, 조금씩 스타로 인정받아가는 시기의 떠오르는 젊은 선수였다. 당시 자타공인 슈퍼스타들만 합류하던 드림팀의 다른 멤버들과는 위상 차이가 꽤나 컸다. 따라서 저렇게 반응하며 가소롭다는 듯이 이야기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29] 당시에는 HIV나 에이즈에 대한 정보가 많지 않아 걸렸다고 하면 흔히 동성애로 인해 걸렸다고 생각했다.[30] 샐리는 96년 3월에 불스에 합류해 잔여 시즌을 뛰었을 뿐이다. 즉, 우승이 확정되던 6월까지 고작 3개월 반 같이 뛰었다.[31] 사실 네임 밸류가 아닌 당시 기량으로만 봐도 스탁턴에게 밀린 것이 그리 억울할 것도 없다. 토마스는 86-87 시즌 2nd에 뽑힌 것을 마지막으로 은퇴 시즌인 93-94까지 단 한 번도 All NBA에 들지 못한 반면 스탁턴은 87-88 시즌 All NBA 2nd에 뽑힌 것을 시작으로 90-91 3rd에 뽑힌 것을 제외하면 올림픽이 열리는 92년까지 언제나 2nd에 이름을 올렸다.[32] 동생 찰스 오배넌도 농구 선수다. 하지만 둘 다 NBA에서 오래 뛰지 못하고 빨리 사라졌다. 그 후 형제는 외국 리그에서 뛰었다. 형 에드는 은퇴했고 동생 찰스는 현재까지 일본 리그에서 뛰고있다. 이 두 사람은 전 고려대학교 선수이자 이번에 청주 KB국민은행 스타즈에 코치로 부임한 박재헌과는 고교시절 농구팀 동료이자 친구였다고 한다. 두 형제는 박재헌을 Jay라는 애칭으로 자주 불렀다고 한다.[33] 두번째 뻘짓이 욕을 먹은 이유는 맥다이스는 무지막지한 운동능력에 20-10은 거뜬히 할수있었던 리그의 손꼽히는 파워포워드였지만 뉴욕으로 왔을때의 그는 무릎부상으로 전성기의 폭발력과 운동능력을 모두 잃은 상태였다. 물론 맥다이스는 그 후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에서 백업 빅맨으로 전환해 제 2 의 전성기를 보내기는 했지만 이때는 충분히 스캇 레이든의 뻘짓이 맞았다.[34] 마이크 스위트니보다 앞에 지명된 선수들은 르브론 제임스, 카멜로 앤써니,크리스 보쉬,드웨인 웨이드등으로 더 설명이 필요없다. 참고로 이 스위트니는 뉴욕에서 2년, 시카고 불스에서 2년뛰고 NBA무대에서 자취를 감추고 D-리그에서 잠시 뛴후 현재는 해외리그를 돌며 아직도 선수생활중이며, 현재는 우루과의 리그에서 뛰고 있다. 참고로 스위트니 바로 밑에 순위에 지명된 선수중에는 현재까지 선수생활을 이어가는 선수들이 많은데 그중에는 데이비드 웨스트도 포함되어 있다.[35] 다만 제임스는 훌륭한 체격과 괜찮은 운동능력으로 인해 "포텐이 터진 것 아니냐"고 하는 전문가들도 많았다. 결과적으로 보면 천하의 뻘짓이지만 영입 자체만 보면 당시 기준으로는 그렇게까지 미친짓은 아닌셈. 그러나 계약규모와 기간을 보면 미친짓이 맞다.[36] 더 큰 문제는 공격형 포인트 가드인 마베리와 프랜시스의 롤이 겹쳤다는 것이다. 하더웨이의 경우 그나마 키가 커서 sf까지 볼수 있지만 마베리와 프랜시스는 둘다 가드만 볼수 있는데다가 수비가 좋은 편도 아니다. 당시 기준으로 프랜시스가 하더웨이보다 훨씬 좋은 선수긴 했지만 팀 입장에서 보면 별 쓸모가 없던 선수인데다가 계약기간도 하더웨이보다 훨씬 오래 남아있었다. 차라리 하더웨이를 계속 데리고 갔으면 시즌이 끝나고 샐러리캡 비우기라도 할수 있었으니 결국 최악의 병크인셈.[37] 사실 이때 하더웨이는 프랜시스와 스타일이 비슷하지도 않았다. 전성기 시절 공격형 pg로 이름을 날렸으나 계속된 부상으로 기동력과 무릎을 잃은 상태였고 이로 인해 더 이상 pg를 보기 힘든 상태였다. 하더웨이는 커리어 말미에 주로 슈팅가드나 스몰포워드로 출전했다. 게다가 뉴욕에서 그는 전력에 큰 도움이 되지못한채 돈만 잡아먹고 있었으며, 닉스는 이에 "너를 원하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주기 위해 그의 라커를 빼버리기까지 했다. 하더웨이가 이에 크게 분노하고 트래이드를 요구한건 당연한 처사.[38] 대부분 패널들이 자주 언급하는 사람들이 하나씩 있다. 오닐은 내쉬 이야기만 나오면 항상 부정하고 페니는 찬양하는 편. 케니는 항상 하킴 이야기를 하고, 커는 항상 조던을 찬양한다. 사실 조던은 워낙 대단했기에 케니 스미스 (대학 시절 동료)처럼 같이 뛴 적이 있는 선수들은 일단 찬양하고 보고 (유일한 예외는 조던 조력자로 자신이 폄훼당한다고 생각하는 피펜) 그에게 발린 2인자들은 자신들의 패배를 정당화하기 위해서라도 그를 높이 평가한다. 아이제아 토마스의 경우 그를 가로막은 자부심 때문인지 조던의 실력을 어느정도 인정하되, 그를 역대 최고로 인정하진 않는다.[39] 사실 퍼스트 팀이나 올스타 선정, 우승횟수 등을 따져보면 피펜이 토마스보다 확실히 아래라도 보기도 애매하지만, 여기 패널들을 포함해 전직 선수들은 그런 세세한 수상실적보다 (적어도 우승을 노리는 팀의) 에이스였냐 여부를 꽤 중시하는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토마스는 피펜이 자기에 대해 얘기하면 급이 다른 놈이 까분다며 자존심 상해하는 편. 커리어 실적으로 보면 바클리, 오닐 등 MVP급과 올 NBA 써드팀 이력이 최고인 레지 밀러는 꽤 차이나는 편이지만, 이걸 갖고 차별하진 않는다. 밀러는 90년대 우승후보급 팀이었던 인디애나의 확고부동한 에이스였기 때문.[40] 다만 89년 시점에 한정한다면, 둘의 기량은 비슷한 수준이라 할 수 있다. 물론 훨씬 더 확률 높은 공격으로 50% 중반대의 야투율을 기록하는 댄틀리가 효율성 면에서 우수했지만.[41] 이렇게 모든 것을 바쳐 희생한 릭 마혼이 필라델피아로 트레이드 되고 피스톤즈와 경기를 벌이게 되자, 끈끈하게 뭉쳐있던 전 동료들은 180도 돌아서서 마혼을 역적처럼 대하며 갖은 공격을 퍼부었다. 토마스와 레임비어는 말할 것도 없고, 디트로이트 시절 자신의 꼬붕이자 반칙 기술을 전수한 제자였던 로드맨마저 육탄 돌격으로 마혼에게 배운 것을 그대로 돌려줬으니......감히 로드맨의 하극상(?)에 참았던 분노가 대폭발한 마혼이 덤벼들고 레임비어와 바클리가 끼어들면서, 유명한 난투극이 벌어지게 되었다. 사실 원해서 한 트레이드도 아닌데, 모든 것을 바쳐 희생한 팀과 가장 든든했던 동료들이 원수처럼 자신을 대하니, 마혼 입장에서는 두고두고 서운함을 토로하는 것도 전혀 무리가 아니다.[42] 반복해서 말하지만, 노장이라 해도 댄틀리의 기량과 득점력은 여전했고, 어과이어가 더 낫다고 할 수 없었다. 따라서 어과이어의 합류로 디트로이트가 우승의 퍼즐을 맞추었다는 일부 매체들의 표현은 사실 끼워 맞추기에 불과하다.[43] 반면 커리어 최초의 우승 기회를 허무하게 트레이드로 놓치게 된 댄틀리는, 이후 3 시즌을 더 뛰었지만, 약체인 댈러스의 전력으로는 우승은 꿈도 못꿀 수 밖에 없었고 아쉽게 커리어를 마감했다. 명예의 전당 투표에서도 현역시절 보인 출중한 기량과 2차례 득점왕이라는 타이틀에 비해 번번이 물을 먹다 13수만에 겨우 헌액되었는데, 챔피언 반지가 없다는 점이 감점요소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44] 위에 설명대로 댄틀리가 자신의 입지에 대해 척 데일리와도 싸울정도였는데 로드맨에게 자신의 주전자리를 내준다는 것은 댄틀리 입장으로는 절대 할 수 없는 일이다.[45] 단 그 당시 같이 뛰었던 선수들이나 팀 메이트들은 대체적으로 아이제아의 리더쉽에 의문을 제기한 적이 없다. 팀원들도 배드 보이즈는 아이제아의 팀이라는 걸 증언했고, 외부에서도 모든 걸 지휘하는 사람은 아이제아로 봤다. 이런 분위기를 볼 때 아이제아의 에이스 기질이 낮다는 건 맞지 않는 소리다. 무엇보다 아이제아는 클러치 상황에서도 꽤나 강한 선수였다.[46] 당장 배드 보이즈의 구성원들만 보더라도 하나같이 컨트롤하기 힘든 악동들이다. 그런 악동들을 다 조율하고 적어도 배드 보이즈 시절 한정으로는 팀내에서 누구도 아이제아에게 반기를 들지 않았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에이스 기질이 없다는 건 어불 성설이다. 팀 플레이, 디펜스에서도 아이제아가 지휘하는 부분은 상당했다.[47] 이 점은 아이제아가 공격에서 아주 큰 기여를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효율성이 낮았다는 걸 의미한다.[48] 잘 이해가 안된다면 아이제아가 상대고 이긴 선수들을 생각해보자. 무려 버드, 매직 그리고 조던이다. 이 셋은 다 알다시피 NBA 역사상 Top 10안에 든다는 선수들이다.[49] 이 중 우승을 경험해본건 키드와 페이튼인데 키드는 11파이널에서 솔솔히 활약했으나 당연히 그 파이널의 주역은 노비츠키였고 페이튼의 경우는 06파이널에서 웨이드의 하드캐리로 사실상 링을 얻은것이다.[50] 물론 2007년에는 본인 스스로가 FMVP를 따내며 그 존재감을 입증하기는 했다는 점이 다른 멤버들과는 다르다. 그러나 이때도 던컨 / 마누가 전성기이긴 했다. 유일한 슈퍼스타였던 토마스와는 확실히 차이가 나는 부분.[51] 사실 이 표현은 마혼과 토마스의 관계를 잘 몰라서 한 소리다. 그 직전까지 토마스와 마혼은 팀 동료로 끈끈한 동료애를 과시했었다. 마혼은 토마스의 승리를 위한 열정과 팀을 위한 희생에 크게 공감하여, 그를 팀의 보스로 인정하고 토마스의 리드를 충실하게 이행했으며, 스스로 행동대장 및 악당 역할을 자청했던 사이이다. 게다가 위에서 표현한 장면은 마혼이 트레이드 된 후, 배드 보이즈를 상대로 처음 만나게 된 경기였다. 위에 보충 설명에 자세하게 부연했는데, 여전히 디트로이트 선수들을 존중했던 마혼과 달리, 배드 보이즈는 토마스와 레임비어, 마혼의 전 꼬붕 로드맨까지 원수처럼 덤벼드는 바람에 마침내 대 난투극이 일어나게 되었다.[52] 래리 브라운이나 라일리, 포포비치같은 감독들..조던 역시 딘 스미스, 필 잭슨같은 레전드 감독들과 함께 했다.